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보람있는 한해였습니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국가보훈처의 활동이 올 한해를 달구었다. ‘이념을 초월한 독립유공자 서훈’은 상반된 이념을 수용하는 우리사회의 수준을 확인하는 가늠자였다. 30년전 총부리를 겨누었던 베트남군과 월남파병용사들이 화해의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일부 보훈단체들이 북한보훈단체와 교류를 제안하는가 하면, 안중근의사 유해찾기 남북공동사업도 활발하다. ‘보훈이 나라의 정신적 좌표’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정책방향을 모색한 사례다. 서울 여의도 소재 보훈처는 ‘국가보훈은 대한민국의 과거-현재-미래입니다’라는 문구로 가득차 있다. 보훈처는 올해 정부혁신 우수사례로 꼽혔다. 보훈기본법 제정, 독립기념관과 대전현충원 업무인수, 제대군인 정책 등 보훈처 40여년의 숙원이 대대적으로 진척된 한해였다. 23일 보훈처장(장관급) 집무실에서 박유철 처장을 만났다. 박 처장은 올 한해를 되돌아보며 아쉬움도 있지만 보람찬 한해였음을 기탄없이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장관급으로 격상되는 등 하드웨어의 확대발전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역사상 처음으로 처장에 임명돼 보훈정책을 이끈 소프트웨어의 발전이라는 양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한해의 성과와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40여년 보훈의 역사에서 숙원이던 사업이 한해동안에 대부분 해결되었다. 이 5월에 제정되어 12월1일 발효된 점이 가장 큰 성과다. 우리나라 보훈은 원호사업으로 시작되다보니, 여기저기서 치이고 그 때마다 임시방편의 법체계를 만들어 중구난방으로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보훈은 물질보상이 아니라 국가정신을 높이는 체계이다. 이 기본법에 따라 5년마다 국가보훈발전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민관공동으로 구성되는 국가보훈위원회를 설치하여 신규 대상범위 결정, 보상원칙 설정 등 주요정책을 일관성 있고 체계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꼽으라면 독립기념관과 대전현충원을 보훈처로 이관받은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 업무를 그동안 보훈처 아닌 곳에서 맡아왔던 것은 그만큼 보훈행정 뒷전이었다는 뜻이 다. 만시지탄이다. 동작동 국립묘지는 국가의전의 역할 때문에 국방부가 계속 맡기로 했지만, 제대로 된 보훈을 위한 기초정비는 된 셈이다. 우리나라 보훈의 기본이념이 ‘자유-민주’에 국한되다보니 협소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민족-자유-민주-번영-통일’로 보훈이념이 보다 확장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과거 보훈은 쌀주고 돈주고 하는 원호사업이었다. 그러나 보훈은 나라의 정신을 정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훈 때문에 대립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보훈정신의 첫째는 나라의 독립, 곧 나라사랑이다. 이게 보훈의 바탕이 되어 선진국으로 가는 보훈을 정립해야 한다. 이제 세계시장에서 이기려면 문화요소가 필수적인데, 바로 보훈이 그런 문화요소를 창출한다. 보훈이 잘되지 않으면 세계경제에 뛰어들어 선진국이 되기 힘들다. 대전현충원과 독립기념관의 보훈처 이관으로 큰 숙원사업이 해결되었지만, 보훈정신을 선양하기 위해서는 아직 부족해 보인다. 보훈기본법에 따르면 앞으로 ‘안중근역’ ‘김 구역’ 등 지하철 역이 등장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새해에 가능한 일인가. 보훈대상자의 첫 번째 바람은 명예이다. 그들의 삶이 인정받는 것이다. 지하철 역명 제정계획은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새해에 지자체들과도 의논해서 추진을 검토할 생각이다. 독립기념관을 겨레의 상징시설로 만들고, 효창공원을 독립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 등 새해에는 현충시설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일에 매진할 계획이다. 보훈처는 민족의 역사와 관련된 기념사업에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데, 정부는 지금 용산미군기지에 민족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보훈처도 참여하는가. 민족의 상징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이라면 보훈처가 참여해야 한다고 보지만, 정부가 지금은 문을 닫은 상태다. 다소 섭섭하게 생각하지만 정부의 업무추진체계가 있으니까 두고볼 생각이다. ‘이념을 초월한 독립보훈’이 2005년 국민의 눈길을 붙잡았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서훈에 대한 국민의 수용도는 어느 정도였다고 평가하는가. 독립기념관장 재직 때 연해주를 간적이 있다. 교포들이 가슴을 치면서 ‘우리는 공산당 하려고 공산주의 한 것 아니다. 나라 찾기 위해 찾은 방법이 그것이었을 뿐’이라고 호소했다. 올해 사회주의자 서훈의 기준은 ‘우리나라 체제가 생긴 이후 우리 체제를 방해하거나 해치려고 하지 않은 이상 사회주의독립운동도 보훈대상자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국민들의 수용도를 굉장히 걱정했는데, 정말 큰 말썽없이 넘어갔다. 우리사회가 이념을 대하는 상대적인 태도가 매우 성숙되어 있다고 느꼈다. 제일 말이 많았던 게 여운형 선생 문제였는데, 그것도 서훈 등급만 논란이 일었지 서훈자체는 이의제기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독립운동사 편찬도 사회주의 계열을 적정하게 평가수용하며 진행되고 있다. 지금 우리 독립운동사는 임정 위주로 되어있는데 만주 등지에서도 독립운동이 격렬했다. 이 부분을 우리 역사 속에 수용하기 위해 객관적인 독립운동사를 편찬하는 작업중이다. 원로 및 중견학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사대계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새해에는 집필에 들어간다. 북한의 정부관계자들이 현충원을 참배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분들을 찾은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남북 공동보훈’의 여지가 엿보였던 한해였다. 새해에 ‘남북 공동보훈’을 추진할 계획은. 북한은 과거에 적이었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더불어 같이 잘살아 갈 길을 찾아야 할 대상이다. 남북공동보훈을 내가 선도하긴 어렵다. 다만 산하 보훈단체에서 이북의 보훈단체와 만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 이를 적극 지원할 수는 있다. 올해 보훈처는 총부리를 겨누었던 파월장병과 베트남군인이 서로 화해하는 장을 만든 바 있다. 남북공동보훈의 일환으로 안중근 선생 유해 찾기 사업은 우리 처의 핵심사업이다. 