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를 비롯한 세계 경영학계의 석학들은 20세기 세계 경제에서 가장 주목할 점이 관료주의와 계획경제에 대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승리한 것이라 요약한다. 21세기 들어 다양한 형태의 경영자들이 부침을 거듭하며 이러한 기조에 가장 적합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이는 21세기와 더불어 세계 경제의 흐름에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이 대두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조라 할 것이다. 본지는 오늘날 기업 경영의 새로운 리더십을 창조하고 있는 세계적 경영자들에게서 교훈을 찾고자 한다. <편집자 주="">
지난 5월 본지 기자가 일본 아이치현 내 도요타시를 방문했을 때, 시 관계자는 먼저 도요타 스타디움으로 안내했다. 1997년 공사를 시작해서 총 4519억원을 들여 4년만인 2001년 5월 완공된 이 스타디움에, 시는 지난 해 60억원을 지원했다. 시는 이와 함께 일본 3대 미술관의 하나로 알려진 시립미술관에 지난 5년간 1230억원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시가 역내 문화시설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온 것은 일본 내에서도 주목할 만한 일인데, 그 배경에 대해 스즈끼 시장은 문화 환경 조성이라는 일반적인 의미 이외에 “시 주민의 7~80%를 차지하는 도요타자동차 및 협력사 종사자들에 대한 배려의 하나”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현재 도요타시 종업원의 73%, 제품출하액의 91%를 도요타자동차가 차지하고 있으며, 지난 해 시 세수 1조2000억원 중 30%인 3500억원을 도요타사가 납부했다.
회사가 앞장서 문화도시를 조성
또한 도요타 시의원 40명 중 7명이 도요타사 출신으로 구성되는 등 회사는 시정에 높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스즈끼 시장은 “그렇지만 지금껏 시가 도요타사 노사문제를 포함, 기업 내부 문제에 관해 어떠한 조정 역할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후 방문한 도요타자동차사의 노무담당 노나카 과장은 이와 관련, “회사는 노사문제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지방 노동감독청의 자문을 구하는 일 이외에 지금껏 노사문제로 외부의 조정을 구한 경우는 1950년 쟁의 이래 한 번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노나카 과장에 따르면 1950년 쟁의 이후 노사는 향후 관계 정립을 위해 무려 12년에 걸쳐 조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 결과 1962년 노사선언을 발표한 이래 지금까지 무분규와 대화를 통한 상호존중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19세기말 양잠업을 주수입원으로 하며 고로모(擧母)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소도시는 도요타자동직기가 자동차공장을 유치하면서 전기를 맞았다. 그후 1959년 도요타자동차가 본격적인 성장세를 구가하면서 인근 읍면을 통합, 현재의 도요타(豊田)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2003년 현재 35만7400여명의 인구를 지닌 이 도시는 7개의 대학과 4만5000석의 스타디움, 일본 최고 수준의 시립미술관,자동차박물관 및 산업박물관, 그리고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녹지공간 등을 자랑하며, 그 대부분의 재원 조성에 도요타자동차사가 참여했다.
도요타자동차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인근 나고야(名古屋)에 도요타공업대학을 설립했다. 4년제와 대학원과정을 운영하며, 전임교수 1인당 학생 수가 7명에 불과한 이 학교는 일본 유수 기업의 인력을 맡아 양성한다. 2006년이면 영국 이튼학교 수준의 중고교를 설립할 예정이며 향후에도 회사는 초일류급 교육시설을 계속 늘릴 계획이다.
위기에서 건져낸 도요타생산시스템
도요타자동차는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하면서 일대 위기를 맞았다. 차량 수요가 급격히 줄었으나 종신고용제를 유지한 때문에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와중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1950년 4월 회사는 최초로 인원감축을 발표했다. 이에 파업이 3개월이나 지속되었고, 극적인 타협 끝에 노사는 1600명의 희망퇴직에 합의했다. 또한 그 결과에 책임을 지고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를 포함한 경영진 전원이 퇴진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도요타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시도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 자동차업계는 포드사가 개발한 대량생산방식을 원가절감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요타사의 기술책임자 오노 다이이치는 이것이 회사의 현실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각 공정마다 적정량의 부품을 적기에 공급하는 다품종소량생산 방식을 도입했다.
