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NGO칼럼>32년만의 무죄판결을 바라보며 한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 그 아이의 목에는 새끼줄이 매여져 있고 몸은 나무기둥에 묶여져 있다. 동네꼬마들은 “빨갱이 자식을 총살시켜라!”라고 외치며 이 잔인한 ‘놀이’를 하고 있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은 이런 장면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저 쳐다보고만 있다. 동네 꼬마들의 장난 아닌 장난에 어린 나이에 깊은 상처를 가슴에 품었을 그 아이는 32년의 세월이 지나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엄청난 혐의로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이 되어버린 아버지가 ‘무죄’ 판결을 받는 그 자리에 서 있다. 1975년 4월 9일, 이수병, 송상진, 김용원, 서도원, 하재완, 여정남, 우홍선, 도예종 등 8명은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국가보안법·대통령긴급조치 위반 등)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그 다음 날 새벽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무죄판결에도 당사자 8명은 없어 이른바 ‘인혁당 재건 사건’으로 이들과 함께 투옥되어 온갖 고문을 받던 이들은 옥사를 하거나 출소 뒤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이는 갑작스레 발병한 암으로, 어떤 이는 자신이 먹는 밥에 누군가가 독을 탄다며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지난 32년간 유족들은 중앙정보부의 끊임없는 감시와 협박 속에서도 전 국민을 향해 억울함을 호소했고 진실을 밝혀달라고 목 놓아 울었다. 석방운동을 하던 가족들은 중앙정보부로 강제 연행당해 육체적·정신적 폭행을 당하면서도 자식들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바라보면서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에 늘 외로운 싸움을 해 왔다.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흘러 드디어 처음으로 추모제를 열었고 사건 발생 32년 만에 ‘간첩’이었던 이들은 ‘무죄’를 선고받고 다시금 명예회복을 했다. 32년의 세월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활동을 해왔던 나는 기쁘고도 슬펐다. 32년만의 무죄선고로 그 동안 가슴으로 피눈물을 흘렸을 가족들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렸음에, 32년 만에 편히 눈을 감았을 여덟 분들의 생각에,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한 평생을 살아오셨을 관련자 선생님들의 생각에 기뻤다. 하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지금 이 순간 가장 기뻐해야 할 여덟 분의 당사자들이 없다는 것에 슬펐다. 한 번 끊어진 생명은 다시 되살릴 수 없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과 사법부가 그들의 목에 묶었던 그 동아줄은 끊어버릴 수 있지만, 그 동아줄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이들의 목숨은 다시 살릴 수 없는 것이다. 하기에 이번 무죄판결은 사형이 얼마나 잔혹한 사법‘살인’인지, 왜 사형제도가 없어져야 하는지를 우리 모두에게 다시금 보여준다. 이들에게 우리는 죄인 우리는 이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 참혹한 범죄에 가담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지난 32년의 세월동안 우리 사회의 철저한 외면으로 유족들을 차가운 거리에서 외롭게 싸우게 한 우리 사회 모두가 유족들과 먼저 떠난 이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또 지난 군사독재시절 오로지 정권 유지를 위해 간첩으로 조작되어 억울하게 죽어가고 고문 받은 수많은 이들이 진실과 사법적 명예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의 무죄판결이 단초가 되어 그 분들의 진실도 밝혀지고 가슴에 맺힌 한이 하루빨리 풀어지길 바란다. 그나저나, 32년 전 그 아이의 목에 줄을 매고, 나무기둥에 묶은 그 꼬마아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무에 묶여 아등바등 거리고 있는 아이와 ‘총살놀이’를 하고 있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32년이 지난 지금, 무슨 생각을 했을까.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1-25
