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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① 백철금속의 ‘바른생활 사나이’ 박현석 씨 이번주부터 매주 수요일 ‘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시리즈를 시작합니다.총 25회에 걸칠 이 연재는 우리사회 서민직업인의 일과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살핀 보고서가 될것입니다 그의 휴대폰은 좀처럼 터지지 않았다. 우리의 목소리는 번번이 엇갈렸다. 그를 만나고 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일하는 백철금속은 주한미군 쿠니 사격장으로 유명한 매향리에 있었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평균 600~700회에 달하는 폭격 훈련을 견디다 못해 전 주민이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냈던 바로 그곳. “군사보호구역이라 휴대폰 통화가 어려워요. 진짜 괴로운 건 폭음이죠. 처음에 숙소에서 잘 때는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한 시고 두 시고 폭격 시작되면 놀래서 일어나고. 잠깐잠깐 쪽잠을 자다가 그냥 출근하는 거죠. 이젠 면역이 돼서 괜찮아요. 니들은 폭격을 하든지 말든지 나는 잘란다….” ‘나는 잘란다’에 실린 구성진 가락이 녹록치 않은 그의 이력을 말해주는 듯한데, 말갛게 웃는 얼굴만은 영락없는 소년이다. 백철금속은 녹이 슬지 않는 철, 스테인리스 제강 회사다. 여기서 생산된 제품은 주로 자동차나 비행기를 만드는 회사로 팔려나간다. 작업 현장을 보여 주겠다며 회사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현석 씨의 어깨에 파스가 붙어 있다. “아, 이거요? 30킬로짜리 마대를 들어 올렸는데 근육이 놀랬나 봐요. 좀 쉬면 괜찮을 거예요.” 걱정하는 나를 안심시키며 그가 제일 먼저 데려간 곳은 고철더미가 작은 산을 이룬 백철금속 정문 안마당. 노란 크레인 한 대가 부지런히 고철 마대를 들어 올리고 있다. “저 고철들을 압축해서 유도로에 넣고 1600도 이상의 고온으로 가열하면 펄펄 끓는 쇳물이 돼요. 그 쇳물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니켈, 크롬 등의 성분을 첨가하는 정련 작업(AOD)이 바로 제가 하는 일이죠.” 박현석 씨(28세)는 쇳물을 정련하는 부서 화이트메탈의 중고참. 30대 동료들이 많은 현장에선 다소 ‘어린 축’에 들지만, 95년부터 줄곧 금속일을 해 온 탓에 이젠 ‘현장만 딱 보면 척 하고 감이 잡히는’ 베테랑이다. 기본 작업은 컴퓨터로 처리하지만 현장에서 수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무전기로 크레인을 불러서 정련이 끝난 150톤짜리 래들(쇳물을 담는 용기)을 다음 공정인 연주에 보내는 일, 쇳물의 온도를 체크하고 올려주는 일, 쇳물의 녹이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코크스나 생석회 마대를 던져 넣는 일까지 모두 AOD에서 처리해야 한다. 무거운 마대를 휙휙 던져 넣다가 박현석 씨처럼 근육이 상하기도 한다. 철강업계에 근골격계 질환자가 많은 건 그 때문이다. “쇳물의 온도를 1700도까지 끌어올린 다음에 10분 동안 재빨리 일을 해치워야 돼요. 온도가 1620도 이하로 떨어지면 다음 공정(연주)에서 주조를 못하거든요. 쇳물이 나오다가 그냥 막혀 버려요. 그러면 LF라고 해서 우리가 다시 온도를 올려 줘요.” 연주에서 뽑아내는 빌릿(Billet)의 무게는 무려 1톤. 시뻘건 불기둥이 내뿜는 열기가 후끈하다. 이 거대하고 육중한 빌릿은 압연과 가공 과정을 거쳐 갖가지 규격의 스테인리스 환봉으로 완성된다. 박현석 씨가 백철금속에 입사한 것은 1999년. 집에서 가까운 회사에 다니려고 중간에 잠시 퇴사했다가 재입사한 기간을 빼도, 이 공장에서 근무한 햇수만 4년이 넘는다. 94년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운영하는 인천직업전문학교 금속과 1년 과정을 수료한 그는 금속주조 금속재료 기능사 자격증을 차례로 거머쥐었다. 그 후 순수하게 금속 일에만 매달려온 세월이 8년. 첫 직장은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열처리 공장이었다. “뿌레카(breaker, 포크레인 굴삭기)라고 아세요? 차타고 가다 보면 도로 땅땅땅 하고 깨잖아요. 그 장비 일체를 가공하고 열처리하는 곳이에요.” 월급 120만원에 보너스 400프로. 당시로서 나쁘지 않은 대우였지만 일이 너무나 고됐다. 고3 때 허리 36을 입을 만큼 ‘등빨’이 좋았던 체격은 졸아붙을 대로 졸아붙어,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날씬한 체격으로 변했다. “솔직히 되게 힘들었어요. 일하다 코피 흘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죽어라 하니까 차차 일이 몸에 익데요.” 폼나게’ 살고 싶은 스무 살 나이, 그는 왜 남들이 3D 업종이라 부르는 ‘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스러운(dangerous)’ 곳을 첫 직장으로 선택했을까. “아버님이 농기계 만지는 걸 보고 자라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기계에 되게 관심이 많았거든요. 손으로 하는 일은 뭐든지 자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는 직업전문학교에서 기술을 배워가지고 산업체 특별전형으로 대학에 가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취업을 하고 좀 있으니까 IMF가 딱 터진 거예요. 