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세계를 흔든 10벌의 남자 양복> (런던=연합뉴스) 김진형 특파원 = 양복은 남성이라면 누구나 입는 평범하고 기본적인 정장으로 꼽힌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으로 보이는 남성 양복도 시대와 사람에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어떤 양복들은 대중의 패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 신문은 세계를 흔든 10벌의 남자 양복을 골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 마오쩌둥(毛澤東) 인민복 = ''마오 룩''이라는 패션용어를 만들어낸 이 박스형양복은 목까지 올라오는 단추, 스탠드 칼라, 대칭적인 4개의 주머니 등이 특징이다.중국에서 남녀를 막론하고 중국인 대다수가 이 인민복을 입었고, 북한에서도 입고 있다. ▲ 리처드 기어의 ''아메리칸 지골로'' 양복 = 할리우드 배우 리처드 기어가 영화''아메리칸 지골로''에서 입은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양복은 영화사에 남는 유명한 영화의상 중 하나다. 이 옷은 양복이 공식적이고 딱딱한 의상이라기보다 섹시한 의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르마니는 이 양복을 통해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렸다. ▲ 마를린 디트리히의 양복 = 독일의 여배우 디트리히는 전통적인 여성성의 개념에 도전해 남성 양복을 입은 최초의 유명인이었다. 그에 이어 팝가수 마돈나,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 프랑스 여배우 카트린느 드뇌브도 남성 양복을 입었고, 남성복풍 패션은 이제 여성 패션쇼의 한 아이템으로 자리를 잡았다. ▲ 윈스턴 처칠의 전시 플란넬 양복 = 1940년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는 강력한 전시 지도자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시카고 갱 같은 분위기의 양복을 입었다.그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시가, 보타이, 중산모에 백색 줄무늬 플란넬 양복을 입었다. ▲ 비틀스의 ''하드 데이즈 나이트(Hard Day''s Night)'' 양복 = 비틀스가 직접 출연한 코미디 영화 ''하드 데이즈 나이트''에서 비틀스 멤버들이 입은 양복은 1960년대를 규정짓는 패션 중 하나가 됐다. 런던의 양복 재봉사 더글러스 밀링스는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 카르댕의 의상에서 영향을 받아 칼라 없는 재킷을 만들어 유행시켰다. ▲ 찰리 채플린의 노숙자 양복 = 무성영화 시대의 최고 배우 채플린의 양복은 대조의 미학에 있다. 꽉 끼는 재킷과 자루처럼 헐렁한 바지, 작은 중절모와 큰 구두는 채플린 영화의 코믹한 분위기를 한층 살렸다. 1914년 영화 ''어린이 자동차 경주''에서 등장한 이 꾀죄죄한 양복은 2005년 경매에서 3천100파운드의 거액에 팔렸다. ▲ 캐리 그랜트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양복 = 영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할리우드 미남 배우 캐리 그랜트가 입은 단정하고 세련된 회색 양복은 세월이 흘러도 세련미를 잃지 않고 있다. 이 양복은 영화 ''콜래트럴''에서 톰 크루즈같은 배우의 패션에 영향을 미쳤다. ▲ 말콤 X의 주트 수트 = 194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멕시코계 미국인 청소년들과미군과의 충돌이 있었다. 당시 10대들은 전시 물자부족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허리가 높고 통이 넓은 바지, 어깨에 패드를 댄 긴 코트 같은 헐렁한 양복을 입었다. 흑인 인권운동가 말콤 X도 이 옷을 입었고, 이 옷은 청소년과 소수민족 반항의 상징처럼 됐다.▲ 그램 파슨스의 양복 = 26세의 나이에 마약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미국의 록가수 그램 파슨스의 화려한 양복은 히피 운동의 패션 품목이 됐다. 이 양복은 엘비스 프레슬리, 엘튼 존, 에릭 클랩튼 등의 옷을 만든 우크라이나 태생 패션디자이너 누디 콘의 작품이다. ▲ 언론인이자 작가 톰 울프의 흰색 양복 = 뉴저널리즘의 아버지로 불리는 톰 울프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흰색 양복을 1962년 처음 샀다. 그는 이제 다양한 디자인과 소재를 가진 온갖 흰색 양복을 자랑한다. kjh@yna.co.kr(끝)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1-23
- 1. 참여정부 국정과제 1번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왜 이렇게 됐나 1. 참여정부 국정과제 1번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왜 이렇게 됐나 임기말 의욕 내는 청와대 vs. 상황관리형 조심스런 외교부 "인수위 시절, 누구도 핵문제 1년 이상 걸릴 줄 몰랐다" 5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미 잊혀진 주제가 됐지만 참여정부의 국정과제 1번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었다. 그 만큼 우선 순위를 두겠다는 북핵문제에 실질적 진전이 있은 뒤 21일 있었던 대북 인권결의안 표결과정에서도 부처내 의견차이가 있었다. 우리 정부는 2006년 인권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북한 인권 상황이 심각하다는 점을 공식확인한 것. 하지만 올해 정부는 표결에서 기권했다. 국제사회가 보기에 불참-기권-기권-찬성으로 이어지던 한국정부가 다시 기권으로 돌아선 만큼 좋게 볼 리가 없다. 이튿날 열렸던 미얀마(버마) 인권결의안 표결을 앞두고 의견개진을 하려던 정부가 갑자기 그 계획을 철회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정부 입장이 막판까지 이견이 많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지난해 7월 북한은 중·장거리 미사일을 쏘고 10월 핵실험까지 감행했다. 당시에도 예정돼 있던 남북 장관급회담의 개최여부와 대북 쌀지원, 개성공단·금강산관광의 지속여부를 놓고 부처내 격론을 벌였다. 하지만 정부내 이견이 이처럼 크지는 않았다. 지난 8월 남북정상회담 전격 합의와 10월 공식 수행단 구성과정에서 간극은 생기기 시작했다. 외교부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조차 수행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김계관-김정일 면담, 힐-부시 면담에 비해 외교부의 소외. 북한의 인권상황이 개선되지 않은 만큼 우리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1-23
