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대통령 비서실 인선 윤곽 비서실장에 윤진식 내정 … 총무비서관에는 김백준씨 유력 윤진식(62) 대통령직인수위 국가경쟁력 강화특위 부위원장이 이명박정부 첫 대통령 비서실장에 사실상 내정된 것으로 16일 알려졌다. 또 총무비서관에는 김백준 당선인 총무보좌역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나라당 핵심 관계자는 이날 “이 당선인의 신임이 두터운 윤 부위원장이 비서실장에 발탁될 가능성이 높다”며 “윤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이미 청와대 인사안을 짜고 있으며 조만간 발표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인수위 관계자도 “기획력과 추진력을 겸비한 데다 경제관료 경험이 풍부해 당선인을 도와 경제살리기를 이끌 적임자로 판단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당선인은 윤 전 장관을 총리나 경제산업부 장관으로 기용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청와대를 총괄하는 쪽으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부위원장은 대통령비서실 경험은 물론 경제부처 장관을 두루 거쳐 MB노믹스를 구현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충북 충주 출신의 윤 부위원장은 72년 행정고시 12회에 합격한 뒤 재무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 관세청장, 재정경제부 차관을 거쳐 노무현 정부에서 산자부 장관을 역임했다. 한나라당 경선이 진행 중이던 지난해 7월 서울산업대 총장을 사퇴하고 참여정부 각료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이 당선인 캠프에 뛰어들었다. 당시 윤 부위원장은 충북 지역 인사 700여명과 함께 ‘속리산경제포럼’을 창립해 이 당선인을 도왔다. 한편 대통령 집사격인 총무비서관에는 이 당선인의 ‘복심’으로 통하는 김백준 당선인 총무보좌역이 사실상 내정됐다. 김 보좌역은 고려대-현대그룹-서울시 출신으로 이 당선자와 함께 한 세월이 30년을 넘는 세월을 함께 한 측근 중의 측근으로 이 당선자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집사’로 통한다. 2001년 ‘e뱅크 코리아’ 설립을 추진할 당시 실무를 맡기도 했다. 김 보좌역은 1977년 현대 계열사로 직장을 옮기면서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 당선인과 인연을 맺은 이후 이 당선인의 재산관리를 사실상 총괄해왔다. 또 한일은행과 외환은행에서 일을 시작해 주로 국제금융 전문가로도 알려져 있다. 성홍식 기자 hssung@naeil.com 2008-01-16
- [이경형 칼럼]손 흔드는 북한 어린이들 손 흔드는 북한 어린이들 이경형 (언론인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으로 가는 내내 울적함과 연민 같은 감정이 뒤섞여 착잡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황량한 계단식 밭, 헐벗은 민둥산,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는 마을, 폐가 같은 가옥들이 마음 한 구석을 짓눌렀다. 그러다가 개성 시내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바구니를 단 자전거를 부지런히 타고 가는 여성들, 손을 흔들면 무표정한 어른들과는 달리 밝게 손을 흔들어 화답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고는 겨우 안도했다. 개성 관광길이 열린 지 한 달이 되던 지난 5일 고려의 500년 도읍지 개성 일원을 9시간 동안 둘러봤다. 박연폭포 관음사 숭양서원 선죽교 고려박물관 등 문화유적지를 돌아보고 이어 개성공단에도 들렀다. 곳곳에 유훈통치 흔적 개성 시내에서 북쪽으로 27km 떨어진 박연폭포는 빙벽을 이루고 있었다. 폭포수로 패인 고모담 서쪽 기슭에는 용바위가 있었는데 표면에 이태백의 시 ‘飛流直下三千尺疑視銀河落九天(날아 흘러 곧추 떨어지는 물이 삼천척이나 되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 듯하구나)’이 초서체로 음각되어 있었다. 중년 여성인 안내원은 구성진 목소리로 명기 황진이가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자신의 머리채로 이 시를 단숨에 썼다’며 “그 동안 아무도 글 뜻을 몰랐는데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께서’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뜻풀이를 하여 인민들이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박연폭포를 지나 계곡을 거슬러 관음사로 가는 길목에 대흥산성이 있었다. 성벽의 북문에 오르면서 안내원은 성곽 축대로 사용된 큰 돌들을 가리키며 “요즘 같았으면 ‘장비 보내 달라 뭐 보내 달라’고 하느라 이런 성을 쌓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수령님께서는 우리 선조들이 기계도 없이 이런 성을 쌓은 것은 축조기술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조국 사랑과 애국심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하셨다”고 덧붙였다. 북한체제의 유훈통치의 단면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10여대의 대형관광버스 행렬이 개성 시내를 통과하는 길가에는 제복을 입고 완장을 찬 군인들이 띄엄띄엄 배치돼 경계를 서고 있었다. 시내에 있는 선죽교와 표충비를 걸어서 관광할 때는 길 건너 북한 주민들을 쉽게 볼 수 있었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무표정했다. 