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민주당 지도부 6인의 새로운 도전 6일 민주당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6명의 민주당 새 지도부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세균 대표는 여전히 ‘관리형 대표’라는 이미지가 큰 게 사실이다. 정 대표가 2년간 어떤 리더십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향후 정치적 진로의 질이 달라질 것이라는 게 정가의 관측이다. 최고위원 선거에서 1위를 차지한 송영길 의원은 이번 선거로 이른바 ‘386 정치인’의 선두주자가 됐다. 40대 중반을 넘어선 ‘386세대’가 사회 중추로 자리잡는 상황에서 이 세대의 정치권 선두주자가 됐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 의원은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2위를 차지한 김민석 전 의원은 말 그대로 ‘기사회생’한 경우다. 이번 선거로 김 전 의원은 6년간 정치권 낭인을 끝내고 부활할 수 있는 계기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86 대표주자’에서 급격히 추락했던 김 전의원 앞에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과제가 높여있다. 박주선 의원 역시 오랜 기간 정치적 역경을 극복하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3번 구속 3번 무죄’로 상징되는 고난의 세월을 최고위원 3위 당선으로 보상받았다. 하지만 박 의원은 이제 동정심이 아닌 실력으로 검증받아야 하는 시험대에 들어섰다는 게 정가의 관측이다. 안희정 논산·계룡·금산 지역위원장의 당선은 ‘친노세력’의 부활로 풀이되고 있다. 하지만 개인 안희정을 놓고 보면 안 위원장의 당선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 안희정’에서 ‘정치인 안희정’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안 위원장은 ‘민주정부 10년의 계승과 혁신’을 선거내내 주장했다. 참여정부의 무엇을 혁신할 것인가가 정치인 안희정의 첫 화두가 될 전망이다. 김진표 의원은 ‘관료 김진표’에서 ‘정치인 김진표’로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김진표 의원이 그동안 관료출신 정치인 보여줬던 한계를 과연 벗어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당 대표 선거에서 낙선한 추미애 의원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 대표 선거에서 정세균 대세론을 넘지 못하고 2위에 그쳤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 지지율 1위를 차지함에 따라 향후 정치적 행보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07-07
- [중국시평]북한의 개혁개방은 가능한 것인가 북한은 1997년 농업분야에서 수십 내지 수백명을 단위로 하던 작업반관리제를 18~23명을 단위로 하는 분조책임제로 전환하였으나 효과가 미미했다. 2002년 이후에는 5~8명으로 줄였고 농경지도 장기간 분조에 고정시켰으며 그 농토에 심는 작물의 선택권도 분조에 주었다. 쌀 1kg당 8전이던 수매가격을 40원으로 50배 격상시켰고 토지사용료로 10%, 국가에 바치는 15% 외의 모든 생산물은 분조에서 임의로 처리하게 했다. 공업 분야에서는 종업원의 임금결정권과 해임권을 기업에 주었다. 그 결과 2000~3000원의 최저임금으로부터 8만원에 이르는 최고임금 사이에 다양한 임금체계가 생겼고 해고된 직원은 도인민위원회에서 재배치하게 되었다. 기업은 국가과제를 초과완수한 부분을 직접 시장에 팔 수 있다. 단 시장에서 판 상품 순이익의 50%를 국가에 바쳐야 한다. 2002년부터 경제개혁 박차 금융 부문에서는 과거 공장 기업소에 대한 투자를 국가재정이 전액 부담하던 방식으로부터 은행으로부터 금리차용형식으로 바꾸었다. 은행에서는 이윤이 높고 상환이 빠른 기업부터 자금을 제공하며 경영부실이거나 상환이 불가능한 기업에는 자금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2003년에는 원래 농산물만 사고 팔던 농민시장을 경공업 제품과 수공업품도 팔 수 있는 종합시장으로 성격전환을 해서 도시의 각 구역과 지방의 군 단위마다 다 두게 했다. 2006년에는 부동산법을 제정, 공장기업소와 기관으로부터 그들이 점하고 있는 부지면적에 의하여 사용료를 징수하고 있으며 공원과 도로도 면적에 의하여 해당기관으로부터 사용료를 징수한다. 이상의 상황만으로도 우리는 북한의 개혁은 2002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혁의 발목을 잡는 애로사항도 엄연히 존재한다. 가장 큰 어려움은 에너지 부족이다. 해마다 400만킬로와트의 전력이 있어야 하는데 근 100만킬로와트가 부족한 상황에서 공장은 교차조업을 하고 있다. 그 사이 많은 발전소들을 새로 건설했고 기존 발전소들에 대한 개보수사업도 많이 했지만 에너지 부족을 완전히 극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음은 자금 부족이다. 경제개혁에 필요한 자금을 해결하려고 2003년에 건국 이래 두 번째 규모의 공채를 발행해 많은 문제들을 해결했지만 외국으로부터 들여와야 할 대량적인 설비와 기술을 위한 자금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북미관계 개선이 유일한 탈출구 세번째로는 안보 환경과 국제사회와의 폭 넓은 교류이다.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네개의 특구가 잘 되지 않는 원인 중의 주요한 하나가 한반도의 불안한 안보 상황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북미관계의 개선만이 유일한 탈출구이다. 북미관계가 정상화되고 북일관계가 개선되어야 북한의 안보상황이 근본적으로 개선될 것이고 기술과 자본이 대량으로 유입될 것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초기단계는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북한은 중국보다 더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개혁개방을 시작했다.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며 꾸준히 도와야 할 것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06-25