- <내일시론>IMF 10년, 그 그늘은 아직 짙다(김진동 2007.11.22) IMF 10년, 그 그늘은 아직 짙다 국가 부도사태를 맞아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10년이 됐다. 한국경제가 구제금융을 받은 대신 IMF관리체제에 편입되어 건국 이후 처음으로 경제주권을 넘겨줌으로써 ‘경제 국치일’로 기록된 지 10년째를 맞게 됐다. 선진국 클럽 OECD에 가입하여 축배를 들고 1년이 채 안돼 치욕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 10년은 상실과 고통의 세월이었다. 또 도전과 치욕의 씻김굿 판의 세월이었다. 외환위기는 외화 유동성 부족과 정부의 환율 관리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대기업의 과다한 차입경영이 큰 몫을 했다. 곧 정부 관료의 무능과 안일, 기업의 무분별한 팽창경영의 합작품이나 다름없다. 외환위기 사태가 우리에게 안겨준 시련과 아픔은 너무나 가혹했다. 기존 시스템은 모두 무너졌다. 그 자리에 낯선 ‘글로벌 스탠더드’가 자리잡고 새 주인이 됐다.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졌다. 30대 대기업 중 17개가 공중분해 되었다. 가장 안전하다던 은행도 33개 중 16개가 사라졌다. 도산 기업과 은행은 줄줄이 외국자본의 손에 넘어갔다. 국내 상업은행의 자본 대부분을 외국인이 갖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 외환위기 사태는 사회와 삶의 문화도 바꿔 놓았다. 평생직장의 의식도 무너졌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일상사가 되면서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신규고용은 줄고 비정규직은 급증했다. ‘오륙도’ ‘사오정’ ‘이태백’의 신조어가 보통어가 됐다. 중산층은 몰락하고 양극화의 골은 깊어졌다. 노숙자가 넘쳐나게 되었다. 가정이 붕괴되고 자살도 속출했다. 사회가 살벌해지고 가정이 멍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외환위기를 빨리 극복한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국난의 직접적 요인이었던 외환보유고가 2600억 달러로 세계 5위권으로 올라섰다. 수출은 연간 3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 근접했고 주가도 2000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기업부채비율도 100% 아래도 내려가 재무구조가 건전해졌다. 방만한 차입경영 분식회계 부패구조 등 낡은 틀이 많이 개선된 것이다. 투명성도 좋아졌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눈을 뜬 덕이라고 하지만, 168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얻은 자산이다. 그렇다고 IMF 터널을 온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한 겨울 뒤끝의 더 매서운 한파에 갇혀 있는 꼴이다.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여전하다. 단기외채가 다시 급증하여 10년 전의 환란 때의 수준에 이르렀다. 재정적자와 가계 빚이 위험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비교적 재정이 건전했기 때문이다. 대립적 노사관계도 달라진 게 없다. 공공부문의 비효율과 거미줄 규제는 오히려 후퇴했다. 저성장 기조가 굳어져 가고 있다. 특히 고용 없는 성장과 잠재성장력의 위축은 이제 고착화된 듯 하다. 무엇보다 가슴 쓰린 것은 기업가 정신의 실종과 사회 총체적 활력의 저하다. 통합의 정신은 찾아볼 수 없고 이기주의가 팽배한 것도 뼈아픈 상실이 아닐 수 없다. 경제활력의 발목을 잡고 있는 투자부진은 기업가 정신의 실종 탓이다. 위험을 회피하며 단기 실적에 집착하기 때문에 투자가 살아나지 않는다. 은행도 안정운행에 안주하려 한다. 해외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전과 역동성을 찾아보기 힘든다. 경제 조로화를 걱정하는 소리도 여기서 싹튼다. 도덕성의 회복도 중요한 시대적 과제다. 청빈과 청부가 대접 받게 되려면 승자독식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IMF 10년 째의 해에 맞추기라도 한 듯 새로운 위기론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위기론의 진원을 살펴보면 결코 흘려들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부질없는 논쟁에 갇혀 있다.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평가하는 소리에 정부가 ''되찾은 10년''이라고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논쟁에 앞서 필요한 반성과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 위기의 재발을 막고 앞으로 10년을 준비하지 않으면 선진국 진입은 어려워진다는 절박함을 모르는 것 같다. 앞으로 10년은 중요한 시기다. 활력을 불어넣고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러자면 규제부터 과감하게 풀어야 한다. 투자를 촉진하고 기업이 신바람 나게 뛰게 하면 희망이 커지게 된다. 경제가 잘 돌아 일자리가 많이 생기면 중산층이 복원되고 양극화 문제도 풀리게 된다. 정부가 치열하게 뛰고 국민이 금모으기 정신으로 돌아간다면 안될 일이 없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1-22
