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3·1절을 맞아 찾아간 ‘항일의 섬’ 소안도 20명이 독립유공자 포상 … 2002년부터 성역화 사업 한창 해방후 보도연맹사건으로 276명 죽어 … 진실규명 간절히 바래 사람들은 ‘전남 완도’하면 가사문학의 보고인 보길도, 장보고의 근거지였던 청해진을 먼저 떠올린다. 또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청산도가 있다. 그러나 완도는 소안도가 있음으로 해서 그 이름값을 한다. 소안도는 행정구역으로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이다. 완도 화흥포항에서 뱃길로 한 시간을 가는데, 보길도와 청산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관련기사 20면 ◆주민 800명이 ‘불령선인’ = 일제치하 때 섬 주민 8000명 중에서 800명이 이른바 ‘불령선인’으로 감시를 받았다. 일제 36년 동안 섬 주민이 투옥된 기간을 추산하면 300년이 된다. 섬 주민들은 이웃이 감옥에 가면 그들을 생각하며 겨울에도 요를 깔지 않고 잤고, 손가락을 베어 투쟁의지를 다진 사람도 여럿이다. ‘해방의 섬’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곳이다. 이들의 항일투쟁은 좁은 섬에 머물지 않았다. 송내호(1895∼1928) 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청년 교육 노농 사상 비밀결사운동을 벌여 운동역량을 축적한 소안면 사람들은 상해임시정부, 중국, 일본 등지로 투쟁의 무대를 넓혀나갔다. 일제 당시 전국 13도 218개 군 중 가장 작은 완도군에서도 제일 작은 면인 소안면에서 20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27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의성 김씨 내앞(川前) 문중과 견줄 만하다. 내앞 문중이 경상도 안동을 근거지로 한 양반가문이라면, 소안면 사람들은 전라도 작은 섬에 기반을 둔 평민들이다. 송내호 정남국 김남두 김사홍 김통안 박흥곤 송기호 이각재 이정동 정석규 최형천 김경천 강정태 신준희(이상 1990년 독립유공자 서훈) 신만희 이갑준 박기숙 김홍기 백형기(이상 1993년 서훈) 정창남(2005년 서훈)이 그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소안 항일운동기념관에는 소안도가 배출한 독립운동지도자 88명의 부조와 사진이 모셔져 있다.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분들은 부조를 만들어 놓았다. 88명은 일제하에서 민족주의 노선을 걷기도 했고,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하기도 했다. 일부 인물은 해방 후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다. 소안면 사람들은 이 분들이 식민통치 시절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에서는 모두 하나였다고 말한다. ◆사회주의 계열주도 … 1990년부터 재평가 =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가들이 주도한 소안항일투쟁사가 제대로 평가받는데 해방 후 수십 년 세월이 필요했다. 소안에 대한 합당한 평가는 잃어버린 반쪽의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과정과 일치했다. 해방 후 이념대립에 휘말린 소안 사람들은 1989년 전까지는 감히 ‘항일’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수많은 소안사람들이 연좌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안사람들은 독립유공자 김사홍 김경천의 후손인 김진택(2000년 사망)씨와 정병호(현 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씨를 중심으로 선조들의 항일운동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벌였다. 소안항일투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89년 이후다. 1990년 소안면에 조그만 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졌다. 이 때 처음으로 송내호 등 14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1990년부터는 해마다 소안학교 설립일인 5월 16일에 맞춰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2001년에는 방대한 분량의 ‘완도군 항일운동’이 출간됐다. 2002년부터 도비와 군비 30억 원을 투입하는 성역화사업을 벌여 옛 소안학교 교사를 복원하고 그 옆에 항일운동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 앞 바다에 해상관광시설도 세울 계획이다. 기념관을 세울 때 면민들은 십시일반으로 1억4000만원을 모금했다. ◆명예회복은 아직도 미완 = 소안 사람들의 명예회복은 이제 절반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1950년 소안 사람 276명이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집단 처형됐다.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김장수 완도군의원은 “김이나 전복을 양식해서 생활수준도 높아졌고, 항일 공적도 인정을 받았지만, 소안사람들은 해방 후 가족들이 왜 떼죽음을 당했는지 알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지난 100년 동안 소안사람들이 겪은 고통은 우리 사회가 함께 풀지 않으면 안 되는 큰 짐이다. /전남 소안도= 신명식 기자 msshin@naeil.com 2005-02-28
