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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여행 가이드>사천성 우쉬하이 우쉬하이 관광지대는 쓰촨성 티베트족 자치간즈주 지우롱현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400㎢고 연평균기온은 섭씨 4.9도에 평균고도는 해발 1440m, 최고높이 해발 6010m다. 40여 곳이 관광지로 개발됐는데 끝없이 이어진 산봉우리, 호수, 원시삼림지대, 협곡 카르스트, 초원, 습지, 야생 동식물, 티베트 풍습과 불교문화 등이 볼만 하다. 설산, 포어예 봉우리, 라오런 봉우리, 시엔따이빙 강, 치스어하이 호수, 우쉬 온천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우쉬하이는 티베트어로 ‘휘황찬란한 호수’를 뜻한다. 호수는 눈 녹은 물이 계속 공급되고 지하수가 올라오면서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우쉬하이 남쪽에 우뚝 솟은 빗 모양의 두개 산봉우리 중 높고 큰 모습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 랑구(설산)이고 유연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것이 스얼즈메이 봉우리다. 아름다운 우쉬하이는 우아하고 고요하며 신비로운 모습의 원시생태를 유지하고 있다. 고목이 하늘 높이 치솟아 원시림을 이루고 원생의 고산 저습지가 정취를 더한다. 서식하는 나무는 창빠오렁샨, 촨띠엔렁샨, 촨시윈샨, 홍화, 바이화, 두쥐엔 등 15종이 있다. 높고 큰 나무에 가득 달려있는 녹색 연기와 같은 송루어는 바람을 따라 춤추는데 그 모습이 가지각색이다. 초원에는 140여 종의 다양한 풀이 뒤덮고 있다. 구역 내에는 야생동물 50여종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중 중국정부가 지정한 국가 1·2급 보호동물이 20여종이다. 진첸빠오(표범의 일종), 바이춘루(사슴의 일종), 니우링(영양의 일종), 샤오시옹마오(팬더곰의 일종), 두안웨이허우(원숭이의 일종) 등이 알려져 있다. 이 밖에 다수의 양서류, 파충류가 서식하고 있으며 진귀한 약재와 버섯도 재배되고 있다. 이곳에는 티베트족과 이족, 한족이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다채로운 문화를 이어오고 있다. 3개 민족은 각자 자신의 전통문화와 풍습을 보존해오면서 서로 교류하며 민족간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보완해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다, 우쉬하이는 미국의 유명한 탐험가 J·F 로커가 샹거리라의 징시를 발견하고 이곳에 오래 머물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국제적인 생태여행 상품으로 개발되고 있는데 원시의 아름다움과 민족 고유의 풍습이 잘 보존돼 있어 고풍스럽고 신비한 운치를 맛볼 수 있다. 우쉬하이는 ‘공가명주’ ‘서부의 신비로운 경승지’로 불리며 관광객 홀로 생태·문화·탐험 여행이 가능하다. 우쉬하이 관광지 입장료는 1인 60위안으로 노새(40위안)· 말(160위안)을 이용할 수 있다. 한국에서 쓰촨성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000년 이전만 해도 한국에서 쓰촨까지 가는 길은 특별한 교통편이 없어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울에서 충칭과 청뚜로 직항로가 개설됐기 때문에 한결 수월해졌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9-27
- <유승삼 칼럼>법조계, 국민에게 길을 물어라 법조계, 국민에게 길을 물어라 유승삼 (언론인 KAIST 초빙교수) 이용훈 대법원장의 초도 순시 발언에 대해 검찰과 변호사협회가 일주일이나 앙앙불락 하는 것을 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지난 22일 한 판사가 동료 판사들에게 보낸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국민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검찰이나 경찰에서는 조서를 ‘꾸민다’고 한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게 아니라 ‘산다’고 한다. … 조서를 진술한 그대로 작성해 준다면 어찌 꾸민다고 할 것이며 전심전력으로 나를 도와준 변호사를 왜 ‘산다’고 하는 것인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검찰과 변호사에 대한 국민의 시각은 이렇다. 그런데도 자성은커녕 대법원장이 제기한 문제의 본질은 제껴 두고 자신들의 체면과 직역 이기주의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은 가소롭다. 국민은 공판중심주의 원한다 대법원장이 강조하고 있는 공판중심주의는 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우리나라 법정에서는 외국 영화에서와 같은 긴박감 있는 법정 공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법정은, 좀 과장하면 ‘꾸민’ 조서를 가진 검사와, 소송 당사자가 ‘산’ 변호사가 ‘전관예우’를 하는 판사의 입회 아래 서류 심사를 하는 곳이다. 이른바 문서조서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니 표현은 다소 직설적이고 거칠었는지는 모르나 “검사의 수사 기록을 던져 버리고 법정에서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는 대법원장의 강조는 국민의 가슴에 깊이 와 닿는 것이었다. ‘밀실’에서 ‘꾸민’ 조서를 중심으로 한 ‘서류심사’재판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법정에서 맞서면서 진실을 가리게 하자는 공판중심주의와 구두변론주의는 이미 사법개혁추진위원회에서도 실시 결론이 난 것이다. 