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렬 정치와 ‘원숭이 주먹’
안병찬 경원대학교 초빙교수·언론학
관훈클럽이 요동치는 정국 속에 6개 정당 대표·당의장·총재를 의석 순번으로 초청하여 토론회를 열고 있다. 관훈클럽은 중견 언론인 모임으로 보수성을 띠고 있다. 월요일 첫 순위는 퇴진 위기의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였다. 관훈토론회장에는 근래 보기 드물게 열 서너 대의 텔레비전 카메라가 옆으로 길게 배치되었다.
이번 관훈토론은 지상파 방송대신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과 인터넷 신문(동아닷컴과 조선닷컴)의 실시간 중계가 이루어진 점이 옛날과 다른 점이다. 한 시절 관훈토론회는 신문이 주관하는 공개 토론의 장으로 잘 나갔었다.
그런 관훈토론회가 텔레비전과 합작한 매체행사(미디어 이벤트)로 흥행의 대박을 터뜨린 것은 1987년의 ‘1노3김’ 초청 토론회였다.
당초 KBS MBC 양 텔레비전은 1노3김의 토론회를 전면 생중계 하겠다고 열띤 경쟁을 벌이다가 슬그머니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데 민정당 집권세력이 전부 녹화방영을 해도 손해볼 것이 없다고 판단하자 상황은 바뀌었다. 관훈토론회 내용은 양 텔레비전을 통해 여과됨이 없이 총 9시간50분간 방영되었다. 그 후 텔레비전은 영상 정치의 괴력에 스스로 놀라면서 자기들의 독점적 무대를 견고하게 구축해왔다.
원숭이는 병 속 열매를 움켜쥔 주먹 때문에 병목에 걸린 손을 빼내지 못한다. 영리하지만 욕심이 지나쳐 일을 그르치는 것이 원숭이 본성이다.
‘죽어야 산다’는 교훈 망각, 최틀러의 자충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에게 이번 관훈토론회는 정치적으로 극적인 반전을 꾀할 기회일 수 있었다. 사즉생의 용단으로 망가져 가는 거대 야당 한나라당을 수습하여 다스리는 정치력을 보이는 것이 살길이었다.
최병렬 대표의 별명은 ‘최틀러’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인물이라고 말한다. 이리저리 둘러대는 데만 능한 관료주의 관행에 비하면 그 행동력은 차라리 후련한 데가 있다는 평도 들었다. 이번 토론회에서도 그는 솔직 담백하다는 느낌을 주는 단답으로 수많은 질문을 받아넘겼다.
그러나 그가 풀어놓은 것은 한나라당의 절대위기를 타개할 본질적 대안이 아니라 현상유지에의 집착이었다. 이회창 책임론을 우회적으로 제기하고 본인이 주도하여 총선을 치를 결심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놓은 대안이라면 당의 자산을 매각하여 불법 대선 자금을 변제한다, 공천혁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한다, 3월 초 제2창당 수준의 ‘뉴 한나라당’ 계획을 제시한다, 내외인사로 구성된 총선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킨다는 정도였다.
이쯤으로는 재창당을 위해 죽어야 산다는 자세로 모든 것을 바치라는 당내 소장파 요구를 조금도 충족하지 못함을 최 대표는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당내에는 최 대표가 통 큰 결단은 내리지 않고 아이디어만으로 승부하려는 성향을 보이며, 뉴스가 될만한 새로운 거리를 찾아 마치 취재하듯이 정치를 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있어왔다고 들린다.
최 대표는 서울특별시장 때(94년)와 한나라당 서울시장후보 때(98년) 관훈토론회에 나온 전력이 있다. 나는 94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최병렬 씨를 8개월 시한부로 위기를 관리하는 서울특별시장에 임명한 것을 보고 지연을 찾아 사람을 발탁했구나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찬찬히 들여다보고 최 시장 발탁이 다른 동기에 따른 일임을 알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기가 야당 원내총무를 지내던 3공 시절, 3선 개헌안이 강제로 통과되었을 때 정치부 기자이던 최병렬이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술회한 적이 있다.
기득권 포기 재창당 외면해 퇴출 위기 자초
그런 최 시장이 억지 도강 돌파작전을 펴듯 서울 승용차 10부제를 강행하고 이를 어기면 과태료 10만원을 부과하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그는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린 것에 공포심을 품은 시민의 심리를 돌파작전을 선포하는 빌미로 삼았다.
그런 생각의 한끝이 표현된 것은 94년 관훈토론회 때였다. “돌아가신 분들한테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성수교 붕괴 사고가 구조물을 건지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고 한국을 살렸다”고 말한 것이다. 시민이 떼죽음을 당해 봐야 다른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는 발상이나 그런 사고가 모두 과거부터 이어져온 총체적 과오에 기인한다는 논리는 직무 유기의 구실에 불과했다.
