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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운수 버스운전기사 최순동씨 고양시의 어느 버스정류장. 버스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한 학생이 “아저씨, 이 버스 OO까지 가요?”라고 묻는다. 그런데 운전석에는 선그라스에, 정복을 입은 여자기사분이 앉아서 “학생, 이렇게 예쁜 아저씨 본 적 있어요?”라고 되묻는다. 순간 버스 안은 유쾌한 웃음바다가 된다. “누나, OO가요?”라고 묻는 학생에게는 “시력이 너무 좋으니 요금 내지 말라”는 특혜가 주어질지도 모른단다. 고양시에서 영등포로 나가는 버스노선에 이처럼 멋진 ‘我줌마’가 있다는 제보가 여러 채널을 통해 들려왔다. 어렵사리 약속을 잡아 만난 사람은 바로 명성운수 버스운전기사, 최순동(47)씨다. 자식들이 나를 지킨 것 “보시다시피 저는 예쁘지도 않고,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어요. 그저 먹고 살려고 열심히 운전하는 것 뿐이죠.” 처음 만나자마자 최순동씨는 자신이 인터뷰에 맞는 인물이 아니라고 꽤나 부담스러워 했다. 그러나 삶의 굽이굽이 이야기보따리와 버스기사로서 겪었던 일을 풀어놓으니, ‘我줌마’의 자부심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최씨는 올해로 9년째 운전을 하고 있다. 결혼 전 외국인 회사, 사무직 등 소위 말하는 좋은 직장에 다니며 도도하게(?) 살았는데, 아이가 생긴 후 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다. 살기 흉흉했던 IMF 시절, 다시 아이를 둘러업고 직장을 구하러 나섰지만 최씨에게 돌아오는 일자리라곤 녹즙배달, 신문배달, 우유배달, 파출부, 홍보지 돌리는 일 등이었다. “경력단절 여성에게는 말 그대로 돈도 안 되는 허드렛일 밖에 없더군요.” 결국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빌딩청소를 했는데, 청소 일보다 더 힘든 것은 ‘젊은 여자가 왜 저런 일을 해?’라는 따가운 시선이었다. 그래도 최씨는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 물고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씨는 버스에서 여자운전기사를 발견하고 ‘아~ 저거다’ 싶었다. 면허도 없던 그는 그 날로 ‘운전기사’를 목표로 잡고, 1종 면허를 따기 위해 우유배달, 신문배달, 녹즙배달을 하면서 운전연습을 했다. 그 당시 최씨는 “밤새 여기 저기 트럭을 긁고, 울며 불며 다녔다”고 회상한다. 그는 1년만에 대형면허를 취득하고 마을버스 회사에 취직을 했다. 첫 기름밥 세계는 너무나 열악했다. 5~6분 간격으로 배차를 해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어, 결국 신장에 이상이 생겨 병원신세까지 지고 말았다. 그 때도 최씨는 “내가 여기서 못 버티면 내 아이들이 죽는다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말한다. “한강에 자살하려고 몇 번이나 갔다가 돌아왔어요. 내가 아이들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며 살았지만, 실은 아이들이 저를 지킨 거예요. 지금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안전운전을 위해 더 긴장하게 됩니다.” 그의 아들은 군복무중이고 딸은 고3이다. 최씨 아줌마의 버스는 인심을 싣고~ 그는 마을버스에서 1년 정도 일하다가, 명성운수로 자리를 옮겨 큰 버스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행복한 직업이 또 있을까 싶어요. 큰 통유리를 통해 새벽의 장엄함부터 노을과 어둠이 깔리는 풍경을 매일 목격하잖아요. 가끔은 비도 퍼 붓고, 눈도 쏟아지고…. 어떤 영화보다도 멋있어요.” 그는 너무 힘든 세월을 살았기 때문에 “사고만 안 나면 버스만큼 쉬운 일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마음으로 손님들을 맞으니 저절로 반가움이 앞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부모님 같고, 학생들은 자식같이 느껴진다. 그 친절함에 승객들이 인정으로 화답하는 것은 당연지사. 배추가 금값일 때, 농부 아저씨가 배추 3~4통을 들고 정류장에서 최씨의 버스를 무작정 기다렸다가 3일만에 만나 건네준 일도 있었다. 손 경례 인사를 잘 하는 최씨에게 시원한 주스를 꼬박꼬박 건네는 주차요원, 사과 2개를 꼭꼭 챙겨주는 과일노점상. 아침에 최씨의 차를 타고 밭일을 갔던 일단의 아줌마들이 저녁에 다시 그 차를 타고 인연이라며 한 보따리 주고 가는 시금치, “이거 졸릴 때 먹어~”하면서 입에 넣어주는 할머니들의 소중한 사탕…. 각박해진 세상에서 이런 인심을 만날 때면 빚 진 것 같고, 감사하고, 행복하단다. 너무 친절한 것도 병인지, 어떤 손님은 최씨를 보고 “운전도 부드럽고, 인사도 잘하는 걸 보니 초보인가 보다”고 넘겨짚기도 한다며 웃는다. 성별분업의 벽을 넘어~ 물론 힘든 일도 많았다. 취객이 행패를 부릴 때면 여성이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같은 운전기사끼리도 동료로 대접하지 않고, 성적 대상이나 편협한 의미의 아줌마로 보는 시각도 불편하고 불쾌하다. 언젠가 영등포에서 정류장이 아닌 도로에 승객들이 몰려 내려와 있어, 최씨는 버스 문을 열지 않았다.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문을 열면 벌금이 20만원이다. 승객들은 차문을 발로 찼고, 버스에 오르며 갖은 욕을 했고, 요금을 던지기도 했다. “거의 집단폭력 수준이었죠. 온 몸이 떨렸지만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여러분도 오늘 먹고 살려고 일했고, 나도 먹고 살려고 운전하고 있다. 내 차에 깔리고 싶은 사람 나오라’고 했어요. 헌데 아무도 안 나서대요? 그 날 그렇게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으면 아마 큰 사고가 났을지 몰라요. 조용히 ‘갑시다, 기사양반~’하는 소리에 분을 삭이고 운전을 했는데, 손님들이 내릴 때는 ‘수고하세요, 화내서 죄송해요’라는 인사들을 남기더군요.” 그는 아직도 남녀 평등한 문화나 높은 시민의식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사실 강한 여자는 아니에요. 절박한 환경이 그렇게 단련시켰을 뿐이지요. 결국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더라고요. 언덕을 오를 때 고개가 엄청 높아 보이지만, 고개를 넘고 나면 별 거 아니고, 탄탄대로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여성들이 자신을 극복하면서 하고 싶은 어느 분야 어디든 진취적으로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남성중심 사업장인 운수회사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멋장이 我줌마, 최순동씨가 인터뷰를 마치며 한 약속이다. “모든 고양시민들은 쾌적하고 안전하게 버스를 탈 권리가 있어요. 그 권리를 지켜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경화 리포터 71khjung@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28
