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재취업 준비, 새 이력서 쓰기부터” 부산고용지원센터서 단계별 개인지원서비스 받아 1년만에 실업극복 “재취업 의지가 있다면 당장 이력서부터 다시 써 보세요. 내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들여다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지난 1월 12일 재취업에 성공한 송재석(41·부산시 당간동)씨에게 지나간 1년은 악몽 같은 세월이면서, 동시에 다시 한 번 세상을 배운 수업기간이었다. 송씨가 10년간 몸담아온 중국음식점의 요리사로 마지막 일을 한 것은 지난 1995년 12월. 당시 다른 식당으로 일자리를 옮기기 위해 며칠간 쉬고 난 후였다. 알고 지내던 이들에게 새 일자리를 부탁했으나, 반응이 시원찮았다. 송씨처럼 고급기술자를 채용해선 수지를 맞출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실제로 송씨는 한식·중식·양식·제과제빵 등 4개 자격증을 보유한 베테랑 요리사였다. 어느 식당에서나 송씨의 음식솜씨를 인정했고, 그의 손맛을 탐냈다. 평소엔 보름정도 쉬고 나면 새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기침체와 물가상승 때문에 다시 주방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재료비가 너무 올랐어요. 1만원이던 밀가루 한포가 3만원으로 뛰었고, 배달원 인건비도 너무 높아졌어요.” 송씨가 그 사이 일자리를 알아본 식당만 50여곳. 아직 미혼인 송씨는 그래도 큰 부담은 없었다. 일단 김해에 사는 부모에게 실직을 알렸다. 작은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부모님은 “경기침체 때문이다. 이제 취직은 사람 힘으로 안 되는 모양”이라며 그를 위로했다. 송씨에게 재취업 돌파구를 열어준 곳은 부산종합고용지원센터다. 지난해 8월 고용지원센터에서 일자리를 알선해준다는 정보를 얻고 당장 달려갔다. “고용지원센터에서 직업상담원 김민성 선생님을 알게 됐어요. 성취프로그램에 참여해보라고 추천하더군요. 정말 많이 배웠어요.” 고용지원센터는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개인별 맞춤형 취업지원서비스’(IAP·Individual Action Plan)를 적용했다. 구직자 유형분류에 따라 상담과 구직자의 취업능력을 진단하고, 개인별 취업지원계획에 입각해 단계별 서비스를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송씨는 성실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일자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겐 요리사 이외의 경력이 없고, 학력이 너무 낮다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1주간 성취프로그램에서 이력서 작성법을 먼저 터득했다. 10년간 요리사로 일할 때는 이력서가 따로 필요 없었다. 남들보다 나은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킬 방법을 몰랐다. “1주일은 너무 짧았어요.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더군요. 면접요령도 배웠어요.” 프로그램에 참여한 동기들과 취업동아리 활동을 했다. 이를 통해 취업정보를 얻고, 자격증 등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갔다. 송씨는 요리사의 길을 접었다. 대신 운전기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3개월간 기사자리를 구하면서, 2종보통에서 1종대형으로 면허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또 중장비기술학원을 다니면서 중장비운전면허도 추가로 땄다. “내가 고용주라면 승용차 운전만 하는 사람보다 중장비까지 다룰 줄 아는 사람을 뽑겠다고 생각한 거죠.” 기사자리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산뿐만 아니라 양산 김해 창원 등 인근 도시의 중소기업들에도 이력서를 들이밀었다. 주로 PC방에서 인터넷과 팩스로 30여통의 지원서를 보냈다. 그는 “취업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말했다. 요리사로 일할 당시 모아둔 3000만원이 바닥을 드러낼 쯤, 부산 소재 ㄷ사로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1년간 세상을 다시 배웠고, 이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리사의 길을 아주 접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앞으로 5년 후엔 다시 요리기술을 살려 작은 식당이라도 내는 게 꿈입니다. 결혼요? 새 일자리에 완전히 적응하고 나서 국제결혼을 할 작정입니다.” /강경흠 기자 khkang@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3-13
- “고위외교관 조기용퇴 가슴 아픈 일”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이 12일 직원조회에서 최근 명예퇴직하는 ‘고참 외교관’들을 위로하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외교부 조직쇄신과 후배들에 보다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한 용퇴에 대한 감사의 표시도 담았다. 송 장관은 “오랜 세월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능력과 실력을 갖춘 선배 또는 동료들이 용퇴하는 상황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라며 “서까래, 동량으로 쓸 재목을 화목(火木 땔감)으로 쓰는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는 이어 “이번 상황은 그동안 외교부에 누적된 모순과 문제점이 표출된 결과로 후배들도 따뜻한 마음으로 선배들을 지원해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송 장관은 “최근 외교부 인사들이 관계부처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일이 많은데, 이들을 외교부 대표선수로 인식하고 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외교부는 올해초 고위직 외교관 26명에 대해 명예퇴직을 개별 통보한 상태다. 이는 외교부의 고위공무원단 가입과 외무공무원법 통과, ‘일 할 수 있는 외교부 조직 만들기’ 등 조직혁신과 맞물려 있다. 외교부는 재외공관장 직위를 30%까지 외부인사로 개방하는 등 고위직에 대한 신분보장을 줄이고 대신 ‘일 할 수 있는’ 실무조직을 확대한다는 방침을 잡고 있다. 현재 1600여명 안팎인 외교부 인력이 국력증가와 교역확대에 비춰 턱없이 부족하다는 판단 아래 단기적으로 수백명, 장기적으로 ‘네덜란드형’에 가까운 3000명 안팎의 조직으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이번 명예퇴직은 자신의 친정인 외교부의 성장 밑거름이 되는 셈이다. 명예퇴직 대상자는 외무인사위원회 명의로 퇴직을 권고하는 편지를 받은 상태며 조만간 신변을 정리할 것으로 알려졌다.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3-13