- 평범한 엄마 김종선 씨의 비범한 ‘공부 습관 길들이기’ ‘스스로 공부’의 힘을 믿으세요 서울대 의대 졸업, 피부과 전문의로 일하는 큰딸. 서울대 법대 졸업, 로펌 변호사로 일하는 둘째 딸.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종합병원에서 약사로 일하는 쌍둥이 셋째 딸. 한양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준비 중인 쌍둥이 넷째 딸. 연세대 의대에 재학 중인 다섯째 딸.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는 늦둥이 고2 막내아들. 대충만 나열해도 귀가 번쩍 뜨이는 수재 집안, 안 먹어도 배부를 이들 남매의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대치동’식도 아닌, ‘목동 엄마’식과도 확실히 다른, 학원이나 과외 없이 아이들을 모두 수재로 키워낸 보통 엄마 김종선 씨의 특별한 자녀교육 노하우를 들었다. 취재 강현정 리포터 sabbuni@naver.com 사진 안지섭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그마한 거실 가운데 큰 테이블 하나가 자리를 다 차지했다. 한쪽 벽은 오래된 백과사전, 위인전집 등 표지만 봐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책들로 꽉 찼다. 슬쩍 들춰보니 얼마나 뒤적였는지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섬유 회사에 다닌 남편의 박봉으로 여섯이나 되는 자녀를 키우면서 1년에 두 번 나오는 보너스는 아예 없는 셈치고 아이들 책을 사는 데 투자한 결과다. 자녀교육이 돈과 비례해 평가되는 시대, 자식 하나 가르치는데도 허리가 휘는 시대인지라 여섯이나 되는 자녀를 모두 명문대에 보냈다기에 넉넉한 집안일 거라던 ‘짐작’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성공적인 ‘자식 농사’의 공은 온전히 부모, 그중에서도 ‘방배동 김 선생’으로 불리는 평범한 엄마 김종선 씨(59)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자녀교육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선택을 항상 믿어준 엄마 김씨는 결혼 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하지만 타 지역으로의 전근이 쉽지 않던 시절이라 결혼을 하면서 교편생활을 접었다. 빠듯한 월급에 많은 식구들. 당연히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다. 맏이 외에는 아무도 유치원 근처에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수재 육남매’ 엄마 김씨에겐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교육관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공부를 잘하던 큰딸이 서울대 의대를 가겠다고 했을 때 학교 선생님들은 ‘강북 1등이 강남 20등밖에 안 된다’며 말렸지만 엄마는 딸의 선택을 전적으로 따라준 것이 그 좋은 예. 피아노를 잘 치던 둘째 딸이 예원중학교에 합격하자 김씨는 ‘언니(큰딸)도 공부를 잘하고 너도 예원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니 이제는 서울로 가서 살자. 돈이 모자라면 전셋집에 살면 되고 김치라도 팔아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친지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하지만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게 된 둘째 딸이 가정 형편으로 전공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 아픈 일이다. 다행히 피아노를 접은 둘째 딸은 ‘돈이 많이 들지 않는’ 법대에 다시 들어가 지금은 로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항상 아이들의 선택을 믿어주고 묵묵히 지켜보고 지지하던 엄마였기에 아이들은 오히려 공부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는 김씨. “아이들이 서로 싸워 엄마가 중재에 나섰을 때 변명하는 자녀를 야단치기는 했어도 아이들에게 공부 잘해 서울대 가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공부 잘하는 비결은 ‘스스로 공부하기’ 대개 아이가 공부를 잘할 때 오히려 엄마는 더 욕심을 내게 마련인데 한결같이 공부 잘하는 자식을 둔 이 엄마, 학원의 유혹에 흔들렸을 법도 하지만 대답은 의외다. “한번은 막내가 학원에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하던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평균 89점, 전교 99등을 했으니 아이도 충격이 컸겠죠. 솔직히 전혀 불안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일단 평균 90점까지만 도전해보자고 설득했어요. 스스로 공부한 다음 다시 고민을 해보자면서요.” 결과는? ‘스스로 공부’의 힘은 컸다. 처음에 99등으로 들어간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전국 수석만도 여러 차례. 잠깐의 불안함 때문에 학원 순례에 나서는 등 소신을 지키며 아이를 키우기 힘든 시대, 아들도 엄마도 ‘배짱’만큼은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데 설마 한 명은 속 썩이는 자식이 있지 않을까’ 싶어 넌지시 물어봤다. “주변에서도 다들 그렇게 물어요. 근데 참 감사하게도 여태 속 썩이는 자식이 없었어요. 공부 잘한 것보다 그게 제일 고맙죠.” 현재 자신의 교육 철학을 가르쳐달라는 엄마들의 요구에 작은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종선 씨는 얼마 전 육남매를 수재로 키워낸 이야기를 담아 를 출간했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공개되는 게 영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엄마를 위해서 이만한 것도 우리가 못하겠니?”라며 동생들을 다독인 심성 깊은 큰딸 그리고 언니의 말에 순응한 마음 따뜻한 동생들까지. 요즘 엄마답지 않고, 요즘 아이들 같지 않은 가족의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훈훈했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1-25
