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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문창재) 발해의 실체를 만난 여행 (칼럼) ^내 마음 속에 발해(渤海)란 나라는 신기루, 또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실체가 없었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우리 역사의 한 가지 자랑, 고구려가 패망한 뒤 그 씩씩한 기상을 계승하기 위하여 그 땅에서 일어난 나라, 이 정도의 상식이 고작이었다. ^한 가수가 ‘발해를 꿈꾸며’를 불렀을 때도, 호기심 많은 젊은이들이 뗏목을 만들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가는 뱃길을 탐사하다가 불행을 당했을 때도, 대조영(大祚榮)을 영웅화한 TV 연속극을 보고 난 뒤에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나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차례 만주 땅을 여행하면서도 그랬다. 조선족 자치주 연변이 발해의 중심 무대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여행의 목적인 백두산이나 고구려 유적지에만 관심이 쏠려, 발해는 귓가를 스쳐가 버렸다. 경유지에서 멀지 않다는 유적을 찾아가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블라디보스토크 등산여행 일정이 잡혀 갑자기 발해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였다. 목적지인 팔라자산과 그 주변에 발해성터 같은 유적들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제 비로소 발해의 실체를 만나게 되는구나 싶어서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손에 잡힌 발해역사서 몇 권을 통하여 개략적인 지식을 얻은 뒤로, 너무도 무심했던 지난날이 갑자기 부끄러웠다. 부끄럽기는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라 했다. 역사 연구를 전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그랬다니 문외한은 좀 낫구나 하고 위안을 삼았다. ^지난날 우리가 그 역사의 무대를 가볼 수 없는 세월이 너무 길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해사를 전공하는 사람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고, 역사의 기록이 멸실되어 당서(唐書) 같은 중국이나 일본 쪽 기록에 나오는 편린으로 밖에는 그 면모를 알 수가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싶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라의 것을 발해 것으로 잘못 안 일본 논문을 사실로 알고, 입시 문제로까지 출제했다는 과오는 너무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등산여행 일정은 무리였다. 동해에서 배를 타고 20시간을 달려가 한 나절 산을 오르고, 한 나절 시내관광 후 다시 배를 타고 돌아오는 3박4일 일정으로는 발해유적을 제대로 만날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40km 떨어진 팔라자산 등산과 그 산 정상에서 비라본 비단산 전망이 모두였다. 국내 등산객들을 위한 코스개발 답사일정이어서 내 관심사를 고집할 수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 속에 지펴진 발해 사랑의 불씨는 너무 뜨겁다. 팔라자산은 아직 눈이 깊어 성터의 흔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양쪽 가이드 아무도 그것에 대한 정보도 관심도 없어 오리무중처럼 혼자 헤맸다. ^그러나 정상에서 바라본 비단산 모습은 내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밭을 두 시간 넘게 허위허위 올라 당도한 산꼭대기에서 현지인 가이드는 “저것이 비단산”이라고 자랑스레 손가락 총을 쏘았다. ^그녀의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보아 너무도 유명한 산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내 가슴을 뛰게 한 것은 해발 1276m 팔라자산보다 더 높다는 그 산의 위용이 아니다. ‘비단산’이라는 그 이름이다. 현지인들이 ‘피단’산이라 부르는 이름의 어원은 우리말 ‘비단’이라는 게 관련 여행사의 설명이었다. 발해시대부터 비단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산이라는 뜻으로 불리어 왔다는 것이다. ^그 산은 또한 ‘발해봉’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발해의 성터와 절터 같은 유적이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고, 꼭대기에는 피라미드 모양의 천제단이 있어 그렇게도 부른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현지인들이 신성한 산으로 숭배하고 있다는 설명에서 태백산과 마니산 이미지가 떠올랐다. 눈 앞에 그 산을 보고도 오르지 못 한 아쉬움이 컸다. ^연해주 지역에서는 지금 발해유적 발굴사업이 한창이다. 러시아가 자기네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로 시작한 사업에 우리가 끼어든 공동사업이다. 지난해에는 연해주 중부 내륙지방에서 고구려 식 온돌 유구가 분명한 평지성이 발굴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440km 거리인 우수리강 상류지역에서도 발해성터가 발견되었다. ^발해는 한반도 면적의 6배에 달하는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강역으로 가졌던 나라다. 그러나 지금 그 땅을 지배하는 나라들에 의하여 육신이 찢어지는 비운의 나라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은 라는 저서를 통해 고려가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약한 나라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래서 역사의 미아가 되었다는 성찰이다. ^이제라도 발해를 되찾지 않으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들 낯이 없게 되고 말겠다는 자각을 한 것만으로도 짧은 등산여정은 헛되지 않았다. ( 문 창 재 논설고문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26
