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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의 그늘을 화사하게 걷어내자 어릴 때부터 타고난 다크써클로 ‘판다’란 별명을 달고 살았던 주부 곽 모(41세)씨는 나이가 들자 눈밑주름까지 생겨 주위로부터 얼굴이 지치고 어둡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요즘처럼 봄볕이 쏟아질 때는 다크서클과 눈밑주름이 더 도드라져 보일까봐 외출을 자제한다. 화장한 날씨일수록 유난히 눈에 거슬리는 것이 얼굴의 주름과 색소질환들이다. 특히 나이가 들면 다크써클(dark circle)과 눈밑주름은 함께 나타나는게 대부분이다. 이들은 얼굴을 전체적으로 칙칙해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한층 나이 들고 피곤해 보이게 만든다. 생동감 넘치는 아름다움과 동안 피부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한 눈밑주름과 다크서클.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방안을 오라클 피부과 이호섭 원장과 고운미 피부과 김동석 원장 도움말로 짚어봤다. ''다크 써클'' 어떻게 잡을까중년으로 접어들면 얼굴 피부의 탄력이 떨어지면서 중력에 의해 전반적으로 아래로 처진다. 이로인해 아래 눈꺼풀의 피부와 볼살의 경계부위가 함몰되어 눈밑주름과 다크서클이 자리 잡는다. 다크써클은 대개 눈밑의 피부가 얇고 많이 늘어나며 핑크빛을 뛴다. 보통 눈밑지방이나 얇은 피부 때문에 혈관이 비치거나, 색소침착으로 피부의 색조가 어두워져 생긴다. 피부가 핑크색을 띄는 경우는 대개 눈밑이 약간 패임을 동반하는데 이는 타고난 체질적 요인이 많다. 눈 아래 부위가 과다하게 색소침착이 된 경우는 반복적인 마찰이나 직업적인 이유, 햇빛의 과다한 노출이 주범이다. 또 나이가 들면서 지방이 볼록해져서 생기기도하고 피부가 얕아 눈 아래를 지나는 정맥이 나타나기도 한다.다크써클을 없애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정맥치료 경우 혈관은 잘 사라지나 효과는 미비하다. 색소침착은 보통 미백관리를 하는데 장기적 치료를 요한다. 필러 요법은 적당한 치료 시 효과를 볼 수 있다. 지방이 불거졌다면 수술요법을 쓰기도 한다. 오라클 피부과 이호섭 원장은 “다클써클은 원인에 따라 치료방법이 다르다”며 “붉은 혈관이 비칠 때는 붉은 혈관에 작용하는 레이저를 이용한 핏줄 치료를 3~5회 정도 실시하면 효과를 볼 수 있고, 만약 푸른 혈관이 비쳐보인다면 이에 해당되는 레이저로 푸른 정맥을 제거하면 쉽게 호전이 된다”고 말했다. 눈 주위가 전체적으로 거뭇하고 색소침착이 많다면 마찰과 자극을 피하고 꾸준한 미백제사용과 미백관리를 하면 좋아진다. 살이 얇거나 지방이 빠져나가 푹꺼져 다크써클이 생겼다면 간단한 주사요법으로 필러를 채워주면 된다. 눈밑이 평평해 보이면서 바로 완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단 효과는 1년 정도 유지된다. 동안의 적 ‘눈밑주름’, 이렇게 관리하자세월의 흔적으로 생긴 눈밑주름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눈 밑 주름 역시 반드시 없애야 하는 동안의 적이다. 일반적으로 피부노화가 20세 이후부터 시작 되면서 피부의 탄력 섬유 성분이 부족해져 피부가 늘어진다.눈 밑에 생기는 자글자글한 눈밑 주름도 이런 요인으로 자리를 잡는다. 눈밑 주름은 눈밑지방과도 관련이 많다. 눈밑지방은 대개 나이가 들어갈수록 피부가 처지고 눈 근육이 약해져 지방을 막아주는 막이 늘어지면서 생기는 것. 처짐이나 기타 여러 원인에 의해 잠깐 생겼던 것이 그대로 굳어져버리기도 한다. 눈밑지방은 대개 눈밑 주름을 동반하는데 특히 스트레스로 많이 생긴다. 최근 젊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눈밑지방과 주름 때문에 병원을 찾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다. 눈밑 주름도 상태에 따라 맞는 치료법을 찾아야 한다. 먼저 수술이 싫다면 비수술적 요법인 레이저나 고주파 또는 초음파 치료로 처진 주름을 리프팅해 주는 방법이 있다. 특히 초음파 리프팅 장비를 이용해 피부표면을 리프팅하면 만족스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리프팅을 위한 화장품도 개발되어 있다. 화장품은 꾸준한 상담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라야 효과를 볼수 있다는 것이 고운미 피부과 김동석 원장의 말이다. 피부과에서 자신의 상태에 맞춰 원스톱 상담을 해준다. 이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수술적 방법은 눈밑지방으로 인한 주름이 원인일 때 많이 적용된다. 눈 밑에 지방이 많으면 눈 밑이 불록하고 쳐져 보인다. 그러나 실제 볼록한 것이 아니라 눈 밑에 띠가 생기는 일명 ‘눈물 고랑’ 때문에 칙칙해 보이는 현상이다.김 원장은 “눈 밑의 지방을 빼면 불록 처지지는 않지만 눈이 퀭해 보여 더 어둡고 나이가 들어보인다”며 “눈 밑 지방을 제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눈물고랑’을 채워주는 ‘눈물고랑 이식술’이 더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이럴 경우 눈밑주름 뿐 만 아니라 다크써클까지 없어지는 이석이조 효과로 보다 젊은 얼굴로 분위기가 바뀐다는 것. 도움말 오라클 피부과 이호섭 원장, 고운미 피부과 김동석 원장한민자 리포터hmj647@empal.com 혼자서 하는 눈밑주름 예방법---박스처리 해주세요1) 손가락으로 눈 끝의 아래와 위쪽을 부드럽게 당겨준다. 2) 엄지 손가락으로 눈과 눈썹 사이의 뼈 부분을 살짝 누른다. 3) 눈의 뒷부분에서 관자놀이까지 부드럽게 눌러준 후, 눈의 앞부분도 지그시 누른다.4) 손바닥을 비벼 따뜻하게 한 다음 눈가를 꼭꼭 눌러준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5-24
- 김영모과자점 대표, 김영모 제과명장 서초본점을 비롯해 강남지역에 4개의 직영점을 운영하면서 빵으로 연 100억 원 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김영모과자점 대표, 김영모 명장. 그 자신이 ‘특별한 삶을 살았다’고 자평할 정도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시절을 보냈기에, 지금의 성공이 더욱 값지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빵과 함께 영글어 가는 김영모 명장의 꿈에 대해 들어보았다. 고객들의 감사 인사가 큰 힘김영모 명장이 1982년 서초본점을 오픈했을 당시에는 부드러운 곰보빵이나 단팥빵만 선호할 뿐 건강빵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었다. 빵의 종류도 많지 않았고 맛도 단순해 그저 맛있는 빵만 찾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빵 하나를 먹어도 건강을 생각할 정도로 웰빙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김영모 명장은 이런 고객들의 요구를 예측하고 국내에서는 천연발효라는 용어조차 생소할 시기에 천연발효빵과 케이크, 쿠키로 건강빵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1995년부터는 천연발효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시행착오를 수없이 겪으면서 결국 우리 기후와 토양에 맞는 지금의 발효법을 찾게 된 것이다.이런 그의 노력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도 매주 와서 빵을 사 갈 정도로 마니아층까지 존재하게 만들었다. 젊은 시절에는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등을 두드려 주면서, 지금은 동년배 고객들이 악수를 청하면서, “우리 지역에서 이렇게 좋은 빵을 만들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올 때 느끼는 그 뿌듯함이 그에게는 큰 힘이었다. 그에게 빵은 ‘인생’이다2007년 대한민국 제과명장에 이어 기능한국인 제과부문 1호로 선정된 김영모 명장에게 빵은 ‘인생’ 그 자체다. 그는 “빵을 만들면서 사춘기 시절의 처절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었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다. 빵은 나에게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내 인생이기 때문에 사명감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전문기능인을 선정하는 기능한국인으로서, 후배 양성과 적성에 맞는 직업 선택에 대한 청소년 진로교육에도 열심이다. 한 번은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산골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전교생이 20여명 밖에 되지 않는 초등학교라 어린 학생들에게 파티쉐라는 직업이 무엇인지 어떻게 보여줄까를 한참 고민했다. 