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한국전쟁 후 고아원에서 생활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가 나오면 삼대가 망한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자인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이항증(68·사진) 감사의 한탄이다. 임청각을 바로 세우기 위해 수년간 노력했지만 돌아온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뿐이었다. 이 감사는 독립운동가 자손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부친인 이병화 선생이 1952년 피난지에서 숨지고 6남 1녀 중 다섯 째였던 이 감사는 다른 형제와 함께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냈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자리를 잡은 형제들은 실익도 없고 개인집도 아니지만 임청각의 등기를 바로 잡기 위해 나섰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다른 곳에 가봐라”는 대답뿐이었다. 이 감사는 “국가 기관 어디를 가도 귀찮다는 듯 거절했다”고 회고했다. 어렵게 지방법원 재판까지 갔지만 4년이 지나도록 피고가 많아 송달이 안된다는 답변뿐이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수반과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유적지 등기가 광복 60년이 넘도록 만신창이가 됐다”며 “국가라는 게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르겠다”고 강조했다. 임청각은 독립운동가의 터전이고 보물로 등록된 문화재인 만큼 특별법이라도 만들어 국가에서 관리해줬으면 하는 게 이항증 감사의 소망이다. 이 감사는 요즘도 서울과 경북 안동을 오가며 임청각을 관리하고 있다.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8-08
- [해방 62주년, 뒤바뀐 진실을 바로 세우자] 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62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비정상적인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굴절된 역사를 바로세우는 작업이 비난받고 친일은 변명을 넘어 찬양으로까지 나가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논할 수는 없다는 취지에서 해방 62주년을 맞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진실을 밝히는 기획을 마련했다. 국적없어 문화재급 500년 옛 집 방치 … 후손들 재산권 등 각종 민사상 권리 상실 지난 2005년 단재 신채호 선생이 국적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립운동가의 국적회복운동이 벌어졌다.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마친 선열들에 대한 국적회복 문제는 이후 국회에서도 논의됐지만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도 국적이 없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 9명 배출한 ‘임청각’ = 경북 안동역 인근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9명이나 배출한 집안의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에서 따왔다는 ‘임청각’ 이 그곳이다. 이 집은 1519년 지어져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안동 종갓집으로 보물 182호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이 집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보전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몸살을 앓아왔다. 중앙선이 생길 때는 집 주인과 친인척이 항일운동을 하는 인물이 많다고 해 마당으로 철길이 지나가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문제는 이 집의 주인인 석주 이상룡 선생이 대한민국 국적자로 등록되지 못하면서 건물 등기가 불가능해 졌다. ◆임시정부 수반, 석주 선생 = 석주 이상룡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운데 최고지도자의 반열에 오른 분이다. 석주는 을미의병에 참여했다가 1910년 한일합방에 분노해 이듬해 정월 친인척 50여 가구와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석주는 임청각을 떠나면서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만주로 향했다. 선생은 만주에서 최초의 해외 독립운동단체인 산학협동의 경학사를 만들었고 무장투쟁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1926년에는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로 바뀐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맡기도 했다. 석주의 집안은 아들과 손자를 비롯해 5촌 이내 9명의 독립운동 수훈자를 배출했다. ◆삼대가 호적거부, 외골수 삶 = 석주의 뒤를 따라 독립운동을 한 아들 이준형 선생과 손자 이병화 선생은 1930년대에 일제치하에서 일본의 국민이 될 수 없다며 호적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이준형 부자는 일제가 새로 도입한 등기제도에 따라 임청각의 소유권을 상실했다. 500년 가까이 된 99칸짜리 고택의 소유권이 없어지면서 이 집은 주인 없는 집이 됐다. 결국 호적을 가지고 있던 문중의 원로 4명이 대신 등기를 내야 했다. 석주의 아들 이준형 선생은 일제의 협박과 회유를 피해다니다 1942년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이 선생은 유서에서 “일제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만 더할 뿐이다”라고 적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손자 이병화 선생은 귀국 후 장례를 치르고 곧바로 형무소로 수감됐다. 하지만 이병화 선생 역시 해방 후 친일파와 협력한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다 1952년 피난지에서 울분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숨졌다. ◆파악된 무국적 독립운동가만 200여명 = 해방이후 석주의 후손들이 호적을 얻고 임청각에 대한 등기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이미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 일제 때 불가피하게 문중원로 4명의 명의로 등기를 했지만 이후 문중 원로 4명의 후손이 4~5대를 지나면서 소유권은 갈수록 오리무중 상태에 빠졌다. 