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여성들 인권기획 1회분: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여성들(간사: 조숭호 기자)-2월 11일 2회분: 영화스텝들의 힘겨운 삶(간사: 김남성 기자)- 2월11일 3회분: 실업자에게도 인권은 있다(간사: 구본홍 기자)-2월 11일 4회분: 안면화상 장애인들(간사: 정원택 기자)-2월 13일 5회분: 청소년 동성애자의 삶(간사: 정석용 기자)-2월 13일 편집자주 :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여성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080-OOO-OOOO.’ 국도변 어디서나 손쉽게 볼 수 있는 플래카드로 동남아시아 처녀와 결혼을 주선해주겠다는 광고다. 하지만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국제결혼이 아닌 국제결혼 사기에 가깝다. 3명 가운데 1명은 남편에게 맞고 살고 있다. 지난해 12월 광주여성의 전화에서 광주·전남지역 국제결혼 이주여성 154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4명중 1명은 한달에 1번 이상 , 10명중 한명은 매주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에게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물리적인 폭력만큼이나 경제적 박탈감은 심각한 인권침해 요인이 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28.5%는 경제권을 남편에게 빼앗긴 채 사실상 남편 허락하에서만 돈 지출을 할 수 있는 형편이다. ‘이주여성인권센터’가 통계청 자료 등을 토대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외국인과의 혼인은 이미 한국 전체 결혼의 8.3%를 차지할 정도로 증가 양상을 보이고 있다. 1990년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여성이 불과 619명이었던 반면 2003년에는 1만9214명으로 불어났다. 10년새 10배 늘어난 것으로 2002년과 2003년 사이에만 42.3%가 증가했다. 이중 중국 국적자(조선족)가 69.6%로 가장 많았고 베트남 7.3%, 일본 6.5%, 필리핀 4.9% 등의 순이었다. 하지만 이들 거주지별 분석으로는 46.3%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해 있었다. 일반적인 관측과 달리 국제 결혼의 문제점이 농촌 거주자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들은 결혼정보회사나 개인 브로커를 통해 사실상 매매결혼을 한다. 이들은 러시아 700만원, 중국 500만원, 베트남 980만원 등의 금액을 매겨놓고 결혼 장사를 하고 있다. 한국인 남편이 아내를 ‘물건’ 취급하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폭력 = 사례1. 44세인 한국인 남편(농업)과 결혼한 베트남 출신의 W씨. W씨는 “처음 만났을 때 나이가 37살이라더니 한국에 온 직후에는 40살이라고 했다. 지금은 44살이라고 하는데 이마저도 거짓인 것 같다”며 “이혼한 전부인과 사이에서 1명뿐이라던 아이도 직접 와보니 3명이나 됐다”고 말했다. 큰 딸과 W씨의 나이차이는 불과 2살이다. 사례2. 11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교포 3세 B씨. 대졸로 교사였던 그는 건설 일용직 노동자인 지금과 남편 사이에 10개월된 아이를 두고 있다. 하지만 남편은 지난 1년반 동안 거의 일은 나가지 않은 채 술로 세월을 보냈다. 가족 생활비는 한달 30만원도 채 되지 못했고 ‘술 좀 끊으라’는 요구로 부부싸움은 시작됐다. 임신 9개월째 되던 날 남편은 ‘집이 팔렸다’며 K씨에게 집을 나가라고 소리쳤다. 아이를 낳고 친정아버지가 오히려 시댁에 돈을 보태주는 형편이었지만 K씨는 아이의 양육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혼을 할 수도, 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형편이다. 이밖에도 의처증이 있는 남편에게 목이 졸려 혼수상태에 빠진 K씨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된 경우도 있다. 국제결혼 이주여성은 육체적 폭력과 폭언·폭행 위협 등에 따른 심리적 폭력,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식의 정서적 폭력, 생활력을 일체 주지 않는 경제적 폭력, 언어·문화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 고립 등이 일상적으로 방치돼 있는 상황이다. ◆그들이 겪는 고통 = 한국 남편들은 부부싸움 중에 뺨때리기, 목조르기,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찍기 등 무차별적 폭력을 휘두르거나 물건을 부수고 칼로 자해하는가 하면 심지어 갓난아이를 내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내는 왜 남편이 그렇게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두르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주여성상담센터’가 지난 2004년 한해 동안 ‘한국사회 적응을 위한 한글교육 및 문화강화강좌’ 참석자에게 설문한 결과 중국 조선족을 제외하고는 우리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주로 10 후반~20대 초반의 나이로 한국에 온 지 1~2년 내에 임신·출산을 겪게 된다. 