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인재풀은 실사구시형 개혁 세력
이영주‘합리적인 전교조’, 김준곤‘대구의 뱃심’, 강진수 구조조정 전문가, 김형기 지방분권의 대부, 이상범노동자 출신 ‘제2의 김두관’
지역내일
2003-05-29
(수정 2003-05-29 오후 4:33:54)
◆ 이영주 경남체육고 교사 = 현재 경남체육고 교사인 이영주(49) 전 지부장은 ‘경남 교사운동의 산 증인’이다.
이 전 지부장은 85년 암울했던 시절 충무 YMCA 중등교사협의회를 만들면서 ‘고생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당시 숱한 학생들이 억압적인 사회분위기와 입시지옥 속에서 한 해 100명 이상 자살하는 것을 보고 교사로서의 자괴감에 교사운동에 투신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후 89년 전교조 초대 경남지부장을 맡는 등 해직과 두 차례의 옥살이를 거치는 등 16년간 경남 교사운동의 ‘대부’역할을 해왔다.
93년 전교조 사무처장으로 해직교사 복직협상을 주도, 1400여명의 교사들이 복직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현재 전교조 경남지부가 조합원 1만명을 육박하며 서울 다음으로 가장 튼튼한 조직으로 성장하는 데는 그의 강력한 리더십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관련 교사들의 평이다.
그는 과거 교육관료들에게 ‘강성’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겨울에는 두터운 옷을 입어야 하고 봄에는 외투를 벗듯이 시대에 걸맞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지론으로 전교조 합법화 이후 물리적 충돌없이 단체교섭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남도교육청 한 고위간부는 “이 전 지부장은 통이 크고 합리적이다”고 평가했다. 그는 입수위주 교육이 아이들과 민족을 병들게 하고 있다며 한 신문에 ‘서울대를 없애자’는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 이상범 울산 북구청장 =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 노동자 출신 시의원, 환경운동가, 지방자치단체장 이 모든 명암은 이상범 북구청장(46)을 가르키는 수식어이다.
이 청장은 15세가 되던 해 부모님을 잃었다. 이때 다니던 중학교도 그만 두어야 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곳이면 어디든지 떠돌아 다녔다.
이 청장은 17세가 되던 해 우연히 자동차 정비기술을 접했다. 현대자동차와 인연을 맺게된 동기다. 현대자동차 입사 이후에도 이 청장은 조용한 모범 사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수많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이 청장은 노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노조 만들기에 나섰다. 해고와 구속을 무릅쓰고 노조설립을 마쳐 한국노동운동에 한 획을 그었다.
2000년에는 총선에 도전했지만 노동계 분열로 눈 앞에서 온 기회를 잃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을 준비한 이 청장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울산 북구 구청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 청장은 “주민참여정치의 꽃을 피워 노동자 출신에게 맡겨도 잘 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 주겠다”고 다짐했다.
◆ 김형기 경북대 교수=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영원히 잘 삽니다’
김형기(51) 경북대 교수가 지난 3년여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래처럼 외치는 구호다.
지방분권국민운동 상임대표를 맡아 지방분권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김교수는 지난 2000년 대구사회연구소 소장에 취임하면서 지방분권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결심했다.
그는 지방에 살면서 느끼는 현실적 문제를 고민하면서 지역발전의 걸림돌로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이라고 지적하고 대안적 발전 모델로 분권시스템을 제시하면서 본격 운동에 주력했다.
지난해 11월 전국조직을 결성하면서 본격궤도에 진입, 지방분권운동을 대통령선거 이슈로 만들어 전국민운동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그는 서울대 상과대 재학시절 ‘상대평론’의 편집장을 역임하는등 유신반독재의 전면에 나서 싸우는 투사형보다 투쟁 이론을 제공하는 지사형 개혁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긴 호흡으로 중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관념적 진보보다 실사구시적인 진보가 바람직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지방분권 운동도 이같은 관점에서 합리적인 진보, 양심적인 보수, 전문가적인 역량을 갖춘 세력과 결합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지론을 주장하고 있다.
매사 진지한 자세로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게 김 교수의 품성이다. 그는 지방분권에 매달리기 전에는 대구경북지역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를 만들었고 전국 최초로 교수신분으로 전교조에 가입해 지원하기도 했다.
◆ 김준곤 변호사= 김준곤 변호사(48)는 대구의 몇 안되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으로 대구 최초로 삼일 법무법인 설립했다.
그는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서울사람들이 하기 싫어해 지방에까지 밀려온 일감이었다. 그는 제안을 받고 하루만에 결심했고 위원장 부재상태의 의문사 진상규명위를 이끌었다.
