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신선하고 푸짐한 생선회, 맛보세요” 위치 : 삼산동 (구) 놀부보쌈 바로 뒤 영업시간 : 오전 11시~오후 10시 메뉴 : 모듬회(자연산, 양식), 알탕, 내장탕, 회정식 등 문의 : 052)256-0702(자갈치횟집) 겨울에 맛보는 생선회에는 겨울바다 냄새가 물씬 풍긴다. 저 먼 바다에서 물살을 가르며 이리저리 유영하는 물고기의 자맥질이 느껴지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바다 속 이야기들이 주저리주저리 세월을 쌓아가는 짙은 물빛 담은 겨울바다. 이름만큼이나 정겨운 자갈치횟집에 가면 살아 있는 바다가 한 상 가득 담겨 나온다. 단체 500석 완비, 주차 걱정 뚝! 남구 삼산동 (구)놀부보쌈 바로 뒤에 자리한 ‘자갈치횟집(대표 박유신)’은 맛깔스럽고도 푸짐한 음식 서비스로 소문난 집이다. 이곳은 우선 식당 규모에서 놀랍다. 울산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많은 수의 인원(5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깨끗하고 넉넉한 홀과 더불어 크고 작은 방들이 다양하게 마련돼 있어 단체나 소모임에 제격이다. 또한 도심의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피로연을 비롯한 각종 모임 장소로도 손색이 없고 식당 뒤쪽으로 넓은 주차장을 두고 있어 주차 걱정이 전혀 없다. 맛에서 반한 푸짐한 요리들 회를 시키면 곁들여 나오는 반찬가짓수만 해도 15가지가 넘는다. 종잇장처럼 얇게 저민 신선한 회가 커다란 접시에 꽃잎모양으로 얌전하게 담겨져 나온다. 눈으로 느껴지는 즐거움 보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맛이 더 일품이다. 질기지 않은 생선 특유의 부드러움이 옆사람 눈치도 볼 것 없이 손을 바삐 움직이게 만든다는 사실. 생선회와 함께 나오는 해삼과 개불 등도 신선하기 그지 없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음식들이 입맛을 당기고 있는데 어느 것 하나 대충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매운탕 또한 적당히 얼큰한 것이 밥 한 공기는 거뜬히 비워내는 데 일등공신이 따로 없다. 북구 강동면 정자가 고향인 박유신 사장은 미역이나 채소 종류를 모두 본가에서 재배한 것을 손님 상에 내놓기 때문에 항상 신선한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미리 예약을 하고 가면 더 아늑한 공간에서 더 맛있는 요리를 푸짐하게 대접받을 수 있다. 서경숙 리포터 skiss72@hanmail.net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2-04
- 효의 도시, 문화의 도시 수원 시 승격 60주년을 맞이한 수원. 관련 기념행사를 미리 살펴보고, 08년 10월 개관한 수원역사박물관 등 수원의 과거를 살펴볼 수 있는 장소와 수원의 동네 이름 및 전설을 통해 수원을 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내가 살아가는 고장에 대한 관심에서 소속감과 사랑이 싹트기 마련이다. 시 승격 기념행사 - 효원가정·수원둥이 찾기 행사 및 각종 축제 다양해 수원시는 8월 15일 시 승격 60주년 기념일을 전후해 여러 기념행사를 마련했다. 흐름, 신명, 도약, 나눔 등 4개 주제로 27개 사업을 진행 중이다. 수원시사 간행사업은 2013년 완료 예정이며, 시 승격 100주년 되는 해에 개봉할 타임캡슐 매설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수원시청 총무과 정규야 씨는 “열린음악회, 여름음악축제, 수원화성국제연극제 등 시민참여축제와 효원가정·수원둥이를 찾는 수원토박이 효원의 뿌리 선발, 재래시장과 함께 하는 수원사랑 행사 등이 계획됐다”고 전했다. 수원역사박물관, 수원향교 - 도심에서 만나는 수원의 과거 팔달문동종, 김준룡전승비가 전시된 수원역사박물관에서는 수원의 과거와 현재를 엿볼 수 있다. 수원의 자연과 변천사를 익힐 수 있고, 60년대 수원도 만날 수 있다. 야외전시장에는 수원도호부 부사였던 이시백 선정비와 여러 관리들의 송덕비, 장승, 정려문이 있다. 어린이체험관에서는 옛날 살림살이 도구를 이용해보거나 탁본과 서예, 지도 맞추기 등 체험활동이 가능하다. 수원역사박물관 한동민 학예연구사는 “8월 60주년 기념전을 준비 중이다. 근·현대의 수원과 관련된 사진과 행정자료 등을 소개할 계획”이라고 했다. 한국서예박물관과 사운이종학사료관도 같은 건물 안에 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최초로 건립한 서예전문박물관인 한국서예박물관은 서예가 근당 양택동 씨의 기증유물이 계기가 돼 만들어졌다. 수원 출신의 사운 이종학 선생은 초대 독도박물관장을 지냈으며, 수집자료 2만 여점을 수원시에 기증했다. 수원역사박물관에서는 50년 이상 역사를 지닌 근대생활유물을 기증받는다. 기증자증이 있으면 무료 관람할 수 있고, 기증유물도록도 받게 된다. 수원의 도심에서도 역사적인 장소가 많다. 향교길에 있는 박내과의원은 수원법원 및 검찰청 청사로 임시 사용됐다(1952~1956). 화성의 봉담에 있던 수원향교는 정조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수원향교 근처의 수원시립중앙도서관에는 수원시민헌장탑이 세워져 있다. 수원의 기원 - 삼한시대부터 모수국부터 시작해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의 의식세계를 드러내는 지명의 변천은 역사를 이루는 한 줄기다. 수원(水原)의 기원은 마한의 모수국, 삼국의 매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모(牟)’나 ‘매(買)’는 발음상 ‘물’과 관련됐다고 여겨진다.