관광버스에 2명씩 배치된 북측 안내요원들은 이동 중에는 외부 촬영을 할 수 없으며 참관지의 유물유적을 배경으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인민들의 거주지를 배경으로 촬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자본주의 모기’를 차단하기 위해 북한사회에 ‘우리식 사회주의’의 모기장을 쳐야 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고충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 새삼 남북 간의 벽을 실감했다. 고려성균관 건물과 부지를 활용하여 지난 1988년에 개관한 고려박물관에 들렀다. 1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려인들의 얼과 예술혼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국보급 고려청자 앞에서 울컥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조명도 없는 초라한 진열장에 놓여있는 유물들의 모습은 오늘을 어렵게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이미지와 묘하게 겹쳐 보였다. 개성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개성공단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현대아산 사옥 옥상에 올랐다. 주위는 구릉과 평야로 광활했다. 이곳에 500년 도읍지를 닦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중국의 첫 경제특구로 오늘날 급성장의 견인차가 되었던 선전(심천)은 1979년 인구 3만 명의 작은 어촌이었다. 개혁·개방 20여년 만에 인구 700만의 산업중심도시로 탈바꿈했고 중국 번영의 시범지역이 되었다. 개성공단을 포함한 개성은 ‘북한의 선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중국대륙과 한반도 지도를 놓고 보면 서울-인천-개성은 지리적으로 환황해권의 3각 허브 지역으로 손색이 없다. 남북이 함께 한강과 임진강을 준설하고 이 일대에 ‘나들섬’ 같은 물류기지를 만들면 새로운 남북협력시대를 여는 것은 물론 이 지역을 새로운 동북아의 물류중심으로 떠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는 평화와 협력의 시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한때 통일부를 외교부와 통합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남북관계의 상징성과 특수성을 감안하여 존치하기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다. 북한을 결코 외국의 하나로 간주할 수는 없다. 개성 시내에서 북한 어린이들이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것은 비록 남북의 과거는 긴장과 불신으로 점철되어왔지만 미래는 평화와 협력의 시대가 될 것임을 알리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01-10
- 손 흔드는 북한 어린이(이경형칼럼) 손 흔드는 북 어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으로 가는 내내울적함과 연민 같은 감정이 뒤섞여 착잡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황량한 계단식 밭, 헐벗은 민둥산,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는 마을, 폐가 같은 가옥들이 마음 한 구석을 짓눌렀다. 그러다가 개성 시내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바구니를 단 자전거를 부지런히 타고 가는 여성들, 손을 흔들면 무표정한 어른들과는 달리 밝게 손을 흔들어 화답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고는 겨우 안도했다. 개성 관광길이 열린 지 한 달이 되던 지난 5일 고려의 500년 도읍지 개성 일원을 9시간 동안 둘러봤다. 박연폭포 관음사 숭양서원 선죽교 고려박물관 등 문화유적지를 돌아보고 이어 개성공단에도 들렀다. 개성 시내에서 북쪽으로 27km 떨어진 박연폭포는 빙벽을 이루고 있었다. 폭포수로 패인 고모담 서쪽 기슭에는 용바위가 있었는데 표면에 이태백의 시 ‘飛流直下三千尺疑視銀河落九天(날아 흘러 곧추 떨어지는 물이 삼천척이나 되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 듯하구나)’이 초서체로 음각되어 있었다. 중년 여성인 안내원은 구성진 목소리로 송도 명기 황진이가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자신의 머리채로 이 시를 단숨에 썼다면서 “그 동안 아무도 글 뜻을 몰랐는데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께서’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뜻풀이를 하여 인민들이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박연폭포를 지나 계곡을 거슬러 관음사로 가는 길목에 대흥산성이 있었다. 성벽의 북문에 오르면서 안내원은 성곽 축대로 사용된 큰 돌들을 가리키며 “요즘 같았으면 ‘장비 보내 달라 뭐 보내 달라’고 하느라 이런 성을 쌓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수령님께서는 우리 선조들이 기계도 없이 이런 성을 쌓은 것은 축조기술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조국 사랑과 애국심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하셨다”고 덧붙였다. 개성 시내 공장건물 간판은 ‘00전투장’으로 되어 있고 벽에는 ‘심장을 바치자 어머니 조국에’라는 붉은 글씨의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북한체제의 유훈통치와 선군정치의 단면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10여대의 대형관광버스 행렬이 개성 시내를 통과하는 길가에는 제복을 입고 완장을 찬 군인들이 띄엄띄엄 배치돼 경계를 서고 있었다. 시내에 있는 선죽교와 표충비를 걸어서 관광할 때는 길 건너 북 주민들을 쉽게 볼 수 있었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무표정했다. 