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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조선조 당쟁과 요즘의 정치판 요즘 정치판을 보면 마치 조선 때 당쟁사를 보는 듯하다. 정치적 논쟁이라는 것이 사사건건, 민생은 팽개쳐버리고 사소한 것에 매달려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어느 시기 어떤 사건이랄 것도 없이 모두 천편일률적이다. 예전 당쟁도 살펴보면 정말 사소한 일이다. 상복을 2년 입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3년을 입어야 하는가?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적임자인가? 청나라와 선린외교를 펼칠 것인가, 아니면 외교에 있어 명나라와 의리를 지킬 것인가? 지금 평가하면 공리공론이라고 비하할 수밖에 없는 내용인데, 이렇게 당쟁만 일삼다 보니 백성들은 임진, 병자의 병란을 겪었고 나중에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까지 당했다. 그런데도 서로 피를 토하고 싸웠던 이유는 뭘까. 단지 정권 쟁취만이 그들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로 민생들의 삶은 고단하고 힘들다. 가진 자는 배 두드리고 살지만 없는 자는 굶기가 일쑤다. 물가는 오르고 일자리는 없으니 부랑아는 거리를 휩쓸면서 사회불안을 야기한다. 이런 사회문제를 당장 치유해야 할 텐데 처방을 내리고 치료하는 정치인은 하나도 없다. 이때 수신제가를 강조하는 성리학자들이 도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정치권에 등장한다. 현 사회문제를 고치려면 정치를 바르게 해야 하고, 정치를 바르게 하려면 수신제가를 철저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문제라고 비분강개한다. 백성들은 처음엔 환호한다. 우선 가슴에 맺힌 무언가를 뚫는 듯한 시원함을 느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 이들도 마찬가지가 된다. 본질 문제는 제쳐 두고 조그만 절차, 도덕 문제에만 매달려 정쟁으로 모든 시간과 정력을 허비한다. 세종과 성종, 영조의 정치 그러나 여기에서 조금 벗어난 임금이 있다. 아마도 세종과 성종, 후기에는 영조 정도였을 것이다. 세종과 성종은 선대가 쿠데타로 집권한 후 정적들을 확실하게 제거해서 반대파가 적었다는 특징이 있을 것이고 영조는 임금 노릇을 오래도록 했으며(52년 재위) 탕평책을 썼다는 다른 점이 있다. 또 이들은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는 임금이었다. 특히 성군이라고 일컬어지는 세종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아마도 똑똑한데다 겸손하기까지 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들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어떻게 하면 소모적 당쟁에서 벗어나 나랏님 노릇을 잘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우선 세종은 사람을 적재적소에 쓰고 오래도록 기용했다. 요즘은 YS 이래 언론에서 떠들기만 하면 장관을 바꾼다. 참여정부에서도 처음에는 퇴임까지 한배를 탈 것처럼 하더니, 청와대 조직은 물론이고 내각까지 겨우 1년을 넘기면 하마시킨다. 그러니 업무 파악도 못하고 조직 장악력도 떨어진다. 다음은 뚝심을 가지고 한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성종은 훈구파를 몰아내기 위해 과거에 합격한 신진들을 대거 기용했으며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갔다. 여론을 앞세우는 언론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냄비처럼 금방 끊고 식는다. 심하게 반발만 하면 밀리고 타협하니 개나 도나 반대를 한다. 심지어 반대를 위한 반대도 많다. 대중 정치는 연예인 바라보듯 선동적이다. 철학강의 듣듯 장기적 안목으로 보지 않는다. 정쟁에 휩쓸릴 필요가 없다. 오불관언하라. 잘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여론을 업고 돌파하려고 하다가, 마지막에는 물러서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민생 문제를 걱정하는 청문회를 마지막으로 싱크탱크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세종은 집현전을 만들어서 젊은 학자들에게 현실적인 학문을 독려하고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던 많은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각종 위원회를 두는 것도 이런 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조차 아웃소싱해서 시장에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 참여정부 초기에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더니, 지금은 각 부처마다 너무나 많은 조직을 만들고 공무원 숫자를 늘리고 말았다. 정부의 외곽 조직을 줄이고 아웃소싱해서 수요를 충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너무 많은 것을 단독으로 결정하지 말라는 주문이다. 그렇지만 꾸준히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두뇌집단의 논의는 장려했다가 이 가운데 사람을 뽑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젠 제발 국회도 민생 문제를 걱정하는 청문회를 열었으면 좋겠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19