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고유명사를 표기했던 때를 지나 757년(통일신라)에 이르러 ‘수성(水城)’으로 불리면서 지명에 본뜻이 포함됐다. 940년(고려) ‘수주(水州)’로 이름이 바뀌고, 지금의 ‘수원(水原)’은 1310년(고려)부터 등장했다. 수원의 역사는 정조와 관련이 깊다. 현재 수원시와 화성시는 행정구역상 분리되지만,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옮기면서 수원은 ‘화성(華城)’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정조의 효심은 경기도 지역의 가옥구조도 바뀌게 했는데, 잦은 능행차 탓에 백성들이 툇마루를 없앴다고 전해진다. ‘지지대 고개’는 ‘능행차에서 돌아오는 정조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발걸음을 더디게 놓았다’ 해서 유래됐다. 수원에는 오랜 역사만큼 긴 세월을 함께 해온 나무도 많다. 못골 놀이터 북쪽 국유지에는 수령 500년과 450년 된 느티나무가 도와 시의 보호수로 지정됐다. 400년 이상 된 영통사 입구의 느티나무는 단오제 등 마을행사의 중심이 된다. 황곡초등학교 앞 느티나무는 큰 황골의 천석꾼이 심었다고 전해지며, 수령 200년으로 추정한다. 마을 이름에도 역사와 의미가 숨어있어 ‘원천’ 혹은 ‘머내’로 불리는 원천동은 ‘수원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는 내’라는 의미를 지녔다. 옛날 구렁이가 많이 살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구렁골 고개는 천석꾼이었던 평산 신씨 가문과 관련된 전설을 지녔다. ‘영통’은 산신령과 관련된 전설과 함께 ‘영(靈)이 통(通)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도 하고 염통처럼 생긴 지형을 따라 이름 붙여졌다고도 한다. ‘벽적골’은 여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벽돌을 구워 살았기 때문에 불리게 된 이름이다. ‘살구골’에는 살구나무가, 개나리 신(莘)자를 사용하는 ‘신나무실’에는 개나리가 많았단다. ‘황골’ 혹은 ‘황곡’은 봉황이 앉아있는 형상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연못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담은 ‘못골’은 화성을 쌓으면서 못을 만들었다는 설과 전부터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는 설이 전해온다. 제일교회 인근의 ‘화약고 고개’는 남문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일제강점기 때 이 고개에 화약을 쌓아놓은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금바위’는 그 생김 때문에 거북바위나 두껍바위로도 불린다. 맑은 날 이 바위에 오르면 서해가 보인다고 한다. 경기과학고 뒤편의 ‘방아골’에는 예전에 곡식을 찧는 방앗간이 있었다. 소나무가 많았던 ‘솔대’는 정조가 인공조림한 대나무가 더해져 송죽동이 됐다고도 하고, 소나무가 우거진 등성이를 일컫는 솔등성이가 솔댕이를 거쳐 솔대로 굳어졌다고도 한다. 세류동은 ‘가는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을 지녔고, ‘버드내’는 수원천 하류의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농촌진흥청 안에 있는 여기산은 ‘산의 모습이 기생의 자태처럼 아름답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산과 서호에 비친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은 수원8경 중 하나다. ◈속담 속 수원 ①수원깍쟁이 : 개성상인보다 한 수 위의 철저함과 절약정신을 보인 수원상인의 전설을 지녔음. ②수원사람은 발가벗고 삼십 리를 뛴다 : 수원깍쟁이와 관계된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원래는 효심 깊은 젊은이가 친구의 꼬임으로 기방에 갔다가 아버지 제삿날임을 떠올려 의관도 갖추지 못하고 서둘러 돌아갔던 일이 과장되어 전해옴. ③과천 나무꾼 수원 나무꾼에게 속다 : 텃세를 부리는 과천 나무꾼에게 거짓정보를 주어 관에서 혼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음. 도움말 수원시청, 수원역사박물관 김선경 리포터 escargo@empa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3-05
- 시론 시론 싸움질 끝에 방학한 국회 대한민국 국회가 봄방학이다. 3일 본회의와 일부 상임위원회 회의를 끝으로 본회의장과 각 상임위원회 회의실 문이 닫혔다. 4월과 6월에 임시국회를 열게 된다니, 앞으로 한달은 꼴사나운 국회 뉴스를 보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정족수 미달로 두 차례나 연기된 끝에 열린 야간국회가 끝나고 의사당을 나서는 의원들의 표정은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해외여행을 준비하는 의원들도 많고, 골프약속 잡은 사람도 많다고 한다. 열심히 일해 고단한 몸을 쉬고 어지러운 머리를 식히려는 방학이라면 당연히 박수를 받을 일이다. 그런데 낯 뜨거운 욕설과 싸움질과 삿대질로 날을 보내던 국회가 한달이나 문을 닫는다니, 무슨 일을 했다고 방학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3월 3일 국회 본회의는 오후 두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다섯시로 한 차례 연기됐지만 정족수에 턱없이 모자라 또 일곱시로 연기되었다. 그래도 재석의원은 104명에 불과했다. 3분의 2에 가까운 의원들이 결석해 비상소집 끝에 겨우 정족수를 채워 회의가 열렸다. 이날은 170명이 넘는 여당의원들의 의원총회가 열린 날이다. 