- “일할 의지 있다면 다시 이력서부터” 요리사 접고 운전기사 택한 송재석씨 부산고용지원센터 개인별 맞춤형서비스 효과 만점 이력서작성・면접 요령 다시 터득 “재취업 의지가 있다면 당장 이력서부터 다시 써 보세요. 내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들여다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지난 1월 12일 재취업에 성공한 송재석(41・부산시 당간동)씨에게 지나간 1년은 악몽 같은 세월이면서, 동시에 다시 한 번 세상을 배운 수업기간이었다. 송씨가 10년간 몸담아온 중국음식점의 요리사로 마지막 일을 한 것은 지난 1995년 12월. 당시 다른 식당으로 일자리를 옮기기 위해 며칠간 쉬고 난 후였다. 알고 지내던 이들에게 새 일자리를 부탁했으나, 반응이 시원찮았다. 송씨처럼 고급기술자를 채용해선 수지를 맞출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실제로 송씨는 한식・중식・양식・제과제빵 등 4개 자격증을 보유한 베테랑 요리사였다. 어느 식당에서나 송씨의 음식솜씨를 인정했고, 그의 손맛을 탐냈다. 평소엔 보름정도 쉬고 나면 새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기침체와 물가상승 때문에 다시 주방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재료비가 너무 올랐어요. 1만원이던 밀가루 한포가 3만원으로 뛰었고, 배달원 인건비도 너무 높아졌어요.” 송씨가 그 사이 일자리를 알아본 식당만 50여곳. 아직 미혼인 송씨는 그래도 큰 부담은 없었다. 일단 김해에 사는 부모에게 실직을 알렸다. 작은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부모님은 “경기침체 때문이다. 이제 취직은 사람 힘으로 안 되는 모양”이라며 그를 위로했다. 송씨에게 재취업 돌파구를 열어준 곳은 부산종합고용지원센터다. 지난해 8월 고용지원센터에서 일자리를 알선해준다는 정보를 얻고 당장 달려갔다. “고용지원센터에서 직업상담원 김민성 선생님을 알게 됐어요. 성취프로그램에 참여해보라고 추천하더군요. 정말 많이 배웠어요.” 고용지원센터는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개인별 맞춤형 취업지원서비스’(IAP・Individual Action Plan)를 적용했다. 구직자 유형분류에 따라 상담과 구직자의 취업능력을 진단하고, 개인별 취업지원계획에 입각해 단계별 서비스를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송씨는 성실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일자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겐 요리사 이외의 경력이 없고, 학력이 너무 낮다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1주간 성취프로그램에서 이력서 작성법을 먼저 터득했다. 10년간 요리사로 일할 때는 이력서가 따로 필요 없었다. 남들보다 나은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킬 방법을 몰랐다. “1주일은 너무 짧았어요.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더군요. 면접요령도 배웠어요.” 프로그램에 참여한 동기들과 취업동아리 활동을 했다. 이를 통해 취업정보를 얻고, 자격증 등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갔다. 송씨는 요리사의 길을 접었다. 대신 운전기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3개월간 기사자리를 구하면서, 2종보통에서 1종대형으로 면허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또 중장비기술학원을 다니면서 중장비운전면허도 추가로 땄다. “내가 고용주라면 승용차 운전만 하는 사람보다 중장비까지 다룰 줄 아는 사람을 뽑겠다고 생각한 거죠.” 기사자리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산뿐만 아니라 양산 김해 창원 등 인근 도시의 중소기업들에도 이력서를 들이밀었다. 주로 PC방에서 인터넷과 팩스로 30여통의 지원서를 보냈다. 그는 “취업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말했다. 요리사로 일할 당시 모아둔 3000만원이 바닥을 드러낼 쯤, 부산 소재 ㄷ사로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1년간 세상을 다시 배웠고, 이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리사의 길을 아주 접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앞으로 5년 후엔 다시 요리기술을 살려 작은 식당이라도 내는 게 꿈입니다. 결혼요? 새 일자리에 완전히 적응하고 나서 국제결혼을 할 작정입니다.” 강경흠 기자 khkang@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3-13
- <내일시론>글자는 지워도 기억은 못 지운다 글자는 지워도 기억은 못 지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총리가 끝내 고노 담화를 부정할 모양이다. 일본 교도통신은 정부 여당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태평양 전쟁 당시의 종군위안부 강제동원을 시인하고 사죄한 고노담화의 사실관계를 재조사하도록 의회에 요청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종군위안부 강제성을 증명하는 증언이 없다느니, 미국의회가 일본의 종군위안부 강제동원을 비판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더라도 사과하지 않겠다느니 하는 말들을 쏟아낸 속내가 결국 이거였구나 싶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조사한지 14년이 지났으며, 그동안 새로운 증언과 자료가 나온 것이 재조사의 배경이라 한다. 