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증권가 반응 “미네르바 신드롬의 진실을 보라” 정책 비판, 위기 경고 높이 사야 ... 진위 집착, 본질 흐려 증권가에서는 검찰이 추정하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정체를 놓고 한때 술렁거렸지만 진위에 집착하는 것은 ‘미네르바 신드롬’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는 데는 목소리를 같이 했다. 특히 정부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적절한 위기경고는 의미있게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검찰이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킨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다는 비판이다. ◆정부에 대한 강한 질책 = 미네르바는 지난해 9월께부터 여느 인터넷 논객처럼 정부정책에 대해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강도높게 비판했다. 부동산 정책뿐만 아니라 이명박정부의 환율, 세제 정책 등에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대통령 뿐만 아니라 강만수 장관 등을 거론하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이와 맞물려 리먼브라더스의 부도, 미국증시의 폭락, 우리나라 환율 급등과 주가 급락 등을 맞추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A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미네르바는 시장의 방향을 전망한 것으로 비판과 내용은 우리나라 애널리스트들이나 경제연구소 연구원들이 하지 않았던 것을 한 것”이라며 “이는 용기있는 것이며 애널리스트나 연구원들이 하지 못한 부분을 꼬집은 것으로 평가받을 만 하다”고 말했다. 특히 지난해 말에는 “정부가 긴급업무명령 1호로 29일 오후 2시30분 이후 7대 금융기관 및 수출입 관련 주요 기업에 달러 매수를 금지하라고 긴급 공문으로 전송했다”는 내용의 의견을 게시, 검찰조사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러나 달러매수 금지요청이 비공개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부의 정책 자체에 대한 지적은 적절했다는 평가다. ◆진위 논란에 대한 유보 = 미네르바가 쓴 글에는 그가 30대이면서 증권사에 종사한 적이 있으며 스스로 공부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40대를 ‘선배’를 지칭하고 고 정주영 회장의 일대기를 묘사한 ‘야망의 세월’을 ‘학생시절’에 봤다고 썼다. 또 세 쪽에 달하는 ‘경제학 독학법’은 그의 전력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기초’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독학의 순서까지 자세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글에서 스스로를 ‘늙은이’로 표현하고 이후에도 혼동을 일으킬만한 언급이 나오면서 정체성이 도마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이 ‘30대, 공고와 전문대졸, 무직’을 타이틀로 내세우며 미네르바의 과거 행적을 가볍게 만들려는 의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B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 시장을 제대로 분석하는 전문가인 것은 아니다”며 “스스로 거래를 하면서 열심히 공부했다면 30대가 충분히 쓸 수 있는 보고서들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환율 등 경제지표에 대한 전망이 마치 비전공자만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며 “검찰이 그의 이력을 토대로 비전문가임을 강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실제로 인터넷 사이트엔 이런 경력으로 분석력이 뛰어난 사람이 적지 않다”고 강조했다. 박준규 이재걸 기자 jkpark@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1-09
- [주말을 여는 책]서대원의 ‘주역강의’ 개인의 운명 알려주는 비책 아니다 … 만물 변화하는 음양원리 주역강의 서대원 지음 을유문화사 / 2만5000원 고달픈 인생길에서 방향을 잃고 헤맬 때면 한번쯤 들춰보게 되는 게 바로 주역이다. 가시덤불을 헤치고라도 계속 나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감춰져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길흉화복의 열쇠를 담고 있다는 주역은 다음의 다섯 글자로 시작된다. ‘乾元亨利貞’. 온통 상징과 비유, 그리고 비약으로 이뤄진 본문의 첫 ‘하늘(乾) 편’ 중에서도 첫 글귀다. 과연 무슨 뜻이런가. 보통은 “건(乾)은 크고 형통하고 이롭고 곧으니라”로 해석되곤 한다. 새해 첫날 점괘를 뽑아 건괘(乾卦)가 나오면 일단 “올해는 만사형통”이라는 식으로 간주되는 것도 그런 해석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주역강의’의 저자인 서대원은 첫 대목에서부터 견해를 달리한다. 건(乾)은 하늘의 절대성을 뜻하며, 다음에 이어지는 네 글자는 각각 혼돈(시작)에서 소멸(마지막)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별 시기를 의미한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따라서 그는 이 귀절을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풀이한다. 이렇게 해석이 남다른 것은 주역이 개인의 운명을 알려주는 ‘비기(秘記)’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다른 유교 경전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땅한 도리와 처세의 가르침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둘째 줄에 이어지는 ‘潛龍勿用’도 “능력이 모자라면 설치지 말고 때를 기다려라”고 해석한다. 말 그대로 “물에 잠긴 용은 쓰지 말지니라”로 풀이되는 귀절이다. ‘잠룡(潛龍)’을 혼돈 상태에서 아직 덜 갖춰진 상태로 파악한 결과다. ‘하늘 편’의 해석은 “일을 시작할 때가 있고 물러날 때가 있으니, 일을 해내려면 용이 물을 박차고 연못 위로 떠오르듯 과감하게 일어서야 할 것이다”라고 좀더 이어진다. 일을 이루려면 타인과의 소통이 중요하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리지 말 것도 당부한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오랫동안 역술인으로 지내왔다는 사실부터가 눈길을 끈다. 스스로 고백하듯이 적어도 동양철학을 학문적으로 섭렵한 정통 학자는 아니다. 주역을 머리맡에 두고 틈틈이 읽으면서 번뇌와 천착으로 터득한 나름대로의 깨달음이다. 