이례적으로 여당의원들의 본회의장 농성이 있었던 날이기도 했다. 그런 날 본회의 정족수 채우기가 그렇게 어려웠다니, 그 많은 국회의원들은 다 어디 갔던 것일까. “결석과 지각이 싸움질보다는 낫다”고 개탄하는 소리도 들린다. 여야 의원이 멱살잡이를 하는 모습이 TV 화면에 보도된 뒤로 정치에 대한 국민의 생각은 ‘불신’ ‘무관심’이 아니라 ‘혐오’로 바뀌었다. 난장판에서도 보기 어려울 모습이 우리 정치의 현주소이니 “차라리 국회가 없는 편이 낫겠다”는 한탄이 지나친 말로 들리지 않는다. 어쩌다가 한번 있는 일이라면 ‘오죽하면 그럴까’ 하겠지만, 국회소식만 나왔다 하면 그런 모습뿐이니 말이다. 법정기일보다 3개월 가까이 늦게 개원한 18대 국회는 지난해 내내 여야 의원들이 원수처럼 싸우다가, 12월 18일 회의실 문을 해머로 부수는 전대미문의 폭력장면을 연출했다. 강제로 문을 여느라 해머와 전기톱이 동원되고, 안에서는 소화기로 소화액을 쏘아대는 모습이 미국 유력언론사 온라인 뉴스에 올라 나라망신을 당했다. 절망한 국민의 탄식과 한숨에 자극되었는지, 미디어 법안 문제에 대해 여야는 극적으로 타협을 이루었다. 여당 단독국회이기는 했지만 가까스로 새해 예산안도 처리하고 악수하고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앞으로는 절대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인 국민은 새해부터는 좀 달라지겠거니 했다. 기대는 금세 깨지고 말았다. ‘합의처리’냐 ‘협의처리’냐 하는 문제로 티격태격 하더니, 다시 극한대결로 치달았다. 3절 90주년 기념일 대한민국 국회본회의장에서 한 의원이 동료에게 목이 졸려 고통 받는 모습, 의원끼리 멱살잡이하는 모습이 TV 뉴스에 나왔다. 또 한 무리의 의원들도 밀고 당기고 하다가 한 사람이 넘어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다음날은 국회사무처가 출입을 막아 의원들이 경찰의 제지를 뚫고 창을 넘어 회의실에 드나드는 희한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국민은 또 절망하고 정치인들은 또 합의했다. 3월 2일, 이번에는 합의문까지 작성하고 양당 대표가 서명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 뒤에 벌어진 일도 이젠 놀라움의 대상이 아니다. 싸움질로 허송세월 하느라고 시간에 쫓기면 법안은 무더기로 일괄 처리된다. 그 많고 복잡한 법안들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문제점을 찾아내고 수정하고 보완하려는 생각은 안중에도 없다. 지금 국회에는 2500여개의 안건이 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것 하나 국민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다. 독소조항은 없는지, 남용의 소지는 없는지, 밤을 새워 법안을 들여다보아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인데, 싸움질로 회기를 다 보내고 봄방학이란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국회도 분쟁이 없는 곳은 없다. 역사가 일천한 우리나라 의회민주주의는 수많은 불상사와 파행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18대 국회처럼 지탄을 받은 전례가 있었던지, 모든 정치인들은 이 방학 중 국민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기 바란다. ( 문 창 재 객원논설위원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3-06
- “의약품 안전성평가 제대로 해야” 식약청, 뒤늦게 ‘진통제 부작용’ 수용 식품의약품안전청이 뒤늦게 일부 진통제의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들임에 따라 그동안 의약품 안전성 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약사단체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건약)는 성명을 내고 “의약품 안전을 다시 평가하는 ‘의약품재평가 제도’가 있다”며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 제도가 유명무실하게 운영돼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이 단체는 진통제인 ‘게보린’과 ‘사리돈에이’, ‘암씨롱’에 들어있는 이소프로필안티피린(IPA)이 혈액질환 부작용이 있다며 지난해 10월 식약청에 대책을 촉구한 바 있다. 건약은 또 의약품재평가 제도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은 원인으로 △부작용 보고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제도상 한계 △보고된 부작용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식약청의 무능함 △보고된 부작용조차 조사할 의지가 없는 식약청의 나태함 등을 거론했다. 식약청이 보고되고 있는 부작용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번 IPA사건에서 확인됐다는 것이다. 처음 건약이 이 성분의 부작용에 대해 문제제기했을 때 식약청은 보고된 부작용 건수가 단 3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지역약물감시센터에 14건의 부작용이 보고된 사실이 알려졌으며 지난달 24일 민주노동당 곽정숙 의원이 이 성분의 부작용 건수가 21건이라고 발표했다. 건약은 “식약청은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누락됐는지 파악조차 못한 채 5개월을 허송세월했다”고 꼬집었다. 한편 식약청은 그동안 혈액질환 부작용 논란이 일던 진통제 ‘게보린’과 ‘사리돈에이’ ‘암씨롱’ 등 IPA 성분이 함유된 의약품의 15세 미만 어린이 복용을 금지한다고 3일 밝혔다. 