일본은 세월이 지나면 역사적인 진실도 변하는 나라인가. 10년이 넘도록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보상과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절규는 왜 증언으로 채택하지 않는가. 재조사 통해 종군위안부 진실 뒤집으려는가 고노 담화란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 사죄문서다. ‘징용귀신’이라 불렸던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고백과 속죄운동을 계기로, 1년 8개월간의 조사 끝에 강제성을 인정한 고백록이다.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 명의로 된 이 문서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는 점에서 그런대로 수용할 만 하였다. “위안소 설치는 군 당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며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했지만, 감언과 강압에 의한 사례가 많았고, 관헌이 직접 가담한 일도 있었다”는 정도로는 너무 미흡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역사의 교훈으로서 직시하겠다”는 다짐을 믿고 싶었다. 이 담화는 2년 뒤 무라야마 사죄담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1995년 패전 50주년을 맞은 무라야마(村山富市) 총리는 “깊은 반성에 입각하여 독선적인 내셔널리즘을 배척하고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신의를 정부시책의 근간으로 삼겠다”고 천명했다. 이 담화는 일본을 국제사회에 재인식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로부터 십 수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그 모든 반성과 사과의 말들을 거두어들이려 하고 있다. 재조사라는 절차를 통해 자기네 정부가 1년 8개월 동안 공식조사를 통해 내린 결론을 뒤집으려고 한다. “광의(廣義)의 강제성은 있었지만 협의(俠義)의 강제성은 없었다”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아베총리는 지난 5일 의회답변을 통해 “본인이 자발적으로 그 길(종군위안부)을 가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중간에 낀 업자가 사실상 강제했다는 사례가 있고, 이런 광의의 해석에서 강제성은 있었다. 그러나 관헌이 집에 쳐들어가서 유괴하는 것처럼 데리고 갔다는 의미의 강제성은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상의 강제는 강제가 아니라니 강제성에도 종류와 국적이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는 “고노담화를 기본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계승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조건이 붙은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전적으로 계승할 수는 없다는 속내가 아닌가. 고노 담화의 기폭제가 되었던 요시다 세이지의 고백을 꾸며낸 말이라고 규정한 의원시절의 발언록을 보면 그런 의심을 살 소지가 있다. 깨끗이 잘못 인정하고 사죄와 보상에 노력해야 총리가 되기 전인 2005년 4월 한 강연회에서“위안부는 요시다가 꾸며낸 이야기이며, 아사히신문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외국으로 번져갔다”고 말했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운동에 여생을 바친 사람의 고백을 거짓말로 몰아붙이는 사람의 속은 어떻게 생겼는지, 가슴을 한번 열어보고 싶다. “분명히 해둘 것은 첫째 종군위안부를 모집한 것이 아니라 노예사냥처럼 강제로 체포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경찰과 군 병력의 지원 아래 골라서 체포해 간 것이니 모집이라는 말도 부당합니다.” 1992년 1월 일본 지바(千葉)현 아비코(我孫子)시로 찾아간 필자에게 요시다 세이지가 처음 한 말이다. “지금부터 말하는 나의 고백이 역사의 자료가 되어야한다”면서 녹음을 해 두라던 그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공식담화문의 글자를 지울 수는 있다. 그러나 수많은 역사의 기록과 피해자들의 기억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깨끗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와 보상에 노력하는 것이 가장 좋은 청산의 방법이다. 문 창 재 객원 논설위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3-09
- <내일시론>글자는 지워도 기억은 못 지운다(문창재 2007.03.09) 글자는 지워도 기억은 못 지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총리가 끝내 고노 담화를 부정할 모양이다. 일본 교도통신은 정부 여당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태평양 전쟁 당시의 종군위안부 강제동원을 시인하고 사죄한 고노담화의 사실관계를 재조사하도록 의회에 요청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종군위안부 강제성을 증명하는 증언이 없다느니, 미국의회가 일본의 종군위안부 강제동원을 비판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더라도 사과하지 않겠다느니 하는 말들을 쏟아낸 속내가 결국 이거였구나 싶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조사한지 14년이 지났으며, 그동안 새로운 증언과 자료가 나온 것이 재조사의 배경이라 한다. 일본은 세월이 지나면 역사적인 진실도 변하는 나라인가. 10년이 넘도록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보상과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절규는 왜 증언으로 채택하지 않는가. 고노 담화란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 사죄문서다. ‘징용귀신’이라 불렸던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고백과 속죄운동을 계기로, 1년 8개월간의 조사 끝에 강제성을 인정한 고백록이다.