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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로 칼럼>한민족 디아스포라의 기억(심재웅 2005.08.03) 심 재 웅 한국리서치 상무이사 1945년 광복 기억을 되새기고 지난 60년을 돌아보기 위한 여러 가지 기념행사가 국내에서 기획되고 있지만 눈을 해외로 돌려보면 광복60주년과 국권상실 100주년을 바라보는 해외동포사회는 다소 차분한 느낌이다. 따지고 보면 한반도 이외의 전 세계에 600만명으로 추산되는 해외동포사회의 기원은 1905년의 국권상실 무렵일 것이다. 1905년 국권상실의 시점을 전후하여 많은 이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도 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이 후 식민지 지배의 와중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중국과 중앙아시아, 사할린, 그리고 일본 등지로 이주하여 흩어져 사는 삶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원래 고향을 떠난 유대인들의 이산을 일컫는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지난 100년 동안 한민족의 흩어져 사는 삶은 한민족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로 부를 수 있다. 지금은 한국기업 지사, 한국인 유학생 그리고 한국에서 온 여행객을 전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우리가 세계화를 외치기 이전에 디아스포라의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살았던 미주지역의 한 작은 도시에서도 한국인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자의 3세, 한국전쟁이후 정착한 교민, 60년대 말과 70년대에 기술이민으로 정착한 이들, 외국가정에 입양된 후 장성한 한인들, 국제결혼으로 낯선 땅에서 새로운 가정을 이룬 사람들, 타국에서 사업으로 자수성가하여 기반을 이룬 이들, 그리고 1.5세와 2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역사속으로 물러나는 1,2세대 미주지역은 그나마 나은 편일 것이다. 다른 지역에 이주한 동포들은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등 세계사의 거센 소용돌이속에서 매서운 시련을 겪고도 광복이후 한민족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고 디아스포라의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게 된 경우도 있다. 이제 길게는 1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1세대, 2세대는 흩어져 살았던 삶의 기억을 안고 역사속으로 물러나는 시점에 있고 3세대, 4세대는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정체성과 소수민족출신의 이민자로서 적응해야 하는 현실적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세대가 되었다. 우여곡절끝에 세계화의 경쟁에서 그나마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한 우리가 한민족 디아스포라 100주년을 맞이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무엇보다도 해외동포사회의 흩어져 사는 삶의 기억들이 소리없이 사라지기 전에 한민족 역사의 소중한 기록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오사카와 연해주, 그리고 사할린이든 또는 비교적 최근에 이주한 독일과 아르헨티나이든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기억을 기록에 담자는 것이다. 비록 연로하긴 하지만 디아스포라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1세대, 2세대의 일기와 편지 그리고 비망록과 같은 자료와 흩어져 사는 삶의 생생한 체험을 담은 생애사(life history)와 구술사(oral history)를 채록하여 보존하자는 것이다. 필자는 이 사업을 전 세계에 있는 한민족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제안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정부와 기업 그리고 민간단체가 한민족 디아스포라 기록사업의 기금을 조성하여 현지 한민족 공동체의 3세대, 4세대의 청년들이 연로한 1세대, 2세대의 기억을 채록하고 풀어 쓰는 프로젝트를 실행할 것을 제안한다. 1세대 등의 삶 채록·보존해야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생성되는 기억과 기록의 외형적 산출물도 역사적 가치가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한민족 공동체의 새로운 세대가 앞서간 세대의 삶을 되새기고 소수민족으로서의 당당한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안기부 불법도청 테이프의 출처와 내용을 둘러싼 의혹과 공방으로 광복 60년, 국권상실 100년의 여름이 어수선하기만 한 요즈음, 어떤 디지털 카메라의 광고는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고 주장하지만 필자는 역설적으로 ‘기억은 기록의 어머니이다’라고 주장하고 싶다. 지난 100년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기억이 더 이상 역사의 흔적으로 사라지기 전에 누군가가 나서서 보존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05-08-02
- [책소개]상극의 틀에서 ‘상생’은 한갓 말장난 상생의 문화를 여는 길 안운산 지음 대원출판 /9800원 정치권에서는 말할것도 없고 경제계 등에서도 ‘상생’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한명은 이기고 한명은 지는 이분법적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서로 이기는 방법을 찾자고들 흔히 얘기한다. 상생이라는 말은 이제 일상적인 용어가 된 셈이다. 물론 상생이라는 말이 많이 쓰인다는 것은 그만큼 ‘상생’이 한국사회에서 말처럼 쉽게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역설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원래 ‘상생’이라는 말은 민족종교인 증산도에서 비롯된 말이다. 상생의 정치, 상생의 문화, 상생의 시대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상생’이라는 말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증산도에서 얘기하는 ‘상생’의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원출판에서 최근 발간한 ‘상생의 문화를 여는 길’은 증산도 안운산 종도사가 증산도의 창시자인 강증산(1871~1909)의 행적과 어록을 모은 증산도 도전을 근거로 증산도의 이념중 하나이자 최근 우리사회의 화두인 상생을 말하고 있다. 