성실성에다 강직한 성품을 유감없이 발휘해 허원근일병 사망사건, 한총련 투쟁국장 고 김준배씨 사망사건 등을 끈질기게 추적 규명해 인권변호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3월에는 대구지하철 참사 실종자 인정사망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수백명의 희생자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한 지하철방화사건의 ''의문사''까지 다루게 된 셈이다.
그는 원칙과 소신, 일관성, 헌신성 등으로 무소불위의 희생자 가족들과 금치산 상태의 대구시 양측으로부터 100% 동의를 얻는 리더십을 발휘해 원만하게 사망인정작업을 마무리했다. 그의 인정사망위 공적은 당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공적 권위로 꼽혔다.
그는 최근 변호사 사무실에서 대구의 미래 정치지형을 바꾸기 위한 시도로 지난 3월 시작한 ‘화요공부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그의 경력은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상업고를 나와 재수로 지방국립대를 입학해 은행직원으로 사회에 진출했다. 대학시절에는 민청학련의 배후 서클 회장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나이 서른에 고시공부를 시작 4년만인 88년 사시 30회로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조인이 됐다.
◆ 강진수 호텔리베라 사장 = 우성건설 노조위원장 출신의 강진수 사장(44세. 호텔 리베라해운대. www.rivierahotel.co.kr)은 정치를 떠나 경제인으로 변신했다. 그는 98년 총선에 출마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민노당 당원이기도 하고, 참여정부의 386 인맥들과는 전대협을 통한 인연이 있기도 하다. 부산에서 사업을 할 때, 강 사장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요청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강 사장은 여전히 기업경영에 집중하고 있다.
우성건설 노조위원장을 할 때, 기업이 부도나자 그는 구사운동을 펼쳤다. 채권자들과 국민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회사를 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이 과정에서 느낀 울분을 토로하고 싶어 출마했고, 선거 뒤에는 호텔의 위탁경영을 맡았다. IMF 관리체제가 시작된 때였고, 45% 객실점유율의 2류 호텔이었지만, 그는 신화를 창조해갔다.
고급 호텔들이 즐비한 속에서 그는 저렴한 가격과 친절하고 수준높은 서비스로 경쟁, 100%에 가까운 객실 판매율을 기록하면서 경영신화를 이어갔다. 13명 직원을 30명으로 늘였다. 그를 소개하는 기사들이 쏟아졌고 지역유명인사가 됐다. 정치지망생들이 얻고 싶은 명망성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총선출마보다는 노조위원장과 경영인의 경험을 합쳐 구조조정전문가로서 역할을 더 높이고 싶어한다. N
이 전 지부장은 85년 암울했던 시절 충무 YMCA 중등교사협의회를 만들면서 ‘고생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당시 숱한 학생들이 억압적인 사회분위기와 입시지옥 속에서 한 해 100명 이상 자살하는 것을 보고 교사로서의 자괴감에 교사운동에 투신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후 89년 전교조 초대 경남지부장을 맡는 등 해직과 두 차례의 옥살이를 거치는 등 16년간 경남 교사운동의 ‘대부’역할을 해왔다.
93년 전교조 사무처장으로 해직교사 복직협상을 주도, 1400여명의 교사들이 복직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현재 전교조 경남지부가 조합원 1만명을 육박하며 서울 다음으로 가장 튼튼한 조직으로 성장하는 데는 그의 강력한 리더십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관련 교사들의 평이다.
그는 과거 교육관료들에게 ‘강성’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겨울에는 두터운 옷을 입어야 하고 봄에는 외투를 벗듯이 시대에 걸맞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지론으로 전교조 합법화 이후 물리적 충돌없이 단체교섭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남도교육청 한 고위간부는 “이 전 지부장은 통이 크고 합리적이다”고 평가했다. 그는 입수위주 교육이 아이들과 민족을 병들게 하고 있다며 한 신문에 ‘서울대를 없애자’는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 이상범 울산 북구청장 =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 노동자 출신 시의원, 환경운동가, 지방자치단체장 이 모든 명암은 이상범 북구청장(46)을 가르키는 수식어이다.
이 청장은 15세가 되던 해 부모님을 잃었다. 이때 다니던 중학교도 그만 두어야 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곳이면 어디든지 떠돌아 다녔다.
이 청장은 17세가 되던 해 우연히 자동차 정비기술을 접했다. 현대자동차와 인연을 맺게된 동기다. 현대자동차 입사 이후에도 이 청장은 조용한 모범 사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수많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이 청장은 노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노조 만들기에 나섰다. 해고와 구속을 무릅쓰고 노조설립을 마쳐 한국노동운동에 한 획을 그었다.