세월이 지나면서 임청각의 원래 주인을 찾는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석주의 증손자인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항증 감사는 “소유권 자체가 불투명해져 임청각에 대한 관리 자체가 어렵다”며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아 국가에 헌납하고 싶어도 어렵다”고 말했다. 문화재급 고택이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신채호 선생의 아들이 선생의 호적이 없어 재판을 통해 가호적을 만든 사실이 있다”며 “하지만 묘소 이장이나 재산권 등 지금도 민법상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유족들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국적 없는 독립운동가만 200여명에 이른다”고 덧붙였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독립운동가 선친을 뒀다는 이유로 이런 설움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며 “국가가 나서 해결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8-08
- 출근 안해도 매달 566만원 받아 경북도 행자부, 고위공무원 8개월째 방치 인사발령 늦어져 독서 여행 … ‘재택근무'' 집에서 책을 읽거나 여행을 다니면서 매달 500만원 이상 월급받는 ‘부러운’ 공무원이 있다. 백준호씨는 경북도청의 부이사관급 공무원이지만 출근하지 않는다. ‘선진지’여행을 하거나 집에서 책을 읽으며 ‘재충전’을 하는 게 일이라면 일이다. 그래도 매달 566만원씩 월급은 꼬박꼬박 나온다. 벌써 8개월째다. 백씨는 공식적으로 ‘공무원’신분이다. 경북도청 자치행정과에 ‘대기발령’ 중인 부이사관급 공무원이다. 동시에 단서조항에 행정자치부 요원이라고 규정돼 있다. 그러나 그는 경북도청에도 출근하지 않고 행정자치부에도 나가지 않는다. 경북도와 행자부 어느 쪽에서도 관리감독을 하지 않는다. 그는 지난해 12월 중순 고위정책반 공무원 교육을 마친 뒤 지금까지 ‘놀고 먹고’ 있다. 행자부와 경북도간 엇박자 인사로 얻은 ‘행운’이다. 경북도는 최근 두차례 단행된 간부인사에서 백씨를 제외시켰다. 행자부에서 백씨를 받기로 구두약속했다는 이유에서다. 행자부는 도와 인사교류 요인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행자부와 지자체간 인사 시기가 맞지 않아 한 두달정도 대기하는 경우는 종종 발생하지만 백씨처럼 반년이상 재택근무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경북도청 공무원 노동조합은 2일 성명서를 내고 “백준호 부이사관이 보직없이 8개월간 봉급받으며 집에서 허송세월하고 있는 건 도민 혈세 낭비”라며 “인사가 늦어지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해 그 피해는 전체 하위직에게 오롯이 전가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경북도 자치행정과 관계자는 “행자부 국장급 인사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발령이 미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행정자치부 관계자는 “경북도와 인사교류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아 백씨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조만간 단행될 행자부 인사에 반영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8-03
- [87년 노동자 대투쟁 경제민주화의 서막 열다]대투쟁 이끈 주역들 전태일을 품고 노동자와 함께 서울대 상대 경영학도에서 공장 노동자로, 그 후 30년 세월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에서 문성현(55)을 빼 놓을 수 없다. 물론 그는 6회에 걸친 구속이 말해주듯 한국사 변혁기에는 대부분 감옥에 있었다. 7·8월 대투쟁 때도 그랬다. 그럼에도 그는 철창 바깥 현장에 직접 영향을 미친 몇 안 되는 노동운동가였다. ◆산골 소년의 가슴에 전태일이 스며들다 = 그는 경남 함양의 산골에서 1952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평교사로서 평생을 보냈다. 1971년 서울대 상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보태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경동교회 야학에 참여했다. 여기서 그는 전태일의 일생을 알게 됐다. 그는 “당시는 평전이 나와 있지 않았다”며 “청사진 형태로 전해지던 전태일의 일기를 읽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전태일은 평생 그의 가슴에서 살게 된다. 그는 75년 졸업을 하고 육군에 입대해 77년 병장으로 제대했다. 군을 제대한 그는 삼양사(현 휴비스)에 입사했다. 1979년 YH사건은 그의 인생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는 신문에서 사건을 읽고 삼양사를 그만뒀다. 가슴속에 있던 전태일이 살아난 것이었다. 그는 조그만 철공소에 다니면서 80년 영등포 청소년 직업학교 6개월 코스에서 직업훈련을 받고 선반공으로 80년 서울 동양기계에 입사했다. ◆노동조합 대의원에서 위원장으로 = 81년 그는 병역특례 젊은이들을 모아 ‘차돌회’라는 소모임을 만들었다. 이 소모임을 중심으로 현장 활동을 한 그는 81년 노조대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82년 동양기계는 창원으로 이전했다. 이어서 동양기계는 통일산업에 합병됐다. 합병 때 노조탄압에 맞서다가 그는 서울로 전출되자 부당하다며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제기·승소해 복귀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노동자들에게 확실히 각인됐다. 그동안 노조에 참여하지 않았던 통일산업 노동자들도 가입해 조합원들은 200여명에서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 84년 노조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4대 국경일만 쉬던 공휴일을 법정휴일에는 모두 쉬도록 하는 것을 사측에 요구해 승리했다. 조합원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그는 회사와 기관으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85년 임금교섭에서 전두환 정권이 한자리수 임금인상을 강요하던 정책에 맞서야 했다. 임금교섭에서 사측은 9.8%를 제시하고는 정부 가이드라인이라며 배수진을 쳤다. 기관의 협박도 매서웠다. 결국 위원장은 월요일 파업을 앞두고 토요일 저녁 두려움에 직권조인을 해버렸다. 월요일 노조는 발칵 뒤집혔다. 위원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위원장을 불신임하고 문 대표의 제안에 따라 노조정상화 후 임금교섭을 재개하기로 했다. 사측에서는 그가 대학출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해고했다. 