관광버스에 2명씩 배치된 북측 안내요원들은 이동 중에는 외부 촬영을 할 수 없으며 참관지의 유물유적을 배경으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인민들의 거주지를 배경으로 촬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북한이 남한 관광객에게서 외화벌이를 하면서도 ‘자본주의 모기’를 차단하기 위해 북한사회에 ‘우리식 사회주의’의 모기장을 쳐야 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고충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새삼 남북 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고려성균관 건물과 부지를 활용하여 지난 1988년에 개관한 고려박물관에 들렀다. 1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려인들의 얼과 예술혼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국보급 고려청자 앞에서 울컥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조명도 없는 초라한 진열장에 놓여있는 유물들의 모습은 오늘을 어렵게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이미지와 묘하게 겹쳐 보였다. 개성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개성공단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현대아산 사옥 옥상에 올랐다. 주위는 구릉과 평야로 광활했다. 이곳에 500년 도읍지를 닦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중국의 첫 경제특구로 오늘날 급성장의 견인차가 되었던 선전(심천)은 1979년 인구 3만 명의 작은 어촌이었다. 개혁·개방 20여년 만에 인구 700만의 산업중심도시로 탈바꿈했고 중국 번영의 시범지역이 되었다. 개성공단을 포함한 개성은 ‘북한의 선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중국대륙과 한반도 지도를 놓고 보면 서울-인천-개성은 지리적으로 환황해권의 3각 허브 지역으로 손색이 없다. 남북이 함께 한강과 임진강을 준설하고 이 일대에 ‘나들섬’ 같은 물류기지를 만들면 새로운 남북협력시대를 여는 것은 물론 이 지역을 새로운 동북아시장의 물류중심으로 떠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한때 통일부를 외교부와 통합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남북관계의 상징성과 특수성을 감안하여 존치하기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다. 북한을 결코 외국의 하나로 간주할 수는 없다. 개성 시내에서 북한 어린이들이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것은 비록 남북의 과거는 긴장과 불신으로 점철되어왔지만 미래는 평화와 협력의 시대가 될 것임을 알리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01-10
- [내일시론]환갑을 맞는 나라의 책무와 도리 환갑을 맞는 나라의 책무와 도리 올 여름 대한민국은 환갑을 맞는다. 인간에게도 갑년이란 특별히 기념하는 경사로운 날일진대, 자손만대로 물려줄 나라가 환력을 맞게 된 것은 이만저만한 경사가 아니다. 그 전에 나라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무슨 호들갑이냐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남의 나라 압제에서 신음하던 세월과 굶주린 이리 같은 열강의 탐욕에 시달렸던 근세사를 떠올리면, 태평성대의 60년의 의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때마침 정권이 바뀌게 되어 세상은 온통 ‘선진화’ 논의로 어지럽다. 실감이 나지 않지만 쳐다보지도 못할 자리를 넘보는 일 그 자체로도 즐겁고 행복하다. 환율 탓이라고는 해도 국민소득 2만 달러가 어디 꿈이나 꾸어본 일이던가. 거기다 연간 7%씩 경제를 성장시켜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 대열에 올려놓겠다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다. 유조선 오염사고 현장에 몰려든 자원봉사자 인파가 연인원 50만 명을 넘었다는 소식은 벌써 선진국이 된 것 같은 착각을 안겨 준다. 99년 터키 강진 때 정부구호금 고작 7만달러 그런데 선진화 논의에 빠져서는 안 될 한 가지가 그냥 버려진 채로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환갑나라의 책무와 도리 말이다. 환갑잔치는 원근 친인척들 뿐 아니라, 낯 모르는 길손과 다리 밑에 사는 걸인들까지 불러다 배불리 먹이고 베푸는 동네잔치였다. 개 돼지도 음식을 골라먹고 까막까치 같은 날짐승들까지 떡 부스러기를 물고 다니는 날이었다. 나라의 환갑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특히 우리처럼 남의 신세를 많이 진 나라일수록 빚을 갚고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라도 베풀어야 한다.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인색했던 허물을 벗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갚아야 한다. 1999년 터키 강진으로 수만 명이 죽고 다치는 재난이 발생했을 때 우리 정부가 터키에 보낸 구호금은 7만 달러였다. 현지 공관장은 이 돈이 너무 부끄러워 전달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민간 구호금과 합쳐서 보내야 했다. 그 때 방글라데시의 구호금이 10만 달러였다. 터키는 6·25 때 우리나라에 1만5000명 가까운 병력을 보내준 나라다. 800명 가까운 전사자와 2000명이 넘는 부상자를 낸, 이름 그대로 피로 맺은 인연의 나라다. 그런 나라에게 우리 정부가 정식으로 고마움을 표한 일이 있었던가. 