결국 케이크 만드는 재료를 하나 가득 차에 싣고 가 복장까지 갖추고 케이크를 만든 후 나눠 먹으면서 “이게 바로 파티쉐다”라며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어려운 시절 체험이 참된 봉사로 이어져힘들게 몸으로 체험하면서 삶을 알아 온 김영모 명장은 서초본점을 오픈할 때도 어려운 이들에게 나눔을 실천하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그 해 12월 강남지역제과협회 회원들과 함께 케이크를 들고 고아원을 찾았던 그는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밖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자신이 남몰래 눈물을 수없이 흘렸던 터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위로하려고 다가갔다가 “제발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말라”는 원망을 들었다. 그 여학생은 1년에 한 번 형식적으로 방문해 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상처만 받았던 것이다. 그동안 교회를 통해 알려지지 않게 봉사를 해오던 그가 지속적인 봉사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계기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랑을 가득 실은, 빵을 통한 봉사를 계속해 오고 있다. 강남구에 지점이 있는 것이 계기가 돼 강남구자원봉사센터에서 빵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봉사할 수 있는 인력을 양성하기도 했으며, 현재 서초구 저명인사 봉사단의 일원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요즈음 그를 만나는 이들마다 고생한 사람 같지 않은 편안한 인상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부터 얼굴 표정까지 밝게 변한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잘할 수 있는 능력 키우는 것이 ‘성공’이다!김영모 명장의 꿈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김영모과자점이 ‘천년 기업’으로 남는 것이다. ‘기능인이 돈에 구애 받게 되면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없다’는 소신으로 지금과 같이 직영 원칙을 지키면서 오랜 세월 명성을 이어가고 싶다. 그의 이런 꿈을 두 아들이 함께 이루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보다 빵 만들기에 관심이 더 많았던 둘째 아들 영훈씨는 2003년 프랑스 제과월드컵 개인전 우승, 스위스 국제기능올림픽 한국대표로 제과부문 동메달을 획득하는 등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영국 조기유학파로 영어와 불어에 능한 그는 현재 프랑스에서 프랑스 정부가 최우수 기술인에게 주는 자격증인 MOF(Meilleurs Ouvriers de France)를 준비하고 있다. 외국인 최초로 MOF에 도전할 자격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으며, 그만큼 열정을 쏟고 있는 것이다.큰아들 재훈씨는 영국에서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무슨 전공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갈등이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인 김영모 명장은 아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을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아들이 호텔경영학을 선택했을 때 비로소 “아버지가 원한 것도 바로 그 것이었다”는 말로 격려했을 정도로 자식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해주는 아버지이기도 하다. 영국유학을 마친 재훈씨는 현재 김영모과자점에서 스스로 궂은일부터 시작하는 자세를 보여 아버지로서 흐뭇한 마음이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가 하는 일을 이어가려는 그들이 있어 김영모 명장의 꿈, ‘천년 기업’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장은진 리포터 jkumeu@yahoo.co.kr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5-24
- 거꾸로 가는 인생은 즐거워! ‘세월을 거슬러 오를 수만 있다면’ 이라는 가정법은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다. 하지만 한번 지나간 세월은 돌이킬 수 없는 법. 그렇다고 흘러가는 세월을 몸속에 꼭꼭 쟁여 놓는 것도 현명한 삶은 아니다. 해가 갈수록 나이를 한 살씩 줄여가는 즐거운 인생의 주인공 오복순(81)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부모님이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시켰어. 난 그때 결혼보다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거든. 그래도 부모님이 시키는 일이니 할 수 있나. 아쉽지만 공부를 포기하고 결혼해서 5남매 낳아 잘 키웠지. 5남매 키우고 나서는 또 손자들을 키웠어. 그러다 보니 내 나이가 너무 많은 거야. 그래서 며느리한테 공부가 하고 싶으니 노인대학에 좀 다녀야겠다고 말했어”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빠르다고 했던가. 오 할머니는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에 노인대학에 첫 발을 내딛는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였기에 할머니의 열정은 이십대들의 귀감이 될 정도였다고. 그렇게 노인대학에 다니며 공부를 시작한 할머니는 2006년에 대전노인종합복지관으로 옮겨와 중국어, 영어, 일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할머니의 공부는 교실에서만 하는 공부가 아니다. 배우면 바로 바로 생활에 활용하는 것이 할머니만의 남다른 공부비법이 아닐까 싶다. 십여년 넘게 콜라주를 해 왔다는 할머니가 보여준 콜라주 작품집 구석구석에 써 놓은 주옥같은 명문장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콜라주 작품집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영어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할머니의 영어 발음은 원어민과 마주 앉아도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유창했다. 이 정도로 할머니의 영어 발음에 놀라기에는 너무 이르다. 영어에 이어 중국어, 일어까지 줄줄이 구사하는 할머니의 외국어 실력. 정말 대단하시다. 할머니의 외국어 실력도 놀랍지만 할머니가 구사하는 명문장들도 하나 같이 명언들이다. 또 거기다 폐지를 이용해서 만든 콜라주 작품집에서는 신용활용 글쓰기의 시초가 되었다고 할 만큼 섬세한 예술 감각을 엿볼 수 있었다. 색감대비부터 디자인까지.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은 젊은 시절 양장점을 운영한 경력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양장점을 그만 둔 이후로도 할머니는 며느리의 임신복을 직접 만들어 입히는가 하면 당신이 직접 며느리, 손녀와 함께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고. 이처럼 할머니의 열정도 열정이지만 타고난 예술 감각 또한 전문가 수준이다. 1996년에는 부사동 성광교회 노인학교에서 꼴라주 작품 전시회를 열었고, 2008년 6월에는 자신의 팔순을 기념해 직접 그림을 그려 넣은 ''효녀 심청'' 책 500권을 펴내기도 했다. “나이 들어서 공부 못한다는 소리는 다 핑계야. 나이 먹어도 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난 공부하는 것이 너무 즐거워. 왜 진작 시작하지 못했나 싶어” 좋아서 하는 공부에는 나이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시는 할머니. 몇 년 전에 복지관 동기들과 일본 수학여행을 다녀와서는 일어로 기행문을 쓰기도 하셨다고. 할머니의 하루 일과는 새벽 4시부터 시작된다. 조용숙 리포터 whdydtnr71@naver.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5-22