그는 점심시간 집회를 열어 조합원들에게 자신이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고 조합원들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조합원들은 “우리도 대학 출신을 원한다”며 “함께 싸울 것”을 결의했다. 85년 6월 구로공단에서 파업 중이던 대우어패럴 노조에 동조해 동맹파업을 준비했다. 파업 전날 밤 경찰은 문 대표를 연행하기 위해 노조사무실에 진입했다. 그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뒷문을 통해 회사 담장을 넘어 뛰어내리다 깨진 유리병 조각에 발을 크게 다쳤다. 정신없이 뛰던 그는 이웃마을 빨래줄에 널려있던 운동화를 훔쳐 신었다. 그의 신발은 유리에 찢어지고 피가 엉겨 붙어 엉망이었다. 그는 “당시 운동화 주인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며 웃었다. 조합원 집에서 응급조치를 마친 그는 다음날 통근버스 좌석 아래에 숨어 회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화장실에 있던 그를 경찰이 덮쳐 구속했다. 6개월 구속 재판 끝에 그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통일중공업노조 위원장에서 전국적인 노동운동가로 = 86년 초 석방된 그는 구속된 노조간부들의 변론문제로 부산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여기서 그는 부산 울산 대구 일대에서 소모임을 하던 권용목 천창수씨 등과 만나며 활동 폭을 넓혔다. 87년 거제 대우조선은 조선산업구조조정 문제로 현장 노동자들이 들썩였다. 당시 거제성당에 있으며 민통련 경남대표를 맡고 있던 김영식 신부가 문 대표를 초청했다. 그의 소개로 이후 대우조선 위원장을 지낸 최은석씨 등과 만났다. 87년은 권인숙씨 성고문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개헌현판식 등으로 전국이 들썩였다. 창원도 마찬가지였다. 창원의 노동자들은 5월 1일 노동절 행사를 창원 반송성당에서 가졌다. 수백명이 모인 규모 있는 노동절 행사였다. 마산·창원은 이때 모인 사람들이 중심이 돼 6월 항쟁 7·8월 투쟁을 이끌었다. 87년 6월 대우조선 백순환(민주노총 금속연맹 위원장 역임)씨가 주동이 된 유인물 사건이 터지자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 대표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6월 민주항쟁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모두 감옥에서 맞았다. 87년 12월 6개월 만기 형을 마치고 12월 출소했다. ◆금속연맹 위원장에서 민노당 당원으로 = 88년 문 대표는 ‘마창노련’ 지도위원을 맡아 마산·창원 지역 연대활동을 강화했다. 그는 89년 다시 제3자개입 혐의로 구속됐다. 1년8개월 감옥을 살고 나온 그는 노동운동의 전국조직화에 참여했다. 94년 전국노조협의회 사무총장을 맡은 그는 전국노동운동가 협의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노운협이 이적단체로 몰려 95년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구속 중 민주노총이 설립됐다. 집행유예로 출소한 그는 95년 전국민주금속연맹 수석부위원장, 99년 금속연맹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01년 2002년에는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2000년 민노당에 입당해 중앙위원이 됐다. 문성현 대표는 순수한 열정과 정의감으로 30년을 노동운동에 바쳤다. 그는 운동노선에 매달리지 않았다. 운동권의 NL·PD 이념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PD였고 어느 때는 NL이었다. 그는 “이념이 자신을 이끈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어려운 생활과 그 해결책에 대한 고민이 그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애정을 인터뷰 내내 표현했다. 문 대표는 “50%가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내수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며 “87년 당시의 절박함을 보는 것같아 애가 탄다. 해결에 심혈을 기울이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7~8월 노동자대투쟁 “사람답게 살고 싶다” 김세훈(50) 민주노총 회계감사 노동자들이 억압에 투쟁한 정의로운 투쟁이었다. 노동운동은 사회적인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의 마음을 어우르고 투쟁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이 87년 당시 우리모두의 아픔과 같다. 적극 나서야 한다. 오상용(51) 금속노조 부위원장 당시 31세였다. 당시 노동현장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정의였다. 요즘 노동자들은 사회공익적 개념이 약한 것 같아 아쉽다. 이흥석(46)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장 노동운동은 기본적으로 약자를 위한 운동이다. 우리주변의 약자인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상인 농민 빈민 등 이웃을 항상 돌아보는 기본정신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그것이 노동운동이 갈 길이다. 주재석(51) 두산중공업 지회 회계감사 20년이면 성인의 나이다. 성인은 방향을 가져야 한다. 눈 앞의 이익에 연연해 계파중심으로 가는 것에서 벗어나 멀리보고 올바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 민족통일은 노동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양규석(47) 로템 근무 당시의 감동이 아직 남아있다. 우리가 새롭게 태어난 사건이었다. 이제 이웃과 주변을 돌아보는 생활운동으로 확산해 나가야겠다. 아파트 등 생활공간에서 87년 정신을 2007-08-01
-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따뜻한 시선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빈민지역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장소만 달라졌을 뿐이죠. 판잣집이 있던 곳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거기 살던 사람들은 밖으로 밖으로 밀려나고…. 그래도 참 따뜻해 보이지 않아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지만 사람들 사이의 정이 느껴져요. 아이들도 한번 봐요. 너무 예쁘죠? 밥 한 그릇에 이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어요.” 가난한 사람들, 빈민지역 아이들 얘기만 나오면 그는 수다스러워진다. 아이들에게 밥 먹이는 얘기가 시작되면 그의 얼굴엔 웃음이 번진다. 밥 한 그릇이 아이들에게 가져다주는 그 ‘행복 바이러스’가 그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정말 신이 나 보인다. ◆사회복지운동은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 강명순(55)씨는 빈민아동의 ‘대모’라는 별칭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어른들에게 학대당하고 방임된 아이들과 빈곤가족의 아픔을 나누며 살아온지30년. 