- 중국시평 북한의 개혁개방은 가능한 것인가? 북경대학 최 응 구 북한은 1997년 농업분야에서 수십 내지 수백명을 단위로 하던 작업반관리제를 18~23명을 단위로 하는 분조책임제로 전환하였으나 효과가 미비하였다. 2002년 이후에는 5~8명으로 줄였고 농경지도 장기간 분조에 고정시켰으며 그 농토에 심는 작물의 선택권도 분조에 주었다. 쌀 1kg당 8전이던 수매가격을 40원으로 50배 격상시켰고 토지사용료로 10%, 국가에 바치는 15% 외의 모든 생산물은 분조에서 임의로 처리하게 하였다. 공업 분야에서는 종업원의 임금결정권과 해임권을 기업에 주었다. 하여 2000~3000원의 최저임금으로부터 8만원에 이르는 최고임금 사이에 다양한 임금체계가 생겼고 해고된 직원은 도인민위원회에서 재배치하게 되었다. 기업은 국가과제를 초과완수한 부분을 직접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다. 단 시장에서 판 상품 순이익의 50%를 국가에 바쳐야 한다. 금융 부문에서는 과거 공장 기업소에 대한 투자를 국가재정이 전액 부담하던 방식으로부터 은행으로부터 금리차용형식으로 바꾸었다. 은행에서는 이윤이 높고 상환이 빠른 기업부터 자금을 제공하며 경영부실이거나 상환이 불가능한 기업에는 자금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2003년에는 원래 농산물만 사고 팔던 농민시장을 경공업제품과 수공업품도 팔 수 있는 종합시장으로 성격전환을 하여 도시의 구역과 지방의 군마다 다 두게 하였다. 2006년에는 부동산법을 제정하여 공장기업소와 기관으로부터 그들이 점하고 있는 부지면적에 의하여 사용료를 징수하고 있으며 공원과 도로도 면적에 의하여 해당기관으로부터 사용료를 징수한다. 이상의 상황만으로도 우리는 북한의 개혁은 2002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혁의 발목을 잡는 애로사항도 실재하고 있다. 우선은 에너지의 부족이다. 해마다 400만kW의 전력이 있어야 하는데 근 100만kW가 부족한 상황에서 공장은 교차조업을 하고 있다. 그 사이 많은 발전소들을 새로 건설하였고 기존 발전소들에 대한 개보수사업도 많이 하였으나 에너지의 부족을 완전히 극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음은 자금의 부족이다. 경제개혁에 필요한 자금을 해결하려고 2003년에 건국 이래 두 번째 규모의 공채를 발행하여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였으나 외국으로부터 들여와야 할 대량적인 설비와 기술을 위한 자금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세번째로는 안보 환경과 국제사회와의 폭 넓은 교류이다.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네개의 특구가 잘 되지 않는 원인 중의 주요한 하나가 한반도의 불안한 안보 상황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북미관계의 개선만이 유일한 탈출구이다. 북미관계가 정상화되고 북일관계가 개선되어야 북한의 안보상황이 근본적으로 개선될 것이고 기술과 자본이 대량적으로 유입될 것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초기단계는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북한은 중국보다도 더 어려운 환경속에서 개혁개방을 시작하였다.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며 꾸준히 도와야 할 것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06-25
- 수도권 규제개혁과 지방지원정책의 병행 추진이 상생발전(기고) 김은경 경기개발연구원 수도권정책센터 책임연구원 지난 7월 21일 정부는 ‘지역발전정책 추진전략’(이하 7.21. 정책)을 발표하였다. 7.21.정책은 일자리와 삶의 질이 보장되는 경쟁력 있는 지역창조를 위해 세계화에 대응하는 광역경제권 구축, 지역개성을 살린 특성화된 지역발전, 지방분권·자율을 통한 지역주도 발전, 지역간 협력·상생을 통한 동반발전 등을 제안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기초생활권·광역경제권·초광역개발권 추진, 신성장동력 발굴 및 지역특화발전, 지방재정의 자율성 제고, 특별지방행정기관 지방이관, 행복도시·혁신도시·기업도시 등의 발전적 보완 등을 제시했다. 지역경쟁력 강화를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 목표는 개방화·세계화 시대에 부응하는 타당한 목표이다. 문제는 7.21. 정책이 이러한 목표에 적합한 정책수단이 될 수 있는가이다. 7.21. 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중장기적 투자가 필요한 지방발전을 위해 경제성장과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시급한 수도권 규제개혁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방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향후 1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한 반면 국가경쟁력 강화는 시급한 당면과제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경쟁력 강화의 핵심인 수도권 규제개혁을 포기한 것은 수도권과 지방의 ‘동반자살’이 될 것이다. 또한 행복도시, 기업도시, 혁신도시 등과 같은 ‘땅 파기’ 사업은 국고 손실 및 혈세 낭비만 초래할 것이다. 더욱이 경제적 효율성과 시장경제원리의 확립을 표방하는 이명박 정부가 반시장적 정책을 발표한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다. 입지와 업종 선택의 자유는 사적 기업의 고유한 권한이며 이러한 기업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는데, 민영화되는 공기업을 지방으로 이전하도록 강요하겠다는 발상이 시장경제에서 가능한가? 또한 경제권의 형성은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교류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광역경제권을 형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인위적으로 ‘5+2 광역경제권’ 추진을 하겠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국가와 지역의 산업정책의 고려가 전제되지 않은 채 기업만 지방으로 옮기면 된다는 발상은 국가경쟁력 및 산업경쟁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더구나 지방정부의 자주재원 확보를 위한 국세·지방세의 근본적인 조정 방안이 없이는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정부의 의존만 심화시킨다. 또한 조직 및 인력, 업무이관에 따른 재원확보 방안, 실질적인 기획권한이 없는 권한위임이나 특별지방행정기관이양은 무의미하다. ‘선 지방육성, 후 수도권 규제완화’의 정책기조는 참여정부 내내 기업의 투자를 억제하며 경기침체를 불러온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현재의 경기침체를 극복하고 국가경제의 성장동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수도권 규제개혁과 지방지원정책을 병행 추진해야 한다. 국가성장을 견인해 나갈 수도권 대기업의 신·증설 허용, 공장총량제 폐지, 정비발전지구제도 도입 등 수도권 경쟁력 강화와 경기도 동·북부 낙후지역의 발전을 위한 지원정책이 필요하다. 