오노는 먼저 회사 여기저기 널려 있는 재고를 줄이는 데 몰두했다. 당시 회사는 대량생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늘 필요한 자재 이상을 구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슈퍼마켓에 들른 오노는 손님이 필요한 물건을 선반에서 가져가면 그만큼만 주인이 채워 넣는 것을 보았다.
오노는 이 방식에 착안하여 선반 대신 ‘간판(看板)’이라는 개념으로 자재를 적시에 가져가고 채우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1955년 도요타 모토마치(本町) 공장에서 시작된 이 방식은 꾸준히 확산되어 1967년에는 외주공장에까지 적용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JIT(JUST IN TIME)이라 불리는 최초의 도요타생산시스템이다.
도요타생산시스템이 대량생산체제를 능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자동차업계는 앞 다투어 이를 모방했으며, 외국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는 도요타가 개발한 수많은 ''가이젠(개선, 改善)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 원동력은 다름아닌 도요타사의 임직원들이었다. 1951년 6월, 한국전쟁으로 간신히 기사회생한 회사는 생산성 향상의 한 방안으로 ‘창의적 제안제도’를 발족시켰다. 이후 노사협력체제가 확립되면서 임직원들은 너나없이 무수한 제안을 내놓게 되었다. 1984년까지 제안건수는 1000만건을 돌파했고, 지난 한 해에도 제안건수 65만1560건, 채용률 99%, 그리고 1인당 제안건수 평균 11.7건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현재 제안활동 총책임자는 오너가문 출신인 도요타 쇼이치로 명예회장.
명암 엇갈린 두 맞수의 경쟁
1933년 동경에 본사를 두고 설립된 닛산은 수십년에 걸친 도요타의 경쟁자였다. 일본 최초의 국민차 닷토를 개발하며 자동차산업에 뛰어든 닛산은 1930~40년대에는 GM과 포드를 누르고 일본 최대의 메이커로 부상하기도 했다.
전후 미군정이 닛산을 재벌로 규정하여 소그룹으로 해체해 버리자, 닛산은 특유의 기술력으로 버티다가 한국전쟁을 맞아 미 군용트럭을 납품하면서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어 1950~60년대는 도요타와 닛산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일본 자동차산업을 이끌었다. 닛산이 ‘블루버드’로 선풍을 일으키면 도요타는 ‘코로나’를 개발해 이에 맞서고 닛산은 다시 ‘서니’로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두 회사는 여러 모로 대조적이었다. 닛산은 수도 도쿄에 본사를 두고 도쿄공대 출신들을 대거 받아들이는 등 일본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높은 브랜드 지명도를 자랑했다.
이에 반해 도요타는 지방 아이치현에 본사를 두고 인근 나고야대학 등에서 인력을 모았다. 또한 현장 종업원들이 주도하는 ‘개선’ 작업으로 기술력을 높이는 한편, 영업에 주력하여 일본 최대의 판매망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를 일본인들은 ‘기술의 닛산, 판매의 도요타’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70년대 들어 판매 면에서 도요타는 점차 닛산을 누르기 시작했고, 이는 점차 기술력의 차이를 상쇄시켰다. 신제품에서 앞서 나가던 닛산은 90년대가 되자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와 함께 적자폭이 확대되면서 신차 출고수를 점차 줄였다.
반면 도요타는 성장을 거듭하여 국내 시장점유율을 40% 이상으로 끌어올린 뒤에도, 항상 3개월분의 운영자금과 직원급여를 사내에 유보하는 등 수십년에 걸쳐 자금관리 원칙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마침내 닛산은 99회계연도 상반기에 3230억엔이라는, 금융기관을 제외한 일본 상장기업 사상 최대의 적자를 내고 파산 직전에 몰렸다.
