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엄마와 자녀가 함께 보는 새책] 구비구비 사투리 옛이야기 노제운 지음 / 이승현 그림 해와나무 / 9800원 정신분석적인 시각으로 한국의 옛이야기를 연구해온 저자가 옛이야기의 ‘원형 복원’에 심혈을 기울여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사투리’ 문체로 풀어 쓴 책이 출간됐다. 이 책 ‘구비구비 사투리 옛이야기’에는 아홉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저자는 아홉 편의 옛이야기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전국각지에 흩어져있는 이야기들을 모두 모아 공통된 요소를 살려 완성한 것이다. 특히 오랜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옛이야기의 고유의 맛을 살리고, 어린이들이 이야기를 더욱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감수를 받아 전국 각도의 사투리로 옛이야기를 엮었다. 단단한 이야기구조에 사투리 문체를 사용한 아홉 편의 이야기는 국내 유명 성우들의 목소리로 녹음되어 CD로 제작됐다. 맛깔스러운 사투리 문체에 이야기 본래의 형태가 살아있는 옛이야기를 책으로 읽고 CD로 듣는다면, 어린들의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마음이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 이야기 경제학, 법학 등 각 분야별로 처음부터 현재까지의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시리즈가 출간됐다. 시리즈 ‘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거나 지역적 기준을 가지고 만든 책이 아니다. 다양한 분야를 청소년들이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각각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냈다. 시그마북스/각권 1만5000원 ■쿵쾅쿵쾅 심장이 뛰어요 신나는 인체 탐험 시리즈는 아이들이 그림과 쉬운 설명을 통해 우리 몸에 대해 재미있게 배울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다. 이번에 출간된 다섯 번째 이야기 ‘쿵쾅쿵쾅 심장이 뛰어요’에서는 심장의 생김새와 각각의 명칭, 하는 일에 대해 쉽게 익힐 수 있다. 파멜라 힐 네틀턴 지음/베키 샤이프 그림/오동원 옮김/애플트리태일즈/8000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7-02
- 해양수산부장관 기고 원양산업, 꿈은 이루어진다 강무현 해양수산부 장관 1957년 6월 29일은 우리나라 수산업의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날이다. 이 날 우리의 첫 원양어선 230톤급 ‘지남호’가 인도양에서 조업을 위해 부산항을 출항했다. 전쟁으로 변변한 산업도 없었던 당시 원양어업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정부의 역점사업이었다. 지남호 출항식에는 상공부장관 해무청장 국회의원이 참석했고 해무청 어로과장이 직접 승선해 조업현장으로 출발했다. 지남호(指南號)는 남쪽으로 향하라는 의미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명명한 이름이기도 했다. 이처럼 국민들의 기대 속에 출항한 지남호는 첫 조업지 인도양에서 50톤의 참치를 어획하고 일부를 미국에 수출해 귀중한 외화를 획득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선주를 경무대로 직접 불러 격려했고 지남호가 잡은 참치를 프란체스카 여사가 토막내 주한 외교관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한 원양어업은 태평양 참치, 북태평양 명태, 대서양 트롤어장 등을 개척하며 성장해갔다. 850여척이 출어했던 1977년은 원양어선 세력이 최대였던 해다. 태극기를 단 우리 원양어선들이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벌어들인 외화는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초석이 되었음은 물론이며 국위선양과 민간외교에 기여한바 컸다. 그러나 이후 우리 원양어업은 험난한 파고를 겪어야만 했다. 1977년 미국·소련의 200해리 EEZ 선포로 당시 북태평양에서 조업하던 60여척이 일시에 어장을 잃었는가 하면 1994년 UN해양법 발효 이후 이어진 연안 국가들의 자원관리 강화로 어장이 지속적으로 축소돼왔다. 조업범위가 지속적으로 축소되면서 우리 원양어선 세력도 크게 감소하였다. 1970년대에 850여척에 달했던 원양어선은 2006년 말 현재 393척에 불과하고 어획량도 1992년 102만톤에서 2006년 63만톤 수준으로 줄었다. 더욱이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으로 일부 품목은 값싼 수입수산물과 힘겨운 경쟁을 벌이게 됐다. 원양어업 개척 50주년을 맞으며 정부는 원양산업 부활 의지를 다지고 있다. 갈수록 악화되는 여건 속에서도 우리 선원들이 피땀 흘려 개척한 원양어장은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우리의 해외자원이며 원양 수산물은 국내 수산물 공급의 21%를 차지하는 주요한 영양 공급원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원양산업발전법 제정을 통해 원양어업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해외투자 유통·가공 등 관련 산업에 대한 투자를 통해 원양어업을 고부가가치 원양산업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특히 원양업계 수익구조를 다변화하고 해외수산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수산물 가격안정과 국민건강에 기여하도록 할 계획이다. 우리는 230톤급 지남호로 시작해 세계 제12위권의 교역국가로 성장한 저력을 갖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힘들게 확보한 세계 곳곳의 원양어장은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세계 시장에 의지를 가지고 도전해 온 우리 경제의 생생한 현장이다. 다시금 바다와 원양어업에서 국민의 희망을 끌어 올리는 역사를 써내려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27