또한 정부는 민영화되는 공기업들이 기업의 의지에 따라 투자할 수 있도록 기업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수도권내 지역을 지정하여 시행되는 지방이전기업지원정책은 폐지되어야 하며, 기업들이 이윤추구의 과정으로서 지방으로 이전하도록 정부가 인센티브를 통해 유도하는 것이 시장원리에 부합된다. 광역경제권 정책은 지자체들과 중앙정부, 그리고 국민들의 합의에 근거해 추진되어야 한다. 지역발전정책의 주체는 지방이기 때문에 지방이 자율과 책임의 원칙에 따라 발전할 수 있도록 중앙정부는 게임의 규칙을 정해주고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지방을 지원해주면 된다. 참여정부의 균형정책에 대한 철저한 평가도 없이 구태의연한 정책을 반복하는 것은 결국 지방의 ‘눈치 보기’ 정책으로서 경제성장과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국가적 대의를 무시하고 지역이기주의에 편승하는 정책이다. 이명박 정부는 7.21. 지역발전정책을 전면 수정해야 할 것이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08-01
- <이경형칼럼> 다시 ‘건국 외교’를 생각한다 최근 한국 외교가 거듭된 낭패를 보고 있는 가운데, 오는 15일 건국(정부 수립) 60주년과 광복 63주년을 맞게 된다. 60년이 지난 지금 국제 정세는 많이 변했지만 한반도 주변 4강과의 관계 중요성 등 지정학적 특성은 그때나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 최고 지도자가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국가 발전의 확실한 목표 아래 외교 정책을 펴나가야 하는 것도 그때나 마찬가지다. 60년 전, 열강들 간 세력확장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독립국가로 살아남은 것은 피를 말리는 ‘초읽기 외교’에서 수(手)를 제대로 읽었다는 뜻이다. 당시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조국은 반드시 남북이 통일된 독립국가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이 매우 높았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건국 외교는 확실히 걸출한 면이 있다. 그는 국제정치 역학의 대세를 냉철하게 읽고 남한 단독정부라도 독립을 해야겠다는 어려운 선택을 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는 신탁통치를 결정했고 민족진영이나 좌우익 할 것 없이 일제히 이를 반대했으나,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은 돌연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승만은 당시 세계정세는 이미 미국과 소련을 두 축으로 하는 냉전 대결로 접어들었고 체코슬로바키아 연정이 공산화로 가는 등 동구제국의 공산화가 확산되는 상황을 보고, 통일정부 수립은 무망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소 공동위에 매달린 하지 미군사령관의 좌우합작 노력은 결국 세월을 허비하다가 남한마저 공산화될지 모른다고 우려하면서 미 국무성을 상대로 단독정부라도 세우기 위한 외교 교섭에 들어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소 파워게임 틀 속에서 남북분단이 불가피했다면 차선책으로나마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민 누구나가 통일정부 수립을 염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 구 등 수많은 민족진영 지도자들도 단독정부를 반대했는데 이를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구한말 때부터 항일독립운동을 펴왔던 애국심, 미국 유수한 대학을 두루 수학하면서 체득한 국제정치에 대한 안목과 냉철한 현실 판단에 입각한 결단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외교는 이승만의 건국 외교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부분적으로나마 그 영역을 확대해왔다. 박정희정부 때는 미국과의 동맹외교로 일관한 가운데 한·일 국교정상화를 이뤘다. 탈냉전시대 전야였던 노태우정부에서는 북방외교의 문을 열었다. 소련과 중국과의 수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으로 한국 외교 지평을 크게 확장시켰다. 김대중정부 들어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은 대북정책의 틀을 크게 바꾸었다. 역대 정부가 나름대로 외교적 지평을 넓혀왔지만 특히 이승만의 건국 외교가 지금 외교적 난관에 처한 이명박정부에게 줄 수 있는 시사점은 두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하나는 국제 정세의 흐름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는 것이다. 건국 외교는 거의 이승만 1인 외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혼자서 많은 결정을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훨씬 덜하다. 물론 최종 순간엔 대통령이 결정을 해야겠지만 국제 정치에 해박하고 안목 높은 인물들을 찾아 참모로 앉히면 된다. 지금 외교 난국은 문제를 너무 미시적으로 보는 외교관 출신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 아닌지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확실한 외치 철학 아래 냉철한 현실주의로 재무장하는 것이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추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논자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외교에서 이상과 명분보다는 현실과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번 아세안안보포럼(ARF)에서 금강산 피격사건과 10·4선언이 모두 빠진 것은 의장국으로서 싱가포르가 남북을 같은 무게로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미국이 원상회복을 하기로 했다고는 하지만 독도를 주권미지정 지역으로 변경한 이면에는 같은 동맹이라도 한·미동맹과 한·일동맹 간에 온도차가 있다는 것을 방증한 것이다. 이명박정부의 실용주의도 따지고 보면 현실주의다. 그렇지만 일관된 외치의 철학적 뒷받침이 약한 현실주의다. 동맹이 대북관계를 포함한 외치를 모두 해결해주는 마스터 키가 될 수는 없다. 남북관계는 또 하나의 외치 영역이다. 최근 와서는 이 정부가 북한과 대화를 한다는 것인지, 안 한다는 것인지 신호가 분명치 않다. 북·미 관계 진전과 한반도 정전체제의 종식 등 남북관계·대북정책을 동북아 안보의큰 틀에서 역사 발전의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08-01
