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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일꿈>원주산림항공관리소 홍성현 어느덧 혹한 겨울을 뒤로 한 채 봄의 향기가 느껴지는 계절에 접어들었다. 설악산, 지리산, 등 많은 산에는 산자락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쭉 펴고 있는 것 같은 나뭇가지와 파릇파릇하게 물들은 잎들로 하여금 상춘객들에게 한풀 더 봄을 실감나게 한다. 최근 주5일 근무제와 웰빙 문화 확산으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주말이나 휴일이면 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일부 등산객의 소홀한 산행 준비로 자신의 체력을 생각하지 않은 채 무리한 산행을 하고, 암벽이나 암릉 등 위험한 산악지역에서 무모한 행동을 하여 조난과 산악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또 일부 산행 인들은 정상에 올라서 음주를 하거나 체온 관리를 하지 못해 저체온 증으로 안타까운 사고를 부르고 있다. 건강의 길 자락인 산행이 자기연민적 생각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산행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9년 2월 겨울추위가 가시지 않은 채 눈이 살짝 덥혀있던 어느 날 사무실로 긴급한 목소리로 구조요청이 들어왔다. “여기 치악산인데요, 같이 온 친구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도와주세요..”라는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목소리에 산림항공구조대는 응급구조장비를 챙겨 즉각 출동하여 환자후송에 나섰다. 현장에 도착한 구조대원은 환자에 상태를 확인하고 즉시 응급처치에 들어갔고 신속히 헬기로 이송해 인근 병원으로 후송했지만 안타깝게도 사망했던 사고였다. 이날 산에 오른 두 사람은 평상시에도 산을 자주 찾는 산행 가였다. 여느 때와 똑 같이 산을 찾았지만 자신의 컨디션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한 산행으로 돌이킬 수 없는 참옥한 상황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최근 2005~2009까지 원주산림항공관리소에서는 산악사고로 인해 29회 출동해 27명을 구조했는데 사고발생원인을 보면 대부분이 무리한 산행으로 인해 산악사고가 발생했으며, 음주와 장비미흡으로 인한 사고가 그 뒤를 이었다. 혼잡하고 답답한 도시 환경에서 벗어나 심신을 증진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리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고 있다. 하지만 산의 대한 불충분한 정보와 각종부주의로 인해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돼 가족이나 자신에게 불행한 산이 될 수 있다. 산을 찾을 때는 항상 산에 대한 정보와 그날의 기상 등 충분한 정보 수집이 필요하고, 산행 중 조난을 대비해 비상식량과 가볍고 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의류 몇 가지와 헤드랜턴, 호각 등 비상시 사용할 수 있는 장비를 필히 준비해야한다. 또 산행 시작 전에 반드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해주고 충분한 몸 풀기 운동을 한 후 자신이 목표로 했던 산행을 안전하게 올라야 한다. 산림청에서는 봄철 산악사고에 대비하여 등산객이 많은 주말과 휴일에 헬기를 긴급출동 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상시 갖추고 있으며, 응급구조대원들의 발 빠른 산악구조에 나서고 있다. 또한 산불과 산악구조 상황발생시 1688-3119로 신고하면 즉각 출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건강과 삶의 풍유를 즐길 수 있는 안전한 산행이 되기를 바란다. 2010-04-13
