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집에서 쉬어도 매달 566만원씩 받아요 경북도 행자부, 고위공무원 8개월째 방치 인사발령 안나 독서 여행으로 소일하는 '재택근무' 집에서 책을 읽거나 여행을 다니면서 매달 500만원 이상 월급받는 '부러운' 공무원이 있다. 백준호씨는 경북도청의 부이사관급 공무원이지만 출근을 하지 않는다. '선진지' 여행을 이나 집에서 책을 읽으며 '재충전'을 하는 게 일이라면 일이다. 그래도 매달 566만원씩 월급은 꼬박꼬박 나온다. 벌써 8개월째다. 백씨는 공식적으로 '공무원' 신분이다. 경북도청 자치행정과 '대기발령' 중인 부이사관급 공무원이다. 동시에 단서조항에 행정자치부 요원이라고 규정돼 있다. 그러나 그는 경북도청에도 출근하지 않고 행정자치부에도 나가지 않는다. 경북도와 행자부 어느 쪽에서도 관리감독을 하지 않는다. 그는 지난해 12월 중순 고위정책반 공무원 교육을 마친 뒤 지금까지 ‘놀고 먹고’ 있다. 행자부와 경북도간 엇박자 인사로 얻은 '행운'이다. 경북도는 최근 두차례 단행된 간부인사에서 백씨를 제외시켰다. 행자부에서 백씨를 받기로 구두약속했다는 이유에서다. 행정자치부는 경북도와 인사교류 요인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백씨는 “충분히 재충전을 하고 있다”며 “팀장이나 계장급 처럼 자리가 많지 않아 행자부 전출이 쉽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하는 일은 없지만 직책이 높은지라 월급은 많다. 백씨가 지난 8개월 동안 받은 급여는 4528만원. 월 평균 566만원에 달한다. 행자부와 지자체간 인사 시기가 맞지 않아 한 두달정도 대기하는 경우는 종종 발생하지만 백씨처럼 반년이상 재택근무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경북도청 공무원 노동조합은 2일 성명서를 내고 “백준호 부이사관이 보직없이 8개월간 봉급받으며 집에서 허송세월하고 있는 건 도민 혈세 낭비"라며 "인사가 늦어지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해 그 피해는 전체 하위직에게 오롯이 전가되고 있다”고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경북도 자치행정과 관계자는 “행자부 국장급 인사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발령이 미뤄지고 있다”며 “8월 중 실시될 예정인 행잡 고위직 인사에는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행정자치부 관계자는 “행자부 국장급 간부의 인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경북도와 인사교류도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아 백씨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조만간 단행될 행자부 인사에 반영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8-03
- 튀니지 : 한니발과 올리브의 나라 튀니지 : 한니발과 올리브의 나라 주튀니지대사관 참사관 유복렬 ‘푸른 바다’라는 단순한 관용구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하고 오묘한 색깔, 청명하고도 눈부신 쪽빛, 튀니지는 바로 그런 색의 지중해로 둘러싸인 나라다. 튀니지가 분명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해 있음에도 튀니지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아프리카나 중동 국가로 표현하는 것을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누군가 튀니지를‘지중해의 카페’라고 불렀듯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튀니지는 분명히 지중해 문화권의 특색이 강하기 때문이다. 튀니지의 역사는 BC 9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중해 무역상으로 유명한 페니키아인들이 현재의 수도인 튀니스 인근에 도시를 건설한 것이 바로 로마와의 포에니전쟁으로 유명한 “카르타고 제국”이다. 카르타고산 무화과 열매를 맛본 당시 로마인들이 이 기막히게 맛좋은 과일을 생산할 수 있는 비옥한 땅을 욕심냈다는 일화가 말해주듯이, 당시 최고의 곡창지대로 불렸던 튀니지는 지금도 온통 초록의 밀밭과 오렌지, 레몬, 석류, 무화과, 수박, 메론, 복숭아 등 갖가지 과일들이 제철이면 쏟아져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카르타고는 한때 로마제패를 평생의 꿈으로 삼고 약관 29세의 젊은 나이에 코끼리떼를 몰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무려 16년 동안이나 이탈리아 땅에서 종횡무진하며 로마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당대 최고의 무장 “한니발”의 고향이기도 하다. 당시 로마인들은 지중해 맞은편에 위치한 막강한 해운국이자 곡창지대로 로마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카르타고 시민을 “아프리”라고 불렀고 카르타고를 정복한 후에는 이곳을 “아프리카주”로 명명했다. 결국 “아프리카”라는 말은 현재의 튀니지를 지칭했던 것이다. 불행히도 현재의 튀니지에서 3천여년전 로마제국을 넘보았던 한니발 장군의 발자취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당시 카르타고를 부유하게 만들었던 해운 중심지 “캅 봉”반도는 봄이면 오렌지꽃이 만발하고 정어리잡이 축제로 떠들썩한 농수산업의 본산지가 되었고, 6-10월에 걸쳐 내내 작열하는 태양과 쪽빛 바다속에 몸을 맡기는 관광객들이 튀니지 모든 해변을 점령해 버린다. 2006년 한해동안 튀니지를 방문한 관광객수는 총 665만명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중 이집트(960만명), 남아공(840만명)에 이어 3위다. 