- <NGO칼럼>인혁당·민청학련 사건, 32년만의 무죄판결을 바라보며(배여진 2007.01.25)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32년만의 무죄판결을 바라보며 배여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상임활동가 한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 그 아이의 목에는 새끼줄이 매여져 있고 몸은 나무기둥에 묶여져 있다. 동네꼬마들은 “빨갱이 자식을 총살시켜라!”라고 외치며 이 잔인한 ‘놀이’를 하고 있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은 이런 장면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저 쳐다보고만 있다. 동네 꼬마들의 장난 아닌 장난에 어린 나이에 깊은 상처를 가슴에 품었을 그 아이는 32년의 세월이 지나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엄청난 혐의로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이 되어버린 아버지가 ‘무죄’ 판결을 받는 그 자리에 서 있다. 1975년 4월 9일, 이수병, 송상진, 김용원, 서도원, 하재완, 여정남, 우홍선, 도예종 등 8명은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국가보안법·대통령긴급조치 위반 등)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그 다음 날 새벽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 사건’으로 이들과 함께 투옥되어 온갖 고문을 받던 이들은 옥사를 하거나 출소 뒤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이는 갑작스레 발병한 암으로, 어떤 이는 자신이 먹는 밥에 누군가가 독을 탄다며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지난 32년간 유족들은 중앙정보부의 끊임없는 감시와 협박 속에서도 전 국민을 향해 억울함을 호소했고 진실을 밝혀달라고 목 놓아 울었다. 석방운동을 하던 가족들은 중앙정보부로 강제 연행당해 육체적·정신적 폭행을 당하면서도 자식들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바라보면서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에 늘 외로운 싸움을 해 왔다.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흘러 드디어 처음으로 추모제를 열었고 사건 발생 32년 만에 ‘간첩’이었던 이들은 ‘무죄’를 선고받고 다시금 명예회복을 했다. 32년의 세월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활동을 해왔던 나는 기쁘고도 슬펐다. 32년만의 무죄선고로 그 동안 가슴으로 피눈물을 흘렸을 가족들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렸음에, 32년 만에 편히 눈을 감았을 여덟 분들의 생각에,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한 평생을 살아오셨을 관련자 선생님들의 생각에 기뻤다. 하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지금 이 순간 가장 기뻐해야 할 여덟 분의 당사자들이 없다는 것에 슬펐다. 한 번 끊어진 생명은 다시 되살릴 수 없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과 사법부가 그들의 목에 묶었던 그 동아줄은 끊어버릴 수 있지만, 그 동아줄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이들의 목숨은 다시 살릴 수 없는 것이다. 하기에 이번 무죄판결은 사형이 얼마나 잔혹한 사법‘살인’인지, 왜 사형제도가 없어져야 하는지를 우리 모두에게 다시금 보여준다. 우리는 이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 참혹한 범죄에 가담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지난 32년의 세월동안 우리 사회의 철저한 외면으로 유족들을 차가운 거리에서 외롭게 싸우게 한 우리 사회 모두가 유족들과 먼저 떠난 이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또 지난 군사독재시절 오로지 정권 유지를 위해 간첩으로 조작되어 억울하게 죽어가고 고문 받은 수많은 이들이 진실과 사법적 명예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의 무죄판결이 단초가 되어 그 분들의 진실도 밝혀지고 가슴에 맺힌 한이 하루빨리 풀어지길 바란다. 그나저나, 32년 전 그 아이의 목에 줄을 매고, 나무기둥에 묶은 그 꼬마아이들은 32년이 지난 지금,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무에 묶여 아등바등 거리고 있는 아이와 ‘총살놀이’를 하고 있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32년이 지난 지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철없던 시절에 저지른 일이라지만, 그래도 용서를 구했어야 할 텐데. 그래야 되는데… 참으로 더디지만,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1-25
