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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안 1000리를 가다]전남 지도가 달라진다 103개 연륙·연도교 건설 … 주민 삶의 질 높아져남해안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수산물 산지정도로만 인식됐던 남해바다와 섬이 21세기 해양시대를 맞아 해양문화·관광·산업·과학 전반을 이끌 새로운 도약발판으로 주목받는다. 남해에 면한 3개 지자체는 각각의 산업기반과 관광 자원을 한데 묶어 수도권에 버금가는 새로운 경제축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남해바다와 섬이 가진 의미, 천혜의 관광문화자원과 이를 지역과 국가성장 발판으로 삼으려는 지자체의 노력을 살펴본다.#2005년 12월 전남 완도 주민의 오랜 숙원이던 신지대교(완도~신지 840m)가 마침내 개통했다. 다리 개통으로 신지에 있는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찾는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개통 전 17만7520명이 1년 뒤 65만7890명으로 늘었고 지난해 125만여명을 돌파했다. 다리 하나가 관광객을 6배 이상 늘린 셈이다. #2006년 6월 전남 강진 마량과 완도 고금을 연결한 고금대교(760m)가 신풍속도를 만들고 있다. 예전에 볼 수 없던 관광버스가 평일 3대에서 주말 10여대까지 눈에 띈다. 토요일마다 마량 바닷가에서 열리는 토요음악회에는 관광객 200여명이 찾는다. 횟집은 신선한 횟감을 찾는 손님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상인 박명서(52)씨는 “다리 개통 이후 판매 수익이 30% 이상 늘었다”고 즐거워했다. 낙후지역 상징이던 섬. 교통망마저 부실했던 전남지역 섬은 더욱 그랬다. 신안군이 전국에서 지역낙후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꼽히는 이유도 섬이 많아서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육지와 섬, 섬과 섬을 잇는 다리가 개통되면서 섬 주민들 삶이 달라지고 있다. 전남 지도도 바뀌고 있다. ◆육지로 변하는 섬 = 전남도가 연륙·연도교 개설에 눈을 돌린 건 지난 2002년. 전국 62%에 달하는 1964개 섬, 6431km에 이르는 리아스식 해안과 생태 보고인 광활한 갯벌 등 즐비한 관광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서다. 2000년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전남은 1995년까지 당일·숙박여행지 5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1999년에는 경기와 경북 경남에 이어 4위에 올랐다. 그러나 관광 목적지는 자연명승지나 사적지 중심이었고 전남도 대표자산인 해변이나 해수욕장을 찾는 관광객은 10% 미만에 불과했다. 전남도는 이런 상황을 돌파할 카드로 ‘연륙·연도교 개설’을 꺼냈고 지금까지 38개를 완공했다. 또 무안군~신안 압해도(925m) 연륙교 등 25개는 현재 건설 중이다. 기본계획을 수립 중인 다리까지 합치면 모두 103개다. 핵심은 ‘여수와 고흥(57.9km)을 잇는 연륙·연도교와 신안 비금과 도초 자은 압해 안좌 등 ‘다이아몬드 클러스터’를 연결하는 연도교다. 여수 등 3개 반도 10개 섬을 하나로 잇는 11개 교량이 설치되고 여수 화양과 백야도를 잇는 백야대교가 개통됐다. 2개 구간은 공사 중이다. 다이아몬드 클러스터에는 비금~도초 등 다리 4개가 이미 완공됐고, 11개가 추가로 놓여진다. 이곳은 다리가 완공되면 주변 경관과 어울려 한폭의 동양화를 그려내는 것은 물론 다리 자체만으로도 세계적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조상필 전남발전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도서 주민의 교통기본권을 충족하는 한편 관광자원 개발을 위해서라도 연륙·연도교 개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도로도 촘촘해지고 있다. 53개 지구에서 국도건설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올해 장성~야은 등 5개 지구 35km 구간이 개통된다. 순천~여수간 자동차 전용도로 등 39곳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지방도 사업으로는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와 도청을 연결하는 나주 동강~무안 일로 등 9개 지구 확장·개설사업이 올해 착공됐다. ◆연륙·연도교, 국가의 관광자원 = 다리와 도로가 뚫리면서 접근성이 크게 개선돼 해수욕장 관광객이 500만명을 넘어섰다. 성장 잠재력 또한 풍부하다. 도는 연륙·연도교와 2010 F1국제자동차경주대회,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등을 연결, 관광분야에서 일대 도약을 한다는 계획이다. 그런 점에서 연륙·연도교는 전남의 미래를 여는 새로운 성장 동력인 셈이다. 정부가 조만간 발표할 ‘남해안발전종합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 부산-경남-전남을 연결하는 도로망도 훨씬 좋아진다. 3개 지역이 하나의 관광 축을 형성, 동북아 관광허브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특히 중국 관광객이 선호하는 제주를 남해안관광벨트에 연결하면 해양레포츠를 만끽할 세계적 관광명소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관광형태도 남해안에 유리하게 바뀌고 있다. 세계관광기구는 21세기 관광형태를 자연밀착형 모험추구형 문화추구형 건강추구형 체험관광 등으로 나눴다. 여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해양관광과 해양레포츠 분야다. 따라서 전남도는 연륙·연도교와 도로 개설 등을 국토 이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고려, 정부에서 재정지원을 해야한다는 입장이다. 홍석태 전남도 건설방재국장은 “연륙·연도교는 단순 통과기능이 아닌 해양관광산업을 육성하고 해상과 대륙을 연계한 관광자원을 개발하는 일석삼조의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무안 방국진 기자 kjbang@naeil.com한센인, 92년만에 육지와 ‘소통’희망의 다리 소록대교3월 고흥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개통됐다. 한센인이 섬에 강제 수용된 지 92년만에 육지와 연결된 셈이다. 일제강점기 초 한센병 환자는 광주 부산 대구 등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요양원에 수용됐다. 하지만 요양시설이 턱없이 부족해 다리 밑이나 움막에 사는 경우가 허다했다. 조선총독부는 강제 수용지로 소록도를 정하고 1917년 73명을 수용했다. 1933년에는 더 많은 한센인을 수용하기 위해 강제노역을 시켰고 전쟁 물자 생산에도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한센인에 대한 핍박과 탄압은 끊이지 않았다. 이유없는 구타에 정관수술을 강요받기도 했다.1963년 한센병 환자 격리·수용정책이 폐지될 때까지 고통이 이어졌다. 그 후 주민들은 격리에서 벗어나고자 다리건설을 요구했다. 편견 때문에 번번이 무산되기 수차례, 주민들이 요구한지 40여년만에 마침내 소록대교가 개통됐다. 다리가 생기면서 평일 300여대, 주말 700여대 차량이 소록도를 방문한다. 외부와의 접촉이 늘면서 주민 생활도 차츰 안정을 되찾고 있다. 주민들은 가깝게는 녹동항에서 멀게는 고흥까지 나가 생활 필수품을 사 올 정도로 활동반경을 넓히고 있다. 김정행(71) 자치회장은 “초기에 비해 주민 생활이 안정되고 있다”며 “이젠 살만하다”고 말했다. 소록대교로 인해 격리의 세월을 끝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주민들. 다만 움직임이 불편한 한센인을 고려, 인도폭을 넓혀줄 것을 익산지방국토관리청에 요구하고 있다. 고흥 방국진 기자 kjbang@naeil.com최신공법과 첨단기술 집약주변 경관 최대한 살린 연륙&m 2009-06-24