- 인터뷰-의정부교도소 김건휘 소장 “사회가 진심으로 그들을 받아들여주고 일자리를 줘야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의정부교도소 김건휘 소장의 말이다. 김 소장은 사회생활 시작부터 지금까지 줄곧 교정분야에서 잔뼈가 굵어온 베테랑이다. 교정직 공무원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는 ‘반죄수’ 생활이 30년이 넘은 것이다. 누구보다 일선 교정현실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일제시대에 지은 낡은 건물에 빈대와 이가 득실거리는 열악한 환경을 실제로 겪었다. 또 당시 반찬은 모두 소금으로 절인(염장) 것이었고, 난방까지 형편없었다. 열악한 환경에 보리밥을 주식으로 하면서 영양이 결핍해져 수용자들 얼굴은 대부분 누렇게 떠 보이는 부황현상이 유행했다. 그래서 정부가 나서서 도입한 것이 ‘콩밥’ 공급이다. 제대로 영양을 맞춰줄 수 없으니까 ‘콩밥’을 통해 부족한 영양을 대신 채워준 것이다. 감옥살이 하는 것을 두고 ‘콩밥 먹는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라고 한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교정환경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는 것이 김 소장 평가다. 세월만큼이나 사연도 많다. 기억에 남는 일로는 오래전 한 젊은 친구가 옥살이를 하는데 늙으신 노모가 어렵게 옥바라지를 해 안타까운 마음에 잘 돌봐준 적이 있다. 그 인연은 출소한 뒤에도 이어졌다. 나중에는 김 소장이 중매까지 서게 됐고, 다행히 결혼이 성사돼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대학입학을 눈앞에 두고 3년형을 받아 들어온 젊은 친구가 의정부교도소에서 영어반을 수료하고 각종 자격증까지 취득한 뒤 지난 2월 가석방을 받아 대학에 다시 입학한 경우를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다. 이 학생은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워드 자격증 1급을 땄고, 외부에서 개최하는 외국어 웅변대회에서 3등을 차지했다. 당시 김 소장은 학생의 가석방을 위해 직접 의견서를 작성해 줘 3년형 가운데 2년 6개월을 살고 가석방 되는 행운을 얻었다. 얼마 전에 학생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와 “교도소에 가면 자식 인생이 완전히 망가지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성숙해지고 사람이 달라져서 너무 기쁘고 고맙다”면서 눈물까지 흘리며 감격하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뿌듯하다. 김 소장은 “사람을 사람답게 취급하는 것이 바로 교정”이라며 “인간존중의 행형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2005-03-18
- <내일시론>지하철 안전도 아직 멀었다(문창재 2005.02.18) 지하철 안전도 아직 멀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꼭 2년 되었다.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일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지하철 안전도가 그리 개선되지 않아 타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올해 신년 벽두 서울 지하철 7호선에서 일어난 방화사건은 언제든지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경보음이었다. 그런데 그저 끔찍한 일이 있었던 날로 기억하고, 희생자들이 참 안됐다고 조의를 표하는 정도로 2주년 기념일은 지나가고 있다. 정부도 지방 자치단체도 지하철 공사도, 성심껏 문제점을 보완해 지하철을 안전한 시민의 발로 다시 태어나게 해 국민의 용서를 구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싸구려 전동차 계속 납품되고 전동차 불연화도 지지부진 199명의 인명을 앗아간 대구지하철 참사의 원인은 첫째 불에 타기 쉬운 내장재로 된 전동차였고, 둘째 위급상황을 서로 알려 더 큰 피해를 막아야 할 통신 시스템의 불비였다. 배연(排煙)시설이나 대피 유도시설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것도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서울 지하철 7호선 방화사건은 대구사건의 재판(再版)이었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이 없이 벌써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다. 승객의 방화로 전동차에서 불이 난 것도 똑같고, 기관사-사령실-역무원 사이의 3각통신이 잘 되지 않아 불붙은 전동차를 몰고 18분이나 달린 것도 그렇다. 승객과 역무원들이 달려들어 불을 끄지 않았다면 대구 못지않은 참사로 번질 뻔 했다. 문제점을 몰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면 직무태만이라는 비판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문제점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같은 사고가 일어났다면 직무태만이 아니라 직무유기다. 대구사건 직후 정부는 지하철 안전관리 체계를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개선하겠다고 민관합동 안전기획단을 만들어, 현장조사와 선진국 사례연구 등을 통해 종합 안전대책이란 것을 내놓았다. 거기에는 전동차와 역 시설 불연화, 3각 통신체계 구축, 대피 및 배연시설 완비 등 모든 것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2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금년 2월 중순 안전관리 실태 특별점검에서 드러난 사실은 ‘달라진 것 별로 없음’이다. 불쏘시개 전동차로 불렸던 싸구려 전동차가 계속 납품되고 있는 사실이 그것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서울지하철공사는 지난해 1월 노후차량 교체를 위해 공개입찰로 전동차를 사들였는데, 대당 낙찰가는 대구 것보다 600만원이 싼 7억 9000만원이었다 한다. 우리나라 업체가 인도와 터키에 납품하는 전동차 값은 대당 16억원대, 홍콩 것은 21억원대다. 그 반값, 3분의 1 값으로 만들어진 전동차가 얼마나 안전할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아직 더 쓸 수 있는 전동차들의 불연화 비율도 지지부진이다. 전국에서 운행 중인 전동차 6514량 가운데 1992량의 내장재가 불연화 되었다 한다. 그것도 의자를 알루미늄 제품으로 바꾼 정도고, 천장과 벽과 바닥을 모두 불연소재로 바꾼 것은 많지 않다. 가연성 유독성 마감재로 인공동굴처럼 만들어 놓은 승강장 벽과 천장도 바꾸겠다고 했지만 아직 한곳도 변화가 없다. 승강장과 대합실 같은 곳에는 가연성 소재로 제작된 광고판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배연시설도 개선된 것 같지 않고, 좁은 승강장과 계단의 혼잡도를 해소하는 대책은 까마득해 보인다. 유사시 3각 통신체계도 아직 대부분 미확립 더욱 큰 문제는 통신체계가 거의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 5호선 등 극히 일부 노선을 제외하고는 아직 유사시의 3각 통신체계가 확립되지 않고 있다. 국가통합지휘무선통신망 구축사업과은 아직 최종계획이 확정되지 않아 빨라야 2010년 이후에 구축된다는데, 그동안 지하철 사고야 나든 말든 알 바 없다는 것인가. 대구 참사 때까지 우리나라 지하철에는 안전도에 대한 기준도 없었다. 업자들이 제시하는 것이 그대로 통했다. 인도보다 값싼 불쏘시개 전동차가 아직 납품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예산타령을 하기 전에 불요불급한 분야의 사업을 줄여서라도, 지하철 같은 대량참사가 일어날 수 있는 분야의 안전도를 높이기에 행정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오늘 그것을 다짐하는 것이 망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반성이다. 문 창 재 객원 논설위원 2005-02-17
