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밥일꿈> 고독에 맞서 열정으로 싸우는 골리아스 /허정환 삼성중공업 골리앗크레인 기사 서울 여의도 면적을 웃도는 100만평 규모의 부지에 육중하게 솟아 있는 갠트리 크레인(골리앗). 삼성중공업에는 최대 800톤의 블록을 탑재할 수 있는 골리앗 크레인 2기와 450톤 짜리 2기가 들어서 있다. 이러한 골리앗 크레인은 웬만한 아파트 30층에 해당하는 높이 88m에 폭 165m, 거기에 쓰인 ‘SAMSUNG’이라는 글자의 너비만도 6m에 달한다. 내부에 설치된 전용엘리베이터로 꼭대기에 오르는데 만도 2분 정도가 소요될 만큼 높은 곳에서 크레인 기사는 근무에 임해야 한다. 일반인들이 한 번 올라오면 오금이 저려 와 한 발짝도 내딛기 힘들다고 말하는 그 곳을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매일같이 오르내리는 이들이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 있다. 지상에 깔린 크레인 레일을 따라 웅장한 굉음을 내며 상하로 움직이는 450톤 골리앗 크레인. 크레인 기사는 육중한 이 ‘덩치’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무전기를 통해 신호수와 교신하며 옥외작업장에서 생산된 대형블록을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도크 안으로 이동시키는 업무를 10년째 하고 있다. 워낙 높은 곳에서 일을 하다보니 혹시라도 의사소통이 잘못되지나 않을까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비록 무전을 통해 신호수와 교신한다고 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방이 유리로 쌓인 운전석 공간에서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한다. 까다로운 자기 관리와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철저한 마인드컨트롤은 골리앗 크레인 기사가 짊어져야 할 짐이다. 지상 88m의 높이에서 항상 일하는 나에게 많은 이들이 놀라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높은 곳을 날아다니다 시피하지만 실제로 겁이 무척이나 많다는 것이고, 둘째는 작은 공간에서 혼자 일하기 때문에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마이크를 잡고 남 앞에 서는 것을 무척 즐긴다는 것이다. 88m나 되는 높은 곳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특이하게도 나는 지금껏 그 흔한 놀이기구, 그 중에서도 하늘열차 한 번 타 보지 못했다. 가족들과 놀이공원에 가는 날이면 그저 가방만 지키고 있을 뿐이다. 두어 평 남짓한 절대고독의 공간, 골리앗 크레인 조종실. 온 정신을 쏟아 내야 하는 만큼 고독이 스며드는 ‘틈’조차 내줄 수 없는 것이 우리 크레인 기사들이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사람 사는 게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럴 때면 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인생을 살게 해 준 골리앗 크레인이 가끔 고맙게 느껴진다. 떠오르는 태양 그리고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골리앗 크레인 기사. 나는 이 직업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일을 마치고 크레인 엘리베이터에서 빠져 나올 때면 나의 모습이 막 우주탐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우주선 승무원으로 보이는 건 아닐까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되는 건 내가 가진 내 일에 대한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0-17
- <김영호 칼럼>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를 털자(2005.10.17)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를 털자 김 영 호 (시사평론가) 흔히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고 말한다. 이런 법언도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에는 통하지 않았다. 정보기관원의 지시에 따라 판결을 내린 사례가 적지 않다. 아니면 영달에 눈이 어두워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비위에 맞춰 사법정의를 팽개치기도 했다. 물론 올곧은 법관들이 있어 꺾이기를 마다하다하고 스스로 법복을 벗기도 했다. 억압과 질곡 속에 살아야 했던 그 시절 많은 법관들이 소신대로 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는 사법부도 오랜 침묵을 깨고 부끄러운 과거를 말해야 한다. 이용훈 신임 대법원장이 취임식장에서 과거의 잘못된 재판을 인정하고 국민 앞에 반성한다는 뜻을 밝혔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인권보장의 마지막 보루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는 법의 선언에 오류가 없었는지, 외부영향으로 정의가 왜곡되지 않았는지 돌이켜보고, 권위주의 시대에 국민 위에 군림하던 그릇된 유산을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법부 수장의 준엄한 자기반성으로서 사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법원행정처가 이미 자료수집에 나섰다고 한다. 전국 주요법원에 협조공문을 보냈다는 것이다. 지난 1972~1989년 긴급조치법, 국가보안법, 집시법, 화염병처벌법 등과 관련한 판결문을 이른 시일 내에 수집해 제출하라는 내용이다. 