그동안 북 따로 남따로 영웅모시기를 하니까 중국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둘이 합쳐서 오면 도와주겠다는 중국정부의 의지에 따라 지금 남북간 대화가 진행중이다. 올 한해 제대군인 문제에 대해 크게 역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최근들어서 급부상한 보훈사업을 꼽으라면 단연 제대군인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이 매우 관심을 두고 있는 사안이다. 자주국방을 위한 군감축계획이 세워졌기 때문에 군의 우수한 인력이 상당수 사회로 진출해야 한다. 국방장관과 보훈처장에게 이 문제 해결에 심혈을 기울이라고 주문했다. 제대군인은 취업문제가 핵심관건이다. 민간기업이 요구하는 자격과 기술을 현역시절부터 배울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다. 20년 이상 장기복무자는 자녀학자금 대부, 취업, 진료 등을 지원한다. 1950~60년대 한국사회에서 가장 우수인력은 군엘리트였다. 지금도 군인력은 기능뿐만 아니라 조직에 대한 충성심 등 자질에서 매우 우수하다. 그런데 자꾸 오갈 곳 없는 사람들 취업자리 부탁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문제가 있다. ‘보훈가족 제대군인 취업박람회’를 열어 군인력의 우수성을 홍보할 계획이다.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제대군인지원위원회’가 현재 운영중이다. 보훈처에는 ‘제대군인지원센터’ ‘제대군인국’이 정책기반을 넓혀가고 있다. ‘제대군인 지원에 관한 법률’도 개정돼 국민적인 관심속에 사업이 진행될 것이다. 올 한해에 제대군인 565명이 취업과 창업에 성공했다. 보훈대상자의 노쇠화 현상으로 의료보장 요구가 갈수록 늘고 있다. 다른 면에서는 보훈대상자의 확충이 필요한데 그 계획은. 보훈대상자가 줄어드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독립유공자들은 많이 돌아가셨고, 참전유공자들도 세월이 지나면서 줄어든다. 보훈대상자의 24%인 28만명이 65세 이상이며, 치매·중풍 등 노인성질환자가 4만2천명이다. ‘전문사료 발굴 분석단’을 운영해 독립유공자와 호국 유공자 민주화 유공자들 중 아직 보훈 대상자가 되지 못한 분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와함께 새로운 보훈대상자 기준을 도입하는 문제는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보훈심사위원회에서 2005-12-26
- [박석무 칼럼]가채리(嘉茝里) 기행(紀行) 가채리(嘉茝里) 기행(紀行)(2005.12.22)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1896년 음력으로 8월 중순, 그 2년 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의 후폭풍으로 세상이 요동치고 있던 가운데, 갑오경장(甲午更張)까지 겹쳐 나라가 뒤숭숭하던 무렵이었다. 그런 와중에 전라도 무안(務安)의 젊은 선비 한 분이 괴나리봇짐을 지고 도보로 천리 먼 길인 경기도 포천의 가채리를 찾아갔다. 가채리는 당대의 거유(巨儒)이자 한말의 의병장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 1833-1906)이 태어났던 고향이다. 면암이 다른 곳에 이사가 살다가, 64세이던 그 해에 마침 고향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면암의 제자가 되려는 욕심과 자신의 선조 비문(碑文)을 받아오려는 임무를 띠고 먼 길을 여행한 선비는 민재(敏齋) 박임상(朴琳相 : 1864-1944)으로, 그때 33세의 시골 서생이자 향학열에 불타던 젊은 한학자의 한분이었다. 그때부터 109년이 지난 올해 11월 30일, 민재의 증손자인 필자는 강원도 철원에 일이 있어 다녀오던 귀로에 포천시내로 들어오자 교통표지판에 ‘가채리’라는 방향 표지를 발견했다. 드디어 평생의 숙원이던 그곳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면암 최익현, 그가 누구이던가. 가채리에서 경주 최씨의 후손으로 태어나 14세에 대학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가 큰 학문을 얻고,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여러 벼슬을 거쳐, 30세에는 충청도 신창(新昌 : 지금은 아산시) 현감으로 승진하고 사헌부의 지평(持平)과 장령(掌令)에 오른다. 이때 36세의 나이로 하늘을 찌르던 대원군의 위세에도 굴하지 않고 그의 독재를 비판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으니 이른바 ‘무진소(戊辰疏)’라는 명상소였다. 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지 10년째이던 41세에 면암은 또 대원군의 독재를 규탄하는 ‘계유소(癸酉疏)’를 올려 대원군이 끝내 권좌에서 물러나는 대사건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미 정3품 당상관의 동부승지에 올라 있던 면암은 곧바로 정2품 호조참판이라는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대원군과 고종 부자의 사이를 이간시켰다는 죄목으로 마침내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나는 불행에 봉착하고, 3년의 유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다. 다음 해인 44세에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광화문 앞에 도끼를 들고 조약반대를 위한 지부상소(持斧上疏)를 감행하였다. 상소의 요구를 들어주든가 아니면 도끼로 자신의 목을 베어달라는 무서운 상소였다. 그러나 정부는 그를 죽이지 못하고 머나먼 흑산도로 유배시켜 4년의 세월을 보내게 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온 나라에 이름이 가득하던 면암을 조야에서 숭앙하지 않은 사람이 많지 않을 때, 저 먼 시골의 선비가 면암을 찾아 16일 만에 선생 앞에 절을 올릴 수 있었다. 골짜기에 가득한 가을바람 나무 사이로 이는데 공경스럽게 선생님 뒤따르며 천천히 걷노라. 당당한 기상이야 산처럼 무거워서 온 세상에 바르지 못한 의논 허용되기 어렵다네. (滿壑秋風隔樹生 敬隨杖屨故徐行 堂堂氣像如山重 當世難容鄭衛聲) ‘선생님을 모시고 마을 뒷산인 채산(茝山)에 올라(陪勉菴崔先生登茝山)’라는 제목의 민재의 시다. 위풍이 당당하기로 유명하여 그분의 영정을 보면 모두가 호랑이 상처럼 무섭다던 면암, 그 위세에 눌려 아무도 허튼 수작을 할 수 없다는 마지막 구절이 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68세의 고령으로 충청도의 정산(定山 : 지금의 청양군)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면암은, 74세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이유로 전라도 순창에서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의 헌병에 붙들려 대마도로 압송되어 거기서 일본의 쌀인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단식하다 끝내 노환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가채리에 들렀더니 ‘채산사(茝山祠)’라는 조그만 사당이 을씨년스럽게 서있을 뿐이다. 당당한 기상으로 천하를 압도하던 면암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고 문을 걸어잠궈 들어갈 수도 없는 쓸쓸한 3칸의 사당 한 채가 있었다. 면암의 혼을 모신 사당이란다. 나라가 망해 36년을 식민통치에 시달렸고, 그 후유증으로 국토가 분단되어 60년이 다 되는 지금, 나라를 지키고 민족의 혼을 살려내자던 면암의 혼이 그렇게 쓸쓸해서야 되겠는가. 증조할아버지 스승의 고향이자 혼이 서린 가채리, 세상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만, 거기에 ‘척사위정’의 당당한 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필자는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100여년전 면암과 민재의 만남이 그림처럼 떠오르고, 필자의 가슴을 꽉 채우는 것이 있었다. 면암 그렇게 외로워서는 안된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2-22