강명순 부스러기사랑나눔회 대표가 그 세월을 한권의 책으로 엮었다. ‘한국의 빈곤아동과 지역아동센터 법제화에 관한 이론과 실천’이라는 딱딱한 제목이다. 일본 고베지역에 있는 기비국제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이다. 강 대표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웬 논문인가’ 싶을 게다. 그가 활동해온 내력을 잘 아는 부성래 교수가 학위논문으로 정리할 것을 설득하고 직접 지도교수를 맡았다. 박사학위를 위해 대학 측에 제출한 일본어판 논문은 10권만 인쇄했다. 대신 한국어판을 별도로 출간했다. 이 책이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진행해온 다양한 사회복지실천 개입 과정을 네 종류의 사회 활동(Social Work) 이론의 틀에 따라 분석하고 체계화해 이론화했다. 이론의 틀은 입법적 옹호(Legislative Advocacy),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회복지 실천(Community-Based Practice), 지역복지력 구축(Community Capacity Building), 사회자본 이론(Social Capital Theory)이다. “현장에서 아이들 껴안고 지내면서 법제도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활동해왔는데 그게 모두 사회복지이론으로 정리가 돼요.” 스스로도 놀랍다는 투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힘주기, 대를 잇는 빈곤의 고리를 끊기 위해 사회복지사가 해야 할 일 등 강 대표와 동료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미 이론으로 체계화해놨다. 빈곤아동 문제와 현황을 지난 30년간 연구한 빈곤 관련 조사자료를 통해 종합하고 분석했더니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사회복지 실천의 틀로 집약된 것이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한번도 교류한 적도 없는 사회복지실천가와 이론가들인데 연구를 진행하면서 사회복지운동이 국가나 지역 시대 종교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연대하고 결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게 됐어요. 빈곤문제 해결을 통해 빈곤아동과 그 가족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복지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 일치하기 때문이에요.” ◆밥 굶는 아이들 없는 2020년을 위해 = 강명순 대표가 빈민지역 교회에서 방치된 빈곤아동을 돌보기 시작한 건 1975년부터다. 1998년 국가경제대란으로 빈곤아동 결식아동이 급증하고 가족해체현상이 심화되면서 다중위기에 처한 아동에게 공부방과 신나는집에서 실시하는 단순한 학습지도나 급식으로는 빈곤아동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급식과 학습을 포함해 문화활동 지역사회복지 가족복지 찾아가는사례관리가 이루어지며 내용적으로 지역아동센터로 전환한 게 2000년 일이다. 그리고 민간주도로 지역아동센터를 법제화하기 위한 노력이 2003년 받아들여졌다. 아이들과 힘을 모아 아동복지법을 바꿔낸 것이다. 대학 2학년때 처음 빈곤아동을 접하고 이후 교육과 훈련을 통해 힘을 축적해왔다. 그 세월을 돌아보고 “한 사람의 사회복지사가 얼마나 큰 일을 해낼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는 ‘강명순’이 아닌 다른 사회복지사들 역시 충분히 그렇게 해낼 수 있으리라 자신한다. “한국사회복지사협회에서 제시한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이란 게 있어요. 미국사회복지사협회도 마찬가지 강령을 갖고 있구요. 빈곤아동과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그들이 다른 사회 구성원과 다름없이 평등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 제도를 변화시키고 법제화시키는 사회행동은 사회복지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윤리와 가치라는 거예요.” 강령은 사회복지사가 ‘인본주의 평등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하고 천부의 자유권과 생존권의 보장활동에 헌신’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특히 사회 경제적 약자 편에 서서 사회정의와 평등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함께 일하며 사회제도 개선에 관련된 제반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강 대표는 “사회복지사 한 사람의 사회정의와 사회행동이 법제화에 미친영향력을 재평가한다면 사회복지사 재교육과 재훈련이 보완돼야 한다”고 말했다. 빈곤아동 권리보장과 지역복지력 구축을 위해 시급하다. ◆한 사람의 사회복지사가 사회를 바꾼다 = 논문은 언뜻 보기에도 ‘논문답지 않다’. 대신 ‘강명순스럽다’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260쪽 분량의 두툼한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컬러사진들이다. “30년동안 수십번 이사를 했는데 그동안 슬라이드 자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끌어안고 다녔어요. 2000장이나 돼요. 대부분 직접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찍은 거예요. 1987년 미국 감리교회에서는 625 동란 이후 사진을 제공해줬구요.” 그 가운데 200여장을 선별했다. 걸러내진 자료만도 책 한권 분량을 될 거란다.사진은 그가 빈민지역과 그곳에서 사는 아이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대변한다. 한 통신회사에서 한국어판 논문을 인쇄하기 직전 500만원을 후원해줬고 그래서 컬러출판이 가능했다. 지금 그는 또다른 후원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번 출간한 ‘부스러기가 꽃이 되다’(2005)로 벌어들인 돈까지 투자해 논문 1500권을 인쇄했지만 현장에서 활동 중인 사회복지사들에게 전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적어도 활동가들과 공유할 정도만이라도 추가인쇄가 필요하다. 강 대표는 스스로를 ‘참 삐딱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가난한 아이들에 대해서는 밑도 끝도 없이 한없이 푸근하고 따뜻한 눈길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논문을 통해 그가 아이들을 보는 시선을 확산시키고자 한다. “빈나 2020운동에 동참해주세요. 2020년까지 빈곤아동 결식아동이 한명도 없는 나라를 함께 만들어요.”