- 무통치료에 대하여-윈치과 노승철원장 (830호 안양군포의왕과천내일신문 게재) 무통치료에 대하여공포, 근심, 통증과 같은 말들은 오랫동안 치과분야에 따라다닌 단어들입니다. 치과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치과에 한번도 다닌 경험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치과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감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공포는 양질의 치과진료를 받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즉, 치아가 아파도 마취주사, 드릴 등을 연상하면 치과에 가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시고, 진통제 등을 복용하면서 참게 됩니다.결국 통증이 있던 치아는 점점 더 나빠져 빼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러서야 공포감을 무릅쓰고 치과에 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에게 치과에 가서도 심한 통증이나 공포감 없이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확실히 획기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근래에 이르러 무통치료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중 일반인들이 편하게 받을 수 있고, 부작용이 없는 무통치료법이 웃음가스를 이용한 진정요법입니다.웃음가스는 말 그대로 웃는 가스, 즉 이 가스를 마시면 즐거워지고 근심을 잊게 되며 공포감을 잊게 된다는 것인데, 미국 및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성인들의 치료에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웃음 가스를 진료실에 완비하여, 치과진료를 공포와 아픔의 대상이 아닌 기분 좋은 휴식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치과의 경우 처음엔 두려움이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어린이 환자들을 진정시킬 목적으로 주로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성인환자에게도 점차 사용이 늘고 있습니다. 웃음가스는 일반 전신마취제와는 달리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환자의 긴장을 완화시켜주고 두려움을 없애줍니다. 환자는 자신이 받고 있는 치과시술의 내용을 알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아프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향후 치과 치료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마음 속 깊이 묻혀 있는 두려움이나 고통에 관한 기억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괴롭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무엇인가가 한 순간에 별 것이 아닌, 편안한 기억으로 바뀌게 되면 과거의 두려움은 현재의 편안함에 가려 잊혀지게 마련입니다. 웃음가스는 치과진료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는 상황을 없애주고 편안하게 치료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윈치과 노승철원장 문의 : 1544-7528(www.windental.co.kr)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5-22
- 교환학생 Y양, 프린스턴 합격 사례 2006년 교환학생에 참가하였던 Y양이 올해 대학입시에서 당당히 미국 랭킹 1위의 프린스턴대학교에 합격하였다.프린스턴대학교!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있으며 300년 이상의 역사에 노벨상 수상자를 30명 이상 배출한 명문 대학교. 아이비리그 대학들 중에서도 최상급 대학교이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명성과 자부심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클린턴 정부 시절, 미국 경제호황을 이끌어 미국 최고의 재무장관으로 꼽히는 로버트 루빈 전 재무 장관은 하버드대학 출신이다. 그가 하버드를 졸업한 후 프린스턴 대학 입학처장에게 편지를 썼다. “귀 대학은 나를 떨어뜨렸지만 나는 하버드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자신과 같은 인재를 받아들이지 않은 대학 측의 실수를 묻고자 했던 모양인데 프린스턴대학교 입학처장은 이렇게 응대하였다. “우리는 몇몇 우수한 학생의 입학을 거절하여 하버드로 보내 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Y양 유학경험 전무, 교환학생 1년이 전부 말하자면 프린스턴은 인재를 다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일부 인재는 하버드로 흘러 가게 되는 것이라고… 프린스턴은 하버드보다 더 뛰어난 학교이니 당신이 프린스턴에 떨어지고 하버드에 간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답변한 것이다. Y양의 프린스턴대학교 입학은 그렇게 자랑스러운 것이다. Y양은 프린스턴 외에도 코넬, 컬럼비아, 펜실베이니아(유펜), UC버클리 등 11개 명문대학교에 동시합격하였으며 프린스턴 입학 또한 전액 학비를 내는게 아니라 무려 $34,000의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들어가는 것이라 하니 대단한 일이다.제가 자랑하고 싶은 것은 Y양이 1년 짜리 교환학생 출신이란 것이다. Y양이 몇 년에 걸쳐서 미국유학을 했고 흔히 생각하는 명문 보딩스쿨을 다녀서 성공을 이루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서울의 한 중학교를 졸업했을 뿐이다. 그리고 국내 고교에 재학 하던 중 단 1년 교환학생을 다녀 온 것이 유학 이력의 전부였다. 그런 짧은 유학 이력, 국내 학교 졸업 이력으로 이룬 성과다.미국을 가보지 않은 사람, 교환학생을 보내 보지 않은 사람, 유학을 보낸 친척도 없는 사람일수록 유학에 대해서, 또 교환학생의 효과에 대해 부정적이다. 불과 1년으로 무슨 효과가 있겠냐? 돌아오면 국내공부 못하기 때문에 보낼 거면 아예 영 보내야 하지 않겠나? 고 1이면 너무 늦었어. 이렇게 자신없는 생각만 가득하다. 하지만 Y양은 늦었다고 하는 고1 때 떠났으며, 불과 1년으로 효과를 얻었다. 물론 그녀의 성공에는 기본적인 자질, 성취하고자 하는 동기가 큰 요인이 되었겠지만 그녀가 한국학생이 전혀 없는 곳에서 교환학생을 지낸 것이 매우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1년의 교환학생이 미국 명문대학 입학에는 필수적인 영어토론 능력 등 실제 영어능력에 관하여 일취월장을 가져다 주었다. 성취동기 부모역할 중요 세계적인 인재가 되고자 고교진학 때부터 미국 최고 명문을 목표로 하였던 Y양에게 국내 교육과정만으로는 부족함이 있었지만 가정형편이 부유한 것도 아니었던 그녀에게 교환학생은 달디단 샘물과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남보다 뛰어난 인물의 공통적인 특징은 강한 도전 정신이다. 남과 다른 길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는 것이다. 지켜보는 부모는 믿고 또 열심히 응원하여야 할 것이다. Y양의 성공 뒤에는 고1 때, 1년짜리 교환학생을 떠나는 것을 늦었다거나 귀국 후 대책이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가능성을 믿고 응원한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녀의 성공을 원한다면 부모 또한 과감하고 적극적인 도전 정신이 필요하다. 의심하고 주저하고 두려워하며 세월만 흘려 보내면 결국 평범한 자녀로 끝나 버릴 것이다.국내 고교 인맥이 중요하다고 하는 분이 아직도 많다. 그야말로 20세기의 눈으로 21세기 자녀의 미래를 전망하는 일이다. 물론 당신들의 세대에는 고교 인맥이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 주변을 돌아보기 바란다. 그러나 성공한 이들이 지금 21세기 자녀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무엇을 주안점으로 두고 있는지 보시기 바란다. 새로운 미래를 위한 시각 필요 이제 자녀들의 미래는 산업화 시대의 부모님과 같은 삶, 사고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인터넷, 아이폰, 애플사와 삼성, 현대,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반기문, 김연아... 이제 이런 용어는 벌써 세계인의 공통어이다. 이제 자녀들은 더 이상 코리안이 아니라 세계인이다. 전세계의 유대인이 왜 아이비리그에 집착하는 지 주목하여야 한다. 아이비리그 대학은 미국의 인재가 아니라 세계의 인재가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녀의 미래가 어디에서 준비되어야 하는지 미리 알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빛나는 한국학생이 많이 나와야 한국의 미래도 밝다. 중3, 고1 때 떠나는 것이 늦었다는 생각을 하신다거나 이것 저것 두려우시면 Y양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기 바란다. 애임하이교육(주)손재호 이사02-582-7088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5-21