- [기고]더불어 잘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우리의 과제 건설교통부장관 추병직 참여정부는 출범이후 줄곧 모든 국민이 잘살 수 있는 균형잡힌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우리나라 사회와 경제가 선진국형으로 연착륙하고 지속적인 발전의 기틀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계층간·지역간 양극화를 완화하여 사회통합을 이루어 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참여정부는 주거복지와 국가균형발전 시책을 역점적으로 추진해 왔으며, 내년은 이러한 시책들의 성과가 가시화될 전망이다. 8.31 부동산 정책 1년, 투기 근절과 서민주거 안정에 기여 부동산거래, 세제, 금융, 공급 등을 총망라한 8.31 정책과 이를 이은 3.30대책의 본격적인 시행을 앞두고 집값이 하향안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확산되면서 부동산 시장은 전국적으로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정부는 지난 1년간 8.31 정책관련 법률 16개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였고, 송파 신도시 등도 차질없이 추진해 가고 있다. 금년초 막연한 규제완화 기대로 국지적인 불안양상을 보이던 집값도 정책이 하나 둘 시행되고 3.30대책이 마련되면서 다시 하향 안정세로 돌아서고 상승 기대심리도 완연하게 꺾였다. 최근 발표된 실거래가격의 흐름 역시 이를 확실히 증명하고 있다. 특히, 이달 25일부터 재건축 부담금 제도가 시행되고, 12월에 종합부동산세 부과, 내년 1월 2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조치 등까지 이루어지면 안정세는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앞으로 정부는 어떠한 요인이 있더라도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여 잦은 정책변경으로 시장 불안을 초래했던 과거와 같은 전철은 밟지 않을 것이다. 집값안정의 토대 위에서 주거복지에 대한 정책역량을 강화 정부는 8.31 정책 1주년을 맞아 얼마전 서민과 중산층의 주거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한 정책방향을 발표하였다. 이는 집값을 확실하게 안정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의 주거복지를 양적·질적으로 선진국 수준으로 높이기 위한 구체적 실천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장기 공공임대주택 재고는 전체 주택수의 2.7%에 불과하여 무주택가구들이 민간 전월세로 살 수 밖에 없고 임대료 상승 등 적지 않은 주거불안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진정한 국민의 주거안정을 위해 2012년까지 계층별 소득수준과 수요에 맞춘 여러 유형의 장기 임대주택을 총 주택수의 12% 수준까지 확대해 간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참여정부 기간내에 국민임대주택 50만호 공급을 차질없이 추진해 가면서, 주택의 유형도 종전의 저소득층을 위한 ‘소형 임대주택 건설’ 위주에서 탈피하여 저소득층에게는 국민임대와 도심내 매입·전세임대주택을 공급하고, 이 보다 좀 더 여유가 있는 계층에게는 ‘10년 임대주택’을 제공할 계획이다. 그리고 그간 정책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던 중산층에게도 중대형 규모의 전월세형 임대, 매입임대 주택의 공급을 늘려 나갈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계층이 좋은 조건에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임대주택 공급체계가 마련되어 임대주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불식되고 주거문화도 ‘소유’에서 ‘거주’중심으로 변화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아울러, 실수요자가 쉽게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양질의 주택을 늘려가면서 세제·금융 등 다각도의 지원을 강화해 나갈 것이다. 정부는 분양가상한제를 통해 저렴한 주택을 많이 공급하고 있으며, 그 혜택이 실수요자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청약제도 개편을 추진 중이다. 아울러,무주택자에 대한 장기저리의 주택자금 지원도 계속 확충할 것이다. 주거복지와 함께 국토균형발전 시책도 차질없이 추진 참여정부는, 모든 지역이 균등한 기회를 갖고 고르게 발전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선진한국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인식하에 행정중심복합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 등의 지역발전 정책과 함께 수도권의 계획적 발전 방안을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을 통해 착실하게 추진 중에 있다. 먼저, 국가균형발전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세기의 미래지향적 모범도시」로 건설하고 있다. 현재 전체면적의 79%를 보상하고 기본계획을 확정하였으며, 금년 하반기에는 개발계획도 수립할 예정이다. 혁신도시도 활력있고 살고싶은 지역발전의 새 거점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현재 기본구상을 수립하였고, 연말까지 지구 지정과 개발계획 수립에 착수하여 내년 하반기에 착공할 예정이며, 혁신도시 건설을 지원하기 위한 「혁신도시건설지원특별법」도 금년에 제정할 계획이다. 아울러, 기업의 창의와 활력을 통해 지방의 자립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기업도시도 잘 진행되고 있다. 현재 시범사업 6곳에 대한 개발계획을 수립중이며, 기업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다각적인 지원방안을 강구중이다. 