또 부분적으로는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말은 그것의 촉진을 강조한 것뿐인데 검찰과 변협은 그 취지는 아랑곳 않고 그 표현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말 그대로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격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 이래 ‘국민을 섬기는 사법부’를 표방해 왔다. 취임사에서 “사법부는 인권 보장의 최후 보루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다”고 한 것부터 시작해 “화이트 칼러 범죄에 대해서는 엄정히 판결해야 한다” “재판은 국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지 판사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압수 수색 영장은 국민의 신체·재산을 제약하는 마지막 수단인데 엄격하게 심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등등 일련의 발언들이 그것이다. 모두 국민을 중심에 두자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더라도 이번 발언이 검찰과 변호사를 폄하하고 모욕하려 했던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서로가 부담스러운지 시끄러웠던 사태는 대법원장이 적당한 선에서 유감 표명을 하면, 현재의 선에서 갈등을 봉합하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식의 미봉은 바람직스럽지 않은 것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대법원이 제기한 ‘국민을 섬기는 법원’만들기에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가령 법원 내부나 검찰, 재야 법조계가 공판중심주의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덮어둘 일은 아닐 것이다. 기왕에 갈등이 불거진 마당에 그것을 공개적으로 제시해 이성적인 토론으로 사법개혁을 함께 완성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래야 각 직역간의 갈등을 원천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길이기도 할 것이다. 대법원장의 신중한 영장발부에 대한 지적이 있은 뒤, 각 법원의 영장 기각률이 거의 두 배나 높아졌다고 한다. 비례해서 법원에 대한 검찰의 불만도 그만큼 높아졌다. 이런 식의 즉흥적이고 일방적인 변화나 그에 따른 갈등은 바람직하지 않다. 전체적인 안목에서 공개적인 논의를 합의하에 개혁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유전무죄’여전히 법조계 숙제 어느 판사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전관예우’라는 말이 가장 듣기 싫다고 고백했다. 국민 역시 그 두 말이 사라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유전무죄’란 말은 한 탈주범이 인질극 과정에서 외쳐 더욱 더 유명한 말이 되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18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 사건과 그 말은 지난 봄 영화로 다시 부활했다. 왜 그 사건이 18년이 지난 오늘, 다시 영화로 부활하며 그 인질범이 외친 ‘유전무죄’가 왜 오늘날까지도 국민의 가슴 속에서 메아리치는가. 감정 대립할 때가 아니다. 법조계는 함께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 해결 방법은 국민의 응어리 진 가슴 속에 있다. 국민에게 물으면 길은 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9-26
- <유승삼 칼럼>법조계, 국민에게 길을 물어라(2006.09.26) 법조계, 국민에게 길을 물어라 유승삼 칼럼 언론인·KAIST초빙교수 이용훈 대법원장의 초도 순시 발언에 대해 검찰과 변호사협회가 일주일이나 앙앙불락 하는 것을 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지난 22일 한 판사가 동료 판사들에게 보낸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국민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검찰이나 경찰에서는 조서를 ‘꾸민다’고 한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게 아니라 ‘산다’고 한다. ~조서를 진술한 그대로 작성해 준다면 어찌 꾸민다고 할 것이며 전심전력으로 나를 도와준 변호사를 왜 ‘산다’고 하는 것인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국민은 공판중심주의 원한다 검찰과 변호사에 대한 국민의 시각은 이렇다. 그런데도 자성은커녕 대법원장이 제기한 문제의 본질은 제껴 두고 자신들의 체면과 직역 이기주의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은 가소롭다. 대법원장이 강조하고 있는 공판중심주의는 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우리나라 법정에서는 외국 영화에서와 같은 긴박감 있는 법정 공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법정은, 좀 과장하면 ‘꾸민’ 조서를 가진 검사와, 소송 당사자가 ‘산’ 변호사가 ‘전관예우’를 하는 판사의 입회 아래 서류 심사를 하는 곳이다. 이른바 문서조서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니 표현은 다소 직설적이고 거칠었는지는 모르나 “검사의 수사 기록을 던져 버리고 법정에서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는 대법원장의 강조는 국민의 가슴에 깊이 와 닿는 것이었다. ‘밀실’에서 ‘꾸민’ 조서를 중심으로 한 ‘서류심사’재판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법정에서 맞서면서 진실을 가리게 하자는 공판중심주의와 구두변론주의는 이미 사법개혁추진위원회에서도 실시 결론이 난 것이다. 