닛산의 구원자는 프랑스의 로노사였다. 세계 메이저 자동차업체들이 활발한 인수합병을 전개하는 가운데, 군소업체로 전락할 것을 우려한 르노가 5대 메이저 진입의 일환으로 닛산 인수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이에 따라 1999년 6월 르노사가 파견한 카를로스 곤이 닛산의 최고영영자(COO)로 앉게 되고, 닛산은 8800명을 감원하는 등 가혹한 구조조정 끝에 가까스로 회생하기에 이른다.
세계화를 상징하는 코드, 렉서스
1980년대 들어 도요타는 일본 최대의 업체이자 세계시장에서 8%를 점한 강자였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싸구려 메이커 취급을 받고 있었다. “고급 승용차는 회사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안정적인 고객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판단 아래 도요타 에이지 회장은 1983년 8월 주요 임직원들과 대책회의를 가지고 그간의 저가전략을 근본적으로 수정, 미국시장을 겨냥한 새 프로젝트를 발족시켰다. 코드명 F1이라 불리는 렉서스 브랜드 개발계획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도요타는 당시 세계 고급승용차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BMW, 벤츠를 넘어서는 모델을 원했고, 그를 위해 비용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회사의 핵심 설계자와 디자이너 60여명이 참여한 끝에 1985년 첫 테스트용 차가 만들어졌다. 다시 1400명의 엔지니어와 2300명의 기술자 그리고 200명의 보조인력으로 구성된 24개의 엔지니어링팀이 구성되어 더 높은 수준의 기술과 품질을 연구했다.
이후 1000여개의 엔진 시제품과 450대의 테스트용 차를 만들어 각국 기술진의 검증을 받았다. 핵심 마케팅 전문가들은 미국에 눌러앉아 미국내 주고객층들의 생활방식을 조사했고, 그들의 조사에 근거하여 디자인과 인테리어가 수정되었다. 예를 들어 내장용 가죽을 정하는 데 2년이 걸렸고, 24가지의 나무로 마감용 장식재를 만들어 비교했다.
특히 도요타가 처음부터 주력한 것이 ‘노화방지 프로그램’이었다. 비싼 차일수록 한 번 구입하면 오래 소유하게 될 것이므로, 이를 위해 개발팀은 자동차의 내구성을 결정짓는 96가지 요소를 규명, 갓 출고된 차와 8만킬로미터를 달린 차 사이에 외관 및 소음, 성능 면에서 전혀 구별이 가지 않도록 만들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개발 기간 5년6개월을 거쳐 1989년 발표된 렉서스 LS430은 그해 미 자동차 비교평가기관인 AMCI에 의해 ‘최고의 럭셔리카’로 선정되었다.
여기에 도요타 특유의 마케팅 전략이 가세했다. 도요타는 렉서스를 미국 시장에서 독립 디비전으로 출시하면서, 차체와 광고에 일체 도요타라는 사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판매망도 독립적인 렉서스 매장을 중심으로 진행했으며, 이 때문에 일반 미국인들은 도요타와 렉서스 사이에 아무런 관계를 찾지 못했다.
심지어 내수용과 수출용에도 각각 모델명을 달리 함으로써 연관성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도요타의 저가 이미지가 렉서스의 고급 이미지를 희석시키지 않기 위한 이른바 역후광효과 회피 전략의 일환이었다.
렉서스는 미국 고급승용차시장에서 10여년째 1위권을 고수, 도요타 경영진의 전략이 옳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모회사의 이미지와 분리된 채 독립적으로 미국시장을 주도함으로써, 오늘날 렉서스는 세계화 시대를 상징하는 브랜드로 회자되고 있다.
무공해자동차로 미래시장 제패 노려
지난 해 4월, 도요타사는 세계시장 15% 확보를 골자로 하는 ‘2010년 글로벌 비전’을 발표했다. 현재 1위 메이커인 GM이 점유율 14.2%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도요타의 목표는 사실상 2010년대 초반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도요타는 이미 목표에 접근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 상반기(4~9월)에 도요타는 판매대수 317만대를 기록, 같은 기간 판매고 312만대에 그친 포드사를 제치고 세계 2위를 기록했다. 이 기간 시장점유율은 10%를 넘어섰고, 순이익은 5200억엔으로 지난 해 같은 기간에 비해 23.2% 늘어나 상위 메이커 중 최고를 기록했다.
