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변해야 산다” 은행장들이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딴청을 부리는 은행원들에게 강한 톤으로 불만을 털어놨다. 강권석 기업은행장은 11일 월례조회를 통해 “아직도 상황인식이 크게 부족한 것으로 보여져 대단히 안타깝다”면서 “제도적 개선은 꾸준히 이뤄지고 있지만 의식의 개선은 아직 크게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강 행장은 이어 “안일한 상황인식은 다소의 생산적인 고통을 지금 피하지만 얼마 후에 재앙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면서 “여름에 허송세월을 보낸 뒤 겨울의 모진 추위를 어렵게 지낸 ‘개미와 베짱이 우화’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강 행장은 “최근 그룹 인터뷰에서 수동적인 업무자세, 부서이기주의 팽배, 낮은 업무지식, 권위주의적 리더십 등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면서 “아무리 차세대 전산망을 갖추고 타 금융기관과 업무제휴를 맺는 등 노력을 기울여도 수동적인 업무자세와 군림하려고만 하는 리더십으로는 전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경쟁을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황영기 우리은행장도 “영업력 강화를 위한 과제 중 조직이나 제도를 바꿈으로써 해결 가능한 것들도 있으나, 가장 쉬우면서도 힘든 과제가 본부부서 지원이지만 아직 영업점이 느끼기에는 부족하다”면서 ‘영업중심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본부직원들을 꼬집었다. 신상훈 신한은행장은 “그 동안 제도나 시스템의 끊임없는 개선과 혁신 노력을 해왔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들어 급변하는 금융환경과 소비자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관계로 영업현장으로부터의 개선요구가 증가하고 있다”면서 “변화와 혁신노력을 쉼없이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발상과 차별화 그리고 고객재발견을 통해 기존의 경쟁틀에서 벗어나 고객과 조직의 가치를 새롭게 창출해 나가야만 조직의 궁극적인 성장과 성공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정원 국민은행장도 “더 빨리 고객지향적으로 변해야 하고 우리의 변화된 자세와 역량을 고객에게 제공하는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영업점 섬기기와 고객만족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친절한 고객응대를 넘어서 이제부터는 감동적인 세일즈를 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달라고도 당부했다. 김종열 하나은행장은 “발상의 전환, 감성과 지혜를 더하는 것 등을 들어 남들과 똑같다면 가진 것을 모두 버릴 각오로 고객들에게 차별화된 +0.5의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당부했다”고 말했다. 2005-05-12
- <유승삼 칼럼>민주노동당의 잃어버린 1년(2005.04.19) 민주노동당의 잃어버린 1년 유승삼 (언론인) 민주노동당은 14일 국회 진출 1주년을 맞아 ‘2012년 집권’을 다시 천명했다. 총선 직후에 들은 말이지만 1년 뒤에 다시 듣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당시는 민주노동당의 호언이 단순히 정치적 수사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집권까지는 몰라도, 이대로 성장하면 정치 구도를 보·혁 구도로 바꿀 강력한 견인차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마저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현재로선 그런 미래가 더 멀어졌으면 멀어졌지 가까워 졌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한 때는 19.2%까지 치솟았던 지지율이 올 들어서는 총선 때의 득표율 13.1%에도 못 미치는 11%대에 계속 머물고 있는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여러 가지 변명을 하고, 성과도 내세우고 있지만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민주노동당의 지난 1년은 한마디로 ‘기대 미달’이고 좀 심하게 말하면 ‘잃어버린 세월’이다. 여건 탓 하며 제 목소리 못내 그동안 줄곧 5%의 벽도 넘지 못해 안타까움을 주었던 진보 정당이 13.1%라는 비약적인 득표율을 얻은 근본 요인은 기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염증일 것이다. 열린우리당마저도 기성 정치권으로 보는 유권자들에게는 민주노동당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진보 정치에 대한 갈망도 작용했다. “민주노동당도 길에서 지갑을 주운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노회찬 의원은 “아직도 우리는 50년 전에 잃어버린 지갑을 찾지 못했다”고 응수한 바 있다. 남북분단과 6·25 그리고 냉전의 지속으로 계속 억눌려 왔지만 진보 정치에 대한 갈망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1인2표제의 도입, 돈 안 드는 선거 등 선거제도의 개선도 큰 기여를 했다. 그렇지만 TV유세가 없었더라도 그런 약진이 가능했을까. 권영길·노회찬 후보의 TV출연은 보수 정권 아래서 형성된 과격한 이미지를 완화하고 대중성을 확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유권자들은 TV를 통해 진보정당도 생각처럼 과격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직하고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국회 진출 후에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원내 교섭 단체가 안 되는 숫자적 열세, 거대 양 당의 의도적인 ‘왕따’가 그 이유라지만 지지자 기대를 좀 더 의식했다면 거리 투쟁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존재를 드러냈어야 했다. 상황의 노예가 돼 절에 간 색시처럼 고분고분했다. 마치 의원 자리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TV 덕을 그만큼 보았으면서도 미디어의 활용에 너무 등한했다. 스타 국회의원들이 화제가 되는 정도였지 당 차원의 미디어 전략은 없었다. 