- 서평 ‘1910년대, 풍문의 시대를 읽다’ 문창재 (객원 논설위원) ^인간에게 지나간 100년 세월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은 사람에 따라, 민족과 국가에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근세 100년은 지구촌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도 격동의 세월이었다. 문명과 인지의 발달이 가져온 인류생활의 변화는 과거 어느 100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한국인에게는 지나간 100년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과도 비견될 수 없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면, 100년은 대략 3세대 남짓한 세월이지만, 고령자들은 일생동안 과거 몇 백 년과 비견될 변화를 겪었다. ^구십 수년 전의 그 세상은 어떠했을까. 이런 물음에 역사책보다 훨씬 실감나는 책이 나왔다. 국문학자 권 보드래 조교수(동국대 교양교육원)의 ‘1910년대 풍문의 시대를 읽다’이다. ^권씨가 1910년대를 ‘풍문의 시대’로 규정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시대는 초기 커뮤니케이션 단계였다. 인터넷 통신이 삽시간에 수십 수백만 인파를 촛불광장으로 끌어내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시대가 100년도 안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움일 것이다. 책상머리에서 간단하게 ‘대통령이 어제 밤 누구와 밥을 먹으면서 무슨 말을 했고, 그 말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웹 2.0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원시 커뮤니케이션 시대였다. ^1901년 벽두 미국에서는 문명의 발달을 상찬하는 말들로 20세기의 첫 새벽을 맞았다. 그 해 1월 1일자 신문 은 그 시대의 물질문명 발전을 ‘환상적’이란 말로 표현했다. 지나간 19세기를 되돌아보고 밝아오는 20세기를 전망하는 특집기사를 통해, 자동차와 기차 같은 교통수단, 전기와 통신기기의 발명 등을 예로 들어 문명시대에 살게 된 행운에 감읍하였다. ^그로부터 10년 세월이 지나도록 조선에서는 지구 저편 사람들의 그런 행복을 짐작도 하지 못 하였다. ‘모르는 게 행복’이던 시대였다. ^일제가 ‘조선 사람들을 어쩐다하더라’ 는 소문과 풍문에 불안해하는 경술국치 초기의 사회상에서부터, 3운동이 일어난 1919년의 국권회복 운동 절정기에 이르는 10년간의 사회상을 조선총독부 기관지 기사로 보여주는 책이 ‘1910년, 풍문의 시대를 읽다’이다. ^기사를 인용한 신문이 총독부 기관지라는 한계는 있지만, 10년을 같은 창으로 내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총독부의 입장에서 바라본 기사들이라 해도, 정치적인 선전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원자재에 접하는 감흥이 있다. ^“합방을 실시하는 시에 재정이 군졸함으로 전국 부민(富民)을 본년 추계에 조사하여 천석 이상을 수확하는 부민은 그 재산 전부를 은행에 처치(處置)하고 매인에게 매일 평균 50전씩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금융을 유통케 한다는 설은 조언(造言)자가 선출(煽出)한 것인데, 이와전와(以訛轉訛)하여 무근의 설이 유행함이라더라.” (1910년 9월 1일자) ^합방 이전부터 나돌던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한다하더라’는 풍설을 합방 사흘 만에 쓴 기사 전문이다. 풍설의 출처와 이를 부인하는 당국자를 밝히지 않은 기사작법과, 문어체 구투의 문장에서도 커뮤니케이션 초기단계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이 책 제1부 제1장(소문과 풍설)에는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강제로 일본 옷을 입히게 하고 매장(埋葬)을 금지한다느니, 출산에도 과세한다느니, 하는 풍설에서부터 종두사업 방해자 엄단, 학령아동 일제조사 같은 총독부 시책에 이르기까지, 사실과 풍문을 모두 ‘하더라’ 식으로 쓴 기사들을 소개하고 있다. ^제2장(천황과 총독과 왕)은 일본 천황 다이쇼(大正)의 즉위식과 생일(천장절)행사, 일제에 협력하는 왕가(王家) 동향, 조선민중에게 ‘시혜’를 베푸는 총독부에 관한 기사들로 묶었다. 특히 서울(경성)에서 열린 천황 즉위식 축하행사를 알리는 ‘경성 대례 봉축의 행사’(1915년 11월 2일자) 기사에서는 일본 총리가 11월 10일 오후 3시 30분 천황만세를 봉창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 경성에서는 부민들이 각각 뜰 앞에 나와 경도(京都) 방면으로 향하여 일제히 만세를 삼창하기로 결정하였다하더라”고 썼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만세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심사에는 아무 언급이 없이. ^제3장(학교와 그 주위)에서는 당시 명문학교들의 입시경쟁률, 여학생들의 사치풍조, 몇몇 학교의 동맹휴학, 마지막 과거시험 등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제4장(도시의 재구성)에는 일제가 서울을 하나의 지방 도시로 전락시키기 위해 행정구역 면적을 8분의 1로 축소했다는 사실(해설)과, 서울시가지 도시계획 사업에 관한 기사들이 눈길을 끈다. 특히 1915년 3월 15일자 ‘여(余)는 서대문이올시다’ 란 기사는 돈의문(서대문)이 헐리게 되어 서운하다고 해놓고, 말미에는 “경성의 교통에 방해만 되는 이 몸이 헐려가는 것이 기쁘기 한량없다”고 철거를 미화하는 말로 기사가 마무리 되었다. ^제2부에서는 조선인 상가와 일본인 상가를 대비한 상술의 차이에서부터, 수탈과 물가고에 허덕이는 서민생활의 고통, 만주이민 유행의 세태, 그 시대의 연애∙ 결혼∙ 여가생활∙ 공연문화 등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기사들이 인용되어 있다. ^선진국들이 문명생활을 상찬한 시기에 제국주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풍문과 미신, 압제와 저항, 생활고와 국권회복 투쟁으로 10년을 살았다. ^내레이션도 윤색도 덧칠도 없는 옛 필름 한 편을 느긋이 본 것 같은 책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07-31
