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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친필 등 2700여점 일본서 돌아와 조선 후기 서화·금석학의 대가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 편지 20점 등 총 2700여점의 관련 자료가 일본에서 돌아왔다. 경기도 과천시는 2일 일본 추사연구가 후지츠카 치카시가 평생을 통해 수집한 추사 관련 자료 일체를 그의 아들 아키나오씨로부터 기증 받았다며 이를 공개했다. 지난달 16일 여인국 과천시장과 최종수 문화원장은 일본 동경에 소재한 소장자의 자택을 직접 방문, 인수에 관한 협정서를 체결하고 자료 일체를 인수했다. 인수 자료는 524종 2750건으로 도서가 2481책, 서화가 46점, 기타 223점이다. 이중 추사 친필 편지가 20여점에 달하고 나머지는 추사와 관련된 사본집과 청, 조선시대 고서 등이다. 이날 공개된 자료들 중 △40대 초반의 추사가 두 동생 명희와 상희에게 보낸 13건의 편지들을 모은 ‘기양제첩(寄兩弟帖)’△과천에 머물 때 제자인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인 ‘기우선(寄藕船)’ 등의 서화들은 추사체 확립 전후 시기의 추사 글씨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 추사와 청의 학자사이에 가교역할을 했던 이상적, 청대 학계와 교류가 깊었던 동생 김명희, 그리고 박제가, 유득공 등에게 보낸 다수의 청대 학자들의 글과 그림, 청의 학문인 경학에 관한 ‘황청경해’등은 조선후기 청과 조선의 문화교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기증된 자료는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후지츠카 치카시가 추사 연구를 위해 중국의 유리창(북경의 고미술거리)과 인사동 등지에서 오랜 세월 수집한 자료로 추사의 대표작품인 세한도도 후지츠카 치카시가 추사 연구가 손재형씨를 통해 기증한 것이다. 추사 관련 자료 일체를 기증한 아키나오씨는 “그동안 과천시가 추사와 관련한 다양한 활동과 깊이 있는 연구자료를 출간한 사실을 높이 평가한다”며 “이들 자료가 앞으로 추사연구에 많은 도움이 있기를 바란다”고 피력했다. 여인국 과천시장은 “아키나오씨는 보상은 커녕 추사 연구활동에 사용하라며 200만엔을 기부하기도 했다”며 “올해 추사서거 150주년을 맞아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추사 관련 사업을 다양하게 벌여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과천시는 추사가 10여년의 유배생활 후 은거한 주암동에 과지초당과 독우물터를 건립, 추사공원으로 복원하고 내년 완공 예정인 종합문화회관에 ‘후지즈카 지카시 박사 자료실’을 만들어 이들 유물을 전시·보존할 계획이다. 선상원 기자 won@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2-03
- [신문로]진정 원하는 진짜 꿈 진정 원하는 진짜 꿈 함 인 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병술년 새해가 시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달력 한 장을 넘기고 있으니, 해를 더해갈수록 시간의 흐름에 가속이 붙는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다. 2월은 바야흐로 각급학교의 졸업 시즌이다. 졸업식 장면 또한 세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듯,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노래를 부르는 동안 눈물 주르르 흘리던 초등학교 졸업식 장면도, 백발성성한 부모님께 학사 가운 입혀드리고 학사모(帽) 씌워드린 후 큰 절 올리던 대학교 졸업식 장면도, 이젠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나 남아 있는 듯 하다. 이들 졸업식 풍경의 소박한 정겨움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음을 지켜보자니 안타까움이 슬슬 고개를 든다. 한데 더더욱 마음 아픈 것은 입시전쟁의 열기가 해를 거듭할수록 더해가는 동안, 한 계단 한 계단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우리 주인공들의 활력과 패기가 점차 꼬리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를 거쳐 생산되는 제품마냥 정형화되고 획일화된 꿈을 꾸고 있는 우리 자녀들 모습은, 마지막 기착지인 대학입학 면접장과 논술 답안지에서 확연하고도 분명히 감지된다. 상급학교 진학하며 패기 사라져 중문학과를 지망하는 학생들 대부분은 “중국이 뜨는 나라이기 때문”에 전공하려 한다는 것이고 앞으로 희망하는 직업은 하나같이 동시 통역사가 되겠노라고 답한다. 불문학과를 희망한다는 학생들은 또 한결같이 까뮈의 이방인에 감동받았고 카프카의 변신을 감명 깊게 읽었다 하며, 역시 장래 희망은 동시통역사 아니면 국제기구의 전문가를 꿈꾼다 한다. 뿐만이 아니다. 미래의 법관 지망생들은 너나없이 힘이 없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소외된 이웃을 위해 인권 변호사가 되겠노라 하고, 경영학을 전공하겠다는 학생 대부분은 경쟁력 있는 유수기업의 CEO를 꿈꾼다. 의사 지망생 또한 ‘의술은 인술’이란 모범답안을 암송하는 건 여타 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명문대학 진입을 목표로 삼았던 우리 자녀들이 정작 대학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고등교육 전문가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우리 인생의 밑그림은 대학 입학 후 약 8주 동안의 경험에 의해 그려진다고 한다. 곧 20대로 진입하면서,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해보고, 진정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탐험해보는 동안 ‘될성부른 나무’는 뿌리를 내려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를 지나면서, 우리 자녀들은 그동안 확신해왔던 자신의 꿈을 서서히 포기해가기 시작함은 슬픈 역설 아니겠는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강의실에서의 경험담 하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왠지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것 같은 학생들을 향해 대학입시 면접 때를 상기시켜 준 다음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꿈이란 이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희망이지 포기하기 위해 존재하는 악몽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미 꿈을 포기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개꿈’이었을 것입니다. 남들에게 보기 좋은 것, 내세우기 좋은 것, 거창하기만 한 것, 그런 것을 꿈이라 하지 않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내가 진정 원하는 진짜 꿈을 꾸어 보십시오.” 순간 강의실엔 숨소리조차 들릴 듯 한 적막이 흘렀고, 한 두 녀석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부모세대 전철 밟지 않아야 어느 덧 공허한 울림이 되어 버린 ‘우리 자녀들의 꿈’을 ‘진솔한 희망’과 더불어 다시 찾아주는 것이 어떨는지? 정보사회의 뒤를 이어 ‘꿈의 사회’가 오고 있다는데, 우리 자녀들이 저마다의 잠재력과 적성에 따라 형형색색 빛 꿈을 꿀 수 있도록 전폭적 지지를 보내줌은 어떨는지?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왠지 허황된 사치요 사춘기시절 치기(稚氣)라 여기며, 한번 뿐인 인생을 관성에 따라 무미건조하게 지나가고 있는 부모세대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말이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31
