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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일꿈]밥과 일, 그리고 꿈 밥과 일, 그리고 꿈 김현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사원) 10여 년 전, 서울역 노숙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대학 한 학기를 남겨두고 서울에 올라와 남산자락 고시원 쪽방에 틀어박힌 언론 지망생이었다. 외로웠고, 고달팠다. 가끔 고향집에 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귀성길 서울역에서 그들과 마주쳤다. 서울역 노숙자만 1천명에 육박하는 IMF 혹한기. 그들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나흘간의 짧은 시간 동안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이야기해 봤다. 그들의 경계심을 허무는 데는 허술한 외모 덕도 컸지만 그보다는 취직 못하면 환향(還鄕)하지 않겠다던 나의 절박함이 그들의 절망감과 닮아있던 탓이리라. 후에 어느 글에서 나는 그 때 경험을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집, 밥, 잠, 돈, 일, 꿈. 우리가 살면서 갖고 누려야 할 최소한의 것들은 한 음절 단어면 족하다. 이들이 가진 것은 잠뿐, 길 위의 한뎃잠을 자며 오늘도 속절없는 꿈을 꾼다.’ 세월이 흘렀다. 나는 광화문 신문로 근처 언론사에 취직했다. 가끔 지나치면서 내일신문 사옥에 쓰인 ‘밥·일·꿈’이라는 글씨를 볼 때면 반가우면서도 씁쓸했다. 여전히 길 위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들이 있었고, 용케도 고시원 쪽방을 떠나 ‘밥과 일과 꿈’을 얻은 내가 있었다. 2003년 11월, 나는 서울역을 다시 찾았다. 이듬해 총선을 앞두고 노숙자들이 정치에 바라는 ‘꿈’을 취재하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우리는 유권자가 아니잖아.” 경험이 기억과 연륜으로 축적되지 않는 나의 아둔함이라니. 10만원을 받고 자신의 주민증을 누군가에게 팔았다는 그 노숙자는 이미 유권자가 아니었다. 물론 ‘증’이 있는 노숙자들은 부재자투표를 한다. 하지만 상당수의 노숙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국가에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 선거철 숱한 서울역 광장의 유세를 한 토막이나마 자기의 것으로 여길 마음이 없었다. 차가운 서울역 광장 바닥에서 그들의 ‘꿈’도 함께 곱아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의 선거가 다가온다. 성장 경제, 서민 경제, 진짜 경제 가짜 경제. 1987년 직선 이후 20년 동안 정치 일색이었던 대선 담론에 비로소 경제가 등장했다. 그렇더라도, 빈곤 해결은 밥과 일 뿐 아니라 인간성 회복을 위한 ‘꿈’을 어루만지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경제 공약이면 좋겠다. 무료 급식도 중요하지만 ‘클레멘트 코스’ 인문학 강의가 노숙자들에게 희망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가족 품을 떠난 그들, ‘사회 보장’ ‘1인 1표’ 헌법의 울타리에는 들어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초가을 때아닌 비바람 탓일까 . 비에 젖는 서울역, 사람들이 처연하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0-02
- 경제시평 2008년 경제전망에서 고려할 것들 곽영훈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분석실장 가을은 전망의 계절이다. 나라살림을 꾸려가는 관가나 경영계획을 수립하는 기업체는 물론 금융가도 이맘때면 다음 해의 경기예측에 바쁘다. 경제전망이라 하면 다양한 경제현상과 복잡한 방정식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는 오히려 상상력이나 직관이 필요한 분야이다. 미래는 불확실성과 확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상상력과 직관만으로 신빙성 있는 결론에 이르기 어렵다. 여기서 2000년 이후 국내경제를 지배하면서도 2008년 경제전망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경제흐름을 제시해 보자. 우선 내수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들은 사태가 발생한 그 순간 경상수지 흑자국으로 변모한다. 내수핍박을 통한 국제수지의 개선이라는 자동조절 기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경상수지가 균형에 수렴하고 있다. 실물경제가 10년 세월을 통해 비로소 외환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러한 경제기조의 변화에 부응하여 지난 10년간 유지되어왔던 전망의 틀에도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한편 수출의존도가 높은 국내경제의 속성상 교역조건의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2007년 중반까지 1년 정도 개선추세였던 교역조건이 최근 유가상승과 IT수출단가하락으로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교역조건의 악화는 지표경기와 체감경기의 괴리를 확대시켜 결과적으로 내수부진을 초래해왔다. 따라서 2008년에는 장기적인 내수회복력의 복원과 단기적인 교역조건의 악화라는 상반된 요인의 힘겨루기에 의해 내수의 흐름이 결정될 것이다. 둘째로는 중국경제의 대두이다. 중국의 고도성장은 국내경제에 제조업의 재생과 생산설비의 해외이전이라는 상반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08년에도 중국경제가 10%대의 고성장을 지속함으로써 국내경제가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중국경제가 올림픽을 계기로 조정국면에 진입할 가능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도 올림픽 직후 성장률이 크게 하락한 경험이 있는데 중국 역시 잇따른 금융긴축과 환율절상, 임금인상과 물가상승, 미국경제의 위축 등 적잖은 난관에 부딪칠 가능성이 엿보인다. 