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백왕순 기자 평양 4박5일 취재기

“분단의 장벽은 38선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었다”

지역내일 2002-10-18
“팀장님 북한 가실래요?”
“좋지”
농담섞인 한마디로 모든 일이 결정되었다.
9월 23일 성남시청 주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후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나눈 대화다.
바로 다음날 서울 수유리 4·19 국립묘지 부근에 있는 통일교육원에서 ‘북한방문 길라잡이’ 교육을 받았다.
“여러분의 방북이 통일의 조그마한 디딤돌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기 바란다.”
“통일이 되기 위해선 북쪽 사람들이 ‘남쪽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북쪽 사람들을 만나거든 좋은 이미지가 남을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고 강사는 강조했다.
그렇다. 남북관계는 과거 대립과 갈등의 시대에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바뀌었으며, 더 많은 접촉과 교류를 통해 차이를 좁혀가고 있다. 한반도에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정착시켜 통일의 길로 한 발 한 발 나가야 한다.

통일의 디딤돌이라는 마음으로
몇 년 전 호주를 처음 방문했을 땐 두려움보다는 이국에 대한 호기심이 앞섰다.
그러나 2년 전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땐 통제사회인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과 두려움이 앞섰다. 상하이 공항에 도착해 입국절차를 밟는 과정 내내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안내를 맡은 중국 측 사람을 만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두려움은 사라지고, 약간의 불안함이 여전히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를 지나고 나면서 언어와 생활 풍습이 약간 다를 뿐 중국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들은 자유로웠으며, 우리 일행이 활동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이후 2·3번 중국을 다녀온 후 지금은 중국사회에 대한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언어장벽으로 인한 불안함이 존재할 뿐이다. 이미 중국이 그만큼 개방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중국, 언어장벽외엔 모든 것 자유로워
북한을 간다는 것이 결정되면서, 반세기 넘게 분단된 북한은 어떤 모습일까? 과연 그곳은 얼마나 통제된 사회일까? 역시 불안함은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10월7일 베이징에 도착해 하루 밤을 청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이번에 평양을 함께 간 일행은 나를 포함해 이철민 대표이사((주)시오리엔터테인먼트), 이두용 감독, 변사 양택조(MBC탤런트)씨, 신우철 이사장((사)한국영화인협회), 조성인 이사((주)시오리엔터테인먼트) 등 6명이었다.
일행 8일 새벽 짐을 꾸려 북경 공항으로 나가 출국수속을 밟고, 북한 고려항공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조금 작은 규모였지만, 스튜어디스의 밝은 미소와 친절한 모습은 이미 북한 사회의 변화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함께 동승했던 현대측 한 관계자에 따르면 몇 년 전 고려항공에 탑승했을 때 스튜어디스들의 서비스는 빵점이었다고 한다. 손님에 대한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으며, 서비스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마침내 기내 스피커에서 착륙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고, 1시간 20여분만에 우리 일행이 탄 비행기는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막 나서자 맑은 공기가 나의 가슴속으로 들어오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이 약간 낀 파란 가을하늘.
문득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순안공항에 착륙해 평양의 하늘을 바라보던 TV속의 모습이 떠올랐다.
드디어 평양에 도착했구나.