- ‘고귀한 희생’ 보상에 인색한 나라 고위험군 10년차 공무원 순직하면 1억1400만원 지급 사병 순직하면 고작 3600만원 … 현실화 필요성 제기 세계 경제대국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이 자기 나라와 국민의 안녕을 위해 희생하는 경찰과 소방대원, 군인 등에 대한 보상에는 인색하다는 지적이다. 천안함 침몰사건이 터진 이후에야 부랴부랴 보상 현실화 목소리가 나오지만 제도화과정에서 또다시 흐지부지될 것이란 우려가 높다. ◆사병은 보험·연금서 ‘소외’ = 직무상 상해나 질병 또는 사망의 위험이 높은 고위험 공직자로는 경찰과 소방대원, 교도관, 국가정보원직원, 군인 등이 꼽힌다. 이들은 크게 경찰과 소방대원 등 일반직군과 군인직군으로 나뉘어 보상체계가 이뤄져있다. 일반직군의 경우 공무상 상해나 질병이 걸릴 경우 3년간 치료비를 대준다. 순수한 치료비일 뿐 그 이상의 보상은 없다. 정부는 지난 2006년 제정된 ‘위험직무 관련 순직공무원의 보상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경찰과 소방대원 등이 공무 중 순직할 경우 소득월액의 60배(기준소득월액의 44.2배)를 일시금으로 준다. 공무원연금공단에 따르면 9급으로 공직을 시작한 공무원이 10년차가 됐을 경우 받는 기준소득월액은 259만원이다. 기준소득월액은 연봉을 12분의 1로 나눈 개념이다. 즉 10년차 공직자가 순직할 경우 받는 보상금은 1억1447만원(259만원×44.2배)이 된다. 유족에겐 별도로 순직유족연금이 지급된다. 20년미만 근무자에겐 기준소득월액의 35.75%, 20년이상 근무자에겐 42.25%가 지급된다. 10년차 공무원인 경우 월 92만원을 받는다. 군인은 부상과 질병에 걸리면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된다. 사망의 경우 공무사망과 전사로 나뉜다. 공무사망 보상금은 본인보수월액의 36배를 받는다. 원사 12호봉의 경우 9987만원이 된다. 사병은 중사1호봉에 기준해 보상금이 산정되는데 3656만원이다. 병사를 제외한 하사이상 간부는 국방부가 민간보험사에 가입한 맞춤형복지제도에 의해 1억원을 별도로 받는다. 간부는 보수월액의 65%에 달하는 유족연금도 받게된다. 전사일 경우엔 보상금이 대폭 뛴다. 전사보상금은 계급에 상관없이 2억원(소령 장기10호봉 보수월액의 72배)을 한꺼번에 받는다. ◆이인기 의원 “보상 현실화 추진” = 천안함 침몰사건을 계기로 위험직군 공무원들의 처우실태가 드러나면서 “희생에 대한 대가가 너무 초라한 것 아니냐”는 여론이 높다. 10년을 근무한 공직자가 순직할 경우 받는 보상금이 1억원을 겨우 넘고, 그나마 징집에 의해 군복무를 하는 사병은 고작 3656만원에 불과한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이다. 실제 지난해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이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08년 사이 순직한 군인 510명이 받은 보상금은 296억원에 머물렀다. 1인당 5821만원에 해당하는 액수다. 고급승용차 한 대 값에 불과한 것이다. 한나라당 이인기 의원은 “(한국은) 보훈개념이 굉장히 약하고 후진적”이라며 “그러다보니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보상액을 높이고 범위를 넓히는데 대해 예산편성권을 쥐고있는 공직사회 내부에서조차 ‘예산이 부족하다’며 난색을 표한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조만간 법개정을 통해 위험직군 공무원의 보상체계를 한층 현실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4-09
- 인터뷰 - 정원도 독도의용수비대원 관련 기사 독도의용수비대란 6.25전쟁 참전용사 중심 1953년 창설 민간조직 울릉주민의 자발적인 의지로 6.25전쟁 참전용사를 중심으로 1953년 4월 20일 창설돼 1956년 12월 30일까지 독도수호활동을 벌인 순수 민간조직이다. 최초 50명으로 구성됐으나 실제 활동한 사람은 33명. 홍순칠대장이 군사조직으로 결성해 절반씩 교대로 독도에 주둔하며 일본인의 독도 침범을 막아내 일본의 실효적 지배를 사전에 차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 6월 24일부터 1955년 11월 21일까지 일본의 실습선과 순시선, 항공기 등과 교전을 벌이며 독도침범을 막아내는 활동을 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수시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 일본군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본정부가 나서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항의하기도 했다. 1956년 12월 30일 우리정부는 일본의 항의를 받고 독도의용수비대를 해산시키고 정식 경찰을 독도에 주둔케 했다. 