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아로요 물러가라” … “피플파워 시기상조” 필리핀 야당이 선거부정으로 의혹을 사고 있는 아로요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해 국민들을 동원하고 있다. 일부 시민들 사이에서 반 아로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지만 대대적인 퇴각 시위가 벌어질 정도로 상황이 무르익지는 못했다고 필리핀 주요 일간 데일리 인콰이어러가 분석했다. 필리핀의 야당 계파들은 아로요 대통령이 대선 부정선거를 지시했으며 그의 가족이 불법도박조직으로부터 상납을 받아왔다는 혐의설이 터지자 대통령의 하야를 위해 뭉치기 시작했다. ◆대선조작 도청 테이프의 목소리 주인공은 누구 = 사건 발생 진원지는 전 국가조사 사무국 부국장 새뮤얼 옹이 아로요 대통령과 목소리가 비슷한 여성이 선거인단 책임자로 짐작되는 인물에게 2004 대선에서 상대 후보와 100만표 차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전화 도청 테이프를 들고 나오면서부터다. 실제로 아로요 대통령은 100만 표를 좀 웃도는 표차로 야당 후보 페르디난트 포를 꺾고 대선에서 승리했다. 야당은 아로요 대통령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다. 아로요 대통령이 대선결과 조작 도청 테이프의 진위에 대해 입을 열도록 압력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야당은 아로요 대통령이 도청 테이프가 가짜라고 주장해도 2004년 선거에서 대대적인 대선 조작이 있었다고 몰아갈 것이며, 만약 아로요 대통령이 녹음 테이프의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가 맞다고 인정할 경우 그녀는 당연히 패배자가 된다는 시나리오를 짜놓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아로요 대통령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이나시오 분예 대변인을 통해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위법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며 야당의 도전을 피해가고 있다. ◆도청 테이프 본뜬 휴대 벨소리 인기 = 필리핀 당국은 도청 테이프가 불법으로 취득됐으며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테이프 내용 방송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한편, 재미있는 현상은 이 도청 테이프를 본 뜬 휴대 벨 소리가 국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 벨소리를 다운받거나 노점 또는 야당 운동가들로부터 벨소리가 담긴 CD를 사는 행위는 법에 저촉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벨소리 다운로드로 처벌된 사람은 없다. ◆야당의 대통령 퇴각주장에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여론 팽배 = 야당은 대통령과 관련한 또 다른 비리가 터져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아로요의 퇴각을 요구하고 군이 여기에 개입하고 나서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6월 11일과 12일 시민들이 길거리로 나와 아로요 대통령 퇴각을 외치도록 여론을 몰아갔던 야당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전화 도청 테이프와 관련한 국가조사 사무국 옹 전 부국장의 기자회견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데다 야당 측에서 카리스마 있는 대체인물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1986년과 2001년 페르디난트 마르코스와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퇴각을 불러온 때와 같은 대규모 시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TV를 통해 아로요 대통령 퇴각시위 움직임을 지켜본 국민들은 단지 수백명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 시위만을 목격했을 뿐이고 이는 국민들로 하여금 아직 새로운 봉기의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따라서 대통령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고 아로요 퇴각 캠페인을 활성화 하는 것이 야당의 최고 과제로 남았다. ◆ 야당측 카리스마 있는 인물 없어 = 1996년과 2001년의 경우처럼 1백만명의 시위자를 모으기 위해서는 비밀 도청 테이프 등으로 대선 부정의혹을 제시하거나 의회 앞에서 아로요의 아들과 시형제 미키 아로요와 이기 아로요가 불법 도박조직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비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1986년과 2001년에는 베니뇨 아키노의 미망인 코리 아키노와 당시 부통령이었던 아로요 같은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현 야당은 아로요 대통령 대신 대권을 이어갈 만한 인물을 제시하기 못하고 있다. 정치적 봉기는 오랜 기간의 준비와 계획에서 비롯된다. 마르코스 정권의 1983년 베니뇨 아키노 상원의원의 암살 후 사람들이 마르코스 정권에 대항해 들고 일어나기까지는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에스트라 전 대통령이 불법 도박 세력을 지지하고 있다는 샤비트 싱손 주지사의 비난이 영향력을 발휘하기까지는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데일리 인콰이어러는 “역사는 혁명을 가속화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모든 혁명은 때가 되어서야 발생했다. 이는 아로요 대통령에게는 조금의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지혜 리포터 2main@naeil.com 2005-06-29
- 중국, 한국의 항일 운동 재조명 중국, 한국의 항일 운동 재조명 김구 선생의 항일 운동에 대한 역사 연구를 중심으로 올해 중국은 “항일 전쟁 승리 60주년”을 맞아 중국의 항일 전쟁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주변 국가의 항일 전쟁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올해 초, 1월 20일 인민일보는 “한국의 국부(國父) 김구의 간고한 세월: 중한 양국이 공동으로 일제에 대항한 정은 영원할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항일 활동 내용과 그의 삶에 대해 3회에 나누어 기술했고 많은 사진들을 첨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기사가 발표된 후 중국 전역의 각 지방 신문들에 다시 게재되어 널리 소개되었다. 기사에는 “항일 전쟁에서 우리의 동지는 김일성과 조선인 줄로만 알았는데...”라며 한국의 항일 전쟁 운동사에 대해 전혀 몰랐다며 의아해하는 네티즌들의 댓글이 대부분이지만, 한편 “한국 인민에 탄복한다, 우리도 그들을 따라 배워야 한다”는 의견들도 적지 않게 올라와 있다. 그리고 가끔 “윤봉길 의사도 있다”, “이뿐만 아니다. 항일을 위해 희생된 한민족의 선혈들이 장백산(백두산), 정강산, 연안 등 곳에 잠들어 있다”라며 한민족의 항일 운동사에 대해 추가 설명을 하는 댓글들도 간간히 보인다. 