- <밥일꿈>방북, 그 가슴 설레는 사건(조미애 2006.02.02) 방북, 그 가슴 설레는 사건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기획국장 조미애 설 연휴가 끝나고 출근하니 2월 초에 있을 남북간 실무협의를 위해 또 방북일정을 맞추느라 사무실이 분주하기만 하다. 북녘교육현대화사업을 위해 4박 5일 일정으로 평양을 다녀온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다. 남북간 민간교류협력사업을 하고 있는 우리 단체에서는 방북이라는 것이 사실 일상화되어 있다. 요즘에야 방북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을 방문한다거나 북녘 동포를 만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 억눌림의 기억 때문인지 방북은 아직도 나에게 설레임과 신기함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남북간 경제협력과 민간교류가 활성화되면서 남쪽의 많은 사람들이 북을 다녀왔다. 특히 작년에는 아리랑 참관을 위해 대규모의 남쪽 참관단들이 평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남쪽 사람들의 방북이 잦아지면서 그에 따르는 부작용도, 과제도 많아졌다. 6·15 공동선언이 채택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방북에 대한 기쁨과 호기심은 잠시, 어떤 사람들은 북의 체제선전에 대한 다소 몰이해적 비난과 북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우월적 관점만을 앞세우거나, 북의 집단주의에 대해 다분히 자유주의적 해석으로 비판을 일삼기도 한다. 우리는 지난 60여 년 동안 반북의식과 반공교육에 억눌려 북의 체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현실 속에 살아왔다. 단 몇 번의 만남으로 우리가 과연 북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북쪽 동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남쪽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로 낯설음의 대상일 것임에 틀림없다. 때때로 자본주의 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일방적 시각이나 사소한 행동들이 남북간의 교류협력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요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남북간의 동질성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진정한 동질성이란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있는 그대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남북간의 교류가 단순한 시혜적 지원이 아닌 교류협력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이 시대의 대세이고, 북이 통일의 한 주체라면 우리는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남북간 교류도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가을, 방북에 대한 감격으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이던, 북녘 동포가 흔들어주는 환영의 손짓에 눈물 훔치던 남쪽 참관단들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제 5년이 지났다. 갈라져 살아왔던 분단의 세월에 비하면 아직 우리는 북에 갈 수 있다는 기쁨을, 북녘 동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감격을 10년은 더 누리고도 모자람이 있을 것이다. 몇 번의 방북기회에서 만난 북녘의 사람들, 또 한 해를 넘기며 서른이 훌쩍 넘도록 시집을 못간 이 노처녀의 일상을 염려하고 있을 북녘의 지인을 생각하니 올 한 해도 마음이 훈훈하기만 하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2-02
- <박석무 칼럼>文化와 藝術을 향유하려면(2006.01.18) 文化와 藝術을 향유하려면 어렸을 적 무성영화나 신파연극을 구경하는 것이 최고 수준의 문화나 예술을 향유하는 일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자전거에 확성기를 달고 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어떤 제목의 무성영화가 상영된다고 광고하는 사람은, 으레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면민 여러분!” 이라며 외쳤다. 돌이켜보면 문화와 예술이 별것 아닌 것이었다. 삼촌들이 중심이 되어 가설무대를 마을의 서당에 만들어 ‘울며 헤어진 부산항’ 등의 신파를 공연하면 괜스레 따라 울면서 함께 즐기던 그 신파 연극이 문화와 예술이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21세기도 6년째에 접어들었다. ‘문화산업’이다 ‘문화의 세기’이다 요란하다. 진정한 예술을 꽃피우자면 표현의 자유가 확보되어야 할 것인데, 더 나아가 문화와 예술은 그 자유가 무제한인 영역이고 그래야만 문화와 예술이 발달하고 또 진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기 때문에, 짐승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는 삶을 영위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절제가 있어야 하고 인내와 조절의 아름다움까지 합해지지 않으면 문화와 예술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요즘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노라면, 문화와 예술의 탈을 쓰기만 하면 일체의 제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떠들며, 구속이나 속박은 물론 일정한 통제조차 거절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제재를 받기는 했지만, 얼마 전 어떤 TV프로에서 홀랑 벗는 알몸의 출연이 바로 그런 잘못된 생각에서 나왔던 것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패션도 문화이고 예술이다. 