- 혈액순환검사로 예방하고 꾸준한 운동으로 관리하자 세월의 흔적은 혈관도 예외는 아니다. 노화속도가 빨라지는 중년 이후 혈관의 상태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개인의 체질이나 유전적인 요인이 노화의 근본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건강한 혈관 환경을 위해선 누구에게나 균형 잡힌 생활습관이 중요하다. 정기적인 건강검진처럼 혈액순환검사를 통해서도 혈관의 현재 모습을 진단할 수 있다는데 혈관건강을 위한 조건들을 살펴봤다. 노화는 유전적인 요소, 호르몬의 변화, 흡연 등 여러 요인으로 작용 우리 몸속 혈관의 길이는 무려 12만 5000km. 지구를 몇 바퀴 감을 수 있을 정도의 긴 길이로 이 중 어느 한곳이라도 막힌다면 크고 작은 탈이 생길 거라는 건 누구나 예측하는 바다. 혈관의 질환으로 혈액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서 손발 저림부터 수족냉증, 근육마비, 신체의 기능저하 등과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증상의 원인을 모두 혈액순환이 안돼서 그런 것이라고 단정 지어선 안된다”고 미래외과 김용귀 원장은 강조한다. 시간·경제적인 손실을 막기 위해서라도 정확한 원인규명이 필요하다는 것. 특히 “양쪽의 손발 저림이나 수족냉증은 개인의 체질적인 특성 때문인 경우도 있기 때문에 좌우 팔·다리를 기준으로 운동능력에 차이가 난다거나 유독 한쪽만 체온의 변화가 심할 때 꼭 혈액순환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김 원장은 덧붙였다. 혈관의 노화는 유전적 성향에 따른 차이가 크고 이상이 생길 수 있는 기회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심혈관질환 등과 같은 가족력이 있는 경우라면 그 이전부터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흡연이나 운동부족 등 혈관질환의 위험인자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50대 이후에는 남성보다는 여성이 혈관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다. 여성의 경우 폐경기 전후로 노화 방지 호르몬은 급격히 감소하는 반면 인슐린, 코르티솔 등 노화 촉진 호르몬이 증가, 혈관건강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간단한 혈액순환검사로 혈관의 흐름을 한눈에~ 평소 환자의 증상과 경력을 듣고 문진하면서 직접 혈관의 여러 부위를 만져보는 이학적 검사만으로도 혈액순환에 대한 여러 현상이 관찰된다. 가장 유용하고 중요한 혈관초음파 검사는 혈관 자체의 모양은 물론 혈액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좌우측의 혈액순환비교를 통해서 한쪽으로 나타나는 증상과의 연관성도 찾을 수 있고, 상지와 하지를 비교해봄으로써 하지혈액순환의 개인별 상대평가도 가능하다. 앞서 본 기본적인 검사에서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차거나 팔다리가 붓는 증상이 있는 경우엔 세부적인 검사로 들어간다. CT컴퓨터단층촬영이나 MR자기공명영상장치 등 혈관촬영이 이뤄지는데 전체 혈관의 연결된 실제 모형을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김 원장은 “간편하면서도 짧은 시간에 전문의의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다는 것이 혈액순환검사의 장점”이라면서 “평소 건강을 위해 건강검진을 받듯 혈액순환검사 역시 생애전환기인 40세 전후에 받을 것”을 권했다. 평소 자신의 혈액순환 상태를 관찰하고 그에 맞는 운동처방이나 향후 혈액 건강을 위한 관리법 등에 대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운동은 혈관건강은 물론 혈관의 이상 유무 파악에도 도움 돼 혈관 건강을 지키기 위한 최우선은 역시 흡연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다. 흡연은 동맥혈관을 좁아지게 하고 혈액의 점성을 높여서 혈액의 흐름을 방해한다. 담배 연기에 많은 일산화탄소가 혈액 내에서 헤모글로빈 대신 산소와 결합해 세포의 기능을 떨어뜨리고 활성산소는 혈관 내벽을 손상, 동맥경화증의 위험을 높이고 노화속도도 빠르게 만든다. 이와 더불어 운동부족은 혈관의 탄성을 떨어뜨리고 혈관질환의 위험인자인 과다 비만을 가져온다. 혈관질환의 위험인자가 결국 운동부족에서 온다고 할 만큼 평소 자신에 맞는 적절한 운동은 매우 중요하다. 과한 운동보다는 하루 30분 이상의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 운동은 혈액순환을 활발하게 만들면서 혈관의 운동성을 증가, 혈관을 건강하게 만든다. 현재 본인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전문의의 진단이 필요한 경우, 즉 몸의 반응이 예전과 다르다거나 다른 사람에 비해 유달리 빨리 지치는 등의 자각증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달거나 기름진 음식은 절제하면서 혈관 벽에 이끼가 끼지 않게 하고 혈액이 뭉치지 않게 하는 채소류 및 해조류 등을 충분히 섭취한다. 등푸른 생선에 들어있는 오메가-3 지방산은 혈중 중성지방을 낮추고 혈전이 생기는 것을 예방해준다. 스트레스를 피하고 되도록 즐거운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일도 현대인이 갖춰야 할 혈관 건강 지키기 항목이다. 도움말 미래외과 김용귀 원장오세중 리포터 sejoong71@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26
- 국가도, 단체도 아닌 어정쩡한 상대 한국에게 북한은 외교적으로 어떤 관계일까. 국가 대 국가도 아니면서 상대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현재 남북한의 관계다. 1972년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서명하고 온 ‘7·4 남북공동성명’ 합의문에는 소속도, 직함도 없이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라고만 돼 있다. 왜 그랬을까.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명과 ‘대통령 박정희’, ‘주석 김일성’이라는 국가수반의 이름을 감히 쓸 수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오른쪽 사진 참조). 세월이 20여년 흘러 1991년. 남북한 모두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됐다. 그 이전에는 ‘할슈타인 원칙(Hallstein Dontrine:서독이 유일한 합법국가이므로 동독을 승인하는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겠다는 W.할슈타인 당시 서독 외무장관의 논리)’에 따라 남북한은 서로 국가로서 상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유엔 회원국 자격부여도 동의하지 않았다. 