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광 김남성 기자 powerttp@naeil.com
◇ “‘나가라’는 말이 추위보다 더 무서워요” =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하고 있는 ''서울 자유의 집''은 현재 우리나라 최대의 노숙자 재활 쉼터다. 대지 2000평에 3개 건물이 있는 이 곳은 현 수용인원만 약 650 여명. 겨울철인 요즘은 하루에도 10여명의 노숙자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자유의 집''이라는 둥지를 찾는다. 기자가 취재를 위해 이곳을 찾은 날도 3개월의 기한을 넘기고 나가는 사람과 지친 몸에 병을 얻어 어디선가 들어오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한 노숙자는 기자에게 이불과 짐을 들고 나가는 사람을 가리키며 “명문 K대 출신으로 모 시장과 동기”라고 귀띔해줬다. 다른 노숙자 쉼터의 수용 인원이 50명을 넘지 않는 것과 비교할 때 이곳의 규모는 단과대와 종합대의 차이지만 수용인원에 비해 입주를 희망하는 노숙자가 워낙 많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3개월 이상 거주할 수 없다.
''서울 자유의 집''이 이처럼 최대 규모의 노숙자 쉼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IMF 이후 넘쳐나는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99년 1월 서울시가 한 대기업과 2년 동안 무료 임대 계약을 맺고 성공회 복지대학교에 위탁 운영을 맡긴 것이 계기다. ''자유의 집'' 서계식 기회관리 실장은 “노숙자 문제를 국가가 나서 시스템화 시켜 수용한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라며 “최초로 시행하다 보니 문제가 있지만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서 실장에 따르면 ''자유의 집'' 같은 대규모 노숙자 시설은 노숙자들이 부랑화 되는 것을 막는 자정 작용과 다양한 계층이 섞여 있는 노숙자의 특성상 사회복지사업의 경험적 실험실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 열악한 근로조건 하에서도 이러한 사명감 때문에 서 실장을 비롯한 40명의 직원들은 노숙자를 위해 일하고 있다.
하지만 서 실장을 비롯한 직원들이나 이곳에 거주하는 노숙자들에게 이번 겨울은 어느 때보다 추울 전망이다. 경제 사정 때문에 더 많은 지원을 못 받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새롭지도 않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을 더 차갑게 하는 건 주민들이 편견과 님비 현상 때문이다. 인근 주민들은 노숙자의 집이 들어서고 나서 일부 노숙자들의 술 주정과 구걸 등을 이유로 이곳의 이주를 위한 대책위원회까지 구성한 상태다. 인근 상가 술집 주인들도 이들이 돈 없이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다며 ''자유의 집''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하다. 일부 주민들은 이곳을 ''혐오 시설''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서 실장은 “일부 노숙자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주민들의 주장은 대부분 ''노숙자 시설''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집값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는 “노숙자의 대부분은 IMF 이후 삶의 터전을 읽은 우리들의 아버지며 남편들이다”며 “우리 사회 누구도 노숙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듯 취재 중에 만난 이곳 거주자 두 명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사회인이었다. 현재 노숙자의 집 세탁 업무를 도와주면 사는 임 모(46)씨도 IMF 이전에는 어업에 종사하는 선주였다. 몇 명의 어부를 두고 남부럽지 않게 살던 임씨는 구제금융 이후 모든 것을 날리고 경상도 안동 등지에서 머슴 생활을 하다 서울까지 흘러들었다. 임씨는 “머슴생활을 할 때는 글자도 모르는 척 해야 쫓겨나지 않았다”며 “부자는 아니어도 고기 잡으며 살던 몇 년 전이 꿈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서울에 와서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몸을 다쳐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하던 일은 다르지만 임씨의 동료 정 모(44)씨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정 씨도 97년 이전에는 가내수공업을 하는 공장의 사장이었다.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공장을 잃고 아내와 하나 있는 자식과도 생이별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당뇨 합병증까지 앓게 된 정씨가 6개월 전 이곳에 왔을 때 몸무게는 정상일 때보다 36㎏ 적은 46㎏. 지금은 자유의 집에서 치료를 해줘 많이 회복됐지만 곧 이곳을 나가야 돼서 막막하다. 정씨는 “다른 곳에 가면 저녁때만 머무를 수 있다”며 “그러다 보면 병이 덧나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심란해했다. 그는 당뇨 때문에 죽은 노숙자 동료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며 담배 든 손을 떨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 같은 방 동료 중 모 방송국 PD였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노숙자 이거 특별한 사람만 되는 게 아니에요. 제발 도와주지는 못해도 혐오시설이라고 폐쇄해야된다는 말만하지 말아 주십시오.”