우리나라 관광객수도 아직은 연간 천여명에 불과한 수준이지만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실제로 튀니지 정부는 관광산업 육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튀니지는 온건이슬람주의를 표방하고 1957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당시 아랍국가들중 최초로 일부일처제를 헌법에 명시한데 이어 1987년에는 호주제를 폐지하는 등 여성지위 향상에 있어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여름이면 튀니지 젊은 여성들은 유럽여성들보다도 더 자유로운 복장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이러한 개방된 사회 분위기는 테러조직과 같은 이슬람 과격분자를 철저히 배격하는 반폭력주의와 연결된다. 안정된 정치정세와 개방적 사회분위기야말로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핵심이라는 사실을 튀니지 정부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튀니지는 파란 바다와 짙녹색의 올리브나무, 그리고 사막, 이 3가지 색채가 어우러진 다채로운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눈부신 해안선을 끼고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나무들 사이로 나있는 도로를 달리다보면 감탄사가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뜨거운 태양아래 지중해바람을 맞으며 오랜 세월 뿌리내린 올리브나무에 빈자리 없이 촘촘히 열리는 튀니지 올리브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하지만 여타 올리브 생산국에 비해 저조한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대부분의 올리브원액을 이탈리아나 스페인으로 수출하고 튀니지산 완제품 수출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스타워즈”, “잉글리쉬 페이션트” 등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남부 사막지역은 한여름철을 제외하고는 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눈부신 태양과 바다, 북쪽의 산악지대, 남쪽의 사막지대, 천혜의 관광자원을 가진 튀니지를 사랑했던 마티스, 클레, 르노와르 같은 화가들과 플로베르, 지드 같은 문인들은 모두 바로 이러한 튀니지의 색깔과 다양한 문화를 찬미했다. 앙드레 지드가 드나들면서 명상하고 집필했던 수도 튀니스 근처 바닷가 마을 “시디 부 사이드”에 있는 카페에는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의 숨결을 느끼면서 반짝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사색의 시간속으로 빠져든다. 튀니지의 관광자원은 전세계 관광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튀니지는 이 관광산업 육성을 통해 제2의 카르타고 시절로의 도약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끝/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8-23
- [4대강 집중탐사]낙동강 밀양을 거쳐 부산 하구둑까지 지자체마다 앞다퉈 골재채취 … 하천부지 농약·비료에 가축분뇨까지 뿌려 도동서원 아래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낙동강변에는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골재채취사업장이 있다. 이 사업장은 강물 속에서 채취한 골재를 자갈과 모래로 분리한 뒤 거기서 쏟아지는 폐수를 그대로 낙동강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아무리 자정력이 뛰어난 모래라고 해도 이렇게 뒤집어놓으면 머금었던 오염물질들을 토해놓지 않을 재간이 없다. 더욱이 진공펌프식 흡입기계로 강바닥에 깊은 웅덩이를 만들어놓으면 각종 오염물질들이 제대로 흘러내려가지 못하고 쌓이게 된다. 낙동강 중·하류권에는 지자체마다 골재채취가 한창이다. 골재채취는 안정된 수생 수변 동식물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생태교란의 주범으로 지목된다. ◆안동에서 부산까지 고도차이 불과 80m = 골재채취가 유속이 느린 구미 이남의 낙동강 중·하류에서 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 국립환경과학원 낙동강물환경연구소에 따르면 낙동강 수계에서 골재채취를 하는 지역은 모두 50곳으로 △부산시 2곳 △대구시 7곳 △경상북도 29곳 △경상남도 12곳 등이다. 특히 집중적인 채취는 △구미시 4곳 △칠곡군 6곳 △고령군 6곳 △대구시 달성군 7곳 등 대부분 구미 하류-밀양 상류 구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낙동강은 발원지인 태백이나 봉화 일대까지는 해발고도가 높지만 안동(낙동강-반변천 합수지점)으로 내려오면 평균하상 높이가 82.85m로 뚝 떨어진다. 안동에서 부산까지 긴 거리를 100m도 채 안 되는 고도 차이로 흘러가야 하는 셈이다. 낙동강의 평균하상 높이는 아래로 갈수록 급격히 낮아진다. 예천 삼강나루(내성천 합수지점)에서 50.12m로 낮아진 낙동강은 대구 화원나루(금호강 합수지점)에서는 20.57m로, 밀양(밀양강 합수지점)에서는 1.91m까지 낮아진다. 