- 안동소주 수정본 명사가 권하는 전통주 컬렉션 ⑥민속주 안동소주 “45도 독한 맛 지키는 진짜 소주” 작가 조정래, “안동포, 하회탈 만든 안동정신이 있어 신뢰할 수 있다” 작가 조정래는 “안동소주는 진짜”라고 말한다. 일제에 맞선 의병투쟁에서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민족사 100년을 소설 ‘아리랑’과 ‘태백산맥’ 그리고 ‘한강’ 32권으로 살려낸 작가가 ‘진짜’라고 말하는 안동소주는 어떤 술인가. ◆“소주는 독해야 한다” = 안동소주는 우리나라에 소주가 들어온 시기부터 명성을 얻었다. 박록담 한국전통주연구소장은 “소주 유입 시기는 몽고가 고려를 침략한 14세기 경으로 본다”며 “이때 안동 개성 제주에 몽고군의 군사 주둔지가 들어섰고, 이후 이들 세 지방은 각기 소주의 명산지로 이름을 얻었는데 그 중에서도 안동지방 소주를 최고로 쳤다고 한다”고 밝혔다. 안동소주가 유명해진 것은 지역 특산품인 마(麻)잎으로 향을 낸 독특한 누룩과 좋은 물을 들 수 있다고 한다. 안동소주는 잔에 따라 놓으면 마시기 전에는 고량주 같은 향취가 느껴지는데 입안에 들어가면 목젖이 알알할 정도로 화끈하다. 조정래씨가 안동소주를 좋아하는 이유도 술이 독하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순한 소주가 유행인데, 소주는 독한 술”이라며 “안동소주는 45도 전통 맛을 지켜 독하고, 빨리 취하지만 빨리 깨 좋아한다”고 말했다. 김연박 안동소주·전통음식박물관장은 “전통소주도 다양한 도수의 술이 나오는데 안동소주는 알콜함량 45% 한 가지만 고집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민속주 안동소주 기능보유자 조옥화씨의 아들이다. 고집, 어쩌면 조정래씨가 안동소주에 반한 진짜 이유는 ‘고집’ 때문일지 모른다. 그의 삶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고집’이 가득하니까. 그는 1983년 소설 태백산맥 집필을 시작해 1989년 전 10권을 완성했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에서 시작해 한국전쟁을 거쳐 1953년 휴전까지를 다룬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는 ‘아침 7시 기상, 체력단련을 위한 운동, 아침밥, 오전 작업, 1시간 낮잠, 점심식사, 체조, 오후 작업, 저녁 식사, 뒤로 달리기, 잠깐 눈붙이기, 야간 작업’의 강행군으로 하루에 30장의 원고지를 써내려 갔다. 컴퓨터 자판이 아닌 육필로. 등장인물 486명, 원고지 1만6500장에 이르는 ‘태백산맥’을 통해 우리의 분단사가 비로소 복원됐다는 평을 들었고, 소설은 그대로 역사가 됐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출간되기 시작한 ‘태백산맥’은 당시 청년학생들에게 ‘분단’을 살아있는 주제로 깨우쳤다. 뿐인가. 태백산맥을 통해 벌교갯벌과 꼬막을 알았고 전라도 사투리에 녹아있는 민중의 힘을 느꼈다. 태백산맥 이후 작가는 세월을 거슬러 분단의 원인을 규명한 문제작 ‘아리랑’ 12권을 세상에 내놓았고 4·19와 5·16, 10월유신과 부마항쟁, 광주항쟁과 6월항쟁에 이르는 현대사를 ‘한강’ 10권에 담았다. 1983년부터 2002년까지 20년을 꼬박 써온 것이다. 평단에선 3세대에 걸쳐 할 일을 작가 한 사람이 해냈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안동소주와 맥주 섞은 ‘바이오주’ 유행 = 안동소주는 예부터 조 수수 등을 사용하지 않고쌀로만 술을 빚었다. 지금도 술맛을 내기 위한 첨가물도 사용하지 않는다. 장작불로 술을 빚을 때는 불조절하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민속주 안동소주’ 기능보유자 조옥화씨는 “시집와서 술을 빚을 때 불 조절을 잘못하면 그동안 한 일이 다 허사가 돼 속상했다”며 “술이 잘 내리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미세한 불길을 조절하면서 소중한 곡식을 사용해 빚는 술이 잘 되기를 바라고 바라던 그 정신은 옛 맛을 그대로 지키겠다는 안동소주만의 고집으로 이어져 ‘안동소주’는 전통주를 대표하는 술 중 하나가 됐다. 조정래씨는 “안동에는 하회탈이 있고, 삼베로서 유명한 안동포도 있다”며 “소주도 이런 안동의 특색이 있어 신뢰가 생긴다”고 말했다. 좋은 술이 계속 발전하려면 ‘소비자의 선택’과 ‘좋은 술 만들기’가 상호 작용해야 한다. 조정래씨는 “전통술을 대중화하려면 좋은 술이어야 하고 값이 적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연박 관장은 “소비자가 전통주를 찾으면 매장 판매대 앞으로 진열하게 된다”며 “희석식 소주와 양주에 젖어있는 소비자들이 우리 쌀로 만든 옛 맛을 찾기 바란다”고 말했다. 최근 안동소주를 즐기는 사람들은 ‘바이오주’를 만들어 냈다. 안동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는 ‘폭탄주’인데, 안동시 관계자는 “위스키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보다 뒷맛이 좋고 가격도 훨씬 저렴해 선호한다”고 말했다. 안동=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1-21
- “두 아이 눈빛이 다시 서게 만들었죠” 인터뷰 = 전 동화은행 지점장 김정호씨 제목: “두 아이 눈빛이 다시 서게 만들었죠” 부제: 노숙자 ‘눈높이 낮춰라’ 충고로 재기 결심 “지점장들은 보통 6시 30분이면 출근하는데 하루아침에 갈 곳이 없어졌어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는데 벽지에 그려진 꽃무늬가 어찌나 크게 보이던지….” 전 동화은행 지점장을 지낸 김정호(57)씨는 자신이 온몸으로 겪은 외환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1998년 6월29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 자기자본비율(BIS)이 8%가 안 되는 은행 12곳 가운데 5곳(동화 동남 대동 충청 경기은행)을 퇴출시키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한 날이기 때문이다. 잘나가던 은행지점장에서 한순간에 실업자 대열에 들어선 순간이다. ◆하루아침에 뒤바뀐 현실 = 김 씨는 77년 우리은행 전신인 한일은행에 들어가 국제영업부와 인사담당 등을 두루 거쳤다. 89년에 동화은행으로 옮기면서 창립멤버로 일했다. 그곳에서도 인사를 주로 담당했고, 94년에 처음 지점장을 맡았다. 분당, 부산 부전동, 영등포구 대림동, 마포구 서교동 지점장 등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한순간이었다. IMF 한파로 퇴출은행원이라는 상상하지도 못한 현실과 맞닥뜨렸다. 아이들은 웃음을 잃었다. 특히 큰 아이는 충격으로 성적이 나빠지더니 대학까지 떨어졌다. 이웃주민들과 마주치는 게 두려웠다. 낮에는 밖에 나가지도 않고 혹시 나가더라도 밤늦게 들어왔다. 