안 종도사는 “재주가 많은 분들이라 그런지 입만 떼면 상생을 얘기하지만 이 상극의 틀에서 그게 잘 되겠는가”라며 “상생은 하늘과 땅,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득한 원망이 사라질 때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입으로만 상생을 외친다고 상생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증산도에서는 “인류가 살아온 지난 선천 상극의 세월은 가혹한 경쟁과 대결의 운명 속에서 하루도 전쟁의 고난과 죽음의 비극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선천이라는 우주 봄 여름의 계절을 마감하고 인류의 진정한 새역사를 열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각, 가치와 제도, 삶의 목적 등 모두 상생의 도로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는 특히 요즘 한반도 내·외 정세를 예견한 듯한 얘기들이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이를테면 6자회담 정세를 예견한듯한 내용이라든지, 행정수도 이전을 예언한 내용 등이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를 다섯 신선이 바둑판을 둘러싼 형세로 보는 ‘오선위기’ 대목을 보자. “두 신선은 판을 대하고 두 신선은 각기 훈수하고 한 신선은 주인이라. 주인은 어느 편도 훈수할 수 없어 수수방관하고 다만 손님 대접만 맡았나니 연사에 큰 흠이 없어 손님 받는 예만 빠지지 아니하면 주인의 책임은 다한 것이니라, 바둑을 마치고 판이 헤치면 판과 바둑은 주인에게 돌아가리니…” 이에 대해 저자는 “지난 100년간의 국제정세는 한반도(남북한)를 사이에 두고 4대 강국이 세력을 다투는 과정”이라며 “최근 6자회담도 남북한을 빼면 결국 4대 강국의 씨름판”이라고 설명한다. 또 증산도 도전에는 “씨름판대는 조선의 삼팔선에 두고 세계 상씨름판을 붙이리라. 만국재판소를 조선에 두노니 씨름판에 소가 나가면 판을 걷게 되리라”라는 대목이 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에 의한 소떼 방북으로 휴전이후 큰 변화없이 흘러가던 남북 관계가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았다”며 100여년전 증산도 도전에 이같은 내용이 이미 예견돼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강증산 사후인 해방후에 ‘삼팔선’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알려졌을텐데도 증산도 도전에 ‘삼팔선’이 언급됐다는 점은 이채롭다. 안 종도사는 이밖에 “도전에는 또 ‘만국활계 남조선(萬國活計 南朝鮮)이요 청풍명월 금산사(淸風明月 金山寺)’라는 글귀가 있는데 상제님 당시에는 없었던 남조선 북조선이 생기지 않았는가”라며 “청풍명월은 충청도를 가리키고 금산사는 미륵불이 머물 곳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최근 충청권으로 행정수도가 이전된다는 것을 거론하는 얘기”라고 해석한다. “요새 보면 정치인들도 상생의 정치를 해야 한다 하면서 상생 소리를 외치고 다닌다. 상생의 정치를 할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주위 환경, 여건이 허용돼야 상생도 이뤄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대자연의 이법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상극(相剋)의 틀에서 상생은 한갓 말장난에 불과하다. /장유진 기자 yjchang@naeil.com 2005-06-27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종찬 전 국정원장 독립운동가문의 후손으로 상하이에서 태어나 정계에 입문, 국회의원과 장관직·인수위원장과 국정원장까지…. 81년 종로구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을 때부터 따지면 정치와 연을 가지고 살아온 게 20년 세월은 족히 넘는다. 강산이 두 번은 변했을 시간이니 이 정도면 정치를 바라보고 인생을 바라보는 관조섞인 혜안이 생길 만하다. 이종찬 전국정원장에겐 바로 그런 류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이 전원장을 만나 최근의 근황과 정국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들어봤다. 어른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라야 할 것도 아니지만, 무조건 늙은이 잔소리 정도로 취급할 일도 아니라는 점을 새삼 새기면서…. ◆남이 못할 때 국민목숨 살리는 게 정보기관 몫 = 아직도 전국정원장으로 불리는 그이기 때문에 최근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 개혁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하고 국민을 감시하자는 건 아니죠. 내가 국정원장할 때 (비정치적 방향으로) 상당히 개혁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국정원을 너무 무능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해 10월 6일, 케네스 버글이라는 영국 사람이 이라크 알카에다에게 납치됐습니다. 이때 영국 정보기관이 총동원됐는데 당시 카다피 대통령 아들이 영국에 유학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내곤 그 사람을 설득했죠. 결국 그 아들이 아버지한테 가서 말했고, 아버지는 강경파한테 버글을 죽이지 말라고 했어요. 알 카에다가 죽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자 영국쪽에서 그 남자는 영국 사람이 아니고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여권도 (아일랜드 여권으로) 바꿔버렸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살아왔거든요. 그게 정보기관이 하는 일이에요. 그거 어떤 시각에서 보면 불법일 수도 있는 것인데 정보기관이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이 전원장이 보기에 지금의 국정원은 ‘개혁’이라는 것을 거쳐서 새로운 정보기관으로 다시 태어났다기보다 새로운 관료집단으로 커가고 있다. 국정원의 권위주의는 해체시키고 해외정보를 강화하겠다던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국정원 사람들에게 이라크에 가라고 하면 내가 왜 가느냐고 합니다. 젊음을 그 쪽에서 불태울 수 있는 우수한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은 무슨 조직을 뜬구름처럼 만들고 경험있는 사람을 다 없애버렸습니다. 