- 신문로 광화문 광장을 지나며 차 미 례 ( 언론인,번역가.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 중학생 때 내가 책가방을 들고 뛰어 건너던 세종로 네거리엔 아직 지하도가 없었다. 단출한 2차선에 교통량도 많지 않던 광화문거리에서, 우리들은 요즘처럼 넓지 않고 얌전하게 줄이 그어진 횡단선을 따라 건너다녔다. 급할 땐 대각선 질주를 하기도 했다. 외국 대통령의 방한 때마다 길가에 전교생이 동원되어(부근 학교마다 지정장소가 있었다) 태극기를 흔들던 몇해 동안, 주변 길이 점점 넓혀지고 지하도가 생기고 지상 횡단보도는 없어졌다. 부근의 다른 건널목도 계단이 많고 높직한 육교로 대치되었다. 보행자들이 밀려나고 차량소통 위주의 도시교통정책이 본격화, 반세기 가까이 도심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10여년 뒤 2층짜리 신문회관이 헐린 뒤 뒤로 훌쩍 물러난 고층의 프레스센터로 변하고 세종문화회관 주변 건물들 앞길도 계속 넓어졌다. 서울시는 토지 보상금과 공사비 등 천문학적 거금과 수십년의 세월을 바쳐 세종로 거리를 가장 넓고 큰 서울의 중심축 도로로 만들었다. 청와대 앞길에 걸맞는 위용을 갖춘 제왕적 대로이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지상 횡단보도가 복원되고 월드컵 응원 열풍 이후 시청앞 잔디광장이 조성되면서 ‘보행자의 권리’가 다소 복권되었지만, ‘광장’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시민의 광장이라는 명분을 두고 이를 만든 당국과 이를 이용하려는 시민과의 견해차가 너무 커서 그렇다. 30일로 개장 한달을 맞은 광화문광장에 214만명이 다녀갔다고 자축 분위기지만, 시위라도 할까봐 너무 제약을 해놓은 ‘시민의 광장’은 무리가 있다. 영화관객처럼 탐방객수 만으로 성공을 점치긴 어렵다. 본래 ‘광장문화’의 원조 격인 옛 서구의 광장은 도시나 마을 구조상 많은 길들이 한데 모이며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집합하는 생활공간이었다. 광장 자체도 흐름과 모임의 결과여서 거대한 규모는 아니었다. 현대도시에서의 ‘광장’은 미셸 라공 같은 도시학자의 지적대로 중앙집권화한 자본가도시, 경제권력의 도시의 상징이기도 하다. 거대도시 속 군중의 집합을 염두에 둔 파시시트 또는 사회주의 국가의 광장은 도심부를 찢어 넓힌 유난히 더 크고 넓은 거대광장이 되기도 했다. 천안문광장 같은 경우는 그 극치다.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 육조거리를 재현해서 국가 중심축으로 되살린 것’ ‘아무 제약과 제한 없이 시민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문화의 중심’이라는 상충되는 주장 아래 서울시가 밀어붙인 ‘작품’이다. 오세훈 시장이 청계천에 이어 화끈한 오세훈표 업적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시달린 결과라는 설도 있다. 문제는 교통의 중심축인 광화문대로의 차량통행을 양쪽에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운데 섬처럼 만들어진 광장의 기능이다. 세검정에서 시청앞까지 자동차로 15분이면 가던 길이 광장 조성후 30~40분 길이 되었다. 확 뚫리던 ‘광화문대로’가 상습정체 병목이 된 것이다. 차도와 광장이 구분되지 않는 돌바닥, 분수 때문에 마른 길에서 갑자기 젖은 도로면을 만나는 위험, 무엇보다 어린이 놀이터와 구분되지 않는 성격탓에 교통사고 위험도 크다. 그래서 차들이 길가쪽으로 몰리니 교통정체는 더 극심할 수밖에 없다. 갖가지 조형물은 가까이 찾는 관람객에게는 보이나, 좀 떨어져서 보면 삭막한 돌판 광장에 여기 저기 설치물이 흩어져 있고 녹색 나무 한그루 없는 어수선한 장터처럼 보인다. 공들인 중앙화단은 수만개의 화분을 부지런히 교체하며 형태를 유지할 경우 시청앞 서울광장의 잔디처럼 엄청난 유지비를 요구하는 ‘돈먹는 하마’가 되리라는 우려도 많다. 수십년 넓힌 도로복판을 갑자기 징발당한 뒤 좁은 찻길에서 매일 기다시피 하는 내 느낌엔 광화문광장은 가로수와 중앙분리대가 있던 옛 광화문 도로에 비해 조금도 정답지 않다. 시민의 광장이기엔 강한 주장과 전시효과를 담은 조작적 시설물이 너무 많아서다. 유명장소라면 한번쯤 꼭 가보는 한국인들의 정서를 고려하더라도 과연 다시 가고 싶고 매일 가고 싶은 시민의 광장이 될 수 있을까. 도로 속 ‘섬’에다 퍼부은 아까운 내 세금의 ‘밑천’ 생각이 들지는 않을까.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31
- [신문로]매미 우는 아침에(김이경 2009.08.28) 매미 우는 아침에 김이경 (칼럼니스트·독서지도사) 마음이 심란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는 책을 읽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시속(時俗)을 떠난 옛글을 읽으며 흩어졌던 마음을 하나둘 그러모읍니다. “지극한 슬픔이 닥치면 온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하기만 해서 그저 한뼘 땅이라도 있으면 뚫고 들어가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두 눈이 있어 글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한권의 책을 들고 슬픈 마음을 위로하며 조용히 책을 읽는다. 만일 내가 온갖 색깔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해도 서책을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라면 장차 무슨 수로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조선 최고의 책벌레 이덕무가 젊은 날에 쓴 글입니다. 