그런데 여름철에 거리를 걷다보면 참으로 희한한 의상 패션이 등장하여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많이 노출하면 할수록 더 문화적이고 예술적이라는 판단 때문인지, 옷을 입었는지 아니면 천만 걸쳤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의복을 입고 버젓이 대로를 걷는 군상들이 늘어나고 있다. 많이 많이 벗은 그림이, 짙고 짙게 행하는 섹스 장면이 더 예술과 문화에 가깝다고 여기는 것인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온 몸을 천으로 가려서 살갗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예술이나 문화가 아니듯이, 그냥 태어난 그대로의 인간 모습을 통째로 보여주는 것만이 꼭 예술이며 문화이겠는가. 때문에 예술이고 문화이려면 반드시 ‘조화(調和)’라는 하모니가 따라야 한다. 벗어도 적당하게 가려도 적당하게 하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나, 지금부터 2500년 전에 공자(孔子)는 이런 문제에 대한 명답을 분명하게 내놓은 바가 있다. 『논어』에 “즐기되 음탕하게 하지 말아야 하고, 슬퍼하되 지나치게 가슴 쓰리게 해서는 안 된다”(樂而不淫 哀而不傷)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시나 음악 등의 예술은 감상하고 즐거움을 느끼거나 애상의 감정에 빠져야 함이 당연하지만, 너무 즐거워하다 정도(正道)를 잃어버리거나, 슬픔이 지나쳐 화기(和氣)에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관현악이나 성악을 들으며 흔쾌한 마음으로 기쁨을 누리고, 아름답고 멋진 그림을 보며 즐거움에 빠지고, 가무를 즐기면서 쾌락에 빠지는 일이야 당연하지만, 그런 것이 지나치면 즐거움이 아니라 인간의 바른 도에서 벗어나 문화도 예술도 아닌 음탕한 세계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근심과 걱정에 잠기고 슬픔과 우수에 빠져 마음이 아파 애절한 지경에 이르는 것처럼, 비극의 영화나 연극을 보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지나쳐서 화기(和氣)를 잃게 된다면 예술도 문화도 아니라는 것이다. 지나침이 해로운 것은 정치도 마찬가지다. 서로 대립하고 맞서면서 옳다고 주장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비판하는 일이야 당연하지만, 지나치게 대립하고 투쟁하다가 정도에서 벗어나고 화기에 해가 된다면 어떨 것인가. 문화와 예술이 정도와 화기를 위해 조화와 중정(中正)을 찾듯이, 정치도 중정을 찾아야지 극에서 극으로 달리면 어떤 국민도 즐겁게 감상하거나 지지해주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극한투쟁(極限鬪爭)’이라는 방식이다. 상대방에게 겁을 주려고 건강이 유지될 만큼 단식하는 일이야 있을 수 있지만 극한투쟁이라야 된다고 계속 굶다가 죽어버리면 어쩔 것인가. 그 대목이 바로 ‘슬픔이 지나쳐 화기를 잃어버림’의 경우다. 요즘 정말 락(樂)과 애(哀)의 조절이 없이 극한을 치닫는 문화와 예술, 극한투쟁이 유행하고 있는 정치판이나 데모 대열을 보면서 적당한 선, 조절이 된 즐거움과 비애가 절실한 때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 한번쯤 공자의 말씀에 귀 기울여 정도와 화기를 잃지 않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18
- <신문로 칼럼>겸허한 출발을…(함인희 2006.01.01) 겸허한 출발을…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새해 새아침이 밝았다. 이제 우리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숱한 바람(風)도, 다수의 상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무수한 쇼크도, 어느 샌가 “작년 일”이 되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어떠한 충격이 와도 쉽게 망각할 수 있는 내공(?)을 쌓아온 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를 일이다. 한 해의 예외도 없이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수식어를 뗄 수 없었던 저간의 삶을 돌아보면 말이다. 새해가 밝았건만 왠지 지나온 뒷모습에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건 비단 나이 들어가는 탓만은 아닌 듯하다. 시작은 언제나 끝맺음과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세상살이의 순리임이 해를 거듭할수록 절실히 와 닿음 때문일 게다. 대학의 새 학기는 대개 퇴임교수를 위한 송별의식으로부터 시작하곤 한다. 평생을 몸담아 온 교정을 마침내 떠나는 자리, 후배교수들을 위해 퇴임의 변(變)을 읊는 바로 그 순간이면, 지나온 수십 년 세월의 자취가 한 치의 에누리도 없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낼 때가 많다. 30분도 채 되지 않는 퇴임사 속에 지난 30여 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그대로 녹아있음이야말로 후학들에게 주는 가장 생생하고도 절실한 교훈인 셈이다. 지금도 문득 문득 생각나는 어느 퇴임교수의 뒷모습. “모든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저는 이제 떠나갑니다.” 짤막한 퇴임인사를 뒤로 하고 이 분이 떠난 곳은 조선족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곳 연변. 이제껏 당신이 누려온 혜택을 조금이라도 돌려주기 위해 떠나신다 했다. 연변의 조선족 동포들을 위해 당신이 하실 일은 무료로 영어회화를 가르쳐주는 일. 당시 연변은 중국의 개혁 개방 물결을 따라 외국계 기업이 다수 진출하고 있었는데, 우리 조선족 동포들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취업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당신이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며 훌쩍 떠나셨다. 그 때 사람의 뒷모습도 앞모습 못지않게 다양한 얼굴이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덧붙여 앞모습은 현란한 분장도 가능하고 화려한 치장도 가능하나 뒷모습만큼은 허세도 가식도 허용치 않음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영화를 즐겨보는 내겐 남다른 버릇이 하나 있다. 영화의 뒷부분을 먼저 보고난 후 다시 처음부터 영화를 보곤 하는 것이다. 주위에선 “끝 장면을 미리 알고 나면 무슨 재미로 영화를 보느냐”며 핀잔을 주지만, 영화 곳곳에 결말을 암시하는 장면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는 경험해보지 않고선 모를 것이다. 