- 인혁당 사건 32년 만에 무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에서 1975년 긴급조치 위반 등 혐의로 사형이 선고돼 숨진 고 우홍선씨 등 8명에게 무죄가 선고돼 위법한 수사·재판의 희생양이 됐던 피고인들이 32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사법부도 과거의 오점을 바로잡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문용선 부장판사)는 23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1975년 긴급조치 1호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이 집행돼 숨진 우홍선씨 등 8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인혁당 재건을 위한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와 관련해 “당시 수사기관의 피의자신문조서와 진술서를 신뢰할 수 없다”며 “대다수 피고인들의 진술과는 배치되는 부분이 많아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워 증명력이 없으므로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여정남씨 등이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반국가단체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결성해 내란을 예비·음모한 혐의 역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사건의 두 축이었던 ‘인혁당 재건위’와 ‘민청학련’이 모두 반국가단체이고 피고인들에게 내란을 예비·음모할 혐의가 있다는 공소사실은 증거가 없으며 이를 토대로 유죄라고 판단한 원심이 잘못됐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김형태·이유정 변호사 등 공동 변호인단과 ‘인혁당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대책위’는 선고 직후 “사필귀정이며 사법적 명예회복이 이뤄진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검찰은 “판결문을 받아본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간첩가족 낙인 유족들 “서럽다” 탄식 = 32년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인혁당 피고인 8명의 유족들은 “회한과 인내로 버텨 온 30년 넘는 세월이 너무 서럽다”며 탄식했다. 고 하재완씨의 부인 이영교씨는 “오늘 재판을 통해 억울함을 풀게 돼 너무 기쁘다”면서도 “무죄가 선고된 줄을 모르고 눈을 감은 남편을 떠올리면 너무 가슴 아프다”고 흐느꼈다. 고 우홍선씨의 아내 강순희씨는 “공산주의자의 아내로 살아온 삶도 억울했지만 유족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국가가 더 원망스러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와 천주교 인권위원회 등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힘써 온 시민단체들도 “32년간 피눈물로 살아 온 유족들의 끈질긴 싸움의 승리이자 인권의 승리”라고 입을 모았다. ◆국가배상 어떻게 되나 = 유가족들이 향후 국가로부터 민·형사상 어느 정도의 배상을 받게 될지 관심을 끌고 있다. 강순희씨 등 유족 46명은 지난해 10월31일 서울중앙지법에 국가를 상대로 34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유족별 청구 배상액은 11억5000만∼48억원이다. 유족들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 권력의 오용·남용으로 인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므로 국가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들어 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민사소송에서 국가의 배상책임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남편에 의해 살해된 뒤 안기부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 발표된 ‘수지 김’의 유족은 국가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42억원의 위자료를 지급받았다. 법원은 또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숨진 최종길 전 서울대 법대 교수의 유족 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는 국가가 18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간첩으로 몰려 16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함주명씨와 가족들은 국가로부터 14억원의 배상을 받았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1-24
- “죽지나 말지, 죽지나 말지” “무죄판결 받고 나니 죽지나 말지 죽지나 말지 하는 말만 나온다. 왜 이리 허망한지 몰라.” 무죄판결을 받고 집에 돌아온 이영교(72)씨의 슬픔에 섞인 한탄이다. 남편 하재완씨가 목욕하고 온다며 집을 나간지 벌써 33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씨가 남편을 다시 만난 것은 3개월 뒤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였다. 푸른 수의를 입고 나타난 남편은 1년 뒤 1975년 4월 9일 사형 확정 하루만에 다시는 볼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모두 8명이 함께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이다. 남편은 1년 동안 고문으로 인해 탈장이 되는 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32년간 빨갱이 가족이라는 모욕과 사회적 냉대속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지난한 싸움이 진행됐다. 그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눈치 때문에 큰 아들이 고등학교 때 전학만 3번을 다녔다”는 말로 지난 세월을 설명했다. 