이건 무능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해체해버리는 게 낫습니다.” 사실 이 전원장은 고영구 전원장이 취임하기 전에도 이런 비슷한 충고를 해주었다. 김승규 신임원장에게도 같은 얘기를 해주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지근거리에서 바라본 권력 = 이 전원장은 정치인생이 긴 만큼 그가 흥망성쇠를 바라본 권력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특히 그는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집안 내력 때문에 권력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많은 편이었다. 최근 벌써부터 노무현 대통령의 레임덕 얘기가 나오는 상황에서 그에게 권력과 레임덕에 대해 물었다. 는 “레임덕의 시초는 정권 실세들의 부패”라고 했다. “DJ 때 보면 정권 실세들이 제일 먼저 부패와 유착이 되고 권한을 행사하고 뭐든지 좌지우지 하는 자의적인 것이 생기면서부터 레임덕이 옵디다. 그 때 한참 권노갑씨가 어쩌고, 박지원씨가 어쩌고 하는 말이 많았죠. 결국 권력실세의 타락이 레임덕의 시초라고 보면 됩니다. 계속해서 레임덕이 오는 텀이 빨라지고 있는데 권력실세의 타락이 빨라졌다고도 볼 수 있고 5년 단임제의 한계가 좀 더 빨리 드러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죠.” 그럼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레임덕일까. 노 대통령은 본인 스스로 ‘시작할 때부터 레임덕이었다’고 말했지만 노 대통령이 말한 레임덕의 뜻은 집권당의 힘이 처음부터 약해서 일이 제대로 안됐다는 의미였다. 이 전원장은 거기에 대해선 이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광재는 뭐요. 행담도가 뭐고.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 아닙니까. 탄핵 때문에 빈 집에 소가 들어왔다고 그래서 흥청망청하고 잔치를 벌여라 하면서 나온 일이라고 봐야죠. 문제는 레임덕이 오면 분열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너는 왜 많이 먹냐 적게 먹냐 싸우게 되고, 아부하는 놈은 많이 생기고 바깥에서 욕하는 사람도 생겨나죠. 결국 동심원이 커지면서 지지세력이 분열되는데 노 대통령이 그런 길을 걸을까 걱정입니다. 스스로 이러면 안 된다고 다잡고 하면 레임덕이 아니고 그냥 밀고 나가면 정말 레임덕이 된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우중씨는 경제쓰나미에 공중분해 = 김우중 전대우회장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DJ 시절 일부 언론에선 당시 잘나가던 김우중씨의 든든한 정치적 그늘이 바로 이종찬 전국정원장이라고 할 정도로 김씨와 이 전원장의 사이는 돈독했다. 최근 김 씨의 귀국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을 그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김우중씨는 제 죽마고우이고 김씨 때문에 가슴이 아픈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IMF는 경제 쓰나미였는데 김씨는 그것에 휩쓸려서 공중분해가 됐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일단 나가 있지를 말았어야 옳았다는 것이고, 나갔다가도 자기 부하들이 재판받는다 하면 들어와서 나를 처벌해라 했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지금처럼 코너로 몰리지 않았을텐데 ….” ◆선진화포럼 만들 것 = 이 전원장은 요즘 국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한국경제 및 선진화를 논할 수 있는 ‘한국선진화 포럼’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 나라 경제가 아직도 정부가 앞장서는 식인데 시장경제를 올바르게 정착시켜서 올바른 국가정책도 제시, 기업이 앞장서게 만드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장’이다. 남덕우 전 경제부총리가 이사장, 진념 전 장관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또 남북문제를 3화주의(세계평화, 민족화해, 국민화합)의 관점에서 연구한 책도 쓸 준비를 하고 있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사진 이의종 기자 2005-07-19
- “타지마할을 무슬림에게” 인도의 한 이슬람단체가 세계적인 문화유산 타지미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고 13일 BBC가 전했다. 인도 이슬람 수니파의 헌납재산(와크프)관리이사회는 우타르 프라데시 주에서만 10만건 이상의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데, 타지마할 역시 무슬림의 묘로서 와크프의 하나이므로 자신들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타지마할은 17세기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그의 아내 무무타즈 마할이 죽자 야무나 강변에 22년에 걸쳐 그녀의 무덤으로 조성한 건물이다. 황제 역시 사후에 왕비의 곁에 함께 묻혔는데 지금은 매년 수백만 명이 찾아오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수니파 헌납재산 관리이사회의 하피즈 우스만 의장은 “관리는 지금처럼 인도고건축관리청(ASI)이 계속 맡겠지만, 입장료수입에 대해서는 주정부 및 연방정부와 협의하여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1920년부터 타지마할을 관리해온 ASI측은 고등법원에 이의를 제기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수니파헌납재산관리이사회 측은 소유권 주장 이유를 “타지마할을 더욱 세심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만약 타지마할이 수니파 재산으로 판결나면 입장료 수입액의 7%를 가지게 된다. 현재 타지마할을 관리하는 ASI는 연간 약 300만 명의 관광객으로부터 1억9000만루피(약 48억원) 이상의 입장료수입을 거두고 있다. 이런 분쟁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무굴제국의 샤 자한 황제 자신이 와크프의 관리인이었기 때문에 타지마할도 당시에는 분명히 와크프였으며 과거 타지마할 당국은 건물을 관리하고 참배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타지마할 주변의 80개 마을로부터 세금을 거두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역사학자 이르판 하비브는 “무굴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샤 자한의 와크프 관리직을 누가 승계했는가. 오랜 세월 동안 아무도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갑자기 누군가가 그 관리직의 승계를 주장한다고 하여 어떻게 타지마할이 그의 소유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김광호 리포터 holhol@naeil.com 2005-07-14