한 세대 가까이 먼지가 소복하게 쌓인 그 판결문의 갈피 갈피에서 사법정의가 실종된 현장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더러는 피맺힌 원성이 귓가에 맴돌지 않을까 싶다. 군사독재 체재 아래서는 법의 지배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은 총과 칼로 말했다. 그 시절에도 용기 있는 이들이 있어 철권체제에 온몸으로 항거하곤 했다. 이것이 이른바 시국-공안사건이다. 정보기관이나 검찰이 온갖 고문을 자행하여 올가미를 씌우면 어떤 판관은 ‘극형’, ‘극형’을 연발했다. 정보기관원의 주문형량대로 판결했던 것이다. ‘사법살인’이란 말이 나옴직도 했다. 기관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민사재판에도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종의 이권사업으로서 말이다. 그 때는 유능한 변호사를 찾기보다는 법원출입 기관원을 통하는 것이 승소를 이끌어내는 지름길이었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인명이 한탄했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반평생을 철창에 갇혀 통한의 세월을 보냈는지도 알 길이 없다. 그 일가나 후손이 겪는 상처와 고통을 어디에도 호소할 길이 없다. 세상도 바뀌었다니 잘못된 재판을 바로 잡아달라고 법원을 찾아 억울함을 말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재심을 청구해도 청구권자와 청구요건이 극히 제한되어 피해회복의 길이 아주 좁다. 그러니 시국-공안사건은 재심을 청구하더라도 본안에 대해 판단하기도 전에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기각해 버리고 만다. 열린우리당이 재심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한다. 확정판결에 중대한 잘못이 있으면 당사자나 유족의 청구에 의해 판결을 취소하고 다시 재판을 받는 절차를 밟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구세력이 웬일인지 딴죽을 걸고 나서 난리를 핀다. 정치적 목적으로 사법부의 근간을 흔든다는 가당찮은 논리를 내세워서 말이다. 피해자의 잃어버린 명예는 영원히 매장되어도 좋고 시류에 영합한 법관의 더러운 권위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모든 분야에서 과거를 묻는데 왜 사법부만 면죄부를 받아야 하는지 자문하기 바란다. 먼저 법과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말하라. 하 숱한 세월이 흐르다보니 많은 유신판사, 5공판사들이 이미 법원을 떠났을 것 같다. 인간의 기본권리마저 짓밟고 그것을 출세의 디딤돌로 삼은 인사들이 아마 아직도 건재할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도 인적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차제에 전관예우도 철폐되어야 한다. 그 더러운 유착관계로 끌어 모은 돈더미 아래 얼마나 많은 억울한 이들의 피눈물이 괴어있는지 안다면 말이다. 법복의 권위를 내세워 국민을 미물처럼 깔보는 그 교만하고 고압적인 자세도 지탄받아야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결코 헛소리가 아니다. 사법부가 언제까지나 무오류, 불가침의 성역일 수는 없다. 경제적 약자, 사회적 소외자가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따듯한 언덕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신임 대법원장의 가식 없는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0-17
- 10월 진주의 밤은 붉게 물들고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함성 들리는 듯 “이 등이 남강 물살을 이기고 당신에게 흘러가듯, 나도 일본놈들과 싸워 이기고 당신에게 돌아가겠소.”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지키던 남편과 그를 기다리는 아내는 금강에 등을 띄워 이같은 얘기를 주고받지 않았을까. 임진왜란때의 금강은 전장에 나간 병사와 삶의 터전을 일구던 가족을 잇는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다. 10월의 진주 남강은 붉게 물든다. 400여년전부터다. 임진왜란때에는 전장에서 싸우는 병사와 가족간 애틋한 사연을 전하는 유등으로, 진주성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한 이름모를 백성의 피로, 일본군 장수를 껴안고 뛰어든 논개의 충절로 물들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때의 정신은 아직도 이어 내려오고 있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남강 위로 붉은 등이 드리워졌다. 진주시가 10월에 여는 유등축제가 관 주도의 여느 축제와 다른 점도 이같은 역사 때문이다. 한반도 구석구석 임진왜란 흔적이 없는 곳이 없지만, 임진왜란에서 진주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그 어느곳 못지 않다. 진주성 싸움은 임진난 3대 대첩중 하나이고, 기생 논개 이야기는 지금까지 생생하다. ◆10월, 진주의 밤은 빛난다 = 10월 진주는 물·불·빛의 도시가 된다. 한국관광공사도 진주를 ‘10월의 가볼만한 곳’으로 선정했다. 올해는 특히 진주남강유등축제, 개천예술제, 진주전국소싸움대회, 세계의상페스티벌, 한국TV드라마축제, 바이오벤처페스티벌 등 개별적으로도 전국 규모 이상의 축제가 10월 한달동안 함께 열린다. 이중 내달 1일부터 12일까지 남강 일대에서 열리는 진주남강유등축제는 문화관광부 지정 10대 축제로 선정된 우리나라 대표적 축제. 행사기간동안 1만5000여개의 소망등과 전문가들이 만든 5000여개의 창작등을 비롯, 크고작은 형형색색 유등이 남강을 물들인다. 