도요타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지금 도요타는 미래 자동차시장 석권을 노리고 있으며, 이를 위해 환경자동차 개발에 전력 질주하는 중이다. 1997년 도요타는 세계 최초로 하이브리드 양산차인 프리우스를 시판했고, 이미 14만대 판매를 돌파했다. 올해 4월 그 상위기종인 THS-II를 발표했는데, 2005년에 이 차량들의 판매가 30만대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또한 도요타는 완전 무공해차량인 연료전지자동차의 상용화를 마치고 그 최초 모델인 FCHV를 지난 해 12월, 역시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 특히 미래 시장을 좌우하게 될 이 분야에서 도요타는 경쟁업체와의 제휴를 마다하지 않는다.
도요타는 이미 99년 GM과 5개년간 하이브리드차, 연료전지차 등 친환경차량을 공동개발하는 데 합의한 바 있고, 폭스바겐과는 재처리 및 내비게이션 분야에서, BMW와는 디젤엔진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자국 내에서는 지난 해 닛산과 하이브리드 시스템 기술 협력을 골자로 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자사에 도움이 되는 기술이라면 경쟁자와도 당연히 협력한다는 입장이다.
철저한 일본식 경영으로 세계 시장에 충격을 던져 온 이 회사는, 창사 이래 줄곧 도요타 가문의 창업정신을 존중하는 동시에 능력위주의 인사로 혁신적인 경영을 지속해왔다.
뉴스위크지는 연말 특집호 ‘2004년의 이슈’에서 오쿠다 히로시 도요타회장을 세계 경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 8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 뉴스위크지의 묘사처럼, 세계 자동차업계는 당분간 ‘애증이 뒤섞인 눈길’로 도요타자동차의 향배에 주목할 것으로 보인다. N1950년 노사분규 이래 53년 무분규 지속 … ‘대화만이 협력 가능케 해’
‘렉서스’로 미국 고급차시장 석권 … 친환경기술로 미래 자동차시장 주도
/김선태 기자 kst@naeil.com편집자>
지난 5월 본지 기자가 일본 아이치현 내 도요타시를 방문했을 때, 시 관계자는 먼저 도요타 스타디움으로 안내했다. 1997년 공사를 시작해서 총 4519억원을 들여 4년만인 2001년 5월 완공된 이 스타디움에, 시는 지난 해 60억원을 지원했다. 시는 이와 함께 일본 3대 미술관의 하나로 알려진 시립미술관에 지난 5년간 1230억원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시가 역내 문화시설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온 것은 일본 내에서도 주목할 만한 일인데, 그 배경에 대해 스즈끼 시장은 문화 환경 조성이라는 일반적인 의미 이외에 “시 주민의 7~80%를 차지하는 도요타자동차 및 협력사 종사자들에 대한 배려의 하나”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현재 도요타시 종업원의 73%, 제품출하액의 91%를 도요타자동차가 차지하고 있으며, 지난 해 시 세수 1조2000억원 중 30%인 3500억원을 도요타사가 납부했다.