또 부분적으로는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대법원장의 말은 그것의 촉진을 강조한 것뿐인데 검찰과 변협은 그 취지는 아랑곳 않고 그 표현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말 그대로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격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 이래 ‘국민을 섬기는 사법부’를 표방해 왔다. 취임사에서 “사법부는 인권 보장의 최후 보루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다”고 한 것부터 시작해 “화이트 칼러 범죄에 대해서는 엄정히 판결해야 한다” “재판은 국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지 판사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압수 수색 영장은 국민의 신체·재산을 제약하는 마지막 수단인데 엄격하게 심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등등 일련의 발언들이 그것이다. 모두 국민을 중심에 두자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더라도 이번 발언이 검찰과 변호사를 폄하하고 모욕하려 했던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서로가 부담스러운지 시끄러웠던 사태는 대법원장이 적당한 선에서 유감 표명을 하면, 현재의 선에서 갈등을 봉합하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식의 미봉은 바람직스럽지 않은 것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대법원이 제기한 ‘국민을 섬기는 법원’만들기에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가령 법원 내부나 검찰, 재야 법조계가 공판중심주의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덮어둘 일은 아닐 것이다. 기왕에 갈등이 불거진 마당에 그것을 공개적으로 제시해 이성적인 토론으로 사법개혁을 함께 완성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래야 각 직역간의 갈등을 원천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길이기도 할 것이다. 대법원장의 신중한 영장발부에 대한 지적이 있은 뒤, 각 법원의 영장 기각률이 거의 두 배나 높아졌다고 한다. 비례해서 법원에 대한 검찰의 불만도 그만큼 높아졌다. 이런 식의 즉흥적이고 일방적인 변화나 그에 따른 갈등은 바람직하지 않다. 전체적인 안목에서 공개적인 논의를 합의하에 개혁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유전무죄’여전히 법조계 숙제 어느 판사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전관예우’라는 말이 가장 듣기 싫다고 고백했다. 국민 역시 그 두 말이 사라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유전무죄’란 말은 한 탈주범이 인질극 과정에서 외쳐 더욱 더 유명한 말이 되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18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 사건과 그 말은 지난 봄 영화로 다시 부활했다. 왜 그 사건이 18년이 지난 오늘, 다시 영화로 부활하며 그 인질범이 외친 ‘유전무죄’가 왜 오늘날까지도 국민의 가슴 속에서 메아리치는가. 감정 대립할 때가 아니다. 법조계는 함께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 해결 방법은 국민의 응어리 진 가슴 속에 있다. 국민에게 물으면 길은 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9-26
- 환갑 넘긴 시의회 청사 건물 곳곳에 영욕의 세월 흔적 남아 서소문 별관, 의회 청사 활용 고려 서울시의회 청사는 1935년 12월 ‘경성부민관’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일제하 경성에서 전기를 독점적으로 판매하던 경성전기가 낸 기부금을 재원으로 지은 건물이다. 철근 콘크리트형 3층 건물로 모서리에 63척 높이의 탑이 지금도 남아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부민관은 애초 연극·강연회·음악회 등을 공연하는 문화공간으로 1800석의 관람석과 냉·난방 시설이 갖춰진 대강당을 비롯해 중강당·소강당 등이 있었다. 최승희의 신무용 등 우리나라 공연예술사에 획을 그은 공연은 대부분 이곳에서 열렸다. 하지만 일제 식민문화의 홍보 창구로 사용되면서 친일파 예술인들이 일본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 말기인 1945년 7월 24일 일본에 점령된 동아시아 각국의 친일파가 이곳에 모여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의사가 폭탄을 설치해 파괴했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 소유로 있다가 정부 수립 후 시민회관으로 지정됐다. 아시아 최초의 국립극장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이승만 박사는 이곳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서울시내 대부분의 건물이 파손되면서 시청사는 1954년 제3대 국회부터 1975년 7대 국회까지 ‘태평로 의사당’이라는 이름으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됐다. 1976년 9월 국회가 여의도로 옮겨가면서 서울시에 환수된 부민관은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용도가 다시 바뀌었다. 1991년 지방의회가 부활하면서 서울시의회가 이 건물을 의회청사로 사용하게 됐고 오늘에 이르게 됐다. 현 시의회 청사는 시의회 본회의 등 의정활동은 물론 어린이와 청소년의 의회체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공간이 좁아 새 청사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7대 의회 박주웅 의장은 서울시 신청사가 완공되면 현 서소문 별관을 의회청사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이명환 기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24