현재 대원으로 활동한 사람중 홍순칠 대장 등 2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생존하고 있으며 김현수 대원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지난 2005년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이 제정되면서 기념사업회도 결성됐으며 지난해 3월부터 대원과 유족에게 매월 50만원과 35만원의 지원금이 지급되고 있다. 이들 대원들은 방위포장과 광복장 등의 훈장을 정부로부터 받은 바 있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4-09
- 5면 사진설명 어린이 교통안전 체험 뉴시스】남강호 기자 = 8일 오전 서울 광진구(구청장 정송학) 자양2동주민센터에서 진행된 ''어린이 교통·생활안전 체험교실''에서 어린이들이 손을 들고 안전하게 건널목을 건너는 법을 직접 체험하고 있다. 사진=광진구청 제공 화재 진압 훈련 체험하는 초등학생들 뉴시스 남강호 기자 = 8일 오전 서울 성북구 정릉동 청덕초등학교에서 성북소방서(서장 조남승) 소방대원들이 전교생을 대상으로 소방안전교육과 화재를 가장한 대피훈련을 실시했다. 이번 훈련은 소방안전에 관한 방송수업, 화재시 대피훈련, 소화기 사용, 화재 진압훈련 등을 실시했다. (사진=성북소방서 제공)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4-09
- “독도는 자식 같은 섬” 57년 전 의용수비대원으로 독도 지켜내 “울릉도 주민에게는 자식같은 섬이고 생계를 해결한 텃밭같은 곳이며 바다에서 길잡이가 되는 등대입니다.” 정원도(82·경북 울릉군 울릉읍)씨는 57년 전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스물다섯 혈기왕성한 나이에 독도의용수비대원으로 활동했던 그 시절…. ◆전쟁 부상 안고 독도경비 나서 = 그가 요즘엔 뿔이 나 있다. 또다시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 때문이다. 정씨는 “억지 주장을 교과서에 수록해 후세들에게 세뇌교육을 시킬 속셈”이라며 “57년 전 독도에 살면서 섬을 지켜낸 사람들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분하고 속상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아직도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2전대장’이라는 당시 직함을 새긴 명함을 사용하고 있는 그로서는 그럴 만하다. 정씨가 독도의용수비대에 참여한 건 1953년. 1948년 입대해 6.25전쟁에 참전, 총상을 입고 제대한 후 고향 울릉도로 돌아와 쉬고 있던 때였다. 독도 인근 해역으로 조업 나갔던 어민들이 일본 어선과 실습선 등이 독도에 ‘다케시마(竹島)’라는 푯말을 꽂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을 비롯해 서기종씨 등을 포함한 9명이 4톤짜리 동력선을 타고 독도로 향했다. 울릉도 도동항(현 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 8시간 정도 파도와 싸우다보니 독도였다. 물골이 있는 서도와 동도를 순찰한 뒤 동도에 막사를 지어 본격적인 경비에 착수하기로 했다. 현재 동도 전경부대 막사 옆에 막사를 지었고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무장했다. 식사는 우럭과 미역. 집에서 들고간 된장과 소금 간으로 버텼다. 대원은 곧 33명으로 늘었다. 두 개 조로 나눠 한달씩 교대근무를 시작했다. 정씨는 “교대근무 후 돌아오다 뱃길을 잃고 72시간 동안 망망대해를 표류한 적도 있다”고 돌이켰다. 1953년 6월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이 독도에 접안하려고 하자 전마선(노를 젓는 소형목선)을 타고 가 경고하며 돌려보냈다.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을 새겼던 1954년엔 일본의 해안보안청 순시선과 교전을 벌였다. 81㎜박격포와 M1 소총, 경기관총 등을 발포해 일본군이 부상을 입자 이후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 연유로 1956년 12월 말에 수비대가 독도에서 철수하고 대신 경찰이 정식으로 주둔하게 됐다. 수비대원 중 8명이 경찰로 발령, 20여년 이상 울릉도와 독도에서 근무했다. 정씨 역시 1년 2개월가량 경찰로 재직했다. ◆주민들이 지켜내야 = “젊은이들이 무장을 하고 독도로 들어갈 때 일부 주민들은 ‘미쳤다’고 놀려대기도 했지요. 