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부스러기사랑나눔회는 강명순 대표는 1975년 서울 사당동 빈민지역에서 처음 ‘탁아방’ 문을 열고 한 사람당 1000원씩 ‘부스러기’ 기부를 받아 빈민지역 아동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2001년 법인등록을 거쳐 부스러기사랑나눔회로 거듭났고 2007년 현재 273개 지역아동센터와 17개 지부, 학대받은 아동을 위한 쉼터 두곳까지 운영 중이다. 밥을 굶거나 학대받은 아이들 9700여명이 바로 그의 행복의 원천이다. 지역아동센터나 복지관을 이용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사회복지사가 직접 찾아가는 ‘길거리 지역사회복지’를 도입했고 아이들을 통해 그 가족에게 접근하는 ‘가족복지’를 통해 대를 잇는 빈곤의 고리를 끊을 방법을 찾고 있다. 용돈이며 학비 급식비 의료비가 없는 아이들 370명을 부스러기 장학생으로 선발해 후원자들과 연계하는 일도 그 중 하나다. 강명순 대표와 아이들의 노력으로 법제화된 지역아동센터는 2006년 12월 현재 2029개. 최근 3년간 695%나 늘었다. 이용하는 아동만 5만9172명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정부지원을 받는 곳은 902개에 불과하다. 지역아동센터가 양적으로 늘면서 그에 따른 질적 뒷받침이 또하나의 과제로 떠올랐다. 홈페이지 www.busrugy.or.kr 전화 02-365-126 2007-07-30
- 책 - 메인 한국의 빈곤아동과 지역아동센터 법제화에 관한 이론과 실천 강명순 지음 도서출판 부스러기 1만5000원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따듯한 시선 빈민운동 30년 사회복지 이론으로 체계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빈민지역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장소만 달라졌을 뿐이죠. 판잣집이 있던 곳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거기 살던 사람들은 밖으로 밖으로 밀려나고…. 그래도 참 따뜻해 보이지 않아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지만 사람들 사이의 정이 느껴져요. 아이들도 한번 봐요. 너무 예쁘죠? 밥 한 그릇에 이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어요.” 가난한 사람들, 빈민지역 아이들 얘기만 나오면 그는 수다스러워진다. 아이들에게 밥 먹이는 얘기가 시작되면 그의 얼굴엔 웃음이 번진다. 밥 한 그릇이 아이들에게 가져다주는 그 ‘행복 바이러스’가 그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정말 신이 나 보인다. ◆사회복지운동은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 강명순(55)씨는 빈민아동의 ‘대모’라는 별칭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어른들에게 학대당하고 방임된 아이들과 빈곤가족의 아픔을 나누며 살아온지 30년. 강명순 부스러기사랑나눔회 대표가 그 세월을 한권의 책으로 엮었다. ‘한국의 빈곤아동과 지역아동센터 법제화에 관한 이론과 실천’이라는 딱딱한 제목이다. 일본 고베지역에 있는 기비국제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이다. 강 대표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웬 논문인가’ 싶을 게다. 그가 활동해온 내력을 잘 아는 부성래 교수가 학위논문으로 정리할 것을 설득하고 직접 지도교수를 맡았다. 박사학위를 위해 대학 측에 제출한 일본어판 논문은 10권만 인쇄했다. 대신 한국어판을 별도로 출간했다. 이 책이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진행해온 다양한 사회복지실천 개입 과정을 네 종류의 사회 활동(Social Work) 이론의 틀에 따라 분석하고 체계화해 이론화했다. 이론의 틀은 입법적 옹호(Legislative Advocacy),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회복지 실천(Community-Based Practice), 지역복지력 구축(Community Capacity Building), 사회자본 이론(Social Capital Theory)이다. “현장에서 아이들 껴안고 지내면서 법제도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활동해왔는데 그게 모두 사회복지이론으로 정리가 돼요.” 스스로도 놀랍다는 투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힘주기, 대를 잇는 빈곤의 고리를 끊기 위해 사회복지사가 해야 할 일 등 강 대표와 동료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미 이론으로 체계화해놨다. 빈곤아동 문제와 현황을 지난 30년간 연구한 빈곤 관련 조사자료를 통해 종합하고 분석했더니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사회복지 실천의 틀로 집약된 것이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한번도 교류한 적도 없는 사회복지실천가와 이론가들인데 연구를 진행하면서 사회복지운동이 국가나 지역 시대 종교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연대하고 결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게 됐어요. 빈곤문제 해결을 통해 빈곤아동과 그 가족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복지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 일치하기 때문이에요.” ◆밥 굶는 아이들 없는 2020년을 위해 = 강명순 대표가 빈민지역 교회에서 방치된 빈곤아동을 돌보기 시작한 건 1975년부터다. 1998년 국가경제대란으로 빈곤아동 결식아동이 급증하고 가족해체현상이 심화되면서 다중위기에 처한 아동에게 공부방과 신나는집에서 실시하는 단순한 학습지도나 급식으로는 빈곤아동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급식과 학습을 포함해 문화활동 지역사회복지 가족복지 찾아가는사례관리가 이루어지며 내용적으로 지역아동센터로 전환한 게 2000년 일이다. 그리고 민간주도로 지역아동센터를 법제화하기 위한 노력이 2003년 받아들여졌다. 아이들과 힘을 모아 아동복지법을 바꿔낸 것이다. 대학 2학년때 처음 빈곤아동을 접하고 이후 교육과 훈련을 통해 힘을 축적해왔다. 그 세월을 돌아보고 “한 사람의 사회복지사가 얼마나 큰 일을 해낼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는 ‘강명순’이 아닌 다른 사회복지사들 역시 충분히 그렇게 해낼 수 있으리라 자신한다. “한국사회복지사협회에서 제시한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이란 게 있어요. 미국사회복지사협회도 마찬가지 강령을 갖고 있구요. 빈곤아동과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그들이 다른 사회 구성원과 다름없이 평등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 제도를 변화시키고 법제화시키는 사회행동은 사회복지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윤리와 가치라는 거예요.” 