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우표로 예술작품 만들어 경상북도 공보관실에 근무하는 박상두씨(54)는 20여년간 수집한 우표로 모자이크 작품 20점을 만들어 전시회를 열었다. 지난 7일부터 10일까지 경북도청내 현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박씨는 민원봉투나 편지 등에 붙어있는 우표를 도청내 전실과를 다니면서 수집, 모자이크 작품을 만들어 선보였다.. 이번 전시회 작품 중에서 가장 돋보인 작품은 ‘독도사랑’. 박씨는 독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끌어내고 독도수호에 대한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었다.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박씨는 일본의 시마네현이 ‘독도의 날’ 조례안이 상정되는 2월 23일에 맞춰 제작하기 위해 밤샘작업을 했다. 박씨는 일본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묵살하고 감히 독도를 넘보지 말 것을 나타내기 위해 작품의 테두리에 무궁화를 더 붙였다. 그는 전시기간 중 도청 전가족의 서명을 받아서 독도박물관에 기증할 계획이다. 박씨는 이번 전시회를 위해 지난 7년 가까운 세월을 휴일도 반납한 채 작품제작에 바쳤다. 총 수집한 우표는 4만5000여장으로 소인이 찍힌 우표들이 대부분이나 작품제작을 위해 특별히 특정우표를 구입하기도 했다. 가로 145cm 세로 75cm 크기로 ‘독도지도’를 비롯 하훼탈, 동물모양, 한반도 지도, 기마인상 등 다양한 문양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모두 20점으로 작품 1점을 만드는데 보통 15일 정도의 시간과 우표 1500~2500매가 소요됐다. 박씨는 “우표수집을 하다보니 너무 많이 모여 궁리한 끝에 모자이크 작품을 만들어 보았다”면서 “최근에는 우표사용이 급격히 줄어 우표구하기가 어려워 앞으로 작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구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2005-06-13
- 흔들리는 문희상호 흔들리는 문희상호 “보고만 있고, 액션이 없다” ‘블랙홀 당의장’ 비판 목소리 … 관리형 체제 한계 지적도 열린우리당 문희상 당의장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5·30 ‘의원-중앙위원 워크숍’에 이어 6·3‘당·정·청 워크숍’까지 여권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워크숍 정치’가 마무리됐지만, 4·30 재보선 참패 이후 열린우리당을 휘감고 있는 위기의식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또 당내 갈등이 증폭되면서 출범한지 석 달도 되지 않는 문희상 당의장의 지도력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 ‘관리형’ 체제의 한계 = 열린우리당 위기의 원인을 문희장 의장에게서 찾는 인사들은 ‘관리형’으로 출범한 문희상 체제가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또한 권한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출범한 문 의장이 지도력마저 제대로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관리형 체제’의 한계를 스스로 노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여권 관계자들은 4·30 재보선 이후 구성한 재보선 평가단의 지지부진한 활동을 관리형 체제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하고 있다. 재보선 직후 문희상 당의장은 평가단을 꾸리는 등 재보선 참패에 따른 ‘위기’ 탈출을 위해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 한 달 시한의 재보선 평가단장에는 염동연 상중위원을 내정했다. 그러나 염동연 상중위원이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사람이 스스로 평가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사실상 활동을 ‘보이콧’함으로써 재보선 평가단은 몇차례 실무자 회의만 거쳤을 뿐 제대로 된 활동이 이뤄지지 못했다. 평가 보고서 역시 상중회의와 중앙위원회에 형식적으로 보고되는 수준에 그쳤다. 또 평가단은 5·30 워크숍에서 간사로 활동했던 박병석 의원이 목차 중심의 간략한 내용을 구두로 설명하는 수준에서 재보선 참패에 대한 평가단 활동을 마쳤다. ‘의원-중앙위원’ 워크숍에 만났던 몇몇 의원들은 “형식적인 평가에 그칠 것을 무슨 평가단까지 구성하면서 요란하게 했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 싫은 소리 못하는 당의장 = 당내 이견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신속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지 않는 점도 문 의장이 비판받는 대목이다. 소위 ‘보고만 있고, 액션이나 지침이 안 나온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당내 인사들은 문희상 당의장에게 ‘블랙홀 당의장’이란 별칭을 붙이기도 한다. 지난 5·30 워크숍에서 ‘대선자금 국고 환납’을 결의한 이후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나오지 않고 있는 점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당시 참석자들은 대국민 약속 이행을 통해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며 구체적 실행 방안으로 의원들이 세비에서 일정 비율을 갹출, 모금을 벌여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일부 초선의원 등은 ‘직책당비 납부도 버거운데, 또다시 일괄적으로 갹출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며 반발했고, 지도부는 ‘형편에 맞게 재조정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워크숍이 끝나고 한참이 지났지만 ‘불법대선자금을 갚겠다’는 대국민 약속 이행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당의 실무 관계자는 “분명한 것은 의원들이 갹출을 이행한다는 사실”이라면서도 “의원별로 얼마씩 갹출한 지는 좀 더 논의를 거쳐봐야 결정될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또다른 당의 관계자는 “의원 한사람 한사람 입장이 모두 다른데, 어느 세월에 그 의견을 수렴해 갹출하겠다는 것인지 답답하다”며 “돈을 갚기로 원칙이 정해졌으면, 지도부가 과단성 있게 결정을 내려줘야 하는데, 그걸 못한다”고 비판했다. 