정부 고관들이 수시로 유럽과 중동, 심지어 아프리카를 들락거리면서 잠깐 들러 관심이라도 표한 일이 있었던가.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방문한 것이 2005년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신세를 갚지 못한 나라가 너무 많다. 6·25 때 우리는 열여섯 나라로부터 전투병력 지원을 받았고 다섯 나라의 의료지원을 받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같은 나라는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공식 비공식 감사의 표시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아공화국 콜럼비아 이디오피아 태국 필리핀 같은 나라에 부끄럽지 않게 했는지는 자신이 서지 않는다. 참전 16개국 젊은이 4만1000명 이상이 한국전선에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전상자 수는 훨씬 많다. 우리에게 의료지원을 해준 스칸디나비아 국가 의료시설은 우리 의료기술 발전의 모태였다. 이런 신세를 지고도 제일 가난한 나라보다 적은 구호금을 냈다. 이러고도 예의를 아는 나라라고 할 것인가. 747 선진국이 된들 누가 알아주고 인정해 줄까 2006년 우리나라의 대외개발원조(ODA)는 국민소득 대비 0.05%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0.30%)에 비하면 너무도 부끄럽다. 예산 당국은 재정형편이 어렵다는 말로 책임을 피해가지만 이래서는 유엔사무총장 배출국가 체면이 말이 아니다. 돈에만 인색한 것이 아니다. 국제사회에 무엇 한 가지 내놓을 게 없다.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파키스탄 사태에 팔짱을 끼고 있는 것도 민주화 투쟁 경험국가의 도리가 아니다. 인류의 평화와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고 추구하는 일에 한 몫을 하지 않으면 747 선진국이 된들 누가 알아주고 인정해 줄 것인가. 나이 값 못하는 사람은 사람대우를 받지 못 한다. 나라도 다르지 않다. 건국 60돌의 해, 대한민국은 도덕적으로 제몫을 하는 방향으로 키를 잡아야 한다. 문창재 객원논설위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01-04
- [밥일꿈]영원한 노동자, 장진수 동지를 보내며 영원한 노동자, 장진수 동지를 보내며 장민석 (전 경원세기노동조합 교육선전부장) 아직은 한창 무르익은 활동을 펼치며 희망과 보람을 사람들과 나눠야 할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가슴이 답답합니다. 더구나 한숨에 달려 갈 수도 없는 멀리 연해주에 떨어져 전해들은 당신의 안타까운 소식에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멀리 떨어져 있어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없었기에 아쉬움은 더 크기만 합니다. 20년 전 1987년 5월, 당신은 30대에 갓 접어든 두 아이의 가장이었지요. 주야간 2교대를 하는 성실한 용접기술자였습니다. 모두들 숨죽이며 몸 사리던 시절, 당신은 두 아이를 둔 가장이면서도 선뜻 나섰습니다. 당신은 추상적 구호나 편향된 이념이 아닌 노동자의 삶 속에서 꿈을 펼쳐나갔습니다.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해결해 나가자는 자주! 관료적이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혜와 힘을 모으는 민주! 노동자들이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로 뭉쳐 나아가자는 통일! 자주 민주 통일은 함께 그 시절을 헤쳐 나가고 좌절이 아닌 희망을 열어나가는 가장 소중한 원칙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원칙아래 의기투합했습니다. 원칙을 세우면 관철하기 위해 흔들리지 않는 마음과 자세로 끝까지 밀고 나갔던 당신의 뚝심은 노동자의 자존심을 세운 자랑이었습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노동현장에서 함께 준비하고 ‘경원세기노동조합 민주화투쟁’을 모범적으로 이끌며 시작된 당신의 삶은 가족들에게도 힘든 세월을 안겨줬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부천에서 시작해 천안으로 그리고 충청남도로, 대한민국 전역을 대상으로 좋은 소리 싫은 소리 모두 들어가면서도 누군가는 가야 할 길 이라며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당신의 삶에 대한 자세가 한창 젊은 나이의 당신을 여기 누워있게 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자신의 이익과 명예와 가족의 평안만 추구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과 함께 편안한 휴식도 갖지 못하고 치열한 현장을 헤쳐 나가는 모습은 야전 천막에서 전투를 지휘하다 최후를 맞이하는 ‘야전사령관’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1987년, 20년이 흐른 2007년! 아직도 우리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치열한 삶의 현장을 거침없이 내달려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물러서서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북 돋우며 함께 어깨 걸고 나아가던 훌륭한 동지를 길 위에 내려놓습니다. 당신이 흘린 땀과 눈물은 거름이 되어 더욱 많은 장진수가 성장해 당신의 빈자리를 채워나갈 것입니다. 출발은 함께 하였으나 마지막 까지 힘찬 어깨동무를 하지 못하는 그대의 벗 장민석이 동지를 애도합니다. ※ 이 글은 지난 4일 갑자기 사망한 전 경원세기노동조합 위원장 장진수(한국노총 비정규국장)씨를 애도하며 동료인 장민석씨가 내일신문에 보내 온 글입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2-07