그는 과거도 볼 수 없는 서얼 출신으로 긴 세월 실의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그를 지독한 슬픔에 잠기게 했는지는 몰라도, 세상에 쓰일 희망도 없이 책을 읽어야 했던 불우한 서생에게 슬픔은 또한 당연한 것이었겠지요. 앎을 행하고 싶은 열망으로부터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닫아야 했으니 그 마음이 어찌 슬프지 않았겠습니까. 책에서 위로를 찾던 옛사람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는데 문득 찌르는 듯한 울음소리가 귀청을 때립니다. 매미입니다. 여느 해보다 뒤가 긴 여름, 매미 울음소리도 이 계절을 닮아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저렇게 큰 소리로 울어대는데 그 동안 못 듣고 있었던 것이 이상하고, 미안합니다. 곤충의 삶을 사람의 눈으로 읽는 것이 부질없기는 하지만, 매미의 일생은 자못 처연한 데가 있습니다. 시끄러운 울음소리와 달리 그의 평생은 침묵 속에서 흘러갑니다. 열흘이나 보름쯤 목청껏 울어 3년씩 7년씩, 때로는 13년, 17년을 캄캄한 땅속에서 나무 수액만 먹으며 조용히 살다가 간신히 해 아래 나와 날개를 폅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열흘이나 보름쯤 목청껏 울다 가는 게 고작이지요. 그래서인지, 그 울음소리는 아무 구애가 없습니다. 온몸을 바쳐 땅과 하늘을 울리는 혼신의 울음을 웁니다. 그리고 울음이 다하면 미련 없이 마른 몸을 버립니다. 물기 하나 없이 바삭한 그 몸뚱이는 여한 없는 생의 증거인 듯,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합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입 안에 매미 모양의 옥(玉)을 넣었다고 합니다. 왜 매미였을까요.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는 매미처럼 새 삶을 받아 다시 태어나라는 소망일까요, 아니면 맑은 수액만 먹고 살다 한바탕 잘 울고 떠나는 매미처럼 가뭇없이 떠나라는 기원일까요? 아마도 두 마음이 더해져 생겨난 의식이겠지요. 매미 울음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날, 길고 지루한 여름의 끝에서 한 사람이 이 땅을 떠났습니다. 이 여름의 시작에서 떠난 한 사람도 아직 보내지 못했는데 또 다시 영결입니다. 떠난 두 사람은 생전에 잘 울었습니다. 억울해서 울고, 서러워서 울고, 가여워서 울고, 고마워서 우는 모습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내보였지요. 그러나 나는 두 사람의 울음에 귀를 막곤 했습니다. 남자의 울음을 반기지 않는 세상을 핑계 삼아, 너무 시끄럽다고, 그만 좀 울라고 투덜거린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헌데 그 울음이 다하여 적막한 이 아침,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가 왜 이리 귓전에 쟁쟁한지요. 지치지도 않고 이 땅을 위해 울었던 사람이여, 늙은 몸을 가눌 수 없는 슬픔에 아이처럼 펑펑 울었던 사람이여, 당신은 여한 없이 울었습니다. 여름 앞뒤에서 떠난 두 사람 남은 울음은 살아남은 우리의 몫이니 우리의 울음이 하늘의 천장을 칠 때 부디 웃어주세요. 천개의 바람으로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평안하세요. 아주 오래된 노래와 함께 이제 당신을 보냅니다. 내 무덤가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에 없습니다. 나는 잠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천 개의 바람입니다.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고요한 아침 당신이 눈뜰 때 원을 그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조용한 새이고 밤하늘에 빛나는 부드러운 별입니다. 내 무덤가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28
- 여성의 상징인 가슴, 출산 후에도 포기 할 수 없다. 결혼 전 여자에게 가슴은 섹시미를 강조할 수 있는 여성의 가장 상징적인 부위라 말할 수 있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 결혼을 하고 출산을 통해 여자에게 가슴은 소중한 내 아이의 일용한 양식을 제공하는 가장 근본적이면서 원초적인 부위로 바뀌게 된다. 출산 전에는 가슴의 크기나 모양에 신경을 썼던 사람도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내 아이가 배불리 먹을 수 있을만한 충분한 양의 양질의 모유가 나올 수 있을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이것은 아이를 낳은 엄마라면 누구나 다 똑같은 마음으로 변하게 되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는 사이 하늘이 주신 모성 본능으로 인해 소중한 아이는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주었지만 탄력 있고 탐스러웠던 여자의 가슴은 알맹이가 쏙 빠진 채 힘없이 늘어져 버린다. 가슴 확대 전문 브랜드 브라바(BRAVA)에 근무하다보니 많은 여성들의 가슴에 관한 고민을 듣게 된다. 앞서 언급한 ‘다이어트 후 가슴 탄력 저하’ 다음으로 ‘출산 후의 가슴 변화’로 인한 고민이 두 번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만큼 여성이라면 필수적으로 겪게 되는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해 여자의 가슴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관리 방법은 없어 사실상 포기하고 지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아이템이 바로 브라바이다. 출산 후 모유수유로 인해 가슴의 단백질 섬유가 연화되면서 윗 가슴의 탄성이 현저히 줄어들어 가슴 처짐 증상이 일어나는데 브라바는 가슴에 혈류량을 증가시켜 조직 세포 활성도가 높아져 사라졌던 지방이나 유선 조직 증식이 일어나 가슴 확대가 이루어진다. 또한 브라바는 돔(dome)이라 불리는 브래지어 형태의 플라스틱을 가슴에 부착하여 사용하는데 이 돔 모양이 윗 가슴의 성장 위주로 이루어 질 수 있게 설계되어 있어 처진 가슴 개선에 무엇보다 뛰어난 효과를 보인다. 