- <밥일꿈>사랑하는 사람의 눈빛(박경석 2005.07.14)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 우리투자증권 이촌동지점 박경석 부장 지금은 중학교 2학년 학부형이지만 16년 전에는 억누를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연애하던 신입사원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복학 4학년 때, 현재의 아내를 만나 열애하던 시절이었지요. 둘만의 여행을 하고 싶다고 늘 생각하며 함께 놀러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던 때였습니다. 어느 날 회사에서 무주에 하계휴양소를 운영한다는 공문을 보았고 그 공문을 본 전 무지개를 보는 워어즈워드 처럼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퇴근 후 공문을 가지고 손 살 같이 아내에게 달려가 무주의 덕유산을 놀러가자고 했고 아내도 신나라하며 좋아했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장인어른 되실 분이 무척이나 완고 하셔서 도대체 허락해 줄 지가 걱정 된 것이지요. 그때 만 해도 젊은 남녀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이 그리 흔하지 않은 때였었습니다. 우리들은 무슨 쿠테타라도 모의 하는 참모들처럼 머리를 맞대고 공모하였지만 좋은 수가 안 떠올라서 결국은 이실직고 하고 허락을 얻기로 하였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찾아 뵙기로 약속을 정하고 아내에게는 내가 이야기 할 때 지원사격을 아끼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 하였습니다. 어느 새 결전(?)의 금요일이 다가오고 퇴근을 하던 저는 길에서 고등하교 동창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날의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친구녀석이 대뜸 한다는 말이 “ 그런 말 하러 가면서 맨 정신에 하러가는 놈이 어디 있냐..한잔 하고 가야지” 하며 사무실 근처 삼겹살 집으로 나를 이끌었고 어떨 결에 끌려간 저는 소주 각 2병에 이차로 맥주 각 3병의 정량을 초과한 음주 상태로 장래의 처가집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가는 동안 알코올의 과다로 인해 저의 가슴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노래소리까지 흥얼거리며 가게 되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누르자 장모님이 뛰어 나오시며 “ 어디갔다 오나 저녁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다 늦게 식사하고 지금 화나 계시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술기운도 사라지고 저의 가슴은 하계휴양소 운영 소식을 들었을 때 보다도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있었습니다. 거실로 들어가 장인어른의 얼굴을 보자 잔뜩 먹구름이 낀 모습이었습니다. “한잔했나?” 장인어른의 첫마디에 “ 네” 하며 머뭇거리자 “ 그래 할 이야기가 뭔가” 하시며 숨 쉴 틈도 안주며 몰아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거의 기절할 정도로 심장 박동이 빨라져서 아무 이야기도 못하자 “ 너무 늦었네…다음에 이야기 하세” 하시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셨고 그저 멍하니 서있던 저는 술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여행예정일이 하루 앞둔 날 장인어른은 나를 집으로 오라고 전화하셨고 하시는 말씀이 “ 이야기 다 들었네….난 자네가 요즘 사람 같지 않게 풍류를 아는 것 같아 좋아. 나도 젊은 시절에 유랑극단도 따라 다녀보고 가수 한다고 여기 저기 기웃대 보기도 했네…젊은 사람기분을 알지. 풍류를 아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 남을 실망시키지도 않고” 하시며 저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당당하게 여름휴가를 함께 떠나게 되었고 회사직원들이 우굴대는 그곳에서 닭살 커플로 이름을 날리며 신나게 놀고 왔습니다. 세월은 흘러 장인어른께서는 지병인 간경화로 앓아 눕게 되셨고 그런던 어느날 간호하던 저를 옛날에 그 눈길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옛날에는 그 눈빛의 의미를 잘 몰랐는데 그때서야 저는 그 눈빛이 말하는 바를 알게 되었습니다.그건 사랑하는 딸을 자네에게 부탁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눈길로 바라본지 얼마 안되어 장인어른께서는 다시는 못 올 곳으로 떠나 가셨지만 우리의 여행을 허락하시고 병석에서 나를 바라보시던 그 눈빛은 저의 가슴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은 가슴속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오랫동안 남아 있나 봅니다. 2005-07-14
- 7면용 미국 정책두뇌집단들, 부시행정부 대북정책바꾸라 압력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이 북한을 인정하고 존중하면 7월에라도 6자회담에 복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은 강온파의 내부대립으로 쉽게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부시행정부에게 북한과 보다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협상과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미국 정책두뇌집단들의 ‘말의 압력’이 늘어나고 있는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우드로윌슨센터(본지 16일 전문 보도)에 이어 존스홉킨스대 존 오버도퍼 교수가 노틸러스 연구소에 기고한 글도 같은 맥락이다. /편집자 주 발문 : 선택해보자구 다음 중 하나로 1. 미국인들은 한국과 북한을 영국과 프랑스처럼 각각 별개의 나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과 북한은 원치않는 분단국일 뿐 한국전 당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미국의 위협에 자극을 받았던 북한은 1960년대부터핵무기 개발에 집착. 한국도 1970년대에 비밀리에 핵개발에 착수했으나 미국정부는 “핵무기와 한미동맹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했는데 당시 미국측 대표 가운데 지금의 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도 포함. 2. 