- <신문로 칼럼>국책사업 표류 서둘러 끝내자(이두석 2005.02.16) 국책사업 표류 서둘러 끝내자 이 두 석 본지 고문 개발인가 환경인가. 환경은 뒷전이고 개발이 먼저인가. 군사독재 시절부터 민주화 정부에 이르기까지 개발과 환경보전의 우선순위를 둘러싼 논란과 갈등이 좀처럼 고개를 숙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바람에 수조 원의 예산이 투입된 대형 국책사업이 줄줄이 표류해 천문학적인 비용손실이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과 고통이 되고 있다. 문제는 정치권이 개발우선과 환경일방주의로 빚어진 사회적 갈등에 대한 조정 해소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노무현 정권 출범 후 순조롭게 진행되는 국책사업을 찾아보기 어렵다. 설 연후전인 3일 경부고속철 천성산 터널 공사 중단에 이어 4일 새만금 사업 중지 행정소송에서 정부가 패소함으로써 장기간의 사업차질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부안 원전 수거물 관리시설(원전센터)을 비롯해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의 사패산터널 공사와 경인운하, 한탄강 댐 등 주요 국책사업이 환경파괴와 경제성 논란에 휩쓸려 좌초위기를 맞고 있다. 환경뒷전 개발독재 유물 답습 이처럼 대형 국책사업이 흔들리는 이유는 간단치 않다. 멀리 따지고 보면 개발독재정권시절부터 관행이었던 환경뒷전 개발우선주의가 빚은 후유증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사업성을 따진 경제논리보다 표밭을 노린 정치논리로 사업을 결정하고 환경평가를 소홀히 한 채 무리하게 밀어붙인 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 종교나 환경단체들이 단식과 같은 극한투쟁으로 계속해 국책사업을 방해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물론 환경보전은 중요하다. 하지만 먹고사는 것도 긴요하다. 민생과 경제 살리기는 우리의 최대 국정과제다. 더구나 이미 부산고법이 경부고속철 천성산 터널 공사의 재개를 결정했으며 국민의 혈세로 조성된 수 조원의 공사비 낭비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도 충분하다. 그런데 오로지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원리주의적 투쟁방식에 법원결정이나 명분이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면 아무도 경부고속전철을 완공하고 새만금사업을 마무리 할 수 없다. 한술 더 떠 설 연후 직전에 달아올랐던 국책사업 표류 문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세인의 망각 속에 잊혀지고 있다. 으레 그렇듯 이 나라 냄비 언론도 하루 이틀 끓어오르다 이미 식은 지 오래다. 그리고 정부당국은 행정법원의 새만금사업 중단 결정에 대한 대법원 항소 등으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오직 사법부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긴 채 허송세월을 하고 있다. 과연 이렇게 대충 넘어가도 되는 것인가. 불과 몇 달 후면 다시 터질 천성산 터널과 새만금사업 중단문제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정부당국과 환경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근본적인 해법을 찾아 더 늦기 전에 국책사업의 표류를 끝장내야 한다. 해법은 복잡한 것 같지만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국책사업을 정치논리가 아닌 경제논리로 결정 추진하는 것이다. 올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나 내년 지방선거 그리고 2007년 대선 때 표밭을 의식하지 않고 사업의 타당성 검토와 지역주민의 여론을 충분히 반영해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개발과 환경갈등’은 집권여당을 비롯한 정치권이 총선이나 대선 때 허황된 선거 공약으로 개발위주 국책 사업을 남용해 빚어진 것이다. 예컨대 지금 표류하고 있는 경부고속철과 새만금사업은 노태우 정권 때 결정된 것이며 사업성보다 표밭을 겨냥한 정략적인 판단이 앞섰다는 것이 중론이다. 정치논리배제 개발-환경 조화를 여기에 한 술 더 떠 2002년 16대 대선 때 당시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이 불교계의 반발을 무마키 위해 경부고속철 천성산 터널공사의 전면 재검토를 공약으로 내세워 사태를 악화시켰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해법은 개발과 환경을 어떻게 조화하느냐이다. 사업구상단계부터 정부당국과 이해 관계자의 참여아래 대화와 토론을 통해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시민배심원제와 공론 조사 등 심의적 의사결정방식을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 이런 방식은 선진국에서 일반화되어있다. 정부도 올 상반기에 갈등관리법을 제정해 갈등관리조정센터를 설립할 예정이라고 한다. 비록 번거롭고 시간이 걸릴지라도 실패 확률이 낮고 후유증으로 인한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해법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개발과 환경의 갈등 관리가 성과를 거두려면 이해당사자들이 신뢰를 바탕으로 꾸준한 참여와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극한투쟁도 불도저식 강행도 이젠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5-02-15