이러한 균형발전시책과 병행하여, 수도권은 계획적 관리를 통해 경쟁력있고 쾌적한 생활터전으로 만들어 갈 계획이다. 주거복지와 국토균형발전 정책을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 오랜 세월 반복되어 온 부동산 시장 불안과 수도권 집중에 따른 불균형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할 국가적 과제이자, 국민 모두가 자기지역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이해와 적극적인 협조, 지지, 성원을 보여주지 않고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사안들이다. 이제 8.31 정책에 의해 시장 정상화의 기초가 마련되었고, 행정·혁신·기업도시 등 국가균형발전의 실질적 토대가 구축된 만큼, 소모적인 논쟁은 지양하고 무엇이 국민의 요구인지, 국가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방향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힘을 합해야 할 시점이다. 특히 이러한 정책들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참여와 성원을 보내면서 적극 동참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9-20
- <안병찬 칼럼>핵에 관한 에피소드(2006.10.13) 핵에 관한 에피소드 안병찬 언론인·한국VJ협회 회장 연 전에 일본 히로시마에 갔었다. 60년 세월이 흘렀으나 심리적으로는 이 비탄의 섬에서 자란 우거진 수림이 아직도 방사능을 뿜어대는 듯 느껴졌다. 지금은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협죽도(夾竹桃)가 피어있다. 붉은 꽃이 향기를 내는 협죽도는 히로시마의 시화(市花)이다. 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작가 이회성이 협죽도의 상념을 술회했다. 어느 날 평화공원을 걸어가던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협죽도를 봤다. 꽃이 너무 아름답다고 여겼다. 그런데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자를 돕는 한 여성의 증언은 딴판이었다. 협죽도의 붉은 꽃이 피 흘리는 모습을 생각나게 해서 꼴도 보기 싫다는 말이다. 작가 이회성은 아름다운 꽃이 실은 핵폭탄의 공포를 떠올리게 만드는 꽃임을 알았다. “여인의 상상력과 나 자신의 상상력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원폭의 피 흐르는 히로시마 협죽도 그 깨달음으로 작가는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의 가슴은 지구상에서 유일한 원폭 희생자와 나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자고 생각하면서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미국이 자행한 역사상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한 핵폭탄 공격. 죄 없는 민간인이 밀집한 두 도시 한 복판에 불시에 원폭을 투하하여 대량 살상한 미국은 그 불명예와 원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미국 내 여론조차 일본을 원폭 공격한 도덕성을 놓고 찬반으로 첨예하게 맞서는 것을 보라. 물론 미국은 핵무기를 사용한 명분이 있다고 말한다. 나가사키에 원폭을 던진 B-29 조종사 찰스 스위니 소령은 종전 후 ‘원폭 투하 임무’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옹호, 설파하고 다녔다. 그 후 가장 젊은 장군으로 진급했고, 2년 전에 84세로 죽었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에놀라 게이호 대원들은 다시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망설이지 않고 원폭 투하 명령에 따르겠다고 다짐했다는 후문이다. 미국의 핵개발과 핵공격은 저명한 과학자들이 펼친 ‘죽음의 안무’였다는 비판도 있다. 맨해튼 계획(미국 핵개발계획)을 주도한 로버트 오펜하이머, 엔리코 페르미 등 4명의 과학자는 “핵폭탄이 죽음의 무기지만, 역으로 전쟁을 끝내고 인류의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구실로 일본에 핵폭탄을 쓰기로 결의했다. 물론 원폭 공격의 최종 책임자는 대통령 트루먼이다. 그러나 레오 질라드 같은 과학자는 핵폭탄 투여는 ‘씻을 수 없는 죄’가 된다고 반대하다가 전공을 생물학으로 바꾸어 버렸다. 원폭개발을 주도했던 오펜하이머는 결국 핵폭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트루먼을 만나 “내 손에 피가 묻어있다”고 말하더니, 평화주의자로 돌아섰다. 미국이 핵실험 왕국의 입지를 향유하는 사이 중국은 매우 감정적인 동기 하에 핵개발을 추진했다. 중소이념분쟁 시기에 중국은 유명한 핵무기 논쟁을 통해 자국의 핵개발 의지를 만천하에 선포했다. 모스크바에서 미국 소련 영국 3개국 대표가 핵실험부분금지조약을 체결하자 중국은 동 조약이 기존 핵보유국의 핵무기 독점상태, 미제국주의의 핵무기 우월상태를 공고히 하는 사기극이라고 부르짖었다. 특히 소련을 향해 침략의 희생자에게는 자위의 권리조차 인정하지 않으려한다고 배신행위를 격렬히 규탄했다. “기필코 핵무기 만든다. 두고 보라!” “우리는 설사 백년이 걸려서 단 한 개의 핵무기도 만들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소련의 지휘봉을 따르지도 않고 미제국주의의 핵 공갈정책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기필코 핵무기를 만들고야 만다. 두고 보라.” 이 맹서가 있고서 일 년이 경과한 1964년 10월 중국은 소련의 예언을 뒤엎고 핵실험에 성공한다. 핵실험 때마다 중국은 ‘어떤 때, 어떤 정황 하에서도 결코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방어 목적의 결의를 다짐해왔다. 