또한 5~6회 복용해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으면 복용을 중지하고 의사나 약사와 상의하도록 했다. 식약청은 중앙약사심의위원회 자문결과를 토대로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조치방안을 발표했다. 식약청은 중앙약심의 심의결과 이 성분이 사용·판매를 중지할 정도의 안전성 문제는 없는 것으로 결론내렸다. 다만 IPA 효능·효과를 ‘진통 및 해열시 단기 치료’로 제한했다. 식약청은 오는 4월 약물감시 사업단을 통해 혈액학적 부작용을 중심으로 집중 모니터링을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범현주 기자 hjbeom@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3-03
- 책면 -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 “전쟁이 끝난 뒤 배를 곯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때 무언가를 챙겨먹지 못하던 우리들은 원조물자로 쏟아져 들어온 식량을 허겁지검 먹어 치우다 체하거나 배탈이 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얘들아,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라고 되풀이해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은, 비단 밥상 앞만의 일이 아닙니다. 경제도, 산업도 당장 배를 채우는 것에 급급합니다. 무슨 자리 무슨 감투를 쓰면 내려놓을 때를 생각지 않고 더 먹고, 더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일모작만이 아닙니다. 이모작, 삼모작도 가능합니다. 더 먹고 싶을 때 욕심 부리지 않고, 그만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더불어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이고, 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친환경 유기농 운동의 대부로, 농림부 장관으로, 또 농민의 동반자로 살아온 김성훈 상지대 총장이 퇴임을 앞두고 펴낸 책에 실린 내용이다. 그동안 많은 언론에 실렸던 칼럼들을 모아 칼럼집을 발간한 것이다. 김 총장은 이 책에서 ‘남을 생각하고 함께 나누는 삶은 먼저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박한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김 총장은 “정권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농업 농촌 농민 문제를 해결해야 이 땅에 미래가 있다”며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농산물도 상품이니까 시장경제 틀 안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장사꾼의 셈법에 젖어 있는 삼류 지도자는 농업의 숨겨진 가치를 알지 못한다. 농민들이야 농업을 포기하고 농촌을 떠나면 그만이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엄청난 피해는 고스란히 대한민국 국가와 국민들이 물려받는다.” 에너지에 이어 식량도 점차 무기화 되고 있는 글로벌 경제 체제에서 농산물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달러를 가지고도 식량을 살 수 없는 시대, 사더라도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지불하며 굽실거려야 할 날이 점차 다가오고 있다는 김 총장의 ‘경고’를 모두가 새겨들어야 한다. “선진국 시장경제에서 농업 부문의 상품생산 가치가 전체 국민총생산의 1~3% 안팎이 되지 않고, 마찬가지로 농가인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1~3%가 채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농업 농촌 농민 문제에 대하여는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국민적 합의 하에 일관되게 지원정책을 펴오고 있다. 그 이유는 농업 부문을 나라와 백성의 형성 유지 발전에 있어 반드시 갖춰야 할 최소 필수조건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총장은 이 책에서 안전한 먹을거리, 깨끗한 환경, 부강한 대한민국의 꿈을 이룰 길이 모두 농업에 있다며 농업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한국농어민신문/김성훈 지음/1만5000원 장병호 기자 bhjang@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2-27