그러나 대원들은 영토를 사수해야한다는 애국심에 불타올라 목숨은 염두에도 없었어요” 정씨는 “당시 의용수비대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영토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며 “57년 전 의용수비대처럼 주민들이 거주하며 독도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무인도’가 아닌 ‘사람 사는 섬’, 주민들이 살고 관광객들이 하룻밤이라도 자고 가는 섬이어야 독도를 우리 땅으로 온전히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괭이갈매기 보호보다 국토 사수가 우선 아닌가요. 민간인이 살아야 앞으로도 시빗거리를 없애고 실효적 지배를 할 수 있어요.” 정씨는 “현대 건축기술이라면 동도의 자갈지역 해안과 서도 일부 지역에 10여가구 이상 얼마든지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울릉도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독도의용수비대란 울릉주민의 자발적인 의지로 6.25전쟁 참전용사를 중심으로 1953년 4월 20일 창설돼 1956년 12월 30일까지 독도수호활동을 벌인 순수 민간조직이다. 최초 50명으로 구성됐으나 실제 활동한 사람은 33명이다. 홍순칠 대장이 군사조직으로 결성해 절반씩 교대로 독도에 주둔하며 일본인의 독도 침범을 막아내 일본의 실효적 지배를 사전에 차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 6월 24일부터 1955년 11월 21일까지 일본의 실습선과 순시선, 항공기 등과 교전을 벌이며 독도침범을 막아내는 활동을 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수시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 일본군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에 정식으로 항의하기도 했다. 현재 대원으로 활동한 사람중 홍순칠 대장 등 2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생존하고 있으며 김현수 대원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최세호 기자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4-09
- 1면 사진캡션 키르기스스탄 반정부시위 100명 사상 … 대통령도 수도 탈출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셰크에서 7일 반정부 시위대가 진압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다. 쿠르만벡 바키예프 대통령 사임을 주장하는 야당 지지자들의 시위는 6일 북서부 소도시 탈라스에서 시작돼 수도와 지방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다. 7일 밤 쿠르만벡 바키예프 대통령이 소형비행기로 수도를 탈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소요사태로 몰도무스 콘간티예프 내무부장관이 살해되고 부총리가 인질로 붙잡혔으며 국영 방송국이 시위대에 장악됐다. 또한 경찰의 발포로 100여명의 시위대원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AFP 연합뉴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4-08
- 희생의 대가에 인색한 대한민국 고위험군 10년차 공무원 순직하면 1억1400만원 지급 사병 순직하면 고작 3600만원 … 현실화 필요성 제기 표있음 세계 경제대국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이 자기 나라와 국민의 안녕을 위해 희생하는 경찰과 소방대원, 군인 등에 대한 보상에는 인색하다는 지적이다. 천안함 침몰사건이 터진 이후에야 부랴부랴 보상 현실화 목소리가 나오지만 제도화과정에서 또다시 흐지부지될 것이란 우려가 높다. ◆사병은 보험·연금서 ‘소외’ = 직무상 상해나 질병 또는 사망의 위험이 높은 고위험 공직자로는 경찰과 소방대원, 교도관, 국가정보원직원, 군인 등이 꼽힌다. 이들은 크게 경찰과 소방대원 등 일반직군과 군인직군으로 나뉘어 보상체계가 이뤄져있다. 일반직군의 경우 공무상 상해나 질병이 걸릴 경우 3년간 치료비를 대준다. 순수한 치료비일 뿐 그 이상의 보상은 없다. 