영화적 상상력에 심취해있던 탓일까, 한 때는 우리네 인생도 끝을 미리 알고 나면 오늘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으려나, 이런 저런 망상 속으로 빠져든 적이 있다. 지난해도 우린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덕분에 ‘빨리빨리 병’증세는 더욱 악화되어 갔고, ‘소 잃고도 외양간 고치지 못하는 병’ 또한 재발을 반복하곤 했다. 이젠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상, 화려한 앞모습 못지않게 진솔한 뒷모습에도 눈길을 돌릴 줄 아는 여유, 그리고 현란한 성과 못지않게 험난한 과정의 소중함을 성찰해보는 성숙함이 필요하리란 생각이 든다. 최근 들어 부쩍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지켜볼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그 때마다 삶의 빛깔이 10인 10색이듯 죽음의 여운이 각인각색이었음이 경이로웠다. 한데 그보다 더욱 가슴이 묵직해왔던 이유는, 마지막 순간 앞에 섰을 때 생의 의미가 가장 겸허하게 와 닿는 역설 덕분이었다. 영화야 필름을 반복해서 되돌릴 수 있다지만 삶이야 어찌 되돌림이 가능하겠는가만, 그래도 삶의 끝자락…. 마지막 순간의 여운을 상상 속에서나마 되새김질해 본다면, 오늘 우리의 출발은 겸허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2-30
- “진정한 보험정신은 나눔입니다” ‘나눔’과 ‘사회공헌’ 그리고 이를 통한 ‘지속가능한 경영’이 세계적 화두다. 영원할 것으로(?) 믿었던 세계초일류 기업들도 무한경쟁 속에서 부침(浮沈)을 거듭했다. 기업들이 이익만 추구해서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음을 실증적으로 경험한 것이다. 국내 기업도 마찬가지다. 특히 금융권에서 나눔과 사회공헌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은행권은 다양한 이름의 봉사단을 앞세워 나눔경영 일선에 뛰어들고 있다. ‘국민은행 사회봉사단’은 봉사단체만 19개에 인원이 1000명에 이르며, 하나은행의 ‘하나사랑봉사단’에도 1100여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고 있다. 산업은행도 지난 96년 만들어진 ‘산은가족 자원봉사단’이 나눔경영의 주력부대로 자리 잡았다. 기부금 규모도 점점 늘고 있다. 적게는 수 억 원에서 많게는 100억원이 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부족하다는 게 중론이다. 1조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순이익을 내면서 순이익의 1%도 기부하지 않는데 ‘과연 진정성이 있느냐’는 뼈아픈 지적도 뒤따른다. 이런 점에서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꾸준히 나눔경영을 실천해 온 보험업계, 특히 생명보험사 빅3의 노력은 제대로 평가받을 만하다는 지적이다. ◆삼성생명, 80만 시간에 담긴 사랑 = 생명보험 업계 1위인 삼성생명의 나눔경영은 역사가 깊다. 지난 7월 삼성생명은 사회공헌 활동 내역을 담은 백서(白書)인 ‘세상을 비추는 사람들’을 발간했다. 1995년 국내 최초로 사회봉사단을 창립하고 10년 동안 나눔경영을 실천해 온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강산이 한 번 바뀌는’ 세월이 지난만큼 그동안 쌓인 흔적이 결코 가볍지 않다. 지난 10년간 총 35만 8421명이 봉사활동에 참여했고, 연평균 3만 5800명의 임직원들과 컨설턴트가 봉사활동을 펼친 것으로 나타났다. 시간으로 환산하면 총 80만 시간이 넘는다. 또한 ‘사랑의 헌혈 캠페인’을 통해 총 1만5700명이 헌혈에 참가했다. 공익연계 상품을 통한 기부금, 여성가장 창업지원, 보육원 출신 대학입학생 장학금 지원 등 방식도 각양각색이다. 특히 대표적인 것으로 ‘질병퇴치 기금 100억 지원사업’과 ‘여성가장 창업지원’ 등을 꼽을 수 있다. 질병퇴치 기금은 2002년 6월부터 치명적 질병을 중점 보장하는 CI보험을 공익연계 상품으로 개발해 판매 1건당 7000원씩 적립하는 형태로 출발했다. 지난 3년간 100억원을 모아, 이를 암, 심근경색, 뇌졸중 등 치명적질병 퇴치기금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국립암센터, 서울대병원 암연구소 등에 기부했다. 2002년 7월부터 실시하고 있는 ‘여성가장 창업지원사업’은 삼성생명의 3만여 설계사들이 신계약 1건 체결당 200원의 기금을 조성해 불의의 사고나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여성 가장이 된 분들에게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매월 1명을 선정 1500만원을 무상으로 지원하는 제도로 현재까지 57명에게 8억3000만원을 지원했다. 말 그대로 십시일반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직원들 뿐 만이 아니다. 씨이오의 지원과 애정도 각별하다. 배정충 사장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의 행복을 책임지는 생명보험업의 정신은 곧 나눔경영을 통해 사회와 함께 하는 것이 경영의 중요한 요체라는 것을 설명한다”고 강조했다. ◆교보생명, 지속적인 안전망 구축이 목표 = 교보생명의 ‘다솜이 봉사단’ 활동도 기업들 사이에 꽤 소문이 났다. 교보생명은 2002년 12월 가족사랑, 이웃사랑, 인간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건강한 사회, 함께하는 세상’이라는 슬로건으로 ‘교보다솜이 사회봉사단’을 창단했다. 건강, 노후생활, 교육복지 등 보험사업과 관련된 3개 주제를 핵심분야로 정했다. 신창재 회장이 직접 단장을 맡은 ‘다솜이 봉사단’은 무료 간병 봉사단 운영, 미숙아 지원, 보육원 출신 청소년 장학금 지원, 소년소녀가장 후원 사업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다솜이 봉사단’을 창단한 것은 99년부터 임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봉사팀을 꾸려 실시해오던 사회공헌활동을 전사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다. 봉사단의 연간 사업규모만 해도 100억원에 달하며,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봉사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교보다솜이지원팀’이라는 전담팀도 뒀다. 12월 현재 봉사팀만 212개에 이르며, 참여하는 직원수도 5100명에 이른다. 교보생명의 사회공헌활동은 ‘모든 사람이 삶의 역경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교보생명의 비전에서 출발한다. 삶의 주요한 3대 역경(건강, 돈, 지식)을 겪고 있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공헌활동이 그것이다. 때문에 교보다솜이 간병봉사단, 은퇴노인 숲해설 봉사단, 미숙아지원사업 등 교보다솜이 사회봉사단의 대표적 활동은 일회성의 시혜적인 도움과는 거리가 멀다. 지원대상자들의 역량개발을 도와주고 다양한 일자리를 마련해 줘 스스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지속적인 안전망을 만들어가는 것이 주된 목표다. 