- 과수 1992년 7월 14일 충북 충주시. 오씨는 언니가 지난 밤 집에 들어오지 않아 밤을 뜬눈으로 새다시피 했다. 한여름이라 날씨는 짜증이 절로 날 정도로 무더웠다. 아침녘에 잠깐 잠이 들었던 오씨는 7시쯤 일어나 부랴부랴 세수를 하고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시장에 있는 언니 주점으로 향했다. 7시 40분쯤 도착한 시장 주점 골목은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골목 어귀와 안쪽에는 취객들이 토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골목 가운데쯤 위치한 언니 주점은 문이 약간 열려있었다. 이상한 예감을 느낀 오씨는 허겁지겁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막 내실에 들어선 오씨는 그만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주점 내실에서 하의 벗겨진 채 살해 아침 8시 출근을 하던 유인홍 경장(현재 경위)은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형사계 동료 2명과 함께 살인 현장으로 급파됐다. 골목에는 10여개의 주점들이 서로 마주보고 늘어서 있었다. 살인 현장에 도착하니 신고를 받은 파출소 직원들이 현장을 봉쇄해 놓고 있었다. 주점은 단층 건물로 술을 먹는 내실과 작은 홀, 부엌으로 된 5평정도 크기의 조그만 곳이었다. 내실은 술을 먹다 싸웠는지 방바닥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나 조그만 마호가니 상위에는 술잔과 담배갑 수박 등이 그대로 놓인채 옆으로 시신 옆으로 밀쳐져 있었다. 술잔은 두 개로 하나는 반쯤 찼고, 다른 하나는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방바닥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몇 개 있었고 술상 주변 방바닥에는 양주병 맥주병 등 10여개가 쓰러지거나 세워져 있었다. 방바닥에 여성이 반듯이 누운 채 죽어있었고 하의가 벗겨져 있었다. 유 경장은 현장 훼손을 줄이기 위해 비닐봉지로 신발 째로 감싸신고 바지 아랫단 부분에서 묶었다. 장갑은 공사현장에서 사용하는 두터운 목장갑을 꼈다. 당시는 아직 과학수사팀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해 수사 장비도 거의 없었다. 현재 사용하는 장화 고무장갑(라텍스 장갑) 머리캡 마스크 등은 당시 지급되지 않았다. 충주경찰서도 마찬가지였다. 과학수사 요원도 유 경장밖에 없었다. 유 경장은 형사 2명의 보조를 받아 현장 감식을 시작했다. 유 경장은 1976년에 입사한 16년차 경력자로 년 100구 정도의 변사체를 감식했다. 먼저 현장 곳곳을 촬영했다. 당시 캠코더는 지급되지 않아 일반 사진기로 찍었다. 시신도 여러 각도에서 촬영을 했다. 피해자는 45세의 여성으로 주점 주인이었다. 하의는 벗겨진 채였고, 항문 아래 부분에는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배설물이 약간 보였다. 분말기법을 통한 지문 현출 우선 눈에 띄는 술병 배설물 담배꽁초 등을 증거물로 채취했다. 이어 현장 지문 채취에 들어갔다. 1980년대부터 강력순간접착제를 사용하는 슈퍼 글루 기법이 개발됐으나 유 경장은 흑색분말기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유 경장은 일단 술병과 술상 그리고 방바닥을 중심으로 감식 순서를 잡았다. 술병과 술상에 준비한 흑연가루를 붓에 묻혀 붓을 툭툭 틀듯이 발라나갔다. 손가락에 묻어 있는 지방을 이용한 방법이다. 가루를 너무 많이 묻히면 지문이 떡이 돼 버리므로 소량을 미세하게 묻혀야 했다. 방바닥에서는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에 방바닥에서 음모 1개를 찾았다. 내실 출입문에서도 지문을 감식했다. 여러 개의 다른 지문이 나왔다. 어느 것이 범인의 것인지 특정하기가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술병에서 약간의 쪽 지문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술상을 감식하던 유 경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술상 밑 부분에서 왼손 시지와 중지 지문이 선명하게 나왔다. 범인이 왼손으로 술상을 잡고 옆으로 밀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 경장은 지문채취 리프트를 이용해 지문을 현출했다. 지문 감식이 끝나고 피해자 시신을 국과수로 보냈다. 채취한 지문은 경찰청 증거분석계로 보냈다. 지문 찾았지만 대조 어려워 국과수와 경찰청에서 시신과 증거물 분석결과가 나올 때까지 유 경장은 3일간 하루에 세 차례씩 오전 오후 저녁으로 나누어 현장을 방문했다. 경험에 따르면 현장은 가는 시간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영감을 준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국과수에서 시신분석 결과가 나왔다. 시신 경직도 등으로 분석한 사망시각은 00시30분이었다. 사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목이 졸려 죽은 것이었다. 음부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음모 6개를 발견했는데 음모를 통해 범인의 혈액형이 A형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음부 바깥부분에서 정액흔적을 찾았다. 정액 분석으로 범인의 혈액형이 A형이라는 것이 재차 확인됐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범인을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당시는 DNA가 밝혀지기 전이라 정액이나 음모를 통해서 혈액형 밖에 못 밝힌 것이다. 특이한 것은 피해자의 질 속에서 나온 정액을 통해 감식한 혈액형은 AB형이었다.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확정증거는 지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지문 대조가 쉽지 않았다. 요즘처럼 컴퓨터를 통한 자동검색시스템(AFIS)이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지문 대조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성별 연령대 주소지 등의 범위를 좁혀줘야 하는데 이번 사건의 경우는 범인 신원에 대한 단서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범인이 충주 거주자가 아니라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나이 또한 특정할 증거가 없었다. 주변 탐문을 통해서 목격자를 찾아야 했다. 며칠 동안의 탐문 끝에 주점골목에서 당시 현장을 목격했다는 목격자를 찾았다. 목격자 김씨는 그날 저녁 8시쯤 건너편 주점에서 동료들과 술을 마시던 중 바람 쐬러 나오다 오씨 주점으로 들어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 옆모습을 얼핏 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보통체격이라는 것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간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다른 손님은 없었다는 것도 기억했다. 그러나 그도 범인의 얼굴이나 나이를 짐작하지 못했다. 유 경장은 답답했다.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고 있었다. 15년이 흘러도 지문은 남는다 세월이 흘러 주점골목의 흔적은 사라졌다. 유 경장은 경위로 승진해 수사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사건 이후 15년이 흘렀으나 시간만 나면 골목어귀를 서성였다. 무언가 또 다른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7년 4월 25일 화창한 봄날이었다. 유 경장은 컴퓨터를 통해 지문을 자동으로 식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본청에 갖추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불현 듯 주점 여주인 살해사건이 떠올랐다. 곧바로 사건파일을 들춰 본청에 지문 식별 요청을 했다. 