6자회담의 다른나라들에 비해 미국이야말로 북한 핵무장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 나라다. 그러나 부시정부의 온건파와 강경파간 내분으로 인해 북핵정책은 정체상태에 빠져 해결능력을 잃어버렸다. 겉으로는 외교적 해결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협상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있다. 북핵문제가 이라크 전쟁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을 뿐만 아니라 강경파들이 협상의 진전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제목 : 부시행정부가 북한지도부 포용해야 북핵문제 풀린다 부제 : 북한핵무장에 가장 겁내야 할 미국은 강온파로 나뉘어 손놓고 있어 6자회담은 이라크전에 몰두한 미국이 다른나라에 공 떠넘긴 것 본문 : 한반도 핵위기는 그 뿌리가 아주 깊기 때문에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먼저 한국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미국인들은 한국과 북한을 영국과 프랑스처럼 각각 별개의 나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과 북한은 2차대전 후 뜻하지 않게 돌발적으로 분단되었을 뿐 사실 하나의 나라다. 한국은 세계사에서도 드물 정도로 오래된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가진 나라다. 7세기 후반 삼국통일을 이룩한 후 20세기 중반까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정부를 가진 나라로써 그 정체성을 수천년 동안 지켜왔다. 또 한국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열강으로 둘러싸인 위험한 지역에서 수많은 외침을 받으며 힘든 역사를 살아온 만큼 국민성도 아주 강인하다. 지금도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 최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한반도에 핵위기가 불어 닥친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을 비롯한 주변 열강들의 책임있다. ◆국방장관 럼스펠트는 한국의 핵무장 포기시킨 장본인= 2차대전 말, 히로시마원폭 투하 직후 만주의 소련군이 한반도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에 이어 일본까지 점령할 것을 우려하여 북위 38도 이북에 대한 소련의 점령을 인정하고 한반도 남쪽에 대한 점령권을 확보하였다. 이 한반도 분할점령은 미국과 소련의 임시조치였지만 결국 오늘날까지 지속되 말았다. 전 미국외무부관리였던 그레고리 헨더슨이 1974년 지적했던 것처럼 미국은 “한국인들의 정서와 국내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한국을 두 조각 낸 무거운 책임”이 있다. 1949년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이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고 1950년 미국무부장관 딘 에치슨이 “한반도를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에치슨라인을 발표한지 6개월도 되지 않아 한반도에는 전쟁이 발발하여 3년이나 지속되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1953년 휴전으로 중단되었지만 또 다른 불안을 잉태했다. 한국전 당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미국의 위협에 자극을 받았던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역시 미국의 동맹의지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1970년대 들어 비밀리에 핵개발에 착수했다. 이를 눈치챈 미국정부는 한국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핵무기와 한미동맹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했는데 당시 미국측 대표 가운데 지금의 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혐오했던 소련 중국도 포용했는데 북한은 왜 못하나= 2002년 여름, 북한이 우라늄농축에 필요한 원심분리관을 구입했다는 정보를 파키스탄으로부터 확보한 미국은 북한이 협상을 어기고 우라늄핵프로그램을 개시했다고 믿기에 이르면서 북핵2차위기가 시작됐다. 2002년11월 필자가 북한을 방문하여 농축우라늄에 대해 질문했을 때 북한 당국은 이에 대한 어떤 부인도 하지 않았다. 북한당국은 “다음 3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미국의 핵우려를 깨끗이 해소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1.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할 것. 즉 북한을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하고 공격이나 체제전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2. 북한의 경제발전을 방해하지 말 것.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경제지원도 바라지 않으니 미국도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를 철회할 것. 3.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북한을 핵무기나 혹은 다른 수단으로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평양에서 돌아온 방문단 일행은 미국정부에게 “즉시 협상에 착수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부시정부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려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정부내에는 “포용정책은 협상을 파기한 ‘나쁜 행동’에 대한 ”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이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002년 11월14일 북한에 대한 중유공급중단을 발표하였다. 