이렇게 낮은 고도 차이로 흘러가면서 오염물질을 정화하기란 강으로서도 힘든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골재채취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강의 자정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낙동강물환경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골재채취, 특히 수중골재 채취는 부유물질을 과도하게 발생시켜 수질을 악화시키고 빛 투과율을 떨어뜨려 수생태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또 지자체의 수익사업이다보니 과다하게 채취되는 경향이 있고 지자체 간의 골재채취업무에 관한 연관성이 없어 하천 상·하류 구간의 평형이 깨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대부분 ‘흡입식’ 기계를 사용하기 때문에 하천단면에 연속적으로 깊은 단면(웅덩이)을 형성, 또다른 하상교란의 문제를 초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변화는 나아가 하상을 낮추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건교부 하천정비기본계획에 따르면 실제 낙동강 하상은 최대 1.64m(금호강 합수지점)까지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제방이 침식되고 교량의 기초가 드러나는 등 토목 안전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골재채취에 대한 환경영향평가와 사전환경성검토가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이는 식물플랑크톤과 어류 등 수서생물상의 감소만 다루고 있을 뿐, 수서 생태계의 종 다양성 등 종합적인 연구는 아직 전무한 실정이다. 낙동강물환경연구소 신찬기 소장은 “골재채취로 훼손된 강의 생태계가 회복되려면 2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며 “외국에서는 하천 내 골재채취를 금지하거나 매우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강보다 강수량 400mm 적어 = 낙동강은 구조적으로 오염에 취약한 조건에 놓여 있다. 하류인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된 한강과는 달리 낙동강유역에는 중·상류부터 많은 사람들이 산다. 특히 구미와 대구부터는 도시지역 뿐 아니라 농촌지역도 심각한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낙동강 오염의 중심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낙동강 제방 안 하천부지를 점령한 시설재배용 비닐하우스들은 1년에 최고 6회까지 농작물을 생산한다. 이런 시설들은 엄청난 비료와 관개용수를 소모한다. 각종 비료에서 녹아나오는 ‘질소’와 ‘인’도 낙동강의 부영양화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인의 경우, 고도처리가 아닌 일반적인 하수처리과정을 거치면 부영양화가 더 빨리 진행된다는 점에서 자연친화적인 농사법이 시급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낙동강변 경작지에서는 가축분뇨를 액비나 고형분 형태로 사용하는 지역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뿌려진 축분비료는 큰비가 오면 그대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오염원이 많은 낙동강 수질에서 가장 큰 변수는 ‘수량’이다. 특히 갈수기에는 상류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안동댐과 임하댐 방류수)의 양이 수질을 크게 좌우한다. 그런데 낙동강 상류지역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사이에 숨어 있어 한강유역에 비해 연간 강수량이 400mm 정도 적다. ‘낙동강특별법’으로 많은 제약을 받게 되는 상류지역 주민들이 이 법에 손을 들어 준 것도 낙동강이 갖고 있는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똥물은 좋다. 독극물만 내려보내지 마라” = 낙동강을 따라가며 보라. ‘안동 똥물 대구 먹고, 대구 똥물 부산 먹는다’는 옛 어른들의 농담이 그대로 현실로 다가온다. 낙동강 페놀사건과 일사다이옥산 등 각종 유해물질 파동 이후 요즘 부산 사람들은 이 농담을 “똥물은 좋다. 독극물만 내려보내지 마라”로 바꾸었다고 한다. 부산은 낙동강 최종취수지인 매리와 물금취수장을 통해 전체 상수원수의 90% 이상을 공급받는다. 여름철이면 이틀이 머다하고 녹조현상이 발생하는 이곳의 정수과정은 중부권의 취수장과는 다르다. 염소와 오존, 입상활성탄을 정수과정에 첨가시켜야 마실 수 있는 물이 만들어진다. 부산의 시인 이동순은 낙동강을 이렇게 노래한다. … 탁한 강물을 마셔서/ 마음조차 흐려진 이곳 강 유역의 주민들은 … 밤마다 그들의 목을 휘감아오는/ 저 차고 무거운 쇠사슬이/ 사실은 죽은 강줄기의 망령임을/ 소스라쳐 깨어서도 눈치채지 못한다 … 취재에 도움 주신 분들 낙동강물환경연구소 대구지방환경청 해성수중 낙동강유역환경청 협찬 환경부 해양수산부 한국수자원공사 경기도 경상북도 대구시 성남판교수질복원센터 대구 밀양 부산 = 글 사진 전호성 남준기 기자 hsjeon@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7-26