유등축제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에서 왜군과 싸울 때 남강에 등을 띄웠던 것에서 유래됐다. 당시 남강 유등은 헤어진 가족간 통신수단이었으며 이순신의 ‘강강수월래’처럼 우리 군사력을 시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또 유등은 군사작전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신호였다.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12만 왜군에 의해 병사와 주민 7만여명이 산화한 뒤부터는 나라를 위해 순절한 7만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금강 유등이 띄워졌다. 축제기간 동안에는 시민들이 직접 자신의 소망을 기원하고 선인들의 충절을 기릴 수 있는 ‘소망등’을 띄울 수 있다. 폐막일까지 강물을 수놓는 소망등은 남강 일대를 물들이며 그것 만으로도 장관을 연출한다. 진주의 야경은 원래 아름답다. 진주를 가로지르는 남강에 비치는 촉석루와 진주성 비경을 비롯, 밤의 진주는 화려함보다는 은은한 아름다움을 준다. 가을밤에 더욱 운치를 더해주는 셈이다. 여기에 유등까지 더해지는 10월 진주의 밤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유등을 비롯해 촉석루, 진주성, 남강 및 진주교 등 황홀한 야경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은 촉석루 맞은편 남강둔치와 진주교, 천수교 등이다. 망진산 봉수대와 선학산을 오르면 남강을 비롯, 진주시내 전체 야경을 볼 수도 있다. ◆양귀비꽃보다 붉은 그 맘 흘러라 = ‘진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김시민의 진주성싸움과 기생 논개 얘기다. 진주성에 들어서 조선 3대 누각이라는 촉석루의 웅장함을 감상하다 아래로 내려가면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투신했다는 의암이 있다. 물이 빠지면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원래는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으로 불렸다고. 촉석루 옆에는 의기사가 있다.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혹시 ‘산홍’이라는 기생을 아는지. 논개가 임진왜란때 충절을 지켰다면 산홍은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기생이다. 산홍을 둘러싼 얘기는 이렇다. 구한말 매국노 이완용 사촌동생이 산홍에게 반해 ‘내 첩이 돼서 같이 살자’며 산홍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산홍은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의 첩을 하느니 차라리 맞아 죽겠다’고 맞섰다고 한다. 결국 산홍은 그녀의 말대로 맞아죽었다. 의기사에는 산홍이 지었다는 시도 걸려 있다. 시는 논개의 의로운 기개를 칭송하고 촉석루에서 춤이나 추고 노래나 부르는 자신을 질타하는 내용이다. 촉석루 밑 바위 한구석에는 ‘산홍’이라는 바위에 새긴 글씨가 아직 선명하다. 아직 반상의 구분이 엄연한 시기에 기생의 이름이 새겨질 정도였다면 산홍은 당시 이름난 기생이었음이 분명하다. 한국전쟁으로 불타기 전까지 국보였던 촉석루는 전쟁시에는 지휘본부로, 평상시에는 향시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활용돼 왔다. 지금은 진주시민들의 휴식터로 활용되고 있다. 촉석루에 앉아 남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트이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진주성 싸움이 임진왜란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일까. 1차 진주성 전투는 4000여명의 군사가 3만여명의 왜군을 무찔러 호남의 곡창지대와 이순신 장군의 전라우수영을 지킬 수 있었다. 이듬해 7만여명이 전사한 진주성 싸움도 비록 성은 함락됐지만 역사적 의의는 1차 전투 못지않다. 진주성 함락에 진을 뺀 왜군들이 더 이상 호남으로 진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빼놓을 수 없는 곳 = 진양호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환상 그자체다. 남강댐이 막아놓은 물 위로 섬처럼 떠있는 산들과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지리산 천왕봉 사이로 떨어지는 해는 하늘빛과 물빛을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총길이 40㎞에 달하는 호반일주도로 드라이브는 연인들에게 적합한 데이트코스. 진주성 정문으로 최근 조성한 공북문 앞 인사동도 들러볼 만 하다. 서울의 인사동과 이름만 같은 게 아니다. 이곳도 골동품가게들이 밀집해 있다. 크고작은 석물과 옹기, 공예품 등이 인도에까지 빼곡하다. 말로만 듣던 ‘돈방석’을 실제로 보고 싶다면 촉석루 앞 진주시향토박물관을 다녀오는 것도 좋다. 이반성면 대천리에 있는 경상남도 수목원도 아이들과 둘러볼만하다. 특히 최근에 지어진 산림박물관은 첨단 체험시설들을 갖추고 있어 아이들이 좋아한다. 국보 302호 영산회 괘불탱이 있는 청곡사는 빛바랜 지붕단청이 아름답다. 중국에서 가져온 이팝나무를 비롯한 수령 500년 이상의 고목들과 연꽃이 장관을 이루는 강주연못과 조선의 역성혁명 참여를 거부한 고려말 충신 정온선생의 우곡정 등도 각각 나름의 얘기를 담고 있는 진주시내 가볼만한 곳이다. 글·사진 장유진 기자 yjchang@naeil.com 여행문의 : 진주시청 (055-749-2055)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09-22