하지만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추운 날씨 속에서 제대로 산후조리조차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상담센터’는 국제결혼한 남성의 생활기반이 약하고 나이차가 많아 젊은 아내들에게 위기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들은 ‘부인이 돈을 목적으로 한국에 왔고 위장결혼을 했으니까 언젠가는 도망갈 것’이라는 의혹도 일부 갖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여성들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한국인과 결혼한 이주여성은 거주비자로 체류자격을 취득해야 하는 외국인 신분이기 때문에 복지대상에서 배제돼 있다. 어떤 이유라도 결혼사유가 해소되면 법적으로 불법체류자 신세로 전락한다. 일년마다 갱신해야하는 비자도 남편이 신원보증을 하도록 돼 있어 철저히 남편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고 결혼 후 2년이 지나야 취득 가능한 국적도 남편이 동행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육아와 자녀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엄마가 우리말이 서툴기 때문에 아이의 언어습득이 늦고 외모가 한국 아이와 달라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엄마 세대에서 시작된 사회적 멸시와 냉대가 아이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해법은 없나 = ‘이주여성인권센터’는 상담을 통해 “전혀 의지할 곳 없다고 생각한 부인에게도 ‘쉼터’라는 의지할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남편들의 태도에 다소나마 변화가 있다”고 전했다. 곤경에 처한 이주여성에게 도움받을 곳이 있음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함께 인권센터는 △이주여성을 한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보는 인식변화 △인권보장을 위한 체류요건의 완화 △자녀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 마련 △이주여성 보호를 위한 종합지원센터의 필요성 등을 지적했다. 하지만 법적인 제약 또한 만만치 않다. 아름다운 재단 소라미 공익 변호사는 “체류기간 연장시 배우자 동행을 의무화한 점이나 이혼 소송 진행 동안 취업을 허용치 않는 점 등은 국제결혼 여성의 법적 지위 보호에 문제점으로 지적된다”며 “특히 한국 남성에게 이혼 귀책사유가 있음을 이주여성 본인이 증명한다는 점 또한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이라고 말했다. 소 변호사는 “혼인에 기한 국적 취득과 자녀를 출산할 경우 국적 취득 요건을 대폭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2005-02-11
- 안양천에 찾아온 철새 안양천살리기 운동이 결실을 맺으면서 수질이 맑아진 안양천이 겨울 철새 도래지로 변신하고 있다. 안양시는 구랍 29일 하루 동안 안양천 연현마을 주변에 날아든 겨울철새를 조사해 모두 9종 1500여 마리가 찾아 온 것을 확인했다. 박달처리장 방류구, 화창교, 세월교, 보도교, 기아대교상류 등 5곳에서 관찰된 철새는 쇠오리(520마리)와 흰 뺨 검둥오리(510마리)가 가장 많았고 청둥오리(190마리), 논병아리, 넓적부리, 왜가리, 백할미새, 깝짝도요 등이 발견됐다. 선상원 기자 won@naeil.com 2005-01-10
- [책소개]게임이론으로 접근하는 시장의 혁신 혁신의 느린 걸음 바스카르 차크라보티 지음 /푸른숲 /1만3500원 기업에 있어서 혁신(Innovation)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사항이다. 고객의 요구와 입맛이 까다로워지고 기업간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경쟁 제품이나 경쟁기업을 모방만 해서는 결코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없다. 비록 혁신을 통한 신제품이라 하더라도 시장에서 자리 잡기까지는 의외로 느리게, 때로는 장구한 세월이 필요하다. 그나마 대부분은 시장에서 성공하지도 못하고 도태하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모든 사람들이 빠른 변화를 기대하고 바랄 것이라는 가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 연구를 시작했다. 