기존 미디어가 보수적이어서 충분히 반영이 안 된다면 특별대책을 세우거나 미디어를 만들어야 할 터인데 가지고 있는 미디어도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 스스로도 “정책 밑천이 바닥났다”고 말하고 있듯이 비판 다음에 새롭고 적절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문제점도 드러냈다. 정권 담당 능력에 의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고질적인 내부 갈등은 계속해서 표출되고 노동계의 격렬한 움직임이 그 때마다 당에 고스란히 투영되니 국민이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국민이 기대를 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두 자리 수의 지지율만은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은 아직도 신생 민주노동당의 걸음마를 애정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마냥 기다려 주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분발해야 한다. 노동계의 주장을 입법화하거나 최소한 공론화하는 게 민주노동당에게 주어진 1차적 책무인 것은 사실이다. 이를 통해 노사 갈등의 해결이 제도화하고 노사간의 의제가 국민적 의제로 확대되는 것은 사회 발전을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진보 외연을 확대하라 그러나 사실상 유일한 진보 정당이라 할 민주노동당의 책무가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민주노동당이 단지 노동조직의 정치기구화에만 만족하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왜소화하고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에게는 잃어버린 50년의 진보 역사를 되살리고 이어갈 책무가 있다. 그를 통해 보수 편향적이며 지역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정치 구도를 진보 대 보수의 구도로 혁신해 달라는 기대도 안고 있다. 그러려면 교조적이고 폐쇄적인 이념과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 잦은 당내 갈등은 당의 문화가 교조적이고 폐쇄적이며 편협하다는 증거이다. 민주노동당이 더 이상, 정신적으로는 학생기를 벗어나지 못한 ‘늙은 운동권 조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국민에게 꿈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설사 가까운 시일 안에 실현될 가능성은 없을지라도 이상을 제시해 사회와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들이 삶의 이정표로 삼게 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보수 정당은 가질 수 없는 진보 정당만의 특권이며 자랑이다. 2005-04-18
- 인터뷰-이강용 천안소년교도소장 천안소년교도소 이강용(58) 소장. 몇 개월 후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이 분야에 몸담은지 30년이 훨씬 넘었다. 법무부 교정기획단장, 안동교도소장 등을 거쳐 지난해 2월 이곳 소년교도소로 왔다. 마지막 근무지다. 그는 교정행정에 대해 한 번 얘기를 꺼내면 쉴 틈이 없을 정도로 열변을 토한다. 남다른 애정과 에너지다. 이 소장은 “어딜 가든 제가 처음 하는 얘기가 ‘교도소를 만들자. 교도관이 되자’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연한 얘기를 왜 할까 의문이 들지만 곧바로 이해를 하게 된다. 그동안 교도소가 교도소답지 못했고, 교도관이 교도관답지 못했다는 자기반성을 담고 있다. 우리 교정행정의 부족함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우리나라 형사정책은 근본이 잘못돼 있다”면서 “검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처우의 문제이자 재범을 막는 일인데 여기에 대해 너무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교도소가 ‘범죄학교’가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길이 바로 형사정책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교정교화에 지금보다 훨씬 많은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소장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교정행정 변화를 위해 누구 못지않게 노력해왔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교정철학은 교정직 공무원 사이에선 꽤 유명하다. 처벌과 격리위주가 아니다. 말 그대로 교정교화가 중심이다. 교정을 통해 사람을 바꾸고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다. 특히 한자교육에 대해서는 예찬론을 펼친다. 그는 뜻글자인 한자교육을 통해 인성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단순히 말로 그치지 않았다. 일선 현장에 근무할 때부터 한자교육을 실천했다. 이것이 30년 세월이 쌓이면서 아예 교재까지 직접 만들게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이 한문, 명심보감, 생활예절 등 세 권이나 된다. 그는 “지금 이곳에 있는 소년범들은 그 사람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를 보내는 것”이라면서 “어떻게 교육하고 처우하느냐에 따라 제2의 유영철이 될 수도 아니면 사회에 유용한 일꾼이 될 수도 있다”고 역설했다. /천안=정재철 기자 2005-04-08
- [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근로복지공단 안산어린이집 방연실 씨 탐스런 눈이 하얗게 세상을 덮은 날, 어린 제자들에게 “얘들아, 눈사람 만들자!”고 소리치며 마당으로 달려가는 선생님, 드넓은 대학 캠퍼스를 볼 때마다 상가주택이나 손바닥만한 놀이터가 달린 곳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떠올리며 가슴아파하는 선생님, 보육교사인 자신의 직업을 ‘어린이들의 꿈을 지켜주는 사람’이라 소개하는 선생님, 처음 만난 이에게 예쁘게 코팅한 ‘어린이 권리 선언문’을 선물할 줄 아는 선생님, 한복이 썩 잘 어울릴 것 같은 희고 단아한 얼굴에 한 점 미소가 달덩이처럼 환하게 떠오르는, 이런 선생님에게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은 부모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는 이런 선생님 (혹은 부모님) 밑에서 자라날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근로복지공단 안산어린이집 원감 방연실 씨는 바로 그런 선생님이다. 