- 5백년 도읍지, 개성 문이 열렸다 태조 왕건의 도시, 정몽주의 곧은 충절과 황진이의 애틋한 사랑이 서려 있는 곳. 고려 500년 도읍지인 개성이 5일 남한 관광객들에게 문을 활짝 열었다. 일반관광객과 국내외 취재진, 현대아산 관계자 등 330여명은 이날 오전 6시 서울 계동에서 10대의 관광버스에 나뉘어 타고 개성을 향했다. 출입국 수속을 밟고 군사분계선을 지나 개성까지 오는 데는 채 2시간도 걸리지 않지만, 남측 사람들이 맘놓고 개성을 둘러볼 수 있기까지 5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개성공단을 지나 개성시내에 가까워오자 가장 먼저 반기는 건 개성 뒤편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송악산이었다. 꼭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이 반듯하게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시내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찾은 곳은 개성에서 북쪽으로 27km 떨어진 박연폭포. 황진이, 서경담과 함께 송도3절로 꼽히는 곳이다. 폭포 위쪽으로는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흐르는 계곡물이 박연을 만들고, 이 물이 37m 절벽 아래로 떨어져 고모담을 이루고 있었다. 고려시대 박 진사라는 사람이 이곳에 머물며 밤마다 피리를 불었는데, 피리소리에 반한 용왕의 딸이 박 진사를 못 속으로 끌고 갔다 해서 박연이 됐고, 박 진사를 찾지 못한 어머니가 슬픔을 견디다 못해 몸을 던진 곳이라 하여 고모담이란 이름이 붙었다 한다. 고모담 옆으로 용머리를 닮아 용바위라 불리는 큰 바위가 놓여 있다. 이 바위에는 조선시대 명기인 황진이가 머리채를 물에 적셔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는 시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폭포를 돌아 산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관음사가 나온다. 관음사란 이름은 970년 법안국사가 천연굴 속에 관음보살상 한쌍을 가져다두고 그 이름을 관음굴이라 부른데서 유래했다. 실제 대웅전 옆 관음굴에는 1.2m 크기에 관세음보살상 좌상이 신비로운 자태로 놓여 있었다. 다른 하나는 현재 평양 중앙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는 안내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점심은 개성시내 한복판에 있는 통일관에서 먹었다. 식사는 개성 토속 음식인 ‘13첩 반상기’가 나왔다. 닭고기 신선로를 비롯해 돼지고기 및 생선구이 등이 13가지의 밥과 반찬이 놋그릇에 담겨 한 상을 이루고 있는 ‘13첩 반상기’는 기름지지 않고 담백했다. 식사를 마친 후 숭양서원을 들러 선죽교를 찾았다. 숭양서원은 원래 정몽주의 집터로 1573년 개성 유수 남응운이 유림들과 함께 서원으로 고쳐 세웠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살아남을 정도로 역사와 전통을 인정받은 곳이라 한다. 선죽교는 길이 6.67m, 너비 2.54m의 돌다리로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곳이다. 정몽주의 혈흔이라는 검붉은 자국은 후세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보이는 돌을 가져다 놓은 것이라는 게 북측 안내원의 설명이다. 그래도 당시의 장면이 머리 속에 그려지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고려박물관이었다. 원래 고려시대 성균관의 건물이 있던 이곳을 북측은 1988년 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해 북측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이중 고려청자는 뛰어난 색상과 아름다운 형상으로 인기를 모았다. 고려 패망 이후 600년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는 왕씨 족보도 눈길을 끌었다. 왕씨 후손이라는 한 관광객은 “집안 어르신 모임 때 보여드릴 예정”이라며 연신 셔터를 눌렀다. 역사 유적지를 옮겨다니며 개성 시내를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개성관광의 특징이다. 개성 첫 관광의 최고령자로 참가한 김윤경 옹(88세)은 “57년만에 고향땅을 밟으니 감개가 무량하다”며 “길과 건물 등 모습은 몰라볼 정도로 바뀌었지만 오래된 옛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쁘다”고 말했다. 개성관광은 당분간 당일코스로만 진행된다. 요금은 1인당 18만원. 겨울인데도 예약자가 7000여명에 달한다.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은 “연간 10만명의 관광객이 개성을 다녀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앞으로 관광코스나 일정 등도 다양화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개성=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2-06
- [김국주 칼럼]법치와 경제 법치와 경제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제주대학교 산학초빙교수) 이제 며칠 후면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나서 어렵게 수립한 우리나라 정부가 환갑의 해 무자(戊子)년을 맞는다. 잘못 들어선 길은 다시 돌아 나오는 데 최소한 같은 길이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던가. 나라를 잃었던 세월의 길이만큼이나 나라를 새로 만드는 작업도 오래 걸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양적으로는 세계 11위 정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고는 하나 여러 면에서 우리는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을 아직 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그것이 우리 - 관(官)과 민(民)을 통틀어 - 의 법 감각(法 感覺)이라고 보아 독자들과 몇 가지 생각을 나누고자 펜을 든다. 