남파간첩과 북파공작원을 보내 상대 지도자의 암살을 노리던 시절에 유엔 동시가입 목소리가 설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냉전해체의 흐름 속에 ‘북방정책’이 추진되고 공산권의 본산, 소련과 국교를 맺는 단계까지 이르러 유엔 동시가입이 성사됐다. 그해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도 채택됐다. 하지만 조약 성격을 갖는 이 합의서는 우리 국회에서 비준을 받지 않았다. 여전히 국가로서 북한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방정책’의 목표가 북한을 양지로 끌어내기보다는 우방인 동구권과 중국, 소련을 우리쪽으로 끌어당겨 북한을 포위시키자는 계산이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 다만 이 때 남북한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양측이 최초로 합의한 것은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다시 20여년이 흐른 2010년 현재. 지금도 당국간 남북대화를 할 때 우리는 북한을 북한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연설과 대화에서 ‘북측’ 또는 ‘귀측’이라고 돌려 말한다. 일반인이 북한에 갈 때는 여권이 아닌 방북허가서를 내고 ‘출입경사무소(또는 세관·출입국·검역의 준말인 CIQ라고 부르기도 한다)’를 거쳐 ‘출경’을 한다. 방북은 ‘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아올 때 역시 입국이 아닌 ‘입경’이다. 북한 사람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북한 국민? 인민? 우리 정부가 내놓은 표현은 ‘북한 주민’이다. 통일부가 발간한 남북교류협력법 해설집에 따르면 ‘헌법에 의거,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 모두가 우리 영토이므로 북한 국민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치 않아 주민으로 부른다’고 돼 있다. 탈북자를 부르는 용어의 변천은 한국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과 직접 맞닿아 있다. 북한을 ‘북괴’라 부르던 시절 ‘귀순용사’였던 그들은 90년대를 거치며 그 숫자가 늘어나자 ‘탈북자’로 일반화됐다. 하지만 그 용어가 한국 정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지적에 따라 통일부는 공모까지 거쳐 ‘새터민’이라는 호칭을 지어줬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서는 그마저도 마뜩치 않았는지 ‘북한이탈주민’이라는 건조한 호칭이 쓰이고 있다.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24
- 신문로(김이경) 담배를 위한 변명 “쿨럭 쿨럭 캑캑 쿨럭!”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시작입니다. 8시 30분, 계단에서 들려오는 해소 기침소리와 함께 아침의 상쾌함은 날아가고 일상의 고단함이 밀려듭니다. 기침의 주인공은 위층에 사는 어르신으로, 기침소리는 이분이 담배를 피운다는 신호입니다. 골초인 이 양반은 집안에선 흡연을 금지 당했는지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데, 그 바람에 아래위층 이웃들이 곤욕입니다. 담배연기보다 더 괴로운 것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기침소리와 침 뱉는 소리. 그 소리가 두어 시간 간격으로 종일 이어지니 어지간한 비위로는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이분의 흡연이 문제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석 달 전 제가 사는 곳이 금연아파트로 지정되면서부터입니다. 원래 아파트 뒤편 화단과 놀이터 옆 등나무 아래서 담배를 피우던 위층 어르신은 그곳에 금연 스티커가 붙자 당신 집 아래층 계단을 흡연 장소로 택한 것입니다. 물론 그분에게 규정을 내세워 흡연을 당장 그만두라고 요구할 수도 있고 벌금을 부과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웃 간에 처벌 규정을 내세워 시비를 가린다면 비록 담배연기가 사라진다 해도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얼마 전 금연운동단체들은 담배 제조와 매매를 금지하는 공개 청원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담배는 독극물 마약이니 정부가 나서서 금지하고 특단의 관리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담배가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고 간접흡연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담배가 독극물이라거나 금연=선, 흡연=악이라는 이분법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때론 독이 약으로 쓰이듯, 세상일이란 그리 단순하게 일도양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광해군 무렵입니다. 그 뒤 담배는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즐기는 기호품이 되었는데, 이런 사정은 정조 때 문장가 이옥이 남긴 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담배의 경전’이란 뜻의 은 담배 재배방법부터 올바른 흡연습관에 이르기까지 담배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책입니다. 문학적인 소품문을 특히 잘 썼던 이옥은 그 때문에 문체반정을 내세운 정조의 미움을 사서, 빼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답답한 그 세월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이란 책을 쓸 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애연가였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를 문책한 정조 역시 신하들에게 담배의 이점을 역설하는 ‘남령초(담배) 책문’을 내릴 정도로 소문난 골초였다는 사실입니다. 정조는 학문과 나랏일에 몰두하느라 가슴이 막히는 병을 얻었는데 담배 덕분에 이 고질병에서 해방되었다며 담배를 상찬합니다. 그에 비해 이옥은 좀더 문학적입니다. 담배 피우기 좋은 때를 열거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산골짜기 쓸쓸한 주막에 노파가 밥을 파는데 벌레와 모레를 섞어 찐 듯하다. 반찬은 짜고 비리며 김치는 시어 터졌다. 