- 창립 19주년 맞은 ‘사랑 실은 교통봉사대’ 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사랑실은 교통봉사대’란 시민단체의 창립 19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지난 86년 만들어진 교통봉사대는 전국적으로 40여개 지대를 갖추고 회원수도 1만4700여명에 이르는 작지 않은 단체다. 회원들은 모두 택시기사 아저씨들. 말 그대로 택시를 운전하며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80년대 중반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이 사회적 관심사로 부각된 것이 교통봉사대가 만들어진 계기가 됐다. 평범한 택시기사였던 손삼호(사진) 대장은 이 소식을 듣고 ‘심장병을 앓는 어린이의 부모 중에는 택시를 모는 사람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들을 돕기 위한 방법을 찾게 됐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택시운전을 하면서 승객들에게 껌을 판매하는 일이었다. 손 대장은 심장병 어린이 돕기운동을 주위 동료 택시기사들에게 전파했고, 이들이 껌을 팔아 100원, 200원씩 모은 돈으로 심장병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수술 받도록 해주었다. 지금까지 교통봉사대를 통해 수술을 받은 어린이는 총 785명, 지원금액도 23억7000만원에 달한다. 이들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이제는 대부분 대학병원에서 수술비의 30%를 부담해주고 있다. 그래도 심장병 어린이 한명을 수술하려면 보통 300만원의 비용이 든다. 100만원을 만들려면 1만5000통의 껌을 팔아야하니까 수술을 하려면 껌 4만5000통을 팔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사실 손 대장이 심장병어린이 돕기 운동을 시작할 때만해도 주위의 비웃음을 산 적이 적지 않았다. ‘어느 세월에 껌을 팔아 수술비를 마련하겠느냐’는 핀잔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작은 정성을 모으려는 손 대장의 노력은 큰 기적을 만들었고, 핀잔을 주던 이들도 어느새 적극적인 지지자들이 됐다. 이같은 기적이 가능했던 데에는 무엇보다 국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손 대장의 얘기다. 손 대장은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국민들은 정이 많다는 사실을 심장병 어린이 돕기 운동을 하면서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수술을 받은 어린이 중에는 캄보디아 어린이 4명도 포함돼 있고, 이 소식이 인근 태국으로 알려지면서 방콕 교민들 중에서도 함께 하는 이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교통봉사대의 선행이 해외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교통봉사대는 심장병 어린이 돕기 운동 외에도 크고 작은 선행을 해왔다. 어린이 놀이터 환경 개선운동도 그 중 하나다. 운전하면서 어린이들이 위험하게 길거리에서 뛰노는 이유를 찾아보니 놀이터 환경이 엉망이었다는 것. 그래서 직접 놀이터 환경개선에 나섰다. 틈나는 대로 어린이 놀이터를 찾아가 고장난 놀이기구를 보수하고, 주변 청소를 하는 등 어린이들이 마음놓고 뛰어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갔다. 이들의 노력은 정부에 알려졌고, 공무원들이 나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효행봉사’도 교통봉사대가 매년 실시하는 봉사활동의 하나다. 어버이날이 되면 역과 버스터미널을 찾아 노인들에게 무궁화꽃과 2000원씩 용돈도 드리고 있다. 교통봉사대 회원들은 이밖에도 어린이와 장애자, 노약자 우선 태우기 등 일상생활에서의 선행을 실천해왔다. 그렇게 19년을 지낸 손 대장은 그동안 가장 큰 성과로 “선행을 하면서 우리 스스로 착한 사람이 됐다는 것”을 꼽았다. 좋은 일을 한다고 주위의 격려를 받다보니 이제는 ‘나쁜 짓’을 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다. 이제 성년의 나이가 된 교통봉사대의 새로운 목표는 북한을 돕기 위한 준비작업을 해나가겠다는 것. 통일을 대비해 북한돕기에 교통봉사대가 한 몫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손 대장은 “지금은 여러 가지 장벽에 막혀 본격적인 활동은 못하고 있지만 어려운 북한 주민들을 돕고 싶다”며 “언제라도 북한주민 돕기에 나설 수 있는 준비를 해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2005-03-03
- [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2004년 근로자연극제에서 국무총리상 수상한 ‘Actor 2002’ 대표 김석진 아마추어 연극의 모범답안 ‘김장하는 날’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가면 있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 가도 있다. 연극에 대한 열정과 끼로 뭉친 직장인 극단 ‘Actor 2002’의 연습실 말이다. 신입단원 워크숍이 진행되고 있는 논현동 지하 연습실 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25평 남짓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단원들의 연습이 한창이다. 이방인에겐 다소 썰렁하게 느껴지는 지하실의 냉기도, 낯선 이의 방문도 아랑곳없이 십여 명의 단원 모두가 연습에만 열중하고 있다. “어떤 놈이야! 도대체 어떤 우라질 놈이 이런 짓을 한 거야!” “계십니까? 김치국 선생 계십니까? 아무도 안계세요?” “어, 이것들이 진짜로 왔네! 진짜로….” “뭐해요? 누가 왔나 본데 문 안 열어 주구….” “열어 주지 마! 열어 주지 마!” 신입단원들과 그들의 연기지도를 맡은 선배가 서너 명씩 패를 지어 연습을 진행하는데,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대사들과 후배들의 발성과 액션을 지도하는 선배들의 코멘트가 뒤섞여 흡사 경매장에라도 들어온 기분이다. 시골 이장처럼 느긋한 걸음으로 연습실 구석구석을 돌며 후배들의 연습을 지켜보는 김석진 씨(36세)의 눈길에는 연극과 사람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 실려 있다. Actor 2002의 대표로서 극단을 이끌어 온 그는 직장에서는 이벤트 업무를 총괄하는 기획팀장이지만 연극으로 만난 단원들 사이에서는 ‘대박 김’이나 ‘김 작가’로 통한다. 실제로 김석진 씨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단원들과 똘똘 뭉쳐 역량을 쌓은 끝에 2004년, 극단을 창단한 지 햇수로 3년 만에 ‘대박’을 터뜨렸다.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창작극 ‘김장하는 날’이 근로자연극제 최고상인 국무총리상과 작품상을 거머쥔 것. “사실 2003년도에도 근로자연극제에 출품을 했었어요. 그때 제가 좀 시도를 했던 부분이 뭐냐면 보통 한 극단에 한 작품씩 출품을 하잖아요. 근데 저희는 두 작품을 했어요. ‘불 좀 꺼 주세요’하고 ‘하녀들’이라는 기존 극이죠. 