셋째로는 금융부문의 영향력 확대이다. 7월말 2차 서브프라임 사태가 발생하면서 이것이 실물경제로 전파될 우려가 컸지만 다행히 9월말 현재 그 영향력은 현저히 축소된 것 같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미국 부동산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차원의 신용리스크 확대이다. 주요국 통화당국의 금리인하 등 신속한 대처로 세계금융시장의 단기적인 안정성은 확보됐지만 신용불안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소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03년 이후 글로벌 유동성의 빠른 확대가 낳은 부작용이 여전히 남아있어 2008년에도 금융불안이 실물경제의 성장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도 2008년에는 새로운 정부의 출범과 국내외의 경제정책 변화 등 수많은 변화요인들이 상존한다. 이 가운데에서 경제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요인들을 가려내는 혜안이 필요하다. 2008년에는 5%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인데 문제는 지속성이다. 상반기에는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장세가 펼쳐지지만 하반기에는 빠른 경기후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직관이다. 가을은 사람들의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상상력이 배가되는 시기이다. 독서만큼이나 경제전망에도 더 없이 좋은 계절임에 틀림없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0-02
- [남북정상회담과 통일을 여는 사람들] ③ 고 윤이상 선생 부인 이수자 여사 “남북이 함께 민족의 음악가로 키워야” … 김정일 위원장, 한국 방문 축하선물 보내기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다음달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열린다. 이번 정상회담은 북핵문제 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가운데 열리는 것이어서 남북관계의 획기적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본지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금까지 통일을 위해 남다르게 헌신했던 인물들의 삶과 근황, 이번 회담에 대한 기대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여보 만족해요?” 이수자(80·사진) 여사는 ‘2007 윤이상 페스티벌’ 개막공연이 열리는 내내 마음속으로 남편 윤이상에게 끊임없이 물었다.“선생님께서 살아서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서 후배들이 자신의 음악을 이렇게 훌륭하게 연주하는 것을 보셨다면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지난달 16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만난 이 여사는 40년만에 조국을 찾아 감격적인 공연을 하는 동안 눈물을 쏟아냈다. 이날 공연은 40년의 세월만큼이나 어렵게 성사됐다. 격정적인 연주 과정에서 첼로의 4개 현 중 마지막 줄이 끊어져 잠시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을 찾았지만 = 이 여사의 이번 조국방문은 꼬박 40년만이다. 지난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부부가 함께 독일에서 강제로 국내로 끌려와 재판을 받고 이 여사는 같은 해 집행유예로 풀려나 독일로 추방된 후 40년만에 다시 남한 땅을 밟은 것이다. 동백림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1967년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학생들이 동독을 방문한 것을 이유로 간첩죄를 적용한 사건이다. 하지만 1969년 2년 형을 살다 풀려난 후 독일에서 망명객의 생활을 한 윤이상 선생은 끝내 살아서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영정만 돌아왔다. 70~80년대 윤이상 선생은 조국의 남쪽에서 철저히 간첩으로 몰렸다. 이들을 조국에서 등지게 했던 ‘동백림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여론몰이 사건의 하나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지난해 1월 “동백림 사건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확대해석 됐다”고 밝혔다. 윤이상 선생은 해외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이 사건을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분노의 사건”이라고 말했다. 화가 이응로는 동백림 사건을 겪고 나서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미치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 윤이상 선생은 1917년 경남 산청군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난 후 4세 때 통영으로 이사해 어린시절을 보냈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음악학교를 다닌 그는 1944년 징용 중 반일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부산 통영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1950년 부산사범학교 시절 같은 학교 국어과 교사였던 이수자와 결혼했다. 이 여사는 집안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 선생과 결혼을 강행했다. 