- <박석무 칼럼>가채리(嘉茝里) 기행(紀行)(2005.12.22) 가채리(嘉茝里) 기행(紀行) 1896년 음력으로 8월 중순, 그 2년 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의 후폭풍으로 세상이 요동치고 있던 가운데, 갑오경장(甲午更張)까지 겹쳐 나라가 뒤숭숭하던 무렵이었다. 그런 와중에 전라도 무안(務安)의 젊은 선비 한 분이 괴나리봇짐을 지고 도보로 천리 먼 길인 경기도 포천의 가채리를 찾아갔다. 가채리는 당대의 거유(巨儒)이자 한말의 의병장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 1833-1906)이 태어났던 고향이다. 면암이 다른 곳에 이사가 살다가, 64세이던 그 해에 마침 고향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면암의 제자가 되려는 욕심과 자신의 선조 비문(碑文)을 받아오려는 임무를 띠고 먼 길을 여행한 선비는 민재(敏齋) 박임상(朴琳相 : 1864-1944)으로, 그때 33세의 시골 서생이자 향학열에 불타던 젊은 한학자의 한분이었다. 그때부터 109년이 지난 올해 11월 30일, 민재의 증손자인 필자는 강원도 철원에 일이 있어 다녀오던 귀로에 포천시내로 들어오자 교통표지판에 ‘가채리’라는 방향 표지를 발견했다. 드디어 평생의 숙원이던 그곳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면암 최익현, 그가 누구이던가. 가채리에서 경주 최씨의 후손으로 태어나 14세에 대학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가 큰 학문을 얻고,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여러 벼슬을 거쳐, 30세에는 충청도 신창(新昌 : 지금은 아산시) 현감으로 승진하고 사헌부의 지평(持平)과 장령(掌令)에 오른다. 이때 36세의 나이로 하늘을 찌르던 대원군의 위세에도 굴하지 않고 그의 독재를 비판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으니 이른바 ‘무진소(戊辰疏)’라는 명상소였다. 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지 10년째이던 41세에 면암은 또 대원군의 독재를 규탄하는 ‘계유소(癸酉疏)’를 올려 대원군이 끝내 권좌에서 물러나는 대사건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미 정3품 당상관의 동부승지에 올라 있던 면암은 곧바로 정2품 호조참판이라는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대원군과 고종 부자의 사이를 이간시켰다는 죄목으로 마침내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나는 불행에 봉착하고, 3년의 유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다. 다음 해인 44세에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광화문 앞에 도끼를 들고 조약반대를 위한 지부상소(持斧上疏)를 감행하였다. 상소의 요구를 들어주든가 아니면 도끼로 자신의 목을 베어달라는 무서운 상소였다. 그러나 정부는 그를 죽이지 못하고 머나먼 흑산도로 유배시켜 4년의 세월을 보내게 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온 나라에 이름이 가득하던 면암을 조야에서 숭앙하지 않은 사람이 많지 않을 때, 저 먼 시골의 선비가 면암을 찾아 16일 만에 선생 앞에 절을 올릴 수 있었다. 골짜기에 가득한 가을바람 나무 사이로 이는데 공경스럽게 선생님 뒤따르며 천천히 걷노라. 당당한 기상이야 산처럼 무거워서 온 세상에 바르지 못한 의논 허용되기 어렵다네. (滿壑秋風隔樹生 敬隨杖屨故徐行 堂堂氣像如山重 當世難容鄭衛聲) ‘선생님을 모시고 마을 뒷산인 채산(茝山)에 올라(陪勉菴崔先生登茝山)’라는 제목의 민재의 시다. 위풍이 당당하기로 유명하여 그분의 영정을 보면 모두가 호랑이 상처럼 무섭다던 면암, 그 위세에 눌려 아무도 허튼 수작을 할 수 없다는 마지막 구절이 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68세의 고령으로 충청도의 정산(定山 : 지금의 청양군)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면암은, 74세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이유로 전라도 순창에서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의 헌병에 붙들려 대마도로 압송되어 거기서 일본의 쌀인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단식하다 끝내 노환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가채리에 들렀더니 ‘채산사(茝山祠)’라는 조그만 사당이 을씨년스럽게 서있을 뿐이다. 당당한 기상으로 천하를 압도하던 면암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고 문을 걸어잠궈 들어갈 수도 없는 쓸쓸한 3칸의 사당 한 채가 있었다. 면암의 혼을 모신 사당이란다. 나라가 망해 36년을 식민통치에 시달렸고, 그 후유증으로 국토가 분단되어 60년이 다 되는 지금, 나라를 지키고 민족의 혼을 살려내자던 면암의 혼이 그렇게 쓸쓸해서야 되겠는가. 증조할아버지 스승의 고향이자 혼이 서린 가채리, 세상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만, 거기에 ‘척사위정’의 당당한 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필자는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100여년전 면암과 민재의 만남이 그림처럼 떠오르고, 필자의 가슴을 꽉 채우는 것이 있었다. 면암 그렇게 외로워서는 안된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2-22