기업 연쇄부도가 나고 대학생들 취직을 하네 못하네 하는 걸 보니까 대학보다는 그냥 안정된 직장 생활을 하는 게 제일 낫겠더라구요.” ‘안정된 생활’이 그의 삶에서 중요한 미덕이 된 것은 성장기에 두 번의 혹독한 경험을 치른 후부터다. 전라도 무안에서 태어난 그는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다는’ 부유한 농가의 장손이었다. 알부자로 소문난 그의 집에는 콤바인, 이앙기, 트랙터 등 없는 농기계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우연히 노름에 손을 대면서 그의 가족은 ‘돈’도 ‘갈퀴’도 다 잃어버렸다. 또 한 번의 위기는 고등학교 입학 직후에 찾아왔다. 오토바이를 몰고 약국에 가다가 신호대기 중에 택시에 치였는데, 21미터를 날아간 그는 한 달이 지나서야 의식을 되찾았다. 일곱 번의 대수술을 거쳐 가까스로 이어붙인 오른쪽 쇄골은 왼쪽 것보다 현저히 짧다. 목숨을 앗아갈 뻔한 ‘약국 앞 그 자리’를 잊고 싶어 집도 학교도 성남으로 옮겼다. 불은 강철을 단련시키고 시련은 사람을 단련시킨다던가. 성장기의 아픈 경험은 현석 씨를 일찍 철들게 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바른생활 사나이’. 일할 때 몸 사리지 않고, 이유 없이 결근하는 일이 없다. 술도 입에 대지 않는다. 그래도 회식 날은 제일 바쁘다. 술 취한 동료들을 집까지 안전하게 ''수송''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야간작업을 마치고 동료들과 어울려 탁구나 볼링을 치는 시간은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소중한 일과다. “회사에서 탁구 치면 제가 다 이겨요. 초등학교 때 탁구선수였거든요.” 그의 월급은 기본급 88만 원에 제 수당을 합해서 2백만 원 선. 1주일에 70시간 가까이 일하고, 한 달의 반은 야간 근무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결코 많은 돈이 아니다. 그래서 작년 여름에는 8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머리띠를 동여매기도 했다. 회사는 소사장제를 도입했다. “부서마다 별개의 사업체처럼 세무사를 두고 임금이며 세금을 따로 처리하니 회사로서도 이득이죠. 하지만 큰 불편사항은 없어요. 회사에서 알아서 대우를 잘 해주는 편이니까요.” 박현석 씨는 노후 장비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라인 작업''의 특성상 기계 하나가 고장 나면 전체 부서가 일을 멈추게 되는데 낡아빠진 기계를 적당히 보수해서 쓰고 또 쓸 뿐이다. “80명의 금속과 동기들 중에 전공 살려서 금속 일 하는 사람은 저 하나예요. 그만큼 힘들단 애기죠. 옛날에는 3D 업종이라 했잖아요. 하지만 경기도 어려운데 그런 거 저런 거 다 따지면 어떻게 일합니까. 다행히 저한테는 이 금속 일이 맞는 거 같아요.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호감을 느끼지 않으면 그 기술은 못 배워요. 솔직히 요즘 기술 없으면 누가 쓰기나 하나요.” 베테랑 일꾼으로서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성실성은 그의 큰 자산이다. 그 자부심과 경험을 밑천으로 한 십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 ‘내 장사’를 하고 싶다는 박현석 씨. 십년 후 그가 어떤 일을 하든, 그는 그 자리에 꼭 맞는 사람이 돼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그런 사람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오빠 같은 사람 없어요” 지난 봄, 치과 조무사로 일 2004-11-17
- <이 사람>국비장학생으로 유학 떠나는 아시아 인어 최윤희 22년 전 인도 뉴델리에서 태극기를 세 번씩이나 올리고 일약 ‘아시아의 인어’로 떠오른 최윤희. 한국 수영 역사를 ‘다시 쓴’ 그는 그러나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 출산과 육아로 한동안 세상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랬던 그가 서른여덟 나이에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지난해 11월 대한체육회가 국제 스포츠 외교를 담당할 인적자원 개발을 위해 실시한 ‘스포츠 외교 전문인력’ 선발 시험에서 10: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 국비 장학생으로 유학길(미국 워싱턴주립대학)에 오르게 된 것이다. 출국 1주일 전인 지난해 12월말, 일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열다섯 살 소녀에서 어느 덧 30대, 두 아이의 엄마가 돼 있었다. 세월을 비켜가지는 못했지만 청중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환하게 미소 짓던 그 모습만큼은 여전했다. 91년 부모님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13살 연상의 가수 유현상과 비밀 결혼식은 스포츠신문 1면 머리기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80년대 대표적인 헤비메탈그룹 ‘백두산’의 리더였던 유현상씨는 결혼하고 나이 들면서 트롯가수로 변신해 화제를 모으기도 한 인물. 술·담배 절대 안 하고 지방 공연이 아무리 늦게 끝나도 잠은 반드시 집에 들어와서 자는 ‘모범생 남편’에다 두 아이 머리를 단정히 빗겨 학교에 보내는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까운 재능 묵히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던 남편은 아내의 등을 떠밀어 대학원에 보냈다. 