전쟁 후 서울로 올라온 윤이상은 여러 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치다 1956년 유럽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을 거쳐 독일 서베를린 음악대학을 1959년 졸업한 그는 그 해 네덜란드의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프란시스 트라비스의 지휘로 초연했다. 이때부터 그는 유럽 현대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61년 이 여사가 독일로 건너오면서 이들은 본격적인 독일생활을 시작했다. 차곡차곡 예술적 성과를 쌓아 올라가던 즈음 1967년 ‘동백림 사건’이 터졌다. 1969년 석방 이후 이들의 삶에는 예술에 민주와 민족이 더해졌다. 1972년 뮌헨올림픽 문화행사로 오페라 ‘심청’ , 81년에는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초연했다. 1988년 독일정부로부터 ‘대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사랑하는 조국에게서 상처만 받은 사람 = 이 여사는 윤이상 선생이 세상을 뜬 1995년 이후 지금까지 귀국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남편의 복권과 한국 정부의 사과를 요구해왔다. 지난 5월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불행했던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윤이상 선생 및 유가족이 큰 고초를 겪은데 대해 사과한다”고 밝히면서 이 여사의 귀국은 빠르게 추진됐다. “윤이상 선생은 한국의 음악을 세계에 알린 음악계의 거장입니다. 동양적인 감수성과 서양의 철학을 결합해 150여곡을 작곡한 예술가로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린 건 분명 조국의 자랑입니다.” “독일의 베토벤,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조국은 윤이상 선생에게 평생 아픔만을 주었습니다. 조국을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에게 조국은 상처만 줬습니다.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이 여사는 “정부가 그의 위대한 작품들을 이용해 우리민족 고유의 정기를 널리 알려야 한다”며 “그것이 조국의 아들로 불우하게 죽어간 윤이상 선생에 대한 위로일 것”이라고 말했다. ◆냉전체제 무너지는 상징 = 이 여사는 지난달 10일 귀국 후 서울에서 ‘2007 윤이상 페스티벌’에 참석하고 청와대를 방문해 노무현 대통령도 만났다. 통영과 부산 등지를 돌면서 친척과 남편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이 여사의 고국 방문은 견고한 냉전체제를 유지하던 한반도의 급격한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이 여사는 오는 4일 방문을 끝내고 북한으로 간다. 이달 22일 북한 평양에서 열리는 윤이상 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현재 이수자 여사는 독일과 평양에 집을 두고 있다. 만약 남한에 또 하나의 집을 둔다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남북한에 집을 가진 사람이 된다. 이 여사는 “북한에서도 이번 방문에 대해 많은 것들을 보고 즐겁게 지내다 오라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았다”며 “김정일 위원장도 선물을 보내줬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에 있는 ‘윤이상관현악단’이 한국에서 연주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윤이상관현악단’은 북한에서 25년 된 악단으로 윤이상 선생이 직접 지도했다. 이수자 여사는 악단에서 고문직을 제안 받았지만 남북관계를 고려해 응하지 않고 있다. 그는 윤이상 선생을 빨갱이도 간첩단 두목도 아니라고 했다. 다만 민족을 사랑하고 통일을 간절히 바랬던 민족주의자였고 훌륭한 예술작품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였다고 강조했다. “이제 윤이상 선생이 세계적인 음악가로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전 민족이 도와줘야 합니다.” 절망만을 안겨줬던 조국에 이수자 여사가 바라는 소망이다. 특별취재팀 = 백만호 윤여운 김현경 김동수 기자 정주환(75) 남북코리아미술교류협의회 회장 지난 1991년 북경에서 남북작가들이 처음으로 ‘남북코리아성화전’을 개최했다. 2001년에는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기념해 북한작가 30여명이 참가해 ‘통일미술전’을 열기도 했다. 미술교류는 사람의 접촉이 필수적이다. 서로 만나 작품에 대해 얘기하고, 예술관 등을 툭 터놓고 말하면서 상호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인배(54) 민족예술인총연합 기획실장 민예총은 1989년 황석영 대변인이 방북하면서부터 북의 예술인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이후 일본 등 제3국에서 북한 예술인과 접촉을 지속해 왔다. 하지만 1994년 북의 ‘문학예술가총동맹과 합의한 코리아통일예술축전이 김일성 주석 사망 등으로 무산됐다. 최근에 다시 우리말사전 남북공동기획, 공동미술전시회, 윤이상 평화음악제 등을 통해 지난날의 노력이 성과를 보고 있다. 김형수(47)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작가의 조국은 모국어다’란 신념을 가지고 있다. 언어가 이질화되고 있는 것은 커다란 문제다. 북측 문인들과 함께 ‘통일사전’ 편찬 작업과 공동기관지 ‘통일문학’ 발행 작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금강산에서 남과 북인이 모여 ‘6·15민족문학인협회’를 결성하기도 했다.이번 제2차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문화교류가 확고하게 자리 잡기를 바란다. 김정민(39) 윤이상 평화재단 기획팀장 2007-10-01