더욱이 이 책은 지금껏 수두룩하게 나온 다른 해설서들에 비해 해석이 명쾌하다. 그동안 주역을 점술과 연관짓다 보니 해석이 어려웠지만 여기서는 일단 이 부분을 떼어냈다. 이 책은 주역을 이루는 본문, 괘상(卦象), 십익(十翼) 가운데서도 본문만을 다루고 있다. 주역에서 점을 치는데 주로 쓰여지는 것은 8괘, 또는 64괘를 다루는 괘상 부분. 그러나 그 내용이 본문과 서로 겉도는 대목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뒷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점술 목적으로 이리저리 덧붙여졌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기도 하다. 대학, 논어, 맹자, 중용과 더불어 시경, 서경과 함께 사서삼경을 이루는 주역이 오늘날 점술책으로 더 널리 인식되는 것도 괘상 때문이다. 하지만 주역으로 운세를 읽고자 하는 것은 화투짝으로 일진을 따져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저자는 주역이 점치는 데나 쓰는 책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한다. 30년도 넘게 역술가로 활동해 온 나름의 결론치고는 뜻밖이다. 점괘를 찾기보다 실천적 지혜를 강조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야만 주역이 제시하는 드넓은 세계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해석에 의해 그 다음 내용을 계속 따라가 보자. 본문 두번째 편인 ‘땅(坤) 편’은 “나아가 뜻을 펼치니 처음은 혼미해도 끝내 뜻을 얻으리라”며 쉽게 포기하지 말 것을 권유하면서 “큰 정치인도 상생의 도리를 어기면 모리배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정치인은 민심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며 작은 청탁이나 뇌물로 큰일을 그르치지 말 것을 깨우쳐 준다. “다스리는 사람은 많지만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은 드물다”라고 개탄하면서 간계와 술수를 부려서는 안된다고도 강조한다. 뒷부분의 해석도 처세의 가르침을 전하기는 비슷하다. 얄팍한 학문으로 득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며, 마른 밥찌기를 위해 양심을 팔지 말 것이며, 진정한 사랑의 열매는 지혜로운 자만이 맛볼 수 있다는 등등. 이밖에 화려한 성공에 집착한 나머지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돌보지 않는 현실을 꾸짖기도 한다. 욕심을 버린 무망(无妄)의 삶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땀방울로 얼룩진 평범한 사람들의 노력과 용기에도 관심과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가슴을 울리는 것은 “때가 되면 뿌리치고 떠나가는 것이 어디 젊음이나 권력 뿐일까”라는 귀절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밝음이 다하면 어둠이 오기 마련인 것을. 그것이 삼라만상 불변의 이치이며 섭리다. 하지만 어둠이 걷힌 뒤에는 또다시 여명이 찾아오는 법. 당장 시절이 어렵다고 가슴만 치며 한탄할 것이 아니라 띠풀이라도 엮으며 새롭게 밝아오는 내일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 책은 가르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발전해간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멈춘 듯이 움직이고 혼돈에 휩싸인 듯하면서도 어느새 일정한 원리에 따라 바뀌어간다. 우주 만물이 그렇고 우리의 인생 또한 다르지 않다. 이처럼 만물이 변화해가는 음양 원리를 바탕으로 처세의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 주역이다. 과거 5천년 동안 동양 고전의 으뜸으로 꼽혀 왔던 지혜의 곳간이기도 하다. 그 옛날, 공자도 주역 책을 묶은 가죽 끈이 세번이나 끊어지도록 탐독했다는 고사가 전해질 정도다. 어지러운 세상을 살면서 한번쯤은 읽어봐야 할 책이다. 새해를 시작하는 요즘이야말로 주역을 읽기에 더 없이 좋은 시점이다. 허영섭 칼럼니스트 언론인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1-09
- <창간 15주년 특집>한국의 5대강을 가다 - 북한강 내린천 상류에서 소양강, 춘천까지 흙탕물 저감 사업, 올해부터 성과창간 15주년 기획으로 ‘강에서 띄우는 그림편지 - 한국의 5대강을 가다’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낙동강을 시작으로 섬진강, 영산강, 금강, 한강(남·북한강)을 모두 돌아보는 이번 기획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진경산수화’의 세계를 개척하고 있는 이호신 화백과 함께합니다. 평화의댐에서 파로호(화천댐)로 흘러든 북한강 본류는 화천댐 발전방류구를 지나 다시 강물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북한강은 춘천댐이라는 인공 구조물에 가로막힙니다. 북한강이 화천에서 춘천으로 넘어오는 경계는 화천군 하남면 원천리와 춘천시 사북면 지촌리. 이 두 마을을 이어주는 5번 국도에는 ‘달거리고개’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어 웃음짓게 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야한 이름은 아닙니다. 아마 ‘산이 높아 달이 걸린다’는 뜻인가 봅니다. 원천리에는 ‘달거리’라는 마을도 있고 사창리 명월리 쪽으로 이어지는 56번 국도 위에는 ‘만월고개’도 있으니까요. 이 일대엔 재미있는 마을 이름이 많습니다. ‘한사모루’ ‘건는들’ ‘챙벌’ ‘석금바위’ ‘빗서오지’ ‘열개미’ ‘토둔이’ ‘원댕이’ ‘며구지’ ‘머구넘이’ …. 산이 높고 물이 깊은 탓에 일제강점기 때 창씨개명을 당하지 않은 우리말 이름들입니다.소양호와 청평사 일대 지명들도 재미있습니다. 청평사 뒤는 ‘오봉산’이 둘러싸고, 오봉산 뒤는 ‘오음리’입니다. 청평사 앞으로는 ‘소양강’이 흐르죠. 춘천에서 양구로 가는 오봉산 서쪽 고개는 ‘배후령’, 오음리에서 청평사로 가는 고개는 ‘백치고개’입니다.청평사는 오봉산 능선이 만든 부채살 계곡 한가운데 포근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부채살처럼 퍼진 계곡의 물이 다 모이면 엄청날텐데 물난리가 안 나는 비결이 뭘까요? 오봉산에 올라 이 일대 지세를 자세히 보면 청평사는 부채살 계곡이 만나기 직전, 부처님 손바닥처럼 봉긋한 자리에 올라앉아 있습니다. 2006년 224일 동안 흙탕물2004년 6월, 당시 곽결호 환경부장관이 고랭지밭 흙탕물 문제 해결을 위해 대관령 고랭지 채소단지를 방문했습니다. 고랭지단지 바로 옆 개울은 도암댐으로 흘러드는 송천 최상류 구간입니다. 개울엔 긴 녹색 물때가 끼어 있고 밭두렁도 없이 콘크리트 농로에서 45°로 비스듬히 갈린 이랑이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비가 조금만 와도 고랭지 채소밭에 뿌려진 닭똥비료가 그대로 개울로 흘러드는 구조, 누가 보더라도 정말 기가 찰 지경이었죠. 