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참자니 먹은 것이 위에 얹혀 내려가지 않는다. 수저를 놓자마자 바로 한 대를 피우니 생강과 계피를 먹은 듯하다.” 예전에 식후불연초면 삼대고자 운운하며 밥숟갈을 놓기 무섭게 담배를 피우던 친구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일 듯합니다. 하지만 그 친구들 중에도 이제는 담배를 피우는 이가 드뭅니다. 전 국가적으로 진행되는 금연운동의 흐름에 자의반 타의반 동참한 것이지요. 덕분에 온몸에서 담배 냄새를 풍기는 일도 사라지고 건강도 챙기게 되었으니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뜻이라 해도 정부가 나서서 금지하고 강제하는 일은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 옳습니다. 금지는 억압을 부르고 억압은 저항을 낳으며 결국 다툼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강제로 담배를 끊는 세상보다 타인을 배려해 흡연을 삼가는 세상이 더 살기 좋은 세상임은 분명할 터. 그러니 애연가는 다른 이들을 위해 금연하고 금연가는 애연가를 격려하면 어떨까요. 그럼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2010-03-04
- 영서권의 흥겨운 농악소리 한번 들어보실래요? 이번 설은 일요일과 겹쳐 다른 명절보다 짧았다. 교통대란이 일어날게 뻔한데도 고향을 찾는 이들로 고속도로는 대만원이었다.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이기에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고유명절의 전통을 지키는 것. 우리의 전통이다. 우리 것에는 얼이 있다. 옛 가락이 그러하고 한옥이 그러하다. 심지어는 한복만 입어도 옛 조상들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하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전통 명륜동의 한 건물.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니 장구며 꽹과리 소리가 흥겹다. 이중문을 열고 들어가니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대학생들이 사물놀이에 한창이다. 우리 전통을 꿋꿋이 지켜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원주매지농악보존회'' ''매지농악''은 원주권 내 대학교의 풍물동아리 학생들이 찾아와 배울 만큼 유명했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농촌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농악을 전수 시켜줄 수 있는 기능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게 되자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풍물 동아리 대학생들과 매지리 동네어르신들이 주축이 되어 ''원주매지농악보존회''를 만들었다. 그것이 1994년도의 일이다. 그 당시 대학생이던 청년 5명이 지금까지 ''매지농악''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 ● 강원 무형문화재 제 18호 지정, 그러나 재정적 지원은··· 아버지에 이어 ''매지농악''의 단장을 맡고 있는 강영구(41)씨. 그는 매지리에서 나고 매지리에서 자란 매지인이다. 그렇게 매지리에서 자란 탓에 늘 농악을 접할 수 있었다. 태평소를 불던 할아버지와 꽹과리를 치던 아버지에 이어 강영구씨도 태평소를 불고 있다. ''원주매지농악보존회''는 영서권의 대표 농악인 ''매지농악''을 전통적 보전 가치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 결과 2005년에는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농악장원인 국무총리상을 받았는가하면 2007년에는 KBS 국악대경연에서 장원을 받았다. 또한 영서권 내에서는 유일하게 2006년 1월에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 18호에 지정되었다. 그런 화려한 명성과 달리 재정적 지원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유일하게 들어오는 정기적인 수입은 강원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후 매달 들어오는 60만 원이 전부. 15명의 단원들이 생활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강원도 유일의 전통농악의 맥을 잇는 그들이지만 지역 내에서의 재정적 지원은 그야말로 푸대접 수준이다. ● 전통을 잇는 또 다른 대안 ''아울'' 모든 것을 ''아우르다''라는 뜻으로 만든 ''아울''. ''매지농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원주매지농악보존회''의 기존 멤버들이 젊은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고자 만든 ''원주매지농악보존회''내 작은 단체다. ''원주매지농악보존회'' 초창기 멤버인 성남진(39)씨는 "''원주매지농악보존회''가 ''매지농악''에 국한돼 있다면 ''아울''은 사물놀이 뿐 아니라 퓨전 국악과 같은 국악 전반을 다루고 있다"며 "젊은 학생들이 좀 더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간구한 나름의 대안이다"라고 말한다. 현재 ''원주매지농악보존회''는 영서고등학교와 전수협약을 맺어 강연을 하며 10년째 후배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현재 ''원주매지농악보존회''를 중추적으로 이끌어 가는 젊은 학생들의 절반이 영서고등학교 출신일 정도니 절반은 성공한 셈. 이 학생들 대부분이 ''아울''에서 활동을 하며 전통을 잇고 있다. 강영구 단장은 "처음 뜻을 같이 해 15년을 버텨온 저희들은 내성이 생겨 괜찮다"라며 "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이 저희 같이 배고픈 시절을 보내기엔 자란 환경이 너무 달라 무리가 있다"라며 안타까워한다. 그래도 그런 힘겨운 상황에서도 묵묵히 후배 양성을 위해 가르치고 또 가르친다. 성남진씨는 "우리에게 배워서 대학을 간 학생들 중 7~8명 정도가 다시 원주에 정착해 우리와 뜻을 같이 하고 있다"며 희망을 말한다. ● 흥겨운 농악소리와 함께 소원 빌어 볼까요? 올해로 18회째를 맞이하는 원주 정월대보름맞이 ''회촌 달맞이 축제''. 2월 28일 일요일에 열리는 이번 행사는 매년 그러하듯 밤 10시에 회촌 달맞이광장에서 열린다. 매년 열리는 이 ''달맞이축제''를 보러 3~4000명이 회촌을 찾아올 정도니 그 규모를 알만하다. 이 행사에서 방문객들과 함께 어우러져 흥을 돋우고 축제를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매지농악보존회'' 회원들은 이번 축제를 위해 하루 3~4시간씩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 중이다. 풋풋한 대학생에서 이젠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원주매지농악보존회'' 청년들. 훗날 우리의 뿌리를 배우려는 후세들을 위해 묵묵히 전통을 지켜나간다는 그들이 있어 원주가 더욱 든든하다. 문의: 761-7228 이지현 리포터 1052jee@naver.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2-22