- <내일시론>부시의 때늦은 대북정책 변신(한면택 2007.06.27) 부시의 때늦은 대북정책 변신 북핵 6자회담의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의 전격적인 북한방문 후 북핵폐기 및 관계정상화 협상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 서너 달 중단된 북핵 폐기와 관계 정상화 협상의 모멘텀을 되살려 속도를 내려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워싱턴의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한 것으로 보인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이 너무 때가 늦어 버렸으며 북한의 핵폐기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아직도 지배적이기 때문으로 관측된다. 워싱턴의 회의적인 시각이 가셔지지 않고 있는 것은 북한 김정일 정권을 여전히 믿지못하는 측면도 있지만 부시 미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갈팡질팡해왔기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다.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의 방북은 부시 대북정책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180도 바뀌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악의 축, 북한과는 직접 대화하지 않겠다고 몰아 부쳐놓고서는 6자회담 틀 안에서는 직접 대화가 가능하다고 발을 빼더니만 베를린에서 회동한 것으로 6자회담 틀 밖으로 나간데 이어 이번에는 평양에서 얼굴을 맞대고 1대 1 협의를 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대 변화가 제자리로 돌아온데 불과하고 5년이나 허비한 다음 이뤄졌다는 점에서 때늦은 변신이라는 소리를 면치 못하고 있다. 더욱이 부시 행정부는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우왕좌왕해왔고 최근에는 북한을 달래기 위해 자국의 법규를 깨고 자신들이 쳐놓았던 올가미를 스스로 푸는데 큰 곤혹을 치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시 행정부는 지난 2002년 제임스 켈리 당시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에서 농축 우라늄 이용 핵개발 문제로 정면충돌, 현재의 북핵위기를 초래했다가 5년만에 이를 풀겠다면서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를 평양에 보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2005년 북한이 달러화를 위조해 유통시키는 등 불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면서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 아시아에 있는 북한자금 2500만 달러를 동결시켜 북한정권 돈줄 조이기에 나섰고 북한은 핵실험 강행으로 정면 맞대응해왔다. 부시 미 행정부는 북한으로부터 핵실험 강행으로 되치기를 당한 다음에나 북한 달래기에 나섰으나 자기모순을 푸는데 갈팡질팡했으며 이번에 북한 자금을 반환하는 데에도 두 번의 뼈아픈 양보를 감수해야만 했다. 한번은 북한자금 2500만달러 가운데 불법행위와 관련 없는 절반이하만을 돌려주겠다는 말하더니 북한의 강한 불만을 사고 전액 반환으로 입장을 바꿨다. 또 한번은 북한자금을 뉴욕연방준비은행을 통해 송금토록 허용함으로써 북한에 재정적 면죄부까지 부여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으로서는 현재까지 북한으로부터 얻어낸 것이 별로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북한과 대화하라고 촉구해온 워싱턴 포스트 등 주요 미 언론들 마저 지금은 부시 행정부의 모순적인 행동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게다가 지금까지 부시 행정부가 양보한 것은 북한과의 빅딜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제자리에 돌아오는데 사용한데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5년을 허송세월로 보낸 다음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사용한 양보조치에 대해서 미국내 비판론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북한과의 실질적인 핵폐기 및 관계정상화를 위한 빅딜에서 획기적인 양보와 주고받기를 할 수 있을지 의문시되고 있다. 여기에 미 언론들은 벌써 8년전 클린턴 행정부 임기말의 북미 협상 국면이 현재 되풀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클린턴 임기말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무장관이 평양에 가고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 양국간 빅딜은 물론 국교정상화까지 임박한 것처럼 보였으나 미국의 정권교체로 없었던 일이 돼버린 바 있다. 이번에도 부시 대통령이 임기말 무언가 외교 업적을 남기려고 북한과의 협상에 적극성을 보일지라도 1년반 후에는 무조건 백악관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8년전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미 전문가들은 관측하고 있다. 미국의 정권 교체 가능성 때문에 언제 합의가 물거품이 될지 모르고 언제 딜을 해야 이득이 될지 손익계산을 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에서 북한 김정일 정권이 핵폐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릴지도 의문시 되고 있다. 부시 행정부나 김정일 정권이 앞으로 1년반안에 그랜드 바겐을 성사시키는 게 서로에게 최대 이익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 서면 예측하지 못하는 급진전이 이뤄질 수도 있겠지만 워싱턴에서는 현재 미국의 차기 정부 출범 때까지 북핵위기가 정면충돌코스를 피하고 위기를 통제할 수 있는데 만족해야 할 것이란 관측이 주를 이루고 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26