강원도의 브리핑이 끝난 뒤, 장관이 평창군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밭두렁도 없이 밭을 만들었습니까?”“예. 농민들이 농로에서 바로 트랙터를 진입시키려고 하다보니 이렇게 …”(평창군수) “…”(환경장관)장관이 다시 물었습니다. “이곳 농민분들, 생활이 무척 어려우시죠?”이 질문에 평창군수는 “아닙니다. 전국 최고의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답변했습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상황에서 누구도 말을 꺼낼 수가 없었죠. 요즘 들어 소양호 수계도 흙탕물이 고민입니다. 소양댐 바로 아래 있는 세월교는 저녁이면 시원한 소양호 방류수가 흘러 춘천 시민들이 즐겨 찾는 피서지입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여름에도 세월교에 사람들이 별로 모이지 않습니다. 누런 흙탕물에 퀴퀴한 냄새가 시원한 느낌마저 가시게 할 정도니 굳이 이곳을 찾을 까닭이 없는 겁니다. 소양호가 거대한 흙탕물 저장고 역할을 하면서(2006년 흙탕물 발생일수 224일) 소양강물이 유입되는 북한강 본류까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소양강 최상류는 우리나라 최대의 열목어 서식지 내린천입니다. 내린천은 강원도 홍천군 내면 일대 백두대간 북쪽 계곡에서 발원합니다. 이 일대 남한강과 북한강의 분수령은 운두령(1089m)과 계방산(1577m), 오대산(1563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주능선입니다. 이번 취재에서 우이령보존회 홍순경 운영위원장과 함께 내린천 상류 최고의 계곡 두곳을 답사했습니다. 점봉산 아래 진동계곡에 사는 홍순경씨는 2007년 6월 25일 내일신문이 남한 최초로 촬영해서 보도한 ‘갯첨서’(남한 미기록종)를 제보한 열렬 독자입니다.홍천군 내면과 인제군 상남면에 걸쳐 있는 미산계곡은 열목어 서식지로서 남한 최고의 명소입니다. 열목어들은 철쭉꽃이 필 때 이곳 미산계곡을 거슬러 올라옵니다. 한여름에도 수온이 18℃를 넘지 않는 산간계곡을 찾아가는 거죠. 반대로 낙엽이 지는 가을엔 다시 미산계곡을 지나 한겨울에도 수량이 유지되는 큰 강으로 내려갑니다.인제군 기린면의 조경동계곡은 제가 보기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예쁜 계곡입니다. ‘아침가리’라고도 하는데 물속으로 걸어갈 수 있는 계곡산행의 최적지입니다. 수정처럼 맑은 물 속 바위틈에서는 1급수에만 사는 ‘꺽지’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상류계곡엔 모래, 하류 댐엔 흙탕물경사진 밭에 객토를 하면 큰비가 왔을 때 이 흙이 모두 떠내려갑니다. 흙과 함께 비료나 농약 성분도 하류로 떠내려갑니다. 결국 상류 계곡은 입자가 굵은 모래로 뒤덮여 열목어 서식지가 사라지고 하류 소양호엔 입자가 고운 황토 성분이 쌓입니다. 이것이 소양호 흙탕물 사태의 본질입니다.다행히 올해 한강 상류수계의 흙탕물 발생은 2006년이나 2007년에 비해 크게 줄었습니다. 강원도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소양강 최상류 지역인 양구 만대천과 홍천 자운천의 흙탕물 발생이 예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2006년 상류에서 19억톤의 흙탕물이 유입되어 최고 328NTU(탁도 단위)라는 최악의 탁도를 보였던 소양호는 2007년에는 6억톤의 흙탕물 유입으로 92NTU, 2008년에는 50NTU로 개선되었습니다.흙탕물이 줄어든 것은 국비지원으로 추진하는 고랭지밭 토사유실 저감사업 덕분입니다. 한강수계기금으로 추진한 고랭지밭 흙탕물 저감사업은 지금까지 강원도 8개 시·군 7.3㎢(1689필지)에서 진행됐습니다. 또 다른 요인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입니다. 농민들이 나서서 밭고랑에 흙망태를 쌓고, 부직포 2008-12-19
- <그림편지> 북한강-2 북한강-2 소양호 ‘흙탕물’에 북한강 몇년째 몸살 소양강, 내린천에서 춘천까지 평화의댐에서 파로호(화천댐)로 흘러든 북한강 본류는 화천댐 발전방류구를 지나 다시 강물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북한강은 춘천댐이라는 인공 구조물에 가로막힙니다. 북한강이 화천에서 춘천으로 넘어오는 경계는 화천군 하남면 원천리와 춘천시 사북면 지촌리. 이 두 마을을 이어주는 5번 국도에는 ‘달거리고개’라는 고개가 있어 웃음짓게 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야한 이름은 아닙니다. 아마 ‘산이 높아 달이 걸린다’는 뜻인가 봅니다. 원천리에는 ‘달거리’라는 마을도 있고 사창리 명월리 쪽으로 이어지는 56번 국도 위에는 ‘만월고개’도 있으니까요. 이 일대엔 재미있는 마을 이름이 많습니다. ‘한사모루’ ‘건는들’ ‘챙벌’ ‘석금바위’ ‘빗서오지’ ‘열개미’ ‘토둔이’ ‘원댕이’ ‘며구지’ ‘머구넘이’ …. 산이 높고 물이 깊은 탓에 일제강점기 때도 창씨개명을 당하지 않은 순 우리말 이름들입니다. 소양호와 청평사 일대 지명들도 재미있습니다. 청평사 뒤는 ‘오봉산’이 둘러싸고, 오봉산 뒤는 ‘오음리’입니다. 청평사 앞으로는 ‘소양강’이 흐르죠. 춘천에서 양구로 가는 오봉산 서쪽 고개는 ‘배후령’, 오음리에서 청평사로 가는 고개는 ‘백치고개’입니다. 청평사는 오봉산 능선이 만든 부채살 계곡 한가운데 포근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부채살 계곡의 물이 다 모이면 엄청날텐데 물난리가 안 나는 비결이 뭘까요? 오봉산에 올라 자세히 보면 청평사는 부채살 계곡이 만나기 직전, 부처님 손바닥처럼 봉긋한 자리에 올라앉아 있습니다. 2006년 흙탕물 발생일수 224일 0000000000000000 2004년 6월, 당시 곽결호 환경부장관이 고랭지밭 흙탕물 문제 해결을 위해 대관령 고랭지 채소단지를 방문했습니다. 고랭지단지 바로 옆 개울은 도암댐으로 흘러드는 송천 최상류 구간입니다. 개울엔 긴 녹색 물때가 끼어 있고 밭두렁도 없이 콘크리트 농로에서 45°로 비스듬히 갈린 밭이랑이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비가 조금만 와도 고랭지 채소밭에 뿌려진 닭똥비료가 그대로 개울로 흘러드는 구조였죠. 강원도의 브리핑이 끝난 뒤, 장관이 평창군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밭두렁도 없이 이렇게 밭이 만들어져 있습니까?” “예. 농민들이 농로에서 바로 트랙터를 진입시키려고 이렇게 …”(평창군수) “…”(환경장관) 장관이 다시 물었습니다. “이곳 농민분들, 생활이 무척 어려우시죠?” 이 질문에 평창군수는 “아닙니다. 전국 최고의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답변했습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상황에서 누구도 말을 꺼낼 수가 없었죠. 요즘 들어 소양호 수계도 흙탕물이 고민입니다. 소양댐 바로 아래 있는 춘천시 세월교는 저녁이면 시원한 소양호 방류수가 흘러 춘천 시민들이 즐겨 찾는 피서지입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여름에도 세월교에 사람들이 별로 모이지 않습니다. 누런 흙탕물에 퀴퀴한 냄새가 시원한 느낌마저 가시게 할 정도니 굳이 이곳을 찾을 까닭이 없는 겁니다. 