여성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때가 언제일까 아마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있을 때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우리는 엄마이기 전에 여자이고 싶다. 여자라면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끝없는 열정 일 것이다. 엄마라는 이유로 여성의 상징인 가슴을 포기한 채 살아가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는 엄마들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도전해 보라 말해주고 싶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브라바 메디컬 팀장 이 은 주 www.brava.kr 02-3453-8285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31
- 과학이 재미있어질 때까지 변신은 계속된다, 쭉~ 아이들을 향해 열려있는 삶, 사랑 마술사, 발명가, 혹은 놀이전문가! 임성숙 교사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부른다. “뭐라 불려도 어때요. 그저 과학이 쉽고 재미있게 머릿속에 쏙쏙 박히면 되는 거죠.” 만면에 웃음 가득한 얼굴로, 호기심에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내며 그가 말한다. 영덕중학교 과학부장이면서 수원교육청 발명교실 교사, ‘참과학’과 매직사이언스선생님모임, 수석교사 모임 회장 등 ‘쉬는 날이라도 있을까’ 싶을 만큼 수많은 역할을 담당해내고 있다. 이도 모자라 수업지도안과 동영상, 사진 등을 바로바로 홈페이지(http://sungsook.com.ne.kr)에 올리는 작업까지…, 참 ‘천직’이란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선생님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연구원 준비를 하던 중에 부탁을 받고 시한부 기간 동안만 맡게 된 거였는데, 결국 25년 세월이 흘렀네요.”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아이들이 너무 좋아서’라고 주저 없이 답했다. 처음 서울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 만났던 아이들이 얼마나 자기를 잘 따르던지, 학교에서 ‘인기가 짱’이었다고. 수원공고 담임 시절엔 5년간 출석률 100%를 기록하기도 했단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하루는 온통 아이들을 향해 열려 있다. 아이들이 게시판에 올리는 아이디어를 일일이 수정·조언해주고, 어떻게 하면 보다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을까 싶어 실험도구를 직접 만들고, 도움을 받을만한 곳으로 달려가 방법을 배워오기도 한다. 그의 과학수업이 마술, 놀이, 발명 등의 재미있는 꺼리와 만나게 되는 이유를 알만하다. 백년대계 교육을 닮은 과학, 기다림이 필요해 얼마 전에 임성숙 씨는 ‘과학놀이터’라는 책을 출간했다. “과학의 첫 모토는 창의력을 기르는 것”이라는 그는 “일상 속에서 얻는 모든 것이 과학의 재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캔 콜라로 기압의 차이를, 설탕물로는 TV모니터의 원리를 설명해 보인다. 재미있게 즐기는 가운데에서도 핵심은 머릿속에 콕콕 박힌다. 하지만 여전히 과학은 찬밥신세다. “과학은 다른 과목과 달리 빨리 결과도 안 나오고, 답도 무한정이에요. 어떻게 보면 교육과도 닮았다고 할까요. 멀리 보고 인내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빨리빨리’에 익숙한 엄마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함께 읽고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지난해부터는 ‘어머니 발명교실’도 운영 중이다. 발명교실 외에도 그가 가르치고 있는 분야의 관련된 자료와 교육노하우는 항상 홈페이지에 오픈되어 있다. 여러 교류를 통해 교사의 장점과 학생의 숨은 영재성을 최대한 발굴해낼 수 있는 교육방법을 찾고 싶기 때문이다. 호호할머니가 돼서도 과학발명교실을 만들겠다는 임성숙 씨, 아이들을 향한 그의 열정을 과연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오세중 리포터 sejoong71@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27
- 신문로 매미 우는 아침에 마음이 심란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는 책을 읽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시속(時俗)을 떠난 옛글을 읽으며 흩어졌던 마음을 하나둘 그러모읍니다. “지극한 슬픔이 닥치면 온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하기만 해서 그저 한 뼘 땅이라도 있으면 뚫고 들어가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두 눈이 있어 글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한 권의 책을 들고 슬픈 마음을 위로하며 조용히 책을 읽는다. 만일 내가 온갖 색깔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해도 서책을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라면 장차 무슨 수로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조선 최고의 책벌레 이덕무가 젊은 날에 쓴 글입니다. 그는 과거도 볼 수 없는 서얼 출신으로 긴 세월 실의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그를 지독한 슬픔에 잠기게 했는지는 몰라도, 세상에 쓰일 희망도 없이 책을 읽어야 했던 불우한 서생에게 슬픔은 또한 당연한 것이었겠지요. 앎을 행하고 싶은 열망으로부터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닫아야 했으니 그 마음이 어찌 슬프지 않았겠습니까. 책에서 위로를 찾던 옛사람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는데 문득 찌르는 듯한 울음소리가 귀청을 때립니다. 