- 어머니 해맑은 웃음의 그날 위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은 1985년 12월 12일 창립됐다. 군사정권의 탄압이 서슬 퍼렇던 당시 민가협은 학생·노동자·시민 등 민주화를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방패막이가 됐다. 민가협은 창립과 함께 구속된 민주인사에 대한 석방투쟁과 각종 시위와 농성을 지원하는 투쟁을 벌였다. 87년 6월항쟁 과정에서도 민가협 어머니들은 헌신적으로 시위현장을 지키며 자식 같은 학생들은 온몸으로 지켰다. 명동성당 등지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먹을거리를 준비해 학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도 했다. 민가협에서 10여년 이상 활동한 남규선 국가인권위원회 시민교육팀장은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들이 자식의 문제로 민주화대열에 나섰지만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투쟁했다”며 “이들의 역할이 시민들이나 국제사회가 보기에도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6월항쟁이후 민가협은 통일과 인권문제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이라는 인권콘서트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으며, 지난해 12월에는 제18회 ‘인권콘서트’가 열렸다. 민가협은 30~4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비전향장기수의 석방운동을 벌여왔으며, 2000년 9월 63명의 비정향장기수가 북한으로 돌아가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89년에는 악명 높은 고문경찰 이근안 경감을 국민들이 직접 검거하자며 현상수배를 하기도 했다. 93년 9월부터 계속된 ‘목요집회’는 지난 21일 669회째를 맞았다. 이날 집회에서 민가협 회원들은 국가보안법을 하루바삐 철폐하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특히 최근들어 경찰의 국가보안법 수사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경계하면서 공안분위기를 조성하는 참여정부를 규탄했다. 한지연 민가협 간사는 “민가협 운동이 양심수 석방운동에서 확장된 개념으로 국보법철폐와 소수자운동 등을 벌여나가고 있다”며 “어머니들이 자식 때문에 운동을 시작해 새로운 세상을 봤다고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가협도 세월의 흐름속에서 예전과 같은 왕성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20년이 넘도록 여전히 열성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20여명의 어머니들이 있지만 한창 때 수백명의 회원이 움직일 때와는 사뭇 다르다. 남 팀장은 “어머니들이 국가보안법의 폐단을 알리고 억울한 사람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하지만 겨우 1명의 무죄만 밝혀냈을 뿐인데 이제 그 어머니들도 많이 늙으셔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25
- [내일시론]북핵, 축지법(縮地法)은 없는가 북핵, 축지법(縮地法)은 없는가 까다롭던 BDA(방코델타아시아)문제가 일단락되고 북한이 IAEA(국제원자력기구) 실사단을 초청함에 따라 북한핵문제가 이제 한고비를 넘겼다. 내주 중엔 IAEA 실사단이 평양에 들어가고 영변 핵시설 폐쇄 조치가 이루어지면 7월중엔 6자회담이 재개되고 이어 6국 외무장관회담이, 7~8월중엔 한반도 평화포럼이 열리게 될 전망이다. 우리는 또 한동안 평화무드에 젖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한핵문제가 이것으로 순조롭게 풀려나갈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봐도 그렇고 핵문제의 복잡성으로 봐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전격적으로 NPT(핵확산 금지조약)를 탈퇴하면서 불거진 북한의 핵파동은 벌써 14년을 끌어왔다. ‘제네바 합의’가 있었음에도 2차 핵파동이 다시 터지고, 또 5년째를 맞고 있다. 6자회담이 재개되면 바로 BDA보다 훨씬 어려운 북한의 모든 핵프로그램 목록 작성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영변 원자로가 폐쇄돼도 고농축우라늄(HEU)문제가 남게 된다. 북한은 당초부터 북한에 HEU는 없다고 주장해 왔음으로 이를 의심하는 미국과 지루한 핵게임이 또 계속될 것이다. HEU, 불능화 문제 등 산 넘어 산 18일 서울에 온 크리스토퍼 힐 미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는 핵 불능화(disablement)조치에 대해 ‘불능화’가 연내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했지만 과연 그럴까. 힐 대표는 그럴만한 근거를 갖고 말했겠지만 미국의 계산대로 되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봐왔다. 이 단계에 가면 북한은 테러지원국 해제, 적성국 교역법 지정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BDA문제 하나를 푸는데 4개월이 걸렸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005년 9월에 합의된 6자회담 공동성명은 말대 말, 행동대 행동의 원칙에 따른 합의 실현을 명시하고 있다. 믿을 수 없으니 하나하나 주고받기식으로 협상을 해나가자는 것이다. 북미간에는 그만큼 불신의 벽이 높다는 얘기다. 이런 식으로는 북핵문제가 미국의 부시정권 임기내에 풀린다는 보장이 없다. 잘못되면 그 다음정권에서나 결말이 날지도 모른다. 핵 피로현상이 도처에 누적돼 있는데 갈 길은 멀기만 하다. 이 문제로 해서 남북문제는 물론 한미문제도 뒤뚱거리고 있다. 미국은 2002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북미간 고위급회담에서 미국은 북한이 완전한 핵포기를 전제로 북한과 국교수립을 하고 대북 경제제재 해제,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 등을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대담한 제안’(bold approach)이다. 