- 이야기가 있는 여행 - 경남 진주 10월 진주의 밤은 붉게 물들고 1일부터 유등축제 … 물·불·빛의 도시로 변신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함성 아직 들리는 듯 “이 등이 남강 물살을 이기고 당신에게 흘러가듯, 나도 일본놈들과 싸워 이기고 당신에게 돌아가겠소.”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지키던 남편과 그를 기다리는 아내는 금강에 등을 띄워 이같은 얘기를 주고받지 않았을까. 임진왜란때의 금강은 전장에 나간 병사와 삶의 터전을 일구던 가족을 잇는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다. 10월의 진주 남강은 붉게 물든다. 400여년전부터다. 임진왜란때에는 전장에서 싸우는 병사와 가족간 애틋한 사연을 전하는 유등으로, 진주성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한 이름모를 백성의 피로, 일본군 장수를 껴안고 뛰어든 논개의 충절로 물들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때의 정신은 아직도 이어 내려오고 있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남강 위로 붉은 등이 드리워졌다. 진주시가 10월에 여는 유등축제가 관 주도의 여느 축제와 다른 점도 이같은 역사 때문이다. 도요토미 정권이 우리 민족을 유린한 이후 한반도 구석구석 임진왜란 흔적이 없는 곳이 없지만, 임진왜란에서 진주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그 어느곳 못지 않다. 진주성 싸움은 임진난 3대 대첩중 하나이고, 기생 논개 이야기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이어내려오고 있다. ◆10월, 진주의 밤은 빛난다 = 10월 진주는 물·불·빛의 도시가 된다. 한국관광공사는 최근 이같은 진주를 ‘10월의 가볼만한 곳’으로 선정했다. 올해는 특히 진주남강유등축제, 개천예술제, 진주전국소싸움대회, 세계의상페스티벌, 한국TV드라마축제, 바이오벤처페스티벌 등 개별적으로도 전국 규모 이상의 축제를 10월 한달동안 묶어 개최한다. 이중 내달 1일부터 12일까지 남강 일대에서 열리는 진주남강유등축제는 문화관광부 지정 10대 축제로 선정될 정도로 우리나라 대표적 축제중 하나. 매년 같은기간에 열린다. 행사기간동안 1만5000여개의 소망등과 전문가들이 만든 5000여개의 창작등을 비롯, 크고작은 형형색색 유등이 남강을 물들인다. 자원봉사자만 연 1만명 규모다. 진주시는 지난해 유등축제에 30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가 780억원의 경제효과를 유발했다고 설명한다. 유등축제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에서 왜군과 싸울 때 남강에 등을 띄웠던 것에서 유래됐다. 당시 남강 유등은 헤어진 가족간 통신수단이었으며 이순신의 ‘강강수월래’처럼 우리 군사력을 시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또 유등은 군사작전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신호였다. 당시에 등을 하나 띄우면 안전하다, 두 개 띄우면 적군이 공격태세에 있다는 뜻이었다.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12만 왜군에 의해 병사와 주민 7만여명이 산화한 뒤부터는 나라를 위해 순절한 7만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금강 유등이 띄워졌다. 축제기간 동안에는 시민들이 직접 자신의 소망을 기원하고 선인들의 충절을 기릴 수 있는 ‘소망등’을 띄울 수 있다. 폐막일까지 강물을 수놓는 소망등은 남강 일대를 물들이며 그것 만으로도 장관을 연출한다. 진주의 야경은 원래 아름답다. 진주를 가로지르는 남강에 비치는 촉석루와 진주성 비경을 비롯, 밤의 진주는 화려하지 않으면서 은은 아름다움을 준다. 가을밤에 더욱 운치를 더해주는 셈이다. 여기에 유등까지 더해지는 10월 진주의 밤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유등을 비롯해 촉석루, 진주성, 남강 및 진주교 등 황홀한 야경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은 촉석루 맞은편 남강둔치와 진주교, 천수교 등이다. 남강둔치 대숲에서 바람소리를 들어보는 것도 좋다. 망진산 봉수대와 선학산을 오르면 남강을 비롯, 진주시내 전체 야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양귀비꽃보다 붉은 그 맘 흘러라 = ‘진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김시민의 진주성싸움과 기생 논개 얘기다. 진주여행에서 진주성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 3대 누각이라는 촉석루의 웅장함을 감상하다 아래로 내려가면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투신했다는 의암이 있다. 물이 빠지면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진주사람들 사이에서는 예부터 의암이 기슭 큰 바위와 붙으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원래는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으로 불렸다고. 촉석루 옆에는 논개의 넋을 기리는 의기사가 있다.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혹시 ‘산홍’이라는 기생을 아는지. 논개가 임진왜란때 충절을 지켰다면 산홍은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기생이다. 산홍을 둘러싼 얘기는 이렇다. 구한말 매국노 이완용 사촌동생이 산홍에게 반해 ‘내 첩이 돼서 같이 살자’며 산홍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산홍은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의 첩을 하느니 차라리 맞아 죽겠다’고 맞섰다고 한다. 결국 산홍은 그녀의 말대로 친일파들에게 맞아죽었다. 의기사에는 산홍이 지었다는 시도 걸려 있다. 