소양호가 거대한 흙탕물 저장고 역할을 하면서(2006년 흙탕물 발생일수 224일) 소양강물이 유입되는 북한강 본류까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00000000000000000000 소양강 최상류는 우리나라 최대의 열목어 서식지 내린천입니다. 내린천은 강원도 홍천군 내면 일대 백두대간 북쪽 계곡에서 발원합니다. 이 일대 남한강과 북한강의 분수령은 운두령(1089m)과 계방산(1577m), 오대산(1563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주능선입니다. 이번 취재에서 우이령보존회 홍순경 운영위원장의 안내로 내린천 상류 최고의 계곡 두곳을 답사했습니다. 점봉산 아래 진동계곡에 사는 홍순경씨는 2006년 내일신문이 남한 최초로 촬영해서 보도한 ‘갯첨서’(남한 미기록종) 발견 제보자이기도 합니다. 홍천군 내면과 인제군 상남면에 걸쳐 있는 미산계곡은 열목어 서식지로서 남한 최고의 명소입니다. 열목어들은 철쭉꽃이 필 때 이곳 미산계곡을 거슬러 올라옵니다. 한여름에도 수온이 18℃를 넘지 않는 산간계곡을 찾아가는 거죠. 반대로 낙엽이 지는 가을엔 다시 미산계곡을 지나 한겨울에도 수량이 유지되는 큰 강으로 내려갑니다. 인제군 기린면의 조경동계곡은 제가 보기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예쁜 계곡입니다. ‘아침가리’라고도 불리는데 물속으로 걸어갈 수 있는 계곡산행의 최적지입니다. 수정처럼 맑은 물 속 바위틈에서는 1급수에만 사는 ‘꺽지’들을 흔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0000000000000000000 경사진 밭에 객토를 하면 큰비가 왔을 때 이 흙이 모두 떠내려갑니다. 흙과 함께 비료나 농약 성분도 하류로 떠내려갑니다. 결국 상류 계곡은 입자가 굵은 모래로 뒤덮여 열목어 서식지가 사라지고 하류 소양호엔 입자가 고운 황토 성분이 쌓입니다. 이것이 소양호 흙탕물 사태의 본질입니다. 다행히 올해 한강 상류수계의 흙탕물 발생은 2006년이나 2007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강원도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소양강 최상류 지역인 양구 만대천과 홍천 자운천의 흙탕물 발생이 예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지난 2006년 19억톤의 흙탕물이 유입되어 최고 328NTU(탁도 단위)라는 최악의 탁도를 보였던 소양호는 2007년에는 6억톤의 흙탕물 유입으로 92NTU, 2008년에는 50NTU로 개선되었습니다. 흙탕물이 줄어든 것은 국비지원으로 추진하는 고랭지밭 토사유실 저감사업 덕분입니다. 한강수계기금으로 추진한 고랭지밭 흙탕물 저감사업은 지금까지 강원도 8개 시·군 7.3㎢(1689필지)에서 진행됐습니다. 또 다른 요인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입니다. 농민들이 나서서 밭고랑에 흙망태를 쌓고, 부직포 등을 이용 토사유출을 줄였습니다. 인북천 상류 양구 펀지볼 일대 농민들은 ‘해안면 산림지킴이’ 본부를 만들어 무분별한 객토와 산지훼손으로 인한 토사유실을 막았습니다. 00000000000000000 ‘호반의 도시’ 춘천 주변은 온통 인공호수들입니다. 북쪽에는 파로호와 춘천호, 동쪽은 남한 최대의 소양호, 서쪽은 의암호, 의암호 하류에는 청평호, 청평댐 옆 산꼭대기에는 청평양수댐까지 들어섰습니다. 문제는 상류에서 내려오는 1급수의 물이 춘천호와 의암호에서 정체되면서 2급수로 떨어진다는 겁니다. 한여름 공지천 옆에 1cm 이상 쌓이는 녹조를 보면 정말 심각합니다. 이런 댐이라면 아예 수문을 열거나 철거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의암댐의 수문을 완전히 열거나 아예 철거하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 흐르는 물만 정체시킬 뿐 홍수 조절능력도 거의 없고 북한 금강산댐 담수 이후 발전용량도 30% 이상 줄어들어 효용가치가 크게 떨어진다는 겁니다. 의암댐을 비우면 북한강과 소양강이 원래의 자연하천으로 되살아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춘천시 북서쪽으로 넓은 둔치가 생겨 지역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홍천 인제 양구 춘천 = 그림 이호신 화백 글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12-18
- 주말을 여는 책- 허영섭 (언론인, 칼럼니스트) 주역강의/ 서대원 지음/ 을유문화사/ 2만 5000원 고달픈 인생길에서 방향을 잃고 헤맬 때면 한번쯤 들춰보게 되는 게 바로 주역이다. 가시덤불을 헤치고라도 계속 나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감춰져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길흉화복의 열쇠를 담고 있다는 주역은 다음의 다섯 글자로 시작된다. ‘乾元亨利貞’. 온통 상징과 비유, 그리고 비약으로 이뤄진 본문의 첫 ‘하늘(乾) 편’ 중에서도 첫 글귀다. 과연 무슨 뜻이런가. 보통은 “건(乾)은 크고 형통하고 이롭고 곧으니라”로 해석되곤 한다. 새해 첫날 점괘를 뽑아 건괘(乾卦)가 나오면 일단 “올해는 만사형통”이라는 식으로 간주되는 것도 그런 해석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주역강의’의 저자인 서대원은 첫 대목에서부터 견해를 달리한다. 건(乾)은 하늘의 절대성을 뜻하며, 다음에 이어지는 네 글자는 각각 혼돈(시작)에서 소멸(마지막)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별 시기를 의미한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따라서 그는 이 귀절을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풀이한다. 이렇게 해석이 남다른 것은 주역이 개인의 운명을 알려주는 ‘비기(秘記)’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다른 유교 경전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땅한 도리와 처세의 가르침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둘째 줄에 이어지는 ‘潛龍勿用’도 “능력이 모자라면 설치지 말고 때를 기다려라”고 해석한다. 말 그대로 “물에 잠긴 용은 쓰지 말지니라”로 풀이되는 귀절이다. ‘잠룡(潛龍)’을 혼돈 상태에서 아직 덜 갖춰진 상태로 파악한 결과다. ‘하늘 편’의 해석은 “일을 시작할 때가 있고 물러날 때가 있으니, 일을 해내려면 용이 물을 박차고 연못 위로 떠오르듯 과감하게 일어서야 할 것이다”라고 좀더 이어진다. 일을 이루려면 타인과의 소통이 중요하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리지 말 것도 당부한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오랫동안 역술인으로 지내왔다는 사실부터가 눈길을 끈다. 스스로 고백하듯이 적어도 동양철학을 학문적으로 섭렵한 정통 학자는 아니다. 주역을 머리맡에 두고 틈틈이 읽으면서 번뇌와 천착으로 터득한 나름대로의 깨달음이다. 더욱이 이 책은 지금껏 수두룩하게 나온 다른 해설서들에 비해 해석이 명쾌하다. 그동안 주역을 점술과 연관짓다 보니 해석이 어려웠지만 여기서는 일단 이 부분을 떼어냈다. 