- 내셔널트러스트 대상에 울산 이진리 타포니해안 ‘2005 이곳만은 꼭 지키자’ 시민 후보지 최종선정 소로리 볍씨 유적지, 수덕여관, 홍도평야 등 11곳 울산시 울주군 온산리 소재 ‘이진리 타포니 해안’이 올해 내셔널트러스트 시민공모전 대상(환경부장관상)을 차지했다. 금상(산림청장상)에는 제주시 북제주군 ‘산양 곶자왈’과 충남 예산군 ‘수덕여관’, 충북 청원군 ‘소로리 볍씨 유적지’, 충북 청주시 ‘원흥이방죽’이 선정됐다. 김포시 ‘홍도평야’(재두루미 도래지), 제주 ‘배무숭이 소금밭’, 전남 강진군 ‘백운동 계곡’, 제주 ‘용눈이오름’은 은상(내셔널트러스트상)을, 성남시 ‘동막천’ 일대와 전주시 ‘완산칠봉 습지’ 일대는 심사위원특별상을 차지했다. ‘이곳만은 꼭 지키자!’는 훼손 위기에 놓인 자연·문화유산을 시민들이 직접 발굴·선정하는 행사로 올해에는 전국 각지에서 추천된 68곳의 후보작이 열띤 경쟁을 벌였다. 11곳의 수상작들은 환경 및 문화유산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과 시민평가단의 서류심사, 인터넷 투표, 현장심사를 거쳐 최종 선정됐다. 올해 수상작들에 대한 시상식은 내년 1월16일 열린다. ◆“해안 전체가 자연사박물관” = 올해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완산칠봉 습지’의 경우 행사기간 중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을 통해 대상 지역을 매입·보전하는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상당수가 국가나 자치단체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가운데 방치되거나, 난개발로 훼손될 위기에 놓여 있어 보전대책이 절실한 상황이다. 대상을 받은 울산 ‘이진리 타포니 해안’ 일대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화강암 지형으로, 타포니(구멍바위)와 핵석(돌알바위)이 잘 발달되어 심사과정에서 “해안 전체가 거대한 자연사박물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울산시가 올해 실시한 학술조사에서도 ‘보존가치 상’으로 평가된 이곳은 신항만 공사와 공장부지 조성으로 해안이 매립될 위기에 처해 있다. 금상을 수상한 ‘수덕여관’(문화재기념물 103호·충남 예산군 수덕사 입구)은 고암 이응로 화백의 예술혼을 간직한 공간으로, 초가와 함께 이 화백의 암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청소년들의 탈선 장소로 이용되면서 화재의 위험까지 안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도심 한가운데 재두루미 월동 = 1만3000년 전의 볍씨가 출토된 충북 청원군 소로리 유적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이다. 벼의 기원 및 진화, 빙하기 후기의 기후와 식생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이곳은 별다른 보전대책 없이 산업단지로 개발될 예정이다. 제주 곶자왈은 화산활동 과정에서 분출된 용암이 굳은 지대에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숲 지대. 지하수의 원천이자 희귀 동·식물의 서식처인 이곳은 지금까지 마을 공동소유로 잘 보존되고 있으나 골프장 등 개발 압력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김포시 홍도평야는 도심 한가운데 재두루미(천연기념물 203호)가 월동하는 곳으로 세계적으로 드문 사례로 평가받았다. 홍도평야 일대는 그러나 김포시 우회도로 건설과 인근 농경지 난개발로 재두루미 도래지가 점점 축소되는 등 해가 갈수록 훼손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자연유산국장은 “훼손 위기는 개인에서부터 개발업체, 자치단체, 지역주민의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대다수 사례에서 볼 때 관련 부처나 자치단체가 개발논리에 편승, 보전에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사진제공 한국내셔널트러스트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2-15
- 내셔널트러스트 공모전 대상에 울산 이진리해안 내셔널트러스트 공모전 대상에 울산 이진리해안 ‘2005 이곳만은 꼭 지키자’ 시민 후보지 최종선정 소로리 볍씨 유적지, 수덕여관, 홍도평야 등 11곳 울산시 울주군 온산리 소재 ‘이진리 타포니 해안’이 올해 내셔널트러스트 시민공모전 대상(환경부장관상)을 차지했다. 금상(산림청장상)에는 제주시 북제주군 ‘산양 곶자왈’과 충남 예산군 ‘수덕여관’, 충북 청원군 ‘소로리 볍씨 유적지’, 충북 청주시 ‘원흥이방죽’이 선정됐다. 김포시 ‘홍도평야’(재두루미 도래지), 제주 ‘배무숭이 소금밭’, 전남 강진군 ‘백운동 계곡’, 제주 ‘용눈이오름’은 은상(내셔널트러스트상)을, 성남시 ‘동막천’ 일대와 전주시 ‘완산칠봉 습지’ 일대는 심사위원특별상을 차지했다. ‘이곳만은 꼭 지키자!’는 훼손 위기에 놓인 자연·문화유산을 시민들이 직접 발굴·선정하는 행사로 올해에는 전국 각지에서 추천된 68곳의 후보작이 열띤 경쟁을 벌였다. 11곳의 수상작들은 환경 및 문화유산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과 시민평가단의 서류심사, 인터넷 투표, 현장심사를 거쳐 최종 선정됐다. 올해 수상작들에 대한 시상식은 내년 1월16일 열린다. ◆“해안 전체가 자연사박물관” = 올해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완산칠봉 습지’의 경우 행사기간 중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을 통해 대상 지역을 매입·보전하는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상당수가 국가나 자치단체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가운데 방치되거나, 난개발로 훼손될 위기에 놓여 있어 보전대책이 절실한 상황이다. 대상을 받은 울산 ‘이진리 타포니 해안’ 일대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화강암 지형으로, 타포니(구멍바위)와 핵석(돌알바위)이 잘 발달되어 심사과정에서 “해안 전체가 거대한 자연사박물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울산시가 올해 실시한 학술조사에서도 ‘보존가치 상’으로 평가된 이곳은 신항만 공사와 공장부지 조성으로 해안이 매립될 위기에 처해 있다. 금상을 수상한 ‘수덕여관’(문화재기념물 103호·충남 예산군 수덕사 입구)은 고암 이응로 화백의 예술혼을 간직한 공간으로, 초가와 함께 이 화백의 암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청소년들의 탈선 장소로 이용되면서 화재의 위험까지 안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도심 한가운데 재두루미 월동 = 1만3000년 전의 볍씨가 출토된 충북 청원군 소로리 유적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이다. 벼의 기원 및 진화, 빙하기 후기의 기후와 식생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이곳은 별다른 보전대책 없이 산업단지로 개발될 예정이다. 제주 곶자왈은 화산활동 과정에서 분출된 용암이 굳은 지대에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숲 지대. 지하수의 원천이자 희귀 동·식물의 서식처인 이곳은 지금까지 마을 공동소유로 잘 보존되고 있으나 골프장 등 개발 압력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김포시 홍도평야는 도심 한가운데 재두루미(천연기념물 203호)가 월동하는 곳으로 세계적으로 드문 사례로 평가받았다. 홍도평야 일대는 그러나 김포시 우회도로 건설과 인근 농경지 난개발로 재두루미 도래지가 점점 축소되는 등 해가 갈수록 훼손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자연유산국장은 “훼손 위기는 개인에서부터 개발업체, 자치단체, 지역주민의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대다수 사례에서 볼 때 관련 부처나 자치단체가 개발논리에 편승, 보전에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1. 