한 단체에서 김포 선사문화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그 곳에서 강사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다른 소개없이 ‘서른 다섯 살 유지만입니다’라고 소개했다. 농담이라 생각했기에 모두 웃었다. 알고 보니 1935년에 태어난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서른 다섯이 아니라 스물 다섯 청년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그에게는 어떤 강한 힘이 느껴졌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중 1인으로 김포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지만(67)씨는 전 김포 문화원장을 지냈고 현재 조헌선생을 기리는 중봉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도 있다. 이처럼 그의 뒤에는 수많은 직함이 있다. 그를 꼭 만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 건 이런 직함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느껴지는 역사 문화에 대한 소명같은 강한 힘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할아버지 같아 보이는 그에게 김포 역사 문화를 일구어 내는 거목(巨木)이라 칭하고 싶을 만큼 두 번째 만남은 시작되었다.
유씨는 월곶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지역사회를 위해 일했다. 국제단체인 JC(청년회의)를 김포에 만들면서 굴포천 오염문제나 시내버스 130번 유치, 부평공단 폐수 문제 등으로 활동한 것은 지금도 보람을 느꼈던 일로 기억하고 있다.
IMF 때 김포 문화원장을 지내면서 시에서 지원하는 문화예산비만으로는 힘들어 호주머니 돈도 털어 가며 활동했을 때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한다. “문화단체들도 시나 기업이 지원 안한다고 배타적인 태도를 갖지 말고 지역사회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업들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글라스빌은 지역문화와 기업활동의 연계로 국제유리공예심포지엄을 열게 된 모범이 된 사례죠”
국사편찬위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간단하게 말한다. ‘사라지는 것을 주워 담는 일’이라며 근세에 대한 사료조사를 하는 일과 각 향토에서 미풍양속으로 남아 있는 것에 재조명하는 작업이라고 한다. “역사를 만드는 건 인간이 만들지만 객관성이 없는 건 가치가 없어요. 발굴하면 정밀한 조사 통해 객관적인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국편 사료조사위원의 중책을 느끼게 해 주는 그의 말이다.
요즘 그는 김포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 즉 우렁각시 손돌 애기봉 투금포 설화 들을 일반인들에게 알려 내는 고민을 하면서 이것이 우리 고장을 바로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김포엔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유적지가 많이 있다. 많이 있으면서도 많이 찾지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에 그는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
“한번은 다른 지역학생들이 우저서원을 찾아 안내와 교육을 담당했는데, 화장실을 찾는 학생들 앞에서 무척 난감했던 기억이 있어요. 화장실 식수대 등 편의시설 하나 없는 유적지에 대해 커다란 문제를 느꼈죠”라며 사람들에게 자칫 외면당할 수도 있는 유적지가 현대화와 고전화가 함께 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기를 바랬다.
“문화재에 대한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문화 정신적 가치가 큽니다. 그만큼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중요한데 빌딩 하나 더 짓는 게 중요하지는 않죠. 훼손되면 더 이상 우리 후손들은 못 보는 거에요. 우리의 뿌리가 끊긴다는 거죠. 여기 김포에는 선사문화의 터전이었다는 증거를 가질만한 통진면 일대 니탄층이라든가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많이 있어요. 고인돌의 경우 개발로 인해 포크레인 등으로 많이 훼손된 상태여서 빠른 시일 내 보존이 안 된다면 우리 후손들은 영영 볼 수 없지요”라며 안타까워한다.
그는 김포 지역의 모든 고인돌군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그래서 선사시대 농경문화의 역사성을 재조명할 산 교육장으로 선사공원 하나쯤은 김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문화행사 하나를 가지더라도 한시적 이벤트 행사보다는 정기적인 학술행사를 열어 단기처방이나 근시안적인 태도를 버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의식이 필요함 강조했다. 이와 더불어 지역의 문화 역사를 지키고 보존는 일로 NGO(비정부기구)의 지킴이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말했다.
그렇게 서른 다섯으로 사는 할아버지와 역사 문화에 대한 깊은 생각을 나누면서 유쾌한 오전을 보냈다. 요즘 강의와 글쓰기 국편활동 지역활동으로 바쁜 활동 속에서도 그의 하루는 아침과 저녁엔 어김없이 낫을 들고 풀을 벤다. 아들 네와 나누어 먹을 먹거리만큼은 손수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한 가지 걱정거리는 인터넷 연결을 앞두고 몇 년 전 6개월 동안 힘들게 컴퓨터를 배웠는데 써 먹을 수 있을 지 모르겠다며 껄껄 웃는다. 그의 웃는 모습도 영락없는 서른 다섯 청년이다.