본청 증거분석계는 미제사건 파일에서 지문을 찾아 자동검색시스템에 적용했다. 지문의 주인은 나승요(1960년 생). 사건당시 32세였다. 경찰청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유 경위는 나씨 체포에 나섰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이미 전과 5범의 범죄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살인 후에도 범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절도와 준강도 등으로 또다시 4회에 걸쳐 처벌받았다. 나씨는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였다. 충주경찰서 형사들은 최근 범죄를 저지른 공주와 대전을 대상으로 탐문에 나섰다. 탐문 19일만인 5월14일 형사들은 승복을 입은 나씨를 체포했다. 나씨는 1m70cm 정도의 키에 보통 체구였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모자를 쓰고 있었다. 부인하는 범인 그는 15년 전 사건당일 저녁 주점골목을 배회하다 8시쯤 오씨의 주점에 들어갔다. 다른 손님은 없었다. 내실에 들어가 술을 마시던 나씨는 자정쯤 오씨에게 여관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오씨가 완강히 거부하자 술상을 왼손으로 잡아 밀치고 강제로 오씨를 성폭행하려 했다. 오씨가 발로 노씨를 차는 등 강하게 반항하자 노씨는 한 손으로 오씨의 목을 잡아 넘어뜨린 후 피해자의 반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배위에 올라타고는 주먹으로 머리를 수차례 때려 항거불능으로 만들었다. 바지를 벗고 강간하려는 순간 오씨가 손톱으로 할퀴는 등 거세게 반항했다. 이에 그는 양손으로 오씨의 목을 졸라 사망케 했다. 오씨가 숨지는 과정에서 배설을 하자 놀란 나씨는 바지를 주워 입고 2010-05-20
- [한국의 과학수사] 지문 ③ 충주 주점 여주인 살해 사건 우리의 과학수사는 어느 수준일까.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생긴지 50년이 됐고 각 경찰청에는 과학수사요원으로 활동한지 15년이 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예산 노부부살인 사건처럼 그동안 대조식별이 어려웠던 지문대조가 이제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순식간에 처리되는 수준으로 올랐다. 혈흔 DNA 지문 검시 족윤적 감식 등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시신주변 물체, 매장토양을 통한 사건발생 시간 확인, 프로파일링을 통한 범인행동양식 파악 등도 수준급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개별 사건에서 과학수사가 그늘에 가려진 것도 사실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과학수사를 각 사건을 통해 연재해 독자들로 하여금 수사의 이해를 돕고, 동시에 치안에 대한 불안을 줄이고자 한다. 지문은 개인별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 동일한 지문을 가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지문의 특징은 범인을 특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약과 감식방법 또한 상당한 발전을 이뤄 유리창 테이프 타일 등 어느 곳에서든 지문을 현출해 낼 수 있다. 1992년 7월 14일 충북 충주시. 오씨는 언니가 지난 밤 집에 들어오지 않아 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한여름이라 날씨는 짜증이 절로 날 정도로 무더웠다. 아침녘에 잠깐 잠이 들었던 오씨는 7시쯤 일어나 부랴부랴 세수를 하고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시장에 있는 언니 주점으로 향했다. 7시 40분쯤 도착한 시장 주점 골목은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골목 어귀와 안쪽에는 취객들이 토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골목 가운데쯤 위치한 언니 주점은 문이 약간 열려있었다. 이상한 예감을 느낀 오씨는 허겁지겁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막 내실에 들어선 오씨는 그만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주점내실서 하의 벗겨진 채 살해 아침 8시 출근을 하던 유인홍 경장(현재 경위)은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형사계 동료 2명과 함께 살인 현장으로 급파됐다. 골목에는 10여개의 주점들이 서로 마주보고 늘어서 있었다. 살인 현장에 도착하니 신고를 받은 파출소 직원들이 현장을 봉쇄해 놓고 있었다. 주점은 단층 건물로 술을 먹는 내실과 작은 홀, 부엌으로 된 5평정도 크기의 조그만 곳이었다. 내실은 술을 먹다 싸웠는지 방바닥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나 조그만 마호가니 상위에는 술잔과 담배갑 수박 등이 그대로 놓인채 시신 옆으로 밀쳐져 있었다. 술잔은 두 개로 하나는 반쯤 찼고, 다른 하나는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방바닥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몇 개 있었고 술상 주변 방바닥에는 양주병 맥주병 등 10여개가 쓰러지거나 세워져 있었다. 방바닥에 여성이 반듯이 누운 채 죽어있었고 하의가 벗겨져 있었다. 유 경장은 현장 훼손을 줄이기 위해 비닐봉지로 신발 째로 감싸 신고 바지 아랫단 부분을 묶었다. 장갑은 공사현장에서 사용하는 두터운 목장갑을 꼈다. 당시는 아직 과학수사팀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해 수사 장비도 거의 없었다. 현재 사용하는 장화 고무장갑(라텍스 장갑) 머리캡 마스크 등은 당시 지급되지 않았다. 충주경찰서도 마찬가지였다. 과학수사 요원도 유 경장밖에 없었다. 유 경장은 형사 2명의 보조를 받아 현장 감식을 시작했다. 유 경장은 1976년에 입사한 16년차 경력자로 1년에 100구 정도의 변사체를 감식했다. 먼저 현장 곳곳을 촬영했다. 당시 캠코더는 지급되지 않아 일반 사진기로 찍었다. 시신도 여러 각도에서 촬영을 했다. 피해자는 45세의 여성으로 주점 주인이었다. 하의는 벗겨진 채였고, 항문 아래 부분에는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배설물이 약간 보였다. 분말기법을 통한 지문 현출 우선 눈에 띄는 술병 배설물 담배꽁초 등을 증거물로 채취했다. 이어 현장 지문 채취에 들어갔다. 1980년대부터 강력순간접착제를 사용하는 슈퍼 글루 기법이 개발됐으나 유 경장은 흑색분말기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유 경장은 일단 술병과 술상 그리고 방바닥을 중심으로 감식 순서를 잡았다. 술병과 술상에 준비한 흑연가루를 붓에 묻혀 붓을 툭툭 털듯이 발라나갔다. 손가락에 묻어 있는 지방을 이용한 방법이다. 가루를 너무 많이 묻히면 지문이 ‘떡’이 돼 버리므로 소량을 미세하게 묻혀야 했다. 방바닥에서는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에 방바닥에서 음모 1개를 찾았다. 내실 출입문에서도 지문을 감식했다. 여러 개의 다른 지문이 나왔다. 어느 것이 범인의 것인지 특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술병에서 약간의 쪽 지문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술상을 감식하던 유 경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술상 밑 부분에서 왼손 시지와 중지 지문이 선명하게 나왔다. 범인이 왼손으로 술상을 잡고 옆으로 밀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 경장은 지문채취 리프트를 이용해 지문을 현출했다. 지문 감식이 끝나고 피해자 시신을 국과수로 보냈다. 채취한 지문은 경찰청 증거분석계로 보냈다. 지문 찾았지만 대조 어려워 국과수와 경찰청에서 시신과 증거물 분석결과가 나올 때까지 유 경장은 3일간 하루에 세 차례씩 오전 오후 저녁으로 나누어 현장을 방문했다. 경험에 따르면 현장은 가는 시간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영감을 준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국과수에서 시신분석 결과가 나왔다. 시신 경직도 등으로 분석한 사망시각은 00시30분이었다. 사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목이 졸려 죽은 것이었다. 음부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음모 6개를 발견했는데 음모를 통해 범인의 혈액형이 A형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음부 바깥부분에서 정액흔적을 찾았다. 