특히 저자는 ‘상호 연결된 세상에서의 게임’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혁신’에 접근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혁신이 시장에서 늦게 확산되는 원인은 경제 주체들간의 긴밀한 상호 연결성에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최근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디지털 카메라의 경우 프린트, 관련 소프트 웨어, 휴대폰, 광대역 통신망 등 관련 산업이 함께 혁신에 동참할 때만이 시장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으며, 실제로 이러한 관련 산업의 동반 성장이 현재의 디지털 카메라 열풍을 형성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따라서 혁신이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현재의 시장상태를 유지하려는 이른바 ‘균형상태’를 뒤흔들고 그 자리에 신제품이나 신기술을 진입시켜 새로운 균형상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현실 시장에서 실천한 AT&T, 마이크로소프트, 소니, 제록스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이루어낸 성공과 좌절의 경험을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2005-02-06
- 1200년동안 지속된 로마제국은 어땠나 로마제국은 세계역사 중에서 가장 강하고 오랫동안 존속했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탄생해 기원 후 476년 서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약 120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존속했다. 동로마제국이 유지됐던 시기까지 포함하면 약 2200년 이상을 대제국으로 존재한 것이다. 로마제국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시스템의 힘에 의해 성장했고 발전을 거듭했다는 점이다. 로마는 역사적으로 절대 권력을 지닌 한 사람에 의해 지배된 ‘전제군주 시대’도 경험했지만 많은 지도층과 시민에 의해 국가가 운영됐을 때 조직력은 더욱 충만했다. 장군 한 사람보다 수많은 시민군이, 군주 한 사람보다는 수많은 집정관들이 로마 힘의 원천이었다. 왕정, 귀족정, 민주정 원리가 혼합된 정치체제가 성공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왕정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통해 국가 기초를 만들어 나갔으며, 성장기에는 귀족과 평민이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 속에서 조화를 유지하면서 국가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1인 지배에 의해 정치적 균형이 무너지고 국가가 개인에 의존하게 되면서 로마는 발전의 에너지를 잃어갔다. 로마 정치체제는 집정관에 초점을 맞추면 왕정처럼 보이고 원로원 기능에만 주목하면 귀족정처럼 보인다. 또 민회를 중시하는 사람은 민주정이라고 평가한다. 수많은 집정관이 해마다 바뀌었는데도 계속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가 어느 한 부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체가 시스템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이 말해주고 있다.(도표 참조) 공화정 시기 집정관은 왕을 대신했는데 민회에서 선출돼 원로원 승인을 얻어 취임했다. 그 절차는 왕과 마찬가지였지만 종신제였던 왕에 비해 임기가 1년밖에 안됐다. 다만 재선은 허용됐고 연령은 40세 이상으로 제한됐다. 게다가 정원이 두명이었고 동료 집정관 생각이나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집정관이 동의하지 않는 한 정책은 집행되지 않을 정도로 견제와 균형 원리에 충실했다. 시민성에 바탕을 둔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 즉 지도층의 특성도 로마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로마 지배계층은 솔선수범해 병역이나 납세 등 의무를 수행했으며 항상 검소한 태도로 평민과 같이 생활하려는 모습을 견지했다. 지도층은 국가 건설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의무로 삼았다. 그러나 국가 지도층이 솔선수범하는 미덕을 잃었을 때 로마는 쇠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김기수 기자 kskim@naeil.com 대경쟁시대에 배우는 로마 흥망의 교훈 신한종합연구소 로마인 이야기 1~3 한길사 2005-02-04