석사과정을 끝낼 즈음이던 2001년 5월, 우연한 기회에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수영장인 ‘킹 아쿠아틱 스위밍클럽’에서 수영 코치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동안 코치생활을 해본 적이 없던 그로서는 수영 종주국에서 자신을 시험하는 또 다른 도전이었던 셈. “동양인에다가 여자, 그것도 이제까지 배우던 방식과 다르게 가르치니까 한 고등학생이 직접 물속으로 들어가서 시범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더군요.” 선수생활 접은 지 오래됐다고 해도 아시안게임 2회 연속 금메달을 휩쓸었던 그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물속에서 나오자 학생들은 일제히 박수로 화답했다. 그 후 1년여 동안 최윤희 코치가 ‘하라는 대로 믿고 따랐음’은 물론이다. 수영을 떼어 놓고 최윤희의 인생을 말할 수 없지만 수영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한 것도 사실이다. 어릴 적엔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도 먹고 남들 다 가는 소풍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수영선수 최윤희에게 그런 또래들이 느끼는 즐거움은 허락되지 않았다. “새벽 운동 할 때가 가장 힘들었죠. 아무리 여름이라도 새벽이면 물이 몸에 닿을 때 온 몸이 싸늘해져요. 겨울은 말할 것도 없구요. 내복까지 껴입고 갔는데 달랑 수영복만 입고 찬물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제 그의 꿈은 모든 운동선수들이 한번쯤 꿈꿔 본다는 IOC 위원이다. “아테네올림픽에서 양태영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힘 있는 나라였다면 그리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우리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은 스포츠 외교력의 승리거든요. 최근 우리 체육계가 좀 흔들리자 이 틈을 타서 태권도를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시키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잖아요. 중국이 약진하고 있으니까 우슈를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려는 거죠.” 우리나라의 스포츠 외교 인력 풀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늦게나마 쇼트트랙 5관왕 전이경씨를 필두로 ‘스포츠 외교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이 다행이다. 나이 마흔을 앞두고 ‘한국 첫 여성 IOC 위원’이라는 새 목표를 향해 태평양을 건너는 그는 “어깨가 무겁다” 했다. 하지만 그는 열다섯 나이에 한국 여자 수영 28년의 숙원을 풀어주지 않았던가. 국제무대에서 한국 스포츠 외교관의 역할을 멋지게 해낼 그의 모습이 기대된다. /신민경 기자 mkshin@naeil.com 사진 이의종 기자 2005-01-06
- 인터뷰 - 박영길 주민감시원 조장 “선진국은 국토가 넓지만 우리보다 매립장 규모가 작다고 합니다. 이곳에 쓰레기가 가득 차면 또 어디에 매립장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내 집 앞에 쓰레기를 묻는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버리지 못할 겁니다.” 인천 서구 수도권매립지에서 반입쓰레기 상태를 감시하는 박영길(44·사진) 주민감시원(조장)은 일부 시민들의 비양심적인 행동에 이렇게 호소했다. 박씨는 3일 하루 동안 5대의 차량을 반출 조치하면서“‘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이 자칫 쓰레기 대란을 몰고 올 수 있다”면서“일반주택가와 소규모 식당에서 분리배출이 잘 이뤄지지 않아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씨를 비롯한 감시원들이 허허벌판에서 악취와 먼지를 마시며 그들의 삶의 터전을 지켜 온 세월은 벌써 4년째다. 가장 힘든 것은‘악취’를 견디는 것. 하루에 반입되는 생활폐기물만 7000~8000톤에 달하는데 이를 일일이 눈으로 검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음식물쓰레기를 냄새만으로 분간할 수 있다. 감시원들이‘악취’를 맡아야하는 이유다. 그나마 지금은 4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좋아졌다. 실제 쓰레기반입 차량이 몇 년 전만해도 하루 2500대에 달했지만 현재는 1500대 수준으로 줄었다. 그는“그동안 지자체별로 각종 시설을 갖추고 의식개선을 위해 노력한 결과, 쓰레기 상태가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초기에는 쓰레기반입 차량 기사들과 멱살까지 잡고 싸우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 지금은 말다툼할 일도 거의 없다. “여기서 일하기 전에는 저도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 땅이 후손들에게 물려줄 소중한 땅이고 쓰레기를 줄이면 예산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을 일하면서 깨달았죠.” 그는 마지막으로“단속보다 의식개선이 중요하다”며“철저한 분리수거로 우리 강토를 지키자”고 시민들에게 당부했다. /인천 곽태영 기자 tykwak@naeil.com 2005-01-03