결국은 두 작품 다 미역국을 먹었지만 그걸 준비하고 연습하는 과정에서 배우고 느낀 것이 참 많았죠. 하여간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려고 많이 노력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 2004년도에 창작극을 출품해서 최고상을 타게 된 거죠.” 몇 개월 동안 머리 속에서 궁굴리기만 하다가 ‘맘먹고 쓰기 시작한 지 4일 만에’ 탈고했다는 ‘김장하는 날’에는 전북 정읍이 고향인 김석진 씨의 어린 날 기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김장하는 날, 일손을 거들기 위해 모여든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걸쭉한 입담과 구수한 사투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난한 시골 농가의 가정사를 통해 우리 시대 가족과 이웃의 의미를 묻는 이 작품은 연극제 심사위원들에게 ‘아마추어 연극이 지향해야 할 답안을 보는 듯했다’는 격찬을 듣기도 했다. 실험하고 도전하는 연극의 매력 김석진 씨가 연극을 시작한 것은 1996년. 이벤트 학원에서 만난 후배의 소개로 ‘셰익스피어 1986’이라는 직장인 극단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연극에는 문외한이었던 그가 ‘정통 셰익스피어극’을 지향하는 그 극단에 들어간 것은 연극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술 마시는 게 좋아서였다. 그런데 몇 차례의 공연에 스텝이나 배우로 참여하면서 차츰 연극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공연을 준비하고,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진정한 사람의 관계와 인간의 삶에 대해 배우게 돼요. 연극이라는 게 음악회처럼 개인이 나와서 발표하는 게 아니잖아요. 전체적인 조화와 팀워크가 필요한 작업이죠. 직장인들이 없는 시간 쪼개서 공연을 준비하고 무대에서 연기를 해보는 것도 상당히 유익한 경험이지만, 이것도 작은 사회집단이다 보니 연습하면서 서로들 싸우기도 많이 싸우거든요. 그 과정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되는 게 바로 연극의 매력이 아닐까요.” 연극의 ‘맛’을 알고 연극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면서 갈등도 생겨났다. ‘맥베드’, ‘로미오와 줄리엣’, ‘시저는 죽기를 거부했다’ 등의 공연에 참여하면서 그가 얻은 결론은 ‘셰익스피어극은 내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추어 집단이 만드는 연극이라면 좀 더 새롭고 실험적인 연극에 도전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2002년, ‘셰익스피어 1986’을 박차고 나온 김석진 씨가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몇몇 사람들과 만든 직장인 극단이 바로 Actor 2002였다. 이들의 ‘온라인 연습실’이라 할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Actor2002 )의 회원은 350명이지만 실제 연습에 상시적으로 참여하는 인원은 25~30명 선. 구성원의 연령과 직업도 다양해서 이번 워크숍에 참여한 신입단원 중에는 10대의 고등학생도 있고, 가정이 있는 40대 직장인도 있으며,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연수원에 다니는 이도 있다. 그러나 결혼해서 가정을 가졌거나 40대에 진입한 단원들의 충성도는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Actor 2002를 이끌어가는 주축은 사실상 20~30대 직장인들이라고 봐야 한다. 바쁜 직장인들이 연극을 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기 연습일은 일주일에 두 번이지만 매년 무대에 올리는 정기 공연과 워크숍 공연, 근로자연극제 시기가 다가오면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장 다니랴 연극하랴 정신없이 돌아치는 세월이 부담스럽기도 하련만, 이 ‘연극 폐인’들은 연습이 없는 날이면 인터넷 카페에 모여 회포를 풀어야 직성이 풀린다니 담배보다 더 끊기 힘든 게 연극의 매력인가. ‘직장 일과 병행하는 게 힘들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뜻밖에도 김석진 씨는 ‘병행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제가 직장에서 공연이나 콘서트, 지역축제 쪽 일을 많이 하는데요. 연극하고 이벤트가 무대 음향이나 조명 등 유사한 부분이 많아서 여러 가지로 공부가 많이 돼요. 예를 들어서 이천 도자기축제를 기획한다고 하면 그 축제가 왜 만들어졌는지를 단막극 형식으로 만들어서 극을 공연하기도 하거든요. 바로 그런 부분들이 상통이 되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를 만들고 싶어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김석진 씨가 가장 자주 입에 올린 단어는 ‘공부’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공부에 포한이 진 사람인지도 모른다. 본래 그가 공부하고 싶었던 분야는 이벤트 쪽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학 입시를 칠 무렵에는 아예 이벤트학과라는 게 없었고, 하는 수 없이 방송연예 쪽 학과로 방향을 튼 그는 연거푸 세 번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에라!’ 하는 심정으로 해병대에 자원했다가 제대 후 1년 동안 서울의 한 이벤트 학원을 다녔다. 결국은 그 학원이 복덩이였다. 원대로 이벤트 회사에 취직하게 된 것도, 연극을 알게 된 것도 다 학원에서 맺은 인연 덕분이니 말이다. 그러나 취직은 결코 끝이 아니었다. “막상 이 업계에 들어와 보니까 공부해야 할 게 너무 많았어요. 이벤트라는 분야가 굉장히 광범위해서 다양한 방면의 지식이 필요했고, 아이템도 계속 개발해야 했지요. 결국 98년도에 방통대 방송정보학과에 입학했는데 이쪽 일의 특성 때문에 일하면서 공부한다는 게 쉽지 않대요. 지역 문화관광축제 쪽 일을 하다 보면 지방 출장이 잦은데 한번 가면 보름씩, 한 달씩 있다 오거든요. 툭하면 시험도 못 치르고, 작년 2월에야 겨우 졸업했어요.” 10년 세월을 이벤트 일에 쏟아 부은 그의 연봉은 3500만 원. 메이저급 회사와 비교하면 많다고 할 수 없는 액수지만 어차피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다.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집안 대소사를 위해 붓고 있는 ‘6남매’ 곗돈과 부모님 용돈이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그밖에 기본적인 생활비와 차량 유지비, 연극 활동에 소요되는 비용을 제하고 남는 돈은 ‘언제 할지 모르는’ 결혼을 위해 저축하고 있다. 이벤트 분야에 십년 세월을 쏟아 부은 그는 한때 이벤트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공연, 콘서트, 지역축제, 스포츠이벤트를 전문으로 하는 (주)아트카오스의 기획팀장이다. 클라이언트가 의뢰한 행사 2005-03-02