일부에서는 북한판 마샬플랜이라고도 한다. 미국 민간연구기관에서도 북미간 ‘빅딜’(big deal 혹은 grand bargaining)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빅딜도 골자는 ‘대담한 제안’과 대동소이해 북한이 핵 등 대량살상무기를 전면 폐기하고 미국은 북한의 안보를 보장하며 대북 경제지원을 한다는 것이다. 핵문제, 결국 빅 딜이 최선이다 북한도 2003년 4월 베이징에서 열린 회담에서 ‘통큰 제안’이란 것을 했었다. 통큰 제안은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국교를 정상화하며 경제지원을 해주면 핵을 폐기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양측이 공히 핵문제를 푸는 데는 빅딜을 통한 일괄타결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라는데 공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딜이 되지 않는 것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상호 불신 때문인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과 대량살상 무기를 먼저 포기하면 북한이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는 것이고 북한은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면 핵을 포기 하겠다는 것이다. 순서의 문제를 두고 양측이 피나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상호불신이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이란 협상방식을 택하게 하고 있으나 이런 식으로는 이 문제를 풀기 어렵다. 설령 풀린다고 해도 부지하세월이 될 것이다. 북미간에 일정량의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다른 이득을 보겠다는 계산이 아니라면 현재의 협상 방식은 참으로 비경제적이고 무모하기까지 하다. 초기이행 조치를 통해 얼마간 신뢰가 쌓이면 결국 빅딜을 통해 모든 문제를 포괄적으로 풀어야 한다. 빅딜을 거듭 촉구한다. 임 춘 웅 객원 논설위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20
- <특별취재>중국망 취재진 현장법사 서역기행의 족적을 따라서 - (마지막회) 라흘(拉合爾), 파키스탄-인도 접경지대 이슬라마바드에서 라흘까지는 400km가 걸린다. 우리는 시내에 머무르지 않았고 파키스탄-인도 접경의 와가국경검문소에 서둘러 도착해 국기하강식을 감상했다. 두 국가 간의 긴장관계 때문에 접경지역에서 세계적 볼거리가 되는 신기한 국기하강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신기했다는 것은 반세기 동안 적대적 관계였던 두 국가가 매일 같은 지역, 같은 시간에 같은 방식으로 얼굴을 맞대고 국기하강식을 한다는 것이다. 양국은 각각 자신의 지역에 관람대를 설치해, 국기하강식을 관광상품이자 애국주의의 교재로 삼고 있다. 현지시간 오후 4시. 파키스탄 지역의 높다란 관람대에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남녀가 각각 양측에 섰다. 관중들은 입구에서부터 성별에 따라 분리해서 들어왔다. 위엄을 차린 의장대 병사는 양손을 뒤로 하고 출입구 옆에 섰다. 양국의 문 사이에는 약 1m정도의 중간지대가 있다. 양측의 깃대에는 파키스탄의 신월기와 인도의 삼색기가 마주보며 펄럭이고 있었다. 델리(德裏)를 관통하는 세월의 터널 델리는 뉴델리와 올드델리로 이뤄져 있다. 한쪽은 첨단의 국제적 대도시이고 다른 쪽은 역사를 충실히 보전하고 있는, 7개 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다. 한쪽은 지난 세기에 오로지 사람들의 계획에 따라 세워진 현대적인 ‘컨벤션 센터’이고 다른 쪽은 세월이 흐르면서 쌓이고 남겨진 역사적 표본이다. 이런 공존은 영화 속 몽타주 기법으로 꾸며낸 장면이 아니다. 인도에서 몇 세기의 세월을 넘나들고 싶다면 그저 ‘델리문’을 통과하면 된다. 올드델리는 ‘세속 천당’ 같다. 도로는 겹겹이 쌓여 있고 길 위의 차량은 떼를 이룰 만큼 많다. 한가한 소 떼와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강아지, 도로를 횡단하는 사람들과 각종 자동차, 마차, 손수레, 삼륜차들이 아무 일 없이 잘 어울리고 있다. 녹지도, 공터도 볼 수 없었다. 도시 전체가 낡은 주택과 잡동사니와 차량들로 메워져 있다. 번잡하고도 번화한 각종 점포와 길가에 늘어져 있는 좌판들은 부지불식간에 인도판 ‘청명상하도’(북송의 도시풍경을 묘사한 중국의 1급 국보)를 그려낸다. 타지마할, 권력과 사랑의 희비극 아그라(阿格拉)는 델리에서 남쪽으로 240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인도 북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다. 델리에서 출발해 차로 6시간 걸려 우리는 아그라의 유명한 붉은 성과 타지마할에 도착했다.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제5대 황제 샤 자한이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을 위해 건설한 묘지이다. 타지마할에는 전자제품과 담배, 라이터 등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또 입구에서는 공항에서와 같이 엄격한 안전검사를 거쳐야 한다. 신체검사 시에는 신발을 벗어야 하며 맨발로 타지마할에 들어서야 한다. 타지마할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고 등을 켤 수도 없다. 어둠 속에서 관리인이 손전등으로 벽을 비추기 때문에 벽에 가득한 홍보석과 조모녹 등 다양한 보석을 볼 수 있다. 그 보석이 발하는 찬란한 광택이, 화려함으로 가득했던 지난날의 무모한 사랑을 짐작하게 해준다. 영웅호걸의 위대한 전략, 낭만적인 사랑, 정치적 모략, 부자간의 배반과 형제간의 살인 등은 화려하면서도 비극적인 비문일 것이다. 녹야원, 부처 최초의 설법지 바라나시(瓦拉納西)는 1957년 이전까지 베네레스로 불렸다. 인도북부 갠지스강 중류의 바라나와 아시 두 강 사이에 있으며 힌두교, 불교, 지나교의 주요성지이다. 주요 명승고적지에는 갠지스강 목욕탕과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설법을 편 녹야원이 있다. 