당시 명동성당에서는 퇴출된 직원들이 농성을 하고 있었다. 그는 “8월로 기억되는데 비가 엄청나게 오는 날이었다. 농성중인 직원들이 빗속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비와 눈물이 뒤섞여 구분이 가질 않았다. 젖먹이를 업고 와서 농성중인 남편에게 김밥을 건네던 한 부인의 손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지점장 120명을 포함해 3000명 정도가 하루아침에 퇴출됐다. 연락 안 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동료 지점장들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여럿이다. 인사팀에 있으면서 정말 우수한 직원들 뽑았다고 자부했는데 그 직원들 대부분이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다. 그는 “우리 잘못이라고 하지만 아무런 실체적 규명도 없이 그냥 그렇게 흘러가니까 우리는 결국 먼지 같은 존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노숙자의 가르침 = 직장생활에 대해서도 새롭게 깨달았다. 직장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니까 정말 시베리아 벌판 같은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정하고 살벌하면서도 곳곳에 유혹은 많다. 처지가 어려워지니까 대부분 연락도 끊겼다. 그대로 가면 노숙자로 전락하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을지로 쪽을 지나가는데 교회에서 노숙자를 위해 식사봉사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뒤에 줄을 섰다. 식판에 밥과 김치, 콩, 튀김 2개를 받아서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불렀다. 그리곤 대뜸 “어떻게 왔냐”고 묻더니 주머니에서 먹다 남은 소주 반병을 꺼냈다. 소주잔이 돌고 얘기가 오갔다. 그를 불러 세운 사람은 중소기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노숙을 하고 있는 처지였다. 노숙자가 그에게 말했다. “여기에는 아예 발들일 생각을 말아라. 자세만 조금 낮추면 지금이라도 다시 뭐든 할 수 있지 않느냐.” 강한 전율을 느꼈다. 그는 소주 세 병을 사서 노숙자에게 건네고 집으로 왔다. ◆칼국수 장사로 재기 =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노숙자의 충고(?)대로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식당을 해서라도 아이들 웃음 잃지 않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고기(육류)는 볼 줄을 잘 모르고, 회는 손이 뜨거워서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은 것은 분식 밖에 없었는데 제일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다보니 칼국수가 남았다. 맛있는 칼국수를 배우기 위해 하루에 4끼씩 칼국수만 먹었다. 지인들 소개로 제부도 바지락 칼국수도 배우러 갔고, 영광 법성포까지 칼국수 맛을 찾아갔다. 수개월을 준비해 강동구청 앞에 칼국수 집을 차렸다. 정성을 다했고, 장사가 잘 됐다. 2년 뒤에는 고향근처인 창원으로 옮겨가 70평 규모로 칼국수 집을 했다. 여전히 잘 됐다. 서울에서 2년 창원에서 5년 7년을 칼국수 집을 했다. 다음날 먹을 김치를 담그고, 새벽에는 바지락 같은 해물을 사와서 다듬고 정말 쉬지 않고 일했다. 장사는 잘 됐지만 몸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교통사고도 겹쳐 다리 수술까지 받았다. 지난해 5월 다시 둔촌동으로 돌아와 피자 체인점으로 전업한 이유다. 7년 동안의 칼국수 장사는 그에게 많은 변화와 자신감을 가져다 줬다. 칼국수로 애들 두 명 모두 대학 졸업시켰다. 큰 애는 미국에 유학 가서 졸업한 뒤 취직해 연수중이다. 작은 딸은 뉴욕시립대에 다니는 중이다. 남부럽지 않다. 그가 말하는 음식점 성공비결은 지극히 간단하다. 첫째는 정성이다. 정성이 없으면 손님이 오질 않는다. 내 부모, 내 자식이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런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 판매만 생각하는 음식은 사료일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다음은 진심어린 친절이다. 장사하게 해주고, 자식들 공부시킬 수 있게 해준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친절해야 한다. 마지막이 좋은 재료다. 세 가지를 갖추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고 전한다.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 = 외환위기가 10년이 흘렀다. 한때는 처지가 부끄럽기도 하고 좌절감도 있었다. 이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한 것은 두 아이의 눈빛이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반듯하게 양복 차려입고,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지금은 흰 머리를 질끈 묶고 산다. 그는 “그야말로 장돌뱅이가 다 됐다”면서 “처지가 어려울 때는 자기 자신의 위치와 좌표를 빨리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말한다. 흘러간 세월만큼 배운 것도 많다. 잘 갖춰 입고, 큰 차를 타면 대접받는 사회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왜곡된 가치평가다. 교통위반에 걸려도 큰 차는 그냥 가지만 화물차에 바지락 싣고 가면 곧바로 ‘야자’하면서 하대(下待)하는 사회다. 현직에 있는 그의 입행 동기는 현재 대부분 은행의 부행장들이다. 우리은행 김희태, 정현진 부행장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말한다. “그분들은 금융 전문가가 됐겠지만 인생의 폭은 내가 더 넓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겉모습은 내가 모자랄지 몰라도 내 나름대로 인생을 잘 겪어왔다고 생각한다. 자식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다.” 그의 바람은 소박하다. 막내딸 공부 끝나고 나면 고향 쪽에 가서 조그마한 찻집을 하나 차릴 생각이다. 아버님이 하시던 양로원(지금은 형님이 물려받아 경영하고 계신다)에 봉사활동도 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단다. 기자를 지하철역까지 바래다 준 그는 그의 옛 직장이었던 우리은행으로 향했다. 직원이 아닌 고객으로.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1-19