이밖에도 교보생명은 대산농촌문화재단, 대산문화재단,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 등 3개의 공익재단 운영과 국민체육진흥, 문화예술 지원사업과 더불어 다양한 역경극복 프로그램을 전개하고 있다. ◆대한생명 “고객에게 받은 사랑 환원”= 대한생명은 2005년을 나눔경영 원년으로 선포하고 전사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한생명은 2005년 5월 ‘사랑모아봉사단’을 발족하고, 사회공헌활동에 대한 비전을 선포했다. 실천전략은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된다. 임직원 및 FP자원봉사활동과 대표공익사업을 병행하는 것이다. 대한생명 ‘사랑모아 봉사단’은 4500여 임직원과 2만 6000여 FP(설계사)등 3만여명으로 구성됐다. 이 인원이 전국 8개의 봉사단과 170개의 봉사팀으로 재구성돼 지역사회 불우시설과 1:1 자매결연을 맺고 월 1~2회씩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 임직원은 연간 근무시간의 1%(약 20시간) 이상을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전직원의 자발적 참여로 매월 급여의 일정부분을 사회공헌기금으로 적립하는 ‘사랑모아 기금’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회사도 매칭그랜트(Matching Grant) 제도에 의해 매월 직원 모금액과 동일한 금액을 사회공헌 기금으로 출연하고 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지난해 4억여원을 모금해 불우시설에 전달했고, 올해는 11월 현재 8억원의 기금을 모금했다. 사회공헌 홈페이지(http://welfare. korealife.com)도 별도로 마련해 월, 분기별 활동계획서 및 활동결과 보고서를 자료로 축적하고 봉사활동 평가 측정표 등 각종 통계 시스템을 활용해 봉사활동을 전산 시스템으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대한생명 신은철 부회장은 “사회공헌은 그동안 고객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우리가 속한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라며 “자원봉사활동은 이웃사랑의 첫걸음이며, 지속적인 사회복지 서비스의 실천은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2-28
- 우리세대가 마지막이 될까 아쉬워 “우리세대가 지나면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습니다. 망치로 두들겨서 만든 것과 기계로 찍어내는 것은 차원이 다르지요.” 45년 망치밥으로 살아온 김예섭(62)씨는 2006년 새해에도 망치질을 하고 있다. 대장간이라는 것이 세월에 묻혀진지 오래지만 김씨의 대장간에서는 아직도 빨갛게 달궈진 쇳덩이들이 새로운 탄생을 위해 두들겨 맞고 있다. ◆곁눈질로 시작한 대장장이 = 서울 은평구 모래내시장 건너편에는 10평 남짓한 모래내대장간이 있다. 지난 6일 아침 이른 시간 영하 11도를 가리키는 매서운 추위도 우습다는 듯 대장간의 열기는 뜨겁기만 했다. 전남 광양군 옥룡면에서 농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김씨는 초등학교 시절 집근처 대장간을 놀이터 삼아 하루를 보내곤 했다. 대장장이들의 손에서 만들어 지는 호미며 낫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 열여덟이 되는 해 몸은 약골이었지만 손재주가 남달랐던 김씨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장간에 들어가 풀무질을 시작했다. 김씨는 돈 한푼 받지 않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열심히 눈치로 배우고 익혔다. 꼬박 3년을 일한 뒤 김씨는 망치를 잡을 수 있었다. 김씨는 “풀무잡이 3년, 망치잡이 3년, 집게잡이 3년은 해야 대장장이가 될 수 있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군생활을 마치고 김씨는 69년 봄 서울로 상경했다. 여전한 아버님의 반대에 다른 일을 찾아보겠노라며 올라왔지만 대장장이의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손재주가 남달랐던 김씨는 대번에 망치잡이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6년의 망치질 끝에 진짜 대장장이라 말할 수 있는 집게잡이가 됐다. 김씨는 “당시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라 만들기 바쁘게 물건이 동이 났다”며 “몸은 힘들었지만 물건 만드는 재미와 돈버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고 말한다. 60~70년대 현재의 동대문운동장 주변에는 수 십 개의 대장간들이 몰려있었다. 현재도 신당동 한양공고 주변에 가면 그때의 흔적이 남아 몇 개의 대장간을 만날 수 있다. ◆방송국 박물관은 새로운 고객 = 집게잡이 6년을 마치고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 뽑혀가 1년을 일했다. 김씨는 “다른 인부들은 월 200달러 남짓을 받고 일했지만 우리 대장장이 들은 월 330달러를 받았다”며 “기술을 인정받은 게 무엇보다 좋았다”고 말했다. 81년 중동에서 돌아와 그동안 번 돈을 모아 신당동에 대장간을 차렸다. 하지만 자리를 잡지 못하고 87년 이곳 모래내에서 새롭게 시작했다. 모래내대장간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4년에 운명을 달리한 박영감이 운영하다 자식들에게 물려준 것을 김씨가 인수했다. 김씨가 만드는 물건은 종류만도 200여가지에 이른다. 그 200여가지도 쓰임새에 따라 크기 모양 등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 합하면 셀 수 없을 정도다. 대장간 하면 늘 생각나는 호미나 낫 등 농기구들은 한 물 간지 오래다. 이제는 공사현장의 인부들이 사용하는 공구를 주로 만든다. 덕분에 공사현장이 쉬는 겨울이 가장 한가한 계절이다. 모래내에서 자리를 잡던 87년 김씨는 새로운 고객을 만들었다. 한 박물관에서 가야시대의 갑옷 샘플을 가져와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해 만든 것을 계기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 후 방송국 박물관 등과 전국 각지에서 별의별 물건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오기 시작했다. 신문과 방송에서 인터뷰도 여러 번 했다. 방송국에서는 사극을 준비할 때면 늘 김씨에게 소품을 주문한다. MBC드라마 ‘허준’과 KBS ‘불멸의 이순신’에 나온 쇠로 만든 소품들은 상당수가 김씨의 손을 거쳐갔다. 김씨는 “‘해신’ 드라마 검투사들이 싸우는 장면에서 최수종씨가 사용했던 칼이 기억에 남는다”며 은근한 자부심을 자랑했다. ◆영원한 대장장이로 남고 싶어 = 김씨에게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는 아들 둘이 있다. 비록 대장장이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남들 못지않게 자식들을 키웠다. 대학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자식들에게 대장장이로 살아갈 것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포기했다. 