서른두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는 몸도 마음도 ‘환한’ 사람이다. 그에게 선물 받은 ‘어린이 권리 선언문’을 되풀이해서 읽는 동안, 그리고 그가 싸이월드에 꾸며놓은 아기자기한 미니홈피를 들락거리는 동안,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그를 그리 환해 보이게 하는 것일까. 정결함이다. 그는 마치 세상으로부터 오염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타고난 성실함으로 끊임없이 뭔가를 닦아 낸다. 성당에 다니며 마음을 닦고, 봉사 활동으로 욕심을 닦고, 새로운 공부에 도전하며 타성을 닦고, 순수한 아이들을 돌보며 세상의 때를 닦는다. 근로복지공단 안산어린이집의 개원 멤버인 그는 올해 초, 원감으로 ‘승진’했다. 돌아오는 것에 비해 책임만 무거운 자리지만, 보육교사 생활 10년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기쁘게 그 ‘선물’을 받았다. 근로복지공단 안산어린이집은 그에게, 직장 이상의 의미를 갖는 소중한 곳이다. 어린이집이 개원한 1997년 7월부터 지금까지 20대의 혼과 열정을 온통 쏟아 부은 곳이기도 하거니와, 저소득층 아이들을 우선 보육하는 어린이집의 교사로서 아동복지와 사회복지의 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을 안겨 준 곳이기 때문이다.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뒤늦게 불타오른 그의 향학열은 20대를 넘긴 후에도 좀체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 주경야독으로 덕성여대 교육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다시 한국디지털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저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 모두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헌신적으로 일하세요. 일하면서 대학원 다니시는 분도 있고요. 일의 강도나 중요성에 비해 보수며 사회적 지위가 좀 낮은 편이지만,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직업’이라는 자부심만은 다들 대단하죠.” 신문의 인터뷰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 좀 민망한지, 방연실 씨는 동료에 대한 칭찬으로 슬쩍 화제를 돌린다. 그래서 그의 입사 동기이자 8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해 온 김지수 원장에게 ‘방샘에 대한 촌평’을 부탁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가 신조인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힘든 일이 닥쳐도 피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해결하는 스타일이죠. 우리 어린이집은 맞벌이 가정이 많아서 보육 시간도 길고 노동 강도가 센 편이거든요. 사명감이 없으면 하기 힘들죠. 그런 면에서 방 선생님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교직원 간의 융화에도 관심이 많아 원만하게 조직을 이끌어가는 사람이죠. 무엇보다 성실하세요. 일직인 날은 7시 반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방 선생님은 신림동에서 안산까지 그 먼 거리를 출퇴근하잖아요. 여러 모로 조직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죠.” 방연실 씨는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집을 나선다. 신림동인 집에서 어린이집까지 가는 시간은 1시간 40분. 전철 안에서는 책을 읽거나, 수면을 취하기도 한다. 정식 출근시간은 8시 40분이만, 천성이 부지런한 그는 이른 시간에 직장에 도착해야 마음이 편안하다. 안산역에 내려 지하도를 건너면 이제는 눈에 익숙해진 원곡동 거리가 펼쳐진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다수가 동남아인이나 아랍인, 조선족, 몽골인이다. 상가에 나붙은 간판도 중국, 아랍, 영어로 돼 있는 이곳은 ‘국경 없는 마을’. 쓰레기 무단투기 금지 팻말조차 영어와 중국어로 돼 있다. 그러나 이곳은 안산에서 좀 산다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주거지 1순위다. 이런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듯 근로복지공단 안산어린이집에도 조선족 자녀나 외국인 자녀들이 십여 명 있다. 근로복지공단 산하 어린이집의 설립 목적 자체가, 전국에 있는 영세 중소기업체 밀집지역의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양질의 교육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의 보육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간혹 ‘이들을 받지 말았으면’ 하는 학부모도 있지만, 실제로 이들 때문에 보육의 질이 떨어지거나 말썽이 빚어진 적은 거의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가정환경인 것 같아요. 가난해도 단란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외국인 자녀도 마찬가지구요. 하지만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것을 보고 자라거나, 엄마가 도망갔다거나, 부모가 모두 병에 걸려 아이를 돌볼 수 없다거나, 늙은 할머니에게 맡겨진 아이들의 처지를 보고 있으면 정말 안타까워요. 보육교사로서 해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잖아요. 목욕을 시켜 주거나 먹여 주거나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지만 일단 아이가 어린이집 문을 나서면 집에서의 생활까지 책임져 줄 수 없으니까요.” 근로복지공단 안산어린이집의 시설과 환경은 전국의 어느 사설 어린이집에 견주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질 높은 보육에, 널찍한 실외 놀이터와 자연학습장, 실내 체육실과 수영장, 자전거 놀이터와 의무실까지 갖춘 이런 어린이집은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는 참으로 반가운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창원, 안산, 구로, 인천 등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밀집된 전국 21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는 근로복지공단 어린이집은 올해도 3곳의 개원이 예정돼 있으며, 저소득 근로자 자녀에게 양질의 교육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근로복지공단의 영유아보육사업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예정이다. 