- 3면용 한나라당 이명박 “최태민 의혹 밝혀라” 박근혜 “은닉재산 분명 있다” 이명박-박근혜 양측은 청문회 이후 강도 높은 2차 검증을 통해 대세를 결정 짓겠다고 벼르고 있다. 2차 검증의 후보군은 이미 청문회에서 어느정도 걸러진 상태다. 양측은 청문회에서 제기된 의혹을 중심으로 상대방을 맹공하겠다는 복안이다. 이 후보측이 향후 박 후보 공격소재로 꼽는 것은 △고 최태민 목사건 △영남대 강취 △육영재단 파행운영 △정수장학회 의혹 등이다. 최태민 목사건은 신분이 불투명한 그가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던 박 후보를 앞세워 부정축재했다는 의혹이다. 문제있는 측근을 오랜 세월 비호하고 최근에도 감싸안는 것은 대통령 자격에 문제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영남대 강취의혹은 박 후보가 29세의 어린 나이에 영남대 이사장이 된 과정과 측근 4인방이 전횡을 일삼았다는 내용이다. 육영재단 의혹은 최 목사 가족의 재단운영을 둘러싼 전횡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최 목사 딸이 수백억원대 재산을 모으는데 육영재단이 이용됐다는 의혹도 있다. 정수장학회 운영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도 공격의 소재다. 정수장학회를 사회에 환원해야한다고 압박할 예정이다. 박 후보측이 꼽는 이 후보에 대한 공격포인트는 △병역면제 의혹 △옥천땅 투기 △도곡동 토지은닉 △양재동건물 차명보유 △BBK 관련 △천호동 재개발 의혹 등이다. 병역면제의 경우 65년 신체검사에서 고도 기관지확장증이라는 중병판정을 받았음에도 이후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고 건설현장에서 밤새 술마셨다는 의혹이 핵심이다. 옥천 땅은 77년 샀다가 82년 처남인 김재정씨에게 판 이후 마을 주민 명의로 인근에 농지를 추가매입했다는 의혹이 새롭게 추가됐다. 도곡동 땅 은닉은 처남 김씨가 땅을 산 자금출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쟁점이다. 이 후보가 땅의 진짜 주인이라는 의심이다. 78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의혹도 거론된다. 이 후보와 친형 이상득 국회부의장, 장인 김 모씨 등이 분양대상이 아니었음에도 아파트를 분양받았다는 얘기다. 이 후보의 맏형과 처남이 대주주인 다스 자회사 홍은프레닝이 천호동에 주상복합건물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도 검증 후보군이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7-19
- <앗! 이런 곳이>태백 관광 3선 석탄박물관 한국 석탄산업 역사를 한눈에 우리나라 석탄 산업의 변천사와 석탄의 역사적 사실들을 한데 모아 놓은 세계 최대의 석탄 전문 박물관이다. 1997년 5월 24일 문을 열었다. 면적 1,337㎡(실내 774㎡, 실외 563㎡), 지상 3층 지하 1층의 규모에 암석, 광물, 화석, 기계장비, 도서문서, 향토사료, 생활용품 등 7450여 종의 소장품을 전시해 놓았다. 석탄의 탐광에서 채굴 및 채탄과 가공, 이용 등에 관련된 각종 방법과 기계장비의 발달사를 직접 확인할수 있다. 또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시책 등 석탄개발 정책의 변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으며 탄광촌의 독특한 주거모습, 생활도구, 무속신앙, 예술 및 전통 놀이문화 등도 소개하고 있다. 지상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게 되어 있는 제8전시실의 경우 탄광갱도를 실제상황과 가깝게 연출한 곳으로, 특수효과를 이용해 갱이 무너지는 모습까지 관람할 수 있다. 야외전시장에는 실내 전시장에 없는 권양기 광차 등 대형 광산장비를 시대별로 전시해 놓았다. *호법IC-남원주IC-제천IC-영월-상동-태백 검룡소 검은 용이 살고 있는 한강 발원지 한강 514km의 발원지로 알려진 곳이다. 금대봉 기슭에 있는 제당굼샘과 고목나무샘, 물골의 물구녕 석간수와 예터굼에서 솟아나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이곳에서 다시 솟아난다. 1987년 국립지리원에 의해 최장 발원지로 공식 인정됐다. 둘레 약 20m이고, 깊이는 알 수 없으며 사계절 9도의 지하수가 하루 2000~3000톤씩 석회암반을 뚫고 솟아 폭포를 이루며 쏟아진다. 오랜 세월 동안 흐른 물줄기 때문에 깊이 1~1.5m, 넓이 1~2m의 암반이 구불구불하게 패여 있다. 소의 이름은 물이 솟아 나오는굴 속에 검룡이 살고 있다 해서 붙여졌다. 물은 정선의 골지천과 조양강, 영월의 동강을 거쳐 단양 충주 여주로 흘러 경기도 양수리에서 한강에 흘러든 뒤 서해로 들어간다. 한국 100대 명수 중 한곳이다. 주변에 금대봉 일대는 환경부가 정한 자연생태보호구역으로 희귀동식물이 많다. *태백역-하장방면 35번 국도-삼수령-검룡소 황지연못 하루 5천톤 물 토해내는 낙동강 근원 길이 525㎞의 낙동강 발원지로 ‘동국여지승람’‘척주지’‘대동지지’등에서 낙동강의 근원지라고 밝혀 놓고 있다. 처음에는 ‘하늘못’이라는 의미로 천황이라 했고 황지라고도 했다. 태백시내 중심지에 있는 황지공원의 커다란 비석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상지·중지·하지로 이루어진 둘레 100미터의 소에서 하루 5000 톤의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물은 태백시를 둘러싼 태백산 함백산 백병산 매봉산 등의 줄기를 타고 땅 속으로 스며들었던 물이 모여 연못을 이룬 것으로 시내를 흘러 구문소를 지난 뒤 경상남도·경상북도를 거쳐 부산광역시의 을숙도에서 남해로 유입된다. 장자못 전설의 근원지가 되는 연못으로, 예부터 ‘황부자전설’이 전한다. 1년에 한두 번 흙탕물로 변하기도 하는데 이무기가 된 연못 속 황부자의 심술 때문이라는 전설이 흥미롭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7-12