이곳은 현장법사가 “천신만고를 겪은 끝에 도착한 극락의 서방정토”라 부른 곳이다. 녹야원은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고대 인도불교 4대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12세기 후반에 녹야원은 터키의 침략을 받아 그로써 건축, 불상 등이 심각하게 파괴됐다. 일부만 남은 유물 가운데 아유왕 석주(돌기둥)가 가장 유명하다. 현재 이 석주의 주요 부분과 출토된 홍사석 보살상 등 수많은 불교문물은 모두 ‘녹야원 고고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바라나시는 힌두교도가 시바신에게 참배하는 곳이라 시내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시바신 참배사원이 건설돼 있다. 바라나시에서 가장 신성한 곳은 갠지스강 욕탕이다. 신도들은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면 평생의 죄악을 씻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신도들은 또 죽은 후에 화장돼 성스러운 강에 흩뿌려지길 기대한다. 여신의 혼과 함께 승천하기 위해 갠지스강변의 간이 화장터는 밤낮으로 연기가 끊이지 않는다. 다음 여정인 보리가야(菩提迦耶)는 석가모니가 성불한 곳으로 인도 바라나시에서 남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에 있다. 보리수 아래서 명상을 바라나시에서 차로 7시간 걸려 도착한 보리가야는 시 전체가 사원과 불탑으로 이뤄져 있는, 그야말로 불교의 성지였다. 보리가야의 중심지인 마하보리사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온 승려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경전을 읽고 있었다. 주요 건축물인 정각탑은 전형적인 인도풍의 나선형탑이다. 하지만 마하보리사를 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탑 뒤 서쪽에 있는 유명한 대보리수다. 부처는 이 나무 아래서 득도해 성불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로 인해 이 나무를 찾는 불교도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가 도착한 때도 보리수 아래는 좌선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중국어를 하는 승려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으니 칭하이라고 답한다. 그밖에도 적지 않은 시장(티벳) 출신 라마교승려들이 머리를 찧으며 불경을 암송하고 있었다. 불교를 믿건 안 믿건, 우리 일행 전원이 보리수 아래 앉아 명상을 하며 심신이 정화되기를 기원했다. 서역행의 종착지 나란타 나란타사(那爛陀寺)는 현장법사 서역행의 종착지다. 이 절의 다른 이름은 유명한 서유기에 나오는 다레인스(다뢰음사)이다. 나란타 유적은 영국 고고학자 알렉산더 캐니햄이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 기재된 내용에 근거해 오랜 발굴 작업을 벌인 끝에 발견했다. 인도의 고성 왕스성 밖에 위치한 나란타사는 한때 인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장관이었던 불교사원이다. 대승과 소승을 불구하고 막대한 양의 불교경전 나아가 브라만교의 가장 오래된 경전과 천문, 지리, 기예, 의약, 교습, 음운 등에 관한 서적이 이곳에 비치돼 있다. 현장법사는 나란타사에 정착해 5년간 불교 경론을 연구했다. 그런 다음 서기 645년경 520여첩, 모두 657부의 불교 경전을 가지고 당나라 장안(지금의 시안)으로 돌아갔다. 오늘 나란타사는 붉은 색의 크고 허물어진 담장에 규모가 작지 않은 탑의 잔해만 남아 있다. 그렇지만 남아 있는 석주에는 천태만상의 모습을 한 부처상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조각돼 있다. 현장이 찾은 서방정토의 종착지는 그렇게 상전벽해 속에 수천 년 역사의 무상함과 신비에 젖어 있었다. 정리 김선태 기자 kst@naeil.com 중국망 취재진은 중국 시안에서 인도 나란타까지, 1300년 전 불법을 얻고자 현장 법사가 떠난 서역기행을 그대로 따라가며 저 위대한 고승의 자취를 기록했다. 현장법사가 걸어간 길의 총연장은 무려 2만5000km로 이른바 실크로드라 불리는 동서횡단로가 이에해당한다. 본지는 이 기록의 일부를 세 번에 나누어 싣는다. 전문과 관련 사진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중국망 한국어판 홈페이지에 전자책으로 제공한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11
- 세대를 넘어 통합의 장으로 승화되길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지 한 세대가 흘렀다. 80년 5월, 홍인화씨는 고등학교에 막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꿈 많은 여고생이었다. 전남도청으로 뛰어갔던 겁 없는 소녀는 27년이 지난 지금 당시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딸을 두고 있는 어머니가 됐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세상에 대한 고민은 여고시절 자신만큼이나 치열한 딸과 어머니가 광주 5·18 민중항쟁 27주년을 맞아 함께 부르는 희망가를 들었다. 내일: 홍의원은 80년 5월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어떻게 시위에 나섰는가? 홍인화(홍): 5·18일 발발하고 19일에 휴교령이 내렸다. 곳곳에서 누가 조사를 받았더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한 마음에 도청에도 자주 나갔다. 집에서는 알 수 없도록 몰래몰래 시위에 참여했다. 내일: 80년 당시 홍의원과 지금의 은진 양의 꿈은 무엇인가? 홍: 집에서는 의대나 약대 진학을 희망했다. 작은 할아버지가 조총련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연좌제에 묶여 있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피해가 이과계로의 진학을 희망하게 한 것 같다. 장은진(장): 사회와 직접 소통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이다. 아직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80년 이후 부모님이 걸었던 길을 나도 걷고 싶다. 