근로복지공단 어린이집의 설비 개선이나 교구 마련을 위한 비용 등은 공단에서 제공하지만, 교사들의 월급은 시에서 지급된다. 2004년 주 5일제 근무가 도입된 뒤부터는 일주일이 한결 가뿐해졌다. 입사 9년차에 접어든 그의 연봉은 2천만 원 선. 그저,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람과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견디라고 하기에는 다소 낮은 액수다. 그래도 그는 저소득층 노동자 자녀의 보육에 힘쓰는 공단이 고맙기만 하단다. “사립 어린이집 선생님들에 비하면 나은 경우잖아요. 어린이집 분위기도 좋고요. 힘든 건 사실이지만, 아이들이 쑥쑥 커가는 모습에서 보람을 찾습니다. 아이들의 말 한 마디, 표정, 선생님에게 건네는 아주 작은 선물들, 거짓말을 해도 금세 티가 나는 그 천진한 아이다움 같은 것이 정말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보육교사들만이 느끼는 작은 행복이죠.” 방연실 씨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사를 꿈꿨다. 교사가 아닌 미래의 삶을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교사 중에서도 보육 교사가 된 것은 (그의 말에 의하면) 순전히 ‘공부 안 한 탓’이다. 그러나 지금 그이는 보육교사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일이 즐겁고 재미나기 때문이다. 교사 생활 10년이 하루처럼 흘러갔는데, 지난 세월이 그리도 빠르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즐거웠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반문한다. 매일같이 아이들과 부대끼며 겪는 크고 작은 일들을 책으로 엮으면 족히 ‘전집’이 될 거라고, 종종 그는 동료들과 농담을 한다. 자신이 키운 아이들이 초등학생 중학생이 되고,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가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나기도 하는 평범한 가정의 일들을 지켜보면서 그는 삶에 대해 겸허한 마음을 갖게 됐다. 그의 마음에 교사의 상을 심어 준 이는 96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그의 아버지는 안산의 선산에 묻혀 있다. 그가 8년 동안 안산을 떠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곳이 아버지가 묻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가 아이들 속에서 늙지 않는 것처럼, 아버지는 젊은 그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50대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늙은 친구’ 같은 존재였다. 자식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밥 먹고 술 2005-03-30
- [우리당 당권주자 8인, 그들의 초상] ⑧ 한명숙 후보 남편 13년 옥살이 중 나눈 ‘러브스토리’ 유명 “여성이 아닌 ‘정치인’으로 평가 받고 싶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도 ‘대답하라’고 하면 고심 끝에 한 사람을 선택할 것이다. 나의 아내 ‘한명숙’. 이것은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대답이다.” 정치인 한명숙의 남편 박성준 교수(성공회대)는 어느 글에서 아내 한명숙을 가장 존경한다고 고백했다. 아내와 자식 자랑하면 팔불출이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내라고 꼽는 남편이 몇이나 될까. 남편에게 존경 받는 아내는 얼마나 행복할까. 열린우리당 지도부 경선 후보 한명숙 의원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한명숙의 인생을 바꿔놓은 두가지 = 정치인 한명숙의 인생에서 남편 박성준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 의원은 항상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 두가지를 꼽는다. 그 중 하나가 남편이다. 평범한 여성 한명숙이 사회운동가로, 우리나라 최초 여성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을 역임한 행정가로,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으로 커온 데는 남편 박성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이들 부부의 러브스토리는 꽤 유명하다. 대학시절 ‘경제복지회’라는 기독교 학생운동 단체에서 만나 1967년 결혼한 한명숙 부부는 남편 박성준이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생이별을 했다. 그로부터 무려 13년 동안 남편은 정치범으로 옥살이를 했고 한명숙은 그의 뒷바라지를 하며 여성운동에 전념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편지를 쓰고, 한달에 한번씩 면회를 가고…. 한 의원은 아직도 그때 주고받았던 편지를 보관하고 있다. 남편이 곁에 없는 동안 그의 인생을 또 한번 바꿔놓은 것이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의 ‘중간집단 교육’이었다.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사회운동 기관. 훗날 한 의원은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의 사회운동을 이렇게 술회했다. “이 곳 교육과정의 하나였던 중간집단교육을 통해 나는 의식화되어 놀랍게 변신했고 여성운동가로서 훈련을 받아 한국사회에서 가장 맹렬한 여성운동가 중 한사람이 되었다.” 남편 박성준의 옥살이가 11년째 되던 해인 1979년. 한명숙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돼 2년 6개월 동안 옥살이의 고통을 당했다. 이들 부부가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결혼한지 15년여 세월이 흐른 1981년이었다. ◆아들 군대 보내는 어머니 심정으로 = 정치인 한명숙의 카리스마는 그의 미소 속에 배어 있는 따스함에서 나온다. 평범한 아줌마의 얼굴 속에는 부드러움이 묻어 있다. 지난 세월 고된 시련을 견딘 탓인지 한명숙의 모습은 언제나 의연하다. 얼마전, 군대 가는 외아들을 생각하며 블로그에 올린 그의 글 속엔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이 배어 있다. “감수성이 예민한 우리 아들 …. 힘들어도 잘 참아 내겠지요. 