부시정부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우물쭈물하면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부시정부의 초기대응 실패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협상론자들과 강경파 사이의 의견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 미국정부가 이라크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핵문제가 이라크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부시정부로서도 완전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북한의 이웃국가들을 북핵문제 해결에 동참시킨다”는 아이디어였는데 이것이 6자회담으로 발전되었다. 양측의 의견접근은 빠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올바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3차회담에서 미국의 제안을 환영한다고 밝혔던 북한은 돌연히 우라늄농축프로그램 개발혐의를 부인하면서 미국을 비난하고 6자회담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결국 2005년 2월10일 핵무기 보유를 공식선언하였고 3월31일에는 핵보유국으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을 둘러싼 어느 나라도 북한의 핵보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모두 북한과 제각기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이 점도 북핵해결의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먼저, 한국의 경우 이제 유권자의 과반수가 한국전쟁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40세 이하로 바뀌었다. 이들은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을 위험한 나라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형제국가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 북한의 공격을 두려워하면서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는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 일으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중국에게 있어서 북한의 핵보유 자체는 큰 위험이 아니다. 다만 북한의 핵무장이 한국, 일본, 특히 대만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 한편 북한의 급작스런 붕괴도 바라지 않는다. 수십만의 난민이 국경을 넘어오는 사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이 지금처럼 일종의 완충지대로 존속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핵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기울이면서도 북한에 대한 어떤 제재나 위협에도 반대하고 있다. 일본의 입장은 상당히 이중적이다. 2002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김정일을 만났던 고이즈미는 협상을 지지하는 한편 미국에게도 대북 포용정책을 촉구 2005-06-20
- [민선자치 10년, 지방분권 갈길 멀다]인터뷰 - 이의근 경북도지사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인데 우리 지방자치도 많은 시행착오속에 발전을 거듭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전히 각종 법적 제약과 독조조항 등이 많아 3할 자치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3선 광역단체장인 이의근 경북도지사는 지난 민선 10년을 직접 경험한 소감을 털어놓았다. 이 지사는 지방자치발전 중 민선단체장의 역할에 대해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풀뿌리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려면 완전한 지방자치의 선결과제인 돈과 사람에 대한 권한을 풀어야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지사는 “수치상 상당히 개선된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돈과 사람에 대한 권한이 중앙정부에 집중돼 있어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운신폭을 좁게 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면서 “민선실시 10년을 맞아 중앙정부가 가지고 있는 각종 권한이 지방으로 대폭 이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지방분권 특별법 제정, 양여금제도 폐지 등 아주 부분적인 분야의 과제만 완료됐을 뿐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지사는 특히 “참여정부 이후 추진하고 있는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정책은 자립형 지방화의 전제조건이고 필수적 요소”라면서 “입으로 하는 지방분권 주장보다 공공기관과 특별행정기관의 지방이전을 하루 빨리 실행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또 “민선 3선에 10여년을 단체장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단체장의 신분이 행정가인지 정치가인지 정확히 규정하기 어렵다”면서 “이는 정당의 공천권 행사와 정치자금법상의 지방자치단체장의 후원회 결성금지조항 때문이다. 특히 기초단체장의 경우 정당공천제는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지사는 또 “정당소속으로 공천을 받아 출마해 직선으로 당선돼 정치행위를 하는 정치인이지만 주민들의 지지도와 무관하게 3선밖에 할 수 없도록 묶어 놓은 단체장의 연임제한 규정도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만큼 철폐돼야 될 독소조항”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 지사는 “이제는 법으로 지방자치를 제한할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의사와 뜻에 따라 지방자치를 해야할 때”라고 덧붙였다. 이 지사는 이와 함께 “표를 의식한 선심행정을 유혹하는 지방의회를 비롯한 주민과 각종 단체들의 정치수준도 이젠 달라져야 완전한 주민참여형 지방자치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지사는 지방자치 발전이라는 큰 걸음에 민선 10년의 경험이 ‘3할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중앙 정부가 풀어야할 과제와 지방자치를 바라보는 지방의회와 국민들의 의식수준 향상이 나머지 ‘7할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2005-06-14