그런 중국이 이제 와서는 북한의 핵실험이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에 대한 도전(런민르바오 인터넷판)이라고 주장한다. 천하무적의 미국과 거국주의 중국은 이처럼 핵의 이중성을 유감없이 들어낸다. 일면 북한의 핵실험은 오기를 바탕으로 한다. “미국의 반 공화국 압살 책동이 극한점을 넘어서 최악의 상황을 몰아오고 있는 제반 정서 하에서, 우리로 하여금 상응한 방어적 대응조치로서 핵 억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핵시험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천명한 북한 외무성 성명은 어쩐지 42년 전의 중국 커뮤니케 말투와 흡사하다. 미국 부시정권의 강경 일변도 대북 정책이 화를 자초했다는 비판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요즘, 마침 한국에 온 미국 예일대 교수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핵실험은 북한의 관점에서 보자면 너무나 논리적인 선택’이었다고 평가한 것도 미국의 오만한 대북 핵 정책을 염두에 둔 말이다. 핵 때문에 꿈자리가 사납다. 우리는 허위와 모순으로 얽힌 ‘핵의 악몽’을 꾸고 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12
- <임재경 칼럼>백범, 몽양, 장준하가 내려다본다면 백범, 몽양, 장준하가 내려다본다면 임재경 (언론인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패권 국가들의 이기주의 산물인 민족의 분단은 60년간의 그 숱한 유혈과 눈물의 세월이 모자라 오늘 다시 우리를 위기의 국면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 분단으로 인한 위기가 한 두 차례가 아니었지만 경제발전 수준이 전 세계를 통틀어 상위권에 올라섰고 아시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한국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는 의지를 다듬고 있는 마당에 험로에 들어선 것이다. 지금 여기서 뼈저리게 느끼는 안타까움의 하나는 IT 강국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분단의 한쪽 대한민국이 정보의 빈곤과 판단의 혼란으로 인하여 허둥대야하는 모습이다. 이글을 쓰는 날(10월 11일) 아침 전국적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방송이 일본의 NHK 보도를 인용하는 방식으로 “북한이 2차 핵실험 실시했다”는 뉴스를 내보냈는데 곧 이 뉴스는 ‘확인불가’, 즉 ‘사실 아님’이 밝혀졌다. 미일 정보에 의존하는 비극 북한의 핵문제만 나오면 거의 전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정보와 판단에 의존해야하는 현실이 6·25전쟁 이후 반세기에 걸친 이른바 한미일 외교-군사 협동체제의 유산이라 하더라도 일본 국영방송(NHK)과 미국 신문의 보도와 해설을 여과 없이 되뇌는 우리의 보도 자세는 위험천만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이번 북한의 핵실험 하나만을 놓고 본다면 지난 9일 핵실험을 실시하기 20분전 중국에 이를 통보하면서도 한국에는 사전 사후에 한마디 하지 않은 북의 ‘민족 공조’ 방식에 책임을 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민족공조란 말이 나온 김에 북의 당국자, 특히 군부와 외교 책임자들이 꼭 귀담아 들어야 할 일이 있다. 남한은 정부당국자 맘대로 여론을 좌지우지 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점이다. 민족공조란 말이 아무리 가슴 설레는 구호라 할지라도 내용 없는 프로파간다로 그치는 순간 남한 주민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은 물론 급기야는 고귀한 그 말의 가치마저 냉소 대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따른다. 북의 당국자들이 남한에 대한 인식이 오랜 농성체제 결과로 초보적인 면에서 조차 크게 빗나가고 있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나 이번 핵실험을 전후한 그쪽 나름의 외교 전략은 중대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에너지와 식량 후원자인 중국을 북한이 특별히 유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겠으나 6·15선언을 일궈낸 한국 안의 분단 극복 에너지를 가볍게 여긴 판단착오는 반드시 교정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이른바 대북 강경제재에 지금 이 시각까지 반대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한국이고 솔직하게 그 다음이 중국이다. 6·15 선언에서 내외에 천명한 민족공조 정신의 구체적 결실을 들자면 바로 이런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북한의 핵실험을 판단하는 시각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것이기 때문에 그 배경과 사후 대책에 대한 논의 역시 미국과 일본 쪽의 것으로 기울어져 있다. 경제적 봉쇄를 강화하고 그것이 소기의 효과를 나타내지 않을 경우에는 군사적 선택(분명한 언표는 피하는 양상이지만 선제공격)을 불사한다는 것이다. 동해의 건너편, 아니 태평양의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사후 책을 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7천만의 동포가 오밀조밀 엉켜 사는 이 한반도에서는 어떤 구실과 명분으로라도 전쟁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 북핵 대책은 민족의 사멸을 뜻한다. 