중국에서는 이제껏 북한과의 형제적 관계와 항일 운동사에 대해서만 알려져 있었기에, 이 기사는 김구의 생애뿐만 아니라 한국의 항일 전쟁사 내지는 독립 운동사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이 글은 “역사는 언제는 놀랄 만큼 닮은 점들이 있다”라고 서두를 떼며, 중국의 항일 운동사와 한국의 운동사를 비교해 보여주고 있다. 1932년 5월 한국 임시정부는 상해에서 적의 수색을 피해 급히 쟈싱(嘉興)으로 옮기게 되며, 쟈싱의 남호에서 1차 선상 특별 회의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마침 1921년 중국공산당 1차 대표대회가 상해에서 급히 쟈싱으로 옮겨 거행된 것과 아주 묘하게도 일치되는 부분이다. 또한 쟈싱 남호에서 열렸던 특별회의는 한국 독립운동에서의 중요한 전환점이며, 이는 중국의 혁명사를 좌우지하는 준의회의에 비교할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중공 1차 대표대회 장소에서 남쪽으로 불과 몇십 미터를 두고 한국 임시 정부의 유적지에 도착한다. 기자는 2004년 11월 권병현 전 주중 한국 대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고 한달 뒤 특별히 쟈생을 방문, 김구 선생의 쟈싱에서의 발자취를 찾았다고 한다. 모두 3부로 나뉘어 연재한 이 글은, 1부에서 김구 선생의 독립 운동 활동을, 2부에서는 중국 여인과의 애틋한 사랑을 다루며 그의 인간적인 측면을, 그리고 3부에서 중국에서 나고 자라 한중 민간 대사의 역할까지를 담당한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중국에서 반세기를 잠잤던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가 다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백범 김구: 독립을 위해 싸우다”라는 소제목의 1부는, 백범 선생의 출생부터 시작해 그의 항일 운동 내용을 다루었다. 김구 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를 소개하며,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서도 소개해 눈길을 끌고 있다. 아울러,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중국의 신해혁명 원로이며 당시 상하이 항일 구원회 회장이었던 추푸청의 도움으로 간신히 상하이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2부에서는 “쟈싱에서 사랑에 취하다”라는 소제목으로 백범일지에서 읽을 수 있었던 주아이바오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다루며, 김구 선생의 인간적인 측면들을 소개하고 있다. 김구 선생의 항일 운동 참여 내용에 대해서는 일찍 ‘쟈싱일보’의 기자이며 소설가인 샤녠성에 의해 소설화된 바 있다. 그녀는 1999년 ‘선월’이라는 제목으로 김구와 중국처녀의 순애보를 그린 소설을 출판했고,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어 샤녠성이 저술한 장편 소설 ‘호보류망(망명한 호랑이의 발자취)’과 ‘회귀천당’은 각각 김구 선생의 중국내 독립운동 행적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다루었다. 이 세 편의 장편소설은 ‘한류 3부작’으로 불리며 최근의 문화 한류와는 다른, 중국 내 자체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발견하고 알리는 한류를 이루기도 했다. 황은하 리포터 enhalisa@hanmail.net 2005-06-24
- 강금실 전 법무장관의 글 ‘아메리카 2악장’ 우리법연구회 5번째 논문집에 실린 글 중 강금실 전 법무장관의 ‘아메리카2악장’이 눈에 띈다. 강 전 장관이 법무법인 지평의 대표변호사로 있던 시절(2002.6) 쓴 이 글에는 구속받기 싫어하는 강 전 장관의 자유스러움이 가득 배어있다. 글 첫 머리를 “사는데 필요한 기술이나 지식을 습득하는 일이 왜 내게는 더디고 힘든 것인지 그 이유를 궁금해 하다가는 세월이 가버렸다”고 고백하듯 밝혔다. 강 전 장관은 “어쩌다 운이 좋아서 사법시험에 한번 합격한 텃세로 평생을 먹고사는 듯하여 요즘도 문득문득 자신이 부끄러워진다”며 솔직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자주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그는 우연찮게 몇 번 들은 드보르작의 현악4중주 ‘아메리카 2악장’을 소개했다. 강 전 장관은 “아메리카 2악장은 삶에 신천지라고는 없고 삶은 원래 그러한 것이니 열심히 적응하며 잘 채워나가라는 그런 충고처럼 들린다”며 “나의 죽음을 누가 거둬준다면 그 시간에 아메리카 2악장을 틀어달라고 부탁해야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고 말했다. 아메리카2악장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그는 “나의 초상에 틀 음악을 상상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지만, 더 늦기 전에 나로 인해 마음 아팠던 타인의 생들에게 씻김 하듯 용서를 구하고 싶어진다”고 덧붙였다. /이경기 기자 2005-06-22
- [국회의원이 권하는 한 권의 책] 열린우리당 장복심 의원《해처럼 빛나고》 약학박사출신의 장복심 의원은 ‘호스피스’ 활동 체험수기를 추천했다. 장 의원이 추천한 책은 강남성모병원 종양내과의 이경식 전문의가 쓴 《해처럼 빛나고》이다. 호스피스란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들을 가족과 함께 돌보면서 환자들의 여러 가지 증상과 고통을 조절해주고 여한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활동이다. 장 의원에 따르면 이경식씨는 지난 30년간 암전문의와 호스피스 활동을 통해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장 의원은 지난 4월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이 책을 선물 받았다. 평소에 저자의 봉사활동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장 의원은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고 한다. 장 의원 자신도 약대 재학시절부터 불우청소년 및 장애우를 돕는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장 의원은 “이 책을 읽으면서 환자를 내 몸처럼 아끼는 저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며 “생의 끝자락에 있는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진정한 의료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해처럼 빛나고》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저자가 자신의 아버지와 장인을 포함 7명의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치료하고 간호하면서 느낀 체험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자신의 아버지의 치매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겪었던 일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다른 환자들과 가족들의 처지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오랜 세월 아버지를 돌보면서 저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특히 호스피스를 하고 매일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면서 아버지의 존엄성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말기암 환자들의 가장 큰 어려움을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불안, 소화기계통의 고통을 꼽았다. 