정부는 지난 2006년 제정된 ‘위험직무 관련 순직공무원의 보상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경찰과 소방대원 등이 공무 중 순직할 경우 소득월액의 60배(기준소득월액의 44.2배)를 일시금으로 준다. 공무원연금공단에 따르면 9급으로 공직을 시작한 공무원이 10년차가 됐을 경우 받는 기준소득월액은 259만원이다. 기준소득월액은 연봉을 12분의 1로 나눈 개념이다. 즉 10년차 공직자가 순직할 경우 받는 보상금은 1억1447만원(259만원×44.2배)이 된다. 유족에겐 별도로 순직유족연금이 지급된다. 20년미만 근무자에겐 기준소득월액의 35.75%, 20년이상 근무자에겐 42.25%가 지급된다. 10년차 공무원인 경우 월 92만원을 받는다. 군인은 부상과 질병에 걸리면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된다. 사망의 경우 공무사망과 전사로 나뉜다. 공무사망 보상금은 본인보수월액의 36배를 받는다. 원사 12호봉의 경우 9987만원이 된다. 사병은 중사1호봉에 기준해 보상금이 산정되는데 3656만원이다. 병사를 제외한 하사이상 간부는 국방부가 민간보험사에 가입한 맞춤형복지제도에 의해 1억원을 별도로 받는다. 간부는 보수월액의 65%에 달하는 유족연금도 받게된다. 전사일 경우엔 보상금이 대폭 뛴다. 전사보상금은 계급에 상관없이 2억원(소령 장기10호봉 보수월액의 72배)을 한꺼번에 받는다. ◆이인기 의원 “보상 현실화 추진” = 천안함 침몰사건을 계기로 위험직군 공무원들의 처우실태가 드러나면서 “희생에 대한 대가가 너무 초라한 것 아니냐”는 여론이 높다. 10년을 근무한 공직자가 순직할 경우 받는 보상금이 1억원을 겨우 넘고, 그나마 징집에 의해 군복무를 하는 사병은 고작 3656만원에 불과한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이다. 실제 지난해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이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08년 사이 순직한 군인 510명이 받은 보상금은 296억원에 머물렀다. 1인당 5821만원에 해당하는 액수다. 고급승용차 한 대 값에 불과한 것이다. 한나라당 이인기 의원은 “(한국은) 보훈개념이 굉장히 약하고 후진적”이라며 “그러다보니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보상액을 높이고 범위를 넓히는데 대해 예산편성권을 쥐고있는 공직사회 내부에서조차 ‘예산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곤한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조만간 법개정을 통해 위험직군 공무원의 보상체계를 한층 현실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4-09
- 인터뷰- 정원도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2전대장 "내 어릴적 텃밭같은 독도를 누가 감히 자기네 땅이라고?" 독도에 민간인 10여가구 이상 상주시켜 독도 영토분쟁 끝내야 "독도는 울릉주민들에게 자식같은 섬이고 생계를 해결한 텃밭 같은 곳이며 길잡이 등대입니다. 57년전 울릉도의 혈기 왕성한 젊은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온 우리 땅이지요" 25세의 젊은 나이에 독도의용수비대의 대원으로 활동한 올해 82세의 정원도(사진 ·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동 3리)옹은 최근 몹시 기분이 상해 있다. "일본이 또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는 억지 주장을 교과서에 수록해 후세들에게 쇠뇌 교육을 시킬 속셈이겠죠. 하지만 57년전 민간인으로 독도에 거주하며 독도를 지켜낸 사람들이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분하고 속상합니다" 정원도 옹의 명함에는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2전대장''이라는 당시 직함을 그대로 새겨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독도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정옹은 "독도 인근 해역에는 각종 어자원이 풍부해 울릉주민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일주일에서 보름정도 머물러 각종 해산물을 채취한 텃밭이었으며 어선들의 휴식처요 뱃길을 안내한 등대역할을 했다"며 "특히 요즘 같은 봄철에는 미역이 많이 나와 미역채취가 한창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독도해역에는 당시 울릉주민뿐만 아니라 삼척과 울진 등 육지의 어선들도 많이 나와 일주일 정도 머물며 배 한 가득 고기를 잡아 갈 정도로 어자원이 풍족했다"고 말했다. ◆6.25 전쟁때 부상입은 몸으로 독도경비 나서 정옹은 1953년도에 독도의용수비대에 참여했다. 1948년 입대해 6.25전쟁에 참전해 총상을 입고 제대한 후 고향인 울릉도로 돌아와 쉬고 있었다. 