- <성한표 칼럼>최규하 전 대통령이 남긴 교훈 최규하 전 대통령이 남긴 교훈 성한표 (언론인 전 한겨레신문 논설주간) 우리나라 헌정사상 재임 중에 군사 쿠데타를 당한 대통령은 윤보선, 최규하 두 사람이다. 내각책임제 하의 대통령이었던 윤 전 대통령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나자 “올 것이 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반면에 대통령제 하의 대통령이었던 최 전 대통령에게는 ‘비운의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이 ‘비운의 대통령’이 22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선출된 1979년 12월 6일 이후 대통령 직을 사임한 1980년 8월 16일까지의 8개월은 최규하 개인의 인생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의 역사에서도 비운의 세월이었다. 12·12와 5·18이라는, 대통령이 결단해야 할 두 큰 사건이 그의 짧은 재임기간동안 일어났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요구받은 결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가 달라질 수 있던 사건들이었다. 성공한 외교관, 실패한 대통령 그는 피살된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10대 대통령에 선출된 지 엿새만인 12월 12일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격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의한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체포(이 사건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 ‘쿠데타적 사건’으로 공식 정리되었다)를 승인해줘야 하는 궁지에 몰렸고, 실질적인 통치권이 신 군부의 손에 들어간 상태에서 12월 21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이듬 해 5월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 중이던 광주시민들을 군이 무차별 살상하는 사태에 대해서도 헌법상의 군 통수권자로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5·18당시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전혀 할 수 없었다는 정황을 드러내는 기록들도 있다. 신 군부가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이후 5월 말까지 그가 공식행사에 참석하거나 군관계자나 민간인을 면담한 기록이 대통령 의전일지에 나타나지 않으며, 심지어 이 기간동안 각료를 만난 기록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모로 실패한 대통령으로 분류될 만 하다. 그러나 그는 직업 외교관으로서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수재로서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는 1952년부터 주일대표부 총영사, 공사 등을 지내다가 59년 9월 일본 일선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외무부 차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4·19혁명 이후 외무부 차관 직을 사임했다가 63년 3월 외무부 본부 대사가 되어 아시아 태평양 각료회의(APEC) 이사회 설립을 추진하여 66년 제1차 대회를 성사시켰다. 그는 말레이시아 대사를 거쳐 67년 외무부 장관에 발탁되는 고속승진의 가도를 달렸다. 그는 75년 말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이듬해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79년까지 장수 총리를 지내다가 박 대통령의 피살로 역사적 격랑에 휘말렸다. 관료로서의 그에 대해서는 양심적이다, 또는 깨끗하다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고인이 된 그의 빈소를 찾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생동안 외교 분야에서 큰 공헌을 한 분이며, 성실한 인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분”이라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격랑을 헤쳐 나가야 했을 대통령으로서 그에 대해서는 가혹한 평가도 나온다. 빈소를 찾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당 대표로서 당시 대통령 권한 대행이던 최 전 대통령을 만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이 말은 그가 지난 99년 낸 회고록에서 최 전 대통령에 대해 “헛된 욕심과 좁은 시야에 갇혀 민주화를 지연시켰다”고 평가한 것을 생각나게 만든다. 최 전 대통령이 대통령 재임시절 일어난 여러 사건에 대해 입을 열지 않고, 그 비밀을 무덤 속에까지 가져가 버린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법정에서 법에 의해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그가 집필하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던 회고록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있다. 공직자의 정체성과 사명감 그러나 우리가 그의 죽음 앞에서 먼저 생각할 일은 그가 가슴 속에 품고 간 비밀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없이, 인생항로에서 만나는 결단의 순간을 회피했을 때 우리 자신과 주변에 어떤 피해를 줄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람이다. 외교관으로서의 그는 뛰어난 영어실력과 신사적인 매너, 그리고 양심적인 태도만 가지고도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다. 그 자리가 요구하는 용기와 결단력, 그리고 헌신을 갖추지 않고는 아무리 욕심나는 자리라도 오르기를 주저할 것을 그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23