회사가 앞장서 문화도시를 조성
또한 도요타 시의원 40명 중 7명이 도요타사 출신으로 구성되는 등 회사는 시정에 높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스즈끼 시장은 “그렇지만 지금껏 시가 도요타사 노사문제를 포함, 기업 내부 문제에 관해 어떠한 조정 역할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후 방문한 도요타자동차사의 노무담당 노나카 과장은 이와 관련, “회사는 노사문제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지방 노동감독청의 자문을 구하는 일 이외에 지금껏 노사문제로 외부의 조정을 구한 경우는 1950년 쟁의 이래 한 번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노나카 과장에 따르면 1950년 쟁의 이후 노사는 향후 관계 정립을 위해 무려 12년에 걸쳐 조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 결과 1962년 노사선언을 발표한 이래 지금까지 무분규와 대화를 통한 상호존중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19세기말 양잠업을 주수입원으로 하며 고로모(擧母)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소도시는 도요타자동직기가 자동차공장을 유치하면서 전기를 맞았다. 그후 1959년 도요타자동차가 본격적인 성장세를 구가하면서 인근 읍면을 통합, 현재의 도요타(豊田)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2003년 현재 35만7400여명의 인구를 지닌 이 도시는 7개의 대학과 4만5000석의 스타디움, 일본 최고 수준의 시립미술관,자동차박물관 및 산업박물관, 그리고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녹지공간 등을 자랑하며, 그 대부분의 재원 조성에 도요타자동차사가 참여했다.
도요타자동차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인근 나고야(名古屋)에 도요타공업대학을 설립했다. 4년제와 대학원과정을 운영하며, 전임교수 1인당 학생 수가 7명에 불과한 이 학교는 일본 유수 기업의 인력을 맡아 양성한다. 2006년이면 영국 이튼학교 수준의 중고교를 설립할 예정이며 향후에도 회사는 초일류급 교육시설을 계속 늘릴 계획이다.
위기에서 건져낸 도요타생산시스템
도요타자동차는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하면서 일대 위기를 맞았다. 차량 수요가 급격히 줄었으나 종신고용제를 유지한 때문에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와중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1950년 4월 회사는 최초로 인원감축을 발표했다. 이에 파업이 3개월이나 지속되었고, 극적인 타협 끝에 노사는 1600명의 희망퇴직에 합의했다. 또한 그 결과에 책임을 지고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를 포함한 경영진 전원이 퇴진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도요타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시도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 자동차업계는 포드사가 개발한 대량생산방식을 원가절감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요타사의 기술책임자 오노 다이이치는 이것이 회사의 현실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각 공정마다 적정량의 부품을 적기에 공급하는 다품종소량생산 방식을 도입했다.
오노는 먼저 회사 여기저기 널려 있는 재고를 줄이는 데 몰두했다. 당시 회사는 대량생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늘 필요한 자재 이상을 구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슈퍼마켓에 들른 오노는 손님이 필요한 물건을 선반에서 가져가면 그만큼만 주인이 채워 넣는 것을 보았다.
오노는 이 방식에 착안하여 선반 대신 ‘간판(看板)’이라는 개념으로 자재를 적시에 가져가고 채우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1955년 도요타 모토마치(本町) 공장에서 시작된 이 방식은 꾸준히 확산되어 1967년에는 외주공장에까지 적용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JIT(JUST IN TIME)이라 불리는 최초의 도요타생산시스템이다.
도요타생산시스템이 대량생산체제를 능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자동차업계는 앞 다투어 이를 모방했으며, 외국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는 도요타가 개발한 수많은 ''가이젠(개선, 改善)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 원동력은 다름아닌 도요타사의 임직원들이었다. 1951년 6월, 한국전쟁으로 간신히 기사회생한 회사는 생산성 향상의 한 방안으로 ‘창의적 제안제도’를 발족시켰다. 이후 노사협력체제가 확립되면서 임직원들은 너나없이 무수한 제안을 내놓게 되었다. 1984년까지 제안건수는 1000만건을 돌파했고, 지난 한 해에도 제안건수 65만1560건, 채용률 99%, 그리고 1인당 제안건수 평균 11.7건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현재 제안활동 총책임자는 오너가문 출신인 도요타 쇼이치로 명예회장.
명암 엇갈린 두 맞수의 경쟁
1933년 동경에 본사를 두고 설립된 닛산은 수십년에 걸친 도요타의 경쟁자였다. 일본 최초의 국민차 닷토를 개발하며 자동차산업에 뛰어든 닛산은 1930~40년대에는 GM과 포드를 누르고 일본 최대의 메이커로 부상하기도 했다.