- <내일시론>2005년을 북핵문제 해결의 해로(임춘웅 2005.01.05) 2005년을 북핵문제 해결의 해로 북한의 핵문제가 다시 불거진 지 벌써 2년을 넘겨 3년째에 접어들었다. 93년 2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거부함으로써 터졌던 1차 북핵파동이 19개월만인 94년 10월, 이른바 ‘제네바 합의’를 통해 봉합된데 비해 이번 핵문제는 2년을 훌쩍 넘기고도 언제쯤 마무리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대통령이 취임 2년이 다 돼 가는데 이 문제 때문에 되는 게 없다고 실토할 만큼 북한의 핵문제는 난해하고 시간 소모적이며 한국을 비롯한 관련국들을 지치게 만들고 있다. 핵문제로 해서 남북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한때 급진전을 보는 것 같았던 북한과 일본간의 북일협정 교섭이 안개 속에 덮여 버렸다. 중국과 미국사이도 이 문제로 새로운 긴장이 조성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그렇지 않아도 불편해지고 있는 러시아와 미국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소지가 있다. 북한과 미국은 목표치 낮추고 ‘핵’으로 문제를 단순화할 필요 있어 북핵문제가 이처럼 어려운 데는 북한과 미국이 다같이 핵을 통해 다른 것을 얻으려는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를 통해 국가안보와 미국의 대북한 경제제재를 동시에 풀어보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른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해소책이다. 반면에 미국은 북한핵을 통해 동북아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계속해서 확보하려는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핵문제라면 문제는 어려울 게 없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는 것은 미국보다 러시아와 중국, 특히 일본이 더 싫어하는 일이다. 더구나 한국은 북핵의 일차적 피해대상국이다. 때문에 북한이 핵무기를 이미 갖고 있거나 가질 의향이 분명하다면 6자회담의 5개 당사국이 일사분란하게 북을 압박하게 되면 북이 견딜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북의 핵무기보유에 대한 확신이 없고 미국은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른 목표들 때문에 북한과 미국은 다같이 이른바 ‘불확실성’을 키우며 핵 게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햇볕정책으로 한때 한반도에서 밀리는 듯 했던 미국의 영향력을 핵문제를 통해 상당부분 되찾는 효과를 이미 확보했다.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얻어내려던 본래의 목표는 얻어내지는 못했어도 남은 4자의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떼어낸 효과를 일단 거두고 있다. 한국의 대북지원이 미국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지속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양측이 목표치를 낮추고 핵으로 문제를 단순화 할 필요가 있다. 인권문제, 재래식 무력같은 문제들을 끼워 넣으면 핵문제는 부지하세월이 될 것이다. 핵문제를 먼저 종결한 다음 인권문제 등은 차후 다시 기회를 보아 풀어가야 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의 외교적 역할이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다행히 미국도 핵문제를 더 이상 질질 끌고 갈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핵 피로현상이 이미 동북아에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핵게임을 계속해서 밀어대면 부메랑은 결국 미국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 미국은 이것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핵문제 종결 타이밍 성숙, 4~5월께 협상 본격화 예상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4일 MBC 라디오와의 회견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6자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을 함께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나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문제를 풀어보겠다는 인상은 자칫 6자회담을 손상시킬 여지가 없지 않다. 6자회담은 핵문제 이후에도 잘 키워나가야 할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남북정상 회담은 언제 어디서든 자주 열릴수록 좋은 것이고 정상회담에서 핵문제를 논의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통해 핵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모양새는 가능한 피해야 한다. 부시 2기정부가 출범하고 새로운 북핵문제 담당 팀이 정책조율을 끝내게 될 금년 4~5월께가 되면 핵문제 협상이 본격화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주도적 역할’은 북한과 미국의 목표치 하향조절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핵협상 연내 마무리에도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임 춘 웅 객원논설위원 2005-01-04