이진리 타포니군 해안 이 일대는 거대한 타포니군과 핵석이 나타나는 곳으로 지질적, 지형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곳이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이진리 해안일대는 공해의 주범인 온산공단주변으로 그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2003년 처음 울산 생명의 숲에서 이 일대를 답사하고, 2004년 울산지리교사도 이곳을 답사하며 이곳의 가치를 파악, 학생들의 수업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2005년 이 일대의 용역학술조사에서도 57개 항목 중 57개 항목모두가 보존가치 상으로 나왔음에도 울산시가 이를 무시,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2004년 5월 이 일대의 천연기념물 지정이 기각되고, 이 일대가 공유수면으로 매립될 위기에 처해있어 울산지리교사모임과 울산의 환경단체가 이 일대를 보호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2. 산양 곶자왈 곶자왈사람들은 제주도내에서 활동하는 곶자왈 보존운동 단체입니다. 곶자왈은 제주도 화산활동 과정에서 분출된 용암이 굳은 지대에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숲지대입니다. 특히 곶자왈은 크고 작은 암반지대로 제주의 생명수인 지하수를 만들어내고 세계적으로 제주에서만 자라는 특산식물을 비롯한 다양한 식물과 동물서식지로 뛰어난 생태적 가치를 지닌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자연자원입니다. 하지만 곶자왈은 제주에 일고 있는 골프장 건설을 비롯한 관광개발분위기속에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공모전을 통해 곶자왈이 갖는 가치를 널리 알리고 우리 모두의 소중한 자원으로 영구 보전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합니다. 산양곶자왈은 제주도 곶자왈 지역내 한 곳으로 미기록 식물을 비롯한 주요 희귀식물들이 자생할 뿐 아니라 암반지대에 이뤄진 상록활엽수림이 빼어난 경관과 생태가치를 갖는 곳입니다. 용암위에 형성된 숲지대인 곶자왈은 투수성 지질로 제주 생명수인 지하수를 만들뿐 아니라 보온 보습효과로 다양한 식물이 자생하는 숲으로 제주 자연에 있어 허파로 불립니다. 3. 수덕여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산 41외. 충남 예산 수덕사 앞에 있는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이 지냈던 수덕여관(충청남도 문화재기념물 제103호). 초가지붕을 얹은 수덕여관은 옛모습을 잘 지키고 있다. 고암 이응노 화백이 동백림 사건 때 한국에 잡혀와 머물었으며, 수덕여관 뒤뜰에는 고암이 이때 그린 암각화가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나 관리가 되지 않고 있고, 건물 소유주는 건물을 팔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형편이다. 수덕사 옆에 있어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지만 관리인은커녕 담조차 없어 사람의 손이 타기 쉽고, 특히 장마철에는 목조건축물에 심한 습피해가 생길 수도 있다. 현재는 수덕여관 안 부엌과 우물가에 쓰레기가 가득하고, 방 안은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아 여느 폐가처럼 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하루 빨리 제대로 관리해 보존을 해야 한다. 4. 소로리 볍씨 유적지 청원 소로리 볍씨와 출토 토탄층은 1998년과 2001년 10월, 두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서 모두 13,000년 전의 볍씨로 현재까지 알려진 볍씨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특히 벼의 기원 및 진화, 빙하기 후기의 기후와 식생을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입니다. 국제적인 학술회의에서 인정을 받고, 영국 BBC 방송에서까지 대서특필한 소로리 볍씨가 유독 지역자치단체의 외면으로 지방문화재 지정조차 부결되는 등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 최고 소로리 볍씨 보존의 당위성 홍보와 보존노력을 민간차원에서라도 끈질기게 벌여 인류가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민간차원에서 문화유산을 지켜내기란 한계가 있습니다.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은 이 한계를 극복하는 단초가 되고 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학계에서 주장하는 원지역의 2000평 정도를 매입하는 비용 등이 몇 백억 이상을 호가할 것이며, 자치단체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벼의 진원지로 알려진 중국에서 한국으로 역사를 바뀌게 될 중요한 시점에서 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정부와 한국토지공사의 배려와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 기본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을 통해서 이를 지속적으로 촉구해야 하며, 대상지를 보존하고 박물관 등을 설립하여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 많은 시민, 학생들이 교육 2005-12-15
- ‘마징가’의 눈물 “한때 3650여명이었던 직원이 1100여명까지 줄었습니다….” 최근 몇 년간 SK그룹이 겪은 어려움을 회고하던 김창근 SK케미칼 부회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중학교 때부터 격투기로 다진 강인한 체력과 일에 대한 열정으로 ‘철인 마징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그였지만 모진세월의 아픔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SK그룹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으로 지난 2003년 SK글로벌 사태로 구속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뒤 올 3월 SK케미칼 부회장으로 경영일선에 복귀한 김 부회장이 14일 서울 시내 한 식당에서 오랜만에 기자들을 만났다. 그는 “외환위기로 그룹이 어려울 때 최종현 전 회장이 타계하고, 이를 추스르기도 전에 SK글로벌 사건이 터졌다”며 “웬만한 회사였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룹의 성장축이자 모태였던 SK케미칼도 섬유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가 한 때 3650여명이었던 직원이 1100여명까지 줄어들었다”며 참 어렵고 힘든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김 부회장은 “SK그룹이 이같은 어려움을 딛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신뢰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SK그룹이 ‘행복경영’을 선언하고 나선 것도 제2의 도약을 할 수 있게 해준 주변에 대해 감사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보통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을 상징하고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을 상징하는 데 행운을 찾기 위해 더 소중한 행복을 잃는 경우가 많다”며 “행복을 지속하기 위해 늘 주변과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김 부회장은 자신이 맡고 있는 SK케미칼 경영과 관련 “정밀화학과 생명과학을 양 축으로 해외진출을 적극 추진하는 등 글로벌 경영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2-15