- 2005년 유럽의 문화수도, 아일랜드 코크 “변두리 작은 도시지만 유럽의 문화적 생명에 기여” 올해 음악제·영화제·문학제 등 4000여 행사 계획 아일랜드 서남부 먼스터주의 작은 항구 도시 코크가 ‘올해의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되었다. 이 작은 도시에 아일랜드의 비밀스러운 보배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도이치벨레가 4일 전했다. 인구 13만의 코크는 리강 어귀에 있는 항구도시다. 큰 파도가 바닷물을 강으로 역류시킬 때면 도시 전체에 짠내음이 풍긴다. 18~19세기에는 신대륙으로 가던 거의 모든 정기여객선들이 코크항에 정박했다.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여행도 이 항구에서 출발했다. 300만이 넘는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의 식민통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 갈 때도 이 항구를 거쳐갔다. 조국에 남아 식민지 통치 아래 어려운 세월을 견디어 내야 했던 사람들에게도 이 도시는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또 코크는 운하와 시, 예술가와 선원들의 고향이었고 카톨릭의 박해를 피해온 위그노와 유대인들에게도 이곳은 안식처가 되었다. 운명의 해였던 1920년 코크에는 씻을 수 없는 상흔이 남겨졌다. 코크 주민들이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더 이상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영국군대는 시장을 사살하고 도심을 통째로 불태워버렸다. 지난 10년간 코크는 새롭게 태어났다. 스페인 출신 건축가 베스 갈리의 설계로 도시의 중심부가 새롭게 단장되었다. 갈리는 지저분하고 비좁은 골목을 없애고 도시 곳곳에 새로운 광장을 조성했다. 산뜻한 보도블록과 하늘을 나는 두루미 모양의 우아한 가로등이 거리를 장식했다. 올해 코크에서는 포크송, 합창, 재즈, 파이프오르간축제, 영화제, 문학제 등 4000여 가지의 이벤트가 열릴 계획이다. 2004년 새로 EU에 가입한 10개국의 시인들이 찾아와 그들의 작품을 낭독하는 행사도 가질 예정이다. 연극과 스포츠행사, 체스경기, 학생들과 주민들이 펼치는 문화행사도 포함되어 있다. 아일랜드에는 “네 집 건너 교회가 하나고 세 집 건너 술집이 있다”는 우스개가 있다. 코크에는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술집은 아주 많다. 이런 도시의 풍경이 문화행사의 무대중심을 장식하겠지만 저명인사들의 작품도 전시될 예정이다. . 유럽문화수도 행사를 주관하는 코크2005의 조직위원장 쉐인 말론은 “코크는 유럽 변두리의 작은 도시다. 그러나 유럽대륙의 문화적 생명에 기여할 풍부한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다. 코크는 시의 도시답게 언제나 새로운 것을 향해 열려있는 항구”라고 소개했다. 말론은 또 “유럽의 재탄생은 중심부에서 변두리를 향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에서 중심부를 향해 진행되야 한다”고 행사의 의의를 설명했다. 코크2005프로그램을 지휘하고 있는 매리 메카시는 “코크는 국제무대에 자신의 문화를 선보일 기회를 가지게 됐다. 문화수도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코크는 또 다른 변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코크는 지금까지 유럽문화의 수도로 선정된 도시 가운데 가장 작은 도시다. EU는 1985년부터 유럽문화의 수도를 지정해 왔는데 암스테르담, 아비뇽, 볼로냐, 글래스고, 그라츠, 바이마르 등이 뽑혔었다. /김광호 리포터 holhol@naeil.com 2005-01-05
- 2월은 우울한 달 새해 1월도 훌쩍 지나간다. 안그래도 세월이 빠른데, 주식시장을 접하다보면 더 빨리 지나가게 된다. 모든 것을 집중하다보니 주변을 살펴볼 시간도 없고, 그 사이 세월을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이제 2월이다. 2월이 되면 증시의 시름은 조금 깊어진다. 통계적으로 2월은 1년중 월간 하락률이 가장 큰 시기이기 때문이다. 1991년 이후 14년간 종합지수는 2월에 11번이나 하락했다. IMF 이후에도 그 추세는 지속되었다. 대세상승으로 본격 진입하던 1999년에도 2월은 큰 음봉이 출현했으며, 대세 상승이 마감되던 2000년에는 기록적인 음봉이 발생했다. 상승 추세의 경우 대체로 1-3월 사이에 꺾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챠트 흐름은 근사하지만 조심할 필요가 있다. 국내 자금이 증시로 유입되고 있다는 것 이외에 경제환경을 둘러싼 변수들이 좋은 것이 별로 없으며, 특히 국제환경은 매우 좋지 않기 때문이다. 선물투자자의 경우 매도를 고려할 타이밍이다. 이번주에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G7 회담이다. 미국은 현재 사상 최고의 쌍둥이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그것인데, 이라크 전비 지출이 지속되고 있어 달러 약세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 중국의 위앤화 절상으로 연결된다. 미국의 무역적자에 가장 큰 요인인 중국의 위치를 감안할 때, 그리고 세계 통화가 다 달러에 대해 절상되는 추세인데 유독 중국만 고정되어있기에 위앤화 절상은 자연스러운 연결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조짐은 나타나고 있다. 지난 28일, 위용딩 중국인민은행 통화정책위원은 “우리는 환율제도에 더 많은 유연성을 필요로 하고 있고, 그것이 위앤화의 평가절상을 의미한다. 지금이 바로 절상을 단행할 때” 라고 발언한 것이다. 