병원을 가야된다며 일어서던 정씨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 비닐하우스촌에도 희망은 있었다 = “이곳 비닐하우스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 못지 않은 희망이 있어요. 다들 어렵지만 나름대로 꿈을 키우며 하루하루 열심히 삽니다.”
28년째 서울 송파구 문정2동 비닐하우스촌에 살고 있는 양재흥(42) 씨. 양 씨는 상추 등 엽채류를 길러 인근 가락시장에 판매한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다. 정성껏 기른 채소를 중간도매상들이 헐값에 사 높은 가격에 되파는 게 불만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 힘으로 벌어 제 가족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여느 가정의 가장처럼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에 재학중인 두 아들이 양 씨의 가장 큰 자산이자 희망이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들을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른다고 한다. 한창 뛰어놀 나이의 아이들은 이미 어둑해진 밤인데도 보이지 않는다.
겨울이 닥치면서 이 곳 사람들의 걱정도 커지고 있다. 겨울이란 계절은 없는 사람에게 더 큰 시름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1000세대 가량의 비닐하우스촌에 거주하는 3000명 가량의 주민들은 막노동이나 구멍가게, 농사 등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일부 보일러를 사용하는 집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연탄을 때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지난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주소를 부여받았다. 이들에게 주소란 큰 의미다. 무허가 건물에 무허가 인생이었던 이들이 어딘가에 속하게 됐다는 기쁨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곳 개미마을 대장으로 불리는 이수행(53) 씨는 주소확보를 위한 구청과의 기나긴 싸움을 열심히 설명했다. 교통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횡단보도 설치,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는 마을 입구의 아스콘 포장도 이곳 주민들의 단결된 힘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하는 열의가 주민들을 단합하게 했고 결국 실현됐다.
그러나 아직은 불완전하다. 낡고 고장난 화장실을 고치는 것도 구청의 허가를 일일이 받아야 한다. 주소는 부여됐지만 본질적으로 무허가이기 때문이다.
양 씨는 “주소를 부여받고 나서 길 건너 사람들과 똑같이 평등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줄 알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이곳 비닐하우스촌 사람들에게 절망은 없다. 아니 절망할 여유가 없다. 그동안 매만지고 매만져 완성한 번듯한 비닐하우스가 있고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양 씨는 마을 입구까지 배웅을 해주며 확실히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나은 편이예요. 성한 팔다리 있겠다, 바람 막을 잠자리 있겠다 걱정이 별로 없어요.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불쌍한 사람들 보면 오히려 우리가 뭐라도 도와주고 싶다니까요.”
◇ “‘나가라’는 말이 추위보다 더 무서워요” =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하고 있는 ''서울 자유의 집''은 현재 우리나라 최대의 노숙자 재활 쉼터다. 대지 2000평에 3개 건물이 있는 이 곳은 현 수용인원만 약 650 여명. 겨울철인 요즘은 하루에도 10여명의 노숙자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자유의 집''이라는 둥지를 찾는다. 기자가 취재를 위해 이곳을 찾은 날도 3개월의 기한을 넘기고 나가는 사람과 지친 몸에 병을 얻어 어디선가 들어오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한 노숙자는 기자에게 이불과 짐을 들고 나가는 사람을 가리키며 “명문 K대 출신으로 모 시장과 동기”라고 귀띔해줬다. 다른 노숙자 쉼터의 수용 인원이 50명을 넘지 않는 것과 비교할 때 이곳의 규모는 단과대와 종합대의 차이지만 수용인원에 비해 입주를 희망하는 노숙자가 워낙 많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3개월 이상 거주할 수 없다.
''서울 자유의 집''이 이처럼 최대 규모의 노숙자 쉼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IMF 이후 넘쳐나는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99년 1월 서울시가 한 대기업과 2년 동안 무료 임대 계약을 맺고 성공회 복지대학교에 위탁 운영을 맡긴 것이 계기다. ''자유의 집'' 서계식 기회관리 실장은 “노숙자 문제를 국가가 나서 시스템화 시켜 수용한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라며 “최초로 시행하다 보니 문제가 있지만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서 실장에 따르면 ''자유의 집'' 같은 대규모 노숙자 시설은 노숙자들이 부랑화 되는 것을 막는 자정 작용과 다양한 계층이 섞여 있는 노숙자의 특성상 사회복지사업의 경험적 실험실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 열악한 근로조건 하에서도 이러한 사명감 때문에 서 실장을 비롯한 40명의 직원들은 노숙자를 위해 일하고 있다.