드디어 평양에 도착했구나!
출국 심사는 간단히 이루어졌다. 민화협측 박 모 실장 등 4명이 나와 우리를 맞았으며, 곧바로 보통강려관으로 향했다.
순안공항에서 평양으로 들어갈 때 좌우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어린 초등학생들은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에서 이삭줍기가 한창이었다. 아련한 옛 추억이 생각났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때도 방과후면 저들처럼 똑같이 이삭줍기를 했었다. 반듯한 길과 깨끗한 길거리는 이미 알려진바 대로였다.
우리를 태운 차는 보통강으로 접어들었다. 보통강의 경치는 한마디로 최고였다.
이두용 감독은 “파리의 세느강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보다는 못할 것”이라고 감탄했다. 나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강변을 본적이 없다. 중국의 호수가의 아름다운 경치도 이보다는 못했던 것 같다.
마음껏 휘영청 늘어진 수양버들 밑으로 찰랑찰랑 넘칠 듯 말 듯 강물이 흐르고, 그 강변에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는 그 동안 반세기 동안 이념적 대결과 갈등을 빚어왔었던 북한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다.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보통강
여장을 풀기위해 호텔에 들어갔다. 여장을 풀고 방에 들어간 순간 ‘모든 방은 도청이 되며,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보고가 된다’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잠시 긴장감이 생기며 ‘말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텔레비전을 켜보니, 중국 CCTV, 스타TV, 일본 NHK(BS1·2), 미국 CNN 방송 등이 여과없이 나오고 있었다. 물론 북한의 중앙방송도 한 채널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의 일부 연속극이 중국CCTV를 통해 여과없이(중국어로 녹음) 방영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여장을 풀고 호텔 1층 접견실에서 북한 ‘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 리종혁 부위원장과 면담의 시간을 갖고, 평양에 있는 동안 일정을 잡았다.
우리가 평양에 온 목적인 ‘아리랑’ 상영일은 11일로 결정되었으며, 10일 저녁 리허설을 갖기로 했다. 또한 상영 장소는 평양국제영화축전이 열렸던 평양국제영화회관으로 결정됐다.
저녁식사는 민화협 직원들과 함께 했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술이 몇 잔 돌자 사진도 같이 찍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하지만 마음속 한 구석엔 언제나 ‘말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짓누르고 있었다.
보통강 호텔에는 노래방과 술집이 있어 타지에 온 기분을 없앨 수 있었다.
나중에 안내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긴데, 보통강 호텔은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지어주었다고 한다.

아리랑 11일 평양국제영화회관에서 상영
평양의 둘째 날(9일) 아침이 밝았다.
김치찌개가 나왔는데, 국물이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 둘째 날은 북측에서 일정을 정한대로 쫓아 다녔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던가?
김일성 주석이 있는 모셔져 있는 금수산 궁전(주석궁), 주석이 태어나 살았던 만경대, 주체탑, 개선문 등을 구경하고 점심으로 옥류관에서 평양국수(냉면)을 먹었다.
오후엔 모란봉과 을밀대를 구경하고, 광복거리에 있는 학생궁전으로 갔으나 시간이 늦어 관람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남아 숙소로 돌아와 한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평양 교예단의 기예를 관람했다.
평양교예단의 묘기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관람장을 가득 메웠다. 북측 주민들과 학생들, 중국 관광객이 대부분이었으며, 서양인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1시간 30분 동안 계속된 교예단의 묘기는 관람객의 손에 땀을 쥐게 했으며, 관람객의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세계 곡예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여러 번 수상했다는 북한의 곡예단의 진면목을 충분히 관람할 기회를 가졌다.
곡예단의 공연을 관람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아파트의 불빛은 밝게 켜지고 전차도 다니고 있었다.
그동안 평양의 전력상황이 많이 좋아진 듯 싶다. 평양을 다녀온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식사 중에 전기가 나가고 밖에 밤이 되면 온통 암흑이라고 들었다.
우리가 있는 동안 방에서 전기가 한번 나간 것 이외에는 한번도 전기가 나간 적이 없었다.
저녁은 민족식당이라는 곳에서 소 불고기와 오징어 불고기로 저녁을 먹었다. 식당의 무대에서 북측의 명창들이 휘파람 등 우리 귀에 낯익은 노래들을 불러주었다.