그는 호스피스와 완화의학(완치가 불가능한 환자들의 질병을 조절하는 의학)의 발전으로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고통을 상당부분 덜어줄 수 있다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소개하고 있다. 한편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있다. ‘저는 그들을 존경합니다. 그 봉사가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환자를 위해 기도해주고, 씻겨주고, 환자와 가족간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장례 때는 장지까지 같이 갑니다.’ 얼마 전 안락사 문제가 국내외적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저자는 안락사 문제도 호스피스 활동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열린우리당 보건의료 직능대표출신인 장 의원은 “우리 국민 4명 중 1명은 암에 걸린다. 호스피스 봉사가 남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 될 수가 있다”며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책 제목처럼 ‘해처럼 빛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윤영철 기자 ycyun@naeil.com 2005-06-21
- 부시행정부, 소련 중국도 포용했는데 북한은 왜 못하나 북한 지도부 포용해야 북핵문제 풀린다 6자회담은 이라크전에 몰두한 미국이 다른나라에 공 떠넘긴 것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이 북한을 인정하고 존중하면 7월에라도 6자회담에 복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은 강온파의 내부대립으로 쉽게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부시행정부에게 북한과 보다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협상과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미국 정책두뇌집단들의 ‘말의 압력’이 늘어나고 있는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우드로윌슨센터(본지 16일 전문 보도)에 이어 존스홉킨스대 존 오버도퍼 교수가 노틸러스 연구소에 기고한 아래 글도 같은 맥락이다. /편집자 주 한반도 핵위기는 그 뿌리가 아주 깊기 때문에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먼저 한국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미국인들은 한국과 북한을 영국과 프랑스처럼 각각 별개의 나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과 북한은 2차대전 후 뜻하지 않게 돌발적으로 분단되었을 뿐 사실 하나의 나라다. 또 한국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열강으로 둘러싸인 위험한 지역에서 수많은 외침을 받으며 힘든 역사를 살아온 만큼 국민성도 아주 강인하다. 지금도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 최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다.이런 한반도에 핵위기가 불어 닥친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을 비롯한 주변 열강들의 책임있다. ◆국방장관 럼스펠트는 한국의 핵무장 포기시킨 장본인 = 2차대전 말, 히로시마원폭 투하 직후 만주의 소련군이 한반도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에 이어 일본까지 점령할 것을 우려하여 북위 38도 이북에 대한 소련의 점령을 인정하고 한반도 남쪽에 대한 점령권을 확보하였다. 이 한반도 분할점령은 미국과 소련의 임시조치였지만 결국 오늘날까지 지속되 말았다. 전 미국외무부관리였던 그레고리 헨더슨이 1974년 지적했던 것처럼 미국은 “한국인들의 정서와 국내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한국을 두 조각 낸 무거운 책임”이 있다. 1949년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이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고 1950년 미국무부장관 딘 에치슨이 “한반도를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에치슨라인을 발표한지 6개월도 되지 않아 한반도에는 전쟁이 발발하여 3년이나 지속되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1953년 휴전으로 중단되었지만 또 다른 불안을 잉태했다. 한국전 당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미국의 위협에 자극을 받았던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역시 미국의 동맹의지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1970년대 들어 비밀리에 핵개발에 착수했다. 이를 눈치챈 미국정부는 한국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핵무기와 한미동맹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했는데 당시 미국측 대표 가운데 지금의 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2002년 여름, 북한이 우라늄농축에 필요한 원심분리관을 구입했다는 정보를 파키스탄으로부터 확보한 미국은 북한이 협상을 어기고 우라늄핵프로그램을 개시했다고 믿기에 이르면서 북핵2차위기가 시작됐다. 2002년11월 필자가 북한을 방문하여 농축우라늄에 대해 질문했을 때 북한 당국은 이에 대한 어떤 부인도 하지 않았다. 북한당국은 “다음 3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미국의 핵우려를 깨끗이 해소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1.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할 것. 즉 북한을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하고 공격이나 체제전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2. 북한의 경제발전을 방해하지 말 것.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경제지원도 바라지 않으니 미국도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를 철회할 것. 3.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북한을 핵무기나 혹은 다른 수단으로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평양에서 돌아온 방문단 일행은 미국정부에게 “즉시 협상에 착수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부시정부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려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정부내에는 “포용정책은 협상을 파기한 ‘나쁜 행동’에 대한 ”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이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002년 11월14일 북한에 대한 중유공급중단을 발표하였다. ◆부시정부 우물쭈물해서 북핵해결기회 놓쳐 = 부시정부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우물쭈물하면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부시정부의 초기대응 실패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협상론자들과 강경파 사이의 의견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 미국정부가 이라크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핵문제가 이라크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부시정부로서도 완전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북한의 이웃국가들을 북핵문제 해결에 동참시킨다”는 아이디어였는데 이것이 6자회담으로 발전되었다. 