위 인사는 “지도자라면 싫은 소리도 해가면서 전체를 끌고 가야 하는데, (문 의장은) 그걸 안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문희상 의장은 이같은 당내 비판에 대해 “지금 당장 눈에 띄는 결과물이 없다고, 작은 일을 꼬투리 잡아 일을 하네 안하네 하는 것은 성급한 얘기”라며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듯, 절차를 밟아 하나하나 진행해 나가고 있다”고 해명했다. ‘장비의 외모에 조조의 꾀를 가졌다’는 문희상 의장.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열린우리당에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조조의 꾀’일까, 아니면 ‘장비’와 같은 돌파력일까. 열린우리당 위기의 원인으로까지 지목받는 문희상 의장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구자홍 기자 jhkoo@naeil.com 2005-06-08
- 밥일꿈 원고 - (사진: 정선생, 117) 얼마 전 각 학교의 중간고사가 끝났다. 내신시험이 끝난 후면 아이들의 학원이동이 활발하다. 학원을 옮기려고 어머니들이 동분서주한다. 정보를 얻고 자신의 자녀에게 적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하느라 바쁘다. 상담스케줄을 잡고 입학을 위한 테스트와 면담 등을 거치고, 원비를 내게 된다. 어머니들의 이 열정과 헌신이 국가적 낭비는 아닌지 고심하게 된다.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는 어머니들의 안타깝고도 뜨거운 눈빛은 이 나라 교육열의 뿌리이면서 사교육시장에서는 태양과 같다. 오! 쏠레 미오. 학원에서 중학교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친 지 벌써 8년을 꽉 채웠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교육과정은 6차에서 7차 교육과정으로 바뀌었다. 흔하던 국어 자습서가 없어졌다. 특목고 열풍이 휩쓸더니, 내신중심으로, 서술형문제 30% 출제까지 변화가 많았다. 아이들의 눈빛은 크게 차이가 없다. 꼭 부모를 닮은 얼굴에 행동거지, 판박이 스티커 같은 성격들이 드러난다. 새 학기 시작할 때, 학부모 간담회를 열 때면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확실히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다. 선생도 사람인지라 좋고 싫음이 있다. 이쁜 아이도 있고, 어째 정이 가질 않는 아이도 있다. 같은 말도 이쁘게 하는 아이가 있으면 삐딱하게 꼬아 던지는 아이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어쩌랴. 강의실에서 욕이나 비속어를 쓰는 아이가 있으면, 면박을 주기보다 웃으며 비타민 한 알이라도 쥐어주는 센스(!)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착한 남학생이 있었다. 중3이고 키는, 선생인 나보다 머리통 하나쯤 더 컸다. 게다가 생긴 건 현빈이나 조인성 중간쯤? 게다가 싹싹한 성격에 매너 좋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였다. 어느 날 수업에 오질 않아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대뜸, 하는 말이 “아! 맞다!”였다. 깜빡 했단다. 알았으니 어서 오라고 했다. 녀석은 푸시시- 웃더니 “지금 가도 오늘은 수업 못 듣는 걸요” 라고 한다. 무슨 소리지? “이거 들어보세요.” 전화기를 타고 들리는 것은 물! 소리였다. 무수한 물방울들을 터지면서 내지르는 시원한 소리. 발을 적시고 모래를 적시고 귀를 적시고 끝내는 머리 속마저 깨끗하게 비울만한 힘찬 소리. 파도소리였다. 녀석은 그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교 수업을 빠지고 부산으로 달려갔다. 땅 끝에 서서 하염없이 파도소리를 듣고 있다가 내가 건 전화를 받은 것이다. 그 핸드폰의 건전지가 다 될 때까지 그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녀석이 왜 거기에 갔는지는 지금도 나는 모른다. 교육정책이 바뀌고 학교가 변화의 몸부림을 치고 사교육시장이 널뛰기를 하든 말든 아이들은 자란다. 자라서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된다. 어른도 한 때는 아이였다. 왜 그걸 잊을까. 묻게 된다, 스스로에게. 2005-06-07
- <밥일꿈>아이들은 자란다(정혜영 2005.06.07) 아이들은 자란다 정 혜 영 (학원강사) 얼마 전 각 학교의 중간고사가 끝났다. 내신시험이 끝난 후면 아이들의 학원이동이 활발하다. 학원을 옮기려고 어머니들이 동분서주한다. 정보를 얻고 자신의 자녀에게 적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하느라 바쁘다. 상담스케줄을 잡고 입학을 위한 테스트와 면담 등을 거치고, 원비를 내게 된다. 어머니들의 이 열정과 헌신이 국가적 낭비는 아닌지 고심하게 된다.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는 어머니들의 안타깝고도 뜨거운 눈빛은 이 나라 교육열의 뿌리이면서 사교육시장에서는 태양과 같다. 학원에서 중학교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친 지 벌써 8년을 꽉 채웠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교육과정은 6차에서 7차 교육과정으로 바뀌었다. 흔하던 국어 자습서가 없어졌다. 특목고 열풍이 휩쓸더니, 내신중심으로, 서술형문제 30% 출제까지 변화가 많았다. 아이들의 눈빛은 크게 차이가 없다. 꼭 부모를 닮은 얼굴에 행동거지, 판박이 스티커 같은 성격들이 드러난다. 새 학기 시작할 때, 학부모 간담회를 열 때면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확실히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다. 선생도 사람인지라 좋고 싫음이 있다. 이쁜 아이도 있고, 어째 정이 가질 않는 아이도 있다. 같은 말도 이쁘게 하는 아이가 있으면 삐딱하게 꼬아 던지는 아이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어쩌랴. 강의실에서 욕이나 비속어를 쓰는 아이가 있으면, 면박을 주기보다 웃으며 비타민 한 알이라도 쥐어주는 센스(!)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착한 남학생이 있었다. 