하지만 서 실장을 비롯한 직원들이나 이곳에 거주하는 노숙자들에게 이번 겨울은 어느 때보다 추울 전망이다. 경제 사정 때문에 더 많은 지원을 못 받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새롭지도 않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을 더 차갑게 하는 건 주민들이 편견과 님비 현상 때문이다. 인근 주민들은 노숙자의 집이 들어서고 나서 일부 노숙자들의 술 주정과 구걸 등을 이유로 이곳의 이주를 위한 대책위원회까지 구성한 상태다. 인근 상가 술집 주인들도 이들이 돈 없이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다며 ''자유의 집''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하다. 일부 주민들은 이곳을 ''혐오 시설''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서 실장은 “일부 노숙자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주민들의 주장은 대부분 ''노숙자 시설''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집값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는 “노숙자의 대부분은 IMF 이후 삶의 터전을 읽은 우리들의 아버지며 남편들이다”며 “우리 사회 누구도 노숙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듯 취재 중에 만난 이곳 거주자 두 명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사회인이었다. 현재 노숙자의 집 세탁 업무를 도와주면 사는 임 모(46)씨도 IMF 이전에는 어업에 종사하는 선주였다. 몇 명의 어부를 두고 남부럽지 않게 살던 임씨는 구제금융 이후 모든 것을 날리고 경상도 안동 등지에서 머슴 생활을 하다 서울까지 흘러들었다. 임씨는 “머슴생활을 할 때는 글자도 모르는 척 해야 쫓겨나지 않았다”며 “부자는 아니어도 고기 잡으며 살던 몇 년 전이 꿈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서울에 와서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몸을 다쳐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하던 일은 다르지만 임씨의 동료 정 모(44)씨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정 씨도 97년 이전에는 가내수공업을 하는 공장의 사장이었다.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공장을 잃고 아내와 하나 있는 자식과도 생이별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당뇨 합병증까지 앓게 된 정씨가 6개월 전 이곳에 왔을 때 몸무게는 정상일 때보다 36㎏ 적은 46㎏. 지금은 자유의 집에서 치료를 해줘 많이 회복됐지만 곧 이곳을 나가야 돼서 막막하다. 정씨는 “다른 곳에 가면 저녁때만 머무를 수 있다”며 “그러다 보면 병이 덧나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심란해했다. 그는 당뇨 때문에 죽은 노숙자 동료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며 담배 든 손을 떨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 같은 방 동료 중 모 방송국 PD였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노숙자 이거 특별한 사람만 되는 게 아니에요. 제발 도와주지는 못해도 혐오시설이라고 폐쇄해야된다는 말만하지 말아 주십시오.”
병원을 가야된다며 일어서던 정씨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 비닐하우스촌에도 희망은 있었다 = “이곳 비닐하우스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 못지 않은 희망이 있어요. 다들 어렵지만 나름대로 꿈을 키우며 하루하루 열심히 삽니다.”
28년째 서울 송파구 문정2동 비닐하우스촌에 살고 있는 양재흥(42) 씨. 양 씨는 상추 등 엽채류를 길러 인근 가락시장에 판매한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다. 정성껏 기른 채소를 중간도매상들이 헐값에 사 높은 가격에 되파는 게 불만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 힘으로 벌어 제 가족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여느 가정의 가장처럼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에 재학중인 두 아들이 양 씨의 가장 큰 자산이자 희망이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들을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른다고 한다. 한창 뛰어놀 나이의 아이들은 이미 어둑해진 밤인데도 보이지 않는다.
겨울이 닥치면서 이 곳 사람들의 걱정도 커지고 있다. 겨울이란 계절은 없는 사람에게 더 큰 시름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1000세대 가량의 비닐하우스촌에 거주하는 3000명 가량의 주민들은 막노동이나 구멍가게, 농사 등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일부 보일러를 사용하는 집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연탄을 때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지난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주소를 부여받았다. 이들에게 주소란 큰 의미다. 무허가 건물에 무허가 인생이었던 이들이 어딘가에 속하게 됐다는 기쁨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곳 개미마을 대장으로 불리는 이수행(53) 씨는 주소확보를 위한 구청과의 기나긴 싸움을 열심히 설명했다. 교통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횡단보도 설치,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는 마을 입구의 아스콘 포장도 이곳 주민들의 단결된 힘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하는 열의가 주민들을 단합하게 했고 결국 실현됐다.
그러나 아직은 불완전하다. 낡고 고장난 화장실을 고치는 것도 구청의 허가를 일일이 받아야 한다. 주소는 부여됐지만 본질적으로 무허가이기 때문이다.
양 씨는 “주소를 부여받고 나서 길 건너 사람들과 똑같이 평등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줄 알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이곳 비닐하우스촌 사람들에게 절망은 없다. 아니 절망할 여유가 없다. 그동안 매만지고 매만져 완성한 번듯한 비닐하우스가 있고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양 씨는 마을 입구까지 배웅을 해주며 확실히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나은 편이예요. 성한 팔다리 있겠다, 바람 막을 잠자리 있겠다 걱정이 별로 없어요.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불쌍한 사람들 보면 오히려 우리가 뭐라도 도와주고 싶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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