- 밥일꿈 홍보맨을 위한 변명? 파라다이스그룹 홍보팀 정윤석 계장 화려한 문장력과 막힘 없는 언변은 기본, 깔끔한 인상과 사람 좋은 매너는 필수. 거기다 웬만해선 끄떡없는 주량(酒量)까지 갖춰주면 금상첨화! 어떤 이는 홍보맨을 빈둥빈둥 ‘놀새 족’쯤으로 여기는가 하면 ‘3D의 대명사’로 손꼽는 이도 종종 있다. 홍보 부서에서만 꼭 5년을 보낸 지금, 나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만만치 않음을 배웠다. 지금도 반나절을 끙끙대며 작성한 보도자료가 ‘빨간 펜’ 검열에 반 토막으로 잘려나가거나, 마음은 ‘청산유수’ 인데 생각만큼 술술 풀리지 않는 ‘말’로 인해 진땀을 뽑는 일이 허다하다. 노타이에 반팔 차림이 허용되는 한여름에도 긴 팔 셔츠에 빈틈없이 당겨 올린 넥타이 차림을 고수하던 입사 초년 시절의 호기는 ‘회사 정책에 적극 동참한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접어버렸다. 깔끔한 인상과 매너 못지않게 적정체온을 유지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걸 배웠으니까. 주량도 훈련으로 늘릴 수 있다고 믿었건만 ‘세월의 힘이 훈련의 힘보다 세다’는 진리를 새록새록 깨닫는다. 밥•일•꿈을 위해 살아가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홍보맨에게도 이상과는 동떨어진 현실을 향한 변명은 있다. 하지만 그 변명은 스스로 오해했거나 또는 주위에서 바라는 홍보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깨고, 홍보맨으로 살며 체득한 경험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깨달음’에 가깝다. 홍보는 보다 많은 고객들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일에 다름 아니다. 즉, 끊임없이 우군을 만들어가는 투자인 셈이다. 홍보의 대상은 비단 외부 고객만이 아니다. 회사에서 주로 ‘돈을 벌기 보다 소비하는 주체’로 눈총(?) 받기 십상인 홍보팀 식구들은 내부 고객을 향해서도 ‘홍보는 소비가 아닌 투자’임을 설득해야만 한다. 홍보의 속성상 칭찬을 받기보다는 욕을 듣기가 더 쉬운 게 현실이지만, 목표를 달성한 후의 쾌감은 그래서 더욱 짜릿하다. 입사 후 처음 낸 보도자료가 일간지 한 쪽을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걸 봤을 때의 희열을 난 지금도 기억한다. 홍보를 하면서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 중 하나가 바로 ‘메시지의 과잉’이다. 회사가 가진 장점을 한꺼번에 전달하려 욕심을 내면 낼수록 미사여구가 늘어나고 반대로 전달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회사가 알리고 싶은 내용을 객관화해 바라보고 이를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하는 ‘객관성’과 ‘통찰력’이화려한 문장이나 현란한 화술보다 홍보맨에게 더욱 절실한 이유다. 그래서 홍보맨은 화려한 데코레이터(decorator)보다 신뢰감을 주는 메신저(messenger)여야 한다고 난 믿는다. 깔끔한 인상과 사람 좋은 매너도 외양보다는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다. 눈으로 보여지는 격식에 얽매이는 사람보다, 진심으로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더 멋지게 느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눈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의 열정적인 대화에 방해가 된다면,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를 잠시 풀어 놓을 줄도 아는 유연함을 가져보자. 감히 이땅의 수많은 홍보맨들에게 권해 본다. 오늘 당신들을 위한 변명을 생각해 보기를….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2-27
- [신문로]헬리코박터균·짠음식이 위암 부른다 헬리코박터균·짠음식이 위암 부른다 이동호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 한국은 아직까지 위암 왕국이다. 매운 음식, 절인 음식, 자극적인 음식이 유독 많은 것이 사실이고, 이것들이 위암 발생에 영향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헬리코박터라는 세균이 위암발생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고 있다. 이 균은 5세 미만의 어린 나이에 우리 몸에 들어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급성 위염을 일으켜 구역질이 나고 배가 아프며 점차 만성위염으로 진행하게 된다. 만성 위염은 1~2년만에 잠깐 오는 것이 아니라 헬리코박터균이 위안에 존재하는 한 지속적으로 진행되며, 결국은 위점막을 얇게 만드는 위축성 위염을 만들게 된다. 또한 위축성 위염은 위세포 모양을 장세포 모양으로 변형시키는 소위 ‘장상피화생’을 동시에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위축성 위염과 장상피화생이 오랜 세월 흐르면서, 일부 정상의 세포 유전자에 변형이 오게 되면 위암이 발생하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헬리코박터 세균이 뿜어내는 여러 독소들이 만성위염, 위축성 위염, 장상피화생을 유발하고, 이 세균으로 유발된 위의 지속적 염증은 정상인 세포의 유전자에 손상을 줄 수 있다. 이러한 만성위염에 의한 유전자 손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면 위암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과일·야채가 위암발생 억제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보고된 의학 논문들을 보면 헬리코박터의 세균이 만연한 지역과 나라에 위암 발생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 일본 중국 등이 대표적인 나라들이다. 