시는 논개의 의로운 기개를 칭송하고 촉석루에서 춤이나 추고 노래나 부르는 자신을 질타하는 내용이다. 촉석루 밑 바위 한구석에는 ‘산홍’이라는 바위에 새긴 글씨가 아직 선명하다. 아직 반상의 구분이 엄연한 시기에 기생의 이름이 새겨질 정도였다면 산홍은 당시 이름난 기생이었음이 분명하다. 한국전쟁으로 불타기 전까지 국보였던 촉석루는 전쟁시에는 지휘본부로, 평상시에는 향시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활용돼 왔다. 지금은 진주시민들의 휴식터로 활용되고 있다. 촉석루에 앉아 남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트이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진주성에는 또 임진왜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지였던 진주성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임진왜란을 주제로 하는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이다. 진주성 싸움이 어떤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일까. 1차 진주성 전투는 4000여명의 군사가 3만여명의 왜군을 무찔러 호남의 곡창지대와 이순신 장군의 전라우수영을 지킬 수 있었다. 덕분에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눈부신 활약을 할 수 있었다고. 이듬해 7만여명이 전사한 진주성 싸움도 비록 성은 함락됐지만 역사적 의의는 1차 전투 못지않다. 진주성 함락에 진을 뺀 왜군들도 2차전투 이후 더 이상 호남으로 진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빼놓을 수 없는 곳 = 진양호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환상 그자체다. 남강댐이 막아놓은 물 위로 섬처럼 떠있는 산들과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지리산 천왕봉 사이로 떨어지는 해는 하늘빛과 물빛을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진양호 전망대를 찾는 사람들은 해가 완전히 떨어질 때 까지 넋을 잃고 낙조를 감상한다. 총길이 40㎞에 달하는 호반일주도로 드라이브는 연인들에게 적합한 데이트코스. 신풍마을을 비롯, 호젓한 시골 마을을 스치듯 감상할 수도 있고, 호수의 아름다움을 차창밖으로 느껴볼 수도 있다. 진주성 정문으로 최근 조성한 공북문 앞 인사동도 들러볼 만 하다. 서울의 인사동과 이름만 같은 게 아니다. 이곳도 골동품가게들이 밀집해 있다. 크고작은 석물과 옹기, 공예품 등이 인도에까지 빼곡하다. 고문서, 서화, 도자기 등을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구입할 수도 있다. 말로만 듣던 ‘돈방석’을 실제로 보고 싶다면 촉석루 앞 진주시향토박물관을 다녀오는 것도 좋다. 이반성면 대천리에 있는 경상남도 수목원도 아이들과 둘러볼만하다. 특히 최근에 지어진 산림박물관은 첨단 체험시설들을 갖추고 있어 아이들이 좋아한다. 주변 지역 학생들 소풍코스로도 유명하다. 경상남도수목원은 결혼을 앞둔 예비신혼부부들의 웨딩사진 촬영지로 활용될 정도로 경치또한 좋다. 국보 302호 영산회 괘불탱이 있는 청곡사는 빛바랜 지붕단청이 아름답다. 중국에서 가져온 이팝나무를 비롯한 수령 500년 이상의 고목들과 연꽃이 장관을 이루는 강주연못과 조선의 역성혁명 참여를 거부한 고려말 충신 정온선생의 우곡정 등도 각각 나름의 얘기를 담고 있는 진주시내 가볼만한 곳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09-22
- [내일시론]경쟁력 추락 정부가 부추긴다 정부 경쟁력이 뒤로 돌아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공약으로 ‘좋은 정부’를 내세웠고 행정자치부 업무보고 때도 ‘일 잘하는 정부’를 약속했다. 지난 5월 정부혁신세계포럼 개막식에서는 “우리가 추진하는 정부 혁신의 목표는 효율적인 정부, 투명한 정부, 분권화정부를 통해 세계 10위권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다짐했다. 정부와 공무원이 확실히 달라졌다는 것을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자주 정부혁신 토론회도 갖고 또 공직사회의 혁신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문에 그쳤을 뿐 현실은 허상으로 나타났다. 세계은행이 최근 발표한 정부경쟁력 지수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02년 50위에서 2004년 60위로 10단계나 추락했다. 노 대통령의 10위권 약속이나 참여정부 출범 이후 개혁작업을 추진해온 사실에 비추어 보면 참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환란의 위기를 겪은 전임 김대중 정부 때보다 크게 후퇴한 것으로 평가되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추락하는 정부와 국가 경쟁력 지수는 충격적 세계은행은 정부 경쟁력을 국민의 정치참여, 정치적 안정성, 정부역량, 정책의 질적 수준, 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 부패에 대한 통제 등 6개 지표로 평가했는데 국민의 정치참여 부문만 소폭 개선되었을 뿐 나머지 5개 항목에서 큰 폭으로 하락했다. 특별히 주목을 끄는 대목은 참여정부의 개혁방향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지난 정부가 ‘작은 정부, 강한 정부’를 지향했던데 반해 참여정부는 공무원 수와 고위직을 많이 늘려 ‘큰 정부, 일하는 정부’를 추진하고 ‘반 시장적’으로 규정될 만한 규제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민간의 불만이 높아가고 있는 것도 개혁방향에 대한 논란의 확산을 자초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한 경쟁력 하락은 곧 한국의 국가 신인도에도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도 분명하다. 