독도 인근 해역으로 조업을 나갔던 어민들이 일본 어선과 실습선 등이 독도에 내려 ''다케시마(竹島)''라는 푯말을 독도에 꽂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독도의용수비대 결성에 앞장섰다.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을 비롯 서기종씨 등을 포함 9명이 모여 4톤짜리 동력선을 타고 독도로 무작정 향했다. 울릉도 도동항(현 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해서 8시간 정도 파도와 싸워야 도착했다. 처음엔 물골이 있는 서도와 동도를 순찰하고 돌아온 후 동도에 막사를 지어 본격적인 독도경비에 착수하기로 결심했다. 독도의용수비대 9명의 동지들은 막사를 지을 목재 등을 싣고 독도의 동도로 다시 들어갔다. 그후 33명으로 대원들이 늘어나 절반씩 한달에 한번 교대근무를 했다. 정옹은 "현재 동도 전경부대 막사 옆에 움푹 파인 곳에 막사를 지었으며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무장해 독도사수에 나섰다"고 말했다. 된장과 소금만 들고 들어가 우럭과 미역을 채취해 식사를 해결했다고 한다. 교대근무를 위해 독도에서 나오다 뱃길을 잃어 72시간 망당대해에 표류한 적도 있다. 1953년 6월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이 독도에 접안하려고 하자 전마선(노를 젓는 소형목선)을 타고 직접 일본 실습선에 올라가 독도에서 물러날 것을 경고하고 돌려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의용수비대원 8명이 일본 순시선 격퇴하기도 특히 1954년엔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을 새기로 일본의 해안보안청 순시선과 교전도 벌였다. "8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일본 경비정이 나타나 81mm박격포와 M1 소총, 경기관총 등을 발포해 일본군이 부상을 입기도 했었죠. 그후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에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정옹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무장을 하고 독도로 들어갈 때 울릉주민들은 ''미친 사람들이다'' 고 놀려대기도 했다"며 "대원들은 당시 갓 군대를 제대한 열혈청년들로 영토를 사수해야한다는 애국심이 불타올라 목숨 같은 건 계산(생각)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독도에 민간인 살게해야 영토분쟁 종지부 찍어" 그후 우리정부는 일본의 항의를 받고 1956년 12월말에 독도에서 철수하고 정식 경찰이 주둔하게 됐다. 독도수비대원중 8명은 정식경찰로 발령나 20여년 이상 울릉도와 독도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정옹은 1년2개월 정도 경찰로 재직하다 사직하고 노동일을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이었다. 정옹은 "57년전 무인도인 독도를 의용수비대가 지켜냈듯 앞으로는 실제 주민들이 살게 하고 관광객들이 하루밤이라도 잘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100년, 200년 독도를 우리땅으로 온전히 지켜내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의용수비대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영토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며 "괭이갈매기보호보다 국토사수가 우선이며 민간인이 실제 거주해야 앞으로도 시비거리를 없애고 실효적 지배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옹은 "동도의 자갈지역 해안과 서도 