- 혼란속에서도 우리는 변화하고 발전했다 2004년은 대통령 탄핵사태, 행정수도 이전 논란, 국가보안법 개폐 등 굵직한 사건을 둘러싸고 온 사회가 대립과 갈등을 빚었다. 한 해를 표현하는 사자성어로 당동벌이(黨同伐異: 같은 무리와는 당을 만들고 다른 자를 공격한다)가 뽑힐 정도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정체한 것이 아니다. 혼란 속에서도 한걸음 한걸음 변화하고 발전했다. 특히 내수부진이라는 최악의 상태에서도 한국경제와 한국문화는 세계무대에서 당당히 인정을 받았다. 2004년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던 사건들을 되새겨 본다.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선전 수출 2500억 달러 우리나라가 세계 교역규모에서 10위내 진입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높은 무역장벽 속에서도 연내 2500억 달러 돌파가 무난할 전망이다. 한국은 1995년 1000억 달러를 달성한 후 불과 9년 만에 2500억 달러 고지를 넘어섰다. 수출호조는 중국경제가 급상승하고 미국과 일본 등 주요 교역국가들이 경기 회복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등 경쟁력 있는 상품은 해외 시장에서 여전히 두각을 나타냈다. 반도체 무선통신기기 자동차 등 3대 수출품목이 40%를 넘는 높은 증가율로 수출을 주도했다. 컴퓨터 선박 석유제품 철강판 합성수지 영상기기 자동차 부품 등 10대 상품도 선전했다. 중국과 홍콩으로의 수출은 40% 이상 증가해 수출다변화에 한몫을 했다. 이처럼 수출은 심각한 내수 침체에 빠진 한국경제의 성장 버팀목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국가경제에서 수출의존도가 40%를 육박해 미국 6.6%, 일본 11% 등 주요 국가들에 비해 기형적으로 높았다. 휴대인터넷·이동지상파 우리기술이 세계선도 IT 업계의 기술개발이 유난히 돋보인 한 해였다. 세계 최초로 와이브로(휴대인터넷) 시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12월 13일 시연회를 가진 와이브로는 우리가 서비스 개념을 정립했고 세계 최초로 기술을 개발했다. 60km의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도 초고속인터넷을 아무런 장애 없이 이용하는 기술이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휴대폰수출강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퀄컴 등 해외기업 의존도가 높았다. 와이브로는 이동통신 핵심칩 분야에서 선진기술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와이브로의 핵심기술인 광대역 OFDM(직교주파수분할다중) 기술은 4세대 이동통신(4G) 표준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개발한 지상파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DMB) 기술도 국제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150Km 이상 고속주행 중에도 선명한 동영상 수신이 가능한 지상파DMB는 국내기술진이 개발한 새로운 서비스다. 지상파 DMB는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외국순방 중에 시연회를 개최, 각국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전 세계 문화코드로 뻗어나간 ‘한류’ 열풍 일본을 위시한 아시아 국가에서 ‘한류’가 하나의 문화코드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중국에서는 신세대 사이에서 ‘한국 것은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유럽에서도 한국영화가 주목을 받았다. 올 해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끈 캐릭터는 한국의 ‘뿌까’였다. 미국과 멕시코를 위시한 남미에도 아시아계를 중심으로 한국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서방 언론은 미국에서 들어온 문화를 한국이 전통적 유교문화라는 체로 한 번 걸러준 덕분에 여타 아시아 국가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아시아 언론들은 아시아 국가들이 가족애 자기희생이라는 공동의 가치 코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중 합작으로 현지 로케이션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은 희망적이다. 중국시장 공략은 물론 홍콩과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진출이 용이해 진다. 또 이슬람권인 말레이시아 진출은 같은 이슬람권인 중동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진출을 의미한다. 정치권·공직사회 변모시킨 탈권위주의 바람 정치권에 탈권위주의 바람을 일으킨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국무회의가 토론의 장으로 바뀌었다. 