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활발해진 남북한 문화교류의 장에서 북측의 ‘반갑습니다’와 함께 가장 친근하게 불리는 노래는 아마도 ‘서울에서 평양까지’라는 곡일 것이다.
지난 6일 반세기만에 열린 육로를 통해 평양을 방문한 일행 중에는 이 곡의 작사가 조태형씨가 있었다. ‘광주보다 더 가까운, 택시요금 5만원’이라는 지척의 거리로 비유됐던 평양을 직접 육로를 통해 방문한 조씨의 감회는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판문점을 넘어선지 15분만에 도착한 개성을 보며 ‘분단의 아픔’을 절절히 느꼈다는 조태형씨.
감상적으로만 그려오던 평양을 직접 방문하며 느꼈다는 조씨의 소회를 들어봤다.
◆15분만에 개성 도착 = 조씨가 이번 평양 육로 방문단에 포함된 것은 순전히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박창익 목사의 제안 때문이었다.
역사적인 평양 방문길에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작사가가 빠질 수 없다는 박 목사의 제안은 그에게 당위로서의 통일을 현실로 느끼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됐다.
특히 버스 안에서 남측 방문단에게 북한을 소개했던 안내원이 그가 탄 줄도 모른체 ‘서울에서 평양까지’노래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그는 그저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었다.
역사적인 육로길을 통해 디딘 평양 땅은 그에게 있어 감동과 함께 복잡미묘한 고뇌를 던져줬다.
이전까지 당위로서의 통일을 위해 막연하게 평양을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조씨에게 실제 접하게 된 평양은 ‘통일은 너무 멀지만 물리적으로 우리는 얼마나 가까운지’를 절감하게 했던 것.
조씨는 “판문점을 넘고 15분이 채 안돼 개성에 도착했을 만큼 북은 지척에 있었지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고착화된 남과 북의 인식 차이를 극복하는 일은 요원하게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특히 1노선으로 이뤄진 평양 시내 지하철을 방문했을 때 “서울에는 지하철 노선이 7개나 된다”고 자랑스레 강조하는 남측 방문단의 말을 들었을 때 어쩔 수 없이 대립적인 접근방식을 놓치기 어려운 우리 자신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한국전쟁 이후 잿더미가 된 땅을 재건한 남과 북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대단한 민족’의 역량을 최대화하기 위한 통일에 있어 앙금처럼 깊숙히 남아있는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또 하나의 화두를 얻고 돌아온 것이다.
◆삶 속 통일 실천 중요 = 조씨는 평양 방문시 제한돼 있던 일정을 피해 일행에서 떨어져 북한 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던 공장에 들어갔었다고 했다.
북한 노동자들은 하루종일 혹사한 근육을 풀기 위해 퇴근과 함께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고 한다.
“민간인과의 접촉이 자유로이 허용되지는 않았지만 워낙 대규모 일행이 방문하다보니 안내원의 눈을 피해 공장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남한에서 온 사람인지 뻔히 알면서도 함께 춤을 추자고 권해 그야말로 ‘춤판’을 벌이게 됐죠. 이는 처음 우리를 안내한 북측 안내원과 분계선을 넘어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우리 빨리 통일을 이루자’며 눈물을 뿌렸던 때와 함께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던 경험입니다.”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그의 소회다.
평양을 두 발로 밟은 이후 최근 논란이 됐던 ‘송두율 교수 문제’를 비롯해 점차 심화되고 있는 이념갈등을 바라볼 때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는 조씨는 “이제 지난 역사를 껴안는 열린 시각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조씨는 이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1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죽창에 찔려 돌아간 내 친지’를 잊기란 도저히 어렵다는, 분단의 비극을 온몸으로 체험한 분들의 말을 흘려들을 수도 없다”면서도 “이제 후손을 위한 발전적 모색의 차원에서 지난 역사를 묻고 남과 북은 물론 나와 다른 이념까지 껴안아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통일이 됐을 때 남한이 북측의 경제적 어려움을 무조건 껴안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육로를 통한 중국과의 수출 통로를 여는데 따르는 경제적 이익과 남북의 장점을 통합시키는 데서 오는 시너지 효과를 더 고민하는 것이 발전적인 사고가 아니겠냐고 반문한 조씨는 “평양 방문을 통해 삶 속에서 통일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 정애선 기자 asjung@naeil.com
지난 6일 반세기만에 열린 육로를 통해 평양을 방문한 일행 중에는 이 곡의 작사가 조태형씨가 있었다. ‘광주보다 더 가까운, 택시요금 5만원’이라는 지척의 거리로 비유됐던 평양을 직접 육로를 통해 방문한 조씨의 감회는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판문점을 넘어선지 15분만에 도착한 개성을 보며 ‘분단의 아픔’을 절절히 느꼈다는 조태형씨.