자신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 게 후회 없는 삶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김씨는 “아들놈들에게 해보자고 이야기 하기도 했지만 할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며 “지금 젊은 사람이 배워놓으면 10년만 지나도 스타가 될텐데”하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김씨는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 7시면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느지막하게 나와 일을 한다. 일이라기보다는 쇠붙이를 가지고 논다. 화덕에서 달궈지는 쇠붙이를 보고 있노라면 60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새로운 열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김씨는 망치질을 시작한 후 한 번도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것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맨몸으로 시작했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살아왔고 최근에는 남에게 베풀 만큼 여유도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대장장이는 앞으로 더욱 전망이 있는 직업”이라고 강조했다. 유행을 타지 않고 재고 걱정도 없는 창조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올해 누군가 젊은이에게 이 일을 전해 주고 싶은 바람이 있다. 그는 “10년만 지나면 이 직업은 스타가 될 수 있는 직업”이라며 “직업의 귀천이 없는 시대에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게 최고 아니냐”고 덧붙였다. /고성수 기자 ssgo@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16
- [신문로]답답한 국회, 한심한 국회 답답한 국회, 한심한 국회 손 혁 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우리나라에 의회민주주의는 있는가. 지난해 말 미국 민간인권기구인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는 우리 민주주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프리덤 하우스는 해마다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보고서를 발간하는데 2년 연속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아시아 최고수준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프리덤 하우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정치적 자유는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 봐도 손색 없는 수준이며, 시민 자유도 그에 버금가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이 같은 평가에 대해 ‘맞아’라고 흔쾌히 동의할 국민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최근 국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어찌 높은 평가를 할 수 있겠는가. 국회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한숨부터 절로 나오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정기국회가 기어이 파행으로 끝났다. 정기국회에서 다루지 못한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열렸던 임시국회마저 허송세월하다가 연말에 겨우 몇 가지 안건만 처리하고 문을 닫았다. 17대 국회에서는 사라질 것으로 믿었던 낡은 정치행태가 여전히 국민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17대 국회 두 번의 정기국회 모두 예산안을 법정기일에 처리하지 못했다. 더구나 지난 정기국회에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제1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예산안이 처리되었다. 17대 국회는 ‘의회운영의 합리성과 책임성 제고’를 위한 노력들이 돋보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렵게 틔운 그 희망의 싹이 지난 정기국회에서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국민 실망시킨 국회의원 폭언 최근의 국회 공전에 대한 1차적 책임은 한나라당에 있다. 한나라당은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처리되자 예산안과 민생법안 처리를 외면한 채 장외투쟁을 벌였다. 투쟁방식의 선택은 한나라당 마음이지만 이건 아니다. 개정사학법이 예산안 처리까지 포기해야 할 정도로 문제가 많은가. 그렇지 않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16대 국회 때부터 처리하지 못했던 밀린 숙제였다. ‘7명의 이사 중 1/3 이상을 개방형 이사로 선임하자’는 원안이 약화되어 ‘7명 중 1/4 이상’으로 되었다. 전교조의 사학재단 장악과 빨갱이 교육 운운은 말도 안 되는 억지다. 한나라당 책임이 크다고 해서 열린우리당의 책임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정기국회가 끝나자마자 다시 연 임시국회에서 예산안과 이라크파병연장동의안 등 정부 안건만 처리하고 다시 국회를 팽개친 열린우리당도 문제이다. 국회의원들의 폭언과 폭력적 행위도 국민을 실망시켰다. 사학법 무효화 및 우리아이 지키기 투쟁본부장인 한나라당 이규택 의원의 발언, 말을 더듬는 오거돈 해양수산부장관을 모욕한 이상배 의원, 국회 여직원들에게 욕을 한 임인배 의원 등을 보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속상하기까지 하다. 이규택 의원은 지난해 12월 16일 서울시청 앞 촛불집회에서 ‘사립학교법이 통과되던 날 북한의 김정일은 너무 기뻐서 밤새도록 기쁨조와 함께 폭탄주를 마셨다’고 주장했다. 정말 어이없는 발언이다. 색깔론을 부추기기 위해 근거도 없는 말들을 마구 쏟아내는데 이런 막나가는 무책임한 행동이 부메랑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가 일을 제대로 했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정기국회가 열리기 직전 각 정당은 이구동성으로 ‘경제, 민생 문제 해결’을 일제히 국민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양극화 문제의 핵심인 비정규법안은 아직까지도 텅 빈 국회에서 뒹굴고 있다. X-파일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특검법 제정도 물 건너갔다. 국가보안법, 금산법 등 핵심적인 개혁법안의 처리도 기약 없이 뒤로 미뤄졌다. 2월국회는 활성화돼야 대구지검 국감술자리 사건도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국민의 분노와 비난이 거세지자 열린우리당 소속 윤리특위 위원들이 이 문제를 윤리특위에 제기했지만 당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였던 정세균 의원의 압력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제 국회는 성난 국민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월 임시국회에서 그 동안 미뤘던 숙제, 민생법안과 개혁법안을 제대로 심의하는 일이 그 첫걸음이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13