이 책은 주역을 이루는 본문, 괘상(卦象), 십익(十翼) 가운데서도 본문만을 다루고 있다. 주역에서 점을 치는데 주로 쓰여지는 것은 8괘, 또는 64괘를 다루는 괘상 부분. 그러나 그 내용이 본문과 서로 겉도는 대목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뒷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점술 목적으로 이리저리 덧붙여졌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기도 하다. 대학, 논어, 맹자, 중용과 더불어 시경, 서경과 함께 사서삼경을 이루는 주역이 오늘날 점술책으로 더 널리 인식되는 것도 괘상 때문이다. 하지만 주역으로 운세를 읽고자 하는 것은 화투짝으로 일진을 따져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저자는 주역이 점치는 데나 쓰는 책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한다. 30년도 넘게 역술가로 활동해 온 나름의 결론치고는 뜻밖이다. 점괘를 찾기보다 실천적 지혜를 강조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야만 주역이 제시하는 드넓은 세계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해석에 의해 그 다음 내용을 계속 따라가 보자. 본문 두번째 편인 ‘땅(坤) 편’은 “나아가 뜻을 펼치니 처음은 혼미해도 끝내 뜻을 얻으리라”며 쉽게 포기하지 말 것을 권유하면서 “큰 정치인도 상생의 도리를 어기면 모리배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정치인은 민심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며 작은 청탁이나 뇌물로 큰일을 그르치지 말 것을 깨우쳐 준다. “다스리는 사람은 많지만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은 드물다”라고 개탄하면서 간계와 술수를 부려서는 안된다고도 강조한다. 뒷부분의 해석도 처세의 가르침을 전하기는 비슷하다. 얄팍한 학문으로 득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며, 마른 밥찌기를 위해 양심을 팔지 말 것이며, 진정한 사랑의 열매는 지혜로운 자만이 맛볼 수 있다는 등등. 이밖에 화려한 성공에 집착한 나머지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돌보지 않는 현실을 꾸짖기도 한다. 욕심을 버린 무망(无妄)의 삶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땀방울로 얼룩진 평범한 사람들의 노력과 용기에도 관심과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가슴을 울리는 것은 “때가 되면 뿌리치고 떠나가는 것이 어디 젊음이나 권력 뿐일까”라는 귀절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밝음이 다하면 어둠이 오기 마련인 것을. 그것이 삼라만상 불변의 이치이며 섭리다. 하지만 어둠이 걷힌 뒤에는 또다시 여명이 찾아오는 법. 당장 시절이 어렵다고 가슴만 치며 한탄할 것이 아니라 띠풀이라도 엮으며 새롭게 밝아오는 내일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 책은 가르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발전해간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멈춘 듯이 움직이고 혼돈에 휩싸인 듯하면서도 어느새 일정한 원리에 따라 바뀌어간다. 우주 만물이 그렇고 우리의 인생 또한 다르지 않다. 이처럼 만물이 변화해가는 음양 원리를 바탕으로 처세의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 주역이다. 과거 5천년 동안 동양 고전의 으뜸으로 꼽혀 왔던 지혜의 곳간이기도 하다. 그 옛날, 공자도 주역 책을 묶은 가죽 끈이 세번이나 끊어지도록 탐독했다는 고사가 전해질 정도다. 어지러운 세상을 살면서 한번쯤은 읽어봐야 할 책이다. 새해를 시작하는 요즘이야말로 주역을 읽기에 더 없이 좋은 시점이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1-08
- “‘카길’이 농협보다 교육 잘한다” 남호경 한우협회장, 교육이 마케팅으로 연결된다고 지적 국내 대표적인인 축산생산자단체인 한우협회 회장이 미국의 세계적인 곡물메이저 ‘카길’에서 실시하는 축산교육 수준이 농협보다 높다고 지적해 주목된다. 남호경 한우협회장은 7일 농림수산식품부 기자단과 가진 간담회에서 “카길은 국내 축산농가에 대한 교육을 꾸준히 실시하며 장기적인 관점을 갖고 장사를 한다”고 지적하고 “교육수준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농협의 축산경제부문에서 실시하는 것보다 높다”고 말했다. 남 회장은 카길의 교육사업이 사료 판매와 연결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국내 축산단체들이 농가에 도움되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우생산농가나 양돈생산농가 등의 경우 사료의 대부분을 수입산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가격의 문제도 있지만 오랜 세월동안 교육지원사업 등을 통해 관계를 맺고 있는 카길의 영업망에서 도움을 받는 것도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실제 경기도에서 돼지 200마리를 기르는 박 모(55)씨는 17년전부터 양돈축사 설계 및 사육방법 등을 조언해준 카길의 컨설팅을 지금도 신뢰하고 있고, 사료도 카길에서 구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한편, 한우협회는 지난해 연말 정부에서 발표한 한우산업육성대책이 △생산자 단체의 역할을 강조하고 △브랜드화 정책의 내실화를 기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평가했다. 또 생산비 절감과 유통비용 절감을 바탕으로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적정 가격에 한우를 공급하고 한우산업의 안정화 목표를 제시했다는 점도 의의가 있다고 호평했다. 그러나 한우농가의 경영안정화를 위해서는 사료가격이 대폭 하락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국제곡물가는 하락했는데 사료업체의 가격인상이 이어지는 불합리한 상황이 개선될 수 있도록 정부의 빠른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1-07