- 동화 ‘활명수’ 109년 동안 78억병 팔려 국내 최장수 상품 … 시장점유율 60% 국내 최장수 상품인 동화약품공업(대표 윤길준)의 ‘활명수’가 109년동안 78억병이 팔린 것으로 나타났다. 25일 동화약품에 따르면 국내 최초 등록상품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부채표 활명수는 1897년 처음 발매된 이래 올해까지 누적판매량이 78억병에 이른다. 이 제품은 1897년 당시 궁중에서 사용되던 생약비방에 양약의 장점을 취해 국민에게 널리 보급하고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이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의 활명수(活命水)는 11가지 순수생약성분으로 제조해, 과식, 소화불량, 식체 등에 효능을 발휘하면서 4세대에 걸쳐 우리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브랜드인 셈이다. 많은 약 중에 유독 소화제인 활명수를 처음으로 만든 까닭은 당시 가장 흔한 질병이 위장장애, 소화불량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많은 양의 식사를 매우 빨리 먹기 때문에 위장병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활명수는 가마솥에 각종 한약건재와 물을 넣고 달여 진하게 한 뒤 몇 번의 여과를 거쳐 수입약제와 가루를 타서 배합하는 방식이었다. 탕약밖에 몰랐던 시대상에 비춰 보면 활명수는 양약의 제조방법을 적용해 탕약의 과학화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활명수는 전자동 액제생산라인에서 연간 1억병이 생산되면 매출 350억원, 시장점유율 60%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브랜드로 성장했다. 동화약품 관계자는 “세월이 흘러도 다름없는 것은 활명수의 약효”라며 “탄산가스를 첨가한 가스활명수를 발매하는 등 브랜드를 확장해 국내 소화제 시장에서 위치를 굳건히 했다”고 말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9-25
- <성한표 칼럼>최규하 전 대통령이 남긴 교훈(2006.10.23) 최규하 전 대통령이 남긴 교훈 성 한 표 우리나라 헌정사상 재임 중에 군사 쿠데타를 당한 대통령은 윤보선, 최규하 두 사람이다. 내각책임제 하의 대통령이었던 윤 전 대통령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나자 “올 것이 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반면에 대통령제 하의 대통령이었던 최 전 대통령에게는 ‘비운의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이 ‘비운의 대통령’이 지난 22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선출된 1979년 12월 6일 이후 대통령 직을 사임한 1980년 8월 16일까지의 8개월은 최규하 개인의 인생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의 역사에서도 비운의 세월이었다. 12·12와 5·18이라는, 대통령이 결단해야 할 두 큰 사건이 그의 짧은 재임기간동안 일어났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요구받은 결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가 달라질 수 있던 사건들이었다. 그는 피살된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10대 대통령에 선출된 지 엿새만인 12월 12일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격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의한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체포(이 사건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 ‘쿠데타적 사건’으로 공식 정리되었다.)를 승인해 줘야 하는 궁지에 몰렸고, 실질적인 통치권이 신 군부의 손에 들어간 상태에서 12월 21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이듬 해 5월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 중이던 광주시민들을 군이 무차별 살상하는 사태에 대해서도 헌법상의 군 통수권자로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성공한 외교관, 실패한 대통령 5·18당시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전혀 할 수 없었다는 정황을 드러내는 기록들도 있다. 신 군부가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이후 5월 말까지 그가 공식행사에 참석하거나 군관계자나 민간인을 면담한 기록이 대통령 의전일지에 나타나지 않으며, 심지어 이 기간동안 각료를 만난 기록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모로 실패한 대통령으로 분류될 만 하다. 