물론 헬리코박터균이 많이 발견되더라도 위암 발생이 낮은 국가들도 있다. 이러한 국가들은 신선한 열대과일이나 야채 등을 즐겨먹고 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동물실험에서는 짠 음식과 헬리코박터 세균을 실험 동물에 동시에 주면 헬리코박터 세균만 있는 경우보다 위암 발생이 더 잘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서 짠 소금 성분은 헬리코박터균에 의한 위암 발생을 더 가속화 시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지나치게 짠 음식을 삼가하는 것은 위암 발생을 막는 효과적인 생활 습관이라고 생각된다. 헬리코박터균은 위암 이외에도 위궤양 십이지장궤양의 발생에도 깊이 관여한다. 최근에는 위 내시경을 통해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이 발견되고 동시에 헬리코박터 세균이 발견되면 이 세균을 박멸하는 치료법이 권장되고 있다. 또한 유럽국가는 부모나 형제 등 가까운 친척이 위암에 걸린 경우에 환자 본인에게서 헬리코박터균이 발견되면 이 균의 박멸을 권장하기도 한다. 2005년 위암 질환에 이처럼 중대한 영향을 주는 헬리코박터 세균을 발표한 호주 의학자 마샬과 와렌이 노벨의학상을 수상했다. 이 헬리코박터 세균의 발견으로 그동안 왜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이 자꾸 재발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을 아무리 잘 치료해도 몇달이나 몇년후에 재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위장병하면 고질병으로 생각되었고 그만큼 완치하기가 어려웠다. 위장병이 재발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헬리코박터균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마샬과 와렌이 헬리코박터균이 위궤양과 십이지장궤양을 일으키는 원인균이고, 일부에서 위암까지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는 이 균을 박멸하는 제균요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헬리코박터균을 약물을 통해 없애버리면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의 재발율이 10%이하로 떨어진다. 헬리코박터균을 그대로 방치하면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의 재발율이 70~80%나 된다. 따라서 요즘은 위내시경 검사에서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이 발견되고, 동시에 헬리코박터균이 발견되면 반드시 약물을 통해 헬리코박터균을 제균하라고 의학교과서에 명시되었다. 위암연구로 노벨의학상을 따라서 이제는 헬리코박터균의 양성인 위궤양과 십이지장궤양은 세균에 의한 감염성 질환이 된 것이다. 헬리코박터균을 없애기 위해서는 적어도 2종류 이상의 항생제와 위산억제제를 함께 처방해야 한다. 앞으로 위암 왕국인 한국에서 이 균에 대한 보다 활발하고 지속적인 연구와 관심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다. 또한 위암과 헬리코박터균 연구를 통해 한국에서도 노벨의학상 수상이 가능했으면 하는 마음을 간절히 기원해본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1-14
- 한방칼럼 소아경풍, 어찌 해야하나 목화한의원 원장 박상흠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 대부분의 가정이 핵가족화 되고 각각의 가정 또한 아이들을 많이 낳지 않지만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어느 세월 보다 각별해졌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당혹스러울 때가 있는데 ‘경기‘를 할 때도 그중 하나 일 것이다. 예전 우리 할머니세대가 아이들을 키우실 때 ‘자래 딴다’, 또는 ‘복학 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아이들의 손바닥 일정부위를 날카로운 칼 등으로 절개 후 비지밥처럼 생긴 일종의 임파액과 같은 체액물질을 제거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한방에서 아이가 밥을 잘 안 먹거나 경풍예방치료법으로서 효과가 있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침과 한약으로 경풍예방과 치료를 하던 지혜가 요즘은 엄마들의 서양의학 일변도의 사고로 점점 잊혀지는 것이 안타깝다. 한의학에서 驚風이란 간질발작, 열성경련, 탈수 때의 근육경련 등 아동이 경련을 일으키는 모든 증상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대체적인 경풍의 한의학적 원인은 열, 담, 풍으로 나누는 데 즉 열이 심하면 담을 낳고, 다시 담은 경을 낳으며 경이 심하여 풍과 연축을 발생시킨다. 경풍은 한의학적으로 크게 세가지로 분류하는데 첫째로, 급경풍은 열성경련과 유사하여 고열에 따른 경련과 유전적 성향을 지니며, 간질로 이행은 드문 편이다. 그러나 눈이 돌아가거나 한쪽방향으로 응시하거나, 입에 거품을 물거나 침흘림 또는 팔다리 강직이나 뒤틀림, 의식소실, 수면에 빠짐 등의 증상이 5세 이상에서 나타나면 뇌파검사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의학에서는 소아의 열성경련의 70%는 식체라 불리는 소화기의 이상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소화기의 관리와 열의 조절은 소아경기의 가장 중요한 예방포인트로 생각 될 수 있다 열성경련이 잦은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간질빈도가 3배에서 9배까지 증가하지만, 열경기를 한다해서 반드시 간질로 되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은 성장하면서 증상이 없어지기도 한다. 둘째로, 만경풍이라 하여 소아간질과 유사하다. 소아간질에 대해선 너무 광범위하여 다 언급할 수 없지만 간단히 말한다면 이는 뇌 신경세포가 갑작스런 비정상적 전기적 흥분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급격한 신경기능의 장애가 생기는 것이 경기이고 경기가 반복적 만성적일 때 간질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소아의 뇌는 미숙하므로 사소한 유발원인에 의해서 발작이 쉽게 발생하며 연령별로 발작형태와 원인이 차이가 있다. 