- [유럽의 전통 직업교육] ⑦ 이탈리아 무라노섬 유리공예 장인교육 유럽의 전통 직업교육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 연재를 통해 유럽의 장인정신과 지역 전통의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한 교육제도를 집중 조명할 것입니다. 유럽의 국가들은 현악기, 모자이크, 향수, 시계 등은 전통과 교육을 융합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들 사례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전통문화를 잇는 것이 가치 있게 평가되고 이에 대한 체계적 관심과 교육, 지원이 이뤄지길 기대해 봅니다. 편집자 주 147년 전통 공예학교 운영 … 공방은 도제식 교육 유리는 ‘모래와 재로 만든 불사조’로 일컬어지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이다. 13세기 이탈리아 베니스 무라노(Murano)섬에서 최초로 유리공예품을 만들어 유럽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유리공예가 명성을 떨치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운하의 강바닥에서 나오는 자갈과 습지의 평원에 있는 소다석회의 조달이 용이했다. 둘째는 유리제조 비법을 지키기 위해 유리 장인들을 무리노섬에 모아놓고 섬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철저히 관리했다. 평생을 무리노섬에서 유리공예를 위해 몰두한 장인들의 희생 없이 명성을 얻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라노섬은 지금도 여전히 유리공예에 있어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가업을 물려받아 수십년간 활동하고 있는 장인들이 만든 유리공예품은 예술성이 뛰어나고 실용미가 넘친다. 무라노의 유리수공예 기술은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경제위기 고비를 넘기며 지켜져 온 ‘유리의 섬’ 무라노의 유리수공예 전통은 세월과 함께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무라노에는 유리 관련 기업만 336개로 섬 전체 경제의 82%를 차지한다. 이 중 유리제조와 생산업체가 175개로 절반이 넘으며, 생산과 판매 모두 담당하는 기업은 57개, 판매업 전문기업은 77개다. 그 외에도 실내장식품 조립과 전등을 생산하는 기업이 22개 있고 유리박물관 등 연구기관도 있다. ◆유리 현대적인 활용에도 관심 = 1861년 개장한 ‘유리제조박물관’과 1862년 개교한 ‘유리제조미술학교’를 통해 유리공예의 전통을 계승 발전키고 있다. 특히 유리제조박물관 개장으로 고대의 유리제조 기술에 관련된 자료 사용과 유물 보관이 가능하게 됐다. 또 무라노섬의 경제와 문화를 재인식하고 보존하려는 의지를 굳히는 기회가 됐다. 유리제조미술학교는 1970년대까지 유리공예 장인들을 대상으로 작업과정에 도움이 되는 예술감각과 미술계획구상 능력, 미적 조화를 교육하는 공간이 됐다. 베니스시는 무라노의 유리제조 전통기술을 재조명하는 교육시설을 만든다는 목표아래 80년대 말 ‘무라노국제유리센터’(아바테 자네티 유리학교)로 재탄생시켰다. 핵심 교과는 유리제조장인 교육, 전통과 현대식 예술유리 제작기술 및 방법, 유리제조 산업 마케팅, 디자인교육 등이다. 또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유리실험반’은 학생들에게 유리의 세계를 이해하고 빛·색·재료라는 측면에서 유리특성을 실험을 통해 터득하도록 한다. 직업인을 위한 워크숍도 실행되며 전통기술전수 외에도 ‘유리’라는 성분 자체의 문화적 사회적 측면을 고려한 검토와 그 과학적 응용을 연구하는 연구소의 역할도 담당한다. 무라노국제유리센터의 교육방침과 목표의 특징은 무라노 지역문화가 현대생활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즉 유리를 다룰 줄 아는 무라노 장인들의 노련함과 기법이 화학, 생물, 기술 전문가들의 실험 연구와 만나 공동의 연구결과를 얻어내는 방식이다. 국제유리센터는 ‘무라노유리실험연구소’와 더불어 유리성분의 개발에 획기적인 진보를 가져왔다. 이제 유리는 현대산업에 중요한 광학섬유, 절연재, 우주항공자재, 또 인공장기 제조와 같은 생명공학에 이용되고 있다. 현대 과학기술로 개발한 기계들은 유리공예 작업 환경도 크게 바꿔 놓았다. 과거에는 작업 중에 뿜어 나오는 연기로 숨을 쉬기 힘들었고 1500도가 넘는 불가마 옆에서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연기흡수관이 따로 있고 절연재사용으로 작업장의 기온도 조절된다. ◆규율 엄격, 말없는 복종 필요 = 유리공예 장인이 되기 위한 훈련은 학교보다는 작업장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유리공예 장인들은 1000년이 넘게 유리제조에 필요한 재료들의 양과 성분을 비밀 수첩에 가득히 채워 기록하고 보존해 오고 있다. 컴퓨터와 화학이 발전한 현재도 연금술사의 신비에 가까운 그들의 비법은 수제자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무라노 최연소 ‘마에스트로 베트라이오’(유리수공예 장인)인 마르코 세구조(34)는 어릴 적부터 학교수업보다 조부와 부친이 일하던 유리작업장에 가는 것을 더 즐겼다. 방학에 틈틈이 시작했던 일이 16세에 직업으로 변했다. 그는 “여름 한 나절 밖의 온도보다 더 높은 작업장에서 일을 마치고 나서면 한 여름이 시원하게 느껴지기만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이 직업은 배움의 끝이 없다”면서 “유리라는 물질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데 흥분을 느낀다. 짧은 시간에 마쳐야 하는 동작, 깨지지 않게 신경을 집중해야 하고 정확한 지점에서 불어야 하는 것, 그 모두가 하나둘 익숙해질 때의 만족감이란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60여년을 유리수공으로 보낸 비토리오 페로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장인과 보조인들이 금방 배우게 되는 첫 번째 규칙은 말수를 최소한으로 줄이며, 눈빛 하나로 모든 걸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3세에 작업장 심부름꾼으로 일을 시작했다는 그는 “내가 매일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아침과 오후, 하루 두 번 주점에 가서 ‘마에스트로’가 마실 포도주를 사오는 것이었다. 마에스트로는 작업 중 남은 자투리 유리를 녹여 만든 컵에 본인은 한 컵, 조수에게는 반 컵, 잡일꾼에게는 더 조금 따라주곤 했다”고 기억했다. 규율은 엄격했고 무조건 말없이 복종하는 것이 절대 조건이었다. 60년 경력의 페로 장인은 “진짜 유리공예 장인은 일을 하면서 만들어질 뿐”이라고 강조했다 . 유리공예품 어떻게 만들어지나 마술같은 손놀림에 절로 감탄 21세기에도 하나하나 입으로 불어만드는 전통방식 고수 경력이 많은 유리공예 장인들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마술같은 손놀림에 감탄하게 된다. 녹은 유리는 젤리같이 혹은 녹은 설탕처럼 흘러내릴 것만 같은데 쉴 새 없이 돌려대는 쇠막대기 끝에서 기계로 만든 것보다 더 모양이 일정하고 완벽한 접시로, 병으로 변해간다. 장인이 쇠막대기 구멍으로 불어대면 투명한 유리는 비눗방울처럼 부풀어간다. 정확한 힘과 팔 동작으로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어진 유리를 가볍게 내려치면 병 주둥이가 깨끗이 잘리면서 작품이 완성된다. 현재 무라노에 있는 유리제조 아틀리에는 100여 개 남짓된다. 