고단함 속에서도 보람과 기쁨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겠지요. 하나뿐인 아들 박한길을 믿는 마음으로 엄마 한명숙의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려야겠지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와 믿음으로 국회의원 한명숙은 더 강해져야겠지요.” 우리당 지도부 경선에 나선 한명숙 후보의 캐치프레이즈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다. “우리당을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게 만들겠다”고 외친다. 지난해 집권여당이 보여준 독선적 정치, 모난 정치의 이미지를 벗어내겠다는 각오다. 당의장을 뽑는 전당대회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지금, 한 의원은 ‘여성배제론’이라는 걱정거리를 하나 안고 있다. 유일한 여성후보인 탓에 경선 순위와 상관없이 상임중앙위원에 당선되다보니 ‘한명숙을 찍지 말자’는 여성배제론이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의원은 “능력이 없어 떨어지는 것은 얼마든지 감수하겠지만 8명 후보 중 여성을 미리 재껴 두고 7명만 경쟁시킨다는 것은 불공정하다”면서 “우리 당원들의 소신투표를 믿고 당당하게 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저는 여성 당의장이 되는 욕심이 있다”면서 “여성이 아니라 정치인으로 당당히 평가받고 싶다”고 강조했다. /신창훈 기자 chunsim@naeil.com 2005-03-23
- <밥일꿈>시골 촌놈의 단상(최갑수 2005.05.02) 시골 촌놈의 단상 최 갑 수 (증권업협회 홍보실 과장) 지난 토요일 오후. 초등학교 3학년 막내가 “다른 집은 주말이면 야외에도 놀러 가는데 왜 우리집은 그러지 않아요?”라고 칭얼댔다. 그래서 모처럼 과천에 있는 서울랜드로 봄나들이에 나섰다. 휴일이라 놀이동산은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인파로 붐볐다. 자유이용권을 이용해 맘껏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문득 고향에서 홀로 농사를 지으시는 어머님 생각이 났다. 지금은 세월은 많이 흘러 옛날과는 교육여건이나 놀이문화가 상당히 다르겠지만, 어머님도 이 못난 자식을 키울 때 저렇게 애지중지하면서 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재 나는 호구지책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올해 일흔여섯 되신 노모를 두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찾아뵙지 못한다. 내 처지를 생각해 보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느 시골농촌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이, 나의 고향 마을은 모두 일곱 가구에 고작 13명밖에 안되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제일 젊은 분이 68살이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농사를 지어 가을걷이를 해 보았자 적절한 수입이 보장되지 않기에 상당수가 도회지로 떠났다. 어르신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 중에 “부모가 자식에게 대하는 것에 십분의 일 정도만, 부모에게 봉양하면 효자”라는 말이 생각이 난다. 예전에는 그 뜻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몰랐으나, 나도 자식을 키워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사람이라면 태어나서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인생을 부평초라 하지 않았던가! 누구나 조문을 가본 적이 있을 것이다. 조문 때마다 빈소에서 보는 단아한 조화에 대한 단상을 생각 해본다. 과연 그것이 돌아가신 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빈소를 지키는 상주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의미가 아닐는지…. 다음주면 또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어버이날이 돌아온다. 자식들은 알량한 건강보조식품에 용돈을 챙겨드리며 야단법석을 떤다. 그러나 평소에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거나 안부 전화라도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살아 계실 때에 고등어 한마리라도 챙겨 드리는 것이 효자라고 생각한다. 돌아가신 다음 제사상에 쇠고기를 올리거나 혹은 부모님 산소에 호화스러운 비석으로 장식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효일까? 며칠 후면 다가올 ‘가정의 달’을 맞이하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대목이다. 2005-05-02
- 하버드대생 “서울대 공부 안한다” … 네티즌 찬반양론 댓글 수천개 서울대에서 방문학생 경험이 있는 하버드대생의 “서울대 공부 안한다”는 비판이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미 하버드대학에 재학 중인 장미정(21 경제학과 컴퓨터 전공)씨는 두 학교를 비교하는 를 27일 출간 했다. 장씨는 4세 때 아버지(장병균·국제통화기금 선임 경제학자)를 따라 미국에 이민왔으며 하버드 입학 후 서울대에서 공부해보고 싶어 지난 2004년 방문학생으로 한 학기를 다녔다. 장씨는 서울대 학습이 강의 진도가 느리고 내용도 쉬워서 공부강도가 낮아 자극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하버드에서는 공부할 양이 많아 친구와 만나 밥 한 끼 먹을 여유도 없을 정도로 시간에 쫓겼는데, 서울대에서는 주말에만 공부해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었다”고 했다. 장씨는 “하버드에서는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친구들과 과제물을 같이 하는데, 만일 누군가 남의 숙제를 베껴 낸다면 당장 그 그룹에서 쫓겨날 정도로 숙제 베끼기는 용납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장씨의 주장에 대해 네티즌들은 격론을 벌이고 있다.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 수천건의 댓글이 달리고 있다. abcdxa라는 네티즌은 “책 쓰신분 세월 편한소리 들어주기 민망하다”며 “서울대 이과 사람들은 대부분이 매일 도서관서 공부하며, 대부분 4년 졸업은 버거워서 보통 5년 학부제라 우스게 소리할 정도로 엄격한 학사관리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heemang39라는 네티즌은 “정말 정확한 지적이다. 기초과정인 고교과정까지는 우수할지 모르지만 진짜로 학문을 해야 하는 대학에서는 공부는 다른 나라 이야기이다”며 “신입사원들을 보아도 서울대출신이나 기타 지방국립대 출신이나 능력면에서 크게 다른점을 찾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정석용 기자 2005-04-27