2000년에는 총선에 도전했지만 노동계 분열로 눈 앞에서 온 기회를 잃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을 준비한 이 청장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울산 북구 구청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 청장은 “주민참여정치의 꽃을 피워 노동자 출신에게 맡겨도 잘 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 주겠다”고 다짐했다.
◆ 김형기 경북대 교수=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영원히 잘 삽니다’
김형기(51) 경북대 교수가 지난 3년여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래처럼 외치는 구호다.
지방분권국민운동 상임대표를 맡아 지방분권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김교수는 지난 2000년 대구사회연구소 소장에 취임하면서 지방분권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결심했다.
그는 지방에 살면서 느끼는 현실적 문제를 고민하면서 지역발전의 걸림돌로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이라고 지적하고 대안적 발전 모델로 분권시스템을 제시하면서 본격 운동에 주력했다.
지난해 11월 전국조직을 결성하면서 본격궤도에 진입, 지방분권운동을 대통령선거 이슈로 만들어 전국민운동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그는 서울대 상과대 재학시절 ‘상대평론’의 편집장을 역임하는등 유신반독재의 전면에 나서 싸우는 투사형보다 투쟁 이론을 제공하는 지사형 개혁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긴 호흡으로 중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관념적 진보보다 실사구시적인 진보가 바람직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지방분권 운동도 이같은 관점에서 합리적인 진보, 양심적인 보수, 전문가적인 역량을 갖춘 세력과 결합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지론을 주장하고 있다.
매사 진지한 자세로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게 김 교수의 품성이다. 그는 지방분권에 매달리기 전에는 대구경북지역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를 만들었고 전국 최초로 교수신분으로 전교조에 가입해 지원하기도 했다.
◆ 김준곤 변호사= 김준곤 변호사(48)는 대구의 몇 안되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으로 대구 최초로 삼일 법무법인 설립했다.
그는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서울사람들이 하기 싫어해 지방에까지 밀려온 일감이었다. 그는 제안을 받고 하루만에 결심했고 위원장 부재상태의 의문사 진상규명위를 이끌었다.
성실성에다 강직한 성품을 유감없이 발휘해 허원근일병 사망사건, 한총련 투쟁국장 고 김준배씨 사망사건 등을 끈질기게 추적 규명해 인권변호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3월에는 대구지하철 참사 실종자 인정사망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수백명의 희생자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한 지하철방화사건의 ''의문사''까지 다루게 된 셈이다.
그는 원칙과 소신, 일관성, 헌신성 등으로 무소불위의 희생자 가족들과 금치산 상태의 대구시 양측으로부터 100% 동의를 얻는 리더십을 발휘해 원만하게 사망인정작업을 마무리했다. 그의 인정사망위 공적은 당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공적 권위로 꼽혔다.
그는 최근 변호사 사무실에서 대구의 미래 정치지형을 바꾸기 위한 시도로 지난 3월 시작한 ‘화요공부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그의 경력은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상업고를 나와 재수로 지방국립대를 입학해 은행직원으로 사회에 진출했다. 대학시절에는 민청학련의 배후 서클 회장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나이 서른에 고시공부를 시작 4년만인 88년 사시 30회로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조인이 됐다.
◆ 강진수 호텔리베라 사장 = 우성건설 노조위원장 출신의 강진수 사장(44세. 호텔 리베라해운대. www.rivierahotel.co.kr)은 정치를 떠나 경제인으로 변신했다. 그는 98년 총선에 출마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민노당 당원이기도 하고, 참여정부의 386 인맥들과는 전대협을 통한 인연이 있기도 하다. 부산에서 사업을 할 때, 강 사장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요청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강 사장은 여전히 기업경영에 집중하고 있다.
우성건설 노조위원장을 할 때, 기업이 부도나자 그는 구사운동을 펼쳤다. 채권자들과 국민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회사를 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이 과정에서 느낀 울분을 토로하고 싶어 출마했고, 선거 뒤에는 호텔의 위탁경영을 맡았다. IMF 관리체제가 시작된 때였고, 45% 객실점유율의 2류 호텔이었지만, 그는 신화를 창조해갔다.
고급 호텔들이 즐비한 속에서 그는 저렴한 가격과 친절하고 수준높은 서비스로 경쟁, 100%에 가까운 객실 판매율을 기록하면서 경영신화를 이어갔다. 13명 직원을 30명으로 늘였다. 그를 소개하는 기사들이 쏟아졌고 지역유명인사가 됐다. 정치지망생들이 얻고 싶은 명망성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총선출마보다는 노조위원장과 경영인의 경험을 합쳐 구조조정전문가로서 역할을 더 높이고 싶어한다.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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