아주 평범한 예에서 출발한다. 주정차 금지 또는 견인지역 표지 밑에 항상 길게 늘어선 자동차들을 보면 운전자와 단속 요원들 간의 숨바꼭질을 보는 것 같다. 또한 대도시 외곽이나 지방에 가면 차량통행이 한적한 교차로에 일정한 주기로 켜지는 빨간 신호등이 있고 이를 무시하고 주행하는 많은 차량들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경제학자들은 운전자의 습관을 탓하거나 시민의식의 미숙을 말하지 않는다. 부의 정당성은 법치에 달려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규정위반으로 얻는 효용(잠시 편리한 주차 또는 신호등에 서지 않고 진행함)과 단속됐을 때의 비효용(벌과금), 그리고 단속될 확률을 종합하여 기댓값(expected value)을 계산하고 이 기댓값을 극대화 하는 행동을 할 뿐이며 그런 여러 사람들의 행동이 모인 것을 하나의 균형이라고 풀이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대로 위반을 선택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다는 사실인데 세상을 다스리는 일은 경제학적으로 푸는 것이 옳다. 금년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시장설계(market design)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런 것은 시장 참여자의 잘못이 아니고 시장의 설계가 잘못된 때문이라고 말한다. 잘 된 설계의 예로는 미국 시애틀의 한적한 도로에서 보았던 교차로 신호등의 전자인식 장치가 떠오른다. 사거리 각 방향의 대기 차량 유무에 따라 신호등의 간격과 순서가 자유자재로 바뀐다. 건너편 도로의 좌회전 차로에 대기중인 차가 없으면 파란 신호등을 계속 켜준다. 좌우측 도로에 대기 차량이 없어도 마찬가지다. 이러니 운전자가 조바심을 낼 이유도 없고 오로지 신호등을 믿고 따르게 된다. 흔히 접하는 도로에서의 예를 들었지만 우리 모두는 매일의 신문과 TV, 그리고 생의 현장에서 위반, 불법, 부패의 사례를 듣고 보고 있다. 잘못된 법, 그래서 집행이 잘 되지 않는 법의 해악은 심대하다. 첫째, 범법자가 양산된다. 단속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으니 검찰, 나아가 정권의 힘이 너무 강해진다. 둘째, 법과 규정을 따르지 않는 습성이 생긴다. 이것은 결국 우리 주위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대형사고 -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 ‘헤베이 스프리트’ 유조선 기름 유출사고까지 - 로 이어 진다. 셋째, 부자에 대한 존경심은 고사하고 부(富)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문화가 형성되지 못한다. 10년 전의 IMF국란은 탑의 허리가 부러진 것에 비유된다. 저층 탑신은 좁은데 그 위로 경제의 탑을 올리다 보니 약간의 흔들림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약했던 것은 경제의 탑신 그 자체가 아니고 그 아래에 있는 기단(基壇)이었다. 기단을 넓히지 않고 경제의 탑을 다시 높이려 한다면 탑의 허리는 어느 때건 또 부러진다고 보아야 한다. 해결책으로 준법정신이나 시민의식을 먼저 말해서는 안 된다. 제도가 의식을 낳는다는 관점에 입각하여 두 가지 접근을 동시에 할 것을 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는 언어적 접근으로서, 진정성이 결여되는 통제나 단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든 사례이지만 이유없이 켜있는 빨간 신호등, 법 망신을 시키는 주정차 금지표지 같은 것은 없어져야 한다. 경제는 단단한 기단에 세워야 둘째는 사법적 접근이다. 법을 지키는 것이 민(民)의 의무라면 법(나쁜 법을 포함해서)을 지키도록 하는 것은 관(官)의 의무다. 사법처리 여부가 검찰이나 정권의 권리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비현실적인 법규라는 생각에 서로 눈감아 주는 것은 결코 고마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는 나쁜 법이 고쳐지지 않고 계속 우리 주위에 남아 우리나라를 비선진국으로 남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꼭 살리고 싶어하는 경제도 쉽게 살려지지 않을 것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2-28
- <김국주 칼럼>법과 경제(2007.12.28) 법과 경제 법치가 부실하면 富의 정당성이 훼손돼 경제의 탑은 단단한 기단 위에 세워야 이제 며칠 후면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나서 어렵게 수립한 우리나라 정부가 환갑의 해 무자(戊子)년을 맞는다. 잘못 들어선 길은 다시 돌아 나오는 데 최소한 같은 길이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던가. 나라를 잃었던 세월의 길이만큼이나 나라를 새로 만드는 작업도 오래 걸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양적으로는 세계 11위 정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고는 하나 여러 면에서 우리는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을 아직 넘지 못하고 있다. 주권상실의 시대에 우리가 입었던 상처가 표면과는 달리 속으로는 이제껏 아물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그것이 우리-관(官)과 민(民)을 통틀어-의 법 감각(法 感覺)이라고 보아 이점에 대해 독자들과 몇 가지 생각을 나누고자 펜을 든다. 아주 평범한 예에서 출발한다. 주정차 금지 또는 견인지역 표지 밑에 항상 길게 늘어선 자동차들을 보면 운전자와 단속 요원들 간의 숨바꼭질을 보는 것 같다. 