- <사람과 사람>고양여성민우회 박옥기 대표 “민우회 활동 8년을 되돌아보니 참 재미있고 즐거웠던 시간이었어요. 이제까지 어디에서도 그렇게 재미있게 놀아 본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민우회 회원들과 즐겁게 생활하고 함께 고민하며 내 자신이 스스로 많이 컸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아이를 키우며 알뜰살뜰 집안일을 돌보는 평범한 주부였던 박옥기씨. 그러나 세상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항상 숙제처럼 다가왔다. 이런 이유로 지난 87년 여성민우회가 고양에 둥지를 틀자마자 민우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렇게 즐겁고 재미나게 8년이란 세월을 보낸 후 박씨는 고양여성민우회의 대표가 됐다. 대표라는 자리가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새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고양여성민우회와 인연을 맺고 끊임없이 발전하고 성숙해졌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나 함께 해온 회원들이 있기에 담담하게 주어진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박 대표는 “저 혼자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못할 일이다. 혼자라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지금까지 회원들과 함께하며 힘을 받고 힘이 났던 것처럼 앞으로도 즐겁고 신명나게 회원들과 함께 일할 계획이다”라고 말햇다. 고양여성민우회는 올 한해 마을 공동체 문화를 내실 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회원들 한명 한명을 정성껏 만나고 회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더불어 잘사는 공동체를 일구도록 움직이겠다는 것. 또한 현재 운영중인 민우회 생협을 지역단위의 생협으로 발전시킬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다가올 2006년 지방선거에서 고양시 여성의 생각과 의견을 담아 낼 수 있는 방도와 모델을 찾고자 준비하고 있다. 박 대표는 여성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주체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남편과 아이를 위한 생활과 삶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삶과 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것을 권한다. 박 대표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올바르게 인식하면 일상이 즐겁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너그러워진다”며 “민우회는 언제나 모두에게 열려있으니 수다를 함께 떨 친구가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오라”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양지연 리포터 powerttp@naeil.com 2005-03-02
- 여당 전대후보 ‘형형색색 리더십’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 나설 후보들이 이번주 내내 출마 선언 릴레이를 펼치고 있는 가운데, 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색깔’을 대변해줄 구호를 앞세워 선명성 경쟁에 나서고 있다. 이 짧은 구호는 ‘실용이냐 개혁이냐’하는 후보들간 노선 경쟁 양상과 맞닿아 있어 주목된다. 현재 문희상 장영달 신기남 한명숙 염동연 송영길 유시민 김원웅 임종인 의원 등은 출마를 공식 선언한 상태며 김두관 전 행자부 장관, 조배숙·이석현 의원, 윤덕홍 전 교육부 장관 등은 출사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후보들은 대부분 “개혁은 반드시 달성돼야 하는 것”이라고 전제하며 실용과 개혁을 대비되는 개념 혹은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는 것은 ‘논리적 오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개혁을 강조하는 목소리의 ‘톤’은 후보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른바 실용주의 노선을 견지한 후보들은 “전략 없는 개혁은 민생과 유리된 공허한 원리주의”라며 개혁세력을 겨냥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일명 개혁파는 “원칙 없는 실용은 야합이자 개혁 후퇴”라며 반박,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실용파의 선두격(?)인 문 의원은 출마의 변에서 “우리의 개혁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며 “국민과 함께 가는 개혁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그 책임은 당이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 의원은 이번 선거에서 ‘강력한 리더십, 통합의 리더십’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개혁 속도조절론자이자 실천적 개혁주의자”임을 자임하고 있는 염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다시피 큰 산이 있으면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며 “중도적 개혁정당이 우리당의 정체성”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장영달 신기남 의원 등은 ‘개혁’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다. 장 의원은 “원칙없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세월을 허송하면서 당의 개혁 정체성을 훼손시켰다”며 “실용주의 저변에는 패배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강조, ‘실용노선’에 명확한 선을 그었다. 