- “모든 한림인이 나의 스승이 돼주었어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은 한림대 최고령 학사학위 수여자 이옥희씨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이씨의 올해 나이는 63세. 한림대 입학에서 졸업까지 4년 이야기를 듣다보면, 가슴이 뜨끈해지는 부러움이 일 정도다. 이씨는 “내가 원하는 것은 배움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이 배움으로 이 사회에서 작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한 보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처음 입학 할 때는 내가 젊은 학생들의 자리를 빼앗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나 때문에 입학의 꿈을 이루지 못한 학생이 있지 않을까하는 미안함. 그래서 4년을 더욱 열심히 보냈다”고 고백한다. 이씨가 보낸 한림인으로서의 4년을 좇아가봤다. 중간>일본에 대해 감정적인 것을 넘어, 잘 알고 싶었다이옥희씨는 한림대학교에서 일본학을 전공했다. 이씨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한·일수교가 되지 않아 지금은 제2외국어로 많이 배우고 있는 일본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생소한 일본어를 배워야 한다는 부담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와는 악연인 일본에 대해 잘 알기 위해 일본학을 선택했다”며, 일본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에 답한다. 그래도 역시 일본어 배우기는 쉽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열정이야 젊은 학생들 못지않았지만, 외국어가 두루 능통한 학생들에 비하면 실력이 모자라 늘 발을 동동 구르고 살았다고. 그래서 무조건 같은 과 학생이건, 다른 과 학생이건 모르는 게 있으면, 붙잡고 물어봤다고. 그래서 모든 한림인이 내 스승이라는 말을 전했다. 중간>정중앙을 빗겨선 칸의 둘째 줄이 내 고정석!늘 아침 8시에 홍천 집을 나섰다고. 1교시 강의가 없어도 늘 8시 45분에 학교에 도착해서 도서관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도서관에도 내 고정석이 생기게 되고, 강의실에도 늘 1등 출석하니까 고정 자리가 생기게 되더라고. 이씨는 지난 시간을 회고하며, “너무 가운데 자리, 맨 앞에 앉으면 가뜩이나 튀는 학생인 나로 인해 교수님이 불편해 질까봐 정중앙을 빗겨선 칸의 둘째 줄 자리가 내 고정석이었다”고 웃으며 말한다. 늦깎이도 너무 늦깎이라 강의실을 잘못 들어 온 게 아닌가하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씨는 “그렇지만 일본학과 학생임을 알고 나서는 젊은 학생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주고 격려가 되어준다며, 오히려 나에게 용기를 주는 교수님들에게 그저 고마울 뿐 이었다”라고 말한다. 중간>“사이토 아케미 교수님, 너무 감사해요!”열정은 넘쳤지만 오랜 세월 학교 공부를 졸업해 있었던 터라, 첫 학기 겨우 학사경고를 빗겨가는 아슬아슬한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씨는 첫 학기를 보내며 많은 고민을 했다고. ‘이런 상태로 남은 7학기를 어떻게 견뎌낼까?’하는 고민. 그래도 시작한 공부를 꼭 끝마쳐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입학할 때 응원해 준 직장 동료들과 후배들의 격려를 떠올리며 졸업할 때는 B학점 이상을 받으리라는 결심과 함께!“되돌아보면 사이토 아케미 교수님이 늘 모르는 게 있으면 연구실로 언제라도 찾아오라고 해 준 말이 너무 감사하다.” 복도에서 만나도 잘 돼 가냐는 관심을 보여줘 졸업까지 이룰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고. 대학원 진학도 계획하고 있지만, 올 한해는 일본어 습득을 위해 진학은 잠시 미뤘다. 일본어 공부에 좀 더 매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옥희씨는 “흐르는 물처럼 바위를 만나면 돌아도 가고, 폭포수로 쏟아지기도 하면서, 깊고도 잔잔하게 흘러가는 보람 있는 인생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문의 248-1332오춘재 리포터 ocjgood@hanmail.net 2009-03-02
- 사람이 희망이다 - 시화호 지킴이 최종인씨 사람이 희망이다 - 시화호 지킴이 최종인씨 제목 : “다시는 이런 잘못 되풀이 말아야죠” 부제 : 시화호와 함께 한 15년 세월 … “최근 주변 개발로 또 걱정” 최종인(55)씨를 만난 곳은 그가 근무하는 안산시청 작은 사무실이었다. 사무실 문 앞에서 만난 그는 마치 작은 방송국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각종 장비를 안고 있었다. 사무실 안은 예상대로 시화호와 관련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수많은 비디오테이프가 정리돼 있고 벽면에는 그가 찍은 시화호 사진들이 붙어있었다. ◆운명처럼 만난 환경지킴이와 시화호 = ‘시화호 지킴이’.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준 또 하나의 이름이다. 최종인씨가 처음 시화호와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 인연은 지난 1989년 안산으로 이사오면서 부터다. 어린 시절 시작한 전기 기술에 인생을 걸었지만 사업은 연이어 실패를 거듭한 후였다. 그렇게 찾아든 곳이 안산이었고 바닷가가 있는 안산은 그에게 하나의 위안이었다. 그가 안산에 들어올 쯤 환경운동도 슬며시 찾아왔다. 안산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하던 90년대 초반 송파구에서 발생한 민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환경운동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화장실 물이 그대로 하수종말처리장으로 가면서 악취가 발생한 민원이었다. 당시 공해추방운동본부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93년 환경운동연합에 정식으로 참여했다. 자연스럽게 환경운동연합 안산 통신원으로 자리잡게 됐고 이런 인연은 자연스럽게 방조제가 건설되는 시화호로 그를 이끌었다. “94년 방조제가 만들어진 후 찾아간 시화호는 썩은 생선냄새로 진동했어요. 