추락하는 것은 정부 경쟁력뿐 아니다. 국가경쟁력도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점수를 매긴 국가경쟁력은 약간 오르는 듯 했으나 세계경제포럼(WEF)이 평점한 국가경쟁력은 11단계나 하락했다. 경쟁력 추락의 주된 이유는 역시 경기침체 지속, 일관성 없는 정책, 비효율적이고 예산을 낭비하는 정부, 노동시장 과다 규제, 문턱 높은 금융시장, 부정부패, 낮은 근무성실도 등이 지적됐다. 정부 경쟁력 추락의 원인과 맥을 같이 하는 것들이다. 정부 경쟁력이 추락하고서야 국가경쟁력이 향상될 턱이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같이 정부에 불리한 조사결과가 나올 때마다 정확하지 않은 자의적인 조사라고 반발한다. 언론에 대해서도 좋은 내용은 보도하지 않고 나쁜 것만 보도하여 국민을 오도한다며 남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다. 그러나 거듭되는 추락현상을 정부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자세로 경쟁력 향상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해법은 이미 제시되어 있다. 이해가 더디고 실천을 미루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불필요하게 비대해진 정부의 규모와 행정 권한을 축소하고 작고 강한 정부를 지향하는 일이다. 공공부문이 팽창하고 규제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민간부문의 경쟁은 약화되고 활력이 시들어지기 마련이다. 공무원이 많으면 밥그릇 챙겨야 할 일도 많아질 것이고 그것은 곧 규제 양산으로 나타나게 된다. 규제는 자의적 권한 행사소지를 넓혀 부정부패와 권력남용을 부르게 된다. 시장활력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대해진 정부 규모 축소하고 작고 강한 정부 지향해야 경쟁촉진과 시장 활성화를 위해서는 평등주의 사고에서 탈피하고 반 시장적 정책은 최소화해야 한다. 정책은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이 생명이다. 그래야 정책에 대한 신뢰가 쌓여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는 법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경쟁력 향상과는 동떨어진, 오히려 경쟁력 추락을 부추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이념과 과거사에 매달리는가 하면 연정 같은 정치게임으로 세월을 허송하고 있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말하는지 서민을 위한 민생을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냉엄한 글로벌 경쟁시대에서 살아남고 또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경쟁력을 길러 ‘강소국’이 되는 것뿐이다. 김진동 객원논설위원 2005-09-08
- <밥일꿈>금기의 흔적(김승교 2005.09.02) 금기의 흔적 김승교 변호사 이제는 빛바랜 옛사진이 되고 흘러간 옛노래가 되어가고 있지만, 우리 사회엔 감히 건드리기 어려운 금기가 적지 않았다. 첫째는 권력에 대한 비판에 그러했다. 지금이야 대통령이나 권력자에 대한 시비가 자유롭고 술판에 안주거리 정도로 되었지만, 한 때는 국가원수모독죄라는 세계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처벌조항까지 두었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법절차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가 고초를 치루었다는 이야기조차 심심찮게 들렸다. 그 와중에 법절차를 따진 사람은 규정에도 없는 ‘괘심죄’라는 것까지 덮어쓰기 일쑤였다고 한다. 둘째는 군사적·정치적으로 대치해온 북한에 대한 언급이었고, 셋째는 혈맹이자 우방이라는 미국에 대한 비판이었다. 55년여 분단이래 처음으로 2000년 남북 정상이 회담을 가져 6.15공동선언을 발표한 후 남북관계와 북한에 대한 인식은 뽕밭이 바다로 바뀌는 것 이상으로 변하였다. 금강산관광에 이어 개성과 백두산관광이 준비되고 있고, 학술·문화·체육·노동·농민 등 여러 부문의 민간이 공동행사를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당국간 경제·군사 등 각종 회담도 헤아리기 숨찰 정도로 열려 왔다. 이제 북한은 물리쳐야할 대결대상이 아니라 같이 협력하고 서로 돕는 동반자로 변해 있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2001년 미국의 상징이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이 무너진 9.11 사건 후 패권주의를 노골화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비판은 세계 어디랄 것 없이 비등해 있고, 남북관계의 전환이 가져온 안보환경의 변화는 주한미군의 존재마저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로써 북한과 미국에 대한 세간의 금기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랜 독재와 군사정권이 만들어놓은 금기가 이제 봄눈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들에게는 근 몇 해 동안의 변화가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모양이다. 