이씨는 “남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우리 아이들의 명예를 위해 지금까지 싸워왔다”고 말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쫓아가 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천주교 인권위 등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며 감사해했다. 그는 또 “가장 나이 많은 피해자 유족이 88세”라며 “이들이 남은 삶이라도 편안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는 사회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신드롬을 우려했다. 이씨는 “유신정권은 불법이었고 박정희는 국민을 우롱했다”며 “이것이 진실”이라고 울먹였다.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1-24
- <내일시론>‘ 힐러리 클린턴 미국대통령’(임춘웅 2007.01.24) ‘ 힐러리 클린턴 미국대통령’ “힐러리를 대통령으로”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59, 민주당, 뉴욕주)이 내년에 있을 미국대통령 선거출마를 선언하면서 내세운 구호다. 상징적이고 산뜻해 보인다. 클린턴 의원이 다음 대선에 출마할 것이란 것은 일찍부터 예상돼 왔던 일이긴 하지만 막상 출마를 공식 선언하자 미국은 적지 아니 흥분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역사상 최초의 ‘마담 프레지던트’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 때문이다. 미국은 대단히 개방적이고 여성인권이 가장 발달해 있는 나라이면서도 여성대통령에는 거부반응이 적지 않은 특이한 나라다. 세계대통령 역할까지 해야 하는 미국의 대통령직에는 여성이 적합지 않다는 선입견이 남아 있는 것이다. 1984년 로널드 레이건 현직 대통령에 도전했던 민주당의 월터 몬데일 후보는 부통령 후보로 여성인 제랄딘 페라로를 지명했었다. 여성표를 모아보려는 회심의 시도였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참패였다. 여성표가 페라로에 투표하지 않았음이 밝혀졌었다. 그 이후 여성후보는 대통령선거전에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미국에도 여성대통령의 전망 밝아 그러나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워싱턴 포스트지가 조사한 것을 보면 여성의 59%가 클린턴 의원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클린턴 의원은 18-34세까지의 젊은 여성층에서 66%라는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공화당 후보로 유력시 되는 루돌프 쥴리아니 전 뉴욕시장, 존 메케인 상원의원과의 경쟁에서도 클린턴 의원은 3-5%포인트 차로 앞서고 있다. 현재의 분위가라면 미국에 여성대통령의 출현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힐러리 클린턴은 우선 민주당 경쟁자인 흑인 상원의원 배럭 오바마를 24% 포인트차로 앞서고 있다. 클린턴 의원은 민주 공화 양당 대통령 후보군중에서 가장 많은 1400백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이미 확보해두고 있다. 선거자금 면에서도 아직은 유리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대통령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라크 전으로 수렁에 빠진 공화당보다는 민주당이 대선에서 유리한 입장이다. 바로 이러한 민주당의 고지가 힐러리에겐 악재가 될 수도 있다. 이라크전이라는 미국의 난해한 딜레마를 푸는데 여성대통령이 적절할 것인가에 대한 투표자들의 의문이 남아있다. 이라크전이 민주당에 유리한 입지를 제공하고 있으나 힐러리에겐 바로 그 이라크전이 함정이 될지도 모른다. 다음으로는 남편이자 전임 대통령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존재다. 최근 미국정치에서 가장 출중한 임무수행 능력을 보여 미국의 ‘슈퍼스타’인 빌 클린턴은 힐러리 클린턴에게 행운이자 동시에 짐이라는 평가가 있다. 벌써부터 정가에서는 다음 대선은 빌 클린턴의 세 번째 선거전이 될 것이란 말이 나돌고 있다. 힐러리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경우 실제 대통령이 누구냐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문제가 투표자들의 의사 결정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가 자못 궁금하다. 힐러리 대통령엔 넘어야할 산 많아 힐러리 클린턴은 매우 개혁적인 민주당원이었으나 상원의원 클린턴은 보수성향을 보인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클린턴 의원은 부시정부의 이라크전에 지지를 보냈고 동성애, 낙태문제 등에서도 보수적인 경향을 보여 왔다. 때문에 민주당 지지층 일각에서는 그를 ‘기회주의자’라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인기도 높지만 ‘안티 힐러리’도 적지 않다. ‘최초의 부부 대통령’도 좋게만 작용하진 않을 것이다. 부시의 ‘부자 대통령’에 거부반응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힐러리 클린턴 의원은 이번 “나는 이기기 위해 뛰어 들었다”는 출마선언에서 이라크전의 올바른 종결과 천문학적인 미국의 재정적자 축소, 의료보험 개혁에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빌 클린턴 정부시절엔 이라크 전도 없었고 천문학적인 적자도 없었다. 그러나 의료보험 개혁은 시도했다 실패했었다.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돼서 이라크 전이 올바르게 종결되고 재정적자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한번 실패했던 의료보험제도를 개혁해 낼 수 있다면 미국엔 축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최초의 여성 미국대통령이 되기 위해 힐러리 클린턴의원이 넘어야 할 산은 아직도 높아 보인다. 임춘웅 객원논설위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1-23