일부지역에는 현대 건축기술로 10여가구이상 거주할 수 있는 집은 얼마든 지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울릉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사진설명 57년전 민간인 신분으로 독도사수에 나선 정원도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2전대장이 저동항 방파제에서 독도 방향을 가리키며 독도의용수비대 활동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최세호 기자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4-09
- 인터뷰 - 정원도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2전대장 인터뷰 - 정원도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2전대장 사진 비니 행정팀 정원도 옹 “독도는 내게 자식같은 섬” 57년 전 의용수비대원으로 독도 지켜내 … “민간인 상주, 영토분쟁 끝내야” “울릉도 주민에게는 자식같은 섬이고 생계를 해결한 텃밭같은 곳이며 바다에서 길잡이가 되는 등대입니다.” 정원도(82·경북 울릉군 울릉읍)씨는 57년 전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스물다섯 혈기왕성한 나이에 독도의용수비대원으로 활동했던 그 시절…. ◆전쟁 부상 안고 독도경비 나서 = 그가 요즘엔 뿔이 나 있다. 또다시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 때문이다. 정씨는 “억지 주장을 교과서에 수록해 후세들에게 세뇌교육을 시킬 속셈”이라며 “57년 전 독도에 살면서 섬을 지켜낸 사람들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분하고 속상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아직도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2전대장’이라는 당시 직함을 새긴 명함을 사용하고 있는 그로서는 그럴 만하다. 정씨가 독도의용수비대에 참여한 건 1953년. 1948년 입대해 6.25전쟁에 참전, 총상을 입고 제대한 후 고향 울릉도로 돌아와 쉬고 있던 때였다. 독도 인근 해역으로 조업 나갔던 어민들이 일본 어선과 실습선 등이 독도에 ‘다케시마(竹島)’라는 푯말을 꽂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을 비롯해 서기종씨 등을 포함한 9명이 4톤짜리 동력선을 타고 독도로 향했다. 울릉도 도동항(현 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 8시간 정도 파도와 싸우다보니 독도였다. 물골이 있는 서도와 동도를 순찰한 뒤 동도에 막사를 지어 본격적인 경비에 착수하기로 했다. 현재 동도 전경부대 막사 옆에 막사를 지었고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무장했다. 식사는 우럭과 미역. 집에서 들고간 된장과 소금 간으로 버텼다. 대원은 곧 33명으로 늘었다. 두 개 조로 나눠 한달씩 교대근무를 시작했다. 정씨는 “교대근무를 끝내고 돌아오다가 뱃길을 잃고 72시간 동안 망망대해를 표류한 적도 있다”고 돌이켰다. 1953년 6월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이 독도에 접안하려고 하자 전마선(노를 젓는 소형목선)을 타고 가 경고하며 돌려보냈다.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을 새겼던 1954년엔 일본의 해안보안청 순시선과 교전을 벌였다. 81㎜박격포와 M1 소총, 경기관총 등을 발포해 일본군이 부상을 입자 이후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 연유로 1956년 12월 말에 수비대가 독도에서 철수하고 대신 경찰이 정식으로 주둔하게 됐다. 수비대원 중 8명이 경찰로 발령, 20여년 이상 울릉도와 독도에서 근무했다. 정씨 역시 1년 2개월가량 경찰로 재직했다. ◆주민들이 지켜내야 = “젊은이들이 무장을 하고 독도로 들어갈 때 일부 주민들은 ‘미쳤다’고 놀려대기도 했지요. 