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 명의로 된 이 문서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는 점에서 그런대로 수용할 만 하였다. “위안소 설치는 군 당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며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했지만, 감언과 강압에 의한 사례가 많았고, 관헌이 직접 가담한 일도 있었다”는 정도로는 너무 미흡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역사의 교훈으로서 직시하겠다”는 다짐을 믿고 싶었다. 이 공식담화는 2년 뒤 무라야마 사죄담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1995년 패전 50주년을 맞은 무라야마(村山富市) 총리는 “깊은 반성에 입각하여 독선적인 내셔널리즘을 배척하고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신의를 정부시책의 근간으로 삼겠다”고 천명하였다. 이 담화는 일본을 국제사회에 재인식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로부터 십 수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그 모든 반성과 사과의 말들을 거두어들이려 하고 있다. 재조사라는 절차를 통해 자기네 정부가 1년 8개월 동안 공식조사를 통해 내린 결론을 뒤집으려고 한다. “광의(廣義)의 강제성은 있었지만 협의(俠義)의 강제성은 없었다”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아베총리는 지난 5일 의회답변을 통해 “본인이 자발적으로 그 길(종군위안부)을 가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중간에 낀 업자가 사실상 강제했다는 사례가 있고, 이런 광의의 해석에서 강제성은 있었다. 그러나 관헌이 집에 쳐들어가서 유괴하는 것처럼 데리고 갔다는 의미의 강제성은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상의 강제는 강제가 아니라니 강제성에도 종류와 국적이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는 “고노담화를 기본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계승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조건이 붙은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전적으로 계승할 수는 없다는 속내가 아닌가. 고노 담화의 기폭제가 되었던 요시다 세이지의 고백을 꾸며낸 말이라고 규정한 의원시절의 발언록을 보면 그런 의심을 살 소지가 있다. 총리가 되기 전인 2005년 4월 한 강연회에서“위안부는 요시다가 꾸며낸 이야기이며, 아사히신문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외국으로 번져갔다”고 말했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운동에 여생을 바친 사람의 고백을 거짓말로 몰아붙이는 사람의 속은 어떻게 생겼는지, 가슴을 한번 열어보고 싶다. “분명히 해둘 것은 첫째 종군위안부를 모집한 것이 아니라 노예사냥처럼 강제로 체포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경찰과 군 병력의 지원 아래 골라서 체포해 간 것이니 모집이라는 말도 부당합니다.” 1992년 1월 일본 지바(千葉)현 아비코(我孫子)시로 찾아간 필자에게 그가 처음 한 말이다. “지금부터 말하는 나의 고백이 역사의 자료가 되어야한다”면서 녹음을 해 두라던 그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공식담화문의 글자를 지울 수는 있다. 그러나 수많은 역사의 기록과 피해자들의 기억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깨끗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와 보상에 노력하는 것이 가장 좋은 청산의 방법이다. 문 창 재 객원 논설위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3-09
- <기고>디스플레이 산업의 희망찬 내일을 기대하며 디스플레이(Display)는 다양한 정보를 인간이 볼 수 있도록 화면으로 구현해 주는 영상표시 장치로 정보통신 시대의 핵심부품이며, ‘산업의 창’ 또는 ‘산업의 눈’으로 불린다. “몸이 1000냥이면 눈이 900냥”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디스플레이 장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사실 디스플레이는 20세기까지 TV, 모니터 등에 그 이름이 묻혀 있었으나, 21세기 들어서 TV, 모니터, 핸드폰 등의 제품 앞에 LCD, PDP, OLED와 같은 디스플레이 장치명을 사용하여 그 제품의 성능이나 품질을 알려주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듯 디스플레이는 21세기 정보화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또한 우리나라가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는 국가 기간산업의 하나이다. 하지만 지난 한해 우리 디스플레이 산업은 환율하락, 유가 및 원자재 가격 상승 등 대외적 여건이 악화되고, 신규투자에 따른 막대한 비용 부담, 패널 공급과잉에 따른 가격의 하락, 경영실적 부진 등의 여파로 근래 들어 가장 어려운 한해를 보낸 것이 사실이다. 불경기 슬기롭게 대처해야 하지만 우리 디스플레이 산업의 침체는 겨우 1년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경기변동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어느 산업이건 호경기와 불경기가 반드시 존재한다. 관건은 불경기를 슬기롭게 대처해서 불황의 정도를 얼마나 최소화 하고 빠른 시일 내에 회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의 성적에만 집착하여 조바심을 내고 자신감을 잃어간다면 이것이 작년 한해의 어려움보다 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 산자부 주관으로 디스플레이 업계 CEO들이 만나 상생협력 협약식을 갖고 디스플레이 장비·부품소재 육성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다짐하였으며, 정부에서도 기존의 R&D지원을 ‘전략기술개발사업’으로 통합하여 핵심 원천기술과 중소기업 지원 등 취약분야의 R&D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할 예정이어서 기대가 되는 바이다. 