전쟁이 아닌 방법, 협상과 외교로 인간의 재앙인 핵무기를 만들지 않는 길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협상과 외교로 문제 풀어야 원래 나라사이의 외교는 역사상 전쟁 회피의 적극적 수단으로 발생했고 이용되어 온 것이다. 전쟁으로 국가와 민족간의 온갖 갈등을 해결하려 하였다면 외교는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 작년 9월 베이징 6자회담에서 9·19 합의에 도달하기 며칠 전 미국이 위폐 문제를 돌연히 제기한 것부터 수상쩍다면 수상쩍은 일이다. 중세의 로마 교황청이 기성의 천동설(天動說)을 지키기 위하여 지동설(地動說)을 제기한 천문학자들을 이단자로 지목하여 분형에 처했던 일이 불현듯 떠오른다. 2002년 초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더불어 ‘악의 축’이라 지칭한 이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이런 구실 저런 구실을 꺼내 북한을 고립 봉쇄하는 전략을 전개했다. 그러므로 북미관계의 종착점은 핵을 매개로한 협상 테이블로 향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전망도 없지 않다. 하지만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수순으로서의 핵실험은 국제정치 게임의 수단으로서는 너무나 위험한 도구다. 평생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친 백범, 몽양 그리고 장준하가 하늘에서 조국 한반도를 내려다보았다면 무어라 말했을까.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12
- <임재경 칼럼>백범, 몽양, 장준하가 내려다본다면(2006.10.12) 백범, 몽양, 장준하가 내려다본다면 패권 국가들의 이기주의 산물인 민족의 분단은 60년간의 그 숱한 유혈과 눈물의 세월이 모자라 오늘 다시 우리를 위기의 국면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 분단으로 인한 위기가 한 두 차례가 아니었지만 경제발전 수준이 전 세계를 통틀어 상위권에 올라섰고 아세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한국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는 의지를 다듬고 있는 마당에 얼마간 예상되기도 했던 험로 들어선 것이다. 지금 여기서 뼈저리게 느끼는 안타까움의 하나는 IT 강국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분단의 한쪽 대한민국이 정보의 빈곤과 판단의 혼란으로 인하여 허둥대야하는 모습이다. 이글을 쓰는 날(10월 11일) 아침 전국적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방송이 일본의 NHK 보도를 인용하는 방식으로 “북한이 2차 핵실험 실시했다”는 뉴스를 내보냈는데 곧 이 뉴스는 ‘확인불가’, 즉 ‘사실 아님’이 밝혀졌다. 북한의 핵문제만 나오면 거의 전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정보와 판단에 의존해야하는 현실이 6·25전쟁 이후 반세기에 걸친 이른바 한미일 외교-군사 협동체제의 유산이라 하더라도 일본 국영방송(NHK)과 미국 신문의 보도와 해설을 여과 없이 되뇌는 우리의 보도 자세는 위험천만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이번 북한의 핵실험 하나만을 놓고 본다면 지난 9일 핵실험을 실시하기 20분전 중국에 이를 통보하면서도 한국에는 사전 사후에 한마디 하지 않은 북의 ‘민족 공조’ 방식에 책임을 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민족공조란 말이 나온 김에 북의 당국자, 특히 군부와 외교 책임자들이 꼭 귀담아 들어야 할 일이 있다. 남한은 정부당국자들이 맘대로 여론을 좌지우지 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점이다. 민족공조란 말이 아무리 가슴 설레는 구호라 할지라도 내용 없는 프로파간다로 그치는 순간 남한 주민은 그 말에 귀를 기우리지 않음은 물론 급기야는 고귀한 그 말의 가치마저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따른다. 북의 당국자들이 남한에 대한 인식이 오랜 농성체제 결과로 초보적인 면에서 조차 크게 빗나가고 있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나 이번 핵실험을 전후한 그쪽 나름의 외교 전략은 중대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에너지와 식량의 후원자인 중국을 북한이 특별히 유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하겠으나 6·15선언을 일궈낸 한국 안의 분단 극복 에너지를 가볍게 여긴 판단착오는 반드시 교정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남한 정부는 분분한 이론을 물리치면서 매년 식량 200만톤과 비료 70만톤을 제공하지 않았던가. 그뿐만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의 이른바 대북 강경제제에 지금 이 시각까지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한국이고 솔직하게 그 다음이 중국이다. 6·15 선언에서 내외에 천명한 민족공조 정신의 구체적 결실을 들자면 바로 이런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북한의 핵실험을 판단하는 시각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것이기 때문에 그 배경과 사후 대책에 대한 논의 역시 미국과 일본 쪽의 것으로 기울어져 있다. 경제적 봉쇄를 강화하고 그것이 소기의 효과를 나타내지 않을 경우에는 군사적 선택(분명한 언표는 피하는 양상이지만 선제공격)을 불사한다는 것이다. 동해의 건너편, 아니 태평양의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사후 책을 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7천만의 동포가 오밀조밀 엉켜 사는 이 한반도에서는 어떤 구실과 명분으로라도 전쟁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 북핵 대책은 민족의 사멸을 뜻한다. 