- <밥일꿈>시골 촌놈의 단상(최갑수 2005.05.02) 시골 촌놈의 단상 최갑수 증권업협회 홍보실 과장 지난 토요일 오후. 초등학교 3학년 막내가 “다른 집은 주말이면 야외에도 놀러 가는데 왜 우리집은 그러지 않아요?”라고 칭얼댔다. 그래서 모처럼 과천에 있는 서울랜드로 봄나들이에 나섰다. 휴일이라 놀이동산은 이른 아침부터 많은 인파로 붐볐다. 자유이용권을 이용해 맘껏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문득 고향에서 홀로 농사를 지으시는 어머님 생각이 났다. 지금은 세월은 많이 흘러 옛날과는 교육여건이나 놀이문화가 상당히 다르겠지만, 어머님도 이 못난 자식을 키울 때 저렇게 애지중지하면서 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재 나는 호구지책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올해 일흔여섯 되신 노모를 두 달에 한번 정도 밖에 찾아뵙지 못한다. 내 처지를 생각해 보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느 시골농촌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이, 나의 고향 마을은 모두 일곱 가구에 고작 13명밖에 안되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제일 젊은 분이 68살이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농사를 지어 가을걷이를 해 보았자 적절한 수입이 보장되지 않기에 상당수가 도회지로 떠났다. 어르신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 중 에 “부모가 자식에게 대하는 것에 십분의 일 정도만, 부모에게 봉양하면 효자”라는 말이 생각이 난다. 예전에는 그 뜻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몰랐으나, 나도 자식을 키워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사람이라면 태어나서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인생을 부평초라 하지 않았던가! 누구나 조문을 가본 적이 있을 것이다. 조문 때 마다 빈소에서 보는 단아한 조화에 대한 단상을 생각 해 본다. 과연 그것이 돌아가신 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빈소를 지키는 상주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의미가 아닐는지…. 다음주면 또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어버이날이 돌아온다. 자식들은 알량한 건강보조식품에 용돈을 챙겨드리며 야단법석을 떤다. 그러나 평소에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거나 안부 전화라도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살아 계실 때에 고등어 한마리라도 챙겨 드리는 것이 효자라고 생각한다. 돌아가신 다음 제사상에 쇠고기를 올리거나 혹은 부모님 산소에 호화스러운 비석으로 장식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효일까? 며칠 후면 다가올 ‘가정의 달’을 맞이하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대목이다. 2005-04-28
- 긴급조치 30주년으로 본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현주소 40년 세월 6·3세대, 정치권 원로로 긴조세대, 뒤늦게 조직화 움직임 보여 전대협 세대, 미래정치 주역될지 관심 1965년 6월 3일 한일국교 정상화 회담, 19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 ‘민청학련 사건’ 발표,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 발효,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7년 6·10 항쟁 ….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을 관통하며 한국 현대사를 뒤 흔들어 놓았던 사건들은 그 시기 국가권력에 저항했던 ‘세대’를 낳았다. 6·3 세대, 민청학련 세대, 긴급조치 세대, 광주항쟁 세대, 전대협 세대 등이 그들이다. 살아온 시대가 다른 만큼 각 세대를 구분 짓는 특징이 있긴 하지만 정치적 지향점에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대부분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이란 점에서 그렇다. 최근 이들은 세대별로 모임을 갖는 등 정치권 내에서 ‘세대경쟁’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스스로 실종된 역사로 평가하는 긴조세대는 다음달 13일 긴급조치 9호 30주년 기념식과 학술토론회를 갖는 등 뒤늦게 조직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김덕룡, 6·3세대 대표 정치인= 1964년 한일국교 정상화에 반대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였던 6·3 세대. 현재 정치권에 남아 있는 6·3세대로는 김덕룡(서울대 61학번)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 이재오(중앙대 64학번) 한나라당 의원, 김덕규(고려대 61학번) 국회 부의장, 문희상(서울대 64학번) 열린우리당 의장, 천영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 한명숙(이화여대 63학번) 열린우리당 의원 등이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들은 정치권 원로로 자리매김해 있다. 6·3세대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탄생한 게 민청학련 세대다. 현 정치권의 핵심은 사실상 민청학련 세대라고 봐도 무방하다. 31년전 오늘,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했다. 민청학련이라는 반정부 학생조직이 정부를 전복하려 했고,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의 주동자들이 학생들을 배후 조종해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학생·지식인은 1024명. 이중 180명은 비상군법회의에 송치돼 구속 기소됐고 인혁당계 8명은 사형선고 다음날 바로 사형이 집행됐다. 