전후 미군정이 닛산을 재벌로 규정하여 소그룹으로 해체해 버리자, 닛산은 특유의 기술력으로 버티다가 한국전쟁을 맞아 미 군용트럭을 납품하면서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어 1950~60년대는 도요타와 닛산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일본 자동차산업을 이끌었다. 닛산이 ‘블루버드’로 선풍을 일으키면 도요타는 ‘코로나’를 개발해 이에 맞서고 닛산은 다시 ‘서니’로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두 회사는 여러 모로 대조적이었다. 닛산은 수도 도쿄에 본사를 두고 도쿄공대 출신들을 대거 받아들이는 등 일본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높은 브랜드 지명도를 자랑했다.
이에 반해 도요타는 지방 아이치현에 본사를 두고 인근 나고야대학 등에서 인력을 모았다. 또한 현장 종업원들이 주도하는 ‘개선’ 작업으로 기술력을 높이는 한편, 영업에 주력하여 일본 최대의 판매망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를 일본인들은 ‘기술의 닛산, 판매의 도요타’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70년대 들어 판매 면에서 도요타는 점차 닛산을 누르기 시작했고, 이는 점차 기술력의 차이를 상쇄시켰다. 신제품에서 앞서 나가던 닛산은 90년대가 되자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와 함께 적자폭이 확대되면서 신차 출고수를 점차 줄였다.
반면 도요타는 성장을 거듭하여 국내 시장점유율을 40% 이상으로 끌어올린 뒤에도, 항상 3개월분의 운영자금과 직원급여를 사내에 유보하는 등 수십년에 걸쳐 자금관리 원칙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마침내 닛산은 99회계연도 상반기에 3230억엔이라는, 금융기관을 제외한 일본 상장기업 사상 최대의 적자를 내고 파산 직전에 몰렸다.
닛산의 구원자는 프랑스의 로노사였다. 세계 메이저 자동차업체들이 활발한 인수합병을 전개하는 가운데, 군소업체로 전락할 것을 우려한 르노가 5대 메이저 진입의 일환으로 닛산 인수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이에 따라 1999년 6월 르노사가 파견한 카를로스 곤이 닛산의 최고영영자(COO)로 앉게 되고, 닛산은 8800명을 감원하는 등 가혹한 구조조정 끝에 가까스로 회생하기에 이른다.
세계화를 상징하는 코드, 렉서스
1980년대 들어 도요타는 일본 최대의 업체이자 세계시장에서 8%를 점한 강자였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싸구려 메이커 취급을 받고 있었다. “고급 승용차는 회사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안정적인 고객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판단 아래 도요타 에이지 회장은 1983년 8월 주요 임직원들과 대책회의를 가지고 그간의 저가전략을 근본적으로 수정, 미국시장을 겨냥한 새 프로젝트를 발족시켰다. 코드명 F1이라 불리는 렉서스 브랜드 개발계획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도요타는 당시 세계 고급승용차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BMW, 벤츠를 넘어서는 모델을 원했고, 그를 위해 비용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회사의 핵심 설계자와 디자이너 60여명이 참여한 끝에 1985년 첫 테스트용 차가 만들어졌다. 다시 1400명의 엔지니어와 2300명의 기술자 그리고 200명의 보조인력으로 구성된 24개의 엔지니어링팀이 구성되어 더 높은 수준의 기술과 품질을 연구했다.
이후 1000여개의 엔진 시제품과 450대의 테스트용 차를 만들어 각국 기술진의 검증을 받았다. 핵심 마케팅 전문가들은 미국에 눌러앉아 미국내 주고객층들의 생활방식을 조사했고, 그들의 조사에 근거하여 디자인과 인테리어가 수정되었다. 예를 들어 내장용 가죽을 정하는 데 2년이 걸렸고, 24가지의 나무로 마감용 장식재를 만들어 비교했다.