특히 과거 독재와 냉전에 편승했거나 길들여졌던 사람들 상당수는 여전히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며 옛사진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학자가 한 인터넷언론에 기고한 “6.25전쟁은 북한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 “맥아더는 38선 분단집행의 집달리이자 전쟁광”이라는 등의 칼럼 내용에 대한 사회 일각의 과도한 지적과 비난에 접하여 새삼 느낀다. 그는 북한과 미국에 관한 금기가 서슬퍼렇게 작동하던 시절에도 안락과 영달을 뒤로하고 평생을 그에 도전해왔던 사람이다. 올해 환갑을 맞은 그는 독재와 냉전의 얼음장 밑에서도 자주와 평화, 통일을 이루는 내일을 노래하며 금기에 저항했던 사람이다. 그 내용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라도, 그냥 그런 의견도 있겠거니 쉽게 보아 넘길 수는 없었을까. 죽어가는 금기를 그들에게서 본다. 세월이 흘러 관이 아닌 민간에서 뜻밖의 곳에서 발견되는 금기의 흔적을 보며 세상의 변화를 실감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얼마나 더 지나야 금기의 흔적마저 사라져 사람들의 뇌리에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일이 생겨나지 않게 될까를 그려본다. 2005-08-30
- “산재근로자의 등불 될 것” “산재 환자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옆에서 조언도 하고, 등불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근로복지공단(이사장 방 용석)이 벌이고 있는 산재보험 TV 캠페인에서 장애를 가진 공단 직원이 직접 출연해 관심을 끌고 있다. 주인공은 근로복지공단 서울 동부지사 성동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선영 씨(32·사진) 이씨는 원래 뮤지컬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응원단장과 치어리더를 도맡아 할 정도로 끼가 있었으며, 노래도 잘 불렀다. 하지만 그녀에게 불행이 찾아 온 것은 고등학교 졸업반 때였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오른쪽 팔을 잃었다” “한쪽 팔을 잃고 나서 제 인생이 바뀌게 됐다” 졸지에 장애인이 된 그녀는 사고가 있고나서 외출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4년을 허송세월하고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주변의 친구들도 사귀면서 새롭게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과 함께 근로복지공단에 들어 온 이씨는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산재근로자들의 어려움을 함께 돌보며 지내고 있다. 이씨는 “제가 그동안 장애를 몸소 느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산재를 당한 분들의 아픔을 조금은 안다”면서 “이분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한편 근로복지공단은 이씨 등이 출연하는 TV 캠페인을 통해서 산재환자를 위해 ‘찾아가는 서비스’를 홍보할 예정이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0-05
- 증금 2 “고통스러울만큼 변화 매진했다” 양찬석 기획부문장 증권금융 양찬석 기획부문장(사진)은 지난해 6월 홍석주 사장이 취임한 이후 증권금융에서 가장 바빴던 사람 중 한명이다. 증권금융이 49년동안 변모했던 것보다 더 많은 변화를 단기간내 이루도록 기획해야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양 기획부문장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들이 자신감으로 돌아왔다”고 강조했다. - 증권금융은 왜 변해야했고, 어떻게 바뀌었나 사실 증권금융은 창사 이후 반세기동안 격동의 세월을 보냈지만, 변화와 혁신이라는 점에선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다. 향후 증권금융이 발전하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했다. 홍 사장 취임 이후 강하게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고, 획기적으로 바뀌고 있다. 대표적으로 경영관리시스템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1년간 노버스 컨설팅과 함께 공동작업을 펼쳐 종합수익관리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던 원가계산이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이뤄지면서 수익성분석이나 경영의사결정에 신뢰성이 높아졌다. 금리결정도 한층 합리적으로 변했다. 경영관리시스템만큼은 여의도 증권업계에 1위권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 내부 분위기도 많이 변했다는데 체인지 파일럿팀이 본사와 영업점을 수시로 방문해 문제점을 발굴하고 관행들을 바꾸는 혁신전위조직 역할을 하면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부문장과 팀장 등이 전체적으로 젊어져 한층 역동적이고 도전적인 분위기가 조성됐다. - 영업분야 분위기는 어떤가 솔직히 과거엔 (영업부문에서) 여수신상품을 파는데 크게 신경 쓰지않는 분위기가 있었다. 영업실적이 저조해도 전체 매출엔 그다지 영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부턴 신상품이 쏟아내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고객인 증권사나 운용사를 매일 찾아다니며 영업하고 있다. 고객들이 놀랄 정도다. 수탁분야 경쟁자인 은행쪽에서 놀라서 대책마련에 나서고 있다. - 어려운 변화의 과정만큼 대가도 있어야하지않나 정확한 평가와 보상체계도 갖추려한다. 부서와 팀, 개인별로 실적을 평가하고, 이에따라 성과급을 차등지급하는 방안을 실시한다. 