강령은 사회복지사가 ‘인본주의 평등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하고 천부의 자유권과 생존권의 보장활동에 헌신’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특히 사회 경제적 약자 편에 서서 사회정의와 평등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함께 일하며 사회제도 개선에 관련된 제반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강 대표는 “사회복지사 한 사람의 사회정의와 사회행동이 법제화에 미친 영향력을 재평가한다면 사회복지사 재교육과 재훈련이 보완돼야 한다”고 말했다. 빈곤아동 권리보장과 지역복지력 구축을 위해 시급하다. ◆한 사람의 사회복지사가 사회를 바꾼다 = 논문은 언뜻 보기에도 ‘논문답지 않다’. 대신 ‘강명순스럽다’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260쪽 분량의 두툼한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컬러사진들이다. “30년동안 수십번 이사를 했는데 그동안 슬라이드 자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끌어안고 다녔어요. 2000장이나 돼요. 대부분 직접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찍은 거예요. 1987년 미국 감리교회에서는 625 동란 이후 사진을 제공해줬구요.” 그 가운데 200여장을 선별했다. 걸러내진 자료만도 책 한권 분량을 될 거란다. 사진은 그가 빈민지역과 그곳에서 사는 아이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대변한다. 한 통신회사에서 한국어판 논문을 인쇄하기 직전 500만원을 후원해줬고 그래서 컬러출판이 가능했다. 지금 그는 또다른 후원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번 출간한 ‘부스러기가 꽃이 되다’(2005)로 벌어들인 돈까지 투자해 논문 1500권을 인쇄했지만 현장에서 활동 중인 사회복지사들에게 전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적어도 활동가들과 공유할 정도만이라도 추가인쇄가 필요하다. 강 대표는 스스로를 ‘참 삐딱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가난한 아이들에 대해서는 밑도 끝도 없이 한없이 푸근하고 따뜻한 눈길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논문을 통해 그가 아이들을 보는 시선을 확산시키고자 한다. “빈나 2020운동에 동참해주세요. 2020년까지 빈곤아동 결식아동이 한명도 없는 나라를 함께 만들어요.”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부스러기사랑나눔회는 강명순 대표는 1975년 서울 사당동 빈민지역에서 처음 ‘탁아방’ 문을 열고 한 사람당 1000원씩 ‘부스러기’ 기부를 받아 빈민지역 아동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2001년 법인등록을 거쳐 부스러기사랑나눔회로 거듭났고 2007년 현재 273개 지역아동센터와 17개 지부, 학대받은 아동을 위한 쉼터 두곳까지 운영 중이다. 밥을 굶거나 학대받은 아이들 9700여명이 바로 그의 행복의 원천이다. 지역아동센터나 복지관을 이용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사회복지사가 직접 찾아가는 ‘길거리 지역사회복지’ 2007-07-30
- 미국 대학입학 자격시험 SAT 어떻게 공부하나 SAT란 어떤 시험인가 SAT는 Scholastic Aptitude Test 의 약자로 미국 대학에서 지원자들의 학업성취 능력을 가늠할 수 있도록 고안된 표준화된 시험이다. 1926년 처음 도입된 이후에 SAT는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쳤는데, 최근의 시험형식의 변화는 SAT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세세한 변화는 차치하고,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짧은 글을 읽고 자신의 의견을 논술해야 하는 작문이 첨가됨으로써 SAT의 고득점이 이전 보다 조금은 어려워 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UCLA 등의 명문대학들이 기존의 SAT가 학습 능력에 필수적인 논리적이며 비판적인 읽기나 작문이 아니라 단지 어휘력을 암기하면 되는 단순한 시험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였고, 이러한 문제제기를 시험출제기관인 ETS가 매우 심각하게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New SAT는 기존의 단순한 암기식 공부가 아닌 대학과정에서 필수적인 읽기와 쓰기에 초점을 맞춘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월이 지나면 당연히 다른 형식의 SAT가 선보일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번의 개정이 상당히 전반적이어서 당분간 이러한 시험형식이 지속될 것임은 거의 틀림이 없을 것 같다. SATⅠ 시험의 형식은 다음과 같다. 점수는 객관식의 경우 한 문제를 맞히면 1점, 틀리면 0.25 감점, 답을 하지 않으면 0점 처리 되므로 합산은 맞은 개수 - 틀린 개수/4 이다. 이 수치에 수험생들의 결과를 백분율로 처리하고 각각의 영역 점수대인 200에서 800으로 전환하면 총 만점이 2400점이 된다. SAT 점수는 엄격한 의미의 절대 평가는 아니기 때문에, 몇 개를 맞아야 얼마의 점수를 받는 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잘 못 보았다고 생각한 시험에서 고득점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개정된 SAT를 이전의 시험과 비교해보면 크게 두 가지 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새로운 SAT는 작문과 읽기 영역이 대폭 강화되어, 수학 실력보다는 언어영역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수학에 강점을 가진 한국 학생들, 특히 국내에서 이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다소 시험 준비의 부담이 더 많아 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영작을 부단하게 연습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단기간에 고득점을 기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의 점수가 필요한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다. SAT는 미국 대학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을 위한 시험이다. 물론 2000개가 넘는 미국 대학의 수를 고려할 때, SAT 점수가 없이도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은 적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주립대학 이상의 대학에서는 필수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명문 대학들은 입학 사정 과정에서 SAT에 비중을 두는 이유는 대학의 입장에서 각양각색의 고등학교들의 내신 점수를 신뢰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고민을 갖고 있다. 