매미입니다. 여느 해보다 뒤가 긴 여름, 매미 울음소리도 이 계절을 닮아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저렇게 큰 소리로 울어대는데 그 동안 못 듣고 있었던 것이 이상하고, 미안합니다. 곤충의 삶을 사람의 눈으로 읽는 것이 부질없기는 하지만, 매미의 일생은 자못 처연한 데가 있습니다. 시끄러운 울음소리와 달리 그의 평생은 침묵 속에서 흘러갑니다. 3년씩 7년씩, 때로는 13년, 17년을 캄캄한 땅속에서 나무 수액만 먹으며 조용히 살다가 간신히 해 아래 나와 날개를 폅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열흘이나 보름쯤 목청껏 울다 가는 게 고작이지요. 그래서인지, 그 울음소리는 아무 구애가 없습니다. 온몸을 바쳐 땅과 하늘을 울리는 혼신의 울음을 웁니다. 그리고 울음이 다하면 미련 없이 마른 몸을 버립니다. 물기 하나 없이 바삭한 그 몸뚱이는 여한 없는 생의 증거인 듯,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합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입 안에 매미 모양의 옥(玉)을 넣었다고 합니다. 하필 왜 매미였을까요.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는 매미처럼 새 삶을 받아 다시 태어나라는 소망일까요, 아니면 맑은 수액만 먹고 살다가 한바탕 잘 울고 떠나는 매미처럼 가뭇없이 떠나라는 기원일까요? 아마도 두 마음이 더해져 생겨난 의식이겠지요. 매미 울음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날, 길고 지루한 여름의 끝에서 한 사람이 이 땅을 떠났습니다. 이 여름의 시작에서 떠난 한 사람도 아직 보내지 못했는데 또 다시 영결입니다. 떠난 두 사람은 생전에 잘 울었습니다. 억울해서 울고, 서러워서 울고, 가여워서 울고, 고마워서 우는 모습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내보였지요. 그러나 나는 두 사람의 울음에 귀를 막곤 했습니다. 남자의 울음을 반기지 않는 세상을 핑계 삼아, 너무 시끄럽다고, 그만 좀 울라고 투덜거린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헌데 그 울음이 다하여 적막한 이 아침,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가 왜 이리 귓전에 쟁쟁한지요. 지치지도 않고 이 땅을 위해 울었던 사람이여, 늙은 몸을 가눌 수 없는 슬픔에 아이처럼 펑펑 울었던 사람이여, 당신은 여한 없이 울었습니다. 남은 울음은 살아남은 우리의 몫이니 우리의 울음이 하늘의 천장을 칠 때 부디 웃어주세요. 천 개의 바람으로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평안하세요. 아주 오래된 노래와 함께 이제 당신을 보냅니다. 내 무덤가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에 없습니다. 나는 잠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천 개의 바람입니다.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고요한 아침 당신이 눈뜰 때 원을 그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조용한 새이고 밤하늘에 빛나는 부드러운 별입니다. 내 무덤가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28
- “김대중 대통령이여! 민주주의여!” 서울광장 1만6천명 마지막 가는길 배웅 추모제 끝나도 자리 안떠 … 영면 기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거행된 23일 서울광장에는 1만6000여명의 시민들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시민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기리는 마음을 가지고 숙연한 모습으로 서울광장을 가득 메웠다. 시민들은 민주당에서 마련한 ‘민주주의여! 통일이여! 김대중 대통령이여!’라는 국민추모문화제에 참여해 김 전 대통령이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생애와 업적이 담긴 영상이 나오자 눈물을 훔치는 듯 손수건을 눈가로 가져가는 시민들도 여럿 보였다. 서울광장 떠나는 운구행렬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운구행렬이 23일 오후 서울광장을 떠나 시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서울역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이어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오정해씨의 추모 공연이 이어졌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추모문화제에서 “민주주의를 사랑했던 고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들어 뒷걸음질치는 민주주의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했다.특히 이날 오후 4시25분쯤 김 전 대통령을 모신 운구차가 서울광장에 들어서자 시민들은 일제히 운구차가 멈춘 대한문 방향으로 몰리며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시민들은 손을 흔들고 “대통령님”이라며 외치는 등 자신들의 방식으로 김 전 대통령을 보내드렸다. 이희호 여사는 차에서 내려 시민들을 향해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 여사는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남편은 일생 동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 왔다. 