신 의원도 “개혁의 가치와 방법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며 “당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당내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개혁의 동력을 만들고 추진해낼 ‘개혁과 단결의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참여정치연구회(참정연) 소속 유시민·김원웅 의원, 김두관 전 장관 등도 그동안 줄곧 주장해온 ‘정당개혁’을 재차 강조하는 동시에 개혁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 의원은 “개혁성 원칙은 지향하는 가치나 이념을 말하는 것”이라며 “정치적, 이념적 지향을 잃는다면 눈을 가린 채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김 전 장관은 “당원이 중심이 되는 정당개혁과 현장중심의 정당건설, 정책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실용노선과 개혁노선의 팽팽한 긴장선 한가운데 ‘중도’를 표방하는 후보들도 나와 주목된다. ‘국민형 리더십’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한명숙 의원은 “개혁과 실용이 조화롭게 통일될 때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 가능하다”며 “지금은 ‘편 가르기’식이 아닌 국민형 리더십, 따뜻한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고 밝혔다. /이숙현 기자 shlee@naeil.com 2005-02-24
- <주주독자마당>“어려운 환경에도 10년넘게 신문내는 정신이 대단해” 박경이(46) 독자는 지금 전업주부로 조용히 지내고 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그는 전북지역 노동운동계의 대표적 여장부로 꼽혔다. 그는 “지금은 아무런 일도 맡고 있지 않지만 내가 해야할 일이라면 반드시 하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생활하고 있다”고 최근 근황을 전했다. 주부로서의 일상에 내일신문 읽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박 독자는 “창간당시 다들 신문은 어렵다고들 했는데 10년을 넘은 세월을 버티면서 신문이 계속 발전하고 있다”면서 “내일신문 사람들 정신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혀를 내둘렀다. 독일계 패션업체인 후레어패션 노동조합 위원장으로서 그는 수년에 걸친 노동조합 민주화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 어려웠던 투쟁을 석탑노동연구소와 함께 하면서 이후 내일신문 주주독자로 이어질 인연도 맺었다. 79년도에 회사에 입사한 그는 87년도 노동자대투쟁 이후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해고와 복직을 거듭하고 88년에는 민주화된 후레어패션 노조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88년도에 치러진 그의 결혼식은 단연 화제거리였다. 남편은 당시 산업재해나 부당해고 등 노동관계 법률상담을 전담하고 있던 노동교육연구소의 박두술 소장. 그야말로 ‘투쟁으로 하나된’부부였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이 화제가 된 것은 만남 자체만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리 보기 힘든 결합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이 전투경찰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후레어 노조 파업현장에서 치러진 것이다. 박 독자는 “결혼 날짜는 잡아놨는데, 아직 파업투쟁은 계속되고 있고 장기간의 싸움에 조합원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며 “지친 조합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결혼식을 이벤트로 만들어 파업현장에서 열었다”고 회고했다. 그 결혼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힘을 얻었다. 건강이 안좋아 고생하던 차에 회사가 중국시장을 노리고 임금이 싼 스리랑카 쪽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그해 95년도에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 역할을 하게 됐다. 하지만 집에 숨어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파트 부녀회 일을 하고 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 전북지회장을 맡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지냈다. 그는 “내일신문이 나온 후로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읽고 있다”며 “때로는 못마땅하고 견해가 다르더라도 ‘그저 다른갑다’하고 읽는다”고 말했다. 내일신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판단을 유보하고 지켜볼만한 믿음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독자는 내일신문이 오늘과는 다른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 내일 신문에 걸어왔던 기대가 너무 커서일까. 그는 “튀는 세상에 비해 내일신문다운 참신함이나 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창간시에 가졌던 그 열정이 그립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정치경제 일간지라고 해도 특별한 정보를 준다거나 크게 볼거리가 없고 조간과 중복되는 기사가 많이 보인다”며 “다른 신문과는 달리 내일신문만이 가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드러나는 재미있는 기사가 많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박정미 기자 pjm@naeil.com 이 란은 독자여러분께 열려있는 공간입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담당 : 박정미 기자 보낼곳 : pjm@naeil.com 2005-01-17