- 남해안기획 기사 제목: 섬을 잇는 다리, 전남의 미래 희망(사진 있음 11장) 부제: 103개 연륙·연도교 건설 .... 주민 삶의 질 높아져 #1. 2005년 12월 14일 전남 완도 주민의 오랜 숙원이던 신지대교(완도~신지면, 840m)가 마침내 개통했다. 다리 개통으로 신지에 있는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찾는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개통 전 17만7520명이던 것이 1년 사이 65만7890명으로 늘었고, 지난해 125만여명을 돌파했다. 다리 하나가 관광객을 6배 이상 끌어 모을 정도로 높은 부가가치를 만든 것이다. #2. 2006년 6월 29일(?) 강진군 마량과 완도군 고금을 연결한 고금대교(길이 760m)가 신풍속도를 만들고 있다. 예전에 볼 수 없던 관광버스가 평일 3대에서 주말 10여대 가량 눈에 띈다. 또 매주 토요일 마량 바닷가에선 ‘토요음악회’가 열리고 관광객 200여명이 찾아온다. 횟감을 찾는 손님들도 장사진을 이룬다. 주민 박명서(52)씨는 “다리 개통 이후 판매 수익이 30% 이상 늘었다”고 즐거워했다. 과거 섬은 낙후의 상징이었다. 도로까지 부실했던 전남 섬은 더욱 그랬다. 신안군이 전국에서 지역낙후도가 가장 높은 것도 ‘섬’이 많아서다. 그러나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육지와 섬을 잇고, 섬과 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개통되면서 섬 주민들의 삶도 개선되고, 전남의 지도도 바뀌고 있다. ◆육지로 변하는 섬 = 전남도가 ‘연륙·연도교 개설’에 눈을 돌린 건 지난 2002년. 전남은 전국 62%에 달하는 1964개 섬, 6431km에 이르는 리아스식 해안, 생태 보고인 광활한 갯벌 등 관광자원이 즐비하다. 하지만 열악한 도로망 때문에 비교우위인 관광자원을 제대로 써 먹지 못했다. 2000년 한국관광공사 국민여행실태조사에 따르면 전남은 1995년까지 당일·숙박여행지를 꼽았을 때 5위 안에도 못 들었다. 1999년에 가서야 경기·경북·경남 에 이어 겨우 4위에 올랐다. 더군다나 관광 목적지가 대부분 자연명승지나 사적지 중심이었고 자랑거리인 해변이나 해수욕장은 10% 미만에 불과했다. 전남도는 이런 상황을 돌파할 카드로 ‘연륙·연도교 개설’을 꺼냈고, 지금까지 38개를 완공했다. 또 무안군~신안 압해도(925m) 연륙교 등 25개를 건설 중이다. 여기에다 기본계획을 수립 중인 다리를 합쳐 모두 103개 교량이 만들어진다. 이중 핵심은 ‘여수와 고흥(57.9km)을 잇는 연륙·연도교 개설과 신안 비금~도초~자은~압해~안좌(다이아몬드 클러스터) 등을 연결하는 연도교다. 여수 등 3개 반도 10개 섬을 하나로 연결하는 대역사에는 11개 교량이 설치되며, 이미 백야대교(여수 화양~ 백야도)가 개통했다. 또 2개 구간이 공사 중이다. 다이아몬드 클러스터에는 비금~도초 등 다리 4개가 이미 완공됐고, 11개가 추가로 놓여진다. 이곳의 다리들이 완공되면 그 자체가 세계적인 관광자원으로 손색이 없으며, 주변 경관과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 낼 것으로 전망된다. 조상필 전남발전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도서민의 교통기본권 충족과 관광자원 개발을 위해서라도 연륙·연도교 개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리가 개설되면서 도로도 촘촘해지고 있다. 53개 지구에서 국도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올해 장성~야은 등 5개 지구 35km구간이 개통된다. 또 순천~여수간 자동차 전용도로, 등 39곳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지방도 사업으론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와 도청을 연결하는 나주 동강~무안 일로 등 9개 지구 확장 및 개설사업이 올해 착공됐다. ◆연륙·연도교, 국가의 관광 자원 = 다리와 도로가 뚫리면서 전남의 접근성이 크게 개선돼 해수욕장을 찾은 관광객이 500만명을 돌파했다. 성장 잠재력 또한 풍부하다. 이미 확충된 연륙·연도교와 2010 F1국제자동차경주대회,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등을 연결시키면 관광분야에서 일대 도약을 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연륙·연도교 개설이 전남의 미래를 여는 새로운 성장 동력인 셈이다. 또 정부가 조만간 발표할 ‘남해안발전종합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경우, 부산-경남-전남을 연결하는 도로망도 훨씬 좋아진다. 이는 부산-경남-전남이 하나의 관광 축을 형성, 동북아 관광허브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중국 관광객이 가장 선호하는 제주를 남해안관광벨트에 연결할 경우 이곳은 해양레포츠를 만끽할 세계적인 관광명소를 성장할 잠재력을 지니게 된다. 관광형태도 남해안에 유리하게 바뀌고 있다. 세계관광기구(WTO)는 21세기 관광형태를 자연밀착형, 모험추구형, 문화추구형, 건강추구형, 체험관광 등으로 나눴다. 여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해양관광과 해양레포츠 분야다. 따라서 전남에 연륙·연도교나 도로 등을 개설하는 것이 ‘국토 이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고려돼 정부의 재정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전남도 입장이다. 홍석태 전남도 건설방재국장은 “연륙·연도교 건설은 단순 통과기능이 아닌 해양관광산업을 육성하고 해상과 대륙을 연계한 관광자원을 개발하는 일석삼조의 사업이다”고 강조했다. 전남 방국진 기자 kjbang@naeil.com 희망을 소통시키는 소록대교(사진 있음 장) 올 3월 개통 ..... 한센인과 외부인 접촉 늘어나 지난 3월 고흥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한센인을 강제 수용된 지 92년 만에 개통했다. 일제 초 한센병 환자는 광주·부산·대구 등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요양원에 수용됐다. 하지만 요양시설이 턱없이 부족해 다리 밑이나 움막에 사는 경우가 허다했다. 조선총독부는 소록도를 강제 수용지로 정하고 1917년 73명을 수용했다. 1933년에는 더 많은 한센인을 수용하기 위해 강제노역을 시켰고 전쟁 물자 생산에도 동원됐다. 이 과정에서 한센인에 대한 핍박과 탄압은 끊이지 않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구타를 당하고 정관수술도 강요받았다. 해방이 됐지만 변한 게 없었다. 1963년 한센병 환자 격리·수용 정책이 폐지될 때까지 고통이 이어졌다. 그 후 주민들은 격리에서 벗어나고자 다리 건설을 요구했다. 하지만 편견 때문에 번번이 무산됐다가 지난 3월 소록대교가 마침내 개통됐다. 다리가 생기면서 평일 300여대, 주말 700여대 차량이 소록도를 방문했다. 외부와의 접촉이 늘면서 크고 작은 잡음 생겼다. 관광객들은 “여기가 문둥이들이 사는 곳 아니냐”고 귓속말을 해 댔고, 주민들도 외부인을 경계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 됐다. 외부 접촉이 늘면서 주민 생활도 차츰 안정을 되찾고 있다. 주민들은 가깝게는 녹동항에서 멀게는 고흥까지 나가 생활필수품을 사 올 정도로 활동반경을 넓히고 있다. 김정행 자치회장(71)은 “초기에 비해 주민 생활이 안정되고 있다”며 “이젠 살만하다”고 말했다. 소록대교가 격리의 세월을 끝내고 주민들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주는 것이다. 고흥 방국진 기자 kjbang@naeil.com 연륙·연도교, 최신공법과 첨단기술 집약 주변 경관 최대한 살려 ... 국내최대 규모 선보여 여수~고흥(57.9km)구간에 개설되는 11개 연륙·연도교가 주변 경관을 최대한 살리고 첨단기술을 동원해 만들어진다. 이 구간의 다리는 지난 2002년 아름다운 경관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국제현상공모를 통해 다리 모양을 결정했다. 시행청인 국토해양부와 익산지방국토관리청이 최종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현상 공모된 모양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첫 단추는 이미 꿰었다. 지난 2005년 여수 화양과 백야도를 잇는 백야대교(길이 345m)가 착공 5년 만에 완공됐다. 최대 경간장이 183m인 백야대교는 닐센아치형 교량으로 최신공법과 첨단기술이 집약된 다리다. 고흥과 고흥 적금도를 잇는 연륙교와 여수 돌산도와 화태도를 잇는 연도교도 이미 착공에 들어갔다. 고흥~적금도 잇는 교량은 가교 지점의 수심조건과 곡선인 도로선형 등을 감안, 국내 몇 손가락 2009-06-23