- <신문로 칼럼> (손혁재 2006.01.13) 우리나라에 의회민주주의는 있는가. 지난해 말 미국의 민간인권기구인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는 우리 민주주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프리덤 하우스는 해마다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보고서를 발간하는데 2년 연속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아시아 최고수준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프리덤 하우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정치적 자유는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 봐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며, 시민 자유도 그에 버금가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이 같은 평가에 대해 ‘맞아’라고 흔쾌히 동의할 국민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최근 국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어찌 높은 평가를 할 수 있겠는가. 국회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한숨부터 절로 나오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정기국회가 기어이 파행으로 끝났다. 정기국회에서 다루지 못한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열렸던 임시국회마저 허송세월하다가 연말에 겨우 몇 가지 안건만 처리하고 문을 닫았다. 17대 국회에서는 사라질 것으로 믿었던 낡은 정치행태가 여전히 국민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17대 국회에 대해 거는 국민의 기대는 남달랐다. 탄핵파동을 거치면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으로 17대 국회가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대에 화답하듯 여야는 대화와 타협, 상생의 정치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공허한 구두선이었다. 이전의 국회보다는 여러 가지 개선된 점이 눈에 띠었지만 국회가 제자리를 찾고 정치가 정상화되었다고 보기에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어 보인다. 낡은 정치행태가 너무 자주 되풀이되는 것이다. 17대 국회 첫 정기국회(2004년)도 두 번째 정기국회(2005년)도 파행으로 끝났다. 두 번의 정기국회 모두 예산안을 법정기일에 처리하지 못했다. 더구나 지난 정기국회에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제1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예산안이 처리되었다. 17대 국회는 ‘의회운영의 합리성과 책임성 제고’를 위한 노력들이 돋보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렵게 틔운 그 희망의 싹이 지난 정기국회에서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최근의 국회 공전에 대한 1차적 책임은 한나라당에 있다. 한나라당은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처리되자 예산안과 민생법안 처리를 외면한 채 장외투쟁을 벌였다. 투쟁방식의 선택은 한나라당 마음이지만 이건 아니다. 개정사학법이 예산안 처리까지 포기해야 할 정도로 문제가 많은가. 그렇지 않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16대 국회 때부터 처리하지 못했던 밀린 숙제였다. ‘7명의 이사 중 1/3 이상을 개방형 이사로 선임하자’는 원안이 약화되어 ‘7명 중 1/4 이상’으로 되었다. 전교조의 사학재단 장악과 빨갱이 교육 운운은 말도 안 되는 억지이다. 한나라당의 책임이 크다고 해서 열린우리당의 책임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정기국회가 끝나자마자 다시 연 임시국회에서 예산안과 이라크파병연장동의안 등 정부 안건만 처리하고 다시 국회를 팽개친 열린우리당도 문제이다. 국회의원들의 폭언과 폭력적 행위도 국민을 실망시켰다. 사학법 무효화 및 우리아이 지키기 투쟁본부장인 한나라당 이규택 의원의 발언, 말을 더듬는 오거돈 해양수산부장관을 모욕한 이상배 의원, 국회 여직원들에게 욕을 한 임인배 의원 등을 보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속상하기까지 하다. 이규택 의원은 지난해 12월 16일 서울시청 앞 촛불집회에서 ‘사립학교법이 통과되던 날 북한의 김정일은 너무 기뻐서 밤새도록 기쁨조와 함께 폭탄주를 마셨다’고 주장했다. 정말 어이없는 발언이다. 색깔론을 부추기기 위해 근거도 없는 말들을 마구 쏟아내는데 이런 막나가는 무책임한 행동이 부메랑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가 일을 제대로 했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정기국회가 열리기 직전 각 정당은 이구동성으로 ‘경제, 민생 문제 해결’을 일제히 국민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양극화 문제의 핵심인 비정규법안은 아직까지도 텅 빈 국회에서 뒹굴고 있다. X-파일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특검법 제정도 물 건너갔다. 국가보안법, 금산법 등 핵심적인 개혁법안의 처리도 기약 없이 뒤로 미뤄졌다. 대구지검 국감술자리 사건도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국민의 분노와 비난이 거세지자 열린우리당 소속 윤리특위 위원들이 이 문제를 윤리특위에 제기했지만 당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였던 정세균 의원의 압력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제 국회는 성난 국민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월 임시국회에서 그 동안 미뤘던 숙제, 민생법안과 개혁법안을 제대로 심의하는 일이 그 첫걸음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13