감상적으로만 그려오던 평양을 직접 방문하며 느꼈다는 조씨의 소회를 들어봤다.
◆15분만에 개성 도착 = 조씨가 이번 평양 육로 방문단에 포함된 것은 순전히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박창익 목사의 제안 때문이었다.
역사적인 평양 방문길에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작사가가 빠질 수 없다는 박 목사의 제안은 그에게 당위로서의 통일을 현실로 느끼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됐다.
특히 버스 안에서 남측 방문단에게 북한을 소개했던 안내원이 그가 탄 줄도 모른체 ‘서울에서 평양까지’노래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그는 그저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었다.
역사적인 육로길을 통해 디딘 평양 땅은 그에게 있어 감동과 함께 복잡미묘한 고뇌를 던져줬다.
이전까지 당위로서의 통일을 위해 막연하게 평양을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조씨에게 실제 접하게 된 평양은 ‘통일은 너무 멀지만 물리적으로 우리는 얼마나 가까운지’를 절감하게 했던 것.
조씨는 “판문점을 넘고 15분이 채 안돼 개성에 도착했을 만큼 북은 지척에 있었지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고착화된 남과 북의 인식 차이를 극복하는 일은 요원하게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특히 1노선으로 이뤄진 평양 시내 지하철을 방문했을 때 “서울에는 지하철 노선이 7개나 된다”고 자랑스레 강조하는 남측 방문단의 말을 들었을 때 어쩔 수 없이 대립적인 접근방식을 놓치기 어려운 우리 자신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한국전쟁 이후 잿더미가 된 땅을 재건한 남과 북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대단한 민족’의 역량을 최대화하기 위한 통일에 있어 앙금처럼 깊숙히 남아있는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또 하나의 화두를 얻고 돌아온 것이다.
◆삶 속 통일 실천 중요 = 조씨는 평양 방문시 제한돼 있던 일정을 피해 일행에서 떨어져 북한 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던 공장에 들어갔었다고 했다.
북한 노동자들은 하루종일 혹사한 근육을 풀기 위해 퇴근과 함께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고 한다.
“민간인과의 접촉이 자유로이 허용되지는 않았지만 워낙 대규모 일행이 방문하다보니 안내원의 눈을 피해 공장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남한에서 온 사람인지 뻔히 알면서도 함께 춤을 추자고 권해 그야말로 ‘춤판’을 벌이게 됐죠. 이는 처음 우리를 안내한 북측 안내원과 분계선을 넘어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우리 빨리 통일을 이루자’며 눈물을 뿌렸던 때와 함께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던 경험입니다.”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그의 소회다.
평양을 두 발로 밟은 이후 최근 논란이 됐던 ‘송두율 교수 문제’를 비롯해 점차 심화되고 있는 이념갈등을 바라볼 때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는 조씨는 “이제 지난 역사를 껴안는 열린 시각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조씨는 이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1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죽창에 찔려 돌아간 내 친지’를 잊기란 도저히 어렵다는, 분단의 비극을 온몸으로 체험한 분들의 말을 흘려들을 수도 없다”면서도 “이제 후손을 위한 발전적 모색의 차원에서 지난 역사를 묻고 남과 북은 물론 나와 다른 이념까지 껴안아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통일이 됐을 때 남한이 북측의 경제적 어려움을 무조건 껴안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육로를 통한 중국과의 수출 통로를 여는데 따르는 경제적 이익과 남북의 장점을 통합시키는 데서 오는 시너지 효과를 더 고민하는 것이 발전적인 사고가 아니겠냐고 반문한 조씨는 “평양 방문을 통해 삶 속에서 통일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 정애선 기자 as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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