연말께 처음 차등지급할 예정인데, 전체 상여금 800% 가운데 400%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평가결과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날 것으로 본다. 또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절감된 비용의 절반을 직원 능력개발을 위한 연수비용으로 쓰기로했다. - 올해초 강도높은 구조조정이 있었지않나 IMF 이후 세차례에 걸쳐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한 결과 300여명에서 200여명으로 대폭 줄었다. 인력부족과 변화과정이 겹쳐 정말 고통스럽게 일을 해야만했다. 퇴근시간이 늦어지는건 다반사였다. 지난 6월부터 해피워크 프로그램이란 이름으로 오후 7시면 강제로 퇴근하는 제도를 도입했을 정도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0-05
- “산재근로자의 등불이 될 것” “산재 환자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옆에서 조언도 하고, 등불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근로복지공단(이사장 방 용석)이 벌이고 있는 산재보험 TV 캠페인에서 장애를 가진 공단 직원이 직접 출연해 관심을 끌고 있다. 주인공은 근로복지공단 서울 동부지사 성동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선영 씨(32·사진) 이씨는 원래 뮤지컬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응원단장과 치어리더를 도맡아 할 정도로 끼가 있었으며, 노래도 잘 불렀다. 하지만 그녀에게 불행이 찾아 온 것은 고등학교 졸업반 때였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오른쪽 팔을 잃었다” “한쪽 팔을 잃고 나서 제 인생이 바뀌게 됐다” 졸지에 장애인이 된 그녀는 사고가 있고나서 외출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4년을 허송세월하고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주변의 친구들도 사귀면서 새롭게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과 함께 근로복지공단에 들어 온 이씨는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산재근로자들의 어려움을 함께 돌보며 지내고 있다. 이씨는 “제가 그동안 장애를 몸소 느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산재를 당한 분들의 아픔을 조금은 안다”면서 “이분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한편 근로복지공단은 이씨 등이 출연하는 TV 캠페인을 통해서 산재환자를 위해 ‘찾아가는 서비스’를 홍보할 예정이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0-05
- 여 해경 71% “보건휴가 사용한적 없다” 대한민국 여성 해경의 처우개선이 개선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공무원들은 매월 1회 보건 휴가를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해경 71%는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 해경들은 또 업무 분장 시 남·여경 차별도 심각하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79%가 ‘차별이 있다’고 응답한 반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은 18%에 불과했다. 이 같은 사실은 한나라당 김명주 의원(통영·고성)이 지난 8월22일부터 9월3일까지 2주간 전국여성해양경찰 23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결과 확인됐다. 이번 설문조사는 편지를 이용했으며, 234명 중 130명이 응해 55%의 응답률을 보였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 해경들이 ‘보건휴가’를 이용하지 않는 이유는 ‘상사의 눈치 때문에’(60%), ‘사용의 필요성을 못 느껴서’(16%), ‘과중한 업무 때문에’(7%) 순으로 대답했다. 이러한 결과는 남성위주의 직장 문화 속에서 법적으로 보장된 여성들의 권리 행사가 현실적으로 불가한 것으로 확인해 준 것이다. ‘여 해경이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일하기 위해 개선되어야 할 과제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여성에 대한 편견 해소’(42%), ‘여성편익시설확충’(36%), ‘적절한 업무분장’(14%)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함정근무자의 경우 가장 힘든 점으로는 ‘여성편의시설 부족’(47%), ‘여성에 대한 편견’(40%), ‘격렬한 업무강도’(3%) 순으로 응답했다. 김 의원실 관계자에 따르면 선상의 경우 여성 화장실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는 등 편의시설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전했다. 한 여경은 여성당직실에 세면대 비치를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명주 의원은 “오랜 세월 지속되어 온 남성위주의 경찰조직 문화가 이제는 좀 더 성숙한 단계로 발전되어야 한다”며 “최근 여성경찰관의 증가추세에 맞춰 이들의 인권과 품위유지에 필요한 기본적인 근무환경이 빠른 시일 내 개선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백왕순 기자 wspaik@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5-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