- [내일시론]이제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문창재 2009.01.02) 이제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 눈만 뜨면 들리는 소리가 ‘어렵다’ ‘죽겠다’는 말들이다. 송년회 때마다 들어온 그 말의 편린이 귀에 못박혔는데, 새해 덕담 끝에도 빠지지 않아 이명처럼 귓전에 붙어버렸다. 신문이며 잡지며 TV같은 매스 미디어들이 쏟아내는 보도가 ‘불황’ ‘불경기’에서 ‘준공황’이라는 표현으로 에스컬레이트 되었다. 잘 나가는 기업들도 몸을 움츠려 새해 아침 몰아친 한파보다 더한 맹추위 같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큰 고난을 여러 차례 이겨낸 경험과 지혜가 있다. 가까이는 바로 11년 전 우리 경제가 국제 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에 의지했던 국가부도의 위기를 몇해만에 거뜬히 극복한 경험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우리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던 엄동의 해에, 근년의 ‘돈놀이’ ‘주식잔치’를 예측한 사람이 있었던가. 도시의 지하도들이 노숙자 무리로 들끓고 큰길을 점령한 노점상들 때문에 길 가기가 어렵던 그 때, 747 공약을 내거는 대통령 후보가 나올 줄 꿈이나 꿀 수 있었던가. 지금 한번 차분히 되돌아 볼 일이다. 일제강점 35년, 6·25전란, IMF 위기도 이겨냈는데 6·25 전화(戰禍)에 비하면 IMF 시대는 고통이라 말할 자격도 없다. 1·4후퇴 때 다섯살 났던 나는 허벅지까지 눈이 쌓인 태백준령을 넘어 피란을 갔다. 짐을 이고 진 어른들에게 손이 없어서, 그 높은 고개들을 걸어서 넘어갔다. 눈이 너무 깊어 걸을 수 없는 곳에서만 이불 짐 위에 잠시 올라타는 ‘행운’을 누렸다. 피란에서 돌아와 학교에 들어가서는 천막교실에서 공부했다. 학교 건물이 불타 없어져버렸던 것이다. 춥고 어두운 천막교실 신세를 면한 것이 3학년 때였다. 기다리고 기다려 옮겨간 새 교실은, 몇해 뒤 사라호 태풍 때 찌그러져버린 판잣집이었다. 그런 고생은 그 시대를 산 사람 모두가 겪은 ‘국민재앙’이었다.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은 영남지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온전히 서 있는 건물이 없었던 그 참담한 폐허를 딛고 일어선 힘이 과연 무엇이었던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다. 전쟁으로 인하여 죽거나 다친 사람, 또는 이산가족 없는 집이 없었다 할 정도의 인명피해까지 입고도, 우리는 기를 쓰고 살아남았다. 피란지 산비탈에 천막을 치고 전시 연합학교들이 문을 열었다. 가르치고 배우기를 그칠 수는 없었다. 우리 민족의 환난(患難)이 어찌 6·25 전란뿐이겠는가. 역사를 멀리 거슬러올라갈 것도 없다. 세계열강의 식민지 쟁탈경쟁의 시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세월이 35년이었다. 그 오랜 압제의 세월에도 우리는 배달민족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았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같은 국난도 우리는 그렇게 이겨냈다. 중국이라는 초강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살면서 독자문화를 오롯이 지켜낸 민족이 몇이나 되는지를 따져보면, 우리 민족의 저력에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중국 땅에 존재하는 55개 소수민족은 모두 자기네 나라를 가졌던 사람들 집단이다. 그 가운데 아직도 자기 말과 문화와 국체를 가진 민족은 한민족과 몽골족뿐이다. 나머지 53개 민족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힘에 녹아들어 민족의 혼과 정체를 잃었다. 중국 괴력에 휩쓸리지 않고 문화·문자·국체 보존 광활한 아시아 대륙 동쪽 해안에 토끼꼬리처럼 붙은 작은 반도 민족이, 중국의 괴력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고 문화와 문자와 국체를 누천년 보존해온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DNA’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다. 그런 생리를 우리는 가졌다. 지혜와 끈기와 투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걸어온 역정을 되돌아보면, 지금 우리 앞에 닥쳐온 역경은 잠시 스쳐가는 보릿고개 정도라 말하고 싶다. 해마다 돌아오는 보릿고개와 한발과 태풍을 견뎌낸 우리의 생리에는 한두 끼니 결식에 지나지 않는 고통이리라.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럴 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가면서, 약이 된다는 ‘치료금식’으로 치부하고 이겨내자. 교수신문이 새해 희망의 말로 뽑은 사자성어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한다. 꽉 막힌 정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아무나 한데 어울려서는 안되지만, 우선은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이 난관을 돌파하는 지혜가 아닐까 한다. 문창재 객원논설위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1-02
- 노인 강력범죄 10년새 급증 살인ㆍ방화ㆍ성폭행 가파른 상승세 (서울=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 보성 어부 살인 사건, 숭례문 방화 사건처럼 노인에 의한 범죄가 크게 늘고 있는 가운데 이 중 살인, 방화, 성폭행 등 강력범죄 증가율이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4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장준오 박사가 펴낸 `노인범죄 및 범죄 피해'' 논문에 따르면 1996년과 10년이 지난 2006년을 비교했을 때 전체 범죄자는 192만2천549명에서 193만2천729명으로 정체 현상을 보인 반면 61세 이상 노인 범죄자는 3만4천492명에서 8만2천323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1996년 전체 범죄자 중 1.8%가 노인이었던 데 비해 2006년에는 4.3%로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같은 기간 20대 범죄자 비율은 24.4%(46만8천166명)에서 15.8%(30만5천805명)로,30대는 32.5%(62만4천995명)에서 23.8%(46만643명)로 각각 줄어 대조를 이뤘다. 노인에 의한 살인ㆍ방화ㆍ성폭행 등 강력범죄 비율도 10년 전보다 크게 높아져 노인범죄가 점차 흉포화하는 경향을 띠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6년 20명이던 노인 살인범은 2006년 59명으로 3배 가까이 늘었고 7명에 그쳤던 방화범도 46명으로 5배 이상 증가했다.또한 노인 성폭행범은 94명에서 423명으로 4배 이상 급증하는 등 살인ㆍ방화ㆍ성폭행 등 3대 강력범죄 증가세가 전체 노인범죄 증가세를 훌쩍 넘어섰다. 한편 전국 교도소와 구치소에 수감된 노인 범죄자를 10여 년 전과 비교한 결과 고령화, 강력범죄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작년 4월 기준으로 범행 당시 60세 이상인 노인 수감자는 737명으로 60∼65세가43.3%로 가장 많은 가운데 66∼70세 35.4%, 71∼75세 16.3%, 76세 이상 4.8%의 분포를 보였다. 1995년 이뤄진 같은 조사에서는 202명의 전체 노인 수감자 중 71세 이상 수감자는 9.9%(20명)에 불과했다. 