정치권도 큰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국회의원과 보좌진의 관계가 수직관계 대신 수평관계로 바뀌었다. 국회의원이 일방적으로 지시하기 보다는 토론하는 관계로 변했다. 산하기관을 고압적으로 대하던 태도가 바뀌었고, 실무를 잘 아는 정부부처 국장·과장급을 직접 상대하는 일도 흔한 모습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국회 구내식당에서 2500원짜리 식사를 하는 의원들이 늘고 있다. 의원과 보좌관들과 함께 국회 공사장에 있는 이른바 함바식당을 즐겨찾기도 한다. 검은색 최고급 승용차가 줄을 잇던 국회의원 회관 앞 풍경도 눈에 띄게 줄었다. 희색승용차나 중고 아반떼·스타렉스 같은 실용적 차가 늘어났다. 전철을 타고 출근하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의원도 있다. ‘보스정치·돈정치’와 실질적으로 절연 올해 상반기 정치권을 뒤흔든 불법대선자금수사는 정치문화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오랜 세월 성역으로 군림해온 대선자금의 실상이 낱낱이 밝혀지며 전·현직 국회의원, 정치인 16명이 사법 처리됐다. 이후 정치권에 투명하지 않은 돈은 대부분 사라졌다. 4월 15일 치러진 총선에서도 불법정치자금 시비는 크게 줄었다. 돈 정치가 사라지며 보스 정치도 사라졌다. ‘3김시대의 정치유물’이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의원 개개인의 의사가 존중되고 당원의 목소리가 커졌다. 대통령이 총재를 겸하며 공천과 돈을 갖고 여당을 지배하던 구도가 사라졌다. 정치인이 살 길은 ‘정책 대결’만 남았다. 정당에 주는 국고보조금의 30%는 의무적으로 당 정책연구소 예산으로 쓰도록 의무화됐다. 의원들은 각종 정책개발모임에 앞 다퉈 참여하고 있다. 평화와 화해를 생산하는 개성공단 가동 12월 15일 오전 11시 황해도 개성시 리빙아트 공장에서 생산된 냄비세트가 트럭에 실렸다. 6시간 후 서울시 중구 롯데백화점 리빙아트 매장에 냄비가 진열됐다. 판매시작 15분 만에 400세트가 매진됐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리빙아트에서 만든 그릇은 평화 그 자체이다”며 “남북 근로자들은 단지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녹이고 화해를 만들며, 평화를 함께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성공단이 완공되면 남북한이 누릴 경제적 가치는 상당하다. 한국은행 분석 자료를 보면 공단 개발이 끝나는 2012년이면 남한 10만개, 북한 73만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 부가가치는 우리 돈으로 남한 24조4000억 원, 북한 7200억 원에 이른다. 11월 체결된 한-싱가포르 FTA에서 관세문제가 해결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경제 어려울수록 더 커진 나눔의 손길 경제가 어려워지며 중산층이 무너지고 소득의 양극화가 심해졌다. 특히 저소득층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어린아이가 장롱에 갇혀 죽거나, 어머니가 일 나간 사이 불에 타 죽은 아이들은 우리들을 안타깝게 했다. 예년에도 경기가 어려울 때면 기부의 손길은 더 커졌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랬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연말에 모금한 액수가 800억 원을 넘어섰다. 액수는 크게 늘었는데도 연말에 반짝 쏠림 하는 현상이 조금은 완화됐다. 전체 기부금에서 연말연시 기부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예년의 79%에서 올해는 65% 수준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개인기부의 비중이 20%에 머무를 정도로 기업 의존도가 큰 것이 아쉽다. 한 단계 높아진 인권재판·인권수사 대법원은 12월 16일 피고인이 ‘내가 진술한대로 작성되지 않았다’며 검찰조서 내용을 부인할 경우 그 조서를 인정하지 않기로 판례를 변경했다. 법정에서 검사와 피고인이 대등한 위치에서 법정진술과 증거를 갖고 유무죄를 다투도록 한 것이다. 종전에는 가혹행위가 인정되어야만 검찰수사기록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재독학자 송두율씨가 항소심에서 주요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04-12-30
- <신문로 칼럼>‘다름’을 위하여, ‘같음’을 향하여(유승삼 2005.1.1) ‘다름’을 위하여, ‘같음’을 향하여 유 승 삼 언론인 교수신문이 교수들에게 올 한 해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사자성어를 물은 결과 ‘같은 사람끼리 패거리 지어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 는 뜻의 ‘당동벌이(黨同伐異)’가 으뜸으로 뽑혔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꼽힌 것이 ‘지리멸렬’과 ‘이전투구’였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지난 한 해를 ‘증오’로 압축했다. 또 다른 이는 ‘적개심’이라고 표현했다. 그 적절성 여부를 떠나서 이런 표현들은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사회가 얼마나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을 겪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이러한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흔히들 정치판에 그 책임을 돌리곤 한다. 