홍: 부모 입장에서는 가끔씩 아이의 그런 꿈이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말리고도 싶지만 지역과 역사, 세계 속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적극 후원할 생각이다. 내일: 80년과 비교했을 때 지금 학생들은 어떤 것 같은가? 장: 나와 비슷한 나이에 사회에 대한 뚜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활동한 것이 대단하다. 목숨마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시위대로 뛰어든 것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난 당시로 가서 어머니와 똑같이 행동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친구들도 부모님 세대에 비해 사회고민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활동에 대해 자부심이 크다. 친구들과 함께 ‘독서동아리’를 운영하며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홍: 딸과 고등학교 생활의 공통점이 있다면 ‘독서모임’을 했다는 것이다. 나도 고등학교 때 흥사단 아카데미에서 운영하던 학교별 독서토론회에 참여했었다. 은진이가 나보다 더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라 고민이기도 하다.(웃음) 내일: 80년 5월이 꿈 많은 여고시절이었는데 홍: 학교보다는 사회에 대한 고민이 많아 제대로 된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터질듯 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러면서 5·18을 경험한 것에 대한 뿌듯함과 행복도 있었다. 하지만 혼란의 경험은 나를 염세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주위 선배들의 아픔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길과 답이 있었는데 끝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장: 어머니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일부는 정리된 부분도 있지만 고등학생으로서 가져야 할 사회적 위치와 지적 호기심이 있지 않은가.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은 너무 뻔한 것이라 마찰이 생길 때도 있다. 홍: 고민은 짧게 했으면 한다. 점수나 진학 등 현실적인 부분에서 얘기를 시작하면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있어 가급적 말을 아끼는 편이지만 고민에 빠진 아이를 보면 예전에 나를 보는 것 같아 아쉬울 때도 있다.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생활을 반복하는 것을 군소리 하나 없이 진행하는 것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다. 장: 어머니의 학교생활을 동경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해도 친구들끼리 잘 통하지 않는 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당시는 자유와 민주를 고민하는 시기였고 지금은 누리는 시기이니 생활과 밀접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라고 본다. 내일: 시위대 중 대다수가 도망하고 그 중 지식인이라던 대학생들이 많았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홍: 도망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도 5·18의 공로가 있다. 5·18은 끝까지 남아 도청을 사수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 전체의 상이자 움직임이다. 장: 처음에는 순수한 활동을 하지 못한다면 모두 비겁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망도 있었다. 하지만 광주정신의 위기는 함께 융합시켜 함께 가는 방향으로 해결됐으면 한다. 순수하더라도 사회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현실에서 어떻게 녹일 것인가가 항상 고민이다. 내일: 27년의 간극에서 5월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홍: 5·18이 광주만의 것이 아니다. 당시에 참여했건 아니건, 살거나 죽었거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대구와 부산 등 동서의 화합과 남북의 화합을 통해 세계화로 가는 것을 모색해야 한다. 27년의 간극이 희생과 아픔을 넘어 새 생명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장: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 희망이 소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더 큰 고민과 활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광주정신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보다 진짜 의미를 찾아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는데 반석이 되길 바란다. 내일: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홍: 빵점 엄마라 딸에게 미안하고 그런 엄마인데도 항상 힘을 줘서 고맙다. 그래도 앞으로도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었으면 그리고 타인을 아프지 않게 했으면 한다. 장: 지금의 어머니가 자랑스럽다.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어머니 모습을 좀더 배우고 싶다. 박지호 기자 hoya@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5-18