- “인연은 적극적으로 찾아서 만드는 것” 바야흐로 봄, 결혼시즌이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결혼 소식이 결혼적령기 선남선녀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하지만 인연은 결코 저절로 다가오지 않는 법, 부지런히 적극적으로 찾아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신한은행 분당 백궁지점장에서 커플매니저로 변신해 이목을 끌고 있는 (주)좋은만남선우 방배센터 박영동 대표. 좋은 배필을 만나고 싶은 이들을 위한 박 대표의 조언을 들어보았다. 좋은 배필 찾아 주는 것에 큰 보람 느껴은행 재직 시절 주로 VIP고객 관리를 담당했던 박 대표는 자녀혼사 문제로 인한 고객들의 고민을 우연히 접하게 됐다. 아무리 부와 명예를 가졌어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바로 자녀결혼 문제였던 것이다. 25년간 은행에 근무하면서 쌓아온 인맥을 바탕으로, 비슷한 조건을 가진 집안끼리 연결해봤더니 30여 쌍이 성혼에 이를 정도로 잘 맺어졌다. 이렇게 ‘좋은 배필을 찾아 주는 것’에서 보람을 느낀 박 대표는 결혼상담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2007년 사윗감을 공개 구혼해 화제를 모았던 1000억대 자산가도 박 대표의 고객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난 부부는 지금 아들 낳고 잘 살고 있다는 후문이다.여성 커플매니저들이 대부분이라 남자회원들 중에는 자신의 속내를 맘 편히 털어 놓고 싶어 박 대표를 찾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좋은 프로필을 갖추고도 혼기를 놓쳐버린 한 남성회원은 박 대표에게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 후, 세세한 코치를 받아 현재 성혼을 앞두고 있다. 부모들도 박 대표를 신뢰하기는 마찬가지. 한 번 찾아오면 1시간 이상 편하게 상담이 이어져 회원 당사자나 집안에 대해 충분한 파악이 가능하다. 이 점이 바로 박 대표가 자신 있게 회원을 소개할 수 있고 아울러 성혼율도 높이게 되는 비결이다.박 대표는 “은행에 근무할 때는 예금이나 대출, 다양한 재테크 상품 등을 통해 고객의 자산을 불려주는 데 가치를 두었다면 지금은 젊은이들에게 좋은 배필을 소개해 잘 살게 도와주는 데서 더 큰 가치를 찾고 있다. 그만큼 보람도 크다”고 밝혔다. 성혼율 높이는 ‘결혼정보회사 효과’모든 일에는 때가 있듯이 결혼에도 때가 있다. 또한 그 때에는 흐름이 있기 마련이다. 결혼은 너무 중요하고 어렵다고만 여겨 쉽게 결정을 못하고 있으면 세월만 간다. 이전과는 달리 결혼 상담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그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요즈음 하나의 트렌드다. 커플매니저들은 상대를 소개시켜 주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팅 할 때?대화법부터 시작해 다양한 결혼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따라서 결혼정보회사를 찾게 되면 결혼에 대한 마음자세부터 바뀌게 된다. (주)좋은만남선우 방배센터 회원들 중 30~40% 정도는 다른 곳에서 짝을 찾아 결혼한다며 감사의 전화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박 대표는 ‘결혼정보회사 효과’라고 부른다. 그동안 결혼보다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적극적이지 못했던 회원들. 이들이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면서 주변 소개도 늘고,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게 된 덕분인 것이다. 박 대표는 “부지런히 적극적으로 찾아야 인연을 만날 수 있다. 진정성을 갖고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했다. 밝은 모습 사진부터 준비해야박 대표가 권하는 결혼 적령기 남녀의 첫 번째 준비요소는 바로 사진이다. 사진관에서 밝은 모습으로 잘 찍어 우선 부모님께 드리며?좋은 사람을 찾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좋다. 또한 여성의 경우는 오빠에게, 남성이라면 여동생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최고의 매칭 매니저는 바로 가족인 것이다. 그러자면 사진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정작 사진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만약 자존심 때문에 결혼정보회사를 찾기 싫다면 역사탐방동호회나 사진동호회 등의 모임에 가입하는 것도?좋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인연을 만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 각종 학원도 포함되며 유학이나 해외연수를 위해 같은 유학원을 찾았다가 친해지기도 한다. 박 대표는 “배우고 즐길 수 있는 곳에 가입하라. 그 곳에 인연이 있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문의 (02)523-2111장은진 리포터 jkumeu@yahoo.co.kr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23