양측의 의견접근은 빠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올바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3차회담에서 미국의 제안을 환영한다고 밝혔던 북한은 결국 2005년 2월10일 핵무기 보유를 공식선언하였고 3월31일에는 핵보유국으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을 둘러싼 어느 나라도 북한의 핵보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모두 북한과 제각기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이 점도 북핵해결의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먼저, 한국의 경우 이제 유권자의 과반수가 한국전쟁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40세 이하로 바뀌었다. 이들은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을 위험한 나라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형제국가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 북한의 공격을 두려워하면서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는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 일으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중국에게 있어서 북한의 핵보유 자체는 큰 위험이 아니다. 다만 북한의 핵무장이 한국, 일본, 특히 대만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 한편 북한의 급작스런 붕괴도 바라지 않는다. 수십만의 난민이 국경을 넘어오는 사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이 지금처럼 일종의 완충지대로 존속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핵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북한에 대한 어떤 제재나 위협에도 반대하고 있다. 일본의 입장은 상당히 이중적이다. 2002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김정일을 만났던 고이즈미는 협상을 지지하는 한편 미국에게도 대북 포용정책을 촉구하고 있다. 다만 납북일본인 문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강경한 자세로 북한을 자극하고 있다. 러시아는 한때 북한과 가장 밀접했던 나라였지만 지금은 거의 영향력이 없어 방관자적 입장에 가깝다. 다만 협력적이고 건설적인 방관자일 뿐이다. 이에 반해 미국이야말로 북한의 핵 무장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 나라다. 북한이 미국본토를 공격할 장거리 미사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알카에다나 미국에 적대적인 중동국가에게 핵무기나 그 기술을 이전할 경우 미국에게는 치명적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핵무장에 가장 겁내야할 미국은 강온파로 나뉜 채 손놓아 = 온건파와 강경파로 양분된 부시정부의 내부분열로 인해 미국의 북핵정책은 정체상태에 빠져 해결능력을 잃어버렸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외교적 해결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협상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있다. 북핵문제가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나 있을 뿐만 아니라 강경파들이 협상의 진전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미국정부의 내분은 부시의 이중적인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북한을 악의 축이며 혐오의 대상이라고 비난했다가, 또 한편으로는 대화와 협상을 다짐하기로 한다. 북핵문제의 해결은 결코 쉽지도 않을 것이고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혹은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서 미봉책으로 대충 처리하고 넘어가고 싶은 유혹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시간은 미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북한의 플루토늄 재처리는 계속될 것이고 농축우라늄프로그램은 북한의 핵능력을 더욱 강화시켜줄 것이다. 결국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북한의 핵무장 능력은 커질 것이며, 해결은 그만큼 더 어려워 질 것이다.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할 2005-06-20
- 7면용분량체크용 제목: 북한 지도부를 끌어안아야 북핵문제 풀 수 있어 최근 한미회담에서 두 정상이 북핵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한다는 데 확인하고 북한도 7월 6자회담 복귀를 시사함으로써 협상의 전망이 밝아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정부가 반대편을 끌어안아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또 다시 제기되었다. 언론인이자 존스홉킨스대학 부교수인 돈 오버도퍼는 노틸러스연구소 웹사이트 기고문을 통해 “미국 정부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져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상황이 악화되었다”면서 “북핵문제는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해야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동북아 국가 중 어느 나라도 북한의 핵무장을 원하지 않지만 북한과의 이해관계가 제 각기 달라 협상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북한의 핵이 외부로 누출될 경우 최대 피해국은 미국이 될 수 있으므로 누구보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그의 기고문을 정리한 것이다. 한반도 핵위기의 기원 한반도 핵위기는 그 뿌리가 아주 깊기 때문에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먼저 한국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미국인들은 한국과 북한을 영국과 프랑스처럼 각각 별개의 나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과 북한은 2차대전 후 뜻하지 않게 돌발적으로 분단되었을 뿐 사실 하나의 나라다. 한국은 세계사에서도 드물 정도로 오래된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가진 나라다. 7세기 후반 삼국통일을 이룩한 후 20세기 중반까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정부를 가진 나라로써 그 정체성을 수천년 동안 지켜왔다. 