-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서상홍 전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93년 헌재 초대 연구부장, 7년간 처·차장 지내 … 헌재 성장 산증인 서상홍 변호사(58·전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장관급)은 지난 3월 9일 퇴임식을 갖고 7년간의 정든 헌법재판소를 떠났다. 그는 참여정부 들어 헌법재판소의 위상이 급상승하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한 산증인이다. 93년에는 헌법재판소 초대 연구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법시험 동기인 서 변호사는 노 대통령의 ‘8인회’멤버로 세간에 알려졌지만 법조인들 사이에서는 ‘헌재맨’으로 통한다. 변호사로 옷을 갈아입었지만 4개월이 지난 지금도 헌법재판소에 관한 얘기라면 얼굴이 상기될 만큼 열정적이다. ◆“‘그놈의 헌법’이라도 좋다” = 서 변호사는 “노 대통령이 정치적 발언의 자유권 제한과 관련,헌법소원을 청구한 것이나 ‘그 놈의 헌법’이라고 발언했는데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헌법의 존재를 국민에게 계속 각인시켰다는 측면에서 그렇다”고 말했다. 헌재의 위상이 높아지는데는 참여정부 들어 헌법적 이슈를 계속 만들어낸 노 대통령의 영향이 컸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대통령 탄핵심판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사건이었다. 서 변호사는 “헌법의 중요성이 자주 부각돼 일반 국민 누구나 법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 헌법을 떠올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헌재에 오래 있다보니 법률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규정하는 시행령과 지침 등이 헌법에 위해되거나 상호모순되는 것을 많이 봤다”며 “헌법적인 큰 틀에서 보는 게 아니라 미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헌법재판소는 내년이면 설립 20주년을 맞는다. 88년 문을 연 이후 20년의 세월 동안 국민들의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 주요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서 변호사는 “헌재라는 기관이 존재함으로써 사회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고 사회 발전이 헌재 발전에 영향을 주는 등 상호작용이 있었다”고 말했다. ◆“헌재와 법원 급격히 변화” = 서 변호사는 지난 99년 서울지법 부장판사로 퇴직한 후 1년 동안 변호사로 일하다 헌법재판소 사무차장 자리를 맡았다. 그후 7년만에 다시 변호사로 나섰다. 그는 그 동안헌법재판소와 법원이 상당한 바뀌었다고 말했다. 서 변호사는 “헌법재판소가 한달에 한번 공개변론을 열면서 ‘위헌이냐 합헌이냐’의 결과만이 아니라 헌법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과정을 보여주는것은 상당히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변호사로서 겪은재판 경험을 언급하면서“법원 또한 법정에서 당사자들의 말을 최대한 들어주는 구술심리를 하면서 의견교환이 자연스러워졌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그는법관의 면담을 제한한 조치에 대해 “너무 잘된 일”이라며 반겼다. 서 변호사는 “7년전에는 사건을 맡으면 의뢰인의 요구때문에 판사를 만나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판사들이 안 만나주는 것을 의뢰인들이 알기 때문에 ‘판사와의 교제 요구’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상대방 변호사가 안 만나니 내가 만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 변호사는 구술심리로 인해 판사들의 업무량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인적·물적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판사의 노동 강도가 강해져현행 제도가 오래 가기 어렵다”며 “획기적인 투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방에 내려가 국선변호 생각” = 서 변호사는 헌재를 나오면서 주변사람들에게 “어려운 사람들의 사건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 7년 전 법무법인에 있을 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도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이자 다짐이었다. 변호사 일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기록이 상당히 방대한 사건을 들고 온 의뢰인이 대법원 상고이유서를 써달라고 했다. 통상의 수임료에 비해서는 상당히 낮은 금액을 들고 왔지만 그는 흔쾌히 사건을 맡았다. 서 변호사는 “변호사가 없는 지방에 내려가서 국선변호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며 “아직도 그 생각에 변함은 없는데 사건이 계속 들어오고 있어 언제 결단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공익활동에 전념하는 문제도 고민 중이다. 그는 “공직에 있다가 나와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좋다”며 “과거에는 후배 판사들이 있는 법정에 나가기가 좀 어색했지만 요즘은 법정에 나가열심히 할 수 있는데 안 나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서 변호사는 “법정에 나가서 변론도 열심히 하지만 판사에게 꾸중도 듣는다”며 웃었다. 1975년 사법시험 17회 합격 1977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1991년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1993년 헌법재판소 연구부장(파견근무) 1999년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1999년 변호사 개업 2000년 헌법재판소 사무차장 2006년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2007년 변호사 재개업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7-06