북측 전력사정 나아진 듯
평양의 셋째 날(10일)은 북한에서 3번째로 큰 명절인 노동당 창건 기념일이었다. 국가 공휴일이다. 우리를 안내한 사람들은 ‘오늘 쉬는 날인데, 당신들 때문에 집에 못 가고 있다’고 농담을 던졌다. 나는 ‘우리는 지금 민족의 화해와 교류를 진전시키고, 통일의 디딤돌이 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자 잠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늘은 묘향산(향산)으로 향했다.
1시간 30여분를 달린 ‘향산 고속도로’는 똑바르고, 공기는 시원하고 맑았다. 향산 고속도로 옆으로 흐르는 청천강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주위로 스쳐 가는 야산들은 많이 개간되고, 보도에 알려졌듯이 나무들이 많이 없는 상태였다.
묘향산에 도착해 외국사절들이 김일성 주석에게 주었던 선물들을 모아놓은 ‘국제친선전람관’을 보고, 이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내온 선물을 구경하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묘향산에서 생산되는 자연산 취나물, 석이버섯, 두릅, 도라지 등으로 끓인 육계장을 먹었다.
오후 서산대사가 계셨던 보현사를 구경하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국제영화회관에서 ‘아리랑’ 리허설을 가졌다.
변사 양택조씨와 이두용 감독은 대본에 맞춰 변사 연습을 했다. 양 변사는 태어나서 처음 해본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 보통강 호텔로 돌아왔다. 날이 새면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이 이루어 질 것이다.
묘향산을 오고 가면서 안내원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족은 하나라는 것. 사진찍는 것 너무 제재하는 것 아니냐? 신의주 특구는 아느냐? 아시안게임에서 북한 미녀 응원단의 활약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내원들은 깊이는 낮아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양빈이 억류된 것까지도.
내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언제 남한에 답방하느냐”는 질문에 북측 안내원은 “6·15 남북선언에 적절한 시기에 답방한다고 되어 있다”며 “적절한 시기에 꼭 방문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6·15 남북 공동선언 꼭 지킬 것
넷째 날(11일), 남쪽에서 제작한 영화를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평양에서 상영하는 아침이 밝았다.
분주하게 준비하고 평양국제영화회관에 도착했다. 귀빈실에서 우리 일행과 리종혁 부위원장, 조찬구 문화성 부상 (차관) 등과 환담을 나누고 영화상영에 들어갔다.
북한의 인민배우가 우리를 소개하고 변사 양택조씨의 “자 필름 돌려요”라는 말로 영화는 시작되었다.
평양 관람객들은 숨을 죽였다. 변사의 말에 따라 웃기도 하고, 눈시울을 적시면서 남측에서 만든 ‘아리랑’과 호흡을 함께 했다.
기술적인 몇 가지 문제점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성공적인 상영이었다. 리종혁 부위원장과 조찬구 부상 등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
상영을 마친 후 북측 대표단과 간담회 시간을 가졌다.
리종혁 부위원장은 “6·15 남북공동선언 후 영화분야에서 남과북이 최초로 구체적인 실천과 행동으로 옮긴 용기있는 일”이라고 평가했으며, 조찬구 부상은 “춘사 나운규 선생의 아리랑을 통해 지난 피눈물의 역사인 일제시대, 우리민족의 아픔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줘 감사한다”며, “우리민족의 아리랑이 통일의 아리랑으로 바뀌고, 남과북이 합심하면 통일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아리랑’ 상영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일행들은 성공적인 상영에 모두 안도의 한숨을 돌리며, 점심으로 평양에서 유명하다는 단고기(개고기) 집으로 갔다.
오후에는 선물을 사고, 호텔로 돌아와 만찬의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남북 영화교류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모두 만족하는 자리를 가졌다.

‘아리랑’ 상영 성공리에 마쳐
평양의 마직막 날(12일), 우리는 짐을 꾸려 순안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안내원에게 “우리가 떠나니 시원·섭섭하죠?”라고 말을 던지자,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창밖을 내다 보았다.
공항에서 서로 악수와 포옹으로 헤어지면서“건강하게 지내고, 또 만납시다”는 말을 건네자, “또 오십시오, 또 만납시다”는 말로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비행기는 순안공항을 이륙하고 저 밑으로 평양의 산천이 눈에서 멀어져 갔다.
비행기 안에서 평양의 5일을 돌아보며 드는 생각은 ‘분단의 장벽은 38선이나 철조망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평양 방문은 내 마음속 있는 분단의 장벽을 허물어 가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평양=백왕순 기자 wspai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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