- 한명숙 전 총리 조사 전문 조 사 1. 노 무 현 대통령님. 얼마나 긴 고뇌의 밤을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떠나셨습니까? 대통령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떠안은 시대의 고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새벽빛 선연한 그 외로운 길 홀로 가셨습니까? 유난히 푸르던 오월의 그날, ‘원칙과 상식’ ‘개혁과 통합’의 한길을 달려온 님이 가시던 날, 우리들의 갈망도 갈 곳을 잃었습니다. 서러운 통곡과 목 메인 절규만이 남았습니다. 2. 어린 시절 대통령님은 봉화산에서 꿈을 키우셨습니다. 떨쳐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한 가난을 딛고 남다른 집념과 총명한 지혜로 불가능할 것 같던 꿈을 이루었습니다. 님은 꿈을 이루기 위해 좌절과 시련을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힘차게 세상에 도전했고, 꿈을 이룰 때마다 더욱 큰 겸손으로 세상을 만났습니다. 한없이 여린 마음씨와 차돌 같은 양심이 혹독한 강압의 시대에 인권변호사로 이끌었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를 향한 열정은 6월 항쟁의 민주투사로 만들었습니다. 3. 그렇게 삶을 살아온 님에게 ‘청문회 스타’라는 명예는 어쩌면 시대의 운명이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3당 합당을 홀로 반대했던 이 한마디! 거기에 ‘원칙과 상식’의 정치가 있었고 ‘개혁과 통합’의 정치는 시작되었습니다. ‘원칙과 상식’을 지킨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거듭된 낙선으로 풍찬노숙의 야인 신세였지만, 님은 한 순간도 편한 길, 쉬운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노사모’ 그리고 ‘희망돼지저금통’ 그것은 분명 ‘바보 노무현’이 만들어낸 정치혁명이었습니다. 4. 노 무 현 대통령님. 님은 언제나 시대를 한 발이 아닌 두세 발을 앞서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영악할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왜곡과 음해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렵다고 돌아가지 않았고 급하다고 건너뛰지 않았습니다. 항상 멀리 보며 묵묵하게 역사의 길을 가셨습니다. 반칙과 특권에 젖은 이 땅의 권력문화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습니다. 화해와 통합의 미래를 위해 국가공권력으로 희생된 국민들의 한을 풀고 역사 앞에 사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님이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대한민국에선 분명 국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동반성장, 지방분권, 균형발전 정책으로 더불어 잘사는 따뜻한 사회라는 큰 꿈의 씨앗들을 뿌려놓았습니다. 흔들림 없는 경제정책으로 주가 2천, 외환보유고 2,500억 달러 무역 6천억 달러,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 한반도 평화를 한 차원 높였고 균형외교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해 냈습니다.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쓰는 세계 첫 대통령으로 이 나라를 인터넷 강국, 지식정보화시대의 세계 속 리더국가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이 땅에 창의와 표현, 상상력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고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한류가 넘치는 문화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대통령님이 떠난 지금에 와서야 님이 재임했던 5년을 돌아보는 것이 왜 이리도 새삼 행복한 것일까요. 5. 열다섯 달 전, 청와대를 떠난 님은 작지만 새로운 꿈을 꾸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잘사는 농촌사회를 만드는 한 사람의 농민, ‘진보의 미래’를 개척하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는 소중한 소망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봉하마을을 찾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뇌하고 또 고뇌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세월과 험한 시절은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룰 기회마저 허용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한없이 엄격하고 강인했지만 주변의 아픔에 대해선 속절없이 약했던 님. ‘여러분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글을 접하고서도 님을 지키지 못한 저희들의 무력함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그래도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의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지막 꿈만큼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세상은 ‘인간 노무현’으로 살아갈 마지막 기회조차도 빼앗고 말았습니다. 6. 님은 남기신 마지막 글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써놓으신 글에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남아 있는 저희들을 더욱 슬프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대통령님. 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님의 말씀처럼 실패라 하더라도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희들이 님의 자취를 따라, 님의 꿈을 따라 대한민국의 꿈을 이루겠습니다. 그래서 님은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 생전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분열로 반목하고 있는 우리를 화해와 통합으로 이끄시고 대결로 치닫고 있는 민족 간의 갈등을 평화로 이끌어주십시오. 그리고 쓰러져가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꽃피우게 해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대통령님을 떠나보냅니다. 대통령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정치하지 마십시오. 또 다시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더는 혼자 힘들어 하시는 일이 없기를, 더는 혼자 그 무거운 짐 안고 가시는 길이 없기를 빌고 또 빕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을 놓아드리는 것으로 저희들의 속죄를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저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가십시오.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 대통령님 편안히 가십시오.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위원장 한명숙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5-29
- 소설가 이현옥 씨가 추천한 불로동 ‘평화식당’ 여러 번 갔었다. 삼겹살부터 목살, 돼지갈비, 김치 전골까지 안 먹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두루 섭렵한 곳이다. 점심이고 저녁이고 사람이 붐벼 갈 때마다 후회하면서도 맛을 잊지 못해 결국은 다시 제 발로 찾아가는 몇 안 되는 곳 중의 하나다.주인인 손영성 씨는 “집에서 먹는 밥처럼 하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온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이 자리에서만 20년이 넘었다.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은 단골로 늘어가고 다시 젊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다. 맛이 뛰어난 죄로 방송도 여러 번 탔다. 맛 집 소개한 사진이 이곳저곳 벽에 걸려 있다. 이 집을 소개한 소설가 이현옥 씨의 얼굴도 그 안에 얼핏 보인다. 항상 열어져 있는 가게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프랜카드 한 장이 눈길을 끈다. ‘주문하신 고기가 마음에 안 드시면 바꿔드립니다’ 처음엔 얼마나 고기가 맛있으면 저럴까하는 의문이 있었다. 다시 생각하면 그만큼 자신이 있는 성실하다는 이야기이다.김치찌개가 아닌 김치 전골이 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언제 보아도 막 담은 것 같은 김치다. 주인이 직접 배추를 기르고 담아 낸 김치는 사철 내내 별미다. 겨울에는 사람들을 모집해 김치 담그는 행사를 주기적으로 벌일 정도다. 요즘은 담은 김치를 판매 하거나 주문을 받아 담가 주기도 한다. 그래서 더 맛있는 것이 칼칼하게 먹을 수 있는 김치 전골이다. 보통 김치찌개 이지만 이 집에서만은 전골이다. 그만큼 맛이 진하고 육수가 배어나와 칼칼하다.다른 집처럼 돼지고기에 두부, 김치가 다인 것 같은데도 무슨 일을 벌인 것 같은 독특한 맛이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특히 20대가 주류인 손님을 보면 독특한 맛은 세대를 초월해 입맛을 사로잡은 비결이 분명 있다.밑반찬도 장난 아니다. 한 번도 인상 쓰지 않고 무한 리필해 주는 달콤한 계란말이부터 제철 나물들이 미각을 자극한다. 식사를 다 한 한 후, 더 즐거운 것은 일 년 내내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아이스크림이다. 계산 후 나오면서 아이스크림 하나 씩 입에 물고 나오며 핥아먹는 재미는 나이를 먹어가도 여전히 즐거운 일이다.●차림표 : 김치전골, 삼겹살, 돼지갈비, 목살구이 ●위치 : 동구 불로동 콜박스 근처●문의 : 062-226-6226 2009-06-22