작년 4월 조사 당시 죄목별로는 살인범의 비율이 23.5%로 가장 높은 가운데 사기(22.1%), 절도(16.8%), 강간(9.6%), 횡령(6.0%), 폭행(2.3%) 등의 순이었다. 반면 1995년에는 살인죄로 수감된 노인 범죄자가 없었고 폭행 30%, 상해 12.8%,사기 8.4% 등의 분포를 보여 세월이 지나는 동안 폭행과 상해 등 비교적 가벼운 사건으로 수용된 노인은 크게 준 반면 살인, 강간 등 강력범죄로 수형생활을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상습 범죄자가 아닌 노인이 뒤늦게 범행을 저질러 수형생활을 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1995년에는 60대 이상 가운데 초범인 경우가 7.4%였지만 작년 조사에서는 노인 수형자 중 60대에 처음 범죄를 행한 비율이 40.2%로 가장 높았다. 장 박사는 "노인은 자신과 가족 및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게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노인이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못 찾은 데 대한 반대급부적 현상이기도 하다"며 "노인이 은퇴 후 계속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setuzi@yna.co.kr(끝)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1-05
- 근대문화유산의 보고 군산을 가다 <상> 바다잃은 선창엔 수탈역사가 숨쉬고… [ 관련기사 : 근대문화유산의 보고 군산을 가다 (하) 근대문화유산 도시로 거듭난다 ]1899년 개항을 전후로 격변의 역사를 경험한 군산시는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제조업과 첨단산업이 혼재된 시설부터 20세기 근대역사의 흔적이 도심 곳곳에 남아 있다. 다양한 이유로 외면하거나 드러내기 꺼려했던 근대역사를 새로 조명해 문화공간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군산만의 독특한 역사’를 산업화하려는 시도를 조명하고 그 가능성을 2회에 걸쳐 살펴본다.“군산은 ‘세기’가 뒤엉킨 근대역사박물관” 2008년 군산은 얼굴이 판이하게 다른 쌍둥이같다. 동쪽 내륙과 맞닿은 산업도로변으로대야의 너른 들판을 건너는가 싶더니 바다를 만나는 서쪽은 조선소 제철화학 자동차 태양광소재 산업의 중심지다. 최대 간척사업이라는 ‘새만금’ 경계를 알리는 방조제는 오래전부터 군산의 미래이자 희망의 상징물이 됐다. 도심 아파트단지를 가로질러 만난 원도심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군데군데 남아 있는 건축물과 수명을 다한 부두의 초라한 모습은 군산을 19세기 말에 묶어 놓은 듯 보인다. 원도심엔 일본풍 근대건축물 즐비군산시 금동 한 골목길. 작은 담장 너머로 단층 목조 주택이 한 눈에 들어온다. 1935년 집을 지을 때 심었다는 일본 전나무와 오밀조밀한 조경이 일본풍을 물씬 풍긴다. ‘마루보시’라 불렀던 운송회사 군산지점장 관사였던 건물이다. 윤여삼(72)씨 내외가 1967년부터 살고 있는데 화장실만 바꿨을 뿐 90% 원형을 보존해왔다. 지주와 부유층이 거주했던 신흥동에는 히로쓰 가옥이 남아 있다. 보수를 위해 건설용 비계가 설치돼 있지만, 본 모습은 검게 콜타르 칠을 한 목판과 지붕 아래 두 개의 처마로 일본식 가옥임을 짐작케 한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 포목상이었던 히로쓰(廣津)가 살았던 곳이다. 1925년 지은 이 집은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 가옥의 형태를 따랐다고 한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야쿠자 하야시의 집으로 나왔고, ‘타짜’에도 출현했던 곳이다. 히로쓰 가옥 주변으로 일본식 집들이 널려 있다. 군산시 신흥동·장미동·영화동 일대에는 일제시대 일본인이 거주했던 집이 100여 채나 남아 있다. 1899년 군산항 개항에 앞서 대한제국은 일제만을 위한 조계지역이 아닌 각국 조계지로 지정했지만 결국은 일제의 영향력에 좌우됐다. 일제는 지금의 내항에서 월명동에 이르는 거리에 일본인 마을까지 조성했다. 갈대밭 천지였던 곳을 매립하고 일본식 마치(町) 체계로 신도시를 조성한 것이다. 본정통(해망로) 전주통(영화동) 명치정(중앙로1가) 강호정(중앙로2가)이 이때 등장한다. 사실상 ‘군산 속의 일본’이 만들어져 개항당시 상시거주 일본인이 77명에서 1940년에는 8391명으로 급증했다. 장미동 월명동 등 내항 주변에는 주택 말고도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세워진 관공서 건물이 남아 있다. 1908년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지은 옛 군산세관 건물은 고딕과 로마네스크를 섞은 일본식 건축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건물과 함께 국내에 3곳 밖에 없어 건축사적인 의미를 인정받고 있다. 내항 바로 앞 장미동에는 건평 1980㎡짜리 옛 조선은행 건물이 서 있다. 1923년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 군산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4층 높이로 2층 건물을 올렸는데 일본 무사의 투구를 연상케 한다. 개인이 넘겨받아 고급 술집으로 사용하다 10여 년 화재로 내부는 망가지고 겉모습만 남아 있다. 그 옆으로는 1907년에 지은 ‘나가사키 18은행’ 건물이 있다. 쌀 반출과 토지강매 등 수탈이 공공연히 진행된 현장이다. 일제와 함께 그들의 종교도 들어왔다. 금광동에 있는 ‘동국사’가 이를 증명한다. 다양한 문양의 공포와 곡선이 조화를 이루는 우리 절집과는 너무도 다르다. 동국사 대웅전은 직선의 용마루가, 높고 가파른 지붕을 떠 받치고 있다. 1913년 건립당시 금강사가 동국사로 바뀐 것 빼고는 당시 분위기를 그대로 전한다. 동국사는 특히 시인 고은 선생을 불제자로 인도한 절로 유명하다. 가장 번성했던 항구의 추락 사실 군산의 근대사의 상당부분이 ‘개항=일제=쌀 수탈’로 도식화된다. 고려시대부터 쌀을 실어나르던 포구와 조창이 있던 곳이고, 개항이후 한해 200만석 이상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창구였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오죽하면 군산 내항에 쌀을 싣기 위해 만든 ‘뜬다리’ 부두 준공식에 참가한 사이토 총독이 ‘오,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이라고 외쳤을까. 해망로를 사이로 조선은행, 미곡취인소(미두장)를 세우고, 대규모 항만시설과 도로 등을 서둘러 건설한다. 군산내항의 뜬다리(부전교)와 나가사키18은행, 군산세관 건물이 그 흔적을 전하고 있다. 특히 ‘한’ 서린 쌀을 실었던 내항은 금강하구둑이 들어선 후 금강이 토해낸 퇴적물로 초라한 모습으로 남았다. 내항에서 진포해상테마공원을 지나면 금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길목에 ‘째보선창’이 있다. 금강이 서해바다를 만나 ‘강물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물을 만난 모양이 Y자로 째져 붙었다는 이곳의 본래이름은 죽성포구. 