또 한국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열강으로 둘러싸인 위험한 지역에서 수많은 외침을 받으며 힘든 역사를 살아온 만큼 국민성도 아주 강인하다. 지금도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 최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한반도에 핵위기가 불어 닥친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을 비롯한 주변 열강들의 책임이 있다. 2차대전 말, 히로시마원폭 투하 직후 만주의 소련군이 한반도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에 이어 일본까지 점령할 것을 우려하여 북위 38도 이북에 대한 소련의 점령을 인정하고 한반도 남쪽에 대한 점령권을 확보하였다. 이 한반도 분할점령은 미국과 소련의 임시조치였지만 결국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말았다. 전 미국외무부관리였던 그레고리 헨더슨이 1974년 지적했던 것처럼 미국은 “한국인들의 정서와 국내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한국을 두 조각 낸 무거운 책임”이 있다. 1949년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이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고 1950년 미국무부장관 딘 에치슨이 “한반도를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에치슨라인을 발표한지 6개월도 되지 않아 한반도에는 전쟁이 발발하여 3년이나 지속되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1953년 휴전으로 중단되었지만 또 다른 불안을 잉태했다. 한국전 당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미국의 위협에 자극을 받았던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역시 미국의 동맹의지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1970년대 들어 비밀리에 핵개발에 착수했다. 이를 눈치챈 미국정부는 한국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핵무기와 한미동맹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했는데 당시 미국측 대표 가운데 지금의 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핵 1차위기와 협상 반면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60년대 초부터 핵개발을 시작한 북한은 1980년경 이미 영변원자로 건설에 착수하게 된다. 영변원자로의 규모에 놀란 소련의 압력으로 1985년 NPT에 가입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했으나 IAEA와 북한의 마찰은 점점 커져갔다. 마침내 1993년 초 북한이 NPT탈퇴를 언급하자 북-미갈등은 전쟁직전 상황으로까지 악화되었지만 지미 카터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가까스로 봉합됐다. 당시 카터를 만난 김일성은 북-미 신뢰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경수로 건설을 해주면 핵시설을 해체할 것이며 미국이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준다면 IAEA사찰도 계속 받겠다고 다짐했다. 김일성은 카터와의 회담 후 3주일 만에 사망했지만 후계자인 김정일은 협상을 지속시켰고 양측은 1994년 10월 미국이 매년 50만톤의 중유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영변핵시설 동결하는 데 합의하였다. 이로써 한반도의 핵위기는 큰 고비를 넘기고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북핵 2차위기 발생과 미국의 대응 그러나 2002년 여름, 북한이 우라늄농축에 필요한 원심분리관을 구입했다는 정보를 파키스탄으로부터 확보한 미국은 북한이 협상을 어기고 우라늄핵프로그램을 개시했다고 믿기에 이르러 양측의 갈등국면이 재개됐다. 하지만 94년협의에서는 플루토늄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우라늄농축이 북미합의를 위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남북한이 체결한 한반도 비핵화협정에는 위배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2002년11월 필자가 전 주한 미대사 도날드 그렉과 코리아소사어티부회장 프레드 캐리어 등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여 농축우라늄에 대해 질문했을 때 북한 당국은 이에 대한 어떤 부인도 하지 않았다. 방문단 일행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였으나, 북한 당국은 “다음 3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미국의 핵우려를 깨끗이 해소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1.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할 것. 즉 북한을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하고 공격이나 체제전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2. 북한의 경제발전을 방해하지 말 것.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경제지원도 바라지 않으니 미국도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를 철회할 것. 3.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북한을 핵무기나 혹은 다른 수단으로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평양에서 돌아온 방문단 일행은 미국정부에게 “즉시 협상에 착수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부시정부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려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정부내에는 “포용정책은 협상을 파기한 ‘나쁜 행동’에 대한 보상”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이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002년 11월14일 북한에 대한 중유공급중단을 발표하였다. 결국 북한도 12월12일 영변원자로 재가동을 발표하고 12월21일 원자로에 대한 봉인과 감시카메라를 제거하였다. 곧이어 NPT를 탈퇴하고 IAEA사찰단을 추방한 후 폐연로봉 재처리에 들어갔다. 부시정부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우물쭈물하면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부시정부의 초기대응 실패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협상론자들과 강경파 사이의 의견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 미국정부가 이라크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핵문제가 이라크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부시정부로서도 완전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북한의 이웃국가들을 북핵문제 해결에 동참시킨다”는 아이디어였는데 이것이 6자회담으로 발전되었다. 