- [[6·25 전쟁 59주년 ''한반도에 평화를''] ① 기억조차 하기싫은 전쟁의 참상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올해로 59년. 긴 세월이 흘렀지만 전쟁의 상처는 좀체 아물지 않고 있다. 6·25전쟁으로 민간인을 포함 200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희생됐고 이산가족만 2000만명을 헤아릴 정도다. 1953년 휴정협정 체결과 함께 전쟁은 일단 끝이 났지만 한반도는 둘로 나뉘어졌고 전쟁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특히 최근 10년간 ‘대화와 협력’으로 다져진 한반도 평화체제는 이명박정부 출범과 함께‘압박과 대치’로 바뀌면서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일부에선 이 대통령이‘전쟁’이란 단어까지 언급하며 대북 강경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당장 서해북방 한계선(NLL)부근에서 북한이 국지적 군사도발을 선제 감행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는 등 어느 때보다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6·25 전쟁과 같은 비극이 한반도에서 더 이상 일어나선 안된다는 것은 골백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나 ‘참혹하고 참혹한’전쟁을 겪었기 때문이다.방어 능력 없는 부녀자 노인 몰아 놓고 무차별 사격 군경, 재소자 집단학살 … “유례없는 비인도적 행위” 진실규명 제대로 안돼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민족 간에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운 처참한 비극이었다. 특히 남북한 양측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혔다.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피해 통계’에 따르면 남한에서 이 전쟁으로 인해 군인들은 13만5000명이 전사하고 44만3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특히 1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 등으로 직접적 피해를 입었다. ◆통계로 본 전쟁의 상흔 = 또 8333명의 군인이 북한에서 포로가 되어 갖은 고초를 겪다 포로교환 때 생환했다. 포로교환이 끝난 1953년말 이후 4만명 이상의 포로를 북한이 억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남한이 입은 물질적 피해의 규모는 4123억 원에 달한다.북한 역시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북한은 그러나 피해규모 등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다만 구소련 자료에 따르면 최소 38만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7만5823명의 군인이 UN측에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교환에 의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민간인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약 80만명이 남한으로 넘어왔고 28만명이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전쟁으로 남북간에 흩어져 고통 받고 있는 이산가족은 2000만명에 달한다.◆민간인 사망자 군인보다 많아 = 한국전쟁은 전쟁사상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됐다. 방어할 능력이 없는 민간인들에 대한 여러 유형의 학살이 존재했기 때문이다.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단체 등에 따르면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최소 200만명의 희생됐는데 이들 중 반 이상은 민간인이었다. 특히 민간인 학살은 전쟁초기에 집중적으로 자행됐다. 지난 1950년 겨울 전남 함평과 전북 남원 순창 등지에선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육군 11사단에 의해서 주도된 토벌작전의 결과이기도 했다. 전북 임실에서는 50년 11월에서 51년 3월에 걸쳐서 수백명의 민간인이 학살됐고 같은 기간 고창에서도 수백명이, 순창에서는 1000여명의 주민이 이유 없이 국군에 의해 학살됐다. 전남 함평에서도 1월 12일 월야면 동촌마을 등 9개면 9개 마을에서 500여명의 주민들이 토벌대의 습격으로 집단 학살당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51년 2월 초순 11사단 9연대는 경남 산청, 거창, 함양 등지에서 활동하는 빨치산을 인민군의 춘계공세 이전에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이른바 ‘견벽청야’ 작전에 나섰다. 말 그대로 ‘거점은 지키되 빨치산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 은 없애버리라’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로 인해 51년 2월 8일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에서는 토벌대가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사람과 가축을 모두 몰아낸 후 집에 불을 질렀다. 가죽과 베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따로 모은 군인들은 동네사람들을 모두 마을 앞 산신당 골짜기로 몰아넣은 후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당시 주민 123명이 즉사하고 6명만이 생존했다. 같은 만행은 이웃 방곡리, 점촌리, 자혜리, 화계리, 주상리에서도 반복됐다. 이 날 하루 동안 529명으로 추정되는 주민들이 학살됐다. 같은 해 2월 10일 거창군 신원면에 출동하 ‘공비들 때문에 위험하니 피난을 가야 한다’며 신원국민학교로 마을주민들을 몰아넣고 가는 도중 행렬을 잘라 뒷줄은 탄량골에 밀어 넣고 군인가족을 골라낸 뒤 집단 총살했다.‘거창 양민학살’로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으로 약 1500여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11사단 9연대의 초토화 작전의 제물이 됐다. 이들 희생자중 대다수가 50,60대 노년층 혹은 10대미만의 어린아이와 여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거창학살은 비극성을 더한다. 일부 지역에선 북한 인민군과 국군이 번갈아 민간인을 학살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전남 영암에서 1949년 7월~1951년 5월에는 인민군과 좌익세력이, 1950년 10월~1951년 3월에는 국군과 경찰이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인민군과 좌익세력은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등의 이유로 영암군 군서면 등 9곳 읍·면에서 최소 149명을 학살했다. 국군과 경찰은 전쟁 때 북측에 협조한 사람을 색출하겠다며 영암군 금정면 등지에서 최소 234명을 숨지게 했다. ◆형무소에서도 민간인 학살 = 민간인 학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형무소에서도 자행됐다. 진실화해위원는 최근 “한국전쟁 발발 직후 형무소에 갇힌 재소자와 민간인 3400여명이 군인과 경찰, 교도관 등에 의해 희생된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고 밝혔다.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은 제주 4ㆍ3 사건과 여순사건 등으로 전국 형무소 20여곳에 수감 중이던 최소 2만명의 재소자와, 예비검속으로 구금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집단 학살돼 암매장되거나 수장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가 진실을 규명한 곳은 부산과 마산, 진주 형무소 등 3곳이며 국가가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을 조사해 실태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동춘 상임위원은 “인민군 비점령지역으로 부산, 경남 지역에서 이미 신병이 확보돼 격리 중이던 재소자와 민간인 수천명을 군경이 일방적이고 임의로 집단 학살한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비인도적 행위였다”고 말했다. ◆‘학살 규명’제대로 안돼 = 한국전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을 포함해 항일독립운동, 인권침해 등 현재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진실규명 요구건수 1만988건 가운데 진실규명이 이뤄진 것은 29%인 3187건에 불과하다.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사건만 56.7%인 6227건이지만 1년 안에 진실을 규명하기엔 무리라는 것이 진실위 안팎의 판단이다.올해 유해발굴지는 전 2009-06-22