정액 분석으로 범인의 혈액형이 A형이라는 것이 재차 확인됐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범인을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당시는 DNA가 밝혀지기 전이라 정액이나 음모를 통해서 혈액형 밖에 못 밝힌 것이다. 특이한 것은 피해자의 질 속에서 나온 정액을 통해 감식한 혈액형은 AB형이었다.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확정증거는 지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지문 대조가 쉽지 않았다. 요즘처럼 컴퓨터를 통한 자동검색시스템(AFIS)이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지문 대조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성별 연령대 주소지 등의 범위를 좁혀줘야 하는데 이번 사건의 경우는 범인 신원에 대한 단서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범인이 충주 거주자가 아니라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나이 또한 특정할 증거가 없었다. 주변 탐문을 통해서 목격자를 찾아야 했다. 며칠 동안의 탐문 끝에 주점골목에서 당시 현장을 목격했다는 목격자를 찾았다. 목격자 김씨는 그날 저녁 8시쯤 건너편 주점에서 동료들과 술을 마시던 중 바람 쐬러 나오다 오씨 주점으로 들어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 옆모습을 얼핏 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보통체격이라는 것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간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다른 손님은 없었다는 것도 기억했다. 그러나 그도 범인의 얼굴이나 나이를 짐작하지 못했다. 유 경장은 답답했다.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고 있었다. 15년이 흘러도 지문은 남는다 세월이 흘러 주점골목의 흔적은 사라졌다. 유 경장은 경위로 승진해 수사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사건 이후 15년이 흘렀으나 시간만 나면 골목 어귀를 서성였다. 무언가 또 다른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7년 4월 25일 화창한 봄날이었다. 유 경장은 컴퓨터를 통해 지문을 자동으로 식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본청에 갖추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불현 듯 주점 여주인 살해사건이 떠올랐다. 곧바로 사건파일을 들춰 본청에 지문 식별 요청을 했다. 본청 증거분석계는 미제사건 파일에서 지문을 찾아 자동검색시스템에 적용했다. 지문의 주인은 나승요(1960년 생). 사건 당시 32세였다. 경찰청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유 경위는 나씨 체포에 나섰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이미 전과 5범의 범죄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살인 후에도 범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절도와 준강도 등으로 또다시 4회에 2010-05-20
- 과학수사 충주 주점 여주인 살해 사건 공소시효 2개월 남기고 잡다 1992년 7월 14일 충북 충주시. 오씨는 언니가 지난 밤 집에 들어오지 않아 밤을 뜬눈으로 새다시피 했다. 한여름이라 날씨는 짜증이 절로 날 정도로 무더웠다. 아침녘에 잠깐 잠이 들었던 오씨는 7시쯤 일어나 부랴부랴 세수를 하고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시장에 있는 언니 주점으로 향했다. 7시 40분쯤 도착한 시장 주점 골목은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골목 어귀와 안쪽에는 취객들이 토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골목 가운데쯤 위치한 언니 주점은 문이 약간 열려있었다. 이상한 예감을 느낀 오씨는 허겁지겁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막 내실에 들어선 오씨는 그만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주점 내실에서 하의 벗겨진 채 살해 아침 8시 출근을 하던 유인홍 경장(현재 경위)은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형사계 동료 2명과 함께 살인 현장으로 급파됐다. 골목에는 10여개의 주점들이 서로 마주보고 늘어서 있었다. 살인 현장에 도착하니 신고를 받은 파출소 직원들이 현장을 봉쇄해 놓고 있었다. 주점은 단층 건물로 술을 먹는 내실과 작은 홀, 부엌으로 된 5평정도 크기의 조그만 곳이었다. 내실은 술을 먹다 싸웠는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조그만 마호가니 상위에는 술잔과 재떨이 안주 등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몇 개 있었고 술잔은 두 개로 하나는 비었고, 다른 하나는 반쯤 채워져 있었다. 술상 주변 방바닥에는 맥주병 소주병 등 10여개가 쓰러지거나 세워져 있었다. 방바닥에 여성이 반듯이 누운 채 죽어있었고 하의가 벗겨져 있었다. 유 경장은 현장 훼손을 줄이기 위해 비닐봉지로 신발 째로 감싸신고 바지 아랫단 부분에서 묶었다. 장갑은 공사현장에서 사용하는 두터운 목장갑을 꼈다. 당시는 아직 과학수사팀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해 수사 장비도 거의 없었다. 현재 사용하는 장화 고무장갑(라텍스 장갑) 머리캡 마스크 등은 당시 지급되지 않았다. 충주경찰서도 마찬가지였다. 과학수사 요원도 유 경장밖에 없었다. 유 경장은 형사 2명의 보조를 받아 현장 감식을 시작했다. 유 경장은 1976년에 입사한 16년차 경력자로 년 100구 정도의 변사체를 감식했다. 먼저 현장 곳곳을 촬영했다. 당시 캠코더는 지급되지 않아 일반 사진기로 찍었다. 시신도 여러 각도에서 촬영을 했다. 피해자는 45세의 여성으로 주점 주인이었다. 하의는 벗겨진 채였고, 항문 아래 부분에는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배설물이 약간 보였다. 분말기법을 통한 지문 현출 우선 눈에 띄는 술병 배설물 담배꽁초 등을 증거물로 채취했다. 이어 현장 지문 채취에 들어갔다. 1980년대부터 강력순간접착제를 사용하는 슈퍼 글루 기법이 개발됐으나 유 경장은 흑색분말기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유 경장은 일단 술병과 술상 그리고 방바닥을 중심으로 감식 순서를 잡았다. 술병과 술상에 준비한 흑연가루를 붓에 묻혀 붓을 툭툭 틀듯이 발라나갔다. 손가락에 묻어 있는 지방을 이용한 방법이다. 가루를 너무 많이 묻히면 지문이 떡이 돼 버리므로 소량을 미세하게 묻혀야 했다. 방바닥에서는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에 방바닥에서 음모 1개를 찾았다. 내실 출입문에서도 지문을 감식했다. 여러 개의 다른 지문이 나왔다. 어느 것이 범인의 것인지 특정하기가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술병에서 약간의 쪽 지문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술상을 감식하던 유 경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술상 밑 부분에서 왼손 시지와 중지 지문이 선명하게 나왔다. 범인이 왼손으로 술상을 잡고 옆으로 밀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 경장은 지문채취 리프트를 이용해 지문을 현출했다. 지문 감식이 끝나고 피해자 시신을 국과수로 보냈다. 채취한 지문은 경찰청 증거분석계로 보냈다. 지문 찾았지만 대조 어려워 국과수와 경찰청에서 시신과 증거물 분석결과가 나올 때까지 유 경장은 3일간 하루에 세 차례씩 오전 오후 저녁으로 나누어 현장을 방문했다. 경험에 따르면 현장은 가는 시간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영감을 준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국과수에서 시신분석 결과가 나왔다. 시신 경직도 등으로 분석한 사망시각은 00시30분이었다. 사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목이 졸려 죽은 것이었다. 음부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음모 6개를 발견했는데 음모를 통해 범인의 혈액형이 A형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음부 바깥부분에서 정액흔적을 찾았다. 