또한 대도시 외곽이나 지방에 가면 차량통행이 한적한 교차로에 일정한 주기로 켜지는 빨간 신호등이 있고 이를 무시하고 주행하는 많은 차량들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경제학자들은 운전자의 습관을 탓하거나 시민의식의 미숙을 말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규정위반으로 얻는 효용(잠시 편리한 주차 또는 신호등에 서지 않고 진행함)과 단속됐을 때의 비효용(벌과금), 그리고 단속될 확률을 종합하여 기댓값(expected value)을 계산하고 이 기댓값을 극대화를 하는 행동을 할 뿐이며 그런 여러 사람들의 행동이 모인 것을 하나의 균형이라고 풀이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피부적으로 느끼는 대로 위반을 선택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다는 사실인데 세상을 다스리는 일은 경제학적으로 푸는 것이 옳다. 금년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시장설계(market design)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런 것은 시장 참여자의 잘못이 아니고 시장의 설계가 잘못된 때문이라고 말한다. 잘 된 설계의 예로는 미국 시애틀의 한적한 도로에서 보았던 교차로 신호등의 전자인식 장치가 떠오른다. 사거리 각 방향의 대기 차량 유무에 따라 신호등의 간격과 순서가 자유자재로 바뀐다. 건너편 도로의 좌회전 차로에 대기중인 차가 없으면 파란 신호등을 계속 켜준다. 좌우측 도로에 대기 차량이 없어도 마찬가지다. 이러니 운전자가 조바심을 낼 이유도 없고 오로지 신호등을 믿고 따르게 된다. 흔히 접하는 도로에서의 예를 들었지만 우리 모두는 매일의 신문과 TV, 그리고 생의 현장에서 위반, 불법, 부패의 사례를 듣고 보고 있다. 잘못된 법, 그래서 집행이 잘 되지 않는 법의 해악은 심대하다. 첫째, 범법자가 양산된다. 단속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으니 검찰, 나아가 정권의 힘이 너무 강해진다. 둘째, 법과 규정을 따르지 않는 습성이 생긴다. 이것은 결국 우리 주위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대형사고 -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 ‘헤베이 스프리트’ 유조선 기름 유출사고까지 - 로 이어 진다. 셋째, 부자에 대한 존경심은 고사하고 부(富)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문화가 형성되지 못한다. 경쟁을 통한 발전이 자본주의의 최대의 장점이라 한다면 경쟁의 결과물을 인정하지 못하는 풍토는 사회발전을 막는 큰 걸림돌이 된다. 10년 전의 IMF국란은 탑의 허리가 부러진 것에 비유된다. 저층 탑신은 좁은데 그 위로 경제의 탑을 올리다 보니 약간의 흔들림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약했던 것은 경제의 탑신 그 자체가 아니고 그 아래에 있는 기단(基壇)이었다. 기단을 넓히지 않고 경제의 탑을 다시 높이려 한다면 탑의 허리는 어느 때건 또 부러진다고 보아야 한다. 해결책으로 준법정신이나 시민의식을 먼저 말해서는 안 된다. 제도가 의식을 낳는다는 관점에 입각하여 두 가지 접근을 동시에 할 것을 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는 언어적 접근으로서, 진정성이 결여되는 통제나 단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든 사례이지만 이유없이 켜있는 빨간 신호등, 법 망신을 시키는 주정차 금지표지 같은 것은 없어져야 한다. 둘째는 사법적 접근이다. 법을 지키는 것이 민(民)의 의무라면 법(나쁜 법을 포함해서)을 지키도록 하는 것은 관(官)의 의무다. 사법처리 여부가 검찰이나 정권의 권리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비현실적인 법규라는 생각에 서로 눈감아 주는 것은 결코 고마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는 나쁜 법이 고쳐지지 않고 계속 우리 주위에 남아 우리나라를 비선진국으로 남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꼭 살리고 싶어하는 경제도 쉽게 살려지지 않을 것이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2-27
- [밥일꿈]홍보맨을 위한 변명 홍보맨을 위한 변명 정윤석 (파라다이스그룹 홍보팀) 화려한 문장력과 막힘 없는 언변은 기본, 깔끔한 인상과 사람 좋은 매너는 필수. 거기다 웬만해선 끄떡없는 주량(酒量)까지 갖춰주면 금상첨화! 어떤 이는 홍보맨을 빈둥빈둥 ‘놀새 족’쯤으로 여기는가 하면 ‘3D의 대명사’로 손꼽는 이도 종종 있다. 홍보 부서에서만 꼭 5년을 보낸 지금, 나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만만치 않음을 배웠다. 지금도 반나절을 끙끙대며 작성한 보도자료가 ‘빨간 펜’ 검열에 반 토막으로 잘려나가거나, 마음은 ‘청산유수’ 인데 생각만큼 술술 풀리지 않는 ‘말’로 인해 진땀을 뽑는 일이 허다하다. 노타이에 반팔 차림이 허용되는 한여름에도 긴 팔 셔츠에 빈틈없이 당겨 올린 넥타이 차림을 고수하던 입사 초년 시절의 호기는 ‘회사 정책에 적극 동참한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접어버렸다. 깔끔한 인상과 매너 못지않게 적정체온을 유지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걸 배웠으고 주량도 훈련으로 늘릴 수 있다고 믿었건만 ‘세월의 힘이 훈련의 힘보다 세다’는 진리를 새록새록 깨닫는다. 밥·일·꿈을 위해 살아가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홍보맨에게도 이상과는 동떨어진 현실을 향한 변명은 있다. 하지만 그 변명은 스스로 오해했거나 또는 주위에서 바라는 막연한 환상을 깨고, 홍보맨으로 살며 체득한 경험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홍보는 보다 많은 고객들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일이다. 즉, 끊임없이 우군을 만들어가는 투자인 셈이다. 홍보의 대상은 비단 외부 고객만이 아니다. 회사에서 주로 ‘돈을 벌기 보다 소비하는 주체’로 눈총(?) 