디스플레이 산업은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대규모 투자가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장치산업이라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전후방 연관 산업의 공동 발전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닌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기업간 협력, 즉 상생(相生)이다. 각 패널 대기업은 회사 사정에 맞춰 지속적인 투자를 계획해야 할 것이고, 장비·부품소재 업체는 그 분야의 핵심이 되는 원천기술 확보에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초에 패널 대기업이 투자 계획을 발표하고 장비·부품소재 기업에 대한 투자 계획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점 또한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부에서도 그간의 R&D 사업이 정부와 민간의 역할이 혼재되고 산업의 특성이 아니라 복잡 다양한 사업별 특성에 맞추어 기술개발을 추진해 온 문제가 있다고 진단하고, 이에 따라 기존의 R&D 지원을 ‘응용개발 위주의 선진국 추격형’에서 ‘핵심원천기술 확보를 통한 기술선도형’으로 재편하여 추진할 예정이다. 사실 그간 디스플레이 패널사업이 세계 1위를 달리면서도 항상 장비와 부품소재의 국산화율이 낮아 해외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향후 디스플레이 산업은 장비와 부품소재의 핵심 원천기술 확보가 경쟁력의 열쇠가 될 것이다. 세계 1위 도약 원년 만들어야 이와 같은 정부의 전략적인 R&D사업 개편과 더불어 대·중소기업의 상생 협력이 더해진다면 2007년이 디스플레이 패널뿐 아니라 장비·부품소재 분야에서도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술 강국으로 도약하여 내실을 기할 수 있는 원년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패널 대기업과 장비·부품소재 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디스플레이산업협회 설립을 통해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이 세계 1위를 유지하는 초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2-15
- <김영호 칼럼>구심점 없는 통합신당 논의 구심점 없는 통합신당 논의 김영호 (시사평론가 언론광장 공동대표) 정당정치란 정당의 정강-정책을 지지하는 국민의 이익을 대변한다. 집권당과 반대당이 견제와 균형을 통해 지지기반의 이익을 최대한 국정에 반영하는 정치체제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정치지형은 반대당의 독주와 집권당의 소멸로 표현된다. 대선가도의 선두권에는 한나라당 주자끼리 각축을 벌이고 그 후미에는 뚜렷한 주자가 없다. 열린우리당이 자구책으로 통합신당을 논의하나 미궁에 빠진 상태다. 이런 형국에 국민의 반쪽은 정치적 지향점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모습이다. 비주류출신 ‘노무현 대통령’ 탄생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탄핵구출’ 또한 같다. 국민들은 다시 4·13 총선에서 급조정당 열린우리당에게 과반수의 의석을 몰아줬다. 이런 정치적 사건마다 그 뒤에는 이 나라의 온갖 모순을 교정해달라는 국민적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집권세력이 그것을 너무나 쉽게 등지고 말았다. 열린우리당이 청와대의 덫에 걸려 입만 열지 귀는 열지 않은 채 말이다. 중도개혁과 평화개혁의 실체 그 실망과 좌절이 여러 차례 재보선에서 분노로 표출되었다. 열린우리당은 영패의 연속을 맛봐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집권세력의 연이은 실책이 한나라당에게 바친 반사이득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엄중한 경고를 번번이 ‘선거결과에는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로 받았다. 민의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5·31 지방선거는 열린우리당에게 산사태 같은 참패를 안겨줬다. 정치적 탄핵이란 해석이 가능했다. 그들은 잠시 기겁하는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빠른 복원력을 갖고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흠집투성이 수구적 인사들을 너무 많이 중용했다. 요직에 포진한 ‘386’들이 민심과 동떨어진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권력핵심에서 쏟아지는 숱한 말이 국민을 너무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첫 손가락을 꼽을 만한 말이 한나라당한테 권력을 통째로 넘겨 줄 수 있다는 느닷없는 연정론이었다. 국민적 논의도 거치지 않고 불쑥 미국과 FTA(자유무역협정)를 맺는다고 야단이다. 그것도 반대의견을 매도하면서 말이다. 대선열기가 달아오르나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바닥을 맴돌며 탈출구를 모른다. 급기야 열린우리당에서 ‘실용’과 ‘쇄신’을 말하던 세력과 ‘개혁’과 ‘변화’를 말하던 세력이 나눠 탈당을 결행했다. 국민이 만들어준 제1당이 제2당으로 전락해 버렸다. 대통령이 탈당했으니 집권당도 아니다. 열린우리당이라는 우리에 갇혔는지 대선주자들의 지지율도 저점에 얼어붙어 뜨기를 마다한다. 정치생명을 재촉하는 시각은 멈출 줄 모르는데 말이다. 열린우리당이 통합신당을 논의한다고 하나 세월만 허송하는 느낌이다. 이대로 가면 또 다른 탈당사태가 이어질 듯싶다. 그런데 통합신당 논의구조를 보면 현실적 긴박감이 보이지 않는다. 6월까지 통합신당을 만들어서 국민경선제를 추진한다니 말이다. 6월이면 대선국면은 중반전에 돌입한다. 잠재적 지지자들이 그 때까지 한가하게 열린우리당의 재창당이나 바라보리라고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열린우리당이 통합신당을 말하면서 중도개혁과 평화개혁을 표방하고 나섰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그 실체가 사학법 재개정과 출자총액제한제 완화를 둘러싸고 드러났다.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집권세력의 대체적인 정책방향은 진보를 가장한 보수이다. 정체성은 위기로 치닫고 실정은 거듭되는데 반성을 모르니 지지세력이 이탈할 수밖에…. 진보의 가치가 훼손된 데 따른 실망의 표시다. 