- [집중점검-인권사각지대] ②팔려온 신부, 국제결혼여성 3명중 1명이 맞고 산다 폭력에 일상 노출, 생계난·불안정한 체류자격이 인권침해 부추겨 결혼 적령기를 넘기고도 배우자를 찾지 못한 한국 남성에게 ‘국제결혼’은 단비같은 소식이었다. 국경과 나이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다복하게 살고 있는 국제결혼 가정도 적지 않다. 국내 결혼의 열쌍중 한쌍이 국제결혼일만큼 활성화돼 있는 상태다. 하지만 이런 수치상의 증가 이면에는 국제결혼이라는 올가미에 묶여 고통받는 또다른 이주여성의 신음이 자리하고 있다.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위장결혼’일 지 모른다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으며 그들은 유형·무형의 폭력에 의해 인권 사각지대로 내몰리고 있다. 국제결혼을 통해 일어나는 인권침해는 특정 농촌지역의 문제도, 일부 가정만의 문제도 아니다.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인권침해 사례를 짚어보고 그 해법을 찾아보았다. /편집자주 ‘이주여성인권센터’가 통계청 자료 등을 토대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외국인과의 혼인은 이미 한국 전체 결혼의 8.3%를 차지할 정도로 증가 양상을 보이고 있다. 1990년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여성이 불과 619명이었던 반면 2003년에는 1만9214명으로 불어났다. 10년 새 10배 늘어난 것으로 2002년과 2003년 사이에만 42.3%가 증가했다. 거주지별 분석으로는 46.3%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해 있었다. 일반적인 관측과 달리 국제 결혼의 문제점이 농촌 거주자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말 서툴러 아이도 언어습득 늦어 = 그러나 한국인과 결혼해 우리나라로 온 외국인 이주 여성들의 삶은 고단하다. 우선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함께 생활하는 가족뿐만 아니라 심지어 남편과도 언어소통이 원활치 못해 사소한 오해가 갈등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나주여성상담센터’가 지난 2004년 한해 동안 ‘한국사회 적응을 위한 한글교육 및 문화강화강좌’ 참석자에게 설문한 결과 중국 조선족을 제외하고는 우리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엄마가 우리말이 서툴기 때문에 아이도 언어습득이 늦어지게 되고, 여기에 외모까지 한국 아이와 달라 고민스럽다. 엄마 세대에서 시작된 사회적 멸시와 냉대가 아이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한국인과 결혼한 이주여성은 거주비자로 체류자격을 취득해야 하는 외국인 신분이기 때문에 복지대상에서 배제돼 있다. 어떤 이유라도 국적 취득전에 결혼사유가 해소되면 법적으로 불법체류자 신세로 전락하기도 한다. 일년마다 갱신해야하는 비자도 남편이 신원보증을 하도록 돼 있어 철저히 남편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고 결혼 후 2년이 지나야 취득 가능한 국적도 남편이 동행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상담센터’는 “부인이 돈을 목적으로 한국에 왔고 위장결혼을 했으니까 언젠가는 도망갈 지도 모른다는 의혹도 일부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폭력 = 일부 여성들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44세인 한국인 남편(농업)과 결혼한 베트남 출신의 W씨. W씨는 “처음 남편은 나이가 37살이라더니 한국에 온 직후에는 40살, 지금은 44살이라고 한다”며 “이혼한 전부인과 사이에서 1명뿐이라던 아이도 직접 와보니 3명이나 됐다”고 말했다. 큰딸과 W씨의 나이차이는 불과 2살이다. 11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교포3세 B씨. 건설 일용직 노동자인 남편 사이에 10개월된 아이를 두고 있지만 남편은 지난 1년반 동안 거의 일은 나가지 않은 채 술로 세월을 보냈다. 임신 9개월째 되던 날 남편은 ‘집이 팔렸다’며 B씨에게 집을 나가라고 소리쳤다. 이밖에도 의처증이 있는 남편에게 목이 졸려 혼수상태에 빠진 K씨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된 경우도 있다. 국제결혼 이주여성은 육체적 폭력과 폭언·폭행 위협 등에 따른 심리적 폭력,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식의 정서적 폭력, 생활력을 일체 주지 않는 경제적 폭력, 언어·문화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 고립 등에 일상적으로 방치돼 있다. 지난해 12월 ‘광주여성의 전화’에서 광주·전남지역 국제결혼 이주여성 154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4명중 1명은 한 달에 1번 이상 , 10명중 1명은 매주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에게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만큼이나 경제적 박탈감은 심각한 인권침해 요인이 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28.5%는 경제권을 전적으로 남편에게 빼앗긴 채 사실상 남편 허락한 만큼만 경제생활을 할 수 있다. ◆동정보다 법·제도 마련 필요 = ‘이주여성인권센터’ 최진영 상담실장은 “전혀 의지할 곳 없다고 생각한 부인에게도 ‘쉼터’라는 의지할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남편들의 태도에 다소나마 변화가 있다”고 전했다. 곤경에 처한 이주여성에게 도움 받을 곳이 있음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함께 인권센터는 △이주여성을 한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보는 인식변화 △인권보장을 위한 체류요건의 완화 △자녀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 마련 △이주여성 보호를 위한 종합지원센터의 필요성 등을 지적했다. 하지만 법적인 제약 또한 만만치 않다. 아름다운 재단 소라미 공익 변호사는 “체류기간 연장시 배우자 동행을 의무화한 점이나 이혼 소송 진행 동안 취업을 허용치 않는 점 등은 국제결혼 여성의 법적 지위 보호에 문제점으로 지적된다”며 “특히 한국 남성에게 이혼 귀책사유가 있음을 이주여성 본인이 증명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이라고 말했다. 소 변호사는 “혼인에 기한 국적 취득과 자녀를 출산할 경우 국적 취득 요건을 대폭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 2005-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