물론 G7 회담에서 중국이 위앤화 절상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논의 혹은 짙은 가능성만으로도 증시는 충분히 영향을 받을 수 있다. 2003년 9월 두바이, 2004년 10월 워싱턴 G7 회담 직후 아시아 통화가 크게 요동치고 주식시장이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음이 이를 반증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중국이 가장 큰 교역국이며, 1월 수출 증가율이 한 자릿수로 급감할 상황이기에 위앤화 절상 논의는 ‘제 2의 차이나 쇼크’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수출 관련 대형주는 일단 피하는 것이 좋겠고, 선물 매도로 종합지수 하락에 대비하는 것이 필요한 중요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1월 한 달간 코스닥이 급등을 보이고, 줄기세포에 이어 위성DMB, 휴대인터넷 등 기존에 없던 개념들이 등장하며 근거가 부족한 급등을 보이는 종목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심할 단계다. 우선 설 연휴가 임박했기에 증시로의 자금 유입이 정체될 전망이다. 이미 그 조짐은 나타나고 있다. 주식형 수익증권 잔고가 3개월만에 순유출을 기록했고, 실질고객예탁금도 지난 26-27일 중 5천억이나 감소한 것이다. 이렇게 실탄이 부족해지면 거품은 허무하게 사그라든다. 위성DMB나 휴대인터넷 등 테마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는 수익성의 잣대를 갖다댈 시기고, 기준 미달의 기업들은 큰 폭 하락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단기 낙폭이 있다고 반등을 노린 단기 매수나, 새로운 IT형 테마를 발굴하는 태도는 현재 매우 위험하다. 막차를 타서 호되게 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제는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실적이 속속 발표되고 있어 실적호전주에 대한 관심을 높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광동제약(00929), 이랜텍(05421) 등이 최근 소리없이 상승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표적인 실적호전주로 분류할 수 있다. 세코닉스(05345), RF텍(06104), 피앤텔(05434), 인탑스(04907), 선양DNT(05011) 등 상승폭이 적고 실적호전 중소형주에 대해 관심을 높일 시기다. 2005-01-31
- [그들의 스승, 그들의 모델] ② 김근태 장관과 네루 “사실 출세를 하려고 현실정치를 시작하는 거냐는 질문을 스스로 많이 했다. 사람들도 ‘함석헌 선생이나 문익환 목사처럼 살 수는 없느냐’고 많이 비판했다. 그러나 나는 인도의 네루와 같은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간디의 길은 더 맑고 많은 꿈을 가진 누군가가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95년 겨울.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은 제도권 정치에 몸을 실었다. 차가운 바닥에서 자주·민주·통일을 외쳤던 그가 ‘간디의 길’(사회운동)을 버리고 ‘네루의 길’(정치운동)을 선택한 순간이다. 당시 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이같은 말을 혼잣말 하듯, 이야기 하듯 내뱉곤 했다. “사람에 대한 미움이 통제가 안 돼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가슴 속에서 욕심 사나운 생각도 났었다. 그래서 간디는 안 하겠다고 결심했다.”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관용이 넘치는 사람, 미워는 하되 그만큼의 용서를 할 줄 아는 사람’으로 기억되지만 김 장관 스스로는 본인이 갖고 있는 간디의 기질(?)을 크게 신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네루의 길 = 김근태 장관이 모델로 삼고 있는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인도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총리를 지낸 인물로 부유한 브라만 가문 출신이다. 젊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라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자연과학과 법학을 전공했다.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네루는 1912년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아버지처럼 따랐던 간디의 비폭력·비복종 행동주의에 영향을 받아 1920년부터 빈곤한 농민 대중의 입장에 서서 반영(反英)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1921년부터 45년까지 8차례에 걸쳐 9년간이나 투옥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후 간디와는 달리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네루 정치철학의 핵심은 조국·민족자결·평화·개혁 그리고 인간이었다. 