중3이고 키는, 선생인 나보다 머리통 하나쯤 더 컸다. 게다가 생긴 건 현빈이나 조인성 중간쯤? 게다가 싹싹한 성격에 매너 좋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였다. 어느 날 수업에 오질 않아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대뜸, 하는 말이 “아! 맞다!”였다. 깜빡 했단다. 알았으니 어서 오라고 했다. 녀석은 푸시시- 웃더니 “지금 가도 오늘은 수업 못 듣는 걸요” 라고 한다. 무슨 소리지? “이거 들어보세요.” 전화기를 타고 들리는 것은 물! 소리였다. 무수한 물방울들을 터지면서 내지르는 시원한 소리. 발을 적시고 모래를 적시고 귀를 적시고 끝내는 머리 속마저 깨끗하게 비울만한 힘찬 소리. 파도소리였다. 녀석은 그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교 수업을 빠지고 부산으로 달려갔다. 땅 끝에 서서 하염없이 파도소리를 듣고 있다가 내가 건 전화를 받은 것이다. 그 핸드폰의 건전지가 다 될 때까지 그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녀석이 왜 거기에 갔는지는 지금도 나는 모른다. 교육정책이 바뀌고 학교가 변화의 몸부림을 치고 사교육시장이 널뛰기를 하든 말든 아이들은 자란다. 자라서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된다. 어른도 한 때는 아이였다. 왜 그걸 잊을까. 묻게 된다, 스스로에게. 2005-06-07
- <안병찬 칼럼>사이공의 ‘남부해방둥이’(2005.05.06) 사이공의 ‘남부해방둥이’ 안병찬 (경원대학교 초빙교수·언론학) 베트남은 사이공이 떨어진 4월 30일을 ‘남부해방기념일’ 및 ‘통일 기념일’로 기념한다. 수도 하노이는 4월 29일에 통일 및 남부해방기념일 전야행사를 열었고, 호찌민 시는 30일의 남부해방기념일에 맞추어 다양한 기념행사를 벌였다. 당초에 나는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겪은 날인 4월 30일에 맞추어 호찌민 시로 ‘감상여행’을 떠날 요량이었으나, 졸저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의 출판관계로 발이 묶였다. 각국 기자 400여명이 남부해방 30주년 현지를 취재하러 호찌민 시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미국 에이피 통신사의 사이공지국장이었던 조지 에스퍼가 있다.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대학 저널리즘 방문교수가 된 그는 ‘특파원, 사이공의 함락을 다시 가보다’라는 제목으로 30년 전 최후의 날을 회상하는 기사(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4월 30일자)를 썼다. 자주정신·애국심이 승리 원천 사이공 중앙광장 곁의 에덴빌딩에 에이피 통신 지국 사무실이 있었다. 에스퍼의 30주년 ‘감상여행기’는 자기가 거주하던 에덴 빌딩 3층의 아파트를 방문하여 그곳에 사는 베트남 주민을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큰 사건이 터지면 때를 가리지 않고 한 층 위에 있는 지국으로 뛰어올라가서 취재하고 송고한 일을 회상했다. 그는 사이공 정권의 말로를 전한 기사를 인용했다. “사이공(에이피)-남베트남 대통령 두옹 반 민은 수요일 북베트남군에게 무조건 항복한다고 발표했다.” 이 기사의 제목은 ‘항복’이라는 영어단어 한 자였다. 에스퍼는 사이공을 해방한 직후 에이피 지국 사무실에 들어섰던 북베트남 전사와 30년 만에 재회한 장면으로 기사를 끝맺는다. 지금은 55세가 된 왕년의 해방군 전사가 한 말은 “양쪽 정부만이 전쟁을 원했지, 베트남과 미국의 대다수 국민은 전쟁을 원치 않았소.”였다는 것이다. 이는 항미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방전사의 말이라고 보기 어렵다. 만일 그대로 말했다면 유연하고 현실적인 베트남 사람의 ‘손님 접대용’ 언사라고 여겨진다. 이 시점에서 베트남이 항미전쟁에서 승리한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짚어본다. 압도적인 무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적인 요소’ 즉 정신력이라고 할 수 있다. 쯔엉 쏜 산맥을 따라서 장장 1만 6000km를 잇는 정교한 보급망 호찌민 통로나, 게릴라전의 요새로 사이공 외곽까지 250km를 뚫어놓은 꾸찌 터널은 항미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적 요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사람들 스스로는 독립심과 인내심과 유연성, 그리고 사회주의에 접목한 애국주의가 정치적·정신적 승리의 원천이라고 본다. 한 가지 끝을 맺어야 할 것은 한국이 베트남과의 과거사를 진심으로 청산하는 일이다. 우리는 일본 정치권력과 우익세력이 과거사를 올바르게 평가하기를 거부하고 신군국주의 속셈을 들어내는 꼴을 보고 있다. 최근에 나는 안수명이라는 노인의 행적을 수소문해 보았으나 호찌민 시와 한국에서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안수명은 30년 전 4월 28일 오전 사이공의 한국 대사관원들이 통신시설을 파괴하고서 황급히 빠져나간 뒤 텅 빈 대사관에 홀로 남은 수위이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일가로 일제의 탄압을 받고 일본에 끌려갔다가 베트남까지 표류하여 유랑의 일생을 보냈다. 당시 그의 왼편 팔뚝에는 1920년에 하얼빈에 살던 누님이 일본으로 건너가 볼모잡힌 소년 안수명을 껴안고 울면서 새겨 주었다는 먹물의 문신이 남아 있었다. ‘안(安)’씨 성 한 자와 태극기 한 쌍, 그리고 1919년 ○월 ○일(흐려서 식별 안 됨)이라는 날짜와 ‘그리스도의 사랑 밑에서’라는 러시아 어의 문신이다. 나이로 보면 금년에 100세가 되었을 안수명 노인은 베트남에서 흔적도 없이 인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이 크다. 안수명 노인의 유랑과 희생은 바로 일본 침략의 과거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안수명 노인의 유랑과 희생 같은 이치로 비록 한국이 베트남과 정치적·경제적으로 화해했다고 하지만 베트남에 대해 과거사를 철저히 가려서 청산하는 도덕적 과제를 안고 있다. 판 반 카이 베트남 총리는 하노이 국회의사당의 30주년 전야 기념식에서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국가들’과도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증진할 필요를 느낀다고 말했다. 과거를 말하지 않고 장래의 실리를 내다보는 베트남의 현실주의가 드러나는 말이다. 베트남 통일 30주년이라면 우리 광복 60주년의 절반이 되는 세월로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한반도의 해방둥이는 장년기를 훌쩍 넘어서 환갑을 1년 앞둔 나이가 되었으나 아직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의 ‘남부해방둥이’는 금년에 30살로 연부역강한 청년기에 도달했다. 전쟁을 전혀 겪지 않은 그들은 평화1세대로서 경제성장의 견인차를 운전하게 된다. 2005-05-06