- 실종 아동등 99% 찾아 장기실종 아동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최근 잃어버린 아이들의 집에 돌아오는 비율이 거의 100%에 육박하고 있다. 아이를 잃어버린 가정이 많았던 예전 기억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2006년에 실종된 비장애아들은 모두 7064명. 이중 장기실종 아동으로 등록돼있는 아동은 19명이다. 단순 계산상으로도 99%가 넘는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이 19명도 지난해부터 법률상 아동의 범위를 14세미만으로 확대함에 따라 늘어난 수치다. 예전과 같이 만 8세 이하의 아이들을 못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장애인 역시 실종된 1만406명 중 장기 실종된 158명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왔다. 장기실종 아동이 급격히 줄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정보통신 등 과학기술의 발전’을 첫 번째로 꼽고 있다. 실종전문기관 관계자는 “얼마 전만 해도 이 동네에서 아이를 잃어버리고 바로 옆 동네에서 아이가 발견돼도 아이를 못 찾는 경우가 있었다”며 “최근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말했다. 경찰이 처음으로 실종아동에 대한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2001년이다. 서울지방경찰청이 통합시스템을 마련하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른 지방청은 예전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전국적인 통합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갖춰진 것은 2004년이다. 경찰청에 실종아동찾기센터를 개소하면서 전국적인 망이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실종아동에 대한 신상이 전국 인터넷망을 통해 공유되면서 길 잃은 아이들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유전자 기술도 이용되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과 함께 하는 DNA활용 실종아동찾기 사업이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의 얼굴이 달라져도 가족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유전자 채취가 시작된 것은 2004년 5월부터다. 경찰에 따르면 현재 관리되는 DNA만 1만6000여건이다. 현재까지 59명이 이를 통해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또 다른 계기가 2005년 12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실종아동 등의 보호와 지원에 관한 법률’이다. 실종아동에 대한 법이 처음 만들어진 것이다. 실종아동의 범위가 14세 미만으로 확대됐고 연령과 상관없이 장애인도 대상에 포함됐다. 아이를 보호하는 사람이나 시설은 반드시 신고를 의무화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5-18
- 시위대의 어머니, 남대문시장 상인들 6월항쟁 인물 야사.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 아름다웠습니다 1 - 시위대의 어머니, 남대문시장 상인들 “학생들이 막 도망 오면 숨겨줬지. 그 땐 다 그랬어.” 87년 6월 서울역 신세계백화점 명동 일대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에 쫓겨 흩어진 시위대를 숨겨주던 남대문시장 상인들에 대한 취재는 예상보다 어려웠다. 우선 20년 전 이곳 남대문시장에서 장사 한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시장을 관리하고 있는 서울남대문시장(주) 관계자는 “1만여 곳의 점포 중 당시부터 영업하고 있는 곳은 20% 정도”라고 말했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른 것인가. 취재에 나서기 전엔 20년이 짧지 않은 세월임을 깨닫지 못했다. 어렵게 만난 고참 상인들이 반가웠다. 그러나 그들은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87년 6월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취재하는 기자를 귀찮아했다. 액세서리 가게를 하는 엄 모(여·60)씨는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가 잘 돼야 여유가 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87년 당시엔 호황이었다. 다들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장사해서 관리비다 뭐다 줘야 하는데, 수입이 줄어드니 마음이 안 좋다”고 한다. 지역에 대형 할인점이 속속 들어선 지난 20년의 유통질서 변화는 이들 삶에 구체적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남대문시장에 뚫린 8군데 골목을 드나들며 시장을 한 바퀴 돌았을 즈음, 큰 길에서 꺾어진 골목에서 30여 미터 들어간 곳에 자리한 오래된 떡집에서 강성애(여·57)씨를 만났다. “그 해 여름에? 데모 많이 했지. 학생들이 막 도망 오면 많이 숨겨줬어. 그땐 다 그랬어.” 20년 전 서른 일곱 살이던 강씨는 고종사촌 언니가 경영하는 떡집에서 일을 하다 경찰에 쫓겨 온 학생들을 2층 식당으로 3층 가게로 피난시켰다. “학생들 올려 보내고 셔터를 바로 내렸어. 경찰이 쫓아와 셔터를 올리려고 하면 ‘최루탄 때문에 괴로워 죽겠는데 어디서 셔터를 올리느냐’고 막 야단 쳐서 보냈지.” 경찰이 무섭지도 않았다 한다. 강씨는 지금은 파출소장이 된 친동생을 포함 친척 중 네 명이 경찰이었다. 당시 경찰이던 고종사촌 오빠에게 강씨는 왜 학생들을 왜 괴롭히냐고 물었는데, 오빠는 “나라에서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좁은 골목 안에서 학생들을 숨겨주었지만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옆 가게 누구도 경찰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바깥 동태를 서로 알려주며 충실한 정보원 역할을 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잃었고, 학생 시위대는 이들의 마음을 얻었다. 시장 골목 안에서 고립된 것은 정권이었다. 