어느 것 하나 무게의 경중을 따질 수 없는 이런 시대적 화두는 식민지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한 국가의 지도자에게는 필연이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1947년 초대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된 네루는 특히 외교정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철저한 ‘비동맹주의’와 ‘균형주의’를 강조했다. 넓은 국토와 다민족·다종교 국가인 인도의 통합을 위해서는 독립 초기 국가 통합이 최우선 과제였다. 이는 대외 정책에 있어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음으로서 실리를 챙기고 강대국간 상호 견제를 통한 자기 방어책을 모색한 이유이기도 했다. ◆김근태의 길 = 김 장관이 정치권에 들어오며 하나의 모델로 삼은 ‘네루의 길’. 젊은 시절의 ‘고난’은 비슷할 지 모르지만, 대중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와 관심을 받으며 제도권 정치로 뛰어들었던 네루와 그는 상이한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민주화 운동세력 대부’라는 말이 왜소해 보일 만큼 그에게 정치 인생의 초반기는 낯설음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대로 김 장관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였던 정치자금 양심고백은 그 ‘낯설음’의 또 다른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당시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통해 “원칙과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해지는 야만이 지배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어느덧 그 정치인생 10년이 흘렀다. 최근 김 장관의 위치도 그 세월만큼이나 달라졌다. 여당의 원내대표를 거쳐 이제는 장관 자리에 오른 것이다. 아직도 네루가 인도 국민들에게 받았던 열렬한 지지와 대중성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제도권 정치의 낯설음을 점차 벗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다. 간디의 길을 잊고 네루의 길을 선택했던 당시의 ‘초심’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아직까지 그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두 인물의 이름을 거론한 것에 빚지지 않고 살아온 나름의 결과로 해석된다. “결국 권력의지에 충동돼 코뚜레 뚫린 소처럼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되물음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한 것이 솔직한 내면 풍경입니다. 유혹에 지지 않을 수 있다는 의지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이숙현 기자 shlee@naeil.com 2005-01-28
- <밥일꿈>교사의 소명의식(남부호 2005.01.26) 교사의 소명의식 남 부 호 교육연구사 나는 교직자의 가정에 태어났다. 교육을 위한 헌신과 봉사, 노력 속에서 고뇌하셨던 아버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때로는 국가나 사회로부터 응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이름도 빛도 없어도, 우리의 2세 교육을 천직으로 알고 생활하신 부친의 영향으로 우리 가족 5명이 교직에 종사하고 있다. 나 또한 교직에 몸 담은 지 벌써 1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교육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전문직을 선택하여 근무를 하고 있다. 내가 근무한 시간은 짧은 시간이지만 그간 우리부가 추진해온 정책을 익히고 교육개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 시행과정에서 사회 안팎에서 따가운 비판이 있던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의 교육현실을 보면 안타까운 일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교육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었다고 하고, 자녀의 교육을 위해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는 것이 즐겁지 않고, 교사들은 가르치는 일에서 보람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런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현실을 비판하기 전에 스스로의 반성과 강한 책임감을 느낀다. 