새 정치세력 등장 갈구 열린우리당이 시민운동가나 덕망가 몇 사람을 영입한다고 국민적 지지를 되찾으리라고 믿는다면 오판이다. 민주당과 합당하면 호남지역에서 세력규합이 가능하다는 판단도 마찬가지다. 이대로 가면 정권창출은 고사하고 국회의원 당선도 어렵다. 당명이나 바꾸고 간판을 새로 포장한다고 통합신당의 의미를 갖는 게 아니다.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제3지대에서 한나라당에 대항하는 진정한 의미의 진보정당 창건에 나서야 한다. 열린우리당이 살길은 버릴 사람은 버리고 신당작업을 주도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지도력과 정치력을 발휘하는 인사가 나온다면 그가 대통령 후보로 부상할 수 있다. 제3의 주자도 입지를 구축해줘야 영입이 가능하다. 국민의 절반은 개혁과 변화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할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갈구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열린우리당이 그 구심점에 나서길 바란다. 시간은 열린우리당의 편이 아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3-07
- ‘괘씸죄’ 교수 구제책 사학법에 담아야 테러사건 출발은 뿌리깊은 ‘패거리문화’ … 진실 외면한 학계도 책임 - 김명호 전 교수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는 교수집단의 ‘패거리 문화’가 있다는 극단적 비판도 나오는데, 이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대학에 아직도 뿌리 깊이 남아 있는 ‘패거리’ 문화가 종종 심각한 문제를 빚고 대학의 발전을 크게 저해한다. 매사 적당히 편하게 넘어 가려는 소수가 패거리를 형성해 다수가 되고, 원칙을 고수하고 잘못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말살한다. 대학당국도 문제가 일어나면 아픔을 참고 신속히 잘못을 시정하기 보다는 감추고 조용히 넘어가려는 성향이 짙다. 또 법은 저울로 비유되는데 저울질이 잘못되었거나 저울을 아예 치워놓고 판결한 것 같다. 지금의 성균관대는 임용·재임용 제도가 많이 개선돼 똑같은 잘못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 판사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1995년 성균관대 입시 수학 문제 오류 지적과 시정 요구에서 출발해 재판 과정에서 판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진행을 보면 김 교수가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인으로서 극단적인 방법은 택하지 말았어야 했다. 오히려 옳지 않은 일로 인해 억울한 일이 일어나는 데 대한 사회적 방어세력을 구축하는 운동에 온 힘을 바쳤더라면더 긍정적이고 전폭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김 교수가 학계에 더 이상 의지할 수 없자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동정론도 만만치 않은데. 학과 교수들은 문제 오류 검토를 외부로 끌고 나가 ‘해교’ 행위를 했다고 상투적인 방법으로 몰아 세웠을 것이지만, 학과 범위에서 도무지 해결이 안 되고 채점위원에서조차 밀려난 상태에서 택하지 말았어야 할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학교도 초기에는 다소 조정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이나 민감한 입시문제 오류가 걸려 있어 결국 패거리 세력에 동조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 같다. 미국 과학지 사이언스에서도 정의에 대한 대접이 교수직 박탈이냐며 김 교수의 손을 들어주고 권위있는 수학자들이 지지해주었다. 그러나 우리 수학회나 고등과학원에서는 법원의 감정 요청에 묵묵부답이었다. 그래도 국내 44개 대학에 재직중인 189명이나 되는 수학교수가 시험문제가 오류임을 인정해주었다. 이는 뒤집을 수 없는 큰 힘이다. - 김 전 교수의 학자적 자질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외부평가에서 ‘내용이 정밀하고 창의적인 면이 많다’면서 최고수준인 ‘수’를 받았다. 재판부도 학과의 ‘우수연구자’ 선정 대상이 되는 SCI 논문을 3편이나 내 만점을 초과하는 점수이므로 ‘논문들을 부적격이라 판정한 것’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에 따른 평가라 볼 수 없다’고 했다. - 사법부의 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판사는 원래 공판정에서 편파성이나 외부 영향 없이 재판의 진행을 맡는 사회자 역할이다. 그런 가운데 양측의 주장과 입장이 공정하게 드러나야 한다. 배석주심판사가 나중에 변명을 했지만 김 교수는 재판이 공정하지 않았고 느꼈던 것 같다. 사법부는 공판중심주의로 나가겠다며 공판정의 진행 과정을 전부 녹음 녹화해 위증 가능성을 줄이겠다는 계획까지 발표했다. 그러나 김 전교수의 녹음 허용 신청은 거부됐다. 문제의 핵심은 입시문제 오류지적과 시정 요구 그리고 재임용 평가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또 평가에서의 학문적 자질과 교육자적 자질 사이의 관계와 비중 문제이다. 재판부는 그 관계나 비중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교도소 재소자들 사이에도 어떤 판사한테 걸리면 양형이 무겁고 어떤 판사한테 걸리면 가볍다는 평가가 다 나온다고 한다. 가볍게 주는 판사만 ‘자질’이 좋은지 양형이 무거운 판사 또는 사형선고를 해 본 판사는 퇴출시켜야 하는지도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 재발방지책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대학사회의 자정 능력이 더 길러져야 한다. 1995년 생각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교수공정 임용을 위한 모임’을 발족시켰다. 많은 부당 사례를 신고 받았고 많은 사례를 해결했다. 이때 언론의 뒷받침이 중요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또 감사원, 교육부 등의 도움도 컸다. 특히 고등교육법에 타교 출신을 3분의 1 이상 뽑게 하는 조항이 생겨 ‘내 사람’ 심기에 제동이 걸리고 타교 출신도 임용될 수 있게 됐다. 제도는 바뀌었지만 마음이 바뀌는 데는 세월이 더 필요하다. 그래서 아직도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김명호 교수 사건도 우리 사례집에 들어 있다. 