최병렬 대표는 관훈토론회의 후 폭풍을 맞고 있다. 당내 초재선 의원과 일부 중진의원이 임시전당대회를 통해 새 지도부를 결성한다고 결의함으로써 최 대표는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졌다. 과연 그가 극적 반전 카드로 위기를 벗어날 정치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병찬 경원대학교 초빙교수·언론학
관훈클럽이 요동치는 정국 속에 6개 정당 대표·당의장·총재를 의석 순번으로 초청하여 토론회를 열고 있다. 관훈클럽은 중견 언론인 모임으로 보수성을 띠고 있다. 월요일 첫 순위는 퇴진 위기의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였다. 관훈토론회장에는 근래 보기 드물게 열 서너 대의 텔레비전 카메라가 옆으로 길게 배치되었다.
이번 관훈토론은 지상파 방송대신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과 인터넷 신문(동아닷컴과 조선닷컴)의 실시간 중계가 이루어진 점이 옛날과 다른 점이다. 한 시절 관훈토론회는 신문이 주관하는 공개 토론의 장으로 잘 나갔었다.
그런 관훈토론회가 텔레비전과 합작한 매체행사(미디어 이벤트)로 흥행의 대박을 터뜨린 것은 1987년의 ‘1노3김’ 초청 토론회였다.
당초 KBS MBC 양 텔레비전은 1노3김의 토론회를 전면 생중계 하겠다고 열띤 경쟁을 벌이다가 슬그머니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데 민정당 집권세력이 전부 녹화방영을 해도 손해볼 것이 없다고 판단하자 상황은 바뀌었다. 관훈토론회 내용은 양 텔레비전을 통해 여과됨이 없이 총 9시간50분간 방영되었다. 그 후 텔레비전은 영상 정치의 괴력에 스스로 놀라면서 자기들의 독점적 무대를 견고하게 구축해왔다.
원숭이는 병 속 열매를 움켜쥔 주먹 때문에 병목에 걸린 손을 빼내지 못한다. 영리하지만 욕심이 지나쳐 일을 그르치는 것이 원숭이 본성이다.
‘죽어야 산다’는 교훈 망각, 최틀러의 자충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에게 이번 관훈토론회는 정치적으로 극적인 반전을 꾀할 기회일 수 있었다. 사즉생의 용단으로 망가져 가는 거대 야당 한나라당을 수습하여 다스리는 정치력을 보이는 것이 살길이었다.
최병렬 대표의 별명은 ‘최틀러’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인물이라고 말한다. 이리저리 둘러대는 데만 능한 관료주의 관행에 비하면 그 행동력은 차라리 후련한 데가 있다는 평도 들었다. 이번 토론회에서도 그는 솔직 담백하다는 느낌을 주는 단답으로 수많은 질문을 받아넘겼다.
그러나 그가 풀어놓은 것은 한나라당의 절대위기를 타개할 본질적 대안이 아니라 현상유지에의 집착이었다. 이회창 책임론을 우회적으로 제기하고 본인이 주도하여 총선을 치를 결심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놓은 대안이라면 당의 자산을 매각하여 불법 대선 자금을 변제한다, 공천혁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한다, 3월 초 제2창당 수준의 ‘뉴 한나라당’ 계획을 제시한다, 내외인사로 구성된 총선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킨다는 정도였다.
이쯤으로는 재창당을 위해 죽어야 산다는 자세로 모든 것을 바치라는 당내 소장파 요구를 조금도 충족하지 못함을 최 대표는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당내에는 최 대표가 통 큰 결단은 내리지 않고 아이디어만으로 승부하려는 성향을 보이며, 뉴스가 될만한 새로운 거리를 찾아 마치 취재하듯이 정치를 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있어왔다고 들린다.
최 대표는 서울특별시장 때(94년)와 한나라당 서울시장후보 때(98년) 관훈토론회에 나온 전력이 있다. 나는 94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최병렬 씨를 8개월 시한부로 위기를 관리하는 서울특별시장에 임명한 것을 보고 지연을 찾아 사람을 발탁했구나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찬찬히 들여다보고 최 시장 발탁이 다른 동기에 따른 일임을 알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기가 야당 원내총무를 지내던 3공 시절, 3선 개헌안이 강제로 통과되었을 때 정치부 기자이던 최병렬이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술회한 적이 있다.
기득권 포기 재창당 외면해 퇴출 위기 자초
그런 최 시장이 억지 도강 돌파작전을 펴듯 서울 승용차 10부제를 강행하고 이를 어기면 과태료 10만원을 부과하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그는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린 것에 공포심을 품은 시민의 심리를 돌파작전을 선포하는 빌미로 삼았다.
그런 생각의 한끝이 표현된 것은 94년 관훈토론회 때였다. “돌아가신 분들한테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성수교 붕괴 사고가 구조물을 건지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고 한국을 살렸다”고 말한 것이다. 시민이 떼죽음을 당해 봐야 다른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는 발상이나 그런 사고가 모두 과거부터 이어져온 총체적 과오에 기인한다는 논리는 직무 유기의 구실에 불과했다.
최병렬 대표는 관훈토론회의 후 폭풍을 맞고 있다. 당내 초재선 의원과 일부 중진의원이 임시전당대회를 통해 새 지도부를 결성한다고 결의함으로써 최 대표는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졌다. 과연 그가 극적 반전 카드로 위기를 벗어날 정치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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