- [유승삼 칼럼]“아직은 용서도 사치다!” “아직은 용서도 사치다!” 유승삼 (언론인·KAIST 초빙교수)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모함’이라고까지 강변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반응을 접하니 태평양 전쟁의 주범 도조 히데키의 손녀 도조 유코가 지난 8월, 오마이뉴스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50년을 제 이름조차 숨기며 죽어지내다가 근래 군국주의 부활 분위기에 힘입어 일약, 일본 사회의 지도자로 등장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조부는 평화를 사랑하셨으며 친절한 성품을 지닌 분이셨다. 그 분이 저지른 죄라면 조국을 사랑했다는 죄밖에 없다.” 그 누구의 말과 너무나 똑같지 않은가. 인터뷰를 읽으면서 역시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고 탄복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인터뷰를 한 기자는 그녀를 “흠잡을 데 없는 매너와 은퇴한 선생님같은 분위기의 이 작은 여성이 바로 아시아를 들끓게 하고 있는, 일본 내 수정주의 사관을 이끄는 주요 인물 중의 하나”라고 묘사했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이 묘사 역시 바로 연상을 불러와 혼자서 쓴 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있다. 반성 모르는 박근혜 대표 기자가 “히틀러도 그렇게 변명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추궁하자 그는 단호하게 이렇게 답변했다. “조부님은 동포를 죽이지는 않았다” 이 대목에서만은 우리 경우와 내용이 다르다. 국정원이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과장 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 과연 박근혜 대표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동안 드러난 그녀의 과거 인식과 태도로 미루어 제대로 된 반성의 말이 나오리라고는 물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어도, 어느 정도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만큼 세월이 흘렀고, 많은 증언도 나왔으며 또 사건의 내용이 너무도 참혹한지라 간단히 유감의 뜻 정도는 표할지 모른다는 짐작도 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였다. 그녀는 ‘유신의 딸’ ‘유신 공주’라는 항간의 지적에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그녀는 억울하게 숨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표시는커녕 발표 내용에 대해서 냉혹하게도 “한 마디로 가치 없는 것”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우리 역사를 왜곡해 함부로 발표하는 자체가 과거사가 될 것”이라는 극언조차 서슴지 않았다. 발표문에도 나와 있듯이 이번 조사에서도, 그녀의 아버지가 사건을 조작·과장하는 지침을 주고 사형집행을 지시했다는 ‘정황’만 있지 그것을 ‘확인할 문서나 증언은 없었다’. 그러나 8명이 억울하게 숨졌다는 것, 그녀의 아버지가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던 절대 권력자였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녀의 아버지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죽음에 대한 정치적·행정적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박씨의 발언은 마치 ‘잘못한 게 뭐냐’고 도리어 삿대질하고 대드는 식이다. 감히 밖으로 표현은 못 하지만 속으론 아직도 인혁당 사건 관련자가 ‘죽을 짓’을 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박근혜 대표의 인식과 발언을 통해 왜 우리 사회가 이토록 오랫동안 화해와 관용없이, 둘로 갈라져서 사생결단식의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가해자가 지난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려고만 하지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자세가 전혀 없는 것이다. 피해자는 아직도 과거의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불행하게 살고 있는데 가해자들은 오히려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기만 한 것이다. 관련자·기관, 참회 나서야 과거사 평가에 있어 당시의 여건에 대한 고려 없이 현재의 잣대로만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후세의 오만’도 물론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과오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가해자의 비양심과 후안무치’일 것이다. 그렇게 사건에 관련된 자들이 단계 단계마다 많은데도 국가정보원이 이번 조사에서마저도 확실한 문서나 증언을 못 얻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 상황에서는 용서도 사치다!”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에게, 참회하며 죽어 가는 나치 병사에 대한 ‘용서의 용기’를 권하자 이렇게 절규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도 다를 바 없다. 먼저 사건을 조작·과장한 정치세력, 그것을 집행한 인권 유린자, 그것에 합법성을 부여해준 검찰과 각급 법원의 그 많은 판사들이 줄줄이 고백과 참회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첫 번 째 순서이다. 그것이 용서와 화해의 전제요 절차일 것이다. 그렇다면 또 모르겠다. 그러나 사죄는커녕 도리어 ‘모함이다!’라고 외치는 판에 누가 용서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재심조차도 꾸물거리고 있는 판에 누가 화해를 말하겠는가. 아직 우리 상황에서도 역시, ‘용서도 사치’일 수밖에는 없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2-13