처음에는 2003년4월 미국 북한 중국의 3자회담이 북경에서 열렸고, 이어서 2003년 8월과 2004년2월, 6월 3차례에 걸쳐 6자회담이 진행되었다. 양측의 의견접근은 빠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올바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3차회담에서 미국의 제안을 환영한다고 밝혔던 북한은 돌연히 우라늄농축프로그램 개발혐의를 부인하면서 미국을 비난하고 6자회담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결국 2005년 2월10일 핵무기 보유를 공식선언하였고 3월31일에는 핵보유국으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급한 것은 미국, 북한 지도부를 포용해야 북한을 둘러싼 어느 나라도 북한의 핵보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모두 북한과 제각기 다른 이해 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이 점도 북핵해결의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먼저, 한국의 경우 이제 유권자의 과반수가 한국전쟁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40세 이하로 바뀌었다 2005-06-20
- 인터뷰-한강택 전남경찰청장 한강택 (54·치안감)청장은 수사·형사통이다. 77년 경위로 임관해 30년 가까운 세월을 거의 수사·형사로 보냈다. 전남경찰청 형사과장, 서울경찰청 수사과장 등을 두루 거쳤다. 특히 조직폭력에 관해 일가견을 갖고 있다. 그가 잡아들인 폭력조직은 47개파, 1423여명에 달할 정도다. 국내 폭력조직마다 이름을 붙여 계보를 정리하고 관리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그가 처음으로 해낸 일이다. 지금 경찰에서 활용하고 있는 관리시스템은 한 청장이 정리한 것을 기초로 삼고 있다. 올해는 한 청장에게는 뜻 깊은 해이다. 경찰 창설 60주년에 고향에서 치안책임자로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 청장은 “하루 하루가 보람차다”고 표현한다. 한 청장은 매주 월·금요일 기능별로 업무혁신토론회를 직접 주재하며 조직혁신을 다그치고 있다. 또 경사급 이하 실무진으로 자율혁신위원회를 구성하고 월 1회 토론회를 갖도록 해 조직혁신을 선도하도록 했다. 한 청장은 ‘경찰의 전문화’에 관심이 많다. 한 청장은 어디 자리에서든 “경찰인력이 전문화돼야 치안확보와 대민 서비스를 강화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서울경찰청 수사과장 재직시절 일선 수사·형사들의 실무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수사직무학교’를 최초로 개설해, 전국으로 시행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요즘에야 일반화됐지만 경찰 내 학습 동아리 활동은 이미 7년 전부터 한 청장이 주도해 이뤄져왔다. 학습 동아리를 통해 어떤 영역에서 전문성을 갖고 있는 경찰관이 동아리 활동을 주도하며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예를 들어 소매치기 검거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경찰관이 동아리 활동을 이끌어 가는 방식인 것이다. /정원택 기자 2005-06-16
- 박 진 의원 ‘날씬한 돌고래 작전’ 한나라당 박 진 의원은 최근 한나라당 칼럼을 통해 본인과 우리나라를 돌고래에 비유했다. 작은 몸으로 대양을 누비는 돌고래를 닮고 싶다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최근 박 의원의 겉모습은 돌고래에 비유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옛날 해군시절만 해도 샤프한 외모였던 박 의원도 세월의 흐름을 따라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그의 몸무게는 현재 94.5㎏에 달한다. 해군시절에는 68㎏이었다. 해마다 늘어가는 몸무게는 사실 박 의원에게 직업병이나 마찬가지다. 의정활동에 집중하다보면 식사도 불규칙하게 되고, 지역구를 다니면서 집어주는 떡과 술을 마다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 지역구 관리를 위해 정치권 입문 후에는 골프까지 끊어서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으면 운동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점도 있다. ‘연애할 때 청바지 입은 날씬한 모습에 반해 결혼했는데 대체 지금 어떻게 된거냐’는 아내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던 박 의원이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된 것은 최근 몸으로 느끼는 불편함 때문이다. 구두끈 맬 때 불편하고, 달릴 때 몸이 무겁고, 산에 오를 때 숨차고 등등이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비만전문의 박용우씨. 본인도 3개월에 10㎏을 빼서 화제가 되기도 한 박씨는 최근 TV 프로그램 등에서 비만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기도 하다. 박씨는 “왜 이렇게 쓸데없는 것을 붙이고 다니십니까. 이번에 13㎏ 빼시죠”라고 권했고 박 의원도 큰 결심을 하게 됐다. 박 의원은 16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다이어트를 공개선언했다. 자신의 생일인 9월 16일까지 15㎏을 빼서 70㎏대까지 낮추겠다는 것이다. 박 의원이 밝힌 다이어트 방법은 7가지다. 첫째, 식사량을 1/2로 줄이기 (물론 패스트 푸드 안먹기) 둘째,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 이용하기 셋째, 매일 한시간 정도 걷거나 달리기 넷째, 공복에 물(생수, 녹차)마시기 다섯째, 폭탄주 안 먹기 여섯째, 저녁 8시 이후 금식 일곱 번째, 날씬한 돌고래 연상하기 등이다. 박 의원은 다이어트 선언에서 “3개월 후, ‘살찐 돌고래’에서 ‘몸짱 돌고래’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박 의원과 가까운 한 정치권 인사는 “박 의원에게 다이어트를 권한 적이 있다”면서 “향후 서울시장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본인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라도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의원의 날씬한 돌고래 되기 작전은 결국은 서울시장 플랜으로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2005-06-16