당초 조선상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설애장(경장시장) 설애포보다 작은 어시장이었으나, 내항이 번성하면서 일제시대 최고 위치를 누렸다. 째보선창은 개항 이후 군산의 시대상을 풍자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이다. 서천땅을 처분한 정주사가 똑딱선을 타고 째보선창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쌀 현물을 가지고 투기하는 미두장에서 돈을 다 날리고는 선창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곳이다. 군산시내 뿐 아니라 개정 대야 서수면에도 일제 강점기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수탈의 역사가 교육 현장으로 군산에 이처럼 19~20세기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유는 개발에서 소외됐기 때문이다. 이들 일제시대 건물은 해방 이후 개발 바람을 덜 타면서 오히려 보존에 도움이 됐다. ‘군산지킴이’로 활동하는 이복웅(63) 군산문화원장은 “개항 전후 군산은 쏟아져 들어온 근대문물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며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것이 이런 유산을 보존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주민입장에서는 지나간 세월만 붙잡고 살 수 없는 노릇이다. 10~20년 전부터 군산 시내의 중심 상권이 나운동·미룡동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이들 거리가 슬럼화되고 번영의 유산은 노후화 2008-12-12
- 시론 이제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 (시론) 눈만 뜨면 들리는 소리가 ‘어렵다’ ‘죽겠다’는 말들이다. 송년회 때마다 들어온 그 말의 편린이 귀에 못박혔는데, 새해 덕담 끝에도 빠지지 않아 이명처럼 귓전에 붙어버렸다. 신문이며 잡지며 TV같은 매스 미디어들이 쏟아내는 보도가 ‘불황’ ‘불경기’에서 ‘준공황’이라는 표현으로 에스컬레이트 되었다. 잘 나가는 기업들도 몸을 움츠려 새해 아침 몰아친 한파보다 더한 맹추위 같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큰 고난을 여러 차례 이겨낸 경험과 지혜가 있다. 가까이는 바로 11년 전 우리 경제가 국제 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에 의지했던 국가부도의 위기를 몇해만에 거뜬히 극복한 경험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우리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던 엄동의 해에, 근년의 ‘돈놀이’ ‘주식잔치’를 예측한 사람이 있었던가. 도시의 지하도들이 노숙자 무리로 들끓고 큰길을 점령한 노점상들 때문에 길 가기가 어렵던 그 때, 747 공약을 내거는 대통령 후보가 나올 줄 꿈이나 꿀 수 있었던가. 지금 한번 차분히 되돌아 볼 일이다. 6·25 전화(戰禍)에 비하면 IMF 시대는 고통이라 말할 자격도 없다. 1·4후퇴 때 다섯살 났던 나는 허벅지까지 눈이 쌓인 태백준령을 넘어 피란을 갔다. 짐을 이고 진 어른들에게 손이 없어서, 그 높은 고개들을 걸어서 넘어갔다. 눈이 너무 깊어 걸을 수 없는 곳에서만 이불 짐 위에 잠시 올라타는 ‘행운’을 누렸다. 피란에서 돌아와 학교에 들어가서는 천막교실에서 공부했다. 학교 건물이 불타 없어져버렸던 것이다. 춥고 어두운 천막교실 신세를 면한 것이 3학년 때였다. 기다리고 기다려 옮겨간 새 교실은, 몇해 뒤 사라호 태풍 때 찌그러져버린 판잣집이었다. 그런 고생은 그 시대를 산 사람 모두가 겪은 ‘국민재앙’이었다.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은 영남지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온전히 서 있는 건물이 없었던 그 참담한 폐허를 딛고 일어선 힘이 과연 무엇이었던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다. 전쟁으로 인하여 죽거나 다친 사람, 또는 이산가족 없는 집이 없었다 할 정도의 인명피해까지 입고도, 우리는 기를 쓰고 살아남았다. 피란지 산비탈에 천막을 치고 전시 연합학교들이 문을 열었다. 가르치고 배우기를 그칠 수는 없었다. 우리 민족의 환난(患難)이 어찌 6·25 전란뿐이겠는가. 역사를 멀리 거슬러올라갈 것도 없다. 세계열강의 식민지 쟁탈경쟁의 시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세월이 35년이었다. 그 오랜 압제의 세월에도 우리는 배달민족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았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같은 국난도 우리는 그렇게 이겨냈다. 중국이라는 초강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살면서 독자문화를 오롯이 지켜낸 민족이 몇이나 되는지를 따져보면, 우리 민족의 저력에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중국 땅에 존재하는 55개 소수민족은 모두 자기네 나라를 가졌던 사람들 집단이다. 그 가운데 아직도 자기 말과 문화와 국체를 가진 민족은 한민족과 몽골족뿐이다. 나머지 53개 민족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힘에 녹아들어 민족의 혼과 정체를 잃었다. 광활한 아시아 대륙 동쪽 해안에 토끼꼬리처럼 붙은 작은 반도 민족이, 중국의 괴력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고 문화와 문자와 국체를 누천년 보존해온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DNA’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다. 그런 생리를 우리는 가졌다. 지혜와 끈기와 투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걸어온 역정을 되돌아보면, 지금 우리 앞에 닥쳐온 역경은 잠시 스쳐가는 보릿고개 정도라 말하고 싶다. 해마다 돌아오는 보릿고개와 한발과 태풍을 견뎌낸 우리의 생리에는 한두 끼니 결식에 지나지 않는 고통이리라.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럴 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가면서, 약이 된다는 ‘치료금식’으로 치부하고 이겨내자. 교수신문이 새해 희망의 말로 뽑은 사자성어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한다. 꽉 막힌 정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아무나 한데 어울려서는 안되지만, 우선은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이 난관을 돌파하는 지혜가 아닐까 한다. 문창재 객원논설위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