이미 공사가 진행되던 91년부터 갯벌의 물이 눈에 띄게 빠지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환경사건이었던 시화호 사태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 때부터 최씨는 정신없이 이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수없이 죽어 떠오르는 물고기와 조개류 등 시화호는 말 그대로 간장색의 ‘죽음의 호수’로 변해갔다. 1997년 환경부 조사로 시화호의 화학적 산소요구량은 17.4ppm이었다. 대부분의 생명체가 서식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일부에서는 주변의 오염물질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결정적으로 시화호를 죽인 것은 갯벌 속에서 죽어간 수천만마리의 생물체였습니다. 생물체의 썩은 물질이 시화호의 60%를 죽였다고 보면 됩니다.” 결국 정부는 시화호 담수화 계획을 포기했다. 바닷물을 막은 거대한 간석지에 농업단지와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담수호를 통해 용수를 공급한다는 개발 논리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1997년 사실상 바닷물 유통이 시작됐다. 99년 2월에 조개 바지락 등이 조금씩 살아났다. 2002년도에는 시화호 상류까지 숭어들이 살기 시작했다. 시화호가 새로운 생명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시민단체 활동가에서 공무원으로 = 시화호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최씨는 94년 본격적으로 시화호에 살리기에 나섰다. 부상당한 새들을 세 들어 사는 집 옥상에서 돌보기도 하고 시화호를 죽이는 온갖 인간들의 행위에 맞섰다. 1994년에는 안산환경운동연합 창립 멤버로 참여, 이후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안산시청에게 최씨는 골치아픈 민원인이었다. 매일 같이 새로운 고발꺼리를 들고 시청에 달려왔다. 이런 그를 눈여겨 본 이가 있었다. 당시 박강호 안산시 환경과장이 밤에는 공공근로, 낮에는 시화호로 달려가는 그를 보고 아예 공무원으로 일할 것을 권했다. 최씨는 이를 받아들여 99년 일용직으로 안산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2004년에는 전문직 공무원으로 전환해 현재까지 안산시 지구환경과에서 근무하고 있다. 시민단체 활동을 하던 그가 공무원으로 변신하면서 힘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정신적으로 고통이 심하죠. 아직도 부딪히는 게 많아요. 협의과정이 힘들어요.” 하지만 얻은 것도 많다. 시민단체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보던 공무원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 물론 공무원들도 시민단체 활동가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공무원이 됐다 해도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시간의 대부분을 시화호에서 보내고 있다. 사진을 찍고 새들을 보호하고 환경오염을 감시하는 역할은 그의 몫이다. ◆“시화호 이름을 바꾸고 싶다” = 이제 시화호는 더 이상 죽음의 호수가 아니다. 최씨의 말처럼 “물반 고기반”이라고 할 정도로 물고기가 넘쳐난다. 잠수부가 들어가면 소라를 수없이 건져낸다. 하지만 아직 그가 가야할 길은 멀다. “시화호는 지금 살아났어요.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어찌보면 시화호는 지금 가장 큰 짐을 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화호는 요즘 때 아닌 개발에 몸살을 앓고 있다. 주변에 골프장 5개가 들어서고 북측엔 시화 멀티테크노밸리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남측엔 농경지가 조성되고 있다. “당장 갈대가 걱정입니다. 정화작용으로 시화호를 지켜주던 갈대가 개발과정에서 없어지면 오염물질이 다시 시화호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는 최근 이름이 알려지면서 이러 저러한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자신이 겪은 일들, 환경에 대한 생각 등을 이들에게 알린다. 무리한 개발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그들에게 알리고 있다. 요즘 최종인씨는 시화호의 이름을 바꾸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화호는 원래 시흥시와 화성시의 합성어다. “이름에 목적이 없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호수라는 뜻이 담긴, 다시는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의 이름을 만들고 싶어요.” 이 때문에 최근 논란을 빚는 경인운하나 대운하도 그에게는 근심거리다. “너무 급해요. 100년을 보면서 진행해야 합니다. 당장 일자리 창출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잖아요.”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2-26