- ‘마징가’의 눈물 김창근 SK케미칼 부회장 “행복경영으로 보답” “한때 3650여명이었던 직원이 1100여명까지 줄었습니다….” 최근 몇 년간 SK그룹이 겪은 어려움을 회고하던 김창근 SK케미칼 부회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중학교 때부터 격투기로 다진 강인한 체력과 일에 대한 열정으로 ‘철인 마징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그였지만 모진세월의 아픔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SK그룹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으로 지난 2003년 SK글로벌 사태로 구속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뒤 올 3월 SK케미칼 부회장으로 경영일선에 복귀한 김 부회장이 14일 서울 시내 한 식당에서 오랜만에 기자들을 만났다. 그는 “외환위기로 그룹이 어려울 때 최종현 전 회장이 타계하고, 이를 추스르기도 전에 SK글로벌 사건이 터졌다”며 “웬만한 회사였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룹의 성장축이자 모태였던 SK케미칼도 섬유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가 한 때 3650여명이었던 직원이 1100여명까지 줄어들었다”며 참 어렵고 힘든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김 부회장은 “SK그룹이 이같은 어려움을 딛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신뢰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SK그룹이 ‘행복경영’을 선언하고 나선 것도 SK그룹이 제2의 도약을 할 수 있게 해준 주변에 대해 감사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보통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을 상징하고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을 상징하는 데 행운을 찾기 위해 더 소중한 행복을 잃는 경우가 많다”며 “행복을 지속하기 위해 늘 주변과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김 부회장은 자신이 맡고 있는 SK케미칼 경영과 관련 “정밀화학과 생명과학을 양 축으로 해외진출을 적극 추진하는 등 글로벌 경영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2-15
- <유승삼 칼럼>“아직은 용서도 사치다!”(2005.12.13) “아직은 용서도 사치다!” 유승삼 칼럼 (언론인· KAIST 초빙교수)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모함’이라고까지 강변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반응을 접하니 태평양 전쟁의 주범 도조 히데키의 손녀 도조 유코가 지난 8월, 오마이뉴스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50년을 제 이름조차 숨기며 죽어지내다가 근래 군국주의 부활 분위기에 힘입어 일약, 일본 사회의 지도자로 등장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조부는 평화를 사랑하셨으며 친절한 성품을 지닌 분이셨다. 그 분이 저지른 죄라면 조국을 사랑했다는 죄 밖에 없다” 그 누구의 말과 너무나 똑같지 않은가. 인터뷰를 읽으면서 역시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고 탄복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인터뷰를 한 기자는 그녀를 “흠잡을 데 없는 매너와 은퇴한 선생님 같은 분위기의 이 작은 여성이 바로 아시아를 들끓게 하고 있는, 일본 내 수정주의 사관을 이끄는 주요 인물 중의 하나”라고 묘사했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이 묘사 역시 바로 연상을 불러와 혼자서 쓴 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있다. 반성 모르는 박근혜 대표의 극언 기자가 “히틀러도 그렇게 변명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추궁하자 도조의 손녀는 단호하게 이렇게 답변했다. “조부님은 동포를 죽이지는 않았다” 이 대목에서만은 우리 경우와 내용이 다르다. 그러고 보니 이 시대엔 선대의 후광에 힘입어 권세와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는 독재자의 혈육이 한 사람 더 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손녀 알렉산드라 무솔리니이다. 그녀는 다당제체제인 이태리 정계에서 할아버지의 후광을 활용해 나폴리의 시장으로, 국회의원으로, 파시즘 정당의 지도자로 큰 소리치며 살고 있다. 그릇된 역사를 제대로 철저히 청산하지 못 할 때 그 역사는 반드시 부활해서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이들 독재자 후손들이 활개 치는 현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정원이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과장 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 과연 박근혜 대표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동안 드러난 그녀의 과거 인식과 태도로 미루어 제대로 된 반성의 말이 나오리라고는 물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어도, 어느 정도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만큼 세월이 흘렀고, 많은 증언도 나왔으며 또 사건의 내용이 너무도 참혹한지라 간단히 유감의 뜻 정도는 표할지 모른다는 짐작도 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였다. 그녀는 ‘유신의 딸’ ‘유신 공주’라는 항간의 지적에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그녀는 억울하게 숨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표시는커녕 발표 내용에 대해서 냉혹하게도 “한 마디로 가치 없는 것”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우리 역사를 왜곡해 함부로 발표하는 자체가 과거사가 될 것”이라는 극언조차 서슴지 않았다. 발표문에도 나와 있듯이 이번 조사에서도, 그녀의 아버지가 사건을 조작·과장하는 지침을 주고 사형집행을 지시했다는 ‘정황’만 있지 그것을 ‘확인할 문서나 증언은 없었다’. 그러나 8명이 억울하게 숨졌다는 것, 그녀의 아버지가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던 절대 권력자였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녀의 아버지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죽음에 대한 정치적·행정적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박씨의 발언은 마치 ‘잘못한 게 뭐냐’고 도리어 삿대질하고 대드는 식이다. 감히 밖으로 표현은 못 하지만 속으론 아직도 인혁당 사건 관련자가 ‘죽을 짓’을 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박근혜 대표의 인식과 발언을 통해 왜 우리 사회가 이토록 오랫동안 화해와 관용없이, 둘로 갈라져서 사생결단식의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가해자가 지난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려고만 하지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자세가 전혀 없는 것이다. 