- <윤장현 칼럼>한반도 절호의 기회. 정상회담(2007.10.01) 한반도 절호의 기회. 정상회담 윤장현 모두 다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0월의 첫 날이다. 고향을 찾아 부모님과 친척 , 친구들도 만나고 조상의 산소를 찾아 성묘도 드리고 먼 길을 되돌아 왔다. 아니면 동남아나 유럽등지에서 황금연휴를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 왔을 것이다. 떠남은 되돌아오기 위한 출발이요, 되돌아 왔기에 또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것이다. 떠남은 만남이다. 일상의 일탈 속에서 만나는 모든 것은 새로운 의미를 더해 간다. 사람이던 풍광이던 인심이던 음식이던 이로 인해서 우리 모두는 새로운 생동감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여유로운 향유 일수도 있고 새로운 접촉을 통한 학습 일수 도 있다. 그래서 모두들 재충전 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국민 모두가 해결해야 할 일상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정서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은 어느 때보다 재충전 되어있는 상태라 생각된다. 내일이면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위하여 주요 정부 고위관료, 기업총수, 사회단체를 망라한 대규모 방북단이 우리 땅을 달려 육로로 평양에 가는 것이다. 12월 대선을 앞둔 정상회담이라 이해득실을 계산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분명 대단한 사건이다. 돌이켜보면 근현대사의 여러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보더라도 정말 중요한 시점이다. 힘 없던 조선의 끝자락에 주위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급기야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했던 굴욕의 역사로 우리민족은 유린 당 했었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맞은 해방의 공간속에서도 미.소의 전략적 묵계 속에서 이 민족은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동족상잔의 피울음을 안고 정전체제로 남과 북이 대립한 채 지내온 세월이 얼마 였던가. 그러나 오늘 우리는 민족의 미래를 스스로 풀어갈 수 있는 드문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로 생각 될 수 있는 것이 남과 북은 물론 세계를 긴장 시켰던 북의 핵문제가 미국을 비롯한 주위의 열강들을 6자회담으로 하나의 테이블에 머리를 맞대게 하였다. 문제를 풀어가는 결과에 따라서 극적으로 북이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고 북.미 간의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고 정상적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어 협력 해가는 상황을 기대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의 진행결과에 따라서 남과 북의 문제는 상호 연동되어 일시에 대립적 적대 관계에서 협력적 상생관계로 발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협력적 상생관계로 발전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이념적 대립으로 사회통합을 가로막았던 경계가 무너질 것이요, 군비경쟁을 줄일 수 있다면 국가의 경쟁력은 여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며 , 남과 북이 경제적으로 윈.윈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남쪽의 경제도 활성화 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맞게 될 것이다. 당연히 긴 호흡으로 본다면 북의 긴박한 경제상황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어 그만큼 미래의 남쪽 부담도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대승적 미래지향적 문제로 이 상황을 풀어 가야 한다는 점이다. 형식적으로는 집권 여당과 대통령이 어설픈 위상과 관계에 놓여 있지만 이는 눈가림일 뿐이다. 그러니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는 훗날 역사에 부끄럽지 않게 긴 호흡으로 남과 북의 현안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 해야 함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뭐라 해도 정치적인 이해득실은 현 집권 여당의 몫이고 다가오는 대선에 상당한 이해로 더해질 것은 눈과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이다. 양보가 됐던 퍼주기가 됐던 관점에 따라서 논란이 많겠지만 당연히 중요한 뇌관인 북핵 문제에 대해서 당당하게 설득하여 모처럼 형성된 국제관계의, 국제사회의 긍정적 상황에 응답하여 확실히 물고를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그래야만 북미관계의 개선과 평화협정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틀 만 진정성 있게 짜여 진다면 남은 문제는 종속변수일 수 있다. 당연히 한나라당에서는 일말의 의심과 불안감을 숨 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민생문제와 경제문제가 현실적으로 중요하다 하더라도 민족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에 이를 외면하거나 딴지를 거는 행태로 간다면 수권정당이 될 수 없다. 일시적 상황의 이해득실에서 아쉬움이 있더라도 일에는 때가 있고 이 때를 놓쳐선 안되기 때문이다. 차기정부에서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유리한 이해로만 가져가겠다는 역논리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수권정당으로서 국정을 걱정한다면 당연히 현 정권하에서 진행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로 얻어 질 수 있는 이해를 담아 낼 수 있는 더 큰 그릇을 준비해야 될 것이다. 이 점을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후보가 고민해야 될 부분이다. 