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향기를 지닌 사람들, < 산 책 >

조재은의 영화에세이(3)

지역내일 2000-11-23


인생에서 30대는 꿈이 서서히 소멸되는 시기이다. 꿈이 퇴색한 자리에는 현실의 벽돌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 벽을 넘기 위한 처절한 싸움에서는 계산적이고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영악한 사람만이 승리 할 수 있다. 이런 30대와는 다른, 아직도 꿈을 꾸는 30대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영화가 <산책>이다.
주인공 네 명의 직업이 영화의 색깔을 말해준다.
작은 음반가게주인은 손님이 적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틀며 레코드 점을 운영한다. 스피커에서는 유행하는 음악과 먼 기타음악과 조 동진의 노래가 들린다. 중학교 과학 선생은 아이들은 졸고 있는데 우주에 대해 열심히 설명한다. 작은 회사 샐러리맨은 뇌물로 들어 온 돈을 고민하다 과장의 책상에 올려놓는다. 대학교 강사는 정교수의 꿈을 접고 안 팔리는 책을 내는 출판사를 차리려고 한다. 이 네 사람은 대학, 음악 동아리 친구들이고 졸업 후에도 매년 한 번씩 관객도 별로 없는 콘서트를 열고 있다. 올해에는 강원도 휴양림에서 콘서트를 했다.
이들의 모습과 비슷한 30살의 조카가 한 명 있다. 일류 대학 법대를 나오고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머리를 식힌다고 수채화를 가끔씩 그렸는데 요즘은 고시 준비는 접어두고 그림만 그린다. 속이 상한 사촌언니는 만날 때마다 조카 얘기만 나오면 웃옷 단추를 풀어헤치고 찬물 한 컵을 마신다. 대학 재학 중에 행정고시에 붙고 다시 사법고시를 봐서 양과 합격을 기대하던 아들이 화가가 되겠다고 해서 홧병이 생긴 것이다.
지난 내 생일에 그 조카가 왔다.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얼굴은 야위었다. 낯선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때처럼 평온한 조카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조카는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이모뿐이라며 얘기를 했다. 고시 공부를 포기한 이유는, 자신도 모르면서 남을 판단하는 법관이란 직업을 갖는 것이 두려웠고, 친구와의 경쟁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카가 내 생일 선물이라고 배낭에서 꺼낸 것은 산을 그린 수채화 한 점과 테이프였다. 그 그림은 사람에 질려서 풍경만을 그렸던 헤르만 헤세의 수채화와 분위기가 너무 비슷했다.
조카가 가고 난 후 조카의 대학 시절, 작은 말다툼을 했던 생각이 났다. 버스 정류장에서 어린아이가 집이 대전이라며 돈을 잃어 버렸다고 차비를 달라고 해서 있는 돈을 다 주었는데, 그 아이가 집에 잘 갔는지 걱정이 된다고 했다. 내가 비슷한 일을 당했는데 사기라고 설명을 해도 세상을 모두 그런 눈으로 보면 안 된다며 속물 취급을 했다. 조카의 순수한 마음이 좋아도 보이고 세상을 어떻게 살까 걱정도 됐다.
조카가 앉았던 자리에 마른 풀잎 몇 개가 떨어져 있다. 여행의 흔적을 말해주는 풀잎을 보니 그때와 비슷하게 목에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파트 베란다로 가서 조카의 가는 모습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 애의 맑은 눈을 보면서 하지 못했던 말을 배낭 진 등 뒤 에다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블루진 보다 넥타이에 검은 법복을 입었으면 더 좋을 텐데…. 선물로 주고 간 테이프 '나무'의 노랫말이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하게 했다. '푸른 한 그루 나무/ 넓은 하늘을 꿈꾼다./ 두 팔을 벌려 온 세상을 내 품에/ 가득 가득 안아 보고 파-.' 자유를 갈망하는 내 하늘은 좁은데 자유로운 삶을 사는 이름 없는 젊은 화가의 하늘은 넓었다.

감독 ; 이 정국
주연 ; 김 상중

영화 노트
<산책>에 나오는 옛날 얘기 하나
"만년설이 덮인 히말라야 깊은 산골 마을에 멀리 프랑스에서 한 처녀가 왔대요. 그 처녀는 매일 매일 강가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어요. 하루하루 기다리다 40년이 지났어요. 그러다 만년설이 녹아 흐르던 어느 날, 젊은 청년의 시체 하나가 강을 따라 떠내려 왔대요. 그 시체는 지금은 할머니가 된 처녀의 약혼자였어요. 40년 전 히말라야 등반 때 실종된 약혼자의 시체만이라도 보고 싶어 오랜 시간을 기다린 거래요. 40년 전 모습 그대로인 약혼자의 얼굴을 보며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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