- [섬마을 선생님]경남 사량중학교 임재욱 선생님 섬은 아련한 동경이다. 낭만과 신화가 가득 쟁여져 있는 곳이다. 섬마을 선생님은 왠지 달콤한 로맨스와 깊은 사연을 지닌 주인공 일 것만 같다. 그래서 섬마을 유람에 나섰다. 섬마을 선생님들의 훈훈한 휴먼스토리와 낙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지면에 담아낼 작정이다. 서해의 백령·연평군도에서 남해 한려수도를 돌아 동해의 울릉도까지…. 옷깃을 파고드는 바닷바람이 여간 칼칼한 게 아니다. 밉살스런 꽃샘추위는 남도의 섬까지 앙칼진 손을 뻗친다. 유난스러웠던 겨울추위에 이어 꽃샘추위마저 지독스럽게 매섭다. 지금이 3월 중순 맞아? 문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산모퉁이를 돌다가 그만 아! 하고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우중충한 겨울옷을 벗지 못한 산비탈 구석에서 한 아름 화사한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분홍 옷으로 곱게 치장한 진달래들의 화사한 봄나들이다. 이 지독한 꽃샘추위 속에 야들야들 속이 훤히 비치는 분홍 블라우스 하나만 달랑 걸친 채 외출을 나선 것이다. 어떤 가지는 만개한 꽃송이들을 이고 있고, 또 어떤 가지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진분홍 꽃망울들을 쳐들고 있다. 바람이라도 훅 강하게 불면 툭하고 찢어질 것만 같다. 저 연약한 꽃잎들이 어쩌면 저리도 당당하게 무시무시한 동장군의 위세에 맞설 수 있을까. 하긴 두터운 동토의 땅을 뚫고 새로운 계절을 여는 것도 여리디 여린 새순들이다. 전남 통영군 사량도 옥녀봉 자락엔 봄의 화신이 와락 달려오고 있었다. 우뚝한 옥녀봉 자락에 섬마을 치고는 제법 규모 있는 학교 하나가 들어서 있다. 2층짜리 교사 현관 입구엔 ‘학생이 행복한 학교’라는 입간판이 걸려 있다. 교정엔 ‘성실, 협동, 창조’란 돌비석이 들어서 있다. 전교생이 28명뿐인 사량중학교다. 금잔디가 곱게 깔려 있는 운동장에서 여섯 명의 학생들이 축구 연습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모두 빨강과 검정색이 섞인 천 바탕에 어깨 위로 흰 줄이 그어진 유니폼을 입고 있다. 남학생이 네 명, 여학생은 두 명이다. 남학생 한 명이 문지기를 하고, 나머지 다섯 명은 키킹 연습을 한다. 흰색 트레이닝 복 차림의 선생님이 볼을 배급하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한 명씩 달려 나와 골문을 향해 볼을 찬다. 사량중학교 덕성부장(생활부장)을 맡고 있는 체육담당 임재욱(44) 선생님이 3학년 체육수업을 하고 있다. 흔히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표현은 아마도 저 선생님처럼 순박하고 착해 보이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수업 분위기가 참 편안하다. 아이들과 뚝 떨어져 홀로 서 있는 어려운 선생님이 아니다. 학생들과 친구처럼 함께 뛰고, 스스럼없이 말을 주고받고, 서로 장난까지 친다. 선생님은 사량도 출신이다. 중학시절 자신이 뛰놀던 교정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들은 선생님의 고향 후배이자 모교 후배들이다. 사량도는 상도와 하도,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생님은 하도의 읍덕초등학교와 상도의 사량중학교를 졸업했다. 뭍으로 나가 삼천포고등학교와 경남대학을 졸업한 뒤 교편을 잡았다. 주로 거제시 인근의 학교를 돌며 근무를 하다가 2008년 봄 모교인 사량중학으로 발령을 받았다. “저는 읍덕초교를 79년에, 사량중학를 82년에 졸업했습니다. 당시 읍덕초교는 200여명의 학생들이 다니던 곳이었어요. 지금은 학생이 단 두 명으로 줄면서 사량초교 읍덕분교로 격하됐지요. 사량중학은 540여명이 다니던 큰 학교였는데 지금은 서른 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로 줄어들었고요.”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님의 감회는 남다르다. 학생들 중에는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의 아들도 있고, 함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동창생의 딸도 있다. 모두가 자신의 아들 딸 같기만 하다. “벌써 교직생활 17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초임 시절의 열정도 많이 식고, 타성에 젖어들 무렵 모교 발령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초심이 되살아나더라고요. 고향의 후배이자, 모교 후배인 제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어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걸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신바람이 나서 아이들에게 뭐든 해주고 싶었던 겁니다.” 인간의 신바람은 큰일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다. 선생님은 부임 첫해 통영시 초겵峠剋?체육대회의 중등부 여자축구대회에 출전하기로 결심한다. 해당 대회에서 우승한 전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당시 사량중학교 전교생은 34명이었고, 그 중 여학생은 13명뿐이었다. 그들 13명으로 축구부를 꾸렸다. 400~500명의 학생들 중 소질 있는 선수를 고르고, 후보 선수들까지 여유 있게 둘 수 있는 다른 학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강한 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시작한 일입니다. 우선 체력을 향상시키고 팀 전술을 숙지시키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은 그 고된 훈련을 너무나도 착실하게 따라주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어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이야기는 비단 성경 속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섬마을 아이들은 첫 게임에서 뭍에 있는 큰 학교를 상대로 6대0이란 대승을 거두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결승에서는 사량중학보다 30배 정도나 규모가 큰 모 여중을 2대0으로 누르면서 우승컵을 손에 쥐었다. 이밖에도 아이들은 그해 통영시 초·중학생 줄넘기 대회 겸 통영교육청 대표선발전에 큰 학교를 모두 물리치고 당당히 1위 자리를 차지했다. 경남도 대회에서는 통영 대표로 출전해 전체 2위를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사량중학 여자 축구부는 이듬해 해체되고 만다. 팀을 꾸리지도 못할 정도로 학생들 숫자가 줄어든 탓이다. 사라진 건 축구부 뿐만이 아니다. 사량중학은 1~2년 전까지만 해도 요트, 스킨스쿠버, 수상 스키 등 섬마을 학교의 특성을 살린 프로그램을 비롯해 테니스, 골프, 댄스 스포츠, 사물놀이 등 다양한 방과 후 특별활동을 운영했다. 그러나 학생수가 30명 아래로 줄어들면서 이런 프로그램들은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다양했던 방과 후 학습은 이제 오후 5시 30분~9시 30 사이 운영하는 야간교실로 바뀌었다. 도시 학생들처럼 사교육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섬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들이 늦게까지 남아 봉사를 하신다. 