- <내일시론>‘좋은 대통령’ 될 수 있다 ‘좋은 대통령’ 될 수 있다 지난 해 한 공무원이 펴내 화제가 됐던 책이 있다. 퇴직을 눈앞에 뒀던 산업자원부 서기관이 낸 것으로 책 제목은 과천블루스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공무원이 된 지 30년 세월이 흘렀지만 공직사회의 부정부패는 변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인터넷이 발전해 사회가 투명해지고 국가청렴위원회가 설치돼 공직사회의 내부감시기능도 발전했지만 공직사회의 부패와 비리는 여전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가짜공문’에 의해 집행되는 공무원 판공비와 출장비가 한 해 수백억은 될 것이라고 한다. 한 부처 차관은 1000원이면 만들 명패를 공금 200만원을 들여 만들었다. 국책은행이 ‘신이 내린 직장’이 된 것은 퇴직 후 이들 은행에서 근무할 가능성이 많은 재경부 고위간부들이 이를 방치했기 때문이라는 대목을 보면 부아가 끓어오른다. 또 신도시 개발정보가 외부로 새나가는 과정을 보면 세금을 또박또박 내는 서민이 불쌍해진다. 건설교통부가 산하기관에 의뢰한 연구논문이 보고되면 건교부 다수 직원들은 이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되고 그들은 이 정보를 친인척에게 알려 엄청난 시세차익을 얻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매달 근로소득세를 꼬박꼬박 내고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법인세를 성실히 납세한 봉급생활자와 중소기업인으로서는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대부분 공복이겠지만 공직사회 부패 여전하다는 주장 많아 물론 대부분의 공무원은 그들 말대로 국민의 공복으로서 많지 않은 봉급을 받으며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있을 것이다. 산간벽지에서도 근무하고 섬마을에서도 2세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공무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과천블루스에서 밝혀진 경제부처의 비리와 삼성장학재단에서 최근 드러난 교육부의 몰염치를 보면 아직 상당수 공무원은 ‘공복’이 분명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삼성그룹의 사회환원기금 8000억원으로 출범한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은 사무국 직원 11명 가운데 9명을 교육부 퇴직공무원 가운데 기용해 교육부의 ‘낙하산 착륙장’이 됐다는 비난을 들어야했던 것이다. 참여정부에서는 정부혁신이 착착 진행돼 어느 정권보다 깨끗하고 효율적인 행정이 이뤄지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아직 도둑놈 심보를 가진 공무원은 많고 아직 상당수 정부기관은 국민들을 위한 서비스 기관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공무원연금에 생각이 미치면 암울해진다. 정부가 마련한 공무원연금 개혁안은 국민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나마 공무원 단체에서는 미흡한 연금개혁안도 반대하고 있다. 물론 전방 철책선과 산간오지 그리고 조그만 섬 등에서 한평생 국민에게 봉사해온 공무원들의 노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 권리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평생을 산업현장 등에서 밤낮없이 일하고도 노후의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대부분의 국민이 공무원이 덜 낸 연금보험료를 대신 납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해답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국민에게는 더 내고 덜 받는 국민연금 개혁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은 더 내고 덜 받는 공무원연금 개혁을 거부한다면 공무원집단은 국민에게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기득권 집단으로 비춰질 뿐이 아니겠는가. 공무원연금과 공직사회 개혁에 앞장섰으면 지금 노무현 대통령은 “내가 한 일이 많은데 많은 국민들이 왜 나를 ‘나쁜 대통령’으로 생각하느냐”고 억울해한다고 한다. 옳은 얘기일지 모른다. 노 대통령은 사실 권위주의 정치를 청산하는데 앞장섰고 정경유착 철폐에 큰 공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의 힘으로 성취했다고 하지만 지난해 3000억달러 수출도 달성했고 올해는 국민소득 2만달러도 달성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노 대통령에게 당부하고 싶다. 깨끗한 정치도 중요하고 올곧은 언론도 중요하나 깨끗한 공직사회와 국민이 존경하는 공무원상 정립을 위해 공직사회 개혁에 나서달라는 것이다. 대통령은 최고위공무원으로서 국군을 통수하고 전 공무원을 지도하게 돼 있다. 고령화사회를 맞아 정년이 보장되고 연금이 많은 공직사회에 인재들이 몰리고 있는 지금이 적기인지도 모른다. 공무원연금도 국민연금과 함께 ‘더 내고 덜 받는’ 구조로 개혁하고 깨끗하고 국민에 서비스하는 공직사회 개혁에 성공할 경우 이 것만으로도 노 대통령은 국민에게 ‘좋은 대통령’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정 세 용 논설 주간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1-23