- 문서 기록이 북한의 정권유지 의지를 보여줘 김정일의 집착 문서 기록이 북한의 정권유지 의지를 보여줘 로버트 S. 리트워크(Robert S. Litwak), 캐서린 웨더스비(Kathryn Weathersby) 2005년 6월 12일 워싱턴 포스터 기고문 “미국은 엄청난 양의 핵무기를 비축하고 있는데 우리는 핵무기 제조를 생각하는 것 조차 금지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북한 외무성 부상의 입에서 나온 분노와 아이러니의 발언이다. 이 질문은 1962년 8월 당시 북한 외무성 부상이 소련 대사에게 던진 질문이다.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야기하는 민감한 안보사안을 해결하려 애쓰는 미 고위 관리들에게 이 질문은 여전히 강력한 의미를 시사한다. 우리는 수십년 된 외교문서와 다른 여러 자료에서 북한의 핵에 대한 사고방식의 상당 부분과 무엇이 아버지와 아들이 반세기 동안 통치해온 정권을 움직이게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우드로 윌슨센터 냉전 국제역사프로젝트(Woodrow Wilson Center''s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CWIHP)연구원들은 50~80년대 북한 관료와 소련 및 동유럽 관료들의 접촉 내용을 담은 소련과 동독 등 동구권에서 비밀 해제된 각종 외교문서 등을 수집하고 당시 김일성-김정일 체제의 형태와 심리를 연구했다. 서구가 보기에 세계의 그 어떤 나라도 김일성의 통치하의 북한만큼 폐쇄적이지 않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을 통치했다. 그 이후 그의 아들 김정일이 미국 및 타 국과 여러 번 시작되는 가하면 중단되는 일련의 외교현상을 시도했다. 북한의 서방과의 외교적 교류 역사가 짧은 관계로 비 공산 서방 전문가들은 북한의 의중을 읽어내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를 알아내고자 갖은 물밑 활동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자료들은 북한이 핵 야욕을 둘러싼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특히 민감하고 중요한 시기에 공개돼 의미가 더하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핵프로그램을 동결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강경정책과, 6자회담을 택했다. 중국을 포함하는 6자회담이 중단 된지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지난 주 북한은 회담에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넌지시 내 비추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많은 경우처럼 서방 외교관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북한이 이런 성명을 발표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3월 말,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이 야기하는 핵 위협 문제도 의제에 포함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자료에서 우리는 특히 다음 두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유가 미군의 공격 위협과 강대 공산국가들로부터 버림을 받지 않을까 하는 뿌리깊은 두려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덜 명시적이지만 정치적 의사 결정에 있어 주변국들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북한의 집착이다. 자료들은 또 북한 정권에게 한국전쟁(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1953년 어려운 휴전협정이 채결된 후 김일성은 미국과 한국이 새로이 공격해 올 것으로 기대했다. 북한은 3년 동안 미국의 대대적 폭격과 핵무기 사용 위협을 견뎌내야 했다. 이런 경험은 북한으로 하여금 북한은 핵 공격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자신감을 갖게 했다. 1963년 2월 김일성은 구소련 대사에게 “핵 전쟁이 발발할 경우 지리적 조건 상 북한에 유리하다. 산들이 핵폭발의 위력을 반감시킬 것이다. 따라서 북한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려면 많은 폭탄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미국의 핵 기술이 점점 발달되면서 김일성의 시각도 서서히 변했다. 김일성은 여전히 미국이 한반도를 공격할 음흉한 의도가 있다고 비난하면서도 1984년 5월 독일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의 회담에서 “우리가 미국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지 못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그들은 더 많은 핵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우리가 한반도에서 미국보다 강하다는 구실을 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이 계속해서 남한을 점령하기 위해 내세우는 변명이다.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절대 떠날 의지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김일성은 도전적이라기 보다는 체념한 듯 보여 미국의 핵 억지 정책이 성공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2년후 1986년 10월 다시 호네커 서기장과의 회담에서 김일성은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으며 그럴 능력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안보라는 표면적 이유로 1000개의 미국 핵탄두들이 남한에 배치돼 있으며 이 가운데 2개만으로도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수세적 인식 전환을 보였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수십년 지난 대화기록은 역사적으로 의미를 가지겠지만 오늘날 외교에 있어서는 큰 가치가 없다. 아무도 아이젠하워 시대의 대화나 레이건 행정부의 외교 대화기록을 가지고 현 부시 행정부의 외교 정책의 이면 생각을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 언론들은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를 부시 41, 부시 43로 표현하지만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책의 유사성 보다는 대비를 위해 사용된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 김Ⅰ세, 김Ⅱ세 2명의 인물에 의해 통치됐을 뿐이며 기록이 보여주는 것처럼 안보적 이슈와 핵무기 추구에 있어 놀랄만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구 소련연방 국가들로부터 핵무기 제조 기술을 획득하려는 북한의 노력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됐지만 계속 거절당했다. 1963년 동독 대사는 구 소련연방 대사에게 “북한이 핵무기에 관한한 무슨 정보라도 찾으려고 혈만이 돼 있다”고 전했다. 또 당시 북한에서 일하고 있는 구소련의 우라늄 전문가는 “북한은 대규모의 우라늄 광산을 개발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김일성 정권은 계속해서 구 소련에 핵발전소를 건설을 재촉했다. 소련은 이것을 핵 폭탄 제조를 위한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한 것으로 의심했다. 1976년 소련연방이 ‘시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핵기술 이전 요구를 거절하자 화가 난 북한은 비우호국과 인접한 북한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라고 소련을 비난했다. 