지금 정치권에 남아 있는 민청학련 관련자는 이 철(서울대 69학번) 전 의원, 열린우리당 유인태(서울대 68학번) 장영달 (국민대 68학번) 강창일(서울대 71학번) 의원, 한나라당 이재웅(연세대 73학번) 의원 이해찬(서울대 72학번) 국무총리 등이다. 김근태(서울대 65학번) 보건복지부 장관, 손학규(서울대 65학번) 경기도 지사는 민청학련 배후조정 혐의로 수배를 받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매년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회장 이 철 전 의원)’를 통해 모임을 갖고 있다. ◆중간허리 역할 ‘긴조세대’ = 70년대 유신헌법 반대데모를 주도했던 긴조세대는 민청학련 세대와 70년대를 같이 살았지만 정치적으로 커다란 조명을 받지 못했다. 유신체제에 저항한 주축이었지만 이들 스스로 ‘실종된 역사’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긴조세대 국회의원은 약 20명. 72학번에서 78학번인 이들은 현재 정치권에서 중간허리 역할을 맡고 있지만 대부분 초·재선이다. 긴조세대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은 열린우리당 이호웅(서울대 69학번) 의원·원혜영(서울대 70학번)·문학진(고려대 74학번)·김부겸(서울대 76학번)·우원식(연세대 76학번) 의원, 한나라당 박계동(고려대 72학번)·김문수(서울대 72학번) 의원 등이다. 대략 봐서도 드러나듯, 이들 정치인의 면면은 각양각색이다. 긴조세대의 한 정치인은 “대중과 함께, 조직화된 운동을 했던 전대협 세대와 달리 우리세대의 운동은 비조직적이었고 대중적이지 않았다”며 “긴조세대는 드러내놓고 운동을 할 수 없었던 시대의 산물”라고 평가했다. 17대 국회 들어 열린우리당 내 긴조세대는 ‘아침이슬’이란 모임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도하는 등 강한 인상을 주었다. 우리당 우원식 의원은 “각 세대별로 모임을 갖고 있는데 우리까지 무슨 모임을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내부 지적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이번 모임이 긴조세대의 역사적 의미를 정립하는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중운동의 시작, 광주항쟁·전대협 세대 = 긴조세대 이후 등장하는 광주항쟁 세대와 전대협 386 세대는 70년대와 달리 운동 과정에서 대중성을 확보함으로써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정치적으로도 민청학련이나 긴급조치 세대에 비해 조명을 받은 세대이기도 하다. 보통 광주항쟁과 전대협을 묶어 ‘386세대’라고 부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이들 세대를 분리해 보는 게 맞다. 광주항쟁 세대의 대표적인 국회의원으로는 열린우리당 민병두(성균관대 78학번) 송영길(연세대 81학번) 김영춘(고려대 81학번) 의원과 심재철(서울대 78학번) 한나라당 의원 등이다. 전대협 세대 국회의원은 열린우리당 이인영(고려대 84학번) 오영식(고려대 85학번) 임종석(한양대 86학번) 이기우(성균관대 85학번) 등을 포함, 10명이다. 전대협 세대는 현재 외곽에서 ‘전대협 동호회’라는 이름으로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다. 이기우 의원은 “전대협 세대에 대한 이런저런 비판과 평가가 있지만 대중운동을 거쳐 정치권에 들어왔기 때문에 향후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며 “현재 전대협 세대 정치인은 리더십 트레이닝 과정에 있다고 본다. 평가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신창훈 기자 chunsim@naeil.com 2005-04-25
- [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광주 ‘늘푸른 설비건설’ 대표 김병록 씨 죽어도 못 잊을 내 인생 최악의 날 2001년 1월 16일 오전 11시 45분경. 순천의 모 오피스텔 천정 텍스 작업을 하던 김병록 씨(54세)가 ‘억!’ 하는 소리와 함께 3미터 아래로 떨어졌다. 둔중한 신음만 흘릴 뿐, 그는 통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이 사고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워낙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전신을 압박해 오는 숨 막히는 통증도 마치 남의 일인 양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한 인부들의 우왕좌왕하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그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큰 공사를 앞두고 재수 없게 다치다니!’ 그는 곧 근처의 성가롤로 병원에 실려 갔다. 엑스레이 판독 결과, 김병록 씨의 요추 1번이 심하게 골절돼 있었다. 이틀 뒤, 그는 여섯 개의 금속 나사못을 이용하여 척추뼈를 고정한 뒤 뼈융합을 시키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 해 3월 15일에 3억짜리 전기공사를 맡기로 돼 있었거든요. 그 일을 못하게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그래, 아파서 죽겄는데도 하루라도 빨리 나갈 욕심에 수술할 때 무통제 주사, 수술 뒤의 진통제를 일절 거부했어요. 근데 담당의사가 최하 5개월은 입원해야 되고 퇴원 후에도 한 2년 동안은 일을 못할 거라고 하는 거예요.” 돈을 벌기는커녕 당분간 바깥출입도 자유롭지 못하게 생겼으니 그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장해 판정도 6급 5호가 나왔다. 공단에서 조사가 나와 평균 임금을 물었을 때 멋모르고 “한 5만 원 적어 놓으쇼!” 하고 대답한 게 실책이었다. ‘노동법’에 무지한 탓에 그저 임금을 싸게 이야기하는 게 좋은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70~80만 원은 받았어야 할 휴업 급여를 50~60만 원밖에 못 받았다. “지금 당장 현장에 가도 기술이 필요한 일은 15만 원 받거든요. 93년 대우전기 공사부 대리 할 때도 월급이 3백이었어요. 직장생활 했던 기록도 다 남아 있구요. 근데 내가 다칠 때는 이걸 몰랐어요. 억울하지만 어쩌겠어요. 일만 할 줄 알았지 노동법에 대해서 너무 몰랐던 거죠. 노무사 찾아가 보니까 소송 과정이 복잡하더라구요. 그래서 ‘에이, 괜히 골치 아픈 일에 메이느니 하루 빨리 나아서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것이 낫겠다.’하고 마음을 접었죠.” “제 고향은 지금 한창 홍길동 생가를 짓고 있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예요. 제 아버지는 우리 8남매 키우느라 평생 뼈 빠지게 일만 하신 분이죠. 낮에 농사일 하시고 밤에는 공사장에 야간 경비 서시고 잠도 한두 시간 밖에 못자요. 그렇게 고생하셔서 악착 같이 자식들 공부시키셨어요. 