또한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제자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나타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식 정보화 사회로 급속히 전환되면서 높아진 국민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이며, 또한 고질적인 학벌중시 풍토에서 이 같은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창의력이 넘치고, 진취적인 젊은이가 성공할 수 있는 사회분위기가 마련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선생님들이 학교교육의 중심에 서서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신나게 가르칠 때 학생들은 열심히 배우고 학부모와 온 국민들도 선생님들을 도와 더 나은 내일을 창조하는 일에 나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반성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거나,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본다.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개혁의 열쇠는 근본적으로 선생님들이라는 것을 더욱 절감하고 있다. 학교는 교사들에게는 보람 있는 일터가 되어야 하고 학생들에게는 신나는 배움터가 되어야 한다. 선생님들이 교단에 처음 섰을 때 많은 꿈과 희망을 불어 넣어줄 생각으로 잠을 설친 초심의 자부심과 포부가, 이제 봄의 꽃처럼 여러분 속에서 다시 활짝 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5-01-26
- 밥일꿈 외고 | ‘2004년 아쉽기도 하지만’(사진 장은정)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법한 일이다. 한참을 걸려 글을 썼는데 저장이 안된 상태로 지워져 버리거나, 저장을 하려고 클릭을 한다는 게 취소 버튼을 클릭해서 다 지워 버리든가 하는 일 말이다. 이럴 때 대개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거나 혹은 정말 난감한 기분이 들게 마련이지만, 간혹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 뿐 ‘차라리 잘 되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다. 지난 한 해도 마찬가지였다. 다 지워버리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실수로라도 ‘취소’ 버튼을 클릭하면 다 지워져 버리는 문서와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것은 매년 그래왔으므로 뭐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손 치더라도, 멋지게 처리하려 했다 실패한 많은 일들, 경솔했던 말과 행동, 쓸데없이 낭비한 많은 시간들이 자꾸만 생각나 깨끗이 다 비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2004년’이라는 문서를 작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강가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저 강물이 작년의 그 강물인가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나그네는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당신은 어제의 당신과 똑 같소?”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공감이 가는 얘기다. 상류에서 흘러온 강물이 하류를 이루며 흘러가듯 나도 이전의 세월들을 흐르듯 지나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일 것이다. 성공적이었든 아니었든 지난 한 해는 이미 나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멋지게 처리하려 했다 실패한 많은 일들, 경솔했던 말과 행동, 쓸데없이 낭비한 많은 시간들이 있었다고는 하나 기억해보면 분명 좋았던 일도 많았다. 작년 한 해 동안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일본을 가 보기도 했었고 내 사랑스런 첫 조카가 태어나 이모라는 호칭을 가졌으며 또 좋은 친구도 몇 명 더 갖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2004년’이라는 문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로 저장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가끔 열어서 살펴보면 앞으로 살아나가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대신 ‘2005년’ 이라는 이름의 문서만큼은 반드시 작은 오타 하나 없이 알찬 내용으로 작성해서 연말 즈음에는 ''취소'' 버튼을 누르는 일 따위는 전혀 상상도 못 할 만큼 아깝고 소중한 문서가 될 수 있도록 올 한 해 정말 열심히 살아야 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LG전선 장은정 2005-01-24