- [인터뷰]신영배 약초시장 상인회장 ‘제천황기’ 이름 없으면 수입품 … 품질 효능 자신 “앞으로 약초 도매뿐아니라 소매도 활성화되면 제천약초시장은 전국을 아우르는 3대 약령시장으로 거듭날겁니다.” 제천약초시장의 터줏대감 신영배 상인회장은 오는 2010년 제천에서 열리는 국제 한방엑스포를 계기로 일반 소비자들도 편리하게 약재를 구입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동시에 제천약초시장의 ‘제2의 전성기’도 기대하고 있다. 신 회장은 “지금은 황기 황정(둥글레) 오미자 등 30여 종류의 약재가 이곳 약초시장에서 세척, 가공, 포장돼 도매로 전국 한약방에 공급되고 있다”면서 “앞으로 시장이전과 함께 도로 주차장 등 기반시설이 확보되면 일반 소비자들도 쉽게 찾아와 우수한 품질의 약초를 저렴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신 회장은 지난 93년 제천약초시장 준공때 이곳에 입주한 시장원년 멤버. 형을 비롯 가족들이 황기 등 약초를 재배하고 있고 신 회장은 판매를 맡아 온지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신 회장은 “지금은 소매와 함께 수출도 거의 안하는 등 약초시장이 다소 침체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과거 일본에까지 제천황기가 수출될 정도로 이곳 약초시장도 활황을 누렸던 때가 있었다”고 회고 했다. 신 회장은 특히 “지역특구 지정으로 제천황기, 둥글레 등은 해마다 30% 이상 재배량이 늘어나고 전국에서 약초들이 모이는 등 약초시장 약재거래물량이 크게 늘었지만 판로는 제자리”라면서 “소매기능 활성화 방안마련에 상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 중에 있다”고 말했다. 제천약초시장엔 70개의 점포 있는데 한약방에서 필요할 때만 약재를 주문하고 있어 소매 등 시장의 확대가 시급한 과제라는 설명이다. 제천황기의 효능이나 품질은 이제 전국에서 최고로 치고 있어 이젠 많은 사람들의 소비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약초시장 상인이 만약 수입산을 국산으로 속여 팔 경우 자체적으로 징계를 내리고 있다”면서 “설사 감독기관을 속이더라도 수십년 경험과 느낌으로 수입산을 구별하는 상인들의 ‘관능검사’까지 하고 있기 때문에 수입산을 국산으로 속이는 일은 제천약초시장에선 일어나기 힘들다”고 소개했다. 그만큼 품질뿐 아니라 브랜드 관리에 철저하게 나서고 있어 이젠 ‘제천황기’라는 브랜드를 쓰지 않는 황기는 100% 수입산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신 회장은 “앞으로 황기 둥글레 등 약초를 가공해 일본을 비롯 해외수출도 다시 타진하고 FTA 등 시장개방에 대응해 약초유통 관리에 힘을 기울일 계획이다”고 말했다. 제천 고병수 기자 byng8@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8-16
- [해방 62주년, 뒤바뀐 진실을 바로 세우자]④ 일제 강제징병·징용자 문제 매듭풀자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62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비정상적인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굴절된 역사를 바로세우는 작업이 비난받고 친일은 변명을 넘어 찬양으로까지 나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논할 수는 없다는 취지에서 해방 62주년을 맞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진실을 밝히는 기획을 마련했다.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 상실 정부, 희생자 고통 껴안아야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조선의 모든 인적 물적자원을 수탈해 갔다. 시골농가의 부뚜막에 있는 숟가락부터 청년은 일본군대로 처녀는 일본군인의 성적 노리개로 끌려갔다. 그러나 일제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징병징용자들의 한많은 삶은 한일 양국정부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다. ◆남태평양 외딴섬에서 풀뿌리로 연명 = 대전에 사는 김종만(89)씨는 1941년 태평양 전쟁에 끌려갔다. 김씨가 일제에 강제로 징병을 당한 것은 스무살 때인 1938년이다. 군대에 안가면 가족들에게 지급되던 배급표를 빼앗겨야 하는 처지였다. 3년을 용산역 부근 부대에 있다가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김씨가 끌려간 곳은 호주 바로 위에 있는 뉴기니아 뉴브르벤토 뉴아이루란도 등 남태평양 3개 섬이다. 일본군이 궁극적으로 노린 곳은 이들 섬 너머에 있는 호주였다. 일본의 공격에 미군의 반격은 거셌다. 미군은 매일 900여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엄청난 양의 폭탄을 이곳에 퍼부었다. 김씨는 미군의 폭격으로 산이 무너지면서 5m 땅속에 묻히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다친 척추가 이후 평생 김씨의 삶을 괴롭혔다. 