전형적인 ‘괘씸죄’ 적용의 재임용 탈락으로 분류돼 있다. 좀 더 긴밀한 관계를 맺어 도울 수 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결과는 막을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크다. 타교 출신 임용 조항을 넣는 법률개정 이후 제보 건수가 줄어드는 등 많은 변화가 있다. 그래서 회원 300명의 동의를 받아 ‘교육선진화 운동본부’의 ‘교수공정 임용’ 부서로 활동하기로 했다. - 이번 재판에서 이른바 ‘가정교육’이 대학교수의 역할에 해당하는가를 둘러싼 논란도 있었는데. 대학교수의 역할을 어디까지라고 보는가. 대학교수의 학생교육은 하급학교와 약간 다른 점이 있다. 이미 성인 취급을 받는 학생을 대상으로 전문지식을 전수하고 지식창출의 씨앗을 심어주되 그 과정에서 교실 접촉, 개별 면담을 통해 학습 또는 연구 내용을 매개로 해서 인격적으로 상호 교류한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교육을 통해 맺어진 사제 간의 관계가 끈끈하고 지속적이어서 아름다운 면도 있다. 주례까지 부탁한다. 학문 선진국보다는 아직도 교수에게 전인간적인 존경과 기대가 크다. 물론 인격적인 지도에 대한 기대감도 크지만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에는 아직 교수나 판사를 성직자 이상의 성직자이기를 바라는 정서가 남아 있다. 대학교수의 역할에서 어두운 면은 학습-연구 부진 학생의 문제다. 몇 년 전 미국에서 중국계 박사과정 학생이 지도교수를 포함해 여러 명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학습부담 때문에 명문대에서 자살하는 학생들도 생긴다. 유사한 일은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다. 평소에 학교, 학부모, 사회가 예방에 힘써야한다. - 김 전 교수는 “나는 전문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우리 사회의 통념과 좀 다른 것 같다. 질문에 대한 김 전교수의 답은 누군가가 이미 지적했듯이 원고인 자신이 다투는 쟁점을 비켜 피고인 학교 측 쟁점에 대해서만 질문하는 데 대한 임기응변적인 반발의 답이어서 비중을 둘 이유가 없다. - 학문적 성과 외에 자질까지 교수의 자격으로 본다면 사학재단이 주관적 평가로 교수신분을 불안하게 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교육자적 자질’의 구성요소가 무엇이냐 또 어떻게 다툼이 없이 수긍할 평가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관한 것이다. 즉 고도로 복잡, 미묘하고도 섬세한 것이라 당사자를 수긍시킬 수 있는 평가는 어렵다. 이 때문에 많은 대학이 강의 과목들을 제대로 소화했는지를 주로 보고 새로운 교양과목을 개발했다든지,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좋았다든지 등에 대해 가산점을 주는 방법으로 단순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이제 대학들은 본능적으로 내게 편한 사람, 고분고분하기만 한 사람을 뽑기 위해 제도를 악용할 것인지, 현명하게 능력 있고 장래성 있는 사람을 뽑기 위해 제도를 활용할 것인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최근 사학법 재개정이 논의되고 있다. ‘괘씸죄’로 억울하게 탈락한 교수가 구제될 수 있는 규정을 포함해야 한다. 대학은 새로운 진리를 찾아 불철주야 깊이 사색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숨 쉬는 공간이어야 한다. 행정보직자, 재단, 사회가 이 공간을 지켜주어야 학문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인류공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정민 교수는 -서울대 영문과 졸, 서울대 인문대학 언어학과 명예교수(현) -교수공정임용을위한모임 회장(1995년) /장세풍 기자 spjang@n 2007-01-31
- <NGO칼럼>한강철책 제거 전 생태계 보전대책을 최근 국방부와 김포시, 고양시는 올림픽대로 종점 김포시 고촌면 전호리에서 걸포동까지 10.6km, 일산방향 행주대교에서 일산대교까지 12.9km 등 총 23.5km의 철책을 제거한다는 데 합의했다. 반세기를 넘는 분단의 흔적을 지우고 남북한 평화 정착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데서 국방부와 김포시, 고양시의 조치에 뜻을 함께 한다. 하지만 한강하구 철책이 제거되기도 전부터 나오는 김포시와 고양시의 한강하구 개발계획에 심히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김포시는 김포 신도시 개발과 함께 한강하구를 체육공원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바 있다. 또한 고양시는 장항습지 일대의 철책선이 제거되면 생태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강하구 생태계 파괴 안된다 우리는 1980년대 파주에서 서울을 잇는 자유로가 건설되면서 한강하구 생태계가 급격히 파괴된 경험을 잊지 않고 있다. 1000여 마리 넘게 한강하구를 찾았던 ‘재두루미’는 자유로 건설 이후 대부분 일본의 이즈미로 둥지를 옮겼고, 한강하구에 재두루미가 다시 찾아오기까지는 15여년의 세월과 노력이 필요했다. 한강하구의 철책이 아무런 보완조치 없이 제거된다면 멸종위기 1급 야생동물 4종, 멸종위기 야생동물 22종 등 수십종의 야생동물이 서식·도래하는 한강하구 생태계는 영원히 파괴되고 말 것이다. 분단시대의 상징인 철책이 해당 자치단체와 주민들의 경제권 및 생활권을 제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 철책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원시생태계가 조성됐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강하구는 인간과 함께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동·식물들에게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다. 또한 원시상태를 유지한 한강하구는 도시화 속에서 잃어버렸던 ‘자연의 선물’을 간직한 도심 속 허파요 단순한 경제적 가치를 넘어서는 무한의 생명적 가치가 깃든 곳이다. 환경부는 2006년 4월 이후 한강하구 일대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한강하구 습지보호지역에는 장항습지, 산남습지, 시암리습지 등 대규모 습지가 포함되었고, 저어새의 서식지인 김포시 유도도 포함되었다. 