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무기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하였다. “아 참 하늘도 너무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어찌하여 그렇게 착한 분이 이렇게 가셔야 하는가? 아직도 하실 일 너무 많고, 선생님을 좋아하는 사람들, 진정으로 존경하고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 많은데.
배무기 선생님의 업적에서 나는 두 가지 훌륭함을 본다. 하나는 학자로서 상아탑의 안일에 탐닉하지 않고, 항상 현실문제에 깊은 애정을 느끼고 끊임없이 현실개선에 참여하는 자세이다. 한마디로 허학(虛學)에 빠지지 않고 실학(實學)을 추구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항상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여 온 그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실천력이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은 언제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선생님은 어려운 일들을 피하지 않고 항상 도맡아 하여 오셨다.
우선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서 근대경제학의 한 분야로서의 노동경제학을 사실상 처음 개척하셨다. 거의 이론적 황무지에서 새로운 학문분야를 하나 만들어 오신 분이다. 그리하여 한국노동경제학회 초대 회장을 하셨으며, 선생님 밑에서 노동경제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한 제자들만도 국내 19명, 해외 13명에 이른다.
다음으로 한국노동연구원 초대 원장(1988∼1990)을 하셨다. 한국노동연구원 같은 정부출연연구소가 이론적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면서 자기 역할을 잘 하려면 초대 원장이 설립 초기에 조직의 문화와 전통을 잘 만들어야 한다. 정부와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된다. 지식인 사회와 노사(勞使) 양쪽에서 존경을 받아야 한다. 배무기 선배님의 능력과 인품이 이 어려운 일을 성공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 노동연구원은 아주 훌륭한 연구소로서 자기의 역할을 잘 하고 있다.
다음으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상임위원(1996∼1997)을 하시면서 1997년 노동법개정을 사실상 주도하여 오셨다. 1954년 처음 제정된 이후 우리나라 노동법의 전면개정을 노사합의로 이끌어 내신 것이다. 이것도 우리나라 역사에는 처음 있는 일로서 분명 무에서 유를 만드신 큰 업적의 하나이다. 또 하나의 창조는 노동법 개정 이후 그 지위가 크게 격상된 중앙노동위원회 초대 위원장(1997∼1999)을 역임하셨다. 그러면서 중앙노동위원회의 위상과 기능을 새롭게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셨다.
또한 우리나라 교육정책과 인적자원개발정책을 통합 한 후 처음으로 교육인적자원정책위원회 초대위원장(2000∼2002)을 맡아서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되는 교육과 노동과 훈련의 정책적 통합을 위하여 선도적 노력을 하셨다.
그러나 이 빛나는 모든 업적 보다 더 귀한 것은 그 분의 마음과 덕성이다. 참 선하고 착하신 어른이었다. 참 온화한 성품의 올곧은 선비였다. 외유(外柔)하면서도 한없이 내강(內剛)하신 분이었다. 그 분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 그리고 동료들, 그리고 지인들 모두가 그의 돌아감을 진실로 슬퍼하는 것은 그의 온화한 웃음과 따뜻한 마음을 다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척박한 노사 불신의 역사, 대립과 갈등의 역사 속에서 노사화합이라는 이루기 어려운 꿈을 실현하려고 묵묵히 성실하게 노력하여 온 신 선생님의 높은 뜻을 새겨 보면서, 그 과정에서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이셨던 선생님이 느끼셨던 좌절과 분노를 우리는 함께 느끼는 바이다.
아무리 역사는 이상주의자의 좌절을 통하여 발전하다고 하지만 이상주의자의 좌절과 고통을 과연 역사는 어떻게 보상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의 이 한없이 답답한 대립과 갈등의 노사문화가 선생님이 천수(天壽)를 누릴 수 없도록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자꾸 든다. 그래서 선생님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은 더욱 더 슬프고 아픈 것이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어찌하여 그렇게 착한 분이 이렇게 가셔야 하는가? 아직도 하실 일 너무 많고, 선생님을 좋아하는 사람들, 진정으로 존경하고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 많은데.
배무기 선생님의 업적에서 나는 두 가지 훌륭함을 본다. 하나는 학자로서 상아탑의 안일에 탐닉하지 않고, 항상 현실문제에 깊은 애정을 느끼고 끊임없이 현실개선에 참여하는 자세이다. 한마디로 허학(虛學)에 빠지지 않고 실학(實學)을 추구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항상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여 온 그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실천력이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은 언제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선생님은 어려운 일들을 피하지 않고 항상 도맡아 하여 오셨다.
우선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서 근대경제학의 한 분야로서의 노동경제학을 사실상 처음 개척하셨다. 거의 이론적 황무지에서 새로운 학문분야를 하나 만들어 오신 분이다. 그리하여 한국노동경제학회 초대 회장을 하셨으며, 선생님 밑에서 노동경제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한 제자들만도 국내 19명, 해외 13명에 이른다.
다음으로 한국노동연구원 초대 원장(1988∼1990)을 하셨다. 한국노동연구원 같은 정부출연연구소가 이론적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면서 자기 역할을 잘 하려면 초대 원장이 설립 초기에 조직의 문화와 전통을 잘 만들어야 한다. 정부와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된다. 지식인 사회와 노사(勞使) 양쪽에서 존경을 받아야 한다. 배무기 선배님의 능력과 인품이 이 어려운 일을 성공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 노동연구원은 아주 훌륭한 연구소로서 자기의 역할을 잘 하고 있다.
다음으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상임위원(1996∼1997)을 하시면서 1997년 노동법개정을 사실상 주도하여 오셨다. 1954년 처음 제정된 이후 우리나라 노동법의 전면개정을 노사합의로 이끌어 내신 것이다. 이것도 우리나라 역사에는 처음 있는 일로서 분명 무에서 유를 만드신 큰 업적의 하나이다. 또 하나의 창조는 노동법 개정 이후 그 지위가 크게 격상된 중앙노동위원회 초대 위원장(1997∼1999)을 역임하셨다. 그러면서 중앙노동위원회의 위상과 기능을 새롭게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셨다.
또한 우리나라 교육정책과 인적자원개발정책을 통합 한 후 처음으로 교육인적자원정책위원회 초대위원장(2000∼2002)을 맡아서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되는 교육과 노동과 훈련의 정책적 통합을 위하여 선도적 노력을 하셨다.
그러나 이 빛나는 모든 업적 보다 더 귀한 것은 그 분의 마음과 덕성이다. 참 선하고 착하신 어른이었다. 참 온화한 성품의 올곧은 선비였다. 외유(外柔)하면서도 한없이 내강(內剛)하신 분이었다. 그 분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 그리고 동료들, 그리고 지인들 모두가 그의 돌아감을 진실로 슬퍼하는 것은 그의 온화한 웃음과 따뜻한 마음을 다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척박한 노사 불신의 역사, 대립과 갈등의 역사 속에서 노사화합이라는 이루기 어려운 꿈을 실현하려고 묵묵히 성실하게 노력하여 온 신 선생님의 높은 뜻을 새겨 보면서, 그 과정에서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이셨던 선생님이 느끼셨던 좌절과 분노를 우리는 함께 느끼는 바이다.
아무리 역사는 이상주의자의 좌절을 통하여 발전하다고 하지만 이상주의자의 좌절과 고통을 과연 역사는 어떻게 보상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의 이 한없이 답답한 대립과 갈등의 노사문화가 선생님이 천수(天壽)를 누릴 수 없도록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자꾸 든다. 그래서 선생님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은 더욱 더 슬프고 아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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