세상에 이렇게 전국방방곡곡에서 밤늦게까지 공부에 매달리는 나라는 대한민국 말고는 없을 것이다. 지난 세월은 대개 아련한 노스탤지어의 항아리 속에 잠겨있다. 어떤 인생의 굴곡이라도 노스탤지어의 항아리 속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애틋함과 그리움의 향취를 입는다. 선생님이 어릴 적 힘들었던 시절을 회고한다. 나그네도 덩달아 세월 여행을 떠난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우리가 자랄 때는 전기불이 없었어요. 밤에는 석유 등잔으로 어둠을 밝혔답니다. 초등학교 때 우리 옆집 아이는 등잔불을 켠 채 자다가 불을 내서 3도 화상을 입기도 했어요. 50~60년대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량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80년의 일이었어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다닐 때였습니다. 낮에는 논일 밭일을 도와야 했고, 소죽 끓이는 일을 거들어야 했어요. 그때까지 우리들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답니다.” 선생님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통학선을 이용했다. 선생님의 집이 있는 하도 읍포에서 사량중학이 있는 상도까지 물길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나무로 만든 작은 통통배는 50여명의 아이들을 꽉꽉 태우고 다녔다. “통통배가 1시간 반 동안 하도의 포구들을 한 바퀴 빙 돌며 학생들을 태웠습니다. 그러다보니 맨 처음 배를 대는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했어요. 3년 내내 새벽 4시에 일어나 산을 넘어 포구까지 걸어와 배를 타야 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요즘이야 차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도로가 뚫렸고, 마을버스도 다니니까 참 편해졌지요. 그런대도 사람들이 떠나고 있느니 참 안타깝습니다.” 선생님이 자꾸 시계를 들여다본다. 아, 배 시간이 다 됐구나. 선생님은 주말이면 아내와 두 딸이 기다리고 있는 거제시의 집으로 간다. 서둘러 인터뷰를 접는다. 선생님이 뛰듯이 교정을 빠져 나간다. 텅 빈 교정을 홀로 걷는다. 10년 후 2010-03-22
- 여성이 행복하고 신나는 삶을 위해 브라보! 오픈 1년, 신나는 가게의 이름을 더욱 알리고파 지난해 3월 오픈, 1년을 막 채워가는 신나는 가게(031-251-9093)는 이제 조금 주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옷 한 가지라도 일부러 와서 기증해주시는 동네 분들도 제법 생겼다. “수익금이 한 부모 가정의 자립을 위해 쓰인다는 걸 아시고 많이 도와주시죠.”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이미옥 매니저는 은행융자에 가게유지비 등 운영비용을 감당하는 것도 녹록치 않다고 토로한다. 지역공부방 간식지원, 향후 급식비 지원 등 진행 중이거나 예정인 일들을 잘 해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기증으로 이뤄지다 보니까 물건이나 사이즈가 다양하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다. 리폼을 한다든가 청바지를 핸드페인팅해서 신나는 가게만의 재활용 상품을 만들려고 생각 중”이라는 그는 “3월부터 시작될 ‘신나는 가게 문화센터’도 그런 의미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역사논술, 리폼, POP, 꽃꽂이 강좌를 운영하면서 가게도 알리고 한 부모 가정 여성이 직업으로 연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굳이 한 부모 가정에 초점을 맞춘 이유가 있을까. “한 부모 가정의 어른이나 아이들은 모두 정신적인 피해자에요. 특히 여성들의 경우는 세상의 편견과 맞서 자신의 처지를 꺼내놓기가 결코 쉽지가 않거든요.” 흐르는 세월처럼 편안해진 나만의 삶, 후회는 없다 그러면서 느닷없이 이 매니저가 자신의 이혼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그들의 마음을 잘 알 수가 있다고, 신나는 가게를 꾸려가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말이다. 그는 0.1%의 가능성만 있다면 상대방과 대화로 풀어갈 것을 조언한다. “가정폭력의 경우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하지만 이혼 결심을 하고서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다반사에요.” 이혼의 문제는 차치해두고라도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나면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는 건 배움이 많든 적든 다 똑같은 것 같다고. 그런 여성들의 생각을 확 바꿔 놓고 싶다. 내가 행복한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게 가족과의 관계도 편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5년 동안 마트에 근무하면서 우연히 마트 내 비리를 알게 됐고, 노동운동은 그의 생각을 확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수원일하는여성회도 그 즈음에 만났다. 후회해본 적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 게 좋기만 하다”고 답한다. 중고생인 아이들이 엄마를 잘 이해하고 받아줘서 고맙기만 하다면서. 궁극적으로는 마음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상담소를 운영할 생각이다. 지금은 신나는 가게가 누구나의 쉼터 역할을 대신 하고 있다. 세상 앞에서 당당해진 자신의 열정이 갈 길을 잃은 영혼에게 삶의 지표를 세워줄 수 있기를 그는 간절히 소망한다. 오세중 리포터 sejoong71@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2-18