이 가운데 일부지역은 람사습지 등록을 추진하는 등 장기적으로 DMZ와 연계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지정도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한강하구 지역 고촌면 신곡수중보에서 하성면 전류리까지는 재두루미의 먹이터이자 생물다양성이 가장 풍부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한강하구 습지보호지역 지정 과정에서 제외돼 심각한 훼손 우려를 안고 있다. 한강시민공원과는 차원이 다른 곳 이 지역의 철책이 제거될 경우 급격한 개발압력이 밀려들게 되고, 이로 인해 김포시 고촌면에서 전류리에 이르는 한강하구의 생태계 훼손은 물론 재두루미의 잠자리인 장항습지와 김포시 홍도평야 먹이터의 생태계 교란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한강하구 습지는 일본의 쿠시로 및 이즈미, 홍콩의 마이포 습지와 견줄만한 자연자산이다.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생태계가 유린된 한강시민공원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다. 이러한 자연자산에 대한 보호계획 없이 우선 철책부터 제거하자는 인간 편의적 계획이 수립된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1-30
- <문창재 칼럼>“죽지나 말지, 죽지나 말지···”(2007.01.26) “죽지나 말지, 죽지나 말지···” “죽지나 말지, 죽지나 말지, 하는 말만 나온다. 왜 이리 허망한지 몰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 8명에 대한 대법원 최종판결이 무효라는 서울중앙지법의 판결 후 한 사형수의 아내가 독백처럼 토해낸 말이다. 누가 죽고 싶어 죽었나. 32년 세월을 싸워 원하는 판결을 얻었건만 허망하기만 하다는 그 말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게 하였다. 오래 힘이 되어준 문정현 신부 가슴에 머리를 묻었던 한 사형수 부인의 슬픈 얼굴은 온통 물기로 번들거렸다. 청상으로 살아온 오랜 고통의 세월이 깊은 주름살로 패인 것을 보면서, 유가족들에게 뒤늦은 명예회복이 무슨 소용인지를 묻고 싶었다. 두 차례의 인혁당 사건은 현대 한국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사건이었다. 아무 실체도 없었던 두 번째 사건이 첫 사건보다 형량이 가혹했다는 점만 보아도 조작성을 알 만하다. 1964년 8월 중앙정보부(중정)로부터 사건을 송치 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은 사건이 되지 않는 것을 기소하라는 상부의 압력에 사표로 저항하였다. “증거가 아무것도 없었다. 불온서적, 판매금지 된 책 한권도 찾아볼 수 없었다. ··· 피의자 전원이 수사 중 고문당했다는 말만 하고 앉았고, 인민혁명당 그런 말을 들어본 기억조차 없다고 했다.”(학민사 발행 사법살인-1975년 4월의 학살) 증거물 하나 없이 중정에서 송치되어 온 국가보안법 위반 국가변란 기도사건이라는 것을 연장수사까지 해보아도 혐의를 발견할 수 없었던 당시 서울지검 이용훈 공안부장과 장원찬· 김병리 검사는 사건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표를 냈다. 검찰 수뇌부는 숙직검사를 시켜 기소하게 했지만 서울고검의 재수사를 통해 14명은 공소취하하고 12명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반공법 위반으로 공소변경 해 재판에 회부하였다. 1심판결 결과는 도예종과 양춘우 피고인에게만 각각 징역3년과 징역2년 형이 선고되었을 뿐, 나머지 피고인은 모두 무죄였다. 이런 사건이 10년 뒤 8명을 무더기로 교수대에 세운 어마어마한 공안사건으로 조작되었다. 1975년 4월 중정은 1차사건의 주모자 도예종 등이 인혁당재건위원회를 결성해 국가변란을 꾀했다는 혐의를 씌워 무더기로 잡아 들였다. 북한의 사주를 받아 민청학련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전복과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수립을 기도했다는 것이 중정의 발표 내용이었다. 무려 253명이 구속되어 군법회의에 묶여간 전대미문의 조작극이었다. 서울대 재학생들이 주축이었던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조차 대부분 재판 도중에 석방되었지만 인혁당 재건위 시건 8명에게는 무죄였던 사람에게까지 사형이 선고되었다.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겨져 1975년 4월 8일 드디어 전원에게 사형을 확정한 ‘역사적’인 판결이 뒤따랐다. 그 판결을 보도한 TV 뉴스에 놀란 국민이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인 다음날 새벽 8명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렇게 서둘러 형을 집행할 이유가 무언가, 왜 유가족에게 전해진 유언들이 조작되었는가, 왜 영결식장으로 가던 유해들이 기동경찰의 완력으로 화장터로 끌려가 강제 화장을 당했는가. 이런 수많은 의혹들은 그 후 30 여 년 동안 금기중의 금기가 되어 입에 담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이런 야만을 합법화 해주었던 1975년 4월의 대법원 판결을 뒤집은 23일 서울중앙지법의 재심판결은 ‘겨울 공화국’ 시절 잘못된 법원의 결정에 대한 사법광정의 의지로 볼 수 있겠다. 너무 늦었어도 다행한 일이지만, 이번 결정을 사법살인 종언의 계기로 승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는 사법살인이 재현될 수 없도록 사형 제도를 폐기하는 일이다. 어떤 이유로도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옳지 못하다. 그 주체가 국가와 제도라 해도 마찬가지다. 제도가 있는 한 사형에 대한 유혹을 떨칠 수 없는 것이 권력의 심리다. 올해로 10년째 사형집행이 없는 한국은 사실상 사형제도 폐지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명문규정으로 확실하게 사형제도 폐지를 못 박을 필요가 있다. 앰네스티는 2006년을 ‘한국의 사형제도 폐지의 해’로 정해 집중 캠페인을 벌였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사형제도 폐지 입장을 공식화 했고, 법무부도 폐지검토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여야 의원 175명도 제도 폐지 결의안을 내놓았다. 분위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남은 것은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한국을 세계 119번째 사형 폐지국가로 만드는 일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