- 6·25 전쟁 59주년‘한반도에 평화를’① 기억하기조차 싫은 전쟁의 참상 문패) 6·25 전쟁 59주년‘한반도에 평화를’① 기억하기조차 싫은 전쟁의 참상 민간인 100만명 사망·학살·행방불명 방어 능력 없는 주민들 한곳에 몰아 놓고 무차별 사격 군경이 임의로 재소자 집단학살 … “유례없는 비인도적 행위” 진실규명 제대로 안돼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59년. 긴 세월이 흘렀지만 전쟁의 상처는 좀체 아물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민간인을 포함 200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희생됐고 이산가족만 2000만명을 헤아릴 정도다. 1953년 휴정협정 체결과 함께 전쟁은 일단 끝이 났지만 한반도는 둘로 나뉘어졌고 전쟁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특히 최근 10년간 ‘대화와 협력’으로 다져진 한반도 평화체제는 이명박정부 출범과 함께‘압박과 대치’로 바뀌면서 한반도 전역에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일부에선 이 대통령이‘전쟁’이란 단어까지 언급하며 대북 강경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당장 서해북방 한계선(NLL)부근에서 북한이 국지적 군사도발을 선제 감행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는 등 어느 때보다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6·25 전쟁과 같은 비극이 한반도에서 더 이상 일어나선 안된다는 것은 골백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나도 ‘참혹하고 참혹한’전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통계로 본 한국전쟁 =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민족 간에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운 처참한 비극이었다. 특히 남북한 양측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혔다.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피해 통계’에 따르면 남한에서 이 전쟁으로 인해 군인들은 13만5000명이 전사하고 44만3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특히 1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 등으로 직접적 피해를 입었다. 또 8333명의 군인이 북한에서 포로가 되어 갖은 고초를 겪다 포로교환 때 생환했다. 포로교환이 끝난 1953년말 이후 4만명 이상의 포로를 북한이 억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남한이 입은 물질적 피해의 규모는 4123억 원에 달한다. 북한 역시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북한은 그러나 피해규모 등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다만 구소련 자료에 따르면 최소 38만명의 군인이 전장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또 7만5823명의 군인이 UN측에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교환에 의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민간인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줄잡아 80만명이 남한으로 넘어왔고 28만명이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북한의 재산피해는 4201억원으로 추산된다. 전쟁으로 남북간에 흩어져 고통 받고 있는 이산가족이 2000만명에 달한다. ◆민간인 사망자 군인보다 많아 = 한국전쟁은 전쟁사상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됐다. 방어할 능력이 없는 민간인들에 대한 여러 유형의 학살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과거사진실화해위원회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단체 등에 따르면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최소 200만명의 희생됐는데 이들 중 반 이상은 민간인이었다. 특히 민간인 학살은 전쟁초기에 집중적으로 자행됐다. 지난 1950년 겨울 전남 함평과 전북 남원 순창 등지에선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육군 11사단에 의해서 주도된 토벌작전의 결과이기도 했다. 전북 임실에서는 50년 11월에서 51년 3월에 걸쳐서 수백명의 민간인을 학살됐고 같은 기간 고창에서도 수백명이, 순창에서는 1000여명의 주민이 이유 없이 국군에 의해 학살됐다. 전남 함평에서도 1월 12일 월야면 동촌마을 등 9개면 9개 마을에서 500여명의 주민들이 토벌대의 습격으로 집단 학살당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51년 2월 초순 11사단 9연대는 경남 산청, 거창, 함양 등지에서 활동하는 빨치산을 인민군의 춘계공세 이전에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이른바 ‘견벽청야’ 작전에 나섰다. 말 그대로 ‘거점은 지키되 빨치산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 은 없애버리라’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로 인해 51년 2월 8일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에서는 토벌대가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사람과 가축을 모두 몰아낸 후 집에 불을 질렀다. 가죽과 베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따로 모은 군인들은 동네사람들을 모두 마을 앞 산신당 골짜기로 몰아넣은 후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당시 주민 123명이 즉사하고 6명만이 생존했다. 같은 만행은 이웃 방곡리, 점촌리, 자혜리, 화계리, 주상리에서도 반복됐다. 이 날 하루 동안 529명으로 추정되는 주민들이 학살됐다. 이중 남자들은 50여명에 불과했다. 젊은 남자들은 미리 피신하였기 때문이다. 대신 60대와 70대 노인과 10살 미만의 어린이 100여명은 영문도 모른 채 국군의 총에 맞아 운명을 달리했다. 같은 해 2월 10일 거창군 신원면에 출동하 ‘공비들 때문에 위험하니 피난을 가야 한다’며 신원국민학교로 마을주민들을 몰아넣고 가는 도중 행렬을 잘라 뒷줄은 탄량골에 밀어 넣고 군인가족을 골라낸 뒤 집단 총살했다. ‘거창 양민학살’로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으로 약 1500여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11사단 9연대의 초토화 작전의 제물이 됐다. 