피해자는 아직도 과거의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불행하게 살고 있는데 가해자들은 오히려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기만 한 것이다. 관련자와 기관은 참회에 나서라 과거사를 평가하는 데 있어 당시의 여건에 대한 고려는 없이 현재의 잣대로만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후세의 오만’도 물론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과오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가해자의 비양심과 후안무치’일 것이다. 그렇게 사건에 관련된 자들이 단계 단계마다 많은데도 국가정보원이 이번 조사에서마저도 확실한 문서나 증언을 못 얻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 상황에서는 용서도 사치다!”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에게, 참회하며 죽어 가는 나치 병사에 대한 ‘용서의 용기’를 권하자 이렇게 절규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도 다를 바 없다. 먼저 사건을 조작·과장한 정치세력, 그것을 집행한 인권 유린자, 그것에 합법성을 부여해준 검찰과 각 급 법원의 그 많은 판사들이 줄줄이 고백과 참회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첫 번 째 순서이다. 그것이 용서와 화해의 전제요 절차일 것이다. 그렇다면 또 모르겠다. 그러나 사죄는커녕 도리어 ‘모함이다!’라고 외치는 판에 누가 용서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재심조차도 꾸물거리고 있는 판에 누가 화해를 말하겠는가. 아직 우리 상황에서도 역시, ‘용서도 사치’일 수밖에는 없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2-13
- [김영호 칼럼]북한경제를 살려야 하는 까닭 북한경제를 살려야 하는 까닭 김영호 (시사평론가·언론광장 공동대표) 2년 전 평양은 가는 곳마다 아파트 외벽공사가 한창이었다. 외벽에 허술하게 붙인 타일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흉하기도 하지만 누추해 보여 모두 떼어내기로 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거의 마무리되어 도시가 한결 산뜻해졌다. 오가는 시민의 옷차림도 밝아지고 한껏 멋을 낸 젊은 여성들도 눈에 띈다. 20년도 더 된 낡은 자동차들만이 간간이 다니더니 요즈음은 드물지만 새 승용차들이 지나다닌다. 가는 곳마다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매점이 있고 흥정도 이뤄진다. 상점도 늘었고 식당에는 창 너머로 담소하는 손님들이 눈에 띈다. 밤의 평양은 더 달라졌다. 어둠이 깔려도 전등을 켠 집들이 드문드문하더니 형광등을 켠 집들도 늘어났다. 전기사정이 좀 좋아진 모양이다. 밤이면 사라지던 자동차들도 긴 헤드라이트로 어둠을 가르며 굴러가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지난 10년간보다 더 큰 변화가 조용히 이뤄진다는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도 남쪽사람을 자연스럽게 대하고 긴장감도 없어졌다. 북 인력과 남 자본 결합해야 지난해 북한의 무역규모는 28억5670만 달러이다. 이것은 1991년 이후 최대규모이다. 이제야 겨우 동구권과 구소련에서 공산주의가 붕괴되던 1989~1990년 이전 수준으로 돌아선 셈이다. 교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공산권 시장을 잃으면서 북한 경제는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15년간이란 긴 세월을 침체의 늪에 빠져있다 헤쳐 나오려는 형국이다. 중국과 남한과의 교역이 늘면서 말이다. 한국의 연간교역규모가 5000억 달러라는 점과 비교하면 북한의 경제규모가 얼마나 영세한지 말해준다. 통일은 언제, 어떻게 올지 아무도 모른다. 이 상태에서 통일이 갑자기 찾아온다면 그 비용은 고스란히 남쪽으로 돌아온다. 남쪽도 빈부격차의 심화로 갈등구조가 점점 첨예화하고 있다. 한마디로 감당할 능력이 없다. 여기에다 민족의 동질성이 회복되지 않아 남북간의 이해의 접점도 좁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의 그 날이 온다면 집단적 마찰이 적대감으로 번져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참화가 예견된다. 하지만 통일을 마다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경제교류를 확대하여 북한경제가 자립하도록 돕는 자세가 중요하다. 북의 인력-자원과 남의 자본-기술을 결합하여 공동번영의 길로 나가는 것이다. 남은 노동집약적 산업의 해외투자를 북으로 돌리면 가격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 언어장벽이 없으니 기술-기능인력의 개발도 효과적이다. 개성공단을 서둘러 활성화시켜야 한다. 최대의 장애물은 북의 핵개발이다. 북은 폐쇄의 문을 활짝 열고 6자 회담을 조속히 성사시켜야 한다. 최근 알려진 바로는 북한이 외국투자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설 모양이다. 합영-합작 외국기업에게 내수시장을 개방하고 감세혜택도 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남북간의 교류는 민족간의 내부거래로 간주하여 남쪽 기업이 해당하는지 모르겠다. 이미 중국은 북의 최대 교역국으로 떠올랐고 현지투자도 늘리고 있다. 중국투자가 증가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 거래되는 공산품은 거의 중국산이다. 중국이 상권도 상당히 장악하고 있고 자원개발에도 활발하다. 북한경제의 중국의존도가 날로 높아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를 말한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고구려사를 침탈하려는 역사왜곡의 차원을 넘어선다. 북한을 자국영토로 편입시킬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려는 책략을 깔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한반도 북반구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 교류 늘어나면 군사적 긴장 완화 북은 해마다 식량 100만t을 외국원조에 의존해야 산다. 농업기술이 낙후하여 고질적인 식량난을 해소하기 어렵다. 비료만 원조 받아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생산성을 향상시키려면 종자개량을 추진하는 한편 농자재를 체계적으로 공급받고 재배기술을 전수 받아야 한다. 이 문제도 남과 손을 잡아야 해결된다. 무엇보다도 자영농을 전면적으로 허용해야 한다. 1988년 집단농장을 폐지한 베트남은 식량난을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3대 미곡수출국으로 발돋움했다. 올해 남북교역액이 처음으로 10억달러를 넘어선다. 왕래인원도 9만명에 이른다. 함께 일하는 남북 일꾼도 개성공단 6000명, 금강산 1500명에 달한다. 북한주민의 의식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남쪽의 경제적 우월성도 안다. 인적-물적 교류가 늘어나면 군사적 긴장도 완화된다. 서로 경제적으로 잃을 것이 많아지면 전쟁억지력을 발휘한다. 남북간의 경제교류는 긴 안목으로 보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