- ‘고래잡이’ 놓고 온라인도 ‘후끈’ “현재 고래의 종류별 개체수를 파악한 후에 과다한 것은 포획토록 하고 희귀한 것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적근거로 보호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찬) “포경금지 공문이 내려진 것은 벌써 20년 전이다. 5년만 묶어둔다고 해놓고선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찬) “지금 고래고기 구할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습니다. 법으로 금지하면 뭘하나여. 지금 거래되고 있는 고래고기는 가짜인가요.”(반) “독도 문제도 있는 지금, 일본 편에 서서 고래 잡자고 떠들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봅니다. ‘혼획 고래’ 대부분이 한국과 일본에서 잡히고 있다는 것도 찜찜합니다. 고래고기 안 먹으면 죽습니까?”(반) 온라인이 고래 부분포획 허용을 둘러싸고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엠파스’가 지난 25일 게시한 ‘대결 고래잡이 부분허용, 가능한가?’ 온라인 찬반투표에는 31일 오전 7시 현재 4136명의 투표자가 참여했다. 총 조회 건수는 8872건, 투표 후 자기 의견을 남긴 경우도 159건이나 됐다. ‘고래잡이 부분허용, 가능한가?’는 ‘설문&투표’ 부문에서 연일 랭킹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투표 참가자들의 43%인 1779명이 ‘찬성 … 어민 생계유지 위해 반드시 필요’에 표를 던졌고 2358명(57%)이 ‘반대 … 고래 멸종 우려, 희귀동물 보호해야’에 투표했다. 찬반 논란도 매우 차분하게 진행 중이다. 양 극단을 달리기 쉬운 온라인 설문에서 자기 논리만을 주장하는 내용보다 여러 가지 문제를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사라져 가는 고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허용할 수 있는 부분 등을 잘 조율해서 어민들의 입장도 생각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조건적인 반대보다는 서로 타협과 조율로써 서로를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 (생각하는 사람) 지구에 존재하고 있는 생물들은 모두 다 지구의 주인들입니다. 생태계는 모든 생물들이 자연스럽게 살아가게끔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지구의 공동주인이 한 종이라도 없어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hawny0323)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2005-05-31
- <안병찬 칼럼>사이공의 ‘남부해방둥이’(2005.05.06) 사이공의 ‘남부해방둥이’ 안병찬 경원대학교 초빙교수·언론학 베트남은 사이공이 떨어진 4월 30일을 ‘남부해방기념일’ 및 ‘통일 기념일’로 기념한다. 수도 하노이는 4월 29일에 통일 및 남부해방기념일 전야행사를 열었고, 호찌민 시는 30일의 남부해방기념일에 맞추어 다양한 기념행사를 벌였다. 당초에 나는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겪은 날인 4월 30일에 맞추어 호찌민 시로 ‘감상여행’을 떠날 요량이었으나, 졸저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의 출판관계로 발이 묶였다. 각 국 기자 400여명이 남부해방 30주년 현지를 취재하러 호찌민 시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미국 에이피 통신사의 사이공지국장이었던 조지 에스퍼가 있다.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대학 저널리즘 방문교수가 된 그는 ‘특파원, 사이공의 함락을 다시 가보다’라는 제목으로 30년 전 최후의 날을 회상하는 기사(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4월 30일자)를 썼다. 자주정신·애국심·유연성이 승리의 원천 사이공 중앙광장 곁의 에덴빌딩에 에이피 통신 지국 사무실이 있었다. 에스퍼의 30주년 ‘감상여행기’는 자기가 거주하던 에덴 빌딩 3층의 아파트를 방문하여 그곳에 사는 베트남 주민을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큰 사건이 터지면 때를 가리지 않고 한 층 위에 있는 지국으로 뛰어올라가서 취재하고 송고한 일을 회상했다. 그는 사이공 정권의 말로를 전한 기사를 인용했다. “사이공(에이피)-남베트남 대통령 두옹 반 민은 수요일 북베트남군에게 무조건 항복한다고 발표했다.” 이 기사의 제목은 ‘항복’이라는 영어단어 한 자였다. 에스퍼는 사이공을 해방한 직후 에이피 지국 사무실에 들어섰던 북베트남 전사와 30년 만에 재회한 장면으로 기사를 끝맺는다. 지금은 55세가 된 왕년의 해방군 전사가 한 말은 “양쪽 정부만이 전쟁을 원했지, 베트남과 미국의 대다수 국민은 전쟁을 원치 않았소.”였다는 것이다. 이는 21년이 걸려 항미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방전사의 말이라고 보기 어렵다. 만일 그대로 말했다면 유연하고 현실적인 베트남 사람의 ‘손님 접대용’ 언사라고 여긴다. 이 시점에서 베트남이 항미전쟁에서 승리한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다시 한번 짚어본다. 압도적인 무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적인 요소’ 즉 정신력이라고 할 수 있다. 쯔엉 쏜 산맥을 따라서 장장 1만 6000km를 잇는 정교한 보급망 호찌민 통로나, 게릴라전의 요새로 사이공 외곽까지 250km를 뚫어놓은 꾸찌 터널은 항미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적 요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사람들 스스로는 독립심과 인내심과 유연성, 그리고 사회주의에 접목한 애국주의가 정치적·정신적 승리의 원천이라고 본다. 일제 침략으로 유랑한 안수명의 운명 한 가지 끝을 맺어야 할 것은 한국이 베트남과의 과거사를 진심으로 청산하는 일이다. 