- <신문로 칼럼>철학의 빈곤에서 벗어나자(박석무 2005.01.25) 철학의 빈곤에서 벗어나자 박 석 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성균관대학교 석좌교수 요즘 실용(實用)과 실용주의라는 단어가 자주 거론되면서 을유년 새해 초의 화두라고 야단이다. 실용을 추구하고 실용주의 노선을 택하는 방향이야 탓할 수 없이 옳은 발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용어나 단어의 본뜻이 무엇이고 그런 이론이 실현되려면 어떤 기초적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세상의 환경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환경이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의식이 또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환경은 대체로 원론이나 원리의 탐구에 마음을 기울이기보다는 현상에 젖어들어 거기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로 여겨진다. 금전만능주의나 물신주의(物神主義)가 모든 원론이나 원리에 앞서 가장 위력을 발하는 행동의 지침이 되었기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도 가장 많은 수익만 올리고, 가장 잘 돈만 번다면 가장 우수한 경영인이고 휼륭한 기업가로 대접받기 십상이다. 다산은 당대의 대표적 철학자 마찬가지로 현상에 가장 잘 대응하고 기발한 착상으로 당장의 난관을 순간적으로 극복하기만 요구하고 원칙과 원론에 의하여 원대하고 항구적인 계책을 수립하는 것에는 등한할 수밖에 없게 되어 간다. 품위가 있거나 격조가 높은 일이어서 얼마간의 시간과 경비가 소요되는 일은 별로 빛을 볼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환경과 세태가 위세를 부리면서 세상은 갈수록 ‘철학의 빈곤’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200년 전에 우리의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철학이 빈곤하고서는 실용이니 실학(實學),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높은 가치는 절대로 실현되지 못한다고 분명한 가르침을 내렸었다. 그렇게 실용과 실학을 강조하고 실사구시의 세상이 도래하기를 염원했건만, 그 실현의 전제에는 반드시 ‘철학의 빈곤’으로부터의 탈피가 앞서야 한다고 했다. “반드시 먼저 철학〔經學〕으로 밑바탕〔基址〕을 굳건히 안착〔立著〕시킨 뒤에 옛날의 역사책을 섭렵하여 정치의 득실(得失)과 잘 다스려진 이유와 난리가 난 이유 등의 근원을 알아내야한다. 그러한 뒤에야 또 반드시 ‘실용의 학문’〔實用之學 〕에 마음을 기울이고 옛날 사람들의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저서, 즉 경제문자(經濟文字)를 즐겨 읽도록 하라”는 원론을 가르쳐 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조선 5백년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경세가(經世家)로 다산 정약용을 꼽지만, 그가 그런 높은 수준의 경세가가 되기 이전에 그는 정말로 독실하게 경학(經學)의 연구에 골몰했던 경학가(經學家), 즉 철학자였음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산은 젊은 시절 벼슬하기 전부터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경학에 높은 공부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젊은 날에 시경(詩經)·대학(大學)·중용(中庸) 등에 대한 연구서를 임금에게 올려 얼마나 융숭한 칭찬을 받았는지는 기록에 자세히 남아 있다. 40세에 나라에서 버림을 받고 내침을 당해, 먼먼 바닷가 귀양지에 이르자 그는 본격적으로 경학의 연구에 18년의 긴긴 세월을 보냈다. 사서육경(四書六經)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물이 무려 232권을 훨씬 웃돌고 있다는 자신의 주장에서 보이듯, 너무도 크고 넓게 깊이 철학을 연구한 당대의 대표적 철학자였음은 세상이 인정하는 일이다. “禮樂 익힌 뒤 兵農 실천해야” 우리가 흔히 일컫는 경세서인 『경세유표』·『목민심서』 등은 철학사상이 익은 뒤인 유배 말년인 마지막 해에 저술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철학으로서의 경서연구, 그 결과 철학의 원리 아래에 이룩된 실용학문인 경세서, 이렇게 본(本)과 말(末)이 구비되었음을 다산 자신이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현실은 어떤가. 본에 대한 철학이나 실천의지는 전혀 없으면서 말인 실용만 따지고 있으니 본말의 도착이자 모순으로 귀결된다. 문학·역사·철학의 인문학의 기초가 천대받고, 자연과학의 기초분야가 설 자리가 취약해진 오늘의 뒤틀린 현상에서 어떻게 역사발전이 이룩될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다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역사를 이끈다고 착각에 빠진 지도자들,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떠드는 지도자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의 가치관을 먼저 세우는 등 철학의 빈곤에서 벗어난 뒤에나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아들아, 예악(禮樂)을 익힌 뒤 정형(政刑)·병농(兵農)을 실천해라”라는 다산의 가르침이 새삼스러운 오늘이다. 2005-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