그래야만 국가와 민족을 위한 포지티브 게임이 더욱 진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만이 우리 민족에게 선진국으로 향할 수 있는 큰 길이 열 릴 수 있을 것이다. 친북 빨갱이 좌파와 친미 꼴통 우파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통합이 가능할 것이며 선진국 진입이 가능 하겠는가 !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북핵의 화약고를 등 뒤에 두고 대립과 갈등이 상존한 채 안정된 경제도약을 담보 할 수 있겠는가 ! 결코 민생과 경제의 문제가 남북의 문제와 대립될 수 없으며 우선순위를 정할 일도 아니다. 함께 풀어가야 할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한반도에 찾아 온 것이다. 결실의 계절 10월에 민족 문제의 결실을 얻어낼 수 있도록 모두가 재충전된 힘을 모을 때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0-01
- 해외 인도 고급인력 “집으로” 지난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6·15 공동선언’을 통해 남과 북의 통일방안에 대해 초보적인 합의를 했습니다. 선언문 제2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북측이 제안한 것으로 명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이미 1989년 3월 북한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가 당시 김일성 주석에게 제안한 내용으로 알려졌습니다. 문 목사는 김 주석과 회담에서 연방제 통일의 단계적 추진을 강조하면서 1단계로 남과 북의 정부가 군사와 외교권까지 독립적으로 행사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때까지 북한은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제기하면서 남과 북의 연방정부가 군사·외교권을 행사하는 높은 단계의 연방제를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문 목사의 단계적 연방제 방안은 실제로 김 주석이 91년 신년사에서 ‘느슨한 연방제’를 제기하면서 북한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느슨한 연방제’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제기한 남과 북 지방정부의 군사와 외교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실제로 문 목사는 당시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김 주석에게 ‘고려연방제만 주장하다가는 통일은 부지하세월인데 분단의 치욕이 50년을 넘으면 안된다’고 말했다”며 “김 주석은 한참 생각하더니 ‘좋습니다’라는 한마디로 나의 통일 ‘1단계’를 수용할 뜻을 비쳤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문 목사는 방북과정에서 북측의 지도부가 경직된 대남 통일노선을 수정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문 목사와 함께 방북했던 유원호(77)씨는 “문 목사가 김 주석과 만나서 ‘나는 개인자격으로 온 것 아니냐, 통일에 대한 열의가 있다면 남쪽의 대통령과 직접 만나라’라고 조언했다”며 “이에 김 주석이 ‘좋다. 지금까지 대통령으로 인정해 본 적이 없는데 노태우를 노 대통령으로 부르고 통일에 대한 협상을 하겠다’고 답하더라”며 두사람의 회담 뒷얘기를 전했습니다. 역시 북한은 문 목사와의 회담이후 남쪽 노태우정권과 여섯 차례의 총리급 고위회담을 통해 91년 12월 남과 북 사이 화해와 불가침 등의 내용을 담은 ‘남북 기본합의서’에 합의하고 국회(최고인민회의)의 비준까지 받았습니다.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문 목사의 방북은 당시 한국사회를 크게 흔들었습니다. 1988년 ‘남북청년학생회담’을 둘러싼 통일논의와 함께 서경원 의원과 소설가 황석영씨의 방북으로 통일문제를 둘러싼 긴장감이 팽배한 때에 터져 나온 문 목사의 방북은 남한사회에 통일문제가 현실적 과제임을 인식시켰습니다. 또한 노태우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당시 터져 나오던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투쟁을 탄압하는 ‘공안정국’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문익환 목사는 김 주석과의 회담에 이어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9개항의 ‘4·2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4·2 공동성명의 주요내용인 △7·4 남북공동성명의 기본 정신인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원칙 확인 △2개의 조선정책 반대와 통일조국 지향 △정치·군사적 대결 해소와 다방면의 민간교류 실현 △남북공존 원칙에 기초한 합리적 통일방안 모색 등은 이후 남북기본합의서 등에 적극 반영됐습니다. 특별취재팀 2007-09-28
- 문익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첫 공론화 지난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6·15 공동선언’을 통해 남과 북의 통일방안에 대해 초보적인 합의를 했다. 선언문 제2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북측이 제안한 것으로 명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이미 1989년 3월 북한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가 당시 김일성 주석에게 제안한 내용으로 알려졌다. 