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적을 두고 있는 1000만 이산가족 재회추진위원회에서 남북 이산가족의 재회를 위한 민간차원의 활동을 막 시작하던, 1983년 여름이었다.
여의도 KBS광장에서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국내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이 펼쳐져 온 나라가 술렁이고 전세계의 이목이 서울로 집중되어 있던 때였다.
위원회에서는 그 7월 중순 장충체육관에서 '이산가족재회 촉진대회'라는 대규모 행사를 개최했다. 공식적인 순서들에 이어 '북한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낭독의 시간이 있었다.
맨 먼저 편지를 낭독한 분은 고당 조만식 선생의 장녀 조선부 씨였다.
"아버님! 통분한 심정으로 삼라만상을 눈물로만 바라보며 살아온 저희 자식들의 30여 년 세월을 무엇으로 말씀드려야 좋을까요?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흘리신 아버님의 눈물을 어떻게 위로해 드려야 좋을까요?"
미상불 선부씨의 '아버님'은 해방 이듬해 건국준비위원장으로 있다가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민족적 지도자요 지금까지 존경을 받는 큰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부녀간의 애타는 사정은 필부들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선부씨는 "내 죽거든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눈 두 개만 새겨두어라. 하나는 일제가 망하는 것을 볼 것이고 하나는 우리 나라가 독립되는 것을 볼 것이다"라는 월남전에 듣고 온 생전의 유언을 되새기면서 다시 역사적 사건 하나를 상기시켰다.
1950년 6월26일 북한에서는 이 날에 맞바꾸자고 제의해놓고 그날이 오기 하루전인 25일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때 선부씨와 가족들은 아버님이 오신다기에 눈물의 상봉을 꿈꾸며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는 것이었다.
장충체육관 촉진대회 행사에서 마지막으로 편지를 읽은 이는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이을순 양이었고 그 편지는 얼굴도 모르는 북한의 할머니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틈만 있으시면 할머니와 고향이야기를 하시곤 했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표정은 침울하고 근심의 표정이 역력했어요. 더구나 요즘 방송을 통하여 이남에 함께 월남해있던 이산가족들이 재회를 하게되자, 아버지는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가 봅니다."
이양은 그처럼 할머니를 잊지 못하는 아버지가 "이 다음에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거든 북녘 땅이 보이는 일선지역의 산 높은 곳에 묻어다오. 황천길의 넋이라도 내 고향과 부모형제 곁으로 가고싶다"는 유언 아닌 유언을 남길 때면 그 남매가 아버지 무릎에 엎드려 엉엉 울고 만다고 했었다.
편지를 읽는 사람마다 모두 울먹였고 넓은 체육관을 빈틈없이 채운 참석자들도 너나없이 눈물바다였던 광경이, 무려 18년이 지난 지금도 필자의 기억에 생생하다.
세월이 흘러 조선부 씨는 풀 길 없는 통한을 안은 채 세상을 떠났고 티없는 여고생이던 이을순 양은 이제 삼십중반의 중년이 되었으되 남녀노소와 유명무명을 막론하고, 이를테면 '초막이나 궁궐이나'를 막론하고 깊은 상처는 그때도 지금도 아프기가 매한가지이다.
이 인지상정의 문제를, 그야말로 인지상정의 인도적 차원에서 풀어야 할 터인데, 가는 세월은 속절없고 해결의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여의도 KBS광장에서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국내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이 펼쳐져 온 나라가 술렁이고 전세계의 이목이 서울로 집중되어 있던 때였다.
위원회에서는 그 7월 중순 장충체육관에서 '이산가족재회 촉진대회'라는 대규모 행사를 개최했다. 공식적인 순서들에 이어 '북한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낭독의 시간이 있었다.
맨 먼저 편지를 낭독한 분은 고당 조만식 선생의 장녀 조선부 씨였다.
"아버님! 통분한 심정으로 삼라만상을 눈물로만 바라보며 살아온 저희 자식들의 30여 년 세월을 무엇으로 말씀드려야 좋을까요?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흘리신 아버님의 눈물을 어떻게 위로해 드려야 좋을까요?"
미상불 선부씨의 '아버님'은 해방 이듬해 건국준비위원장으로 있다가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민족적 지도자요 지금까지 존경을 받는 큰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부녀간의 애타는 사정은 필부들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선부씨는 "내 죽거든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눈 두 개만 새겨두어라. 하나는 일제가 망하는 것을 볼 것이고 하나는 우리 나라가 독립되는 것을 볼 것이다"라는 월남전에 듣고 온 생전의 유언을 되새기면서 다시 역사적 사건 하나를 상기시켰다.
1950년 6월26일 북한에서는 이 날에 맞바꾸자고 제의해놓고 그날이 오기 하루전인 25일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때 선부씨와 가족들은 아버님이 오신다기에 눈물의 상봉을 꿈꾸며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는 것이었다.
장충체육관 촉진대회 행사에서 마지막으로 편지를 읽은 이는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이을순 양이었고 그 편지는 얼굴도 모르는 북한의 할머니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틈만 있으시면 할머니와 고향이야기를 하시곤 했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표정은 침울하고 근심의 표정이 역력했어요. 더구나 요즘 방송을 통하여 이남에 함께 월남해있던 이산가족들이 재회를 하게되자, 아버지는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가 봅니다."
이양은 그처럼 할머니를 잊지 못하는 아버지가 "이 다음에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거든 북녘 땅이 보이는 일선지역의 산 높은 곳에 묻어다오. 황천길의 넋이라도 내 고향과 부모형제 곁으로 가고싶다"는 유언 아닌 유언을 남길 때면 그 남매가 아버지 무릎에 엎드려 엉엉 울고 만다고 했었다.
편지를 읽는 사람마다 모두 울먹였고 넓은 체육관을 빈틈없이 채운 참석자들도 너나없이 눈물바다였던 광경이, 무려 18년이 지난 지금도 필자의 기억에 생생하다.
세월이 흘러 조선부 씨는 풀 길 없는 통한을 안은 채 세상을 떠났고 티없는 여고생이던 이을순 양은 이제 삼십중반의 중년이 되었으되 남녀노소와 유명무명을 막론하고, 이를테면 '초막이나 궁궐이나'를 막론하고 깊은 상처는 그때도 지금도 아프기가 매한가지이다.
이 인지상정의 문제를, 그야말로 인지상정의 인도적 차원에서 풀어야 할 터인데, 가는 세월은 속절없고 해결의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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