정액 분석으로 범인의 혈액형이 A형이라는 것이 재차 확인됐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범인을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당시는 DNA가 밝혀지기 전이라 정액이나 음모를 통해서 혈액형 밖에 못 밝힌 것이다. 특이한 것은 피해자의 질 속에서 나온 정액을 통해 감식한 혈액형은 AB형이었다.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확정증거는 지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지문 대조가 쉽지 않았다. 요즘처럼 컴퓨터를 통한 자동검색시스템(AFIS)이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지문 대조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성별 연령대 주소지 등의 범위를 좁혀줘야 하는데 이번 사건의 경우는 범인 신원에 대한 단서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범인이 충주 거주자가 아니라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나이 또한 특정할 증거가 없었다. 주변 탐문을 통해서 목격자를 찾아야 했다. 며칠 동안의 탐문 끝에 주점골목에서 당시 현장을 목격했다는 목격자를 찾았다. 목격자 김씨는 그날 저녁 8시쯤 건너편 주점에서 동료들과 술을 마시던 중 바람 쐬러 나오다 오씨 주점으로 들어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 옆모습을 얼핏 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보통체격이라는 것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간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다른 손님은 없었다는 것도 기억했다. 그러나 그도 범인의 얼굴이나 나이를 짐작하지 못했다. 유 경장은 답답했다.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고 있었다. 15년이 흘러도 지문은 남는다 세월이 흘러 주점골목의 흔적은 사라졌다. 유 경장은 경위로 승진해 수사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사건 이후 15년이 흘렀으나 시간만 나면 골목어귀를 서성였다. 무언가 또 다른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7년 4월 25일 화창한 봄날이었다. 유 경장은 컴퓨터를 통해 지문을 자동으로 식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본청에 갖추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불현 듯 주점 여주인 살해사건이 떠올랐다. 곧바로 사건파일을 들춰 본청에 지문 식별 요청을 했다. 본청 증거분석계는 미제사건 파일에서 지문을 찾아 자동검색시스템에 적용했다. 지문의 주인은 나승요(1960년 생). 사건당시 32세였다. 경찰청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유 경위는 나씨 체포에 나섰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이미 전과 5범의 범죄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살인 후에도 범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절도와 준강도 등으로 또다시 4회에 걸쳐 처벌받았다. 나씨는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였다. 충주경찰서 형사들은 최근 범죄를 저지른 공주와 대전을 대상으로 탐문에 나섰다. 탐문 19일만인 5월14일 형사들은 승복을 입은 나씨를 체포했다. 나씨는 1m70cm 정도의 키에 보통 체구였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모자를 쓰고 있었다. 부인하는 범인 그는 15년 전 사건당일 저녁 주점골목을 배회하다 8시쯤 오씨의 주점에 들어갔다. 다른 손님은 없었다. 내실에 들어가 술을 마시던 나씨는 자정쯤 오씨에게 여관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오씨가 완강히 거부하자 술상을 왼손으로 잡아 밀치고 강제로 오씨를 성폭행하려 했다. 오씨가 발로 노씨를 차는 등 강하게 반항하자 노씨는 한 손으로 오씨의 목을 잡아 넘어뜨린 후 피해자의 반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배위에 올라타고는 주먹으로 머리를 수차례 때려 항거불능으로 만들었다. 바지를 벗고 강간하려는 순간 오씨가 손톱으로 할퀴는 등 거세게 반항했다. 이에 그는 양손으로 오씨의 목을 졸라 사망케 했다. 오씨가 숨지는 과정에서 배설 2010-05-20
- 고장을 알리고 보살피는 시니어 지킴이 ① 문화관광해설사 지자체 문화·유적 알리는 명예로운 봉사직… 50세 이상 시니어 활동 높아 여러 지역의 유적지에 가면 그곳의 역사와 유래, 숨은 사연들을 재미있게 설명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통해 무심코 지나쳤던 표지석 하나에도 세월에 얽힌 사연과 뒷이야기가 있음을 알 게 되고 더불어 우리 선조들의 생활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다. 이렇듯 유적지 관람이 조금 더 재미있고 풍부해 질 수 있는 이유, 문화관광해설사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특히 성남과 용인에는 은퇴 이후 경력을 살리거나 평소 관심 있던 역사공부를 기반으로 해설 활동을 하는 시니어들이 많다. 게다가 이들의 활동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오랜 연륜과 경험이 묻어난 깊이 있는 해설로 관람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또 은퇴 이후 생기는 시간적 공백을 해설을 위한 연구에 쏟을 수 있고 지역에 대한 애정과 따뜻한 시선으로 새로운 유적지를 개발하는 등 이들이 가진 존재적 강점은 누구보다 크다.‘내가 가진 열정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보람된 활동’이라며 자긍심 또한 남다른 시니어 문화관광해설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성남ㆍ용인 시니어, 문화 해설사 참여 높아성남시의 경우 ‘성남문화원’에 소속된 해설사 15명이 교육을 이수하고 해설사로 활동 중이다. 이들의 나이는 평균 50대 후반. 성남문화원의 박미화씨는 “주부, 공무원, 교사 등 은퇴 전 다양한 경력을 가진 중ㆍ장년 이상의 시니어 분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이런 흐름은 용인도 마찬가지. 용인시청 문화 관광부 소속으로 활동 중인 ‘문화관광해설사’ 35명 중 절반이 50대, 60대 이상도 9명에 이른다. 용인시 문화 관광과의 이영선 계장은 “대체로 지역에 대한 관심과 봉사 마인드가 높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스스로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이라고 전했다.이들 시니어 해설가는 대졸 이상의 학력에 은퇴 전 교장, 대기업 임원, 직업 군인 등 화려한 이력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것이 특징.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고장에 대한 이해와 애정, 그리고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은 열망이 활동을 북돋아 주는 가장 큰 동력이라고 말한다.공부하고 진화 하는 문화관광해설사성남문화원의 문화 해설사로 활동 중인 서종철(63)씨는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우연한 계기로 해설사 교육을 받고 활동을 하게 됐다”며 “취미와 적성에 맞는 일이라 재미를 느끼고 지역의 유적지들을 찾아 움직이고 말하고, 또 공부를 하다 보니 몸과 마음에 활력이 생겨 더 없이 좋다”고 소감을 밝혔다. 용인시 문화광광해설사로 활동 중인 홍의달(61)씨도 은퇴 후 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찾다가 활동을 시작한 경우다. “처음 해설활동을 시작할 5년 전만 해도 친구들에게 해설사 한다는 얘기를 못했어요. ‘관광 가이드’한다는 얘기 들을까봐 머뭇거렸었죠. 그런데 지금은 ‘지역을 알리는 해설가 선생님이 바로 나’라고 당당히 이야기 합니다.” 고장의 문화를 소개하는 활동이 이들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면 멈추지 않는 학습열의는 이들의 역량을 키우는 햇빛이다.해설사의 역할은 남녀노소 누구든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 고장에 대한 역사부터 문화, 지리, 속담, 구전 가요 등 해박한 지식이 전제조건이다. 