대부분 2~3명의 장인들이 전통적인 기법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소규모 공방이다. 이곳에서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재래식 화로 옆에서 연신 땀을 흘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유리 공예품들을 만드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액체와 고체의 중간 상태로 점성이 높은 유리 반죽을 1500도 가량의 고온에서 가열한다. 이들은 아직도 ‘칸네’라고 하는 긴 대롱을 통해 입김을 불어넣는 전통 제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가위 하나만 손에 쥐고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장인의 손놀림은 한마디로 예술이다. 베니스 무라노 유리의 가장 큰 특징은 뚜렷한 형태와 화려하고 선명한 색채다. 프랑스에서 수입한 ‘사비아’란 모래를 1200도 화덕에 끓인 후 색소를 적절히 배합해 색깔을 낸다. 검정색은 망간, 파랑색은 코발트, 노란색은 카드뮴, 초록색은 산, 빨강색은 금을 색소로 넣는다. 이 곳 유리는 크리스탈과 유리의 장점만을 이용해 납을 섞는 크리스탈 보다 투명도가 높으면서 강도는 일반 유리보다 훨씬 강하다. 무라노 유리 제품으로는 관광객을 위한 기념 소품에서부터 유리 화병 등의 장식용품, 귀걸이나 시계 등 액세서리, 대형 샹들리에 같은 조명기구까지 다양하다. 가격대 역시 몇 천원부터 수백만 2008-07-31
- 유럽의 전통 직업교육 주: ⑦베니스 ‘무라노’ 섬 유리공예 장인 교육 부: 천년 역사의 ‘유리의 섬’ … 수백년 제조비밀 이어가 부: 장인 ‘노하우’ 광학섬유·항공재·인공장기 제조에 활용 ‘모래와 재로 만든 불사조’로 일컬어지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 유리. 13세기 최초로 유리를 공업적으로 만들어 유럽에 공급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탈리아 베니스의 무라노 섬이었다. 이곳에서 유리 장인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귀족 신분에 오르기도 하고 귀족과의 혼인도 허용 됐다. 하지만 가마의 축조와 유리 제조기술의 비밀 유지를 위해 섬 밖으로 도망치는 자는 극형에 처해졌다. 당시 유리제조가 나라경제에 끼친 영향과 그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무라노 섬은 여전히 유리공예에 있어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유리공예의 가업을 물려받아 수십년간 활동하고 있는 장인들이 만든 유리공예품은 예술성이 뛰어나고 실용미가 넘친다. 무라노의 유리수공예 기술은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경제위기의 고비를 넘기며 지켜져 온 ‘유리의 섬’ 무라노의 유리수공예 전통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무라노에는 유리 관련 기업만 336개로 이들이 섬 전체 경제의 82%를 차지한다. 이 중 유리제조와 생산업체가 175개로 절반을 넘으며, 생산과 판매 모두 담당하는 기업은 57개, 판매업 전문기업은 77개다. 그 외에도 실내장식품 조립과 전등을 생산하는 기업이 22개, 유리박물관 등 연구기관들이 있다. ◆아바테 자네티 유리학교, 전통기술 재조명 = 오랜 유리공예의 명맥을 이을 수 있게 한 것은 1861년 개장한 ‘유리제조박물관’과 1862년 개교한 ‘유리제조미술학교’다. 유리제조박물관 개장으로 고대의 유리제조 기술에 관련된 자료의 사용과 유물 보관이 가능하게 됐다. 또 무라노 전통경제와 문화를 재인식하고 보존하려는 의지를 굳히는 기회가 됐다. 유리제조미술학교는 1970년대까지 유리공예 장인들을 대상으로 작업과정에 도움이 되는 예술감각과 미술계획구상 능력, 미적 조화 배워 장인예술가로서의 기본을 획득하는 공간이 됐다. 그러던 중 무라노 유리제조 전통기술을 재조명하는 교육시설을 만든다는 베니스시의 목표아래 80년대 말 ‘무라노국제유리센터’(아바테 자네티 유리학교)로 재탄생 했다. 학교의 핵심 교과는 유리제조장인 교육, 전통과 현대식 예술유리 제작 기술 및 방법, 유리제조 산업 마케팅, 디자인교육이다. 또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유리실험반’은 학생들에게 유리의 세계를 이해하고 빛 색 재료라는 측면에서 유리특성을 직접 실험을 통해 터득하도록 한다. 실험을 통해 직접 경험하는 실습교육을 제공한다. 직업인을 위한 워크숍도 실행되며 전통기술전수 외에도 ‘유리’라는 성분 자체의 문화적 사회적 측면을 감안한 검토와 그 과학적 응용성을 연구하는 연구소의 역할도 담당한다. 이무라노국제유리센터의 교육방침과 목표의 특징은 무라노 지역문화가 현대생활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즉 유리를 다룰 줄 아는 무라노 장인들의 노련함과 기법이 화학, 생물, 기술 전문가들의 실험 연구와 만나 공동의 연구결과를 얻어내는 방식이다. 국제유리센터는 ‘무라노유리실험연구소’와 더불어 유리성분의 개발에 획기적인 진보를 가져왔다. 이제 유리는 현대산업에 중요한 광학섬유, 절연재, 우주항공자재, 또 인공장기 제조와 같은 생명공학에 이용되고 있다. 현대 과학기술로 개발한 기계들은 유리공예 작업 환경도 크게 바꿔 놓았다. 과거에는 작업 중에 뿜어 나오는 연기로 숨을 쉬기 쉽지 않았고 1500도가 넘는 불가마 옆에서의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연기흡수관이 따로 있고 절연재사용으로 작업장의 기온도 조절 된다. ◆도제식 교육이 더 많아 = 한편, 유리공예 장인이 되기 위한 훈련은 학교보다는 작업장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유리공예 장인들은 1000년이 넘게 유리제조에 필요한 재료들의 양과 성분을 비밀 수첩에 가득히 채워 기록하고 보존해 오고 있다. 컴퓨터와 화학의 발달이 극에 다다른 현재도 연금술사의 신비에 가까운 그들의 비법은 수제자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무라노 최연소 ‘마에스트로 베트라이오’(유리수공예 장인)인 마르코 세구조(34)는 어릴 적부터 학교수업보다 조부와 부친이 일하던 유리작업장에 가는 것을 더 즐겼다고 했다. 방학에 틈틈이 시작했던 일이 16세에 직업으로 변했다. “여름 한 나절 밖의 온도보다 더 높은 온도의 작업장에서 일을 마치고 나서면 한 여름이 시원하게 느껴지기만 했다”고 기억했다. “이 직업은 배움의 끝이 없다”면서 “유리라는 물질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데 흥분을 느낀다. 짧은 시간에 마쳐야 하는 동작, 깨지지 않게 신경을 집중해야 하고 정확한 지점에서 불어야 하는 것, 그 모두가 하나 둘 익숙해 질 때의 만족감이란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60여년을 유리수공으로 보낸 비토리오 페로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장인과 보조인들이 금방 배우게 되는 첫 번째 규칙은 말수를 최소한으로 하며, 눈빛 하나로 모든 걸 이해하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13살에 작업장 심부름꾼으로 일을 시작했다는 그는 “내가 매일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아침과 오후, 하루 두 번 주점에 가서 ‘마에스트로’가 마실 포도주를 사오는 것이었다. 