표준화 되어 있으면서 백만 명이상이 치루는 SAT는 미국의 적지 않는 고등학교 들이 내신 점수를 후하게 주는 관행에 대한 대학들 나름대로의 안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SAT가 대학 입학 사정의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됨은 확실하지만, 몇 점을 맞아야 어느 대학을 갈 수 있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미국의 명문대학의 경우 신입생 선발SAT 점수 외에, 학점평균 (G.P.A), 수행평가, 지원자의 에세이, AP, 그리고 SATⅡ 등을 함께 고려하기 때문에, 훌륭한 여러 자격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SAT 점수가 다소 떨어지더라도, 명문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다른 면에서 본다면 높은 SAT 점수가 낮은 학점, 엉성한 에세이, 한가한 학생 활동 경력을 보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명문대학은 다소 SAT 점수가 떨어지더라도 활기에 찬 학생활동을 했고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가진 지도자적 능력을 가진 학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개정된 SAT의 이제껏 평균은 약 1520점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2100 이상의 점수 이상을 요구하는 명문 대학들이 많다. 특히 해마다 미국 대학의 경쟁률이 높아져 가고 있는 추세를 고려할 때, 많은 지원자들을 처리해야 하는 명문대학의 경우 SAT는 일차적으로 학생들을 걸러 내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음은 분명해지고 있다. 즉 높은 SAT 점수가 명문대학의 입학을 보장하는 도구는 분명히 아니지만, 낮은 SAT 점수로는 ‘본선대회’에 참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화 되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작문과 독해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주제를 정리하는 학습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최 재 진 솔에듀 원장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7-27
- SAT를 바로 알기 1. SAT란 어떤 시험인가? SAT는 Scholastic Aptitude Test 의 약자로 미국 대학에서 지원자들의 학업성취 능력을 가늠할 수 있도록 고안된 표준화된 시험이다. 1926년 처음 도입된 이후에 SAT는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쳤는데, 최근의 시험형식의 변화는 SAT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세세한 변화는 차치하고,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짧은 글을 읽고 자신의 의견을 논술해야 하는 작문이 첨가됨으로써 SAT의 고득점이 이전 보다 조금은 어려워 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UCLA 등의 명문대학들이 기존의 SAT가 학습 능력에 필수적인 논리적이며 비판적인 읽기나 작문이 아니라 단지 어휘력을 암기하면 되는 단순한 시험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였고, 이러한 문제제기를 시험출제기관인 ETS가 매우 심각하게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New SAT는 기존의 단순한 암기식 공부가 아닌 대학과정에서 필수적인 읽기와 쓰기에 초점을 맞춘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월이 지나면 당연히 다른 형식의 SAT가 선보일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번의 개정이 상당히 전반적이어서 당분간 이러한 시험형식이 지속될 것임은 거의 틀림이 없을 것 같다. SATⅠ 시험의 형식은 다음과 같다. 점수는 객관식의 경우 한 문제를 맞히면 1점, 틀리면 0.25 감점, 답을 하지 않으면 0점 처리 되므로 합산은 맞은 개수 - 틀린 개수/4 이다. 이 수치에 수험생들의 결과를 백분율로 처리하고 각각의 영역 점수대인 200에서 800으로 전환하면 총 만점이 2400점이 된다. SAT 점수는 엄격한 의미의 절대 평가는 아니기 때문에, 몇 개를 맞아야 얼마의 점수를 받는 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잘 못 보았다고 생각한 시험에서 고득점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개정된 SAT를 이전의 시험과 비교해보면 크게 두 가지 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새로운 SAT는 작문과 읽기 영역이 대폭 강화되어, 수학 실력보다는 언어영역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수학에 강점을 가진 한국 학생들, 특히 국내에서 이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다소 시험 준비의 부담이 더 많아 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영작을 부단하게 연습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단기간에 고득점을 기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2. 누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점수가 필요한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다. SAT는 미국 대학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을 위한 시험이다. 물론 2000개가 넘는 미국 대학의 수를 고려할 때, SAT 점수가 없이도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은 적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주립대학 이상의 대학에서는 필수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명문 대학들은 입학 사정 과정에서 SAT에 비중을 두는 이유는 대학의 입장에서 각양각색의 고등학교들의 내신 점수를 신뢰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고민을 갖고 있다. 