그러나 그는 직업 외교관으로서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수재로서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는 1952년부터 주일대표부 총영사, 공사 등을 지내다가 59년 9월 일본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외무부 차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4·19이후 외무부 차관 직을 사임했다가 63년 3월 외무부 본부 대사가 되어 아세아 태평양 각료회의(APEC) 이사회 설립을 추진하여 66년 제1차 대회를 성사시켰다. 그는 말레이시아 대사를 거쳐 67년 외무부 장관에 발탁되는 고속승진의 가도를 달렸다. 그는 75년 말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이듬해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79년까지 장수 총리를 지내다가 박 대통령의 피살로 역사적 격랑에 휘말렸다. 관료로서의 그에 대해서는 양심적이다. 또는 깨끗하다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고인이 된 그의 빈소를 찾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생동안 외교 분야에서 큰 공헌을 한 분이며, 성실한 인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분”이라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격랑을 헤쳐 나가야 했을 대통령으로서 그에 대해서는 가혹한 평가도 나온다. 공직자의 정체성과 사명감 빈소를 찾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당 대표로서 당시 대통령 권한 대행이던 최 전 대통령을 만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이 말은 그가 지난 99년 낸 회고록에서 최 전 대통령에 대해 “헛된 욕심과 좁은 시야에 갇혀 민주화를 지연시켰다”고 평가한 것을 생각나게 만든다. 최 전 대통령이 대통령 재임시절 일어난 여러 사건에 대해 입을 열지 않고, 그 비밀을 무덤 속에까지 가져가 버린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법정에서 법에 의해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그가 집필하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던 회고록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죽음 앞에서 먼저 생각할 일은 그가 가슴 속에 품고 간 비밀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없이, 인생항로에서 만나는 결단의 순간을 회피했을 때 우리 자신과 주변에 어떤 피해를 줄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람이다. 외교관으로서의 그는 뛰어난 영어실력과 신사적인 매너, 그리고 양심적인 태도만 가지고도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다. 그 자리가 요구하는 용기와 결단력, 그리고 헌신을 갖추지 않고는 아무리 욕심나는 자리라도 오르기를 주저할 것을 그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23
- 책면 수정분 ‘관심’의 경영적 가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등장한 가치창조 방법 ‘관심 마케팅’ 못 가진 사람은 가지려 하고, 이미 가진 사람은 더 가지려고 한다. 돈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관심’이다. 명품 핸드백과 구두, 옷을 사기 위해 월수입 대부분을 소비하는 명품족에 대해 사회적인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분수에 맞지 않은 명품을 선호하는 여성을 빗대 ‘된장녀’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하지만 이들의 변명은 간단하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요.” 이들은 단지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재화를 손에 넣음으로써 타인과 차별화하려는 욕구를 해소하는 것이다. 의식주와 생계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금전소득보다 ‘관심소득’으로 신분을 매긴다고 한다. 환율이 곤두박질치고, 유가가 폭등한다고 하는 경제 적신호에도 불구하고 수입차와 명품에 대한 소비는 줄지 않고 있다. ‘관심’ 때문이다. 프라이버시를 위한다는 ‘발신번호표시 서비스’도 오히려 역으로 전화를 거는 사람이 자신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실질적으로는 ‘관심’의 서비스인 셈이다. 미국의 대형 유통점에는 4만종의 품목이 진열돼 있다. 한 가정이 연간 구입하는 품목은 150여종에 불과하다. 제품과 제조사는 ‘제발 나를 봐주세요’라고 아우성 치고 있다. 고객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제품은 팔리지 못한다. 결국 제조사는 관심을 끌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1999년 미국의 식료품 제조업체들이 ‘관심’을 사들이는데 지불한 돈은 벌어들인 돈을 뛰어 넘는다. ‘관심’의 경제에도 수요와 공급이 있고 투자 포트폴리오를 짤 수도 있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관심을 배분할 수 있다. 관심은 공급이 영화관의 좌석이나 신선한 음식처럼 한정돼 있고 금세 소비될 수 있다. 관심은 시장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 부모들에게 쏟는 관심도 중요하다. 관심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을 경우 탈이 생긴다. 그런 경우는 가족 구성원간 ‘관심’의 수요·공급 균형이 깨진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구애의 이메일을 날리더라도 관심을 끌 수 있도록 ‘기술’을 써야한다. 