미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은 이들 섬에서 완전히 고립됐다. 보급로가 완전히 끊긴 일본군은 섬에서 풀뿌리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으며, 김씨 등 50여명의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이곳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1946년 10월 조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가미가제 특공대의 비행기 정비도 = 선태수(83)씨는 1943년 8월, 당시 대구직업학교 졸업반의 신분으로 일본 다구시마현 이스미 항공학교를 5개월만에 수료하고 10명의 조선인과 함께 가노야 항공기지에 배치됐다. 일본특공대의 비행기를 정비했던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굴속에서 생활했다. 선씨는 해방이 되고도 열흘이 지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선씨는 1945년 9월 20일 부산으로 돌아왔다. 태평전쟁 기간동안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숫자는 공식적으로 남아있지 않다. 몇가지 단서를 통해서 추측할 뿐이다. (사)일제강제연행한국인생존자협회(회장 선태수)가 지난 2005년 공개한 일본 중의원 법무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은 중일전쟁 때 17만9212명, 제2차 세계대전 때 133만9930명 등 모두 151만9142명이 징용됐다. 양순임 태평양전쟁유족회 회장은 “지난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우리가 일본측에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생존자 93만명을 포함해 103만명이었다”며 “일본 자료를 보더라도 연인원 750여만명이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올 6월까지 정부가 접수한 피해신고에 따르면 노무자가 13만7696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군인 2만9946명, 군속 2만4576명, 위안부 303명 등 19만3836명이었다. ◆역대 한국정부 무관심 일관 = 태평양 전쟁 관련자의 고통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계속됐다. 국가는 그들이 일본에 제기할 개인 청구권을 빼앗았다. 한일협정 협상당시 양국간에 오간 회의록은 최근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희생자들이 주목을 받은 것은 1972년이다. 박정희 정권이 태평양 전쟁 희생 유족들에게 1인당 30만원씩 보상금을 지급한다며 신고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보상금액이 너무 적고 사망자한테만 지급을 한다는 점에서 문제로 지적됐다. 당시 김학렬 부총리를 면담했던 선태수씨는 “김 부총리가 ‘지금은 국가가 어려운 만큼 국민소득 2000달러가 되면 생존자들에게도 보상을 할 것’이라고 면담 때 약속했다”고 말했다. 선씨는 “유신 이후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지만 그들은 관심 자체가 없었다”며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까지 왔다”고 탄식했다. 양순임 태평양전쟁유족회 회장은 “생존자들은 죽도록 고생했으면서도 일제에 부역했다는 의심을 받으며 살아왔다”며 “생존자들 대부분이 80대 고령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이들의 명예를 국가가 회복시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8-13
- <내일시론>‘원폭의 날’과 한국인 피해자(문창재 2007.08.10) ‘원폭의 날’과 한국인 피해자 일본의 8월은 세계의 이목을 끈다. 근세 일본사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날들이 이 달에 집중되어 있다. 태평양 전쟁 패전 기념일과 두 차례 원자폭탄 피폭 기념일이다. 인류사상 처음으로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이면, 일본은 세계를 향하여 핵무기 없는 세상을 염원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쏘아 올린다.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 끔찍한 참상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뜻으로 희생자들 영혼 앞에 손 모아 절을 하고 꽃을 바친다. 정치가들은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에 발린 약속을 쏟아낸다. 그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9일은 나가사키 차례다. 히로시마의 그늘에 가려 자신들의 피폭 사실이 잊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양, 히로시마에 못지않은 이벤트를 마련한다. 두 지역 행사가 너무 두드러진 탓일까, 정작 패전 기념일인 15일에는 조용해진다. 이 날만은 잊고 싶은 심정을 헤아릴 만하다. 올해도 예년과 똑같은 이벤트가 반복되었다. 9일 나가사키 식전에서는 지난 1년 동안 피폭 후유증으로 숨진 3,069명의 명단이 평화기념 조형물 앞에 봉안되었다. 