- <밥일꿈>부실채권 정리에도 ‘공짜점심은 없다’ 부실채권 정리에도 ‘공짜점심은 없다’ 정 진 문 (한국자산관리공사 종합기획부장) 1997년의 외환·금융위기 상황이 발생한지도 어언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정부는 한보철강의 부도를 신호로 시작되었던 우리 경제의 총체적 경제위기 상황 극복을 위해 긴급히 마련한 금융구조개혁 프로그램의 핵심축으로서 부실채권정리기금을 한국자산관리공사(이하 “KAMCO”)에 설치했다. KAMCO는 부실채권정리기금 39.5조원으로 111조원의 부실채권을 인수하였고, 그중 75.4조원을 정리하여 42조원을 회수함으로서 흑자를 냈다. 또한 잔여보유자산을 정리할 경우 잉여액은 약 5조원으로 추정되는 예상외의 큰 성과를 거뒀다. 이러한 성과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KAMCO의 효율적인 관리전략에 기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KAMCO가 부실채권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도입한 선진 금융기법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국제입찰, ABS(자산유동화증권) 발행, 기업채권의 제3자 인수방식 M&A, 외국투자가와 합작 AMC(자산관리회사)·CRC(기업구조조정전문회사)·CRV(기업구조조정투자회사) 설립 등 KAMCO의 새롭고 다양한 노력은 공적자금 회수 극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같이 KAMCO는 부실채권정리기금을 운용을 통해 금융시장의 안정과 금융시스템의 원활한 작동을 유지토록 함으로써 경제위기 극복에 기여했다. 그 과정에서 국내외 투자자를 상대로 한 활발한 마케팅 활동, 채권 종류별 ·유형별 정리방법 개발, 부실채권정리의 국제적 협력체제 구축 등 부실채권시장의 형성과 활성화를 위해 선도적 역할을 했다. 또한 KAMCO는 기업의 워크아웃 성공에도 큰 성과를 냈다. 대우계열 부실기업의 워크아웃에 적극 참여하여 대우인터내셔날, 대우조선해양, 대우일렉트로닉스 등이 과거의 부실을 털어내고 정상화되도록 했으며 최근에는 대우종합기계와 대우건설을 M&A 함으로써 공적자금을 최대한 회수할 수 있었다. 현재 KAMCO는 그동안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쌓아온 부실채권정리 노하우를 사장시키지 않고 국외부실채권시장에 투자해 수익을 창출하고자 해외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07년을 해외진출의 원년으로 삼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날 수 있도록 5,000억원 규모의 투자협의체를 주도하여 국외부실채권에 투자할 예정이다. 지난 10년간의 부실채권정리기금 운용 성과를 돌이켜보면 “공짜 점심은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공적자금으로 조성된 부실채권정리기금이 흑자를 실현하기 까지는 금융시스템의 복원과 성장을 위한 정부의 일관된 정책 아래 금융기관과 구조조정 기업에서 수많은 사람이 직장을 떠났던 아픔과 밤늦도록 일에 매달렸던 헌신적인 노력이 오늘 성과의 밑거름이 되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1-04
- 교육이 경쟁력이다 - 아일랜드 교육개혁 맞춤식 대학교육, 국가경쟁력 견인 외국기업 유치하면 눈높이 인재공급 … 토종기업 육성에도 나서 지난해 세계적인 인터넷 쇼핑몰 아마존이 영국 런던 외곽지역에 있던 고객서비스센터를 아일랜드 코크로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아마존이 밝힌 고객서비스센터 이전 이유는 영국에서 외국어를 구사하는 직원을 구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값싼 노동력을 찾아 영국을 떠난 기업은 많았다. 그러나 ‘능력 있는 사람’이 없어 영국을 떠나겠다고 한 기업은 아마존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영국 교육계와 경제계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최근 세계적인 기업들이 ‘강소국’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사례가 늘고 있다. 20세기 산업화시대에는 값싼 노동력이 기업경쟁력의 원천이었다면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는 창의성을 갖춘 고급인력이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강소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의 공통점은 탄탄한 평생교육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한때 국내에서 신드롬현상까지 일으킨 아일랜드도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아일랜드는 특별한 지하자원을 가지지 못했다. 인구도 400여만명에 불과하고, 오랜 세월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은 식민지였다. 그러나 작고 지리적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아일랜드는 1인당 국내 총생산(GDP) 3만달러를 넘어선 부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고속성장은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이티(IT)와 소프트웨어(SW) 분야의 외자유치가 발판이 됐다. 