우리는 일본 정치권력과 우익세력이 과거사를 올바르게 평가하기를 거부하고 신군국주의 속셈을 들어내는 꼴을 보고 있다. 최근에 나는 안수명이라는 노인의 행적을 수소문해 보았으나 호찌민 시와 한국에서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안수명은 30년 전 4월 28일 오전 사이공의 한국 대사관원들이 통신시설을 파괴하고서 황급히 빠져나간 뒤 텅 빈 대사관에 홀로 남은 수위이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일가로 일제의 탄압을 받고 일본에 끌려갔다가 베트남까지 표류하여 유랑의 일생을 보냈다. 당시 그의 왼편 팔뚝에는 1920년에 하얼빈에 살던 누님이 일본으로 건너가 볼모잡힌 소년 안수명을 껴안고 울면서 새겨 주었다는 먹물의 문신이 남아 있었다. ‘안(安)’씨 성 한 자와 태극기 한 쌍, 그리고 1919년 ○월 ○일(흐려서 식별 안 됨)이라는 날짜와 ‘그리스도의 사랑 밑에서’라는 러시아 어의 문신이다. 나이로 보면 금년에 100세가 되었을 안수명 노인은 베트남에서 흔적도 없이 인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이 크다. 안수명 노인의 유랑과 희생은 바로 일본 침략의 과거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같은 이치로 비록 한국이 베트남과 정치적·경제적으로 화해했다고 하지만 베트남에 대해 과거사를 철저히 가려서 청산하는 도덕적 과제를 안고 있다. 판 반 카이 베트남 총리는 하노이 국회의사당의 30주년 전야 기념식에서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국가들’과도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증진할 필요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는 미국대사 마이클 머린도 있었다고 한다. 과거를 말하지 않고 장래의 실리를 내다보는 베트남의 현실주의가 들어 나는 말이다. 베트남 통일 30주년이라면 우리 광복 60주년의 절반이 되는 세월로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한반도의 해방둥이는 장년기를 훌쩍 넘어서 환갑을 1년 앞둔 나이가 되었으나 아직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의 ‘남부해방둥이’는 금년에 30살로 연부역강한 청년기에 도달했다. 전쟁을 전혀 겪지 않은 그들은 평화1세대로서 경제성장의 견인차를 운전하게 된다. 2005-05-06
- “컴퓨터요? 우리끼리 배워요” 인도는 세계적인 IT강국이다. 그러나 IT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이기도 하다. 전기가 사치품처럼 여겨지고 컴퓨터를 구경조차 못해본 오지가 수두룩하다. 이런 극심한 IT격차를 줄여보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다. 수가타 미트라다. 인도 델리의 한 IT기업에 근무하는 수가타가 사막에 있는 오지마을 바르나의 어린이들에게 컴퓨터를 보급하는 모습을 BBC가 2일 전했다. ◆극빈층에 컴퓨터 보급 새 시도 = 어느 날 쓰러져가는 움막에서 낮잠자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수가타는 “저 아이들에게도 컴퓨터가 무엇인지 보여주어야겠다”고 결심하고 한대의 컴퓨터를 마을에 설치한 다음 인터넷에 연결했다. 다음 순간 수가타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가 미처 가르쳐주기도 전에 아이들은 스스로 컴퓨터 사용법을 깨우치고 서로 가르쳐주고 있었다. 수가타는 델리의 빈민가를 상대로 컴퓨터 보급을 계속하면서 이 놀라운 실험을 반복했다. 수가타가 컴퓨터를 보급하는 방식은 마을 한복판에 공중전화박스처럼 생긴 컴퓨터부스를 설치하고 아이들이 마우스와 키보드를 만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는데 언제나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영어도 모르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사용법을 깨우쳐갔다. 수가타는 “아이들에게 적절한 장비만 제공해 주면 컴퓨터 교육의 기초적인 목표를 그들 스스로 달성할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인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작은 마을의 어린이들에게는 이 발견이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훈련된 교사를 학교마다 파견하지 않더라도 컴퓨터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라자스탄주 바르나 지역 아이들 역시 컴퓨터는 물론 포장재인 스티로폼도 처음보는 아이들이였지만 ‘자전거 타듯’ 컴퓨터 다루는 법을 스스로 깨쳤다. 컴퓨터 스위치가 켜지자 아이들은 키보드와 마우스를 이리저리 마구 눌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가타는 이 최초의 혼란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우스가 규칙적인 패턴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야 저 화살표가 움직이네’라 알게 되고 첫 번째 클릭을 하게 되는데 못 믿을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과정은 3분 이내에 진행된다”고 예언한다. 이 아이들에게는 교육용게임이나 오락용게임 같은 구분도 필요없다. 그림그리기 게임을 하면서 영어 단어도 함께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수가타는 그 동안의 경험을 이렇게 전한다. “9개월만 지나면 한 마을의 모든 아이들이 일반기업체 사무실직원의 수준에 도달한다. 파일을 끌어다 옮겨놓을 줄 알게 되고 다운로딩도 하게 된다. 비디오와 오디오 프로그램사용법과 인터넷검색방법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컴퓨터보다 더 급한 것 많다” 반박도 = 물론 수가타의 방법에 모든 사람이 찬성하지는 않는다. 이코노미스트지의 기술부편집장인 톰 스탠디지는 “빌 게이츠도 개발도상국에 컴퓨터를 보급해 주는 것보다 의료지원을 선택했다. 이들에게는 컴퓨터보다 식수공급을 위한 펌프가 더 절실하며, 컴퓨터를 설치하고 유지하는 비용이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수가타가 컴퓨터 한대를 보급하는 데는 약 1900달러가 소요된다. 그리고 사용자들이 쿵쿵 두드려대기 때문에 보수 비용도 만만찮다. 그러나 바르나 마을의 어른들은 이 새로운 장치를 환영한다. 한 노인은 “컴퓨터가 후손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부여할 것”이라며 “인터넷은 미래다. 우리 아이들도 꿈을 가지게 됐다”며 반겼다. 이 꿈이 한낱 사막의 먼지로 사라질지,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지는 세월이 보여줄 것이라고 BBC는 전했다. /김광호 리포터 holhol@naeil.com 2005-05-04