- [책소개]“더 먹고 싶을 때 그만두라” 김성훈 지음 한국농어민신문/1만5000원 “전쟁이 끝난 뒤 배를 곯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때 무언가를 챙겨먹지 못하던 우리들은 원조물자로 쏟아져 들어온 식량을 허겁지검 먹어 치우다 체하거나 배탈이 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얘들아,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라고 되풀이해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은, 비단 밥상 앞만의 일이 아닙니다. 경제도, 산업도 당장 배를 채우는 것에 급급합니다. 무슨 자리 무슨 감투를 쓰면 내려놓을 때를 생각지 않고 더 먹고, 더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일모작만이 아닙니다. 이모작, 삼모작도 가능합니다. 더 먹고 싶을 때 욕심 부리지 않고, 그만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더불어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이고, 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친환경 유기농 운동의 대부로, 농림부 장관으로, 또 농민의 동반자로 살아온 김성훈 상지대 총장이 퇴임을 앞두고 펴낸 책에 실린 내용이다. 그동안 많은 언론에 실렸던 칼럼들을 모아 칼럼집을 발간한 것이다. 김 총장은 이 책에서 ‘남을 생각하고 함께 나누는 삶은 먼저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박한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김 총장은 “정권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농업 농촌 농민 문제를 해결해야 이 땅에 미래가 있다”며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농산물도 상품이니까 시장경제 틀 안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장사꾼의 셈법에 젖어 있는 삼류 지도자는 농업의 숨겨진 가치를 알지 못한다. 농민들이야 농업을 포기하고 농촌을 떠나면 그만이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엄청난 피해는 고스란히 대한민국 국가와 국민들이 물려받는다.” 에너지에 이어 식량도 점차 무기화 되고 있는 글로벌 경제 체제에서 농산물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달러를 가지고도 식량을 살 수 없는 시대, 사더라도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지불하며 굽실거려야 할 날이 점차 다가오고 있다는 김 총장의 ‘경고’를 모두가 새겨들어야 한다. “선진국 시장경제에서 농업 부문의 상품생산 가치가 전체 국민총생산의 1~3% 안팎이 되지 않고, 마찬가지로 농가인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1~3%가 채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농업 농촌 농민 문제에 대하여는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국민적 합의 하에 일관되게 지원정책을 펴오고 있다. 그 이유는 농업 부문을 나라와 백성의 형성 유지 발전에 있어 반드시 갖춰야 할 최소 필수조건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총장은 이 책에서 안전한 먹을거리, 깨끗한 환경, 부강한 대한민국의 꿈을 이룰 길이 모두 농업에 있다며 농업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장병호 기자 bhjang@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2-27
- [신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사진 2장> 문인 29명, 춘천의 추억을 끌어내다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 박찬일 최수철 한명희/ 사진 박진호 문학동네/ 1만3500원 “당신은 춘천에 어떤 추억을 두고 왔나요.” 흥겨운 MT. 설레는 데이트코스. 쫄깃한 닭갈비. 춘천이라면 모두 아스라한 추억의 한 대목을 가지고 있다. 서울에서 춘천까지 2시간 거리. 춘천은 가는 길마저 아름답다. 산과 물을 끼고 흘러 들어가는 경춘선을 따라 시선을 압도하는 풍광은 모두를 가슴 설레게 한다. 안개와 호수의 고장 춘천에 대한 ‘연가’를 29명의 이야기꾼들이 풀어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29인이 한 도시에 모였다. 각양각색, 세대를 넘나드는 당대의 작가들을 한데 불러 모은 곳은 춘천. 작가 오정희는 ‘봄내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때때로 작가와 예술가들, 세상의 잡담과 사람들에게 치여 상처받은 사람들이 심신의 치유와 행복을 꾀하며 또는 창작에의 열정과 기대로 그림자처럼 조용히, 소문 없이 춘천으로 숨어든다고 하였다. 춘천, 그가 내 안에서 사는가, 내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가.” 춘천 태생 시인 이승훈은 책의 첫머리를 열며 고향 춘천의 호수와 안개를 이렇게 묘사했다. “30대에 춘천에서 만난 것은 안개와 호수지만 춘천의 안개는 아름다운 신비와 우수와 환상이 아니라 깊은 밤 흐느끼는 울음소리였다. 뭉크를 사로잡던 불안, 회색빛 청춘, 우울한 동경, 황량한 그리움은 당시의 나의 초상이고 춘천의 내면이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을 오롯이 춘천에서 보낸 소설가 한수산 역시 ‘청춘의 가장 반짝이던 때’ 그러나 그런 만큼 더욱 ‘가슴 저리고 쓰라리고 하염없는 그 시절을 보낸 곳’으로서의 춘천을 회상했다. 그는 ‘안개, 그것은 내 청춘을 적셔준 춘천의 상징이었노라’고 고백한다. 춘천을 추억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일상공간으로 살아가는 문인들. 그들이 보는 춘천은 어떨까. 