물론 정계가 책임을 면할 길은 없다. 그러나 갈등과 대립의 원인을 정치판에만 돌릴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지난 한 해는 모든 국민이 정치인이 된 것 같았다. 만나면 화제가 정치였다. 어려운 경제문제조차 뒷전으로 밀렸다. 적개심으로 맞대결한 한 해 교과서는 국민의 정치에 대한 깊은 관심이 민주주의와 참여정치를 성숙하게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지난 해 공·사석에서 나타난 과잉 정치의식과 격정적인 표현에서 그런 긍정적인 요소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성이나 논리는 없고 맹목적인 증오와 적개심, 격정과 과격한 언사만이 넘쳐났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국민 특히 기성세대들은 역사적 격변 속에서 살아 왔다. 일제를 겪고 해방을 맞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르고 4·19, 5·16, 5·18, 6·10 등등 숨 돌릴 틈조차 없이 격변을 겪어 왔다. 그런 세월 동안 우리들의 내면에는 이런저런 일로 해서 증오와 상처가 켜켜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랜 권위주의 시대의 억압 때문에 그것이 발산되거나 치유되지 않아서 걸핏하면 격렬한 감정적 대립을 빚는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적 설명이다. 영국 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인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며 1914~1992년까지를 ‘극단의 시대’라고 이름지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전과 베트남전 그리고 50년간의 냉전이 전개 되었던 그 ‘극단의 시대’도 소련 체제의 붕괴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만은 여전히 ‘극단의 시대’ 속에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대전제는 우리 모두가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원하건 원하지 않건 세상이 변한 다는 걸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다. 지난 87년 이래 지난 대선과 총선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변화가 말해주는 것은 빙하기의 얼음 속에 갇힌 매머드 같았던 한국 사회도 변화에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변화를 읽지 못하고 과거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홉스봄은 “바람직한 미래를 과거나 현재를 연장해서 건설할 수는 없으며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을 경우 그 결과는 암흑뿐”이라고 단언했다. 사회의 필연적인 변화에 동의한다면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다름’에 대한 관용이다. 즉 다른 사람의 주장을 자신의 주장과 같은 값으로 인정하고 평가할 줄 아는 겸손과 관용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자신만이 옳다고 여겨 남들도 자신과 똑 같은 견해를 갖기를 바라는 것은 독선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대립과 갈등을 낳는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그것들이 다수의 동의를 얻기 위해 규칙에 따라 평화롭게 경쟁하는 게 민주사회이다. 그렇다고 남의 주장을 폭력으로 억압하려는 극단주의까지 이해하고 관용할 수는 없다. 극단주의에는 오히려 철저히 맞서야 한다. 실은 지난 해의 대립과 갈등은 시대 변화에 불안감을 느낀 극단주의자들이 빚어낸 것이다. 공동의 목표 세워 대립 극복을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는 또 하나의 길은 생각의 차이를 뛰어 넘어 우리들이 함께 추구할 공동의 목표를 만드는 것이다. ‘차이’속에서도 추구할 목표는 ‘같음’을 확인하게 해주는 것이다. 서구 여러나라들이 복지사회 계획을 경제적 성장 후에 마련한 것은 결코 아니다. 1920년대~40년대에 복지사회의 청사진을 마련한 뒤 그 실현을 목표로 성장을 추구해 왔다. 우리에게는 이런 장기적 청사진이 없다. 장래가 불안하니까 불신과 반목도 커진다. 우리 사회의 큰 문제인 노사갈등이나 국민들의 부동산 집착도 따지고 보면 국가가 국민에게 안정적인 미래를 약속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북구처럼 사회보장제가 잘 확립돼 있다면 노사가 전투적인 대결을 벌일 필요도 없고 국민이 부동산에 집착할 이유도 없다. 무한한 흐름 속에 눈금을 그을 줄 아는 것은 인류의 지혜이다. 새해에는 대립과 갈등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들만이 역사의 지진아가 되어 ‘극단의 시대’에 아직도 갇혀 있는 현실이 너무나 서글프다. 대립과 갈등을 넘어 ‘다름’을 인정하면서 ‘같음’을 추구하는 희망있는 새해가 되기를 대망한다. 2004-12-30