표준화 되어 있으면서 백만 명이상이 치루는 SAT는 미국의 적지 않는 고등학교 들이 내신 점수를 후하게 주는 관행에 대한 대학들 나름대로의 안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SAT가 대학 입학 사정의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됨은 확실하지만, 몇 점을 맞아야 어느 대학을 갈 수 있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미국의 명문대학의 경우 신입생 선발SAT 점수 외에, 학점평균 (G.P.A), 수행평가, 지원자의 에세이, AP, 그리고 SATⅡ 등을 함께 고려하기 때문에, 훌륭한 여러 자격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SAT 점수가 다소 떨어지더라도, 명문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다른 면에서 본다면 높은 SAT 점수가 낮은 학점, 엉성한 에세이, 한가한 학생 활동 경력을 보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명문대학은 다소 SAT 점수가 떨어지더라도 활기에 찬 학생활동을 했고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가진 지도자적 능력을 가진 학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개정된 SAT의 이제껏 평균은 약 1520점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2100 이상의 점수 이상을 요구하는 명문 대학들이 많다. 특히 해마다 미국 대학의 경쟁률이 높아져 가고 있는 추세를 고려할 때, 많은 지원자들을 처리해야 하는 명문대학의 경우 SAT는 일차적으로 학생들을 걸러 내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음은 분명해지고 있다. 즉 높은 SAT 점수가 명문대학의 입학을 보장하는 도구는 분명히 아니지만, 낮은 SAT 점수로는 “본선대회”에 참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화 되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작문과 독해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주제를 정리하는 학습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7-26
- 사람이 사라진 증오의 한국전쟁 한국전쟁이 한반도에 남겨놓은 상처는 너무나 컸다. 3년여에 걸친 전쟁은 ‘모든 것을 석기시대로 돌려놓았다’는 말처럼 공장 집 등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사라지게 했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한국전쟁은 당시 한반도에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며 그 중 20%는 실제 죽거나 다쳤다. 정확한 한국전쟁의 통계는 없다. 다만 추정만 할 뿐이다. 정확한 통계 자체가 불가능했다. 현재까지 한국전쟁 중 죽거나 다친 사람은 대략 남북한 합쳐 300여만명에서 많게는 500여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한이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160여만명, 북한이 350여만명이었다. 여기에 유엔군과 중공군으로 참여한 외국군의 사상자도 50여만명에 이르렀다. 한국전쟁 내내 북한 평양시에 쏟아부은 미군 폭탄의 숫자가 당시 평양시민보다 많았다는 이야기는 한국전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사례다. 전쟁은 전선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전선과 후방이 따로 없었다. 민간인 사이에서도 서로 죽이고 죽이는 상호보복이 횡행했다. 산업 파괴도 가공할 수준이었다. 남한은 일반공업시설의 40%, 주택의 16%가 파괴됐다. 폭격이 일상화됐던 북한 역시 전력의 74% 화학공업의 70% 등이 파괴됐다. 평화네트워크 이준규 정책실장은 “한국전쟁을 다룬 책에서 나온 문구처럼 가장 좁은 공간에 가장 많은 총알을 쏟아 부었고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고 한국전쟁을 평가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는 남북 서로에 대한 화해할 수 없는 증오였다. 가공할 학살과 파괴는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말 자체를 입에 담지 못하게 했다. 한동안 남한에서는 평화통일이 불온시됐고 무력북진통일이 국가의 목표가 될 정도였다. 전쟁을 겪은 사회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집단으로 앓았다. 그것이 치유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다.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는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 전쟁을 통해 어떻게 증오하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20세기 냉전의 상징이었다. 특별취재팀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7-24
- 한나라당 검증 2라운드 공격 포인트 이명박 “최태민 의혹 밝혀라” 박근혜 “은닉재산 분명 있다” 이명박-박근혜 양측은 청문회 이후 강도 높은 2차 검증을 통해 대세를 결정 짓겠다고 벼르고 있다. 2차 검증의 후보군은 이미 청문회에서 어느정도 걸러진 상태다. 양측은 청문회에서 제기된 의혹을 중심으로 상대방을 맹공하겠다는 복안이다. 이 후보측이 향후 박 후보 공격소재로 꼽는 것은 △고 최태민 목사건 △영남대 강취 △육영재단 파행운영 △정수장학회 의혹 등이다. 최태민 목사건은 신분이 불투명한 그가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던 박 후보를 앞세워 부정축재했다는 의혹이다. 문제있는 측근을 오랜 세월 비호하고 최근에도 감싸안는 것은 대통령 자격에 문제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영남대 강취의혹은 박 후보가 29세의 어린 나이에 영남대 이사장이 된 과정과 측근 4인방이 전횡을 일삼았다는 내용이다. 육영재단 의혹은 최 목사 가족의 재단운영을 둘러싼 전횡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최 목사 딸이 수백억원대 재산을 모으는데 육영재단이 이용됐다는 의혹도 있다. 정수장학회 운영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도 공격의 소재다. 정수장학회를 사회에 환원해야한다고 압박할 예정이다. 박 후보측이 꼽는 이 후보에 대한 공격포인트는 △병역면제 의혹 △옥천땅 투기 △도곡동 토지은닉 △양재동건물 차명보유 △BBK 관련 △천호동 재개발 의혹 등이다. 병역면제의 경우 65년 신체검사에서 고도 기관지확장증이라는 중병판정을 받았음에도 이후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고 건설현장에서 밤새 술마셨다는 의혹이 핵심이다. 옥천 땅은 77년 샀다가 82년 처남인 김재정씨에게 판 이후 마을 주민 명의로 인근에 농지를 추가매입했다는 의혹이 새롭게 추가됐다. 도곡동 땅 은닉은 처남 김씨가 땅을 산 자금출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쟁점이다. 이 후보가 땅의 진짜 주인이라는 의심이다. 78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의혹도 거론된다. 이 후보와 친형 이상득 국회부의장, 장인 김 모씨 등이 분양대상이 아니었음에도 아파트를 분양받았다는 얘기다. 이 후보의 맏형과 처남이 대주주인 다스 자회사 홍은프레닝이 천호동에 주상복합건물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도 검증 후보군이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