저야 야간고등학교 간신히 마쳤지만 내 밑에 동생들은 다 대학 나왔거든요. 지금도 생각나는 게 저 장성중학교 갈 때 논 두 마지기 팔아서 교복이랑 가방이랑 등록금이랑 자전거랑 마련해 주셨어요.” 야간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광주로 나온 그는 친척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 운영하는 자동차 부속품 가게에서 먹고 자며 일을 거들었다. 학비 대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월급이 따로 있었겠는가. 비록 주경야독하는 신세지만, 급우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독한 놈’ 소리를 들어가며 밤 한두 시까지 책과 씨름하는 모범 청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동안 자동차 부품 회사를 다니던 그는 70년대 중반에 서울로 올라와 황학동에서 청과물도매를 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부인 김경자 씨. “지금은 저렇게 건장해졌지만, 처녀 적에는 아주 날씬하고 다리가 예뻐서 미니스커트가 잘 어울렸지요. 제가 그때 청과물을 오래 하지는 않았는데 아마 저 사람 만나려고 서울에 올라왔던가 봐요.” 1975년에 결혼한 두 사람이 이듬해 둥지를 튼 곳은 경기도 포천에 있는 한 농장이었다. 5만4천여 평에 달하는 그 거대한 농장의 소유주는 당시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병록 씨의 고종사촌 형으로,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한 장준하 씨의 부검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젖소 50~60두에 닭 3만 마리, 사료 공장까지 거느린 그 농장에 오는 관리인마다 한 몫 잡아서 나가곤 했다니, 사촌 되는 이가 김병록 씨에게 관리를 맡긴 이유를 알만 하다. 아버지를 닮아 성실하고 부지런한 데다가 착하기까지 한 김병록 씨는 10원 한 장 허투루 돌리지 않고 새벽부터 밤까지 소처럼 일했다. 76년부터 82년까지 7년 동안 일한 대가로 손에 쥔 것은 일금 3백만 원과 위염. 83년에 광양에 내려와 부인 김경자 씨는 만두집을 열고, 김병록 씨는 83년부터 89년까지 고창기계시스템 기술관리과장, 90년부터 대우전기 공사부 대리, 96년부터 금호전력 공사과장 등 쉬지 않고 일했는데도 아직까지 내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했다. 슬하에 둔 자식은 하나뿐이지만 일곱이나 되는 동생들 치다꺼리에 돈 모을 겨를이 없었던 것.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남의 농장과 가겟방을 전전하며 자란 아들 재일 씨가 구김살 없이 성장해 준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지금까지 한 54년 살아오면서 느끼는 건 사람이 불량기도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남의 것은 10원 한 장 건드리지 않고 사기성 없이 곧이곧대로 산 결과가 이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돼지 한 3천 두 기르는 후배가 있어요. 내가 회사 생활할 때 한 팔년 데리고 있었던 얘거든요. 남보다 기술도 빨리 전수해 주고 반장 주임도 막 시켜 주고 그랬는데 나중에 알고 봉게 32평짜리 아파트도 사놓고 그랬더라구요. 저요? 그 회사 나올 때 305만 원 갖고 내려왔어요. 팔잔가 봐요, 허허….” 김병록 씨가 요추 골절로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안 그래도 복잡했던 가정은 더욱 엉망이 됐다. 90년대 후반부터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면서 집안의 경제 사정은 몹시 좋지 않았다. 부인 김경자 씨가 광양에서 십여 년간 해 오던 ‘신포우리만두’ 체인점은 IMF의 된서리와 잇단 오토바이 사고로 간판을 내린 지 오래였다. 전국을 떠돌며 음악을 하던 아들은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97년에 얻은 손녀 유림이는 쑥쑥 자라는데 그 밑감당을 어떻게 다 할 것인가. 그래도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암담함 속에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근로복지공단 여수지사에서 보내 준 광주재활훈련원 소개 책자에 그는 눈이 번쩍 띄었다. 그는 7개월여의 병원 생활을 끝나자마자 광주재활훈련원 산업설비과에 입교했다. “나보다 더 심한 장해를 입고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동기생들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어요. 마정용 선생, 김창현 선생 등 도움을 주려는 분들도 많았구요. 제가 원래 성격이 굉장히 내성적인 편이거든요. 그런데 재활훈련원에서 학과 수업과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어요.” 한 가지, 훈련 기간 동안의 가족들 생계 문제가 걱정거리였다. 6개월이 지나자 그는 훈련원에 취업 허가를 얻어 전기공사며 보일러공사 일을 다녔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었으나 그걸 걱정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온수온돌기능사, 공조냉동기계기능사, 보일러취급기능사 등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공부에 몰두했다. 얼마나 공부에 몰두했던지 선생들마저 독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가 이처럼 무리를 하면서까지 열심을 부리는 이유가 있었다. 훈련원을 마치는 대로 창업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에서는 김병록 씨 같은 산재 노동자를 위해 자립점포 임대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마침내 2003년 12월 1일, 김병록 씨는 광주 광산구 월곡동에 ‘늘푸른 설비건설(062-953-4616)’이라는 멋진 간판을 올렸다. 사무실 인테리어는 물론 가게 공터를 이용해서 다섯 식구가 생활할 가건물도 그의 손으로 직접 했다. 때마침 음악 활동을 정리하고 돌아온 아들이 몸이 성치 않은 아버지의 일을 돕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뒤늦게 신학대를 졸업한 아내도 광양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을 개시했다. ‘산재’라는 비싼 수업료는 물었지만 그는 새로 얻은 인생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몸의 한쪽 마비되지 않을 정도로 다친 것이 얼마나 다행하며, 2005-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