- <글로벌 경쟁시대와 상생의 노사관계>④노사 모두가 풀어야 할 조직과제 기업-중간관리자·노조-대의원 등은 조직의 핵심 밑바닥 창의성 수렴하는 ‘팀플레이 리더’로 거듭나야 1분기 경제성장률이 당초 예상치를 밑도는 2.7% 수준에 그치면서 한국경제에 대한 우려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일본(5.3%)의 회복세나 중국(9.5%)의 약진과 비교되면서 “너무하지 않느냐”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다. 또한 원화절상, 국제유가 상승, 위안화 평가절상 등의 대외적인 불안요소 때문에 ‘낙관은 금물’이라는 격언을 되새겨야 할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본격적인 임·단협 시기를 맞아 노·사·정간 반목과 갈등이 심화된다면 한국경제의 추락은 불을 보듯 뻔하다. 더구나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 노동계가 비리의 늪에 빠져 있는 것으로 드러났고,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면서 정부와 재계는 근로대중으로부터 신뢰받고 있지 못해 노사관계에 불안요소가 유령처럼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글로벌(Global·세계화) 경쟁시대에 이런 것들이 대한민국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 주목, 본지는 5회에 걸쳐 노·사·정 경제3주체가 당면한 노사관계 현안을 살펴보고,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됐던 노사관계를 21세기형 ‘상생(相生)의 노사관계’로 전환·정착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본다. /편집자 주 영화 ‘슈퍼맨’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 배우 크리스토프 리브는 지난 1995년 승마시범 중 낙마(落馬), 그 뒤 줄곧 하반신 마비로 지내다 지난해 사망했다. 그는 냉전시대 미국의 우월한 힘을 상징하며 많은 팬을 확보한 스타였지만, 부도 명예도 그리고 현대 의학도 그의 허리를 되살려내지 못했다. 허리는 정상적 신체 활동을 수행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날이 갈수록 국가간, 기업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글로벌 경쟁시대에 ‘조직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층을 강화해야 한다’는 명제가 보편적 가치를 지닌 조직이론으로 인정받고 있다.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잭 웰치는 1981년 그룹사상 최연소 회장에 뽑혔는데, 그 직후 ‘고쳐라, 매각하라, 아니면 폐쇄하라’라는 경영전략 하에 대대적인 조직혁신에 나선다. 그는 1980년대 미국이 불황기에 접어들면서 조직의 대대적 혁신을 위해 빠르고(Speedy), 단순하며(Simple), 자신감(Selfconfident) 있는 조직으로 만든다는 이른바 3S 경영원칙을 밀고 나갔다. 이를 위해 그는 이전까지 9~11단계까지 거쳐야 했던 결재라인을 대폭 줄여, 최고경영자(CEO)-팀장-팀원으로 이어지는 3단계 결재시스템을 구축해 신속한 업무처리를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중간관리자에 해당하는 팀장의 위상이 새로워졌다. 단순히 조직의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자리가 아니라 구성원(Team)의 장(長)으로서 그들의 경영자가 된 것이다. 지난날 우리나라 기업들의 중간관리자는 사용자의 앞잡이, 직원들이나 노조원들의 감시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특히 노무담당 관리자들은 70~80년대 노동자들에게 원성의 대상이기도 했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가 횡행하는 전근대적 노사관계나 노동과 자본의 이분법적 대립이 주류를 형성하는 근대적 노사관계에서는 중간관리자의 고유한 역할이 눈에 띄기 어려웠다. 그와 같은 전근대적, 근대적 노사관계를 넘어 현대적인 개념의 소유·경영·노동이 통일되는 상생(Win-Win)의 관계로 전환하면, 경영자나 노동자와는 다른 중간관리자만의 고유한 역할이 주목되기 시작한다. 중간관리자는 수동적이던 틀에서 벗어나 또 다른 소우주(小宇宙)이자 조직의 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프랑스 인시아드(Insead) 경영대학원의 퀴 뉴엔 후이 교수는 한 대형 통신회사에서 진행한 조직혁신 프로젝트의 사례에서 117개의 세부 프로그램 중 최고경영자의 주도로 진행한 것은 성공률이 20%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중간관리자들이 제안한 것은 80%가 성공했으며, 이로 인해 회사는 3억 달러의 경제적 이득을 실현했음을 실증했다. 후이 교수는 이러한 결과를 낳은 이유에 관해, 중간관리자가 자기 관리하의 하급직원들과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창의적인 혁신안을 현실화시켰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의 주류회사인 아사히맥주의 중간관리자들은 혁신적인 신제품 수퍼 드라이 비어(Beer)를 개발해 재기의 기반을 닦았으며, 모토롤라의 중간관리자들 역시 보통 2~3년이 소요되는 무선 디지털 시스템을 1년 만에 개발, 회사를 위기에서 구하기도 했다. 반면 중간관리자가 혁신과 창의에 기초한 팀플레이의 리더가 되지 못하면, 거대 기업조직에서 비효율과 간섭, 권위주의의 상징으로 전락하기 쉽다. 우리가 사무실과 학교에서 하나씩 옆에 두고 사용하는 메모지인 포스트잇(Post-It)은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무려 11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3M의 연구자 스펜서 실버는 1970년 ‘잘 붙지 않는 접착제’라는 특이한 물질을 만들었다. 수년이 지난 후 그의 동료 아트 프라이는 이 접착제를 종이에 붙여 메모지로 활용할 아이디어를 고안해 시제품을 만들었지만 유통을 담당하는 중간관리자(팀장)가 이를 무시하고 넘어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포스트잇은 그 뒤 3M의 직원들 사이에서 조금씩 호평을 받아 결국 1981년 시판되기에 이르고, 현재 3M의 대표적인 제품 중 하나로 성장했다. 