문 목사는 김 주석과 회담에서 연방제 통일의 단계적 추진을 강조하면서 1단계로 남과 북의 정부가 군사와 외교권까지 독립적으로 행사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때까지 북한은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제기하면서 남과 북의 연방정부가 군사·외교권을 행사하는 높은 단계의 연방제를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문 목사의 단계적 연방제 방안은 실제로 김 주석이 91년 신년사에서 ‘느슨한 연방제’를 제기하면서 북한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으로 자리 잡았다. ‘느슨한 연방제’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제기한 남과 북 지방정부의 군사와 외교권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문 목사는 당시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김 주석에게 ‘고려연방제만 주장하다가는 통일은 부지하세월인데 분단의 치욕이 50년을 넘으면 안된다’고 말했다”며 “김 주석은 한참 생각하더니 ‘좋습니다’라는 한마디로 나의 통일 ‘1단계’를 수용할 뜻을 비쳤다”고 말했다. 이처럼 문 목사는 방북과정에서 북측의 지도부가 경직된 대남 통일노선을 수정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문 목사와 함께 방북했던 유원호(77)씨는 “문 목사가 김 주석과 만나서 ‘나는 개인자격으로 온 것 아니냐, 통일에 대한 열의가 있다면 남쪽의 대통령과 직접 만나라’라고 조언했다”며 “이에 김 주석이 ‘좋다. 지금까지 대통령으로 인정해 본 적이 없는데 노태우를 노 대통령으로 부르고 통일에 대한 협상을 하겠다’고 답하더라”며 두사람의 회담 뒷얘기를 전했다. 역시 북한은 문 목사와의 회담이후 남쪽 노태우정권과 여섯 차례의 총리급 고위회담을 통해 91년 12월 남과 북 사이 화해와 불가침 등의 내용을 담은 ‘남북 기본합의서’에 합의하고 국회(최고인민회의)의 비준까지 받았다.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문 목사의 방북은 당시 한국사회를 크게 흔들었다. 1988년 ‘남북청년학생회담’을 둘러싼 통일논의와 함께 서경원 의원과 소설가 황석영씨의 방북으로 통일문제를 둘러싼 긴장감이 팽배한 때에 터져 나온 문 목사의 방북은 남한사회에 통일문제가 현실적 과제임을 인식시켰다. 또한 노태우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당시 터져 나오던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투쟁을 탄압하는 ‘공안정국’을 조성하기도 했다. 한편 문익환 목사는 김 주석과의 회담에 이어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9개항의 ‘4·2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4·2 공동성명의 주요내용인 △7·4 남북공동성명의 기본 정신인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원칙 확인 △2개의 조선정책 반대와 통일조국 지향 △정치·군사적 대결 해소와 다방면의 민간교류 실현 △남북공존 원칙에 기초한 합리적 통일방안 모색 등은 이후 남북기본합의서 등에 적극 반영됐다. 특별취재팀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9-27
- <신문로 칼럼>한반도 절호의 기회. 정상회담(윤장현 2007.10.01) 한반도 절호의 기회. 정상회담 윤장현 모두 다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0월의 첫 날이다. 고향을 찾아 부모님과 친척 , 친구들도 만나고 조상의 산소를 찾아 성묘도 드리고 먼 길을 되돌아 왔다. 아니면 동남아나 유럽등지에서 황금연휴를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 왔을 것이다. 떠남은 되돌아오기 위한 출발이요, 되돌아 왔기에 또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것이다. 떠남은 만남이다. 일상의 일탈 속에서 만나는 모든 것은 새로운 의미를 더해 간다. 사람이던 풍광이던 인심이던 음식이던 이로 인해서 우리 모두는 새로운 생동감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여유로운 향유 일수도 있고 새로운 접촉을 통한 학습 일수 도 있다. 그래서 모두들 재충전 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국민 모두가 해결해야 할 일상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정서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은 어느 때보다 재충전 되어있는 상태라 생각된다. 내일이면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위하여 주요 정부 고위관료, 기업총수, 사회단체를 망라한 대규모 방북단이 우리 땅을 달려 육로로 평양에 가는 것이다. 12월 대선을 앞둔 정상회담이라 이해득실을 계산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분명 대단한 사건이다. 돌이켜보면 근현대사의 여러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보더라도 정말 중요한 시점이다. 힘 없던 조선의 끝자락에 주위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급기야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했던 굴욕의 역사로 우리민족은 유린 당 했었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맞은 해방의 공간속에서도 미.소의 전략적 묵계 속에서 이 민족은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동족상잔의 피울음을 안고 정전체제로 남과 북이 대립한 채 지내온 세월이 얼마 였던가. 그러나 오늘 우리는 민족의 미래를 스스로 풀어갈 수 있는 드문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로 생각 될 수 있는 것이 남과 북은 물론 세계를 긴장 시켰던 북의 핵문제가 미국을 비롯한 주위의 열강들을 6자회담으로 하나의 테이블에 머리를 맞대게 하였다. 문제를 풀어가는 결과에 따라서 극적으로 북이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고 북.