특히 도요타가 처음부터 주력한 것이 ‘노화방지 프로그램’이었다. 비싼 차일수록 한 번 구입하면 오래 소유하게 될 것이므로, 이를 위해 개발팀은 자동차의 내구성을 결정짓는 96가지 요소를 규명, 갓 출고된 차와 8만킬로미터를 달린 차 사이에 외관 및 소음, 성능 면에서 전혀 구별이 가지 않도록 만들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개발 기간 5년6개월을 거쳐 1989년 발표된 렉서스 LS430은 그해 미 자동차 비교평가기관인 AMCI에 의해 ‘최고의 럭셔리카’로 선정되었다.
여기에 도요타 특유의 마케팅 전략이 가세했다. 도요타는 렉서스를 미국 시장에서 독립 디비전으로 출시하면서, 차체와 광고에 일체 도요타라는 사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판매망도 독립적인 렉서스 매장을 중심으로 진행했으며, 이 때문에 일반 미국인들은 도요타와 렉서스 사이에 아무런 관계를 찾지 못했다.
심지어 내수용과 수출용에도 각각 모델명을 달리 함으로써 연관성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도요타의 저가 이미지가 렉서스의 고급 이미지를 희석시키지 않기 위한 이른바 역후광효과 회피 전략의 일환이었다.
렉서스는 미국 고급승용차시장에서 10여년째 1위권을 고수, 도요타 경영진의 전략이 옳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모회사의 이미지와 분리된 채 독립적으로 미국시장을 주도함으로써, 오늘날 렉서스는 세계화 시대를 상징하는 브랜드로 회자되고 있다.
무공해자동차로 미래시장 제패 노려
지난 해 4월, 도요타사는 세계시장 15% 확보를 골자로 하는 ‘2010년 글로벌 비전’을 발표했다. 현재 1위 메이커인 GM이 점유율 14.2%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도요타의 목표는 사실상 2010년대 초반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도요타는 이미 목표에 접근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 상반기(4~9월)에 도요타는 판매대수 317만대를 기록, 같은 기간 판매고 312만대에 그친 포드사를 제치고 세계 2위를 기록했다. 이 기간 시장점유율은 10%를 넘어섰고, 순이익은 5200억엔으로 지난 해 같은 기간에 비해 23.2% 늘어나 상위 메이커 중 최고를 기록했다.
도요타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지금 도요타는 미래 자동차시장 석권을 노리고 있으며, 이를 위해 환경자동차 개발에 전력 질주하는 중이다. 1997년 도요타는 세계 최초로 하이브리드 양산차인 프리우스를 시판했고, 이미 14만대 판매를 돌파했다. 올해 4월 그 상위기종인 THS-II를 발표했는데, 2005년에 이 차량들의 판매가 30만대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또한 도요타는 완전 무공해차량인 연료전지자동차의 상용화를 마치고 그 최초 모델인 FCHV를 지난 해 12월, 역시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 특히 미래 시장을 좌우하게 될 이 분야에서 도요타는 경쟁업체와의 제휴를 마다하지 않는다.
도요타는 이미 99년 GM과 5개년간 하이브리드차, 연료전지차 등 친환경차량을 공동개발하는 데 합의한 바 있고, 폭스바겐과는 재처리 및 내비게이션 분야에서, BMW와는 디젤엔진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자국 내에서는 지난 해 닛산과 하이브리드 시스템 기술 협력을 골자로 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자사에 도움이 되는 기술이라면 경쟁자와도 당연히 협력한다는 입장이다.
철저한 일본식 경영으로 세계 시장에 충격을 던져 온 이 회사는, 창사 이래 줄곧 도요타 가문의 창업정신을 존중하는 동시에 능력위주의 인사로 혁신적인 경영을 지속해왔다.
뉴스위크지는 연말 특집호 ‘2004년의 이슈’에서 오쿠다 히로시 도요타회장을 세계 경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 8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 뉴스위크지의 묘사처럼, 세계 자동차업계는 당분간 ‘애증이 뒤섞인 눈길’로 도요타자동차의 향배에 주목할 것으로 보인다. N1950년 노사분규 이래 53년 무분규 지속 … ‘대화만이 협력 가능케 해’
‘렉서스’로 미국 고급차시장 석권 … 친환경기술로 미래 자동차시장 주도
/김선태 기자 kst@naeil.com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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