게다가 인터넷 등 각종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울림을 주는, 깊이 있고 풍부한 해설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업그레이드도 필요하다. 때문에 이들은 전문 강사를 초빙해 새로운 지식을 충전하고 규칙적인 학습모임을 통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새로운 유적지를 개발해 UCC나 영상 자료로 만들고 고장을 소개하는 번듯한 안내 책자를 만들기도 한다. 이 같은 사례는 작년 8월, 용인시 문화관광해설사들이 ‘용인의 젖줄 경안천’, ‘테마가 있는 산행길’ 등 직접 촬영하고 편집한 작품으로 용인시 홍보 UCC 대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던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적성 맞고 보람 있는 활동 원하면 도전 해 볼만 각 지역마다 문화와 유적지, 관광지를 개발해 알리고 홍보하는 ‘로컬(local) 관광 사업’이 활발해 지면서 문화관광해설사들의 역할은 앞으로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실제 용인시의 경우 지난 3월부터 ‘시티투어’를 통해 본격적인 지역 관광 사업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용인의 유적지를 체험과 교육 등 2개 코스로 모아 탐방 하면서 문화관광해설사들을 참여 시킨 것도 관심을 받고 있다. 이영선 계장은 “용인은 비교적 볼거리가 많음에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이 많아, 앞으로 유적지를 발굴하고 안내하는 작업에 해설사들의 역할이 많아질 것”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예는 광주시의 경우도 마찬가지. 지역의 유서 깊은 유적지인 남한산성 투어에 문화광광해설사들을 투입해 관광 안내를 진행하고 있는 것.남한산성 문화관광해설사 안규현씨는 “현재 남한산성 문화관광해설사 18명 중 10명 이상이 시니어들이고 이분들의 해설에 관람객들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라고 전했다. 서종철(63) 문화 해설사는 “자신의 적성에 맞고 사람을 만나 활동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라며 “특히 나이든 어른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보람도 크다”고 전했다. 한편, 지역의 문화관광해설사가 되기 위해서는 각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교육을 이수해 자격증을 받으면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권미영 리포터 myk31@paran.com 지역의 문화관광해설사성남문화해설사 성남문화원에서 2006년부터 진행한 ‘성남 문화해설사’ 수업을 이수한 사람들로 현재 15명이 활동 중이다. 올해는 충원 계획이 없고 내년쯤 모집을 새로 할 예정이다. 향토문화에 관심과 봉사 정신을 갖춘 성남시민이면 누구나 신청이 가능하다. 일주일에 두 번, 이론수업과 현장답사를 한다. 수업은 12주 동안 진행되며 ‘성남의 역사와 문화’를 집중적으로 배우게 된다. 수료자에게는 성남문화원의 문화 인증서가 발급되며, 각종 문화 사업에 문화해설사로 활동할 수 있다.문의 031-75 2010-05-17
- 윤장현 며칠후면 광주 5월 항쟁 30주년을 맞게 된다. 30년이라는 세월의 흔적은 경험하지 못했던 세대는 물론이고 경험했던 세대에게도 역사의 뒤안길로 놓아 버릴 수 있는 시점이라면 이번 30주년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과거완료형의 망각의 역사에서 미래진행형의 희망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번 30주년 행사의 내용도 추모식, 학술토론, 문화행사 등으로 규모의 판을 넓혀 놓은 듯 하지만, 정치의 계절을 맞아 망월묘역을 찾는 정치인들의 순례를 보게 될 것이고, 광주시민마저도 얼마나 주체적으로 참여할지도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미래를 향한 비젼과 실천과제를 담보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그동안의 5월 운동, 5월 단체 활동, 시민의 참여와 인식, 전국화, 세계화 등 모든 면에서 진정어린 성찰이 필요한때이다. 다시 말할 것 없이 광주 5월 항쟁은 한국 현대사를 가르는 역사적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부당한 국가폭력에 대항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내 가족과, 공동체를 지켜내고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한 자유와 민주를 향한 처절한 항쟁이 있다. 5월 운동은 10일간의 처절한 항쟁기간 동안 이루어냈던 저항과 참여 그리고 자치공동체의 대동 세상을 이루었던 세계사적으로도 유래가 드문 장엄한 역사가 중심이다. 그러나 5월의 피를 먹고, 가족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온 몸으로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과 군부독재퇴진을 원했던 광주시민은 물론 아픈 역사에 함께하지 못했던 전국의 청년, 학생, 지식인, 종교인, 노동자들까지 함께해서 이루어 낸 민주화 운동이 바로 전국화된 5월 운동이었다. 이는 결국 87년 6월 항쟁을 정점으로 군부통치를 종식시키고 직선제 개헌을 이룩해 낸 장엄한 시민혁명으로 꽃피워진 것이다. 92년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5.18민주화 운동으로 공식화 되면서 광주 5월 항쟁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고 보상과 배상 그리고 망월동 성역화와 국가기념일 재정 등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해왔던 요구들이 수용된 것이다. 광주시민이 아니 전 국민이 참여했던 민주화의 대장정이 승리로 끝난 것이다. 그런데 오늘 지나놓고 보니 제1의 과제였던 진상규명을 명백히 해내지 못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보상금을 주고받는 통과의례로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때 보상과 배상을 거부하거나 미루고 진상규명을 끝까지 관철해냈었다면 오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92년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광주는 정치적으로는 복권되었다. 이후 5월 운동은 추모사업과 정신계승 사업으로 이어진다. 이때부터 5월 정신의 세계화가 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우리의 역사와 똑같았던 그들에게 5월의 가치와 경험을 나눈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절대빈곤을 극복한 한국의 민주화 경험을 함께 나누고 연대하고 지원하는 5월의 세계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아픔이 자리하고 있다. 추모 받아야 할 5월 당사자들이 추모하는 중심이 되고 정신계승하겠다는 주체가 되면서 시민들은 객체로 파편화되고 그저 5월 행사의 참여자로 위상이 왜소화 된 것이다. 또한 지역의 정치가 5월 정신이 꽃피워지는 민주, 인권, 평화의 지역공동체를 이루어내지 못한 부끄러운 도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5월 단체가 주관하는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만 머문다면 잊혀져가는 5월이 될 위험성이 크다. 5월 단체만이 안고 있으면 시민이 설 땅이 없어지고 광주 시민만이 안고 있으면 전국화는 이룰 수 없다. 대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추모 사업은 5월 단체가, 정신계승은 전문가와 시민들의 몫으로 돌려져야 할 때이다. 이제 항쟁의 도시다운 대동 세상을 광주에서 이루어 낼 때이다. 시민들은 5월 단체들의 새로운 변화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원한 청춘의 도시 광주가 한국사회의 짐이 되지 않고 21세기 우리들이 희망하는 세상 곧 소외된 자와 약자가 배려 받고 인권과 평화가 살아 숨쉬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될 때 광주는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30주년을 맞아 광주로부터 저항의 몸짓 에서 참여와 창조의 패러다임으로 대전환이 필요한 이유이다. 광주가 한국사회 고립된 섬으로 남겨지는 한 한국사회는 역사적인 채무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해야 할 때이다. 기념은 잊지 않고 기억하기위한 산자의몫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