전쟁이 아닌 방법, 협상과 외교로 인간의 재앙인 핵무기를 만들지 않는 길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원래 나라사이의 외교는 역사상 전쟁 회피의 적극적 수단으로 발생하였고 이용되어 온 것이다. 전쟁으로 국가와 민족간의 온갖 갈등을 해결하려하였다면 외교는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 작년 9월 베이징의 6자회담에서 9·19 합의에 도달하기 며칠 전 미국이 이른바 위폐 문제를 돌연히 제기한 것부터 수상쩍다면 수상쩍은 일이다. 중세의 로마 교황청이 기성의 천동설(天動說)을 지키기 위하여 지동설(地動說)을 제기한 천문학자들을 이단자로 지목하여 분형에 처했던 일이 불연 듯 떠오른다. 2002년 초 북한을 이란 이락과 더불어 ‘악의 축’이라 지칭한 이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이런 구실 저런 구실을 꺼내 북한을 고립 봉쇄하는 전략을 전개했다. 그러므로 북미관계의 종착점은 핵을 매개로한 협상 테이블로 향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전망도 없지 않다. 하지만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수순으로서의 핵실험은 국제정치 게임의 수단으로서는 너무나 위험한 도구다. 평생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친 백범, 몽양 그리고 장준하가 하늘에서 조국 한반도를 내려다보았다면 무어라 말했을까.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12
- <내일의 눈>핵실험에도 생필품 사재기 없었다 북한 당국자의 ‘서울 불바다’ 발언과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가 이어졌던 94년은 남북 긴장관계가 극도에 달한 때였다.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이 나왔을 때에도 ‘북한 내 권력다툼으로 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며 생필품 사재기 현상이 곧잘 나타나던 때였다. 10여년이 흘러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연일 전해지고 있다. 내용의 무게감으로 치면 이전의 어떤 소식보다 충격적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사재기에 나서기는커녕 담담하고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10일 서울 강남 거리를 걸어가는 시민들의 표정에서 불안감이나 당혹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보에 가장 민감하다는 증권가 역시 북핵 소식 하루만인 10일 평상시 장세를 이어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이를 두고 ‘안보 불감증’ 또는 ‘시민의식 성숙’이라는 상반된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이 긴 세월 동안 북한의 행동방식을 겪어오면서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보고 대처하려는 성숙한 태도를 갖게 됐다는 게 더 정확한 분석이 아닌가 한다. 국민들이 차분하고 평온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북핵에 대해 우려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는 점은 ‘북핵이 우려스럽지만 북-미간 전쟁만은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사회지도층이나 언론이 이러한 국민정서를 ‘이례적’이며 ‘안보불감증’으로까지 진단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국민들은 절제된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획특집팀 김은광 기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11
- <밥일꿈>“아부지, 사랑합니다” “아부지, 사랑합니다” 박 현 옥 (인천광역시 부평구 갈산동) 며칠 전 법 없이도 사신다는 소리를 들었던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고도 우리는 밥을 먹고 때로는 웃고, 자기도 합니다. 마음은 찢어질듯이 아프고 한없이 울었지만 가신분만을 생각하기엔 우리는 너무 바쁜 세월을 살고 있나 봅니다. 문득 문득 닮으신 분들을 보거나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식을 먹으면서, 또는 좋아하시던 노래를 들으면서 아버지를 회상하겠지요. “아빠”라고 부를 수 있었던 애들이 행복해 보였고, 아빠한테 용돈 달라고 떼쓰던 친구들이 부러웠던 어린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렸을 때도 불러보지 못했던 ‘아빠’라는 호칭보다 ‘아부지’가 왜 이리 푸근하고 불러보고 싶은지요. 그래서 살아계실 때 잘하라고 하나 봅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월남 하셔서 현실보다는 꿈속을 사시는 듯 맘이 여리고 결단성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어릴 때 공부했다는 것과 필적 좋은 것만 내세우며, 5남매와 어린 아내를 위해 결코 먼저 세상에 뛰어들지 못하고 아내가 나서는 일에 겨우 동참하시는 우유부단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항상 핀잔을 들으셨고, 우리들에게는 매일 싸우는 부모님으로 보였습니다. 포장마차까지 하시면서 많이 힘드시고 고단하셨겠지요. 시절을 잘못 만난 것을 한탄도 하셨겠지요. 