미 간의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고 정상적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어 협력 해가는 상황을 기대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의 진행결과에 따라서 남과 북의 문제는 상호 연동되어 일시에 대립적 적대 관계에서 협력적 상생관계로 발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협력적 상생관계로 발전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이념적 대립으로 사회통합을 가로막았던 경계가 무너질 것이요, 군비경쟁을 줄일 수 있다면 국가의 경쟁력은 여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며 , 남과 북이 경제적으로 윈.윈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남쪽의 경제도 활성화 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맞게 될 것이다. 당연히 긴 호흡으로 본다면 북의 긴박한 경제상황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어 그만큼 미래의 남쪽 부담도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대승적 미래지향적 문제로 이 상황을 풀어 가야 한다는 점이다. 형식적으로는 집권 여당과 대통령이 어설픈 위상과 관계에 놓여 있지만 이는 눈가림일 뿐이다. 그러니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는 훗날 역사에 부끄럽지 않게 긴 호흡으로 남과 북의 현안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 해야 함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뭐라 해도 정치적인 이해득실은 현 집권 여당의 몫이고 다가오는 대선에 상당한 이해로 더해질 것은 눈과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이다. 양보가 됐던 퍼주기가 됐던 관점에 따라서 논란이 많겠지만 당연히 중요한 뇌관인 북핵 문제에 대해서 당당하게 설득하여 모처럼 형성된 국제관계의, 국제사회의 긍정적 상황에 응답하여 확실히 물고를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그래야만 북미관계의 개선과 평화협정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틀 만 진정성 있게 짜여 진다면 남은 문제는 종속변수일 수 있다. 당연히 한나라당에서는 일말의 의심과 불안감을 숨 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민생문제와 경제문제가 현실적으로 중요하다 하더라도 민족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에 이를 외면하거나 딴지를 거는 행태로 간다면 수권정당이 될 수 없다. 일시적 상황의 이해득실에서 아쉬움이 있더라도 일에는 때가 있고 이 때를 놓쳐선 안되기 때문이다. 차기정부에서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유리한 이해로만 가져가겠다는 역논리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수권정당으로서 국정을 걱정한다면 당연히 현 정권하에서 진행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로 얻어 질 수 있는 이해를 담아 낼 수 있는 더 큰 그릇을 준비해야 될 것이다. 이 점을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후보가 고민해야 될 부분이다. 그래야만 국가와 민족을 위한 포지티브 게임이 더욱 진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만이 우리 민족에게 선진국으로 향할 수 있는 큰 길이 열 릴 수 있을 것이다. 친북 빨갱이 좌파와 친미 꼴통 우파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통합이 가능할 것이며 선진국 진입이 가능 하겠는가 !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북핵의 화약고를 등 뒤에 두고 대립과 갈등이 상존한 채 안정된 경제도약을 담보 할 수 있겠는가 ! 결코 민생과 경제의 문제가 남북의 문제와 대립될 수 없으며 우선순위를 정할 일도 아니다. 함께 풀어가야 할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한반도에 찾아 온 것이다. 결실의 계절 10월에 민족 문제의 결실을 얻어낼 수 있도록 모두가 재충전된 힘을 모을 때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9-28
- [밥일꿈]가을 단상(斷想) 가을 단상(斷想) 장상길 (경북도청 과학기술정책 담당) 참 더웠지요. 한 10년 여 만에 처음 맞는 무더위였던 것 같은데요. 우리 직원 중 누가 올 여름을 보내고 던지던 말이다. 그렇지 그때였다. 나의 빛나던 청춘의 막바지(?) 20대말, 졸업하고 사회의 첫발을 디딘 이듬해 맞이한 94년의 여름. 아스팔트 위에 계란이 익어가는 장면을 뉴스에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유유히 서울 거리를 활보하던 펄펄 끓던 젊음 만큼 뜨거웠을까? 그 때는 결코 가을이 이렇게 감상적이지 않았건만! 그런데(선배님들껜 죄송하지만) 하마 불혹도 두해를 넘긴 나이다. 남자의 계절, 이 가을! 밤새 가위 눌렸다. 이놈의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일가지고 걱정해본 적은 없는데 꿈결에 헛소리를 했는지 아내가 놀란다. 일은 집에 가져오지 않는 것이 철칙인데 맙소사 꿈결에 까지 들고 오다니! 깝깝하다. 찾아도 답이 없다. 길 없는 길을 가야만 하는 이 심정 누가알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갑자기 일은 왜 이리 또 몰리는 지. 터널이 끝나는가 싶더니 또 하나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다. 오 신이시여! 잠든 처자식의 얼굴을 보며 후다닥 한 그룻 국에 아침을 해치우고(?) 시동을 건다. 오늘도 우리 중 누구는 모두가 잠든 새벽 길로 출근을 재촉하고 또 누군가는 비로소 사랑하는 처자식의 꿈길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직 서쪽 하늘에 걸린 달을보며 새벽일을 나가시던 우리 아버지. 그 길을 따라 간다. 추석이다. 그립다. 나도 비로소 아버지인가 보다. 아버지! 가을은 인사철이다. 최근 경북도도 청내 직원 인사로 잠시 어수선 하였다. 공무원 이라는게 종이 한 장에 왔다 갔다 하는 자리인 만큼 떠날 때는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마무리는 깔끔하게 뒷사람에게 누를 끼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원하는 자리를 고집해서도 안된다. 