마에스트로는 작업 중 남은 자투리 유리를 녹여 만든 컵에 본인은 한 컵, 조수에게는 반 컵, 잡일꾼에게는 더 조금 따라주곤 했다”고 기억했다. 규율은 엄격했고 무조건 말없이 복종하는 것이 절대 조건이었다. “모두들 점심식사로 나간 사이에 남은 유리를 녹여 작은 동물들, 재떨이를 만들어 보는 것으로 기쁨을 삼았다”고 회상했다. 뒷전에서 틈만 나면 열심히 배웠던 그는 5년 후 18세에 ‘마에스트로’가 됐다. 60년 경력의 페로 장인은 “진짜 유리공예 장인은 일을 하면서 될 뿐이다”이라고 강조했다 . 이탈리아 전명숙 통신원 ******* 주: 가위하나로 탄생하는 손놀림의 ‘예술’ 부: 기술발전에도 입으로 불어 만드는 전통 방식 고수 부: 유리 조각기술 개발…“남들관 다르다” 자부심 강해 경력이 많은 유리공예 장인들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마술과도 같은 손놀림이다. 녹은 유리는 젤리같이 혹은 녹은 설탕처럼 흘러내릴 것만 같은데 쉴 세 없이 돌려대는 쇠막대기 끝의 덩어리 유리는 조금씩 기계로 만든 것 보다 더 모양이 일정하고 완벽한 원형에서 접시로, 병으로 변해간다. 쇠막대기 구멍으로 불어대면 비눗방울처럼 부풀어가는 투명한 유리, 정확하게 조정된 힘과 팔 동작으로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어진 유리를 가볍게 내려치면 병 주둥이가 깨끗이 잘리면서 완성된다. 현재 무라노에 있는 유리제조 아틀리에는 100여 개 남짓. 대부분 2~3명의 장인들이 전통적인 기법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소규모 공방이다. 이곳에서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재래식 화로 옆에서 연신 땀을 흘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유리 공예품들을 만드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액체와 고체의 중간 상태로 점성이 높은 유리 반죽을 1500도 가량의 고온에서 가열해 ‘칸네’라고 하는 긴 대롱을 통해 입김을 불어넣는 전통 제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가위 하나만 손에 쥐고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눈 깜짝할 동안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장인의 손놀림은 한마디로 예술이다. 베네치아 무라노 유리의 가장 큰 특징은 뚜렷한 형태와 화려하고 선명한 색채다. 프랑스에서 수입한 ‘사비아’란 모래를 1200도 화덕에 끓인 후 색소를 적절히 배합해 색깔을 낸다. 검정색은 망간, 파랑색은 코발트, 노란색은 카드뮴, 초록색은 2008-07-29
- [신영수 칼럼]‘베이징올림픽’ 바로 보기 ‘베이징올림픽’ 바로 보기 신영수 (베이징저널 발행인)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8’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부자가 된다’는 말과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중국당국은 베이징(北京)올림픽 개막일을 날씨가 더운 계절의 8월 8일로 잡았다. 이처럼 13억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길일에 개막되는 베이징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안전 문제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최근 중국인들 이외의 사람들이 보기에 지나칠 정도의 안전보장 조치에 대해 여러 외국들로부터 비판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베이징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대회는 안전 확보가 전제조건’이라는 명분 아래 올림픽 개최 목표를 당초의 ‘최고의 올림픽’에서 ‘안전한 올림픽’으로 아예 바꾸어 버렸다. 이같은 변경은 요즘 중국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사람 본위(以人爲本)’의 통치이념과 일치한다는 것이 중국 언론의 해설이다. 사실, 올림픽 주최국인 중국으로서는 ‘안전제일’을 표방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중국이 지난 2001년 베이징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지 불과 2개월 뒤에 바로 ‘9·11’ 테러사태가 발생했다. 위협요인 많아 안전제일 표방 이 사태는 전 세계에 커다란 충격과 함께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으로서도 이때부터 올림픽 안전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올림픽 개최국은 전체 인류의 대제전인 올림픽의 안전보장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지금 올림픽 사상 가장 엄격한 포괄적 안전조치를 취한 것은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얼마 전부터 외국인들에 대한 중국 입국비자 심사가 까다로워졌다. 특히 단기비자로 중국을 오가며 비즈니스를 하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피해를 입게 됐다. 중국인들도 매우 불편해졌다. 얼마 전부터 베이징으로 향하는 자동차와 배의 티켓에 실명등록제가 실시되고 지하철 구내에서도 안전검사가 시행되고 있다. 베이징으로 진입하는 차량들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고 있다. 베이징 공항에서는 2중으로 안전검사가 시행된다. 지난 2004년 아테네올림픽도 ‘9·11’ 사태의 영향으로 안전조치가 강화되면서 15억달러의 막대한 안전보장경비를 지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국토가 광대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환경이 복잡한 중국은 이보다 훨씬 많은 경비를 투입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난 3월 라싸(拉薩)에서 발생한 폭력적 티베트(西藏) 독립운동과 최근 잇따라 적발된 것으로 보도된 신쟝위그르(新疆維吾爾) 자치구의 테러 관련 사건 등은 올림픽을 앞둔 중국정부에게 커다란 안전 위협요인들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인들 스스로 베이징올림픽이 직면한 위협은 역대 어느 대회보다도 심각하다는 자체 평가를 내릴 정도다. 올림픽 개최는 중국인들의 꿈이다.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는 곧 중국인들의 꿈의 실현이다. 