이제 저도 나이가 들어 당신 능력 안에서 성실하게 사신 것 인정해 드리고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5남매 삐뚤어질 수 있는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잘 커온 것도, 강한 엄마 뒤에 푸근한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하느라 힘든 딸을 위로하기 위해 제가 좋아하는 순대를 사들고 독서실에 오시곤 했던 아버지. 그때마다 졸고 있던 큰 딸이 많이 죄송했습니다. 교대 나와서 동생들 공부시켜 고생 덜어 드리려고 했는데 동생들 진로 맘껏 펴지 못하게 한 것 지금도 죄송합니다. 그래도 좋은 남편 만나서 열심히 사는 모습 보여드리는 것으로 효도에 대신하려는 저의 마음 알아주신 것 뒤늦게 고마워합니다. 아버지는 12년 전 중풍을 맞으셨습니다. 많은 세월 눈물 흘리며 나약한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힘들어 하셨고 고생도 많이 하셨습니다. 대소변 받아내고, 목욕시키고, 악취까지 참아내야 했지요. 이렇게 약한 우리 아버지가 마지막에는 스스로 배곯는 길을 택해 엄마의 수고를 덜어 주셨습니다. 그 긴 세월 환자로서 맘껏 위로 받지 못하고 투정하지 못한 그 시간들이 불쌍합니다. 아버지 가시는 날 손님도 많았고 화환이 가득한 속에서 고통도 아픔도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당신의 덕으로 우리의 가정이 지켜졌고 우리들이 잘 살고 있음을요. 아버지, 우리 형제들 더 화목하게 엄마 위해 드리면서 행복하게 살게요. 아부지 사랑합니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10
- [밥일꿈] “아부지, 사랑합니다” - 박현옥 (인천광역시 부평구 갈산동) 며칠 전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법 없이도 사신다는 소리를 들었던 우리 아버지가. 그러고도 우리는 밥을 먹고 때로는 웃고, 자기도 합니다. 마음은 찢어질듯이 아프고 한없이 울었지만 가신분만을 생각하기엔 우리는 너무 바쁜 세월을 살고 있나 봅니다. 문득 문득 닮으신 분들을 보거나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식을 먹으면서, 또는 좋아하시던 노래를 들으면서 아버지를 회상하겠지요. “아부지…” “아빠”라고 부를 수 있었던 애들이 행복해 보였고, 아빠한테 용돈 달라고 떼쓰던 친구들이 부러웠던 어린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렸을 때도 불러보지 못했던 ‘아빠’라는 호칭보다 ‘아부지’가 왜 이리 푸근하고 불러보고 싶은지요. 그래서 살아계실 때 잘하라고 하나 봅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월남 하셔서 현실보다는 꿈속을 사시는 듯 약하고, 맘이 여리고 결단성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어릴 때 공부했다는 것과 필적 좋은 것만 내세우며, 5남매와 어린 아내를 위해 결코 먼저 세상에 뛰어들지 못하고 아내가 나서는 일에 겨우 동참하시는 우유부단한 지아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항상 핀잔을 들으셨고, 우리들에게는 매일 싸우는 부모님으로 보였습니다. 포장마차까지 하시면서 당신 스스로 많이 힘드시고 고단하셨겠지요. 시절을 잘못 만난 것을 한탄도 하셨겠지요. 이제 저도 나이가 드니까 당신 능력 안에서 성실하게 사신 것 인정해 드리고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5남매 삐뚤어질 수 있는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잘 커온 것도, 강한 엄마 뒤에 심성 좋고 푸근한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하느라 힘든 딸을 위로하기 위해 제가 좋아하는 순대를 사들고 독서실에 오시곤 했던 아버지. 그때마다 졸고 있던 큰 딸이 많이 죄송했습니다. 교대 나와서 동생들 공부시켜 고생 덜어 드리려고 했는데 그것이 또 아버지의 소망이셨는데, 그 꿈 이뤄드리지 못하고 동생들 진로 맘껏 펴지 못하게 한 것 지금도 죄송합니다. 그래도 좋은 남편 만나서 열심히 사는 모습 보여드리는 것으로 효도를 대신하려는 저의 마음을 알아주신 것 뒤늦게 고마워합니다. 아버지는 12년 전 중풍을 맞으셨습니다. 열심히 운동해 거뜬히 일어나는 대신에 많은 세월 눈물 흘리며 나약한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힘들어 하셨고 고생도 많이 하셨습니다. 대소변 받아내고, 목욕시키고, 악취까지 참아내야 했지요. 이렇게 약한 우리 아버지가 마지막에는 스스로 배곯는 길을 택해 엄마의 수고를 덜어 주셨습니다. 그 긴 세월 환자로서 맘껏 위로 받지 못하고 투정하지 못한 그 시간들이 불쌍합니다. 아버지 가시는 날 손님도 많았고 화환이 가득한 속에서 고통도 아픔도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당신의 덕으로 우리의 가정이 지켜졌고 우리들이 잘 살고 있음을요. 아버지, 우리 형제들 더 화목하게 엄마 위해 드리면서 행복하게 살게요. 아부지 사랑합니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10
- <엄마와 자녀가 함께 보는 새책>한글 우수성 보여주는 역사동화 초정리 편지 배유안 지음/창비/8500원 한글날을 앞두고 한글창제의 의의를 잘 설명해주는 역사동화 ‘초정리 편지’가 출간됐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이후 눈병 때문에 충북 청원군 초정 약수터로 요양을 간다. 이 작품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을 두고 초정에 사는 ‘장운’이라는 사내아이가 어려운 형편에서도 석수장이로 성장해가는 이야기 속에 한글 창제의 의의와 우수성을 담아놓았다. 한글이 반포되기 전 장운은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낯선 양반 할아버지를 만난다. 한양에서 왔다는 할아버지는 장운에게 새로 만들어진 글자를 가르쳐주고 다음날까지 외워 오면 쌀을 한 되 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쌀을 준다는 제안에 장운은 누이와 함께 새로운 글자를 익힌다. 