이 날 행사에서 나온 수많은 말 가운데 눈에 띤 것은 북한의 핵위협에 대한 불안과, 일부 정치인들의 핵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북한과 이란의 핵개발 의혹으로 핵 비확산 체제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는 우려 끝에 “북조선의 핵 폐기를 위한 6개국 협의에서 끈질기게 노력하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피폭자들의 실정에 눈을 돌려 원호시책을 충실히 하라”는 주문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관련기사와 자료를 아무리 눈여겨보아도 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패전 후 국적이 다르다고 보상과 치료의 의무를 외면해 온 일본 당국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피해자 단체들에게 ‘인간의 도리’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원폭피해자협회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조선인) 원폭피해자 수는 무려 10만 명. 군수산업 기지였던 히로시마에는 10만 가까운 한국인 근로자들이 살고 있었는데, 1945년 8월 6일 미국의 원폭 공격으로 3만 5,000명이 폭사 또는 후유증으로 죽었다. 군항이었던 나가사키에서도 1만 5000명이 그렇게 죽었다. 두 도시에서 살아남은 5만여 명은 알거지가 되어 귀국해 모진 고생을 겪었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세월이 지나면서 알 수 없는 증세가 나타났다. 갑자기 식욕이 없어지면서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에 푸른 반점이 생겼다. 귀와 코에서 출혈이 시작되어 드러누우면 죽음이었다. 2세들이 이유 없이 불구자 또는 기형으로 태어났다. 이들의 치료와 보상 요구에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보상의무가 소멸되었다”고 주장해온 일본 정부는 1979년 ‘도일치료’ 와 연간 4200만 엔의 치료 보조비 지급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전이어서 도일수속이 까다롭고, 알량한 치료 보조비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이 문제는 계속 양국 간의 외교현안이 되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때 일본 정부는 40억 엔을 내는 것으로 치료와 보상에 관한 책임을 털어버렸다. 정부는 그 돈으로 피해자들에게 치료비 조로 월 10만원씩 지원하고, 합천에 피폭자회관을 건립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 양 책임을 망각하고 말았다. 히로시마 평화의 공원 밖에 서 있는 한국인 피폭자 위령탑은 죽어서도 차별당하는 한국인 피해자의 원혼이 깃든 돌이다. 재일 한국인거류민단은 1970년대 평화의 공원 안에 위령탑을 건립하려 했지만, 일본 정부가 허가하지 않아 공원 밖 강가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민단은 기회 있을 때마다 위령비의 공원 내 이전을 추진했으나 번번이 좌절당하였다. 평화란 무엇인가. 남의 고통과 불행을 외면하고 같은 편끼리만 원하는 바를 얻는 것으로 족한가. 피해자의 10분의 1은 일본인은 아니었지만 그 때 일본 국적이 주어졌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거기에 갔던 것도 자의가 아니었다. 징용으로 끌려갔거나, 살 길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원하지 않는 곳에 있게 함으로써 피해를 입게 한 것이 미안하지도 않은지, 소리쳐 묻고 싶은 8월이다. 문 창 재 객원 논설위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8-10
- 22세 중국 여성, 엄마 친구와 열애 끝 결혼 22세의 왕나나(王娜娜)는 자신보다 11살이나 많은 ‘아저씨’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그 과정이 한국의 드라마 ‘낭랑18세’의 줄거리와 흡사하다. 10년 전 그녀가 12살일 때 우연히 어머니의 친구인 23살의 차오밍량(曹明亮)을 알게 되었다. 당시 파견근무로 공사에 참여하게 된 차오는 인근 가게 여자 친구의 딸인 나나와 친해졌다. 유학자 타입에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차오는 어린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6세에 나나는 충칭(重慶)에서 혼자 대학교를 다니게 됐고 이 때 차오는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즐거운 일이 생기면 둘은 함께 기뻐했고 두 사람 사이에 애틋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의 나이를 인식해 차오는 쉽사리 그녀에게 고백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친한 아저씨로만 지내왔다. 하루는 나나가 한밤중에 고열로 아파하고 있을 때 차오가 급히 병원으로 옮겨 준 적이 있었다. 이틀 동안의 밤샘 간호로 끝에 눈을 뜬 나나는 차오의 초췌한 얼굴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나나는 자신의 짝사랑을 고백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감정을 나나의 집에 알렸고 나나의 집에서는 거세게 반대했다. “인연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고, 우리는 서로를 인정했다. 또 서로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자 했다”는 왕나나의 말처럼 모진 반대의 세월을 참고 기다린 끝에 둘은 마침내 결혼에 성공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