오로지 인권과 남북평화협력을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여사는 “여러분이 남편이 평생을 두고 추구해 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의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한다”면서 “그것이 남편의 유지”라고 당부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이 평소 좋아했던 ‘우리의 소원’이란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시민들은 고인의 사진과 ‘김대중 대통령이여 민주주의여’라는 글귀가 박힌 노란 풍선을 하늘로 날려 보내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시민들은 추모 문화제의 사회를 맡은 정봉주 전 의원, 김유정 의원과 함께 “김대중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이희호 여사님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며 슬픔을 달랬다. 추모 문화제에서는 황지우 시인이 추모시를 낭독했다. 황 시인은 추모시에서 ‘그 분이 가셨다’면서 ‘투옥과 망명은 파란만장이라는 말로도 모자라다’며 ‘한 세상을 나와 인생을 이렇듯 엄청난 역량으로 살아온 사람이 있을까’라는 말로 고 김 전 대통령을 기렸다. 이어 ‘따라하려 해도 잘 안 되는 것을 당신은 했다. 그것은 용기, 용서였다’라며 ‘용서하였으므로 당신의 생은 위대하다’고 고 김 전 대통령을 추억했다. 시민들은 추모시를 들으며 역경과 고난의 세월을 용서와 화해로 승화시킨 고인의 불굴의 의지를 다시금 되새겼다. 광주에서 왔다는 이 모(52)씨는 “아무나 할 수 없는 남북의 길을 뚫어놓으신 분이다. 역대 대통령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분”이라며 고인을 기억했다. 대학생 이 모(20)씨는 “코흘리개 시절, 처음 안 대통령이다. 늘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생각했다. 김해가 고향이라 민주당 등을 별로 안 좋아하는 분위기지만 내게는 단 하나의 대통령이다”며 김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했다. 시민들은 운구차가 지나가고 추모제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서울광장에 머무르며 고 김 전 대통령의 영면을 빌었다.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24
- 차(茶)와 함께 하는 맑고 향기로운 나의 인생 차(茶) 한 잔의 여유. 말만 들어도 마음이 편안하고 맑아지는 것이 차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대중이 흔히 마시는 커피와 달리 차는 이렇듯 단아함과 향기로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좋은 차는 무릇 말려 있는 잎 속에 향기가 잘 간직된 것으로, 다른 이의 정성과 시간의 결과물이다. 때문에 그윽한 향기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좋은 차를 선택해 마시는 것이 좋다. 김성원(45 성내동) 씨는 인터넷 카페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카페지기이자 차와 다기를 직접 수입해 판매하는 ‘파인티(FineTea.co.kr)’ 운영자로 오랜 세월 묵묵히 좋은 차와 다기를 다루어왔다. 그를 만나 차와 향기로운 그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우연히 차, 다기를 다루다 김성원 씨를 찾아가니 차와 다기를 다루는 직업인답게 “무슨 차를 드릴까요?”라며 우선 차 먼저 권한다. 그러더니 우려 낸 차가 ‘문산포종차’. 대만이 원산지로 맑은 향이 강하면서도 매끄러운 뒷맛이 마실수록 상쾌하기 그지없다. 능숙하게 차를 우려내며 차와 다기에 대해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에게서 직업을 따지기 이전에 차를 사랑하는 마음이 한껏 배어나온다. 김씨가 차와 다기를 판매하는 직업을 가지게 된 건 약 십년 전쯤. 당시 일반회사 전산실에서 근무하던 그에게 차(茶) 공장을 운영하던 친구가 쇼핑몰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일하던 짬짬이 쇼핑몰을 관리하다가 때마침 홍콩에서 직접 차(茶)를 수입하는 또 다른 친구를 통해 수입차를 함께 팔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차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인사동 등을 다니며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지요. 2001년도에는 중국 다예사공부를 하던 사람에게서 7개월 동안 기초적인 차문화 등에 대해 배우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차와 다기의 매력에 푹 빠져 아예 전업을 해 버렸답니다.” 차와 다기 다루는 일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좋아서 하나하나 배우고 발로 뛰다보니 어느새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야말로 천직이 아닐 수 없다. 차 문화는 생활 속에서 편안히 즐기는 것 평소 사람들이 커피 말고 즐기는 대중적인 차로 녹차를 빼놓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티백녹차를 많이 우려 마시는데, 김씨는 전문적으로 차를 다루는 이답게 차 향기를 제대로 즐기려면 좋은 차를 우려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좋은 차는 대충 우려도 차가 지닌 고유의 맛을 베풀어줍니다. 가령 대만 문산포종차의 경우 재다원끼리 경쟁을 붙여 선별한 차를 상품화시키기 때문에 차의 질이 우수합니다. 이런 차는 향이 뛰어나고 찻잎자체에 꽃향기가 있어 청향하지요. 하지만 티백의 경우 질이 낮은 찻잎으로 만들어 향이 떫고 쓴 맛이 강한 한편 몸에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차 고유의 향을 즐기기 위해서는 차 자체의 질도 좋아야 하지만 더불어 중요한 것이 우려내는 물이다.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이 돌 틈에서 솟아나는 석간수이지만, 실생활에서 얻기가 힘들기 때문에 수돗물을 저장해서 이용하는 방법을 많이 쓴다. 김씨는 “차의 미세한 향을 즐기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물을 옥돌→은다기→무쇠주전자에 넣어 저장하는 것이다”면서 “옥돌은 물에 단맛을 내게 하고 은다기는 부드럽게 하며 무쇠주전자는 차를 즐기기에 가장 적당한 농도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처음 차 문화를 접할 때는 너무 번거로우므로 차를 우릴 수 있는 그릇과 물, 차만 있으면 된다고. 