이들 희생자중 대다수가 50,60대 노년층 혹은 10대미만의 어린아이와 여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거창학살은 비극성을 더한다. ◆형무소에서도 민간인 학살 = 민간인 학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감옥(형무소)에서도 자행됐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최근들어 한국전쟁 발발 직후 형무소에 갇힌 재소자와 민간인 3400여명이 군인과 경찰, 교도관 등에 의해 희생된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은 제주 4ㆍ3 사건과 여순사건 등으로 전국 형무소 20여곳에 수감 중이던 최소 2만명의 재소자와, 예비검속으로 구금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집단 학살돼 암매장되거나 수장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가 진실을 규명한 곳은 부산과 마산, 진주 형무소 등 3곳이며 국가가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을 조사해 실태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실화해위는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에 대해 2006년 11월부터 직권조사를 시작했으며, 아직 조사 중인 675건에 대해 올해 안에 조사를 마무리하고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김동춘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인민군 비점령지역으로 부산, 경남 지역에서 이미 신병이 확보돼 격리 중이던 재소자와 민간인 수천명을 군경이 일방적이고 임의로 집단 학살한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비인도적 행위였다”고 말했다. ◆‘학살 규명’제대로 안돼 = 한국전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을 포함해 항일독립운동, 인권침해 등 현재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진실규명 요구건수 1만988건 가운데 진실규명이 이뤄진 것은 29%인 3187건에 불과하다.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사건만 56.7%인 6227건이지만 1년 안에 진실을 규명하기엔 무리라는 것이 진실위 안팎의 판단이다. 올해 유해발굴지는 전국 30여곳 이상의 유해매장 추정지 중 전남 함평군 불갑산 일대, 진주시 문산읍 명석면 일대 등 4곳만이 선정됐다. 문제는 진실위원회 활동시한이 내년 4월로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실위의 기한연장 없이는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인 셈이다. 때문에 한국전쟁 전후 군인 경찰에 의한 집단학살 희생자의 유족들 사이에서 진실위의 활동기한을 연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고병수 기자 byng8@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6-22
- 중요무형문화재 태평무 이수자, 무용가 이용덕 어린 시절의 꿈들은 한 순간 어떤 영감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 속의 한 장면, 위인전 속의 한 구절 등 짧지만 강렬하게 가슴에 필이 꽂히는 순간 말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로 무용가로 지도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용덕(47)씨. 그의 꿈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수원의 한 국악원에서 꼭두각시 춤을 보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순탄대로는 아니었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그 때 주저앉았다면 지금 같은 행복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그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무용에 입문할 수 있었던 큰 힘은 어머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단순하고 유치(?)하기도 했던 꼭두각시 춤이 왜 그리 아름답게 보이던지 그 날 이후로 무용이 하고 싶어 몸살이 났다”고 웃는 이용덕씨.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그가 열 살 남짓하던 당시에는 무용을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용학원도 거의 없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여자가 많이 배워봐야 소용 없다”고 생각하던 완고하고 보수적인 양반. 그런 아버지 몰래 그를 지원해 준 것은 어머니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내내 무용을 할 수 있었고 대학 무용과에 입학했지만, 그 때까지 아버지는 대학도 다른 과로 진학한 줄 아셨다고.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무용을 하도록 지원해줬다 하면 집이 좀 사는가 보다 생각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다”는 이용덕씨. 물질적인 도움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오빠의 도움도 받고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한 해 벌어 한 해 학교 다니고 또 휴학을 거듭하다보니 졸업도 남들보다 한참이나 늦었고 석사과정도 대학졸업 후 10년 만에야 끝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무용을 포기하지 않았던 힘은 부모님이었다. 어머니는 꿈을 꺾지 않도록 지켜준 정신적인 지주였고 장단과 시조를 즐기던 아버지는 비록 반대는 했지만 그에게 예인(藝人)의 기질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할수록 빠져드는 한국무용의 매력 “일반인들이 보는 것보다 한국무용은 참 어렵고 힘든 춤이에요. 테크닉에 집중되는 타 무용 장르에 비해 한국무용은 전통무용 살풀이, 승무, 민속무용, 궁중무용, 검무 등 너무나 다양해 30여 년 무용을 하면서도 부채, 장구, 북, 타악 등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죠.” 한국무용 중에서도 그가 매료된 것은 태평무. 가슴 속 깊이 박힌 내면의 것을 절제된 동작으로 풀어내는 살풀이에 비해 웅장하고 화려하고 우아한 태평무에 더 끌린단다. 지난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에 이어 2006년 전북무형문화재 제7-2호 정읍설장고를 이수한 그는 그동안 경희대 경인여대 강사, 고양시 무용협회 이사, 통일문화예술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10여 년째 세원고 연극부의 한국무용을 지도하고 있고 총신대학에서 실버무용 담당 교수로 재직하는 등 무용가로 지도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주부로서의 역할, 최선을 다하려 노력 한 해에 수차례 지방과 해외 무대가 그를 기다리지만, 무대 밖에서는 그도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주부다. 자기 일을 가진 여성들이 대부분 일과 가정, 둘 다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부분 포기하거나 타협한다고 하지만 이용덕씨는 무대 밖에서는 주부로서의 역할에 소홀하지 하려고 무던히도 애썼다고 토로한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다 남편도 예술과는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하는 터라 “충실하려고 했던 것보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 맞다”는 그는 공연을 앞두고 새벽까지 연습해야 하는 상황을 남편이 이해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해가 안 돼 서운하기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한다고 해도 많은 것이 부족했을 남편이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다고 한다. 이제 “무용을 하지 않으면 못 사는 여자”로 인정해주고 반 쯤 포기한 남편은 그렇지만, 고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는 무용보다 ‘엄마’로서의 역할이 우선. “엄마의 따스함을 충분히 느끼면서 크게 하고 싶다”는 그는 힘들지만 100%는 아니라도 최선을 다하는 며느리, 아내, 엄마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 한다. 정말 좋아하는 일 할 수 있어 행복 한 때 부상으로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시간을 겪으면서 “물리적인 통증보다 무용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아팠다”는 그는 오히려 무대에 서자 그 아픔이 없어졌다고 할 정도로 너무나 무용을 사랑한다. 또 좋아하는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는 것, 앞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단다. 더 행복한 것은 나이가 들면 은퇴하는 것이 보통인 다른 일에 비해 무용은 나이가 들수록 완숙미가 더해져 더 동작이 완벽하고 아름다워진다는 것. 팔십이 넘은 나이에도 우아한 동작으로 후배들을 매료시키는 선배 무용가들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는 무용가 이용덕. 한국무용은 동작이 정적인 것이 많은데다 끊임없이 다음 동작을 외워야 하는 등 노년의 몸과 정신을 건강을 위해서 더 없이 좋다고 한다. 그가 실버무용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인과 주부들에게 실버무용을 전파해 바른 자세와 우울증을 떨치는 좋은 취미생활로 가꿔나가는데 초석이 되고 싶다고 한다. 그의 큰 꿈은 외국인들이 더 극찬하는 한국무용이 ‘태양의 서커스’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로 더 많은 세계무대로 진출하는 것. 그의 춤사위는 부드럽지만 꿈을 향한 열정은 뜨겁고 강하기만 하다.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6-19