어용집행부가 판을 쳤던 1970~80년대엔 위원장과 소수 상근간부들이 제멋대로 모든 것을 결정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노조원들의 의사를 수렴하여 이를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할 대의원대회가, 거수기들의 집합소에 불과했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말이다. 마치 유신과 5공화국 시대의 ‘통일주체국민회의’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런 집행부-대의원 아래서 민주적인 의사결정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은 지난날 노동계의 잘못된 인식과 관행을 극복하는 계기였다. 민주집행부가 하나 둘씩 늘기 시작하면서 노조 대의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롭게 자각하기 시작했다. 집행부와 노조원을 잇는 가교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기지개를 켜게 된 것이다. 잘못된 집행부의 판단에 대해 노조원의 힘을 바탕으로 제동을 걸기도 했고, 집행부의 방침을 노조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현장에 내려가 설득하고 투쟁 판을 조직해 내기도 했다. 마치 로마군대의 기본 구성단위를 책임진 백인대장(百人隊長·Centurio)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노동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백인대는 로마군대의 최소 단위로 오늘날로 하면 팀과 같은 개념이다. 백인대장은 단순히 군단이나 대대장의 명령을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100명 안팎의 백인대 구성원들의 생활과 전투와 생명을 책임지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한다. 백인대장은 대략 15~20년 가까이 군단생활을 거친 사람에게 자격이 주어지며, 그중 백인대 내에서 신망이 높아 리더십을 갖춘 군사 중에서 선출됐으며, 출신계급에 따라 차별받지 않는 특혜가 주어졌다. 결국 인류역사상 최장의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한 로마군대는 100명 안팎의 군사들 내에서 신망 받고 지지받는 유능한 군사 가운데 선출된 백인대장과, 이를 믿고 따르는 군사들의 유기적 군사행동(팀플레이)을 기초로 삼은 셈이다. 오늘날 유럽의 웬만한 도시가 로마시대 군단기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데서도 살필 수 있듯, 군단의 기본단위였던 백인대와 백인대장의 역사적 의미는 되새겨볼 충분한 가치가 있다. 노조 대의원도 로마의 백인대장처럼 조직의 최소단위를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높은 도덕성과 함께 노조원들에게 봉사하려는 의지 또한 탁월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 노조 전·현직 대의원들이 부정·비리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노동계의 허리에 디스크가 발병했다. 한편 허리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 곳은 바로 축구계다. 21세기 현대축구는 허리를 중심으로 한 팀플레이의 완성도에 따라 승패가 갈리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촉망받는 축구선수 가운데 한명이 박지성 선수다. 박 선수는 현재 네 2005-05-27
- 동농 김가진 일가의 4대에 걸친 나라사랑 동농과 그 후손들의 나라사랑은 4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큰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임정의 안팎살림을 맡은 일꾼들이다. 그들의 외아들 김자동은 임정기념사업회장으로 독립정신 계승에 매진하고 있다. 동농의 차남 김용한은 의열단 사건에 관계됐고, 그의 아들 김석동은 임정 광복군에서 최연소 대원이었다. 동농의 후손들은 사회민주화에 나섰다. 김자동의 큰 딸 김진현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노조위원장이고, 그의 남편은 곽태원 전국사무금융노련 위원장이다. 둘째 딸 김선현은 1987년 이후 한국과 호주 땅을 떠들썩하게 했던 웨스트팩 은행 노조 위원장을 지냈다. 동농 김가진 (1846~1922) 종1품 개화파 관료에서 무장독립투쟁 꿈 꾼 공화주의자로 변신 동농 김가진은 1846년(헌종 12년)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동농은 당시 안동부사였던 김응균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이른바 서얼이었다. 동농의 과거 응시가 불가능한 서얼 출신들과 교류하며 세월을 보냈다. 동농은 1877년(고종 14년) 11월 서얼 중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주어지던 규장각 검서관에 진출했다. 동농은 5년간 하급관리로서 한직을 돌아야 했다. 동농은 1883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아문) 주사(6품)에 발탁되어 고종의 측근으로 부상하는 한편 대 러시아 비밀외교를 보좌했다. 갑오경장 주역 참여 독립문에 글씨 남겨 조선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비로소 적서차별을 타파했다. 동농은 1886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문과에 응시, 급제했다. 동농은 1887년 5월부터 4년간 주차 일본공사로 일본에 상주하며 반청자주외교를 펼쳤다. 이 때 동농은 이른바 ‘동양 삼국 공영론’을 받아들였으며, 일본을 조선 근대화의 모델로 생각했다. 1894년 박정양 김윤식 유길준과 함께 갑오경장의 주역으로 참여해 각종 개혁안을 추진했다. 이 때 동농은 ‘군주주도형 입헌군주제’를 꿈꾸었다. 이 시기 이조참판 병조참판 공조판서를 맡아 정경의 반열에 올랐다. 1896년 독립협회가 결성됐을 때는 독립문의 한자및 한글 글씨를 직접 썼다. 이후 농상공부 대신, 중추원 참의, 중추원 부의장, 충청남도 관찰사를 거쳐 1907년 11월 규장각 제학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동농은 1907년 11월 남궁억 장지연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대한협회를 만들었다. 