소아간질의 경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특발성간질인 경우가 75%정도나 되고 나머지 25%가 원인을 알 수 있는 증후성간질이다. 소아에서 흔한 원인은 출생시 뇌손상, 무산소증, 뇌감염증, 선천성뇌기형, 뇌외상 등이 있다. 소아간질을 앓고 있는 아동의 경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발달의 지연과 지능저하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보통 양방에서 쓰는 항경련제는 중추신경흥분을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졸리거나 정신이 멍해지는 부작용을 대부분 가지고 있고 운동 언어 인지발달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소아간질에 있어서 단지 경련발작을 없애거나 줄이는 것만이 아닌 정상적인 뇌발달을 돕는 것이 매우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한방치료는 위에 언급한 한의학적 원인과 분류에 입각한 치료로써 아동의 전반적인 인체생리의 불균형을 바로잡아 경련발생의 유발요인을 줄이고 발작후의 회복시간도 짧게 해주며 또한 항경련제로 인한 각종 부작용을 완화시켜주며 더 나아가서 경련발작이나 항경련제 사용으로 지연된 뇌 발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셋째로, 오랫동안 설사 또는 구토로 정혈 및 소화기의 기운이 고갈되었을 때도 경풍이 발생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풍의 유발요인이 있는 아동 즉, 피곤하거나 잠이 부족하거나 감기나 급체로 인한 열질환이 잘 발생하는 아동은 우선적으로 한방체질분류와 원인에 대한 한방치료를 권하고 싶다. 경기가 발생하면 초기에 신속한 대처가 필요한데 소아발작이 30분 이상 지속되거나, 발작사이에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지속되면 뇌 손상을 남 길수 있으므로 발작 즉시 신속한 응급조치 및 의료기관을 방문하여 후유장애를 최대한 막아야한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2-17
- [내일시론]드디어 열린 남북철도시대 드디어 열린 남북철도시대 남쪽의 문산역과 북쪽의 봉동역(개성공단)을 연결하는 개성공단 정기화물열차가 11일부터 정기운행에 들어갔다. 실로 감개무량한 일이다. 이날 북으로 떠난 첫 화물 열차는 현대아산의 개성공단 건설용 자재를 싣고 오전 6시20분 도라산역을 출발해 곧 군사분계선을 넘었고 이어 북쪽의 판문역에 도착했다. 이 열차는 주말을 제외한 1일 1회 문산~봉당역을 오가게 돼 있으나 봉당역 물류센터가 완공될 때까지는 판문역까지만 운행한다고 한다. 불과 7.3Km를 연결하는 이 열차 운행에 우리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남북간 철도시대가 다시 열렸다는 역사적 의미 외에도 철도시대가 남북문제 전반에 몰고 올 파급효과 때문이다. 남북간 철도가 끊긴 게 56년 전이고 철도연결을 남북이 합의하고도 개통까지는 무려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끊어진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자”고 남북기본합의서(1992년)에서 합의 해놓고 진전이 없다가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야 사업이 본격화됐다. 그러나 철도 연결공사를 끝내고 시험운행을 하는 데만 5차례나 일정이 무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이제야 정기운행에 들어간 것이다. 남북간 소통과 통합의 길 여는 쾌거 남북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새삼 실감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힘들게나마 물꼬가 트이면 물은 흐르게 돼 있는 것이다. 남북문제도 철도와 더불어 한결 가속도가 붙게 될 전망이다. 남북열차 운행이 정기화 되면 서울과 개성간 물류가 트이게 되는 효과만이 아니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언급했듯이 이는 남북간 소통과 통합의 길을 여는 것이고 정치·군사·사회적으로도 커다란 변화를 유도하게 될 것이다. 6·15공동성명 이래 남북은 3대 경협사업을 추진해왔다. 3대 사업이란 개성공단조성과 금강산 관광사업, 철도와 도로 연결사업이 그것들이다. 이제 3대 사업이 모두 자리를 잡은 셈이다. 관광사업은 개성관광이 새로 추가됐고 백두산 관광도 내년 상반기에는 이루어지게 된다. 개성공단사업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일부 분야는 목표보다 앞서가는 부분도 있다. 이제 남북문제도 한 단계 더 도약할 때가 된 것이다. 경의선 연결의 효과는 경제적인 측면만 해도 숫자로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기대하는 것은 이 철도가 서울과 개성을 연결하고 이어 평양, 신의주로 달리게 되며 그것이 베이징을 거쳐 모스크바, 파리, 런던으로 이어지는 ‘철의 실크로드’를 새로 까는 것이다. 동해선의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경의선의 중국횡단철도(TCR) 연결은 중국 러시아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업에 진척이 없는 것은 북한 철도의 노후화로 복구에 엄청난 돈이 들고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북한이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있다. 남북문제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그러나 길은 열리게 돼있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개성공단 사업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했다. 북한도 더디긴 하나 개방세계로 나서고 있다. 북한이 1998년 헌법을 개정해가며 사회주의시장경제 실험을 시작한 지도 벌써 9년이 됐다. 일부에서는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그간 북한의 경제, 사회변화도 생각보다 크다는 것은 각종 자료가 입증해 주고 있다. 