- [성한표 칼럼]대법관과 ‘존엄한 퇴진’(성한표 2009.05.22) 대법관과 ‘존엄한 퇴진’ 성한표 (언론인 전 한겨레신문 논설주간) 대법원은 어제(21일) 이른바 ‘존엄사’의 길을 열어준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 존엄을 해치게 되므로 환자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인간 존엄과 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판시했다. 이 재판에서 신영철 대법관도 ‘찬성’ 의견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국어사전은 ‘존엄’을 인물이나 지위 따위가 감히 범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엄숙하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법관이 바로 존엄한 자리다. 임명장에 의해 유지되는 자리가 아니라 수많은 법관들의 신뢰 위에서 유지되는 자리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신 대법관 문제로 전국의 판사들이 연일 회의를 열고 있으며 21일에는 서울고법 배석판사 회의가 열렸다. 서울고법은 가장 큰 규모의 고등법원인데다 배석판사들도 다른 고법과 비교해 경력이 높은 편이다. 이들이 대부분 모였다는 점만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던 회의였다. 이날 6시간 동안 진행된 회의는 `신 대법관의 행위는 법관의 재판독립 침해라는데 인식을 같이했다''''는 결론을 냈다. 고법판사들 신 대법관 거취 논의 신 대법관의 거취문제에 대해서도 토론이 있었고, 외부에 알리지 말자는 다수 의견에 따라 공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장 판사들에 이어 고법판사들까지 거취문제를 논의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그에 대한 법관들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은 드러났다. 모든 사건에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대법관이 법관들의 신뢰를 잃으면 대법관으로서의 정상적인 기능을 하기가 어렵다. 신 대법관은 이제 자진사퇴의 결단을 내릴 때다. 우선 그가 오랜 세월 몸담았던 사법부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다. 사법부는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다.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비판을 불러왔지만 이미 동료인 박시환 대법관이 사법부의 현 사태를 ‘5차 사법 파동’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현 사태가 ‘파동’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일반인의 시각이지 법률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흔히 판사회의 같은 법 테두리 안에서 하는 의사표현은 파동이라고 부르지 않고, 연판장이나 집단사표 등을 통한 법 테두리를 넘어서는 의사표현 단계에 들어가야 파동이라고 부른다고들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보인 판사들의 움직임은 과거 이른바 사법파동에 비해 매우 신중하다. 그것은 사법부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문제를 풀어가려는 지혜로운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신 대법관이 스스로 물러나면 사법부는 법관의 재판독립을 침해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하고 이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다. 신 대법관의 자진사퇴 결단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대법관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번에 보일 그의 처신에 따라 긴 판사생활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가 내려지게 되어 있다. 사법부 구성원들의 상당수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행위가 부적절했다는 의견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대법관의 직을 유지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법관은 그 직을 물러난다고 하여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생계로 말하면 변호사 일을 통해 대법관 당시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현직을 유지하는 이유는 명예와 국가에 대한 봉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연이는 판사회의의 대상이라는 불명예를 얻었고, 더 이상 국가에 봉사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아직도 신 대법관의 자진사퇴 결단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고집일지도 모른다. 일선 판사들이 나를 비판한다고 해서 물러나면 나의 명예를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이 버텨보겠다는 고집을 나을 수 있다. “대법관이라는 자리는 여론몰이를 통한 압박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신 대법관은 지금 여론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의 중추인 판사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자진사퇴가 명예 지키는 길 신 대법관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존엄사’의 길을 열어주자는 쪽에 손을 들었다. 이제 자신의 ‘존엄한 퇴진’을 생각할 때다. 존엄한 퇴진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퇴진이다. 대법관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일반 직장의 필부들도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면 사표를 던진다. 사표는 곧 실직이고, 가족의 생계가 벼랑 끝에 서는 일임에도 그들은 그런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한다. 지금이 자리에 연연하는 대법관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변호사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기를 기대한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5-22