구소련 지도부는 김일성 정권에게 핵확산금지조약을 준수하는 것이 북한에 이득이 된다고 설득해보기도 했다. 1969년 헝가리 대사의 북한에 보내는 전보에 따르면 구소련 외교관들은 북한에 북한의 핵보유가 일본의 핵무기 보유를 가져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자 북한은 다른 상황에서는 선호하지 않겠지만 이런 특별한 상황의 경우 핵확산금지가 보다 정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서는 김일성의 소련과 중국과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한국전쟁 동안 소련연방 지도자인 조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북한이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고 있는데도 강력한 소련 공군의 역할을 극히 제한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국의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받아들이는 것 보다 소련의 도움에 의존하는 것을 명백히 선호했다. 중국이 북한의 형제와 같은 공산국가며 한국전에서 북한을 도왔지만 김일성은 중국왕실이 한반도를 지배한 역사에 매우 민감히 반응하고 중국이 북한 내부 정치에 개입할 것을 우려하는 민족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공산주의가 국제적으로 전성기를 누릴 당시 중국에 대한 북한의 이런 신중한 태도는 중국이 북한의 핵프로그램 포기하도록 권유 혹은 강요하는 부시 행정부의 전략 차원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김일성은 우려하는 것은 또 있었다. 우리는 러시아 문서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북한에 대해 스탈린 격하 정책을 강화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일성은 1956년 10월 헝가리 민중봉기가 소련 정부의 정신을 온통 뺏어갔을 때에야 소련 지도자에 의해 부추겨진 심각한 정 2005-06-14
- <내일시론>6·15 방북단에 기대하는 것(임춘웅 2005.06.14) 6·15 방북단에 기대하는 것 14일부터 17일까지 평양에서 열리는 ‘6·15 5주년 민족통일 대축전’에 참가하는 방북단이 14일 평양으로 떠났다. 방북단의 규모문제로 또 한번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큰 탈 없이 기념대회가 열리고 우리 대표단이 평양에 가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남북 간에는 자주 만나는 것이 안 만나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므로 만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과 북도 만나는 것 자체의 의미를 넘어 좀더 실질적인 성과를 기대 해야 한다. 이번 방북은 축하축전 참가에 목적이 있어 애초 어떤 공식적인 성과를 기대 할 수는 없다. 또 성과에 집착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식적인 회담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롭고 허심탄회하게 남북간 건설적인 얘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북에서도 북한내 실세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김기남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 북측 대표단 단장을 맡고 있고 남측에서도 남북문제의 핵심 부서인 통일부의 정동영 장관이 단장을 맡고 있어 비공식적으로 나마 좋은 얘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남측 자문단에 임동원, 박재규, 정세현씨 등 최근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인사들이 망라돼 있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임동원 전 장관 등 막강한 자문단의 역할이 중요하다 자문단이 접촉해온 사람이 북측에 있을 것이고 현직이 아니므로 보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남북문제가 꼬일 때나 북한과 미국간에 갈등이 고조 될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움은 남북간에 과연 비공식적으로 나마 서로간 속 깊은 얘기를 나눌만한 인맥이나 정보망이 형성돼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때부터만 해도 벌써 7년여의 세월이 지났고 그동안 ‘퍼준다’는 비판을 받으며 대북지원을 그만큼 해왔으면 어려울 때 서로간 귓속말을 주고 받을만한 인맥은 형성돼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마다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렇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곤 했다. 그것은 북한을 몰라서 하는 소리란 얘기는 더 이상 변명이 되지 않는다. 자문단이 바로 그런 일을 해야 하고 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번 방북단이 특별히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핵문제 일 것이다. 핵이 남북문제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핵이 해결되지 않고는 남북문제에서 큰 진전을 기대할 수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에 이번 방북단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핵문제를 푸는데 미국측에 더 많은 책임이 있음을 우리는 이 난을 통해 누누이 지적해 왔지만 협상에는 상대가 있는 것이므로 이제는 북한도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북한 핵문제는 북미간의 문제인 것처럼 돼 있으나 그렇지 않다. 남북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의 당사국인 것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핵문제가 남북문제의 전부가 아니므로 이 문제로 남북문제의 근간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념해주기 바란다. 남북문제는 남북문제에 대한 미국의 이해를 최소화하는 게 언제나 중요한 과제였다. 이 문제를 극복하는 데는 우리가 1980년대 말 한참 논의했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민족공동체 복원이 남북문제의 핵심 민족공동체란 국가는 다르더라도 민족은 하나라는 엄연한 사실을 재확인하고, 민족공동체 복원에 남북이 함께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민족공동체 복원만이 남북문제의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다. 민족공동체 복원에 대한 사명감은 여러 가지 지엽적인 문제들로부터 남북문제를 지켜주는 방파제가 될 것이다. 이번 자문단으로 평양에 간 임동원 전통일부 장관은 재임중 남북문제는 ‘평화지키기’ 단계를 지나 ‘평화만들기’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바 있다. 만들기는 지키기와 많이 다르다.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신념을 갖고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보려 노력 할 때만 진전이 있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객이 100만을 넘어섰고 개성공단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주도적으로 평화만들기를 추진한 값진 결과들이다. 이번 6.15 축제는 민족공동체 복원을 재다짐하는 제전이 돼야하고 평화만들기의 장이 돼야 할 것이다. 민족공동체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다른 문제들은 큰 틀에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임 춘 웅 객원논설위원 2005-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