지난 한해 북한을 방문한 남한 사람이 10만명을 넘어섰고 남북간 교역액도 98년 2억 달러에서 2006년 13억 달러를 넘어섰다. 철도의 개통은 남북간 경제협력 시대가 본격화 됐다는 뜻 외에도 남북경제통합의 기초가 될 것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유력한 한 후보의 참모는 남북문제는 국제환경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독자적 대북정책이란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자기비하가 아닐 수 없다. 개성공단, 관광사업, 이번 철도연결 등 지난 10여 년 동안 추진된 각종 남북사업은 미국이나 주변 강대국들의 전략적 의도와 관계없이 남북이 독자적 의지로 추진하고 실현시킨 것들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남북문제는 이제 우리가 주도적으로, 또 창의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다음 정부도 이점 명심해야 한다. 임춘웅 객원 논설위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2-12
- <내일시론>드디어 열린 남북철도시대(임춘웅 2007.12.12) 드디어 열린 남북철도시대 남쪽의 문산역과 북쪽의 봉동역(개성공단)을 연결하는 개성공단 정기화물열차가 11일부터 정기운행에 들어갔다. 실로 감개무량한 일이다. 이날 북으로 떠난 첫 화물 열차는 현대아산의 개성공단 건설용 자재를 싣고 오전 6시 20분 도라산역을 출발해 곧 군사분계선을 넘었고 이어 북쪽의 판문역에 도착했다. 이 열차는 주말을 제외한 1일 1회 문산-봉당역을 오가게 돼 있으나 봉당역 물류센터가 완공될 때까지는 판문역까지만 운행한다고 한다. 불과 7.3Km를 연결하는 이 열차 운행에 우리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남북간 철도시대가 다시 열렸다는 역사적 의미 외에도 철도시대가 남북문제 전반에 몰고 올 파급효과 때문이다. 남북간 철도가 끊긴 게 56년 전이고 철도연결을 남북이 합의하고도 개통까지는 무려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끊어진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자”고 남북기본합의서(1992년)에서 합의 해놓고 진전이 없다가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야 사업이 본격화됐다. 그러나 철도 연결공사를 끝내고 시험운행을 하는 데만 5차례나 일정이 무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이제야 정기운행에 들어간 것이다. 소통과 통합의 길 남북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새삼 실감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힘들게나마 물꼬가 트이면 물은 흐르게 돼있는 것이다. 남북문제도 철도와 더불어 한결 가속도가 붙게 될 전망이다. 남북열차 운행이 정기화 되면 서울과 개성간 물류가 트이게 되는 효과만이 아니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언급했듯이 이는 남북간 소통과 통합의 길을 여는 것이고 정치·군사·사회적으로도 커다란 변화를 유도하게 될 것이다. 6·15공동성명 이래 남북은 3대 경협사업을 추진해왔다. 3대 사업이란 개성공단조성과 금강산 관광사업, 철도와 도로 연결사업이 그것들이다. 이제 3대 사업이 모두 자리를 잡은 셈이다. 관광사업은 개성관광이 새로 추가됐고 백두산 관광도 내년 상반기에는 이루어지게 된다. 개성공단사업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일부 분야는 목표보다 앞서가는 부분도 있다. 이제 남북문제도 한 단계 더 도약할 때가 된것이다. 경의선 연결의 효과는 경제적인 측면만 해도 숫자로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기대하는 것은 이 철도가 서울과 개성을 연결하고 이어 평양, 신의주로 달리게 되며 그것이 베이징을 거쳐 모스크바, 빠리, 런던으로 이어지는 ‘철의 실크로드’를 새로 까는 것이다. 동해선의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경의선의 중국횡단철도(TCR) 연결은 중국 러시아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업에 진척이 없는 것은 북한 철도의 노후화로 복구에 엄청난 돈이 들고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북한이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있다. 남북문제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그러나 길은 열리게 돼있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개성공단 사업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했었다. 북한도 더디긴 하나 개방세계로 나서고 있다. 북한이 1998년 헌법을 개정해가며 사회주의시장경제 실험을 시작한지도 벌서 9년이 됐다. 일부에서는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그간 북한의 경제, 사회변화도 생각보다 크다는 것은 각종 자료가 입증해 주고 있다. 지난 한해 북한을 방문한 남한 사람이 10만명을 넘어섰고 남북간 교역액도 98년 2억 달러에서 2006년 13억 달러를 넘어섰다. 철도의 개통은 남북간 경제협력 시대가 본격화 됐다는 뜻 외에도 남북경제통합의 기초가 될 것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유력한 한 후보의 참모는 남북문제는 국제환경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독자적 대북정책이란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자기비하가 아닐 수 없다. 개성공단, 관광사업, 이번 철도연결 등 지난 10여 년 동안 추진된 각종 남북사업은 미국이나 주변 강대국들의 전략적 의도와 관계없이 남북이 독자적 의지로 추진하고 실현시킨 것들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남북문제는 이제 우리가 주도적으로, 또 창의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다음 정부도 이점 명심해야 한다. 임춘웅 객원논설위원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