최선미 리포터 mongsil0406@hanmail.net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중 1인으로 김포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지만(67)씨는 전 김포 문화원장을 지냈고 현재 조헌선생을 기리는 중봉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도 있다. 이처럼 그의 뒤에는 수많은 직함이 있다. 그를 꼭 만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 건 이런 직함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느껴지는 역사 문화에 대한 소명같은 강한 힘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할아버지 같아 보이는 그에게 김포 역사 문화를 일구어 내는 거목(巨木)이라 칭하고 싶을 만큼 두 번째 만남은 시작되었다.
유씨는 월곶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지역사회를 위해 일했다. 국제단체인 JC(청년회의)를 김포에 만들면서 굴포천 오염문제나 시내버스 130번 유치, 부평공단 폐수 문제 등으로 활동한 것은 지금도 보람을 느꼈던 일로 기억하고 있다.
IMF 때 김포 문화원장을 지내면서 시에서 지원하는 문화예산비만으로는 힘들어 호주머니 돈도 털어 가며 활동했을 때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한다. “문화단체들도 시나 기업이 지원 안한다고 배타적인 태도를 갖지 말고 지역사회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업들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글라스빌은 지역문화와 기업활동의 연계로 국제유리공예심포지엄을 열게 된 모범이 된 사례죠”
국사편찬위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간단하게 말한다. ‘사라지는 것을 주워 담는 일’이라며 근세에 대한 사료조사를 하는 일과 각 향토에서 미풍양속으로 남아 있는 것에 재조명하는 작업이라고 한다. “역사를 만드는 건 인간이 만들지만 객관성이 없는 건 가치가 없어요. 발굴하면 정밀한 조사 통해 객관적인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국편 사료조사위원의 중책을 느끼게 해 주는 그의 말이다.
요즘 그는 김포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 즉 우렁각시 손돌 애기봉 투금포 설화 들을 일반인들에게 알려 내는 고민을 하면서 이것이 우리 고장을 바로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김포엔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유적지가 많이 있다. 많이 있으면서도 많이 찾지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에 그는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
“한번은 다른 지역학생들이 우저서원을 찾아 안내와 교육을 담당했는데, 화장실을 찾는 학생들 앞에서 무척 난감했던 기억이 있어요. 화장실 식수대 등 편의시설 하나 없는 유적지에 대해 커다란 문제를 느꼈죠”라며 사람들에게 자칫 외면당할 수도 있는 유적지가 현대화와 고전화가 함께 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기를 바랬다.
“문화재에 대한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문화 정신적 가치가 큽니다. 그만큼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중요한데 빌딩 하나 더 짓는 게 중요하지는 않죠. 훼손되면 더 이상 우리 후손들은 못 보는 거에요. 우리의 뿌리가 끊긴다는 거죠. 여기 김포에는 선사문화의 터전이었다는 증거를 가질만한 통진면 일대 니탄층이라든가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많이 있어요. 고인돌의 경우 개발로 인해 포크레인 등으로 많이 훼손된 상태여서 빠른 시일 내 보존이 안 된다면 우리 후손들은 영영 볼 수 없지요”라며 안타까워한다.
그는 김포 지역의 모든 고인돌군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그래서 선사시대 농경문화의 역사성을 재조명할 산 교육장으로 선사공원 하나쯤은 김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문화행사 하나를 가지더라도 한시적 이벤트 행사보다는 정기적인 학술행사를 열어 단기처방이나 근시안적인 태도를 버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의식이 필요함 강조했다. 이와 더불어 지역의 문화 역사를 지키고 보존는 일로 NGO(비정부기구)의 지킴이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말했다.
그렇게 서른 다섯으로 사는 할아버지와 역사 문화에 대한 깊은 생각을 나누면서 유쾌한 오전을 보냈다. 요즘 강의와 글쓰기 국편활동 지역활동으로 바쁜 활동 속에서도 그의 하루는 아침과 저녁엔 어김없이 낫을 들고 풀을 벤다. 아들 네와 나누어 먹을 먹거리만큼은 손수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한 가지 걱정거리는 인터넷 연결을 앞두고 몇 년 전 6개월 동안 힘들게 컴퓨터를 배웠는데 써 먹을 수 있을 지 모르겠다며 껄껄 웃는다. 그의 웃는 모습도 영락없는 서른 다섯 청년이다.
최선미 리포터 mongsil04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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