관심을 빼놓고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기 주변에 ‘관심’이 존재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소홀히 한다. 인간관계는 물론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가 바로 관심이다. 기업들은 고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신문과 방송, 인터넷을 옮겨 다니고 있다. 더 높은 수준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관심의 경제’가 문서화되기 위한 첫 연구는 1997년에 지작되어 8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보화의 홍수는 수요자들을 정보비만으로 만들고 있다. 이 책 ‘관심의 경제’가 지방이 될지 비타민이 될지를 판단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실제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스콧 맥닐리 사장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사내에서 파워포인트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컬러프린터로 사내용 문서를 인쇄하지 못하도록 했다. 관심을 얻기 위해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의 주요대기업 인사담당자들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직장을 얻기 위해 구직자들은 끊임 없이 튄다. 그러나 튀는 신입사원들보다 무난한 신입사원을 원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과도한 ‘관심 마케팅’보다는 수요자의 이해와 요구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약보다 식품으로 치료하라 “처방을 내리는 데 있어서 먼저 식품으로 치료하는 것을 우선하고 식품으로 치료가 되지 않으면 약으로 치료한다.” 조선시대 어의를 지낸 명의 전순의가 집필한 책 ‘식료찬요’를 통해 밝힌 내용이다. 조선시대 의술을 이야기 하면 대개 허 준과 동의보감을 떠올리지만 식료찬요의 저자도 명의중 명의로 꼽힌다 전순의는 세종 때부터 세조 때까지 47년간 4명의 임금을 섬긴 어의다. 조선 최고의 의학자이자 식품전문가였던 그는 동양최고의 의학사전이랄 수 있는 ‘의방유취’와 온돌·한지를 이용해 식품저장방법을 수록한 ‘산가요록’ 침구술을 정리한 ‘침구택일편집’ 등을 펴냈다. 현재 한의원 원장인 김종덕씨가 고문서인 ‘식료찬요’를 현대인들도 읽을 수 있도록 정리해 출간했다. 어려운 고어와 전문용어 때문에 책읽기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전통 민간요법이나 식이요법의 기원이나 유래를 쉬이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 종종 눈에 뜨인다. 예를 들면 “검은 참깨를 볶아 먹으면 풍질(중풍질환)이 생기지 않고, 풍을 앓던 사람이 매일 먹으면 보행하는 것이 단정하고 말이 어눌하지 않게 된다”, “살조개는 가슴과 배의 냉기와 요척(허리등뼈)의 냉풍을 다스리며 속을 따뜻하게 하고 양기를 일어나게 한다. 또한 혈색을 좋게 하며 오장에 이롭다” 등이다. 또 설사에는 생강 분말이 좋고 변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율무가 좋으며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분말로 만들어 미음이나 물과 함께 복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상극이 되는 음식이나 식품에 대한 설명도 많다. 공복에 개고기는 성생활에 도움을 주지만 마늘과 같이 먹으면 해롭다는 것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23
- <밥일꿈>“경찰관 남편이 자랑스러워요” “경찰관 남편이 자랑스러워요” 주 경 희 대구지방경찰청 홍보담당관실 황성호 경위 부인 남편이 팜플렛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아빠·엄마 직장 체험하기’ 행사 안내장이었다. 아빠·엄마가 다니는 직장을 둘러보며 ‘경찰가족’이라는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김석기 대구지방경찰청장이 직접 마련한 행사라고 했다. 쑥스럽고 어색하긴 했지만 마음은 부풀어 올랐다.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의 직장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경찰관 정복을 입은 사람보다 사복 입은 사람이 훨씬 많아 대구지방경찰청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어리둥절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위화감을 없애려는 배려였다고 한다. 정복을 입으면 계급이 확연히 드러나게 돼 상·하위직 사이의 골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우락부락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경찰이 이렇게 세심하게 가족들을 배려하다니…” 두 번째로 놀랐다. 청사 현관에 설치된 전광판에는 환영문구가 번쩍였다. 대강당 입구에 ‘포돌이 시네마’ 현판이 걸려 있었고 강당을 들어서자마 울려 퍼지는 경찰악대의 연주로 분위기 한껏 고조됐다. 강당 안을 꽉 메운 600여명의 경찰가족들은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 연예인 이용식씨의 사회로 진행된 행사는 대구경찰 업무소개와 함께 김석기 대구청장님의 말씀으로 꾸며졌다. “구청 부부공무원으로 출발해 지금까지 말없이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면서 오직 남편 뒷바라지하며 일편단심 기도하며 살아온 당신… 내 인생의 등불이 된 당신 정말 고마워, 여보 사랑해.” 