- [책소개]영원한 섬진강 선생, 세상에 쓴소리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 김용택 글. 김세현 그림 문학동네. 1만3800원 그가 교단에서 겪어낸 38년 세월은 길었지만, 마지막 수업은 바람처럼 한순간에 지나갔다. 그가 마지막 수업에서 뿌린 그 씨앗 같은 말과 생각들을 모아, 그리고 마지막 수업에서 그가 채 못다한 말들을 엮어 책 한 권을 펴냈다. 주인공은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다. 아직도 그는 새 학기가 시작되는 봄이 오면 아이들을 생각한다. 아이들이 그리울 때마다 마지막 수업이 열렸던 그 아늑한 교실에서 차마 아이들에게 못다한 말들을 속으로 되뇔 때마다, 그는 아이들이 쓴 동시를 꺼내 읽는다. 이 책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다소 파격적이고 직접적인 사회 비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아이들보다는 돈봉투와 교장 직위에만 관심 있는 썩은 교육자들에 대한 분노, 권력 지향적인 한국의 정치판과 심화되는 빈부격차에 대한 슬픔, 가난한 가정에서 부모없이 자란 아이들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다. 제자들의 말을 무거운 투로 옮기기도 한다.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악마 같은 말들을 한다. 우리 민해가 여야 여성 대변인들의 말싸움을 보며 한 말이다. 정말 그렇다.” 그는 “국토와 교육과 나라의 설계는 정권과 상관없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권은 5년이고, 국토는 영원히 대물림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지키고 싶은 것들’에서는 그가 가슴 깊이 사랑해 온 ‘선생’이라는 직업과 어머니, 자연, 아이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토로한다. 교단에 선 동안 그가 가장 간절하게 지키려 했던 것들 중 하나는 ‘아이들의 꿈’이다. 그동안 유수의 작가들과 공동작업으로 출판에 참여했던 김세현 화백과 김용택 시인이 만났다는 점에서 이 책의 재미는 더한다. 화백은 섬진강의 사계와 그 속에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정을 아름다운 수묵화로 그려냈다. 그는 여전히 ‘선생’으로 남고 싶어 한다. 교단에 선 38년 세월 동안 시골 아낙의 맛동산 선물에도 당황하던 그 시절 그 선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동기들이 모두 교장교감이 되고 장학사가 될 때에도 ‘선생이라는 말을 사랑한다’며 아이들과 뒹구는 평교사를 ‘사수’했던 그는 안타깝게도 아이들에서 벗어나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19
- 용두산 공원을 돌아 먹자골목에서 추억을 맛본다 70년대 용두산 공원 꽃시계 앞에서70년대 용두산 공원 꽃시계 앞에서70년대 용두산 공원 꽃시계 앞에서오늘도 꽃시계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추억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릴 때면 으레 등장하는 곳이 용두산 공원, 남포동 극장가, 먹자골목이다. 까까머리 학생 시절부터 어설픈 어른 흉내를 내던 처녀, 총각 시절까지 남포동 일대는 최고의 데이트 장소이자 눈과 입 모두 즐거운 거리였다.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성업 중인 집이 있는가하면 기억 속 저편으로 사라진 집도 많다. 지금도 건재한 용조각상 용두산 꽃시계는 부산 최고의 사진 명소해묵은 사진첩을 들여다보면 용두산 공원 안 꽃시계 앞에서 찍은 사진 한 두 장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마땅히 갈 곳이 부족했던 어린 시절 용두산 공원은 신나는 나들이 장소였다는 정주원(35?남천동) 씨. “어렸을 때 엄마와 함께 갔던 용두산 공원에서 비둘기 모이 주는 게 그렇게 재미났었어요. 시간가는 줄 몰랐죠. 꽃시계 앞에서 사진도 찍고요. 내려오는 길 옆에 미화당백화점으로 들어가는 좁은 철제 계단이 있었는데 한적한 공원에서 북적이는 백화점으로 이어주는 마법의 다리같았다고 할까. 그 계단을 지나가며 느꼈던 설렘은 아직도 생생하네요” 미화당백화점이 없어지고 신발 마트가 들어선지 오래지만 지금도 용두산 공원을 떠올리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얼마 전 아이들과 찾은 용두산 공원에서 용조각상을 봤는데 어릴 때보다 작아져 보여서 황당했다고. “조각상이 작아진 게 아니라 제가 큰 거겠죠. 그래도 어릴 때는 꽤 커보여서 무서웠는데”라며 웃었다. 남포동 극장가 거리가벼운 일탈은 언제나 남포동 극장에서 지금은 어엿한 은행원인 이희철(40 재송동) 씨는 대학교 시절 오전 수업을 빼먹고 친구들과 보러갔던 영화 ‘피아노’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사실 영화 내용이 감동적이어서 기억나는 게 아니에요. 오전 수업을 빼먹고 친구들이랑 술과 족발을 사서 피아노를 보러 갔지요.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술과 족발을 다 먹고 잠들어버려서 영화는 전혀 보지를 못 했어요”라며 겸연쩍어 했다.초등학교 때 배가 아프다며 학교를 조퇴하고 영화를 보러 간 기억이 새록새록하다는 천승민(40? 남천동) 씨는 주말의 영화는 꼭 챙겨보던 시네마 키드였다. 학창 시절 모범생으로 남아있는 천승민 씨 얘기에 친구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고. 누구나 한 번쯤은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기웃거려 봤을 테고, 야간자율학습을 빼먹고 영화관으로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특별한 즐길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영화는 최고의 오락이자 문화 공간이었고 일상에서 벗어나 가벼운 일탈을 즐기기에 영화관 순례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장소였던 셈이다. 언제나 맛나는 부추전과 오징어 무침여전한 메뉴 여전한 그 맛 먹자골목남포동을 떠올리면 늘 따라오는 기억은 ‘먹자골목’이다. 영도에 사는 배혜정(39세) 씨는 남포동에서 그리 멀리 않은 서여고를 다녔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이면 간식에 목마른 학생들이 사다리를 탔고, 임무를 부여받은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신발을 벗어놓은 채 덧버선 바람으로 골목을 내려와 먹자골목에서 김밥이며 순대, 부추전을 사갔다고. 친구들과 몰래 먹는 간식은 꿀맛이었지만 덧버선 바람으로 남포동 일대를 다닌다는 것 자체가 지금 하라면 절대 못할 일이라며 옛날 추억을 되새겼다. 지금도 여전히 그 메뉴 그 맛으로 성업 중인 먹자골목이지만 예전만큼의 맛을 느낄 수 없는 건 적은 돈으로 최소한의 양만 먹을 수 있었던 그 아쉬운 맛이 없어져서일 것이다. 누구나 돌이켜보면 웃음 짓게 하는 기억이 있다. 내 마음이 따뜻했던 시절. 친구들과 짝을 지어 누비던 남포동 거리는 지금도 젊은이들로 활기가 넘친다. 사람들과 가게 간판이 바뀌었을 뿐 추억을 만들어 가는 장소임은 여전하다. 오늘 하루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며 기억 속을 걸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이수정 리포터 cccc0900@naver.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