김씨는 “편안하게 차를 접하면서 관심을 갖게 됨에 따라 차츰 넓혀가는 것이 자연스럽다”면서 “차 문화 역시 어렵고 번거로워 부담을 갖는 경향이 있는데, 예(禮)나 자세 등을 따지기보다 일상에서 편안하게 자주 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전했다. 은은한 차 향기처럼 맑고 향기롭게 차와 함께 하는 삶인 만큼 김씨의 생활은 차 향기처럼 담백하고 여유롭다. 미세한 차의 향기를 즐기기에 먹을거리까지 자연주의를 실천한다. 김씨는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는 행보(行補)가 낫다’는 동의보감 내용을 절감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비록 다도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따뜻한 차 한 잔 앞에 두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생활의 즐거움 중의 하나일 것이다’라는 쇼핑몰 홈피에 쓰인 글귀와 같이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차 한 잔의 여유와 더불어 향기를 나누고자 하는 그의 마음도 차 향기를 닮아있는 듯하다. 윤영선 리포터 zzan-a@hanmail.net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22
- 조은미 내유농원 대표 일산대교를 달리다 김포시로 접어들자 김포의 넓은 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방금 지나쳤던 회색빛 콘크리트 아파트들과 불과 몇 백 미터 사이, 온통 푸르름 사이로 비닐하우스들이 스머프의 집처럼 자리 잡고 있는 그곳에 ‘내유농원’이 있다. 그 곳의 주인장은 조은미(52)씨. 그의 미소 때문일까? 뜨거운 태양 볕으로 이글거리는 바깥보다 오히려 비닐하우스 안이 서늘하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버티는 행복도 아름답다”는 그. 도회적인 이미지와 달리 농장과 함께 한 세월이 벌써 18년째라는 조은미 대표를 만났다. 귀농, 남편은 ‘설득’하고 아내는 ‘마다’하고 내유농원은 양치식물 전문 농원이다. 익숙한 동작으로 쏙쏙 자라고 있는 어린 더피 사이로 물을 주고 있는 조은미씨는 농원보다는 골프장에서 골프채를 들고 필드를 누비면 훨씬 더 어울릴 듯싶다. “대부분 내 첫 인상만 보고 직접 농원 하는 것 맞느냐고 묻는다”고 웃는 그는 400여 평의 농원을 아주 바쁠 때 잠시 일손을 빌리는 것을 제외하고 혼자 힘으로 농원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일을 하다 뒤돌아보면 어느 사이 쏙쏙 자란 푸른 것들이 주는 행복, 그 성취감이 대단하다”지만, 처음부터 농원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 초 그의 남편은 전형적인 전문직 화이트칼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인이었고, 그는 전업주부로 살림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 늘 같은 방향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삶은 우연치 않게 방향전환을 해, 18년 전 남편과 함께 내유동에서 농원을 시작했다. 지금의 ‘내유농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 시기. 도시에서만 살아온 남편은 오히려 멋모르고 설득하고 충청도가 고향인 그는 농사일의 고충을 알기에 마다하는 시작이었지만 그것도 잠시 노력한 만큼 보답하는 농원 일에 재미가 있었단다. 버티는 행복도 아름답다 애쓰고 힘든 만큼 배반하지 않는 농원 일이 차츰 자리잡아가면서 안정될 즈음, 아이들이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1학년일 무렵 그는 싱글 맘이 되었다. “갑작스런 아픔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그는 어쩌면 농원 일을 시작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남편이 계속 직장생활을 했더라면 전업주부로 남았을테고, 전업주부로 있었다면 자포자기 상태에서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 지나고 보니 해야 할 일이 있고 돌보아야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시간을 잘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한단다. “지나고 보니… 그랬다”고 말은 하지만 담담해지고 당당해지기까지 아픔이 없을 리 있을까. 다행히 혼자서도 운영해나갈 수 있도록 농원 시설이나 시스템이 자리 잡을 무렵이었다고 하지만 그런 것은 차치하고라도 한참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맞은 아이들 걱정이 제일 컸다고. “다른 건 몰라도 인덕은 있는 것 같다”는 조은미씨는 많은 이들이 그의 아픔을 같이 하고 마음을 함께 해주었지만 가장 큰 백그라운드로 친정아버지를 꼽는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식사 때마다 8남매나 되는 자녀들을 위해 일일이 기도를 드릴 정도로 사랑을 베푸신 분이라고 회상한다. “밥상을 앞에 놓고 8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하나하나 기도드렸으니 늘 식어 맛없는 밥을 먹는 것이 불만이었다”고 하지만 나중엔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기도와 “대신 넌 자식이 잘 될거야”라는 덕담을 해주시던 친정아버지 덕분에 그의 두 아들은 당당한 직장인으로, 또 엄마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 같은 버팀목으로 잘 자라주었다고 믿는단다. 그동안 내유동에서 삼송리를 거쳐 내유농원은 이전에 마련해두었던 김포 땅에 자리를 잡았다. 농원을 시작한 지 18년, 혼자 농원을 운영한 지는 12년 째. 아침에 출근해서 하우스 문을 열고 자식 같은 더피에 물을 주다가 문득 되돌아보면, 흙에 묻혀 보이지 않던 작은 것들이 어느 사이 쏙쏙 자라 제법 모양새가 나는 푸른 것들이 주는 행복, 그 성취감에 아픈 시간들도 묻혀 지나갔다는 그. “버티는 행복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가 참 멋지다. 