- 우리가 마지막 대장장이 될까 아쉬워 “우리세대가 지나면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습니다. 망치로 두들겨서 만든 것과 기계로 찍어내는 것은 차원이 다르지요” 45년 망치밥으로 살아온 김예섭(62)씨는 2006년 새해에도 망치질을 하고 있다. 대장간이라는 것이 세월에 묻혀진지 오래지만 김씨의 대장간에서는 아직도 빨갛게 달궈진 쇳덩이들이 새로운 탄생을 위해 두들겨 맞고 있다. ◆ 곁눈질로 시작한 대장장이= 서울 은평구 모래내시장 건너편에는 10평 남짓한 모래내대장간이 있다. 기자가 찾아간 아침 이른 시간 영하 11도를 가리키는 매서운 추위도 우습다는 듯 대장간의 열기는 뜨겁기만 하다. 전남 광양군 옥룡면에서 농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김씨는 초등학교 시절 집근처 대장간을 놀이터 삼아 하루를 보내곤 했다. 대장장이들의 손에서 만들어 지는 호미며 낫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 열여덟이 되는 해 몸은 약골이었지만 손재주가 남달랐던 김씨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장간에 들어가 풀무질을 시작했다. 김씨는 돈 한푼 받지 않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열심히 눈치로 배우고 익혔다. 꼬박 3년을 일한 뒤 김씨는 망치를 잡을 수 있었다. 김씨는 “풀무잡이 3년, 망치잡이 3년, 집게잡이 3년은 해야 대장장이가 될 수 있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군생활을 마치고 김씨는 69년 봄 서울로 상경했다. 여전한 아버님의 반대에 다른 일을 찾아보겠노라며 올라왔지만 대장장이의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손재주가 남달랐던 김씨는 대번에 망치잡이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6년의 망치질 끝에 진짜 대장장이라 말할 수 있는 집게잡이가 됐다. 김씨는 “당시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라 만들기 바쁘게 물건들이 동이 났다”며 “몸은 힘들었지만 물건 만드는 재미와 돈버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고 말한다. 60~70년대 현재의 동대문운동장 주변에는 수 십 개의 대장간들이 몰려있었다. 현재도 신당동 한양공고 주변에 가면 그때의 흔적이 남아 몇 개의 대장간을 만날 수 있다. ◆ 방송국 박물관은 새로운 고객= 집게잡이 6년을 마치고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 뽑혀가 1년을 일했다. 김씨는 “다른 인부들은 월 200달러 남짓을 받고 일했지만 우리 대장장이 들은 월 330달러를 받았다”며 “기술을 인정받은 게 무엇보다 좋았다”고 말했다. 81년 중동에서 돌아와 그동안 번 돈을 모아 신당동에 대장간을 차렸다. 하지만 자리를 잡지 못하고 87년 이곳 모래내에서 새롭게 시작했다. 모래내대장간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4년에 운명을 달리한 박영감이 운영하다 자식들에게 물려준 것을 김씨가 인수했다. 김씨가 만드는 물건은 종류만도 200여가지에 이른다. 그 200여가지도 쓰임새에 따라 크기 모양 등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 합하면 셀 수 없을 정도다. 대장간 하면 늘 생각나는 호미나 낫 등 농기구들은 한 물 간지 오래다. 이제는 공사현장의 인부들이 사용하는 공구를 주로 만든다. 덕분에 공사현장이 쉬는 겨울이 가장 한가한 계절이다. 모래내에서 자리를 잡던 87년 김씨는 새로운 고객을 만들었다. 한 박물관에서 가야시대의 갑옷 샘플을 가져와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해 만든 것을 계기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 후 방송국 박물관 등과 전국 각지에서 별의별 물건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오기 시작했다. 신문과 방송에서 인터뷰도 여러 번 했다. 방송국에서는 사극을 준비할 때면 늘 김씨에게 소품을 주문한다. MBC드라마 ‘허준’과 KBS ‘불멸의 이순신’에 나온 쇠로 만든 소품들은 상당수가 김씨의 손을 거쳐갔다. 김씨는 “‘해신’ 드라마 검투사들이 싸우는 장면에서 최수종씨가 사용했던 칼이 기억에 남는다”며 은근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 영원한 대장장이로 남고 싶어= 김씨에게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는 아들 둘이 있다. 비록 대장장이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남들 못지않게 자식들을 키웠다. 대학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자식들에게 대장장이로 살아갈 것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포기했다. 자신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 게 후회 없는 삶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아들놈들에게 해보자고 이야기 하기도 했지만 할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며 “지금 젊은 사람이 배워놓으면 10년만 지나도 스타가 될텐데...”하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김씨는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 7시면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느지막하게 나와 일을 한다. 일이라기보다는 쇠붙이를 가지고 논다. 화덕에서 달궈지는 쇠붙이를 보고 있노라면 60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새로운 열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김씨는 망치질을 시작한 후 한 번도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것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맨몸으로 시작했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살아왔고 최근에는 남에게 베풀 만큼 여유도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대장장이는 앞으로 더욱 전망이 있는 직업이다”고 강조한다. 유행을 타지 않고 재고 걱정도 없는 창조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올해 누군가 젊은이에게 이 일을 전해 주고 싶은 바람이 있다. 그는 “10년만 지나면 이 직업은 스타가 될 수 있는 직업이다”며 “직업의 귀천이 없는 시대에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게 최고 아니냐”고 덧붙였다. 고성수 기자 ssgo@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6-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