그러나 대원들은 영토를 사수해야한다는 애국심에 불타올라 목숨은 염두에도 없었어요” 정씨는 “당시 의용수비대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영토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며 “57년 전 의용수비대처럼 주민들이 거주하며 독도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무인도’가 아닌 ‘사람 사는 섬’, 주민들이 살고 관광객들이 하룻밤이라도 자고 가는 섬이어야 독도를 우리 땅으로 온전히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괭이갈매기 보호보다 국토 사수가 우선 아닌가요. 민간인이 살아야 앞으로도 시빗거리를 없애고 실효적 지배를 할 수 있어요.” 정씨는 “현대 건축기술이라면 동도의 자갈지역 해안과 서도 일부 지역에 10여가구 이상 얼마든지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울릉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사진설명 57년 전 독도사수에 나섰던 정원도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2전대장이 울릉도 저동항 방파제에서 독도 방향을 가리키며 당시 활동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최세호 기자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4-09
- “사고당시 승조원 29명 정상근무” 민관합동조사단이 밝힌 천안함 침몰 상황 7일 천안함 사고와 관련, 민관합동조사단(합조단)이 밝힌 당시 상황은 그 동안 국방부가 밝혀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수임무가 아닌 정상적 경계작전’에 투입됐던 천안함이 사고 당일에도 일상적으로 근무를 했으며 사고 직후에도 적절하게 위기에 대응했다는 것. 합조단 발표자료에 따르면 사고를 전후한 천안함 상황은 다음과 같다. ◆8시부터 정상적 야간당직 근무 = 지난 26일 침몰한 천안함이 서해 백령도 해상에서 경비임무를 부여받은 것은 지난 달 16일. 25일 서해 풍랑주의보가 발효되면서 대청도 동남방으로 피항했다. 26일 기상상황이 나아져 경비구역으로 복귀한 천안함은 오전 8시 20분부터 정상적인 작전임무를 수행했다. 저녁 8시 이후에는 O 대위를 포함 29명이 야간 당직근무를 시작했다. 함장(최원일 중령)은 저녁 9시 5분 함내 순찰을 마치고 함장실에서 컴퓨터와 KNTDS(해군전술지휘통제시스템) 화면을 확인중이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침실·식당 등에서 휴식·취침 중이었다. ◆‘꽝! 꽈-앙’ 하고 덮친 굉음 = 생존자 58명은 모두 배꼬리에 충격과 함께 ‘꽝!꽝-아앙(1~2초간)’하는 소리가 났고 정전과 동시에 격실에 기름·바닷물이 유입되면서 우현 90도로 기울었다고 진술했다. 이 때가 9시 22분. 합조단은 이를 ‘원인미상의 상황발생’이라고 표현했다. 그 동안 ‘폭발’이 기정사실화됐던 것과 전혀 다른 표현법이다. 함장은 충격으로 함장실에 갇혔다가 승조원의 도움으로 좌현 갑판으로 탈출했다. 그 때 이미 연돌 이후 배꼬리는 보이지 않았고 약한 기름냄새가 났다. 9시 28분 천안함 포술장(대위)는 휴대폰으로 2함대 상황장교에 구조 요청을 했고 이를 들은 2함대 상황반장은 9시 30분 대청도 고속정 편대에 긴급출항을 지시했다. 9시 32분 인천해경과 관공선에도 긴급지원 요청이 전달됐다. ◆“전대장님, 함미가 안보입니다” = 같은 시각. 2함대 22전대장(대령)으로부터 최 함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뭐에 맞은 것 같습니다” “뭔거 같애?” “함미가 아예 안보입니다” “어디? 함미 어디부터?” “연돌이 안보여요, 고속정이나 고속단정 빨리 조치해 주십시오” “생존자는?” “58명이고 다수가 피를 흘리며 중상자가 2명입니다” 긴박한 대화가 오갔다. 9시 56분. 고속정편대 5척이 천안함에 도착, 인명구조를 시작했다. 편대는 천안함에 3인치짜리 홋줄을 연결했다. 천안함 작전관(대위)이 고속정으로 뛰어건너다 바닷물에 빠지는 걸 보면서 함장은 해경의 고무단정(rib)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너울로 인해 함수에 있던 승조원의 추락이 우려되면서 고속정은 천안함과 연결됐던 홋줄을 다시 풀었고 10시 41분 해경 501함이 현장에 도착해 고속단정을 이용해 인명구조를 시작했다. 10시 50분에는 관공선이 추가로 인명구조를 시작했다. 이후 11시 13분까지 환자를 포함해 모든 병사들이 천안함을 떠난 것을 확인한 함장은 부장, 통신장과 함께 해경 501함으로 옮겨탔다. 이후 생환 승조원들은 고속정편대로 옮겨탄 뒤 성남함으로 갈아타고 2함대 사령부가 있는 평택항에 도착했다. 이 때가 사고발생 16시간이 지난 27일 오후 2시였다.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