남편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 영상메시지가 강당을 가로질러 잔잔하게 내 마음을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홍보담당관실 경위 황성호’라는 자막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짤막한 이야기였지만 분명 내 남편은 진지해 보였다. 86년 경찰관이 되겠다며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정든 직장을 떠난 남편. 그동안 말 못할 고통과 우여곡절도 많았다. 삶이 파란만장하다는 것을 실감한 세월이었다. 2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초고속 승진으로 과장 서장이 되는 게 아니라, 돈 많이 벌어줘서가 아니라 오로지 이 순간만큼은 나를 생각해준 남편이 고마웠다. 항상 자신 있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남편이 어느 때보다 자랑스러웠다. 결혼 후 처음 느끼는 짜릿한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즐거웠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포돌이 만화가 이현세씨와 유명 연예인 이영아씨 등이 등장해 팬사인회를 열었고 경찰악대 연주도 이어졌다. 경찰 기마대 소개, 먹거리 장터, 농산물 팔아주기 등 준비된 프로그램도 다양했다. 경찰 가족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행사였다. 남편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동료, 그들의 가족을 알게 된 것도 기뻤다. ‘경찰관 내 남편’이 너무 자랑스러운 하루였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20
- <경제시평>경기침체, ‘친기업 정서’로 풀어야 국내경기가 부진의 늪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벌써 4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이런 정도면 ‘장기 부진’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195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한 이래, 지금처럼 장기간의 경기부진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석유파동이 터졌을 때에도, 1980년 군사쿠데타와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이 일어났을 때에도, 1997년 단군 이래 최대의 난리라던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에도, 경기침체 기간은 길어봐야 2∼3년에 불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 기간이 길어졌을까? 가장 큰 이유는 ‘반 기업 정서’가 다른 때보다 강해진 때문인 것 같다. 국부 혹은 국내총생산 또는 국민소득은 누가 창출할까? 노동자일까? 아니다, 기업이다. 노동자는 그 중의 한 주체일뿐 전부는 아니다. 경제성장은 누가 이끌까? 기업이다. 고용은 누가 창출할까? 기업이다. 경기침체로 서민만 고통 그렇다면 ‘반 기업정서’가 강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업 활동은 약화되고 경기는 부진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 경기가 부진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용이 줄어들고 사업은 어려워진다. 이런 때에는 해고를 당해도 못사는 사람이 가장 먼저 당하고, 사업이 망해도 영세업체부터 망한다. 반면에, 잘사는 사람은 웬만하면 일자리를 지킬 수 있고, 튼튼하고 큰 기업은 웬만하면 망하지 않는다. 경기가 부진해지면 못사는 사람들만 죽어나는 것이다. 국민들의 경제생활은 언제 가장 윤택할까? 당연히 호경기가 지속될 때이다. 즉, 경기호조가 오래 지속되어야, 실업률은 낮아지고 임금상승률이 높아진다. 그럼 언제 호경기가 지속될까? 기업이 생산과 투자를 활발하게 할 때이다. 기업이 생산과 투자가 활발하게 하면 고용이 늘어나고, 고용이 늘어나면 소득이 늘어나고, 소득이 늘어나면 소비도 늘어나며, 경기는 상승국면을 연출한다. 그럼 기업은 언제 생산과 투자를 늘릴까? 당연히 이익이 늘어날 때이다.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기업이 아니던가. 그런데 참여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정부조차 ‘반 기업정서’의 노예가 된 느낌이다. 토지의 분양원가 공개는 좋지만 건물의 건축원가까지 전부 공개하는 것은 문제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는 그 대표적인 증거이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비록 완곡하지만 이걸 정부가 앞장서서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럼 분양원가를 공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분양가를 내리라는 여론이 거세질 것이다. 분양가를 내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미 지어진 아파트의 가격까지 떨어뜨릴 수 있을까? 아니다. 아파트 분양가를 낮추면, 분양받은 사람만 폭리를 누린다. 그럼 국민들은 생업을 멀리 하고라도 분양당첨에 목을 맬 것이다. 장기부진은 반기업 정서탓 좋은 아파트 한 채만 분양받으면, 매일 고생하여 평생 벌어들일 소득보다 훨씬 더 많이 벌 수 있는데, 누가 이런 유혹을 떨칠 수 있겠는가? 아파트 분양은 ‘바다이야기’나 로또복권 같은 도박판으로 변할 것이다. ‘반 기업 정서’는 모든 경제문제에 있어서 이처럼 위험하다. 경제문제는 ‘친 기업 정서’에 입각하여 접근해야 순조롭게 풀어낼 수 있다. 제발 ‘기업에게만 떼돈을 벌게 할 수 없다’는 소아병적인 발상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기업이 더 많은 이익을 남겨야, 생산과 투자가 더 늘어나고, 그래야 고용이 더 늘어나면서 서민들의 소득도 더 늘어난다는 사실을 재인식했으면 좋겠다. 정부는 물론이고 국민 모두가 말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