- <권화섭 칼럼>김우중 회장 귀국 이후(2005.06.14) 김우중 회장 귀국 이후 권화섭 (언론인) “재벌 문제라는 것은 경제사회 전체와 관련된 구조적 문제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재벌 문제는 범주적으로 입법을 통해 처리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현실은 그렇지 않고 개별적인 대상에 대해 국세청과 검찰이라는 행정수단을 동원해서 선별적으로 타격을 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한다. 이것은 염려스러운 일이다.” 지난 1999년10월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김우중 회장이 중국에서 석연찮게 잠적할 당시 노재봉 전 국무총리가 국민의 정부 재벌개혁 방식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5년8개월간의 해외도피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다. 이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의 귀국으로 이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 최대의 스캔들이었던 대우사태와 그에 대한 사법적 처리가 마무리될 수 있게 되었다. 대우 해체 진상 밝혀질까? 그러나 97년 외환위기나 그 이후 재벌개혁 과정에서 대우그룹 해체가 김우중 회장이라는 한 개인의 처벌을 끝으로 그냥 덮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문제다. 그 충격이 컸고 고통이 심했던 만큼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미래를 위한 뼈아픈 교훈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노재봉 전 총리의 지적은 단지 재벌개혁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정부의 경제운용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한 문제점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점이란 정책 목표의 당위성을 내세워 정책 수단의 합법성 내지 합리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조급성이다. 오늘날 부동산 정책의 전면적 혼란은 바로 이 조급성의 표출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우그룹 해체를 비롯한 재벌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러한 조급성 때문에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을 거의 하지 못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IMF가 요구하는 금융산업 재편과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국제신인도 회복과 외자유치’라는 명분을 내세워 집권 1년 반만인 99년8월까지 55개 대기업의 퇴출과 반도체 등 7개 업종의 구조조정(빅딜)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실적이 불만족스런 대우그룹을 정부 주도로 해체하고 법정관리를 신청한 삼성자동차의 부채정리를 위해 이건희 회장의 사재 출연을 압박하는 등 고압적인 방법을 마다하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에서 대우그룹을 비롯한 한국재벌들의 과오는 막중했다. 책임이 큰 만큼 재벌그룹들의 대수술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재벌그룹을 빼고 나면 한국경제가 없어진다”는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의 지적을 너무나 가볍게 귓등으로 흘려버렸다. 또한 개혁의 조급성에 떠밀려 ‘재벌 이후’의 문제를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채 한국 재벌그룹들의 경쟁 위협을 견제하고 국내 시장 진출을 노리는 외국자본과 그 후원자인 IMF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추종하게 되지 않았는가 의심된다. 대우경제연구소장 출신의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은 김우중 회장이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사법적 처리를 감수해야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국내 재벌의 연쇄 몰락과 국제 금융자본의 국내경제 장악이 발생한 배경을 가장 잘 아는 만큼 숨겨진 이야기를 듣고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재벌개혁 절차 반성해야 김우중 회장의 귀국으로 이제 우리는 법정에서 검찰과 변호인단 간에 기업회계와 자금운용에 관한 기술적인 문제와 함께 정부의 재벌개혁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점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을 지켜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이 논쟁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경제철학적인 문제이므로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경제상황은 이 문제를 결코 묵과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8년 세월이 지났고 한국재계의 판도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재벌그룹과 그 총수들은 여전히 사회적 지탄의 대상을 면치 못하고 있고 한국경제는 저성장의 함정에서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김우중 회장의 귀국은 우리의 경제개발과정에서 그와 재벌그룹들의 공과에 대해 새롭게 진지하게 평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나라당 맹형규 정책위의장의 지적처럼 외환위기에서 “큰 기업들의 잘못이 많이 있었지만 (동시에 그 수습과정에서) 기업을 무너트린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 재벌총수들과 함께 정치인과 관료들도 외환위기와 그 이후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2005-06-14