시인 유안진은 이 책에서 ‘어느 날 문득 춘천이라는 이름이 나를 사로잡았고, 내 혼을 기습 점령해버렸다’며 춘천이 전해 준 압도적인 영감을 그려냈다. 소살가 함정임은 ‘춘천,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품고 있는 블랙홀이자 활홀경. 내가 흠모하는 영혼들은 그곳에서 왔거나 그곳으로 갔다’고 기록했다. 우연히 남편을 따라 내려간 춘천에서 30여 년의 세월을 보내며 ‘파로호’ ‘새’ 등 춘천을 배경으로 한 역작을 남긴 소설가 오정희. 그리고 김유정 문학의 산실 실레마을에서 김유정 문학촌장으로 일하는 전상국. 전상국 촌장은 춘천의 힘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연은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위안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사람들과의 밀고 당기기의 탐색과는 달리 온통 덧셈이었다. 그는 자연 속에서 두 개의 그가 아닌 온전한 하나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아닌 그와 그가 되고 싶은 그가 완전한 화해를 하는 곳이 바로 자연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연 앞에서 거침없이 감동했고 그 충만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염인 증세도 사라졌다.” 이 책에서는 춘천의 어제와 오늘을 가로지르는 문인들의 이야기와 함께 춘천 각지의 명소와 명물들이 소개된다. 청평사와 강촌, 소양댐, 의암호, 춘천호, 공지천, 실레마을 등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진 곳은 물론이거니와 에티오피아에서 직접 공수해오는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이디오피아의 집’, 한 마을에서 박사를 114번째 배출한 ‘박사마을’, 의암댐에서 춘천댐까지 절경이 이어지는 ‘환상의 도로’를 모두 담았다. 시인 유안진은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이렇게 표현했다.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이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된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봄 한아름을 만날 수 있을 것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 가본 적은 없지 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오지 단풍도 꽃이 되지, 귀도 눈이 되지 춘천이니까. 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2-27
- 세상을 달관한 화가의 눈으로 그림을 말하다 일제강점기, 해방, 6.25전쟁 그리고 가난. 꿈보다는 하루하루의 삶이 절박했던 시절.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꿈을 쉽사리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운명처럼 다시 잡은 붓, 이제 그 세월은 50년이 흘렀다. 한국화가 기노철. 그에게서는 변화와 지난의 역사를 살아야 했던 삶이 화폭 속에 묻어나는 듯했다. 자연 그 자체의 은은함이 화폭을 채운다. 그림 속 산수는 세상을 달관한 화가의 눈으로 말을 건넨다. “그림은 다양해야 해.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 그림이지. 의도하지 않아도 세월의 변화에 따라 그림이 달라져.”한국화의 가는 세필에 매료되어 한국화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굵은 터치의 그림을 그린다고. 실경 산수를 많이 그렸지만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각인되었던 수많은 실제 풍경들은 이제 관념 산수로도 떠오른다. 화가는 손으로 그릴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그릴 수 있어야 한다는 반백의 노(老)화가는 자신은 지금도 수채화나 유화를 더 배워보고 싶단다. 요즘은 한국화와 서양화가 소재나 재료, 기법에 제한이 없어지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다양하게 확장되어 가고 있는 추세. 자신의 분야만 고집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것이 화가의 삶이기에 새로운 시도는 계속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림은 때때로 감상하기 어렵다. 작가의 의도를 찾으려면 모호해 질 때가 있다. “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멈추는 그림이 좋은 그림이야. 자기와 교감이 되는 그림이지. 화가는 지나는 이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해.” 화가에게 그림은 나만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는 이까지 염두에 둔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이다. 칠순을 넘긴 기노철 화가는 마지막 전시회에 대한 소망이 있다. “내 그림을 가지고 싶은 사람에게 나눠주고 떠나고 싶어. 비싸야 값어치가 있는 건 아니거든. 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소장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오래오래 봐 주었으면 해.” 권성미 리포터 kwons0212@naver.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