대한협회는 애국과 실력배양을 표방했지만 일제의 억압으로 점차 정치적 성격을 상실했다. 동농은 1908년 7월 2대 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대한협회는 일제 침략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개화지식인의 모임이었다. 의병활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주장하자, 대한협회는 국민대회를 열어 이를 규탄했다. 대한협회는 1910년 경술국치 후 해체됐다. 3·1운동 후 근대적 민주사회 지향 실의에 빠져 칩거하던 동농에게 3.1운동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농은 항일비밀결사인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맡았다. 대동단은 봉건적 사회지배 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 민주사회를 지향했다. 대동단은 1919년 3월부터 11월까지 지하유인물 배포와 같은 항일활동을 했다. 대동단 사건으로 투옥된 사람이 30명에 달했다. 대동단은 동농과 의친왕 이 강(고종의 다섯째 아들)의 상해망명을 계획한다. 두 사람은 사돈 사이다. 동농이 아들 김의한과 함께 1919년 10월 10일 상해에 도착하자 이동녕 김 구 등이 그를 환영했다. 동농의 망명은 국내외에 파문을 일으켰다. 현지 언론이 대서특필 했다. 당시 일제는 국제외교무대에서 ‘임정은 하층민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선전하고 있었다. 대신을 지낸 사람이 임정에 참여한 것은 상징적 의미가 컸다. 북로군정서 고문 추대 1921년 임정 안에는 다양한 노선이 대립했다. 동농은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해 북간도 독립운동 조직인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추대됐다. 동농이 1922년 7월 4일 사망하자 임정은 어려운 형편에도 장례를 성대히 치르고 만국공묘에 안장했다. 임정 국무위원 전원 이름으로 부고를 냈고, 홍 진 국무위원회 주석이 식사를 했다. 동농은 부인 이씨와의 사이에 김의한 김용한 김정원(여) 김각한 김영원(여) 3남2녀를 두었다. 성엄 김의한 (1900~1964, 1990년 독립장 추서) 수당 정정화 (1900~1991, 1982년 애족장 서훈) 임정 안팎살림 묵묵히 떠맡았던 일꾼 국내잠입 여섯 차례 김의한(1900~1964)은 동농 김가진의 큰아들이다. 그의 부인 정정화(1900~1991)는 수원유수를 지낸 정주영의 2남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두 사람은 1910년 결혼해 외아들 김자동을 두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상해로 망명하자 정정화는 대담한 결심을 한다. 1920년 1월 시어머니에게는 친정에 다녀오겠다고 둘러대고 집을 나와, 친정아버지가 준 800원을 갖고 서울 의주 봉천 천진 남경을 거쳐 열흘 만에 상해에 도착했다. 한 밤 중 압록강에 거룻배 띄워 탈출 대개 혼자 몸인 임정 요인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부엌살림은 정정화의 몫이었다. 쪼들리는 살림에 애가 탄 정정화는 1920년 3월 임정의 비밀통신연락망인 ‘연통제’를 이용해 국내에 잠입했다. 20일 동안 모금한 약간의 돈을 갖고 한 밤 중 압록강에 거룻배를 띄워 조선을 탈출했다. 상해에 도착한 후에야 이 사실을 안 임정요인들은 정정화의 담력에 감탄을 했다. 정정화는 1921년 늦은 봄 역시 돈을 구하러 조선에 잠입했다. 1922년 6월 3차 잠입 때는 이미 임정의 비밀연락망이 붕괴되어 독자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압록강 철교를 건너다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됐다. 서울 체류 중 동농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정화는 이후에도 세 차례 국내에 잠입했다. 1930년 여섯 번째 잠입을 했을 때 민심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임정 간판을 들고 7년 떠돌이 생활 1930년대 들어 임시정부는 외교적으로 고립됐다. 국내와도 단절됐다. 백범 김 구는 애국단을 조직해 침략원흉들의 저격에 나섰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일왕이 탄 마차에 수류탄을 던졌다. 1932년 4월 29일 일제는 일왕의 생일인 이른바 천장절 행사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었다. 이곳에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져 침략원흉들을 응징했다. 당시 상해는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조계 당국은 임정을 더 이상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임정 요인들은 임시정부의 간판을 들고 1939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7년동안 중국대륙을 떠돌기 시작했다. 김의한은 임정 국무원 비서직을 맡아 비서장 차이석과 함께 살림을 맡았다. 임정의 안살림은 정정화가 맡았다. 정정화는 혼자 100명이 넘는 식구들의 식사를 차리면서도 웃음을 머금고 살았다. 해방, 그리고 개인자격 귀국 “왜적이 항복! 이것은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일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군 유격대를 국내에 투입할 계획을 세우던 백범은 이렇게 탄식했다. 미군정은 임정요인들의 귀국을 허용했지만 개인자격이었다. 김의한 일가를 포함해서 중경에서 살던 임정 가족은 1946년 1월 하순에야 귀국길에 올랐다. 김의한 일가는 3월 초순 동농의 묘소를 참배했다. 김의한 정정화는 몸 어느 구석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들어있는지, 그 많은 눈물을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 이 날의 참배가 마지막 성묘가 되고 말았다. 남북협상의 실패와 김의한의 납북 1948년 봄 단정 수립을 반대하던 한독당은 4월 19일 남북협상에 나섰다. 백범을 따라 김의한도 협상대표로 참가했다. 그러나 남북협상은 실패했고, 5월 5일 이들이 귀경했을 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국회의원 선거가 진행되고 있었다. < 2005-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