받기 십상인 홍보팀 식구들은 내부 고객을 향해서도 ‘홍보는 소비가 아닌 투자’임을 설득해야만 한다. 홍보의 속성상 칭찬을 받기보다는 욕을 듣기가 더 쉬운 게 현실이지만, 목표를 달성한 후의 쾌감은 그래서 더욱 짜릿하다. 입사 후 처음 낸 보도자료가 일간지 한 쪽을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걸 봤을 때의 희열을 난 지금도 기억한다. 홍보를 하면서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 중 하나가 바로 ‘메시지의 과잉’이다. 회사가 가진 장점을 한꺼번에 전달하려 욕심을 내면 낼수록 미사여구가 늘어나고 반대로 전달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알리고 싶은 내용을 객관화해 바라보고 이를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하는 ‘객관성’과 ‘통찰력’이화려한 문장이나 현란한 화술보다 홍보맨에게 더욱 절실하다. 그래서 홍보맨은 화려함 신뢰감을 주는 메신저여야 한다고 난 믿는다. 깔끔한 인상과 사람 좋은 매너도 외양보다는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다. 눈으로 보여지는 격식에 얽매이는 사람보다, 진심으로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더 멋지게 느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눈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의 열정적인 대화에 방해가 된다면,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를 잠시 풀어 놓을 줄도 아는 유연함을 가져보자. 감히 이땅의 수많은 홍보맨들에게 권해 본다. 오늘 당신들을 위한 변명을 생각해 보기를….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2-27
- 나이 서른 많이 고민하고 배워라 내 서른 살은 어디로 갔나 신현림 지음 민음사 1만원 10대와 20대 성장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들은 그동안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중장년기도 마찬가지다. 조금 더 나은 삶,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책들은 삶의 지침서가 되고 참고서가 됐다. ‘그러면 30대는’이라는 의문이 든다. 사실 30대를 의한 책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인생에서 30대는 사회에 진출해 자기 위치를 잡고 인생의 다른 변혁기인 결혼을 준비하는 때다. 이렇다보니 조직에서 사회에서 더 좋은 위치에 올라가게 하는 그런 류들의 책이 대부분이다. 기껏해봐야 연애지침서나 재테크, 직장내에서 성공하기 위한 처세술의 책들이 30대를 위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외모를 잘 가꾸는데 도움을 주지만 내면은 다져주는 책은 거의 없다.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해답을 던져주고 있지 못하는 책이 홍수처럼 넘친다. 이른바 자기 삶과 조직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책을 만나도 우리는 항상 ‘왜 성공을 하는데’라는 질문을 버리지 못한다. 30대들이야 말로 자아의 정체성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들이 필요하다. 10대·20대와 다른 고민이 넘치고 상실의 시대를 걷고 있다는 점에서 ‘인생의 절정’인 30대를 위한 그런 책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 신현림의 ‘내 서른 살은 어디로 갔나’는 의미 심장하다. 이 책은 저자의 30대를 조명한 책이지만 쉽게 동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주변에서 쉽게 보지 못하는 가족사와 시인으로 등단하기까지 과정, 사회에서 오점으로 남을 수 있는 이혼의 아픔을 겪고 ‘싱글맘’으로 자리잡기 까지 과정이 담겨져 있다. 본인에게는 슬프고 서러운 세월이지만 독자들에게는 이질감이 남는다. 하지만 그녀의 글에서는 하루하루 생존에 매몰된 사람들에게 잔잔한 울림을 던져준다. 저자는 자신의 서른살이 치열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독자들이 동의할지는 의문이다. 대부분의 30대는 더 나은 삶을 위해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데 노력한다. 하지만 저자는 경제적 부 대신 자신의 습작을 위한 노력만 벌인다. 신자유주의와 1등, 최고, 혁신만을 떠드는 지금의 30대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그런데도 ‘내 서른 살은 어디로 갔나’에 자꾸만 손이 가는 것은 30대라면 누구나 해봄직한 고민들이 열거돼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거듭된 입시 실패로 10년 넘게 불면증에 시달렸다. 헌책방에서 책을 사다 읽었고 문하생이나 대학이 아닌 문화센터에서 시를 배우며 자신을 추스렸다. 그야 말로 ‘헝그리’ 인생인 셈이다. 당연히 좌절의 깊이와 길이도 길었을터. 저자는 현실의 어려움이 닥쳐 올 때마다 좌절이 오기를 불렀고, 학맥·인맥으로 얽혔더라도 실력이 이길 것이라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결국 등단에 성공했고 여러 문학상을 받으며 전업시인과 사진가로 활동하게 된다. 이 과정에 저자 주변에는 가족과 지인들이 끊임없이 도움을 줬다. 저자에게는 배고픈 후배를 위해 피를 팔아온 선배도 있지만 풋사랑을 키워 그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한 어설픈 사랑도 있었다. 무엇보다 저자는 언제 어디서고 그를 위해 달려오던 친구들을 읊는다. 저자는 “더 나이 들어서도 제일 가고 싶을 서른살, 곧 삼십대. 그때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더라. 그 시절 고독과 불안을 잘 이겨냈기에 가난도 외로움도 행운이었다”고 말한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