당시 대학 4학년이었던 김정수(44)씨는 “주황색 바가지에 보리차를 그득 담아 얼음을 동동 띄워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냉차 아주머니, 때론 야쿠르트를 비닐봉지에 5개 6개씩 담아 학생들의 손에 쥐어주던 아저씨, 팔던 손수건을 학생들의 손에 쥐어 주며 마스크 대용으로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던 아주머니 등등 좁은 시장판에서 나중에는 도망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군이 많아졌다”며 “6월 18일 이후엔 남대문에서 잡힐 걱정은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고 기억했다. “왜 숨겨 주었냐고? 학생들이 잡히면 다 죽는다고 하더라.” 강씨는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지금도 모르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시위대는 “학살정권 고문정권 전두환을 타도하자” 등의 구호도 외쳤다. 박종철군이 경찰 고문으로 사망했고, 6월에는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던 때였다. 짧았던 여름은 가고, 20년이 흘렀다. 투표할 때마다 ‘당첨자를 맞추지 못하던’ 강씨는 97년과 2002년 연이어 자신이 찍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맞았다. 그러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김대중씨는 서민을 위해 잘 할 거라고 생각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딸 아이들이 찍으라고 해서 투표했는데, 둘 다 실망했다”고 말한다. 지금은 박근혜 이명박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많이 한다고 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 생활이다. 강씨는 고종사촌 언니가 하던 떡가게를 물려받아 경영을 하고 있다. 시위대를 숨겨주던 이곳에서 열심히 일해 아이들을 모두 대학 졸업시켰고, 결혼도 시켰다. IMF는 시장에서 떡집을 하는 그에게도 타격을 주었다. 강씨는 “97년을 정점으로 장사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씨나 남대문시장에서 가게를 갖고 일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은 적다. 문제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임노동자들이다.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 차이는 갈수록 벌어지는 것 같다”는 게 강씨의 느낌이다. 양극화는 강씨와 이웃 가게에 일하는 사람들의 삶에도 구체적으로 스며들고 있다. 세를 얻어 하는 것이지만 자신이 경영하는 가게를 가진 상인이 “갈수록 살기 어려운 것 같다”고 말한다. 20년 전에 비하면 말하는 자유는 많이 생긴 것 같은데, 살아가는 자유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낀다. 남대문시장(주) 관계자는 “상가 관리비를 못 내는 가게가 많지는 않지만 장사가 잘 안되니까 쉽게 내지 못 하는 경향은 늘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점포 종업원을 하다 돈을 벌어 다른 곳에 가게를 차리거나, 남대문시장에서 돈을 벌어 다른 곳으로 확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움을 겪는다”면서 “가만히 있어도 손님이 찾아오는 이곳과 다른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해 생기는 어려움도 많다”고 지적했다. 강씨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가게 앞에 줄을 지어 한국의 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 달음에 다가가 흥정을 한다. 상가에서 일본인과 중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할 수 있게 흥정이나 셈 하는 방법을 적은 일본어 중국어 회화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87년 여름 민주주의를 품었던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그날도 오늘도 치열한 생존 경쟁을 치르고 있다.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07
- 진주대아고 1면용 기사 6월항쟁 힘 보탠 ‘까까머리’ 시위 87년 3월 진주 대아고 학생들 ‘학내 민주화’ 요구 ‘눈길’ 87년 2월7일 당시 대학생이던 박종철군이 경찰청 공안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한 이후 국민들의 폭발하는 분노와 이를 짓누르려는 군사정권의 억압으로 정국은 팽팽한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이 얼음을 깬 것은 지방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87년 3월10일 진주대아고 학생 1000여명은 ‘학생회장 직선제와 민주적 운영’ ‘보충수업비 횡령의혹 해명’을 요구하며 교정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은 곧 전국 대학교의 대자보를 통해 알려졌고 대학생들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선 것은 군사정권 당시 없었던 일이었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 정권은 공안경찰을 통해 학생들을 탄압했고 ‘배후에 간첩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위협했다. 결국 경찰의 대대적 단속으로 시위 학생 2명이 제적되고 7명은 징계받은 후 자퇴했다. 하지만 학교는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대아고 학생회장은 87년부터 직선제로 선출됐다. 이후 민주화가 됐지만 이들의 민주화운동은 세월에 묻혔다. 이들은 그 후 아직 명예회복이 되지 않았다. 모두들 피나는 노력으로 사회의 중견으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당시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창원 원종태 기자 jtwon@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