지난 7년간 공을 들이고 정성을 다해 준비해 온 올림픽이 훼손되는 사태는 중국으로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방해야 한다. 한국인들 가운데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12만여명(유학생 포함)의 한국교민 가운데 최근 3만여 명이 귀국해 한국인들이 밀집해 사는 왕징(望京)과 우따오커우(五道口) 거리가 한산해졌다고 할 정도다. 그동안 중국당국은 한국인들에게 비자를 비교적 후하게 내준 편이었다. 비용만 내면 3개월짜리 방문비자를 받아 중국에 입국, 합법적으로 비자 연장을 해가면서 이곳에서 생활하고 비즈니스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올림픽이 임박해 안전조치가 강화되면서 비자 발급 요건이 까다로워졌고, 그나마 방문비자를 제한하고 관광비자를 주로 내주고 있다. 1개월짜리 관광비자로는 연장을 해봤자 3개월 이상의 중국 체류가 불가능하므로 비자 만료가 된 한국인들이 ‘일시 귀국’을 선택하고 있다. 이웃나라에서 불편 이해해야 중국은 이웃이다. 중국이 올림픽을 개최하는 마당에 우리가 다소 불편을 겪고 피해를 입더라도 이웃으로서 이를 이해하고 성공적인 올림픽을 기원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일 것이다. 각종 경기장 건설을 포함해 무려 420억달러의 막대한 개최 비용을 들인 베이징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중국이 오랜 세월의 좌절과 시련을 딛고 떨쳐 일어서려는 ‘굴기’의 역사적 계기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중국의 굴기가 갖는 엄청난 의미를 엄밀히 통찰하고 거기에 대처할 슬기를 가다듬는 일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07-28
- 경북 봉화 수해마을 현장 경북 봉화 수해마을 현장 재정자립도 꼴찌 봉화, 자립재활 능력 상실 완전 복구 하세월 하늘만 원망 · 숟가락 밥그릇부터 새로 준비해야 지난 24일 저녁부터 25일 오전까지 만 하루동안 200mm이상의 폭우가 쏟아진 경북 봉화군 서벽리와 의양리 속칭 운곡 계곡 20여km 일대는 28일 오후 막혔던 도로만 겨우 뚫린 상태였다. 마을 곳곳 담벼락에는 침수된 가옥의 가재도구와 이불가지와 옷들이 널려 있었다. 28일 폭염특보 발령기준인 33도 안팎의 불볕더위속에서 군인과 의경, 공무원 등이 뿌연 흙먼지속에서 복구작업에 구슬땀을 흘렸다. 운곡계곡의 하류 끝 지점인 의양 4리 강변마을은 상습 침수지역인데다 이번 폭우에 30여가구가 완전 침수됐다. 25일 칠흙같은 새벽 턱까지 차오르는 흙탕물을 헤치고 몸을 피한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나무와 흙으로 만든 일부 가옥은 안전진단없이 다시 들어가 살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 의양 4리 금란교회 이기호목사는 “마을입구 두 개의 다리 교각에 계곡에서 쓸려내려온 나뭇가지와 암석들이 물흐름을 막아 마을로 강물이 범람한 것 같다”며 “의양 4리 일부 마을은 상습침수지역이어서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간장·된장 단지도 떠내려가 이 마을 주민 전순이(55)씨는 “25일 새벽기도를 준비하는데 강물이 덮쳤다”며 “된장과 간장단지가 물에 둥둥 떠는 것을 보고 이웃집으로 몸만 피해 칼과 도마를 비롯 세간살이 준비를 완전히 새로 해야한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서 침수된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삼성전자 남부지사 20여명의 직원들도 흙먼지와 악취속에 전자제품 수리에 한창이었다. 삼성전자 안동센터 권인수(38)씨는 “냉장고와 세탁기는 수리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많은데 회로판으로 된 다른 가전제품은 안전성 등을 고려해 완전 건조후 사용가능여부를 점검해 되돌려 주고 있다”며 “문제는 가전제품을 수리해도 들여놓을 집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폭탄이 떨어진 듯 춘양면 의양리에서 서벽리로 가는 88번 국가지원도로 양쪽의 논밭은 자갈밭으로 변했다. 수확철을 앞둔 감자가 자갈더미 속에 나뒹굴고 있었다. 고랭지 채소와 고추밭 등은 아예 쓸려 내려간 곳도 많았다. 하천과 도로,논밭은 구분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28일 늦은 오후 애당리 감자밭에는 70대 노부부가 외로이 자갈밭에서 감자를 골라내고 있다. ◆서벽1리 마을 도랑이 거대한 하천자갈밭으로 마을전체의 절반이 쓸려간 서벽 1리는 참혹했다. 춘양목 집산지인 문수산과 구룡산아래 자리잡은 서벽 1리는 송이를 따고 고추농사 등으로 평화롭게 살던 평상시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마을 입구 봉화경찰서 서벽 분소 일대는 수마가 할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약초시험장에 일나가던 이상순(64)씨와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온 대학생 박영순(20)씨 등 두 모녀의 목숨을 앗아간 마을이다. 이들은 마을 입구 하천에서 실종된 지 3일만인 28일 오전과 오후 주검으로 발견됐다. 고 이상순씨 집과 3m정도의 작은 도랑을 두고 건너편에 사는 김노의(70) 할머니는 25일 새벽 방까지 물이 차오자 돌담을 넘어 옆집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김씨의 다리에는 아직도 돌과 나무에 긁힌 상처가 남아있다. 3~4m 폭의 작은 도랑 양옆으로 파출소와 학교, 마을 회관과 주민가옥 등이 형성된 서벽 1리 40여가구중 20가구이상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평생 이 마을에 살았던 이인걸(71)씨는 “24일 저녁부터 비와 천둥번개가 치드니 25일 새벽 1시에서 3시사이에는 아예 쏟아붓듯 했다”며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나니 고 이상순씨 집은 지붕만 보였고 3~4 m 의 도랑엔 폭이 100m 가 넘은 자갈밭과 산사태와 함께 밀려온 나뭇가지가 뒤엉켜 있었다”고 말했다. ◆특별재난지역 선포 긴급 복구 도와야 600여명의 공무원이 25일부터 비상근무중인 봉화군청의 기획감사실 배도열 봉화군청 공보담당은 “2008년도 본예산 기준으로 재정자립도가 8.45%밖에 안되는 봉화군 재정으로 수해복구는 요원한 일”이라며 “관광과 농림업으로 먹고사는 봉화군은 이번 폭우로 파산위기에 몰려 있다”고 덧붙였다. 봉화군 관계자는 “28일까지 30% 정도 피해상황을 조사한 결과 피해액이 510억원을 넘은 것으로 잠정집계됐다”고 말했다. 경북도와 봉화군은 지난 27일 춘양면 서벽 1리를 방문한 한승수 국무총리에게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해줄 것을 건의했다. 한편 29일 오전 7시 현재 봉화군 일대 집중 푹우로 인한 피해는 사망 6명, 실종 2명 을 8명의 인명피해를 비롯 이재민 193가구 390명, 주택피해 193동, 농경지피해 640여ha 등으로 집계됐다. 경북 봉화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