바램은 종이 한 장의 무게만큼만. 보따리를 들고 아래층 위층으로 자리를 바꾸고 새로운 업무를 익히고 새 사람과 인연의 물꼬를 터느라 분주하다. 오랜만에 다시 반가운 해후의 손을 잡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는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하고 또 누구는 꼬인 인연을 풀려고 고심한다. 어쨌든, 사람들아 제발 남의 말 좀 좋게 하고 살자꾸나. 입술이 닳도록! 낮에 오랜 만에 옥상엘 올랐다. 가을 햇살이 따갑다. 그래도 멀리 앞산을 바라보니 가슴이 탁 트였다. 아쉬운 건 신천의 물줄기는 세월 따라 자꾸 가늘어 지고 그 옛날 대구 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던 침산의 장엄한 노을은 나날이 높아가는 아파트에 왜소해져만 간다. 천고마비, 아니다 비만관리의 엄숙한 계절이다. 젊은 날의 꿈은 더욱 새록새록하고 그리운데 한번 나온 배는 들어가지 않는다. 살이 어데 몸에만 찐다더냐. 욕심이 더덕더덕 마음도 뒤뚱거린다. 올 가을엔 세심원, 뒷동산 대나무처럼 몸도 마음도 쭉쭉 뻗어 보리라. 기필코, 텅빈 충만을 이루게 하소서!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9-17
- [밥일꿈]새 일터에서의 단상 새 일터에서의 단상 김윤기 (대신경제연구소 경제조사실장) 얼마 전 국책경제연구기관에서 여의도 증권가의 민간경제연구소로 이직하였다. 10년 만에 밥벌이 터를 옮겼다. 비록 박봉이지만 준공무원 신분과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롭고 무엇보다 상아탑을 연상케 하는 직장 분위기를 박차고 나서기는 쉽지 않았다. 90년대 초, 졸업을 앞두고 여의도에 본사가 있는 모공사에 입사원서를 제출하러 상경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빌딩이 즐비만 여의도 금융가에서 직장을 갖고 폼 나게 근무하는 게 나같은 경제 관련 전공자들의 작은 소망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당시에 여의도 입성은 못해 늘 가슴 한구석엔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이후 대기업 본사에 운 좋게 입사한 뒤 세 달도 못 채우고 대학원 진학을 하게 되었고 졸업과 동시에 국책연구원의 연구원이 되었다. 때마침 건국이래 최대의 경제위기를 겪는 해인 97년부터 하루 하루를 정신 없이 보냈지만 국가경제의 난국을 헤쳐가는데 일조한다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했다. 연구실 마다 미니 국기를 책상 앞에 꽂아두고 투철한 국가관으로 뭉쳐진 양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고 그 때를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당시 우리 나라 거시경제 분야의 주요 쟁점들을 다루고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중요한 일에 미력하나마 참여하고 IMF의 위기 극복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본 일은 국책연구원에서 일한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세월이 변한 건지 사람이 변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연구원 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지고 뭔가 변화를 갈구할 시점에 때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망설임이 없진 않았지만 이미 많은 선후배들이 여의도 증권가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들로부터 익히 많은 얘기를 듣고 권유도 있었던 터라 결정은 빨랐다. 벌써 새로운 일터로 온지 두 달이 지나가고 있다. 전과 달라진 생활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자정이 가까워서야 퇴근하는 생활이 반복된다는 것이고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퇴근하면서 가로등이 켜진 한강을 바라보며 강변을 달릴 때 왠지 모를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끔 가슴이 벅차 오를 때가 있다. 14년 전 사회 초년생으로 첫 발을 내딛고자 했던 이곳을 먼 길을 돌아서 이제야 정착한 느낌이 들기 때문일까? 바빠진 생활로 몸은 피곤하지만 가슴은 사회초년병처럼 늘 긴장되고 한편으론 재미있기도 하다. 오늘도 여의도의 늦은 밤 빌딩 숲 사이로 불빛은 밝게 빛나고 있다. 팽팽한 긴장감과 빠르게 돌아가는 일 처리 그리고 경쟁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받아들여지지만 이 모두가 나에게는 새로운 일터가 가져다 주는 기쁨으로 느껴진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9-13
- 운명이 비슷한 이어도와 가거초 마라도에서 서남쪽으로 4시간동안 쾌속선을 타고가야 만날 수 있는 이어도와 가거도에서 서쪽으로 뱃길따라 48km를 가야 닿을 수 있는 가거초는 운명이 비슷하다. 이어도는 망망대해에 솟구쳐 있는 수심 50m의 해산으로 그 정상은 수심이 4.6m에 불과한 암초로 알려져 있다. 가거도도 높낮이 차이가 최대 50m인 기둥모양의 암석으로 이뤄져 있다. 이어도를 놓고 한일간 신경전을 벌이는 것처럼 가거초의 역사도 비슷하다. 이어도는 해녀들의 구전으로 존재가 알려졌지만, 가거초의 존재는 1927년 일본 군함에 의해 빛을 봤다. 일본은 일본군함 ‘일향’호가 가거초에 부딪치는 사고가 나자 이 암초의 이름을 ‘일향초’로 지었다. 세월이 지나 일본이름으로 살아온 가거초를 딱히 여긴 주민들은 해양지명위원회에 요구해 가거초의 국적을 되찾았다. 물론 배타적경제수역을 설정하는 기준이 되지 못하지만 80년간의 ‘창씨개명’된 이름을 제대로 찾아준 것이다. 두 ‘섬’ 모두 시야가 좋으면 배 밑에 모습을 드러내고 다양한 수중생물이 서식하고 있어 바닷속 생태계를 관찰하기에 적합하다. 자원과 기상 해양 정보를 수집하는 주요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오승완 기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