아일랜드 안팎에서는 낙후된 농업국가 아일랜드가 IT·SW 분야에 외자를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 특히 대학교육이 바탕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최근 유럽 일부에서는 아일랜드 교육에 대한 회의론이 일기도 했다. 아일랜드 초등학교 한 학급 당 평균 학생 수는 대다수 유럽 국가들보다 많은 24.5명 수준이다. 덴마크의 한 학급 당 평균 학생 수는 19명, 벨기에는 20명, 이탈리아는 18명, 룩셈부르크는 15명이다. 외국어 교육도 영국과 헝가리에 이어 끝에서 3번째 수준이다. 성인들의 문맹률도 유럽국가에서 뿐 아니라 개발도상국 전체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아일랜드 교육의 경쟁력은 교육통계로 설명할 수 없는 곳에서 시작된다. 이른바 ‘경제적 요구에 부응하는 교육시스템’이 그것이다. 아일랜드 교육제도의 기본은 평생교육체제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 요구에 부응하는 교육시스템’이다. 아일랜드 정부는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하며 이공계 인력을 대거 배출했다. 아일랜드 대학졸업생 가운데 50%가 이공계다. ‘경제적 요구에 부응하는 교육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정부는 물론 대학과 기업이 손을 잡고 학과의 신·증설, 커리큘럼 조정, 교수 초빙 등에 나섰다. 아일랜드에서는 겨울이면 기업, 대학, 학부모, 정부가 참여하는 아일랜드 포럼을 연다. 이 포럼에서는 기업체의 인력수요를 진단하고 대학의 학과신설과 정원문제를 논의한다. 이것이 바로 수요자 중심의 대학교육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정부가 외국기업을 유치하면 대학들은 2~3년 이내에 해당기업이 필요로 하는 ‘맞춤형 인재’를 공급한다. 이런 노력의 흔적은 아일랜드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인 더블린대학의 사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더블린대학은 19세기 중반에 세워진 종합대학으로 인문학 전통이 강했던 대학이다. 이런 더블린대학이 2년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 결과 11개 단과대학, 110개 학과 체제를 5개 단과대학, 35개 학과 체제로 바꿨다. 특히 아일랜드 구조조정에서는 ‘학과이기주의’도 극복했다는 점이다. 의학·농학·수의학·보건학 등이 생명과학(Life Science) 대학으로 통폐합됐으며 수학·엔지니어링·물리학과도 하나의 합쳤다. 유럽의 명문대학이며 신학 철학 역사학 등 순수 인문학의 발상지로 꼽히는 400년 전통 트리니티대학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아일랜드 대학생들은 3학년이 되면 캠퍼스를 떠나 기업에 나가 실무를 익힌다. 이 과정에서 조기 취업을 하는 사례도 많으며 대학 졸업생의 98%는 졸업 후 3개월 이내에 취업을 하고 있다. 이 처럼 조기취업이 가능한 것은 정부가 3학년 학사제도 등 다양한 학위제도를 만들어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아일랜드 대학들의 역할은 외국계기업에 고급인력을 공급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있다. 아일랜드 대학들은 ‘캠퍼스 비즈니스 인큐베이터 센터’를 앞 다퉈 설립하고 있다. 즉 토종기업을 설립하고 지원하는데 대학이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이미 상당한 성과도 거두고 있다. 아일랜드 교육의 강점은 평생교육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직업교육은 세계적인 기업들이 아일랜드를 선호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아일랜드가 낮은 실업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정부의 적극적인 직업교육 투자를 확대해왔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아일랜드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직업교육예산을 3배 이상 늘렸다. 1994년부터는 대학교육수준의 직업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1-02
- 한방상식 범의 기백을 얻게 되는 호박(琥珀) 옛날에 어떤 사냥꾼이 있었는데 매우 어린 자식이 있었다. 하루는 그 자식이 승냥이에 쫓기다 놀라서 병을 얻었다. 사냥꾼은 승냥이에게 놀라서 병이 된 것이므로 범 고기를 먹일 생각으로 범을 잡으로 산 속으로 갔다. 며칠이 지나자 큰 소나무 밑에 맹호 한 마리가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사냥꾼은 창을 들어 범을 향해 던졌는데 범이 보이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사냥꾼은 범이 누워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범이 누워있는 자국밖에 없었다. 그곳을 파 보니 범의 뼈 같은 것이 나왔는데 범이 죽어 변한 것으로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그것을 자식에게 삶아 먹였더니 신기하게 나았다. 세월이 지나 그 자식은 담대한 청년이 됐고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을 수 있을 만큼 용맹하게 됐다. 이들 부자는 놀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약을 주었는데 호백(虎魄)이라고 불렀다. 뒤에 사람들은 옥과 같이 투명하다고 호박(琥珀)이라고 쓰게 됐다. 호박은 식물의 수지가 땅속에 오랫동안 매몰돼 응결된 일종의 화석이다. 호박에는 혼백을 편안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