이후 누나는 빚 때문에 남의집살이를 하러 떠나고, 한양서 온 할아버지도 돌아가자 장운은 쓸쓸하게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장운은 누이로부터 새 글자로 쓴 편지를 받고 기뻐한다. 세월이 흘러 석수장이가 꿈인 장운은 한양에서 벌어진 절 공사에 석수들과 같이 일을 하러 간다. 장운은 돌 깎는 기술을 틈틈이 종이에 적어놓았다 익힌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아무리 배워도 실감을 못한다. 이 책은 한글 창제의 의의와 우수성을 독자 또래 아이의 성장사와 연결해 잘 보여주고 있다. 글(한자)을 배울 수 없었던 장운이가 누이와 편지를 주고받게 되며 돌 깎는 기술을 종이에 적어두었다 익히고, 주변 인물들에게 자연스럽게 글을 가르치게 된다. 저자는 책에서 조선시대 하층민들의 삶에 파고든 한글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지를 통해 한글의 위대성을 설명하고 있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04
- <박영규 칼럼>함께 나누는 추석(2006.10.04) 함께 나누는 추석 박영규 예로부터 "덜도 말고 더도 말고 가윗날만 같아라." 했다. 들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힘든 농사일도 끝나 거두는 기쁨을 누릴 때가 추석이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곳에서 대를 이어 살던 시절. 추석은 마을에서 친지들끼리 모여 즐기는 명절이었다. 그것이 산업화가 급진전 되고 농촌인구가 대도시로 무리를 지어 나간 뒤 변했다. 70년대 이후 고향을 떠난 도시민이 명절 때 귀향하면서 `민족 대이동''이란 새로운 풍속도가 생겨났다. 그 풍속이 세월의 흐름 속에 다시 변하고 있다. 30여 년 전에는 승용차 귀성 행렬은 없었다. 일반인이 자가용 승용차를 보유할만한 소득 수준에 미치지 못해서다. 고향에 가려면 기차나 버스를 탔다. 기차는 늘 콩나물시루처럼 북적거렸고 버스는 한나절이나 걸렸다. 그것도 며칠 전부터 밤을 새며 표를 구해야 했다. 게다가 선물보따리를 들고 아이들까지 동반하니 힘들고 짜증나는 길이었다. 그러나 설렘이 컸기에 피곤함은 덜했다. 먼지를 날리던 시골길. 미루나무가 소실점을 이루고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던 길. 황금빛 들판을 지나 마을 어귀에 닿으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감과 윤기가 흐르는 밤톨이 매달린 감나무와 밤나무가 시야에 닿고 앞마당 멍석 위엔 검붉은 고추가 햇살을 받던 정경들이 귀성객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민족 대이동이 30여 년 지난 지금. 추석 이동 인구는 3천900만 명이나 된다. 그 중 80%이상이 승용차로 움직인다.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 등이 여기 저기 격자형으로 건설돼 전국은 도로망으로 거미줄처럼 엮였다. 길을 너무 많이 닦아 생태계 훼손을 걱정할 정도다. 그런데도 많은 차량이 움직이니 도로 정체는 여전하다. 이번 추석에 승용차로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서울에서 부산이 9시간, 광주가 7시간 정도라고 한다. 평상시의 2배 정도 걸린다. 그래도 10여 전에 비해 3~4시간 빨라졌으니 나아진 셈이다. 일년 간 가꾼 곡식 등을 거두어 나누고 조상에게 바치는 것이 추석이다. 그런데 시장 개방 이후 값싼 수입 농산물이 이 땅에 밀려들어 일상 음식은 물론 명절 제상까지 외국산이 점령하게 됐다. 수확의 의미가 무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명절을 명절답게 쇠지 못하는 계층도 늘어났다. 가족 해체 현상이 심화되며 소년소녀 가장과 독거노인이 늘었다. 실직 등으로 거리나 쉼터에서 보내는 노숙자도 증가 추세다. 북한에서 이탈한 새터민도 1만 명을 넘는다. 불법체류를 포함한 외국인 근로자도 50만 명에 달한다. 차례를 지내지 않고 연휴를 해외나 국내 여행지에서 보내는 사람도 급증하고 있다. 이번 연휴 해외 여행객만 35만 명으로 추산된다. 추석의 풍속도가 이렇게 바뀌었다. 그럼 30년 후의 추석은 어떨까? 최근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화장 비율이 50%를 넘어 매장을 앞질렀다. 불과 수년 전 까지도 30%정도 이었다. 이미 매장한 조상마저 화장해 납골당에 안치하는 추세다. 최근 수목장 등 새로운 장례 방식도 관심을 끌어 매장 문화가 급속히 퇴색할 전망이다. 공설이든 사설이든 납골 묘는 추모하기 편리한 곳에 세워진다. 따라서 자손의 주거지와 인접한 곳에 위치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고향으로 향하던 귀성 행렬이 줄어들 것이 뻔하다. 자유무역협정(FTA)이 확장되는 추세니 외국 농수축산물 수입이 확대될 것이다. 그만큼 수확의 의미를 내포한 추석의 의미도 반감한다. 장례 문화 변화로 귀성 인구가 줄면 세시 풍속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 친지가 오순도순 모여 정을 나누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저 휴가 여행만 즐기는 풍조가 보편화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미래의 변화는 불확실한 예측일 뿐이다. 중요한 건 추석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려면 소외계층에 대한 나눔을 실천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주변에는 명절을 잊고 지내는 어려운 이들과 고향을 잃은 새터민이 적지 않다. 물심양면으로 이들을 생각하는 명절이 되었으면 한다. 다민족 사회의 현실도 감안해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따듯한 배려도 필요하다. 열린 마음으로 이들과 함께 나누는 추석이라야 한다. 사회적 소외자인 이들이 그야말로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고 여기기를 바란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