- <밥일꿈>관광브랜드, 개발보다 가치축적이 중요하다(주상용 2005.07.06) 관광브랜드, 개발보다 가치축적이 중요하다 한국관광공사 사업홍보관리실 과장 주상용 관광산업의 고객은 단순히 먹고 놀고 즐기는 행동위주의 고객이 아니라 추억과 감동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고객으로 변해있다. 관광산업은 제조업과는 달리 고도의 감성적 휴먼서비스 차원에서 접근해야하는 것이다. 나날이 치열해지는 국제간 관광객 유치전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우위를 점하려면 고객에게 감동을 주어야만 한다. 이는 지속적 브랜드 관리를 통한 고객과의 감성적 유대형성과 강력한 신뢰 구축이 있어야 가능하다. 뉴질랜드의 관광브랜드가 청정자연(100% Pure New Zealand)이듯이 십수년전부터 우리나라도 관광브랜드를 개발해야한다고 많은 이들이 그 필요성을 제기해왔다. 관광브랜드는 국가브랜드의 핵심가치중 하나로도 인식되고 있는데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이미지가 국가 이미지와 직결되고 국가브랜드 제고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브랜드의 시대가 이미 활짝 열렸는데도 우리나라 관광마케팅은 여전히 브랜드 아이덴터티(Brand Identity)가 불분명하다. 오랜세월 말로만 되풀이되어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물론 선진관광국에 비해 관광마케팅 측면에서 명쾌하게 내세울 만큼 국제적 인지도가 높은 상징적 연상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구체적인 형태에 지나치게 집착한 탓은 아닐까? 다행히 올 하반기부터 문화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공동으로 한국관광브랜드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계획인데 진단과정에서부터 이런 관점들이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관광자원이나 상징물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브랜드는 특정한 상징물 한가지로만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된 의미와 가치 그리고 다양한 속성들로 이루어진 무형자산이다. 관광광고, 관광지 심볼 등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그 나라 관광종사원들의 서비스의 수준,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과 태도, 관광지와 역사유적 현장의 관리 운영 상태 등 이 모든 것들이 관광브랜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다시 말해 관광브랜드 가치는 거창하고 화려한 구호나 장식물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주변환경 일체, 즉 관광객이 여행중에 마주치는 모든 것이 만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전략적 관리나 다양한 프로모션활동도 필요하겠지만 결국 한국관광브랜드는 우리 모두가 함께 쌓아가는 것이다. 브랜드는 개발도 중요하지만, 개발된 브랜드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 강화해 나가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코리아 관광을 세계적으로 강력하고 확고한 파워브랜드로 키우기 위해서는 현장의 접점에 있는 국민 개개인 모두가 브랜드 관리자가 되어 그 가치를 끊임없이 축적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2005-07-06
- <밥일꿈>관광브랜드, 개발보다 가치축적이 중요하다(주상용 2005.07.06) 관광브랜드, 개발보다 가치축적이 중요하다 주 상 용 (한국관광공사 사업홍보관리실 과장) 관광산업의 고객은 단순히 먹고 놀고 즐기는 행동위주의 고객이 아니라 추억과 감동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고객으로 변해있다. 관광산업은 제조업과는 달리 고도의 감성적 휴먼서비스 차원에서 접근해야하는 것이다. 나날이 치열해지는 국제간 관광객 유치전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우위를 점하려면 고객에게 감동을 주어야만 한다. 이는 지속적 브랜드 관리를 통한 고객과의 감성적 유대형성과 강력한 신뢰 구축이 있어야 가능하다. 뉴질랜드의 관광브랜드가 청정자연(100% Pure New Zealand)이듯이 십수년전부터 우리나라도 관광브랜드를 개발해야한다고 많은 이들이 그 필요성을 제기해왔다. 관광브랜드는 국가브랜드의 핵심가치중 하나로도 인식되고 있는데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이미지가 국가 이미지와 직결되고 국가브랜드 제고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브랜드의 시대가 이미 활짝 열렸는데도 우리나라 관광마케팅은 여전히 브랜드 아이덴터티(Brand Identity)가 불분명하다. 오랜세월 말로만 되풀이되어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물론 선진관광국에 비해 관광마케팅 측면에서 명쾌하게 내세울 만큼 국제적 인지도가 높은 상징적 연상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구체적인 형태에 지나치게 집착한 탓은 아닐까? 다행히 올 하반기부터 문화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공동으로 한국관광브랜드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계획인데 진단과정에서부터 이런 관점들이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관광자원이나 상징물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브랜드는 특정한 상징물 한가지로만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된 의미와 가치 그리고 다양한 속성들로 이루어진 무형자산이다. 관광광고, 관광지 심볼 등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그 나라 관광종사원들의 서비스의 수준,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과 태도, 관광지와 역사유적 현장의 관리 운영 상태 등 이 모든 것들이 관광브랜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다시 말해 관광브랜드 가치는 거창하고 화려한 구호나 장식물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주변환경 일체, 즉 관광객이 여행중에 마주치는 모든 것이 만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전략적 관리나 다양한 프로모션활동도 필요하겠지만 결국 한국관광브랜드는 우리 모두가 함께 쌓아가는 것이다. 브랜드는 개발도 중요하지만, 개발된 브랜드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 강화해 나가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코리아 관광을 세계적으로 강력하고 확고한 파워브랜드로 키우기 위해서는 현장의 접점에 있는 국민 개개인 모두가 브랜드 관리자가 되어 그 가치를 끊임없이 축적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200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