농원은 오히려 세심한 여성에게 적합 “농원일이 예전처럼 일일이 노동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기계화된 시설로 여성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조언하는 조은미씨는 물을 주고 농약을 치는 등 초기 시설을 잘 갖춰놓으면 적정한 크기의 농원 정도는 여자 혼자 해나가도 어떤 사업보다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물론 어떤 작물을 기를 것인가에 대한 공부나 연구를 위해 농업전문학교 등에서 자기계발도 필요하고 같은 분야의 사람들과 트렌드에 대한 소통도 나눠야 하는 등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지만. “어떤 사업이든 그 정도 노력하지 않는 것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그는 농원일이 세심함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 오히려 여성에게 맞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쉬운 것은 없다”는 그는 “할 것 없으니까 농사나 짓지”라는 생각이 가장 위험하다고 조언한다. “화초도 유행이 있어 어떤 것이 잘 된다 싶으면 자칫 수급과잉으로 말 그대로 엎어버려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미련 없이 엎어버리고 빨리 다른 것으로 전환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여린 첫 인상을 확 깨는 카리스마,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내면의 여유로움…. 그는 참 가진 것이 많은 행복한 我줌마다.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21
- [기고]해외투자기업도 국내법으로 보호해야(장대근 2009.08.21) 해외투자기업도 국내법으로 보호해야 장대근 (변호사) 지난 몇년 동안 많은 기업들이 중국, 베트남, 동남아 등의 저렴한 생산비용을 이유로 생산공장을 해외에 건설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업들이 해외에 설립한 법인과 관련되어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과연 해외진출 법인은 우리나라 법과 법원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A사는 생산원가 절감을 위해 중국에 현지공장을 세우며 하청업체인 B사에게도 중국에 현지공장을 세우라고 제안했다. A사는 만일 중국에서 B사의 수익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 A사가 B사의 투자설비를 인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A와 B사는 각각 중국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그런데 A사의 중국 법인은 그 후 B사의 중국법인에게 거의 생산을 의뢰하지 않았다. 이에 결국 B사 중국법인은 막대한 손해만 보았고, A사 측에 설비인수를 요구하였으나 A사 측에서는 수년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갑’ 회사는 베트남에 현지공장을 세우며 하청관계에 있던 ‘을’ 회사에 베트남에 같이 진출하자고 했고 결국 ‘을’ 회사는 ‘갑’ 회사를 따라 베트남 ‘갑’ 회사 공장 내부에 별도의 공장을 세웠다. 하청업체들 피해사례 많아 그런데 몇 년 후 ‘갑’ 회사는 ‘을’ 회사와 거래를 중단하고 ‘을’ 회사가 사용하는 출입문을 봉쇄했다. 그리고 당시 베트남의 부동산 가치가 급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을’ 회사의 공장을 자기 회사에 염가에 매도하라고 압박을 했다. 위와 같은 일이 국내에서 벌어졌을 때에는 피해기업은 국내법원에 소를 제기하여 손해배상 등을 받을 수 있다. 해외에서 같은 일을 당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두 사례 모두 하청업체들은 해결책을 찾지 못해서 수년의 세월을 허비했고, 결국 막대한 경영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국내 기업이 전액 출자를 해서 해외에 현지공장을 설립하려면 현지에 별도의 법인을 설립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국내의 기업이 전액을 출자했고, 그 회사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운영해도 회사는 국내의 기업과는 별개의 해외기업이다. 결국 그 해외 출자기업과 관련된 분쟁은 해외법률에 의해 해결할 수 밖에 없다. 국내기업인들의 입장에서는 해외의 법률체계를 이해하는 것, 해당 국가 법률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 결국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국내로 돌아오는 기업이 많이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국 베트남 등 국내기업이 다수 진출한 국가들 사이에서 ‘사법공조협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사법공조협약은 분쟁 발생시 국내법원에서 소송을 할 수 있고, 국내법원의 판결을 해당국가 법원이 인정하는 것이다. 국내 모기업이 책임 지도록 하지만 사법공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해외에 진출해 설립한 법인에 관하여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 이에 대해 국내에 있는 모기업이 책임을 지도록 하는 법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고 본다. 한편, 기업인들 입장에서는 해외에 동반진출하는 회사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그 책임을 국내에 있는 모기업이 책임을 지는 것으로 서로 약정을 체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럴 경우 국내법원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해외 진출 기업이 많지만 우리의 법은 이런 현실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다. 민과 기업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 빨리 개선책이 필요하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