- [기고]벼 농작물재해보험 가입하세요 농촌은 이제 한가롭고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벼농사준비로 활기를 띠는 때다. 벼는 오랜 세월 우리민족과 함께한 가장 중요한 작물이다. 역사적으로는 1997년 충북청원에서 1만5000년이나 된 탄화(炭化)볍씨의 발견으로 한반도가 세계 최고(最古)의 벼 재배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공익적 기능과 함께 국민의 기초식량이라는 식량안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벼농사는 쌀 소비량과 생산면적이 감소하는 인위적인 변동뿐만 아니라 자연재해에 의한 수확량 감소라는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다. 특히 자연재해는 예측과 통제가 매우 어렵고, 거대재해 발생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에 이러한 위험을 완화시키기 위한 수단이 필요한 실정이다. 농가에 제공할 수 있는 위험관리수단으로는 사전적으로 농작물재해보험과 사후적으로는 재해지원을 꼽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이들 두 가지 제도를 양립해 운영하고 있으나 제도의 효과성이나 지원의 효율성 면에서 재해지원보다는 농작물보험의 유용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도 2001년부터 농작물재해보험을 도입해 과수농가, 밭작물 재배농가에 대해 보험상품이 제공하고 있다. 벼 재해보험은 농촌현장의 다양한 의견과 국내외 전문가의 조언을 종합해 개발됐다. 쌀의 안정적인 재생산과 농가경영안정을 위해 도입된 벼 재해보험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첫째, 대다수 농가에서 농작물재해보험 가입이 가능해졌다. 지금까지의 재해보험은 사과, 배 등 과수작물 위주로 도입되어 있어 전체농가의 일부만이 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다. 벼 재해보험의 도입으로 대부분의 농가에서 농작물재해보험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금년도의 경우 전국 벼 주산지 20개 시군에 대해서 시범적으로 도입하며, 향후 모든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본사업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둘째, 농가의 종합적인 위험관리가 가능해졌다. 벼 생산량 감소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재해는 태풍이 대표적이지만, 매년 크고 작은 병충해, 조수(鳥獸)피해가 발생한다. 지난해의 경우 흰잎마름병으로 인한 극심한 피해로 벼 생산을 포기한 농가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에 벼 재해보험은 흰잎마름병, 줄무늬잎마름병, 벼멸구 등 방제가 어려운 병해충으로 인한 피해를 보장하며 점진적으로 그 범위를 넓힐 예정이다. 또한, 멧돼지나 조류 등에 의한 피해에 대해서도 보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농가는 자연재해를 비롯하여 병충해, 조수해 등에 대비한 종합적인 위험관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농업인의 선택에 따라 보험료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지금까지 정부는 농업인에게 보험료의 50%를 지원하고 있다. 벼 재해보험의 경우는 보장유형에 따라 보험료의 50~75%까지 확대 지원된다. 따라서 농업인은 보험료 부담능력과 농지별 피해심도 등을 감안하여 자기부담비율을 선택하여 보험에 가입함으로써 보험료 부담을 조절할 수 있다. 최근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로 태풍의 강도가 커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국지적인 집중호우, 우박폭풍과 같은 이상기후로 인해 농가경영의 불확실성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특히, 벼의 경우 1980년에 발생한 냉해와 같은 전국적인 거대피해도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다. 벼 재해보험은 이러한 기상이변에 대비한 위험관리수단이다. 벼 재배 농가는 경영규모가 확대되고 전업화가 진전되고 있어 재해위험을 관리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앞으로 벼 재해보험은 벼 농사를 영위하는 농가의 경영안정수단이라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5-21
- 벼 농작물재해보험 가입하세요 어느덧 주위의 산천이 푸르른 자태를 자아내는 계절이 되었다. 농촌은 이제 한가롭고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벼농사준비로 활기를 띠는 때이기도 하다. 벼는 오랜 세월 우리민족과 함께한 가장 중요한 작물이다. 역사적으로는 1997년 충북청원에서 1만 5,000년이나 된 탄화(炭化)볍씨의 발견으로 한반도가 세계 최고(最古)의 벼 재배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공익적 기능과 함께 국민의 기초식량이라는 식량안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벼농사는 쌀 소비량과 생산면적이 감소하는 인위적인 변동뿐만 아니라 자연재해에 의한 수확량 감소라는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다. 특히, 자연재해는 예측과 통제가 매우 어렵고, 거대재해 발생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에 이러한 위험을 완화시키기 위한 수단이 필요한 실정이다. 농가에 제공할 수 있는 위험관리수단으로는 사전적으로 농작물재해보험과 사후적으로는 재해지원을 꼽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이들 두 가지 제도가 양립하여 운영? 품?있으나 제도의 효과성이나 지원의 효율성 면에서 재해지원보다는 농작물보험의 유용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도 2001년부터 농작물재해보험이 도입되어 과수농가, 밭작물 재배농가에 대해 보험상품이 제공되고 있다. 벼 재해보험은 농촌현장의 다양한 의견과 국내외 전문가의 조언을 종합하여 개발되었다. 쌀의 안정적인 재생산과 농가경영안정을 위해 도입된 벼 재해보험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첫째, 대다수 농가에서 농작물재해보험 가입이 가능해졌다. 지금까지의 재해보험은 사과, 배 등 과수작물 위주로 도입되어 있어 전체농가의 일부만이 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다. 벼 재해보험의 도입으로 대부분의 농가에서 농작물재해보험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금년도의 경우 전국 벼 주산지 20개 시군에 대해서 시범적으로 도입되며, 향후 모든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본사업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둘째, 농가의 종합적인 위험관리가 가능해졌다. 벼 생산량 감소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재해는 태풍이 대표적이지만, 매년 크고 작은 병충해, 조수(鳥獸)피해가 발생한다. 지난해의 경우 흰잎마름병으로 인한 극심한 피해로 벼 생산을 포기한 농가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에 벼 재해보험은 흰잎마름병, 줄무늬잎마름병, 벼멸구 등 방제가 어려운 병해충으로 인한 피해를 보장하며 점진적으로 그 범위를 넓힐 예정이다. 또한, 멧돼지나 조류 등에 의한 피해에 대해서도 보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농가는 자연재해를 비롯하여 병충해, 조수해 등에 대비한 종합적인 위험관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농업인의 선택에 따라 보험료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지금까지 정부는 농업인에게 보험료의 50%를 지원하고 있다. 벼 재해보험의 경우는 보장유형에 따라 차등하여 보험료의 50~75%까지 확대 지원된다. 따라서 농업인은 보험료 부담능력과 농지별 피해심도 등을 감안하여 자기부담비율을 선택하여 보험에 가입함으로써 보험료 부담을 조절할 수 있다. 최근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로 태풍의 강도가 커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국지적인 집중호우, 우박폭풍과 같은 이상기후로 인해 농가경영의 불확실성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특히, 벼의 경우 1980년에 발생한 냉해와 같은 전국적인 거대피해도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다. 벼 재해보험은 이러한 기상이변에 대비한 위험관리수단이다. 벼 재배 농가는 경영규모가 확대되고 전업화가 진전되고 있어 재해위험을 관리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앞으로 벼 재해보험은 벼 농사를 영위하는 농가의 경영안정수단이라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농협중앙회 농업정책보험부 부장 박영래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