- 한국과 더 가까워진 남아시아 <인도, 싱가포르, 베트남> 인도 정보통신기술교류 가능성 확인 싱가포르 상품·서비스 자유무역 베트남 상호보완적 경제구조 활용 어느 해보다 한국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호응이 뜨거웠던 올 한해 동안 동·서남아시아와의 관계도 급진전했다. 이 지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적 활력을 보여주고 있는 곳으로 우리에게 갈수록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인도 = 노무현 대통령은 10월4~6일 한국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인도를 국빈방문했다. 노대통령은 인도방문 기간 중 “인도의 소프트웨어와 한국의 하드웨어기술이 결합하면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기대를 표명하면서 ‘경제협력 강화를 위한 공동연구단’을 발족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정보, 통신, 석유화학, 항공 등 4개 분야에 대해 양국간의 깊은 관심을 확인했다. 노 대통령의 인도방문 기간 중 인도 최고의 소프트웨어 연구소인 국제정보기술연구소(IIIT)와 한국의 BIT캠프는 ‘석사과정수준의 고급정보기술과 정보관리를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한국에서 실시하기로 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 양해각서에 따라 IIIT는 고급정보기술과 관리를 위한 교육을 인터넷을 통해 한국학생들에게 제공하며 소프트웨어 제품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현재 인도에는 170개 이상의 한국기업이 진출하고 있으며 총 투자규모는 26억 달러에 이른다. 특히 지난 10월에는 LG전자가 뭄바이에 4300만달러를 들여 휴대폰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싱가포르 = 아세안+5정상회의에 참석 중이던 노 대통령은 11월29일 싱가포르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칠레에 이어 두번째 FTA였고 아시아국가와는 첫번째였다. 한-칠레 FTA에 비해 금융, 전자, 기술상호인정 등의 분야를 체결하고 있어 거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 교역의 자유화가 이루어지게 됐다. 특히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의 원산지를 한국으로 규정함으로써 한국기업의 북한투자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베트남 = 베트남과 한국은 1992년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양국간의 감정의 골을 메우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한번 관계가 정상화되자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해왔다. 1992년 4억9000만 달러였던 교역규모가 2003년에는 30억 달러로 늘었다. 이처럼 양국간의 경제적 관계가 빨리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상호보완적인 산업구조를 양국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양질의 값싼 노동력이 풍부해 한국기업들 특히 중소기업들의 좋은 투자처로 각광 받아왔다. 한국기업의 투자는 베트남의 경제발전과 고용증대에 기여했고 8000만이 넘는 인구는 한국수출기업의 주요시장으로 떠올랐다. 지난 5월 한국상공회의소가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는 트롱마이호아 부통령이 직접 대표단을 영접할 정도로 한국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이 자리에서 호아 부통령은 “베트남이 한국중소기업들이 투자하기에는 최적지”라고 설명했다. 6월에는 ‘베트남 근로자의 한국취업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노동분야의 협력도 한층 강화시켰다. 10월9~12일에는 노대통령이 베트남을 국빈방문하여 트란둑루옹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후 농둑만 여당사무총장 판반카이 총리와도 개별회동을 가졌다.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은 미래지향적 파트너십을 더욱 발전시키고 경제교류를 강화하기로 했다. 양국간의 관계는 경제분야뿐만 아니라 문화와 교육분야에서도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하노이와 호치민에서 열린 한국의 사물놀이와 난타공연은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고 한국도 베트남문화주간행사를 개최하여 레티엔토 부총리가 참석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4개 대학에서 베트남학과 언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베트남에서는 6개 대학이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또 하노이TV는 2004년10월부터 한국어 배우기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김광호 리포터 holhol@naeil.com 2004-12-29
- 경제수사통 김진우 강남서 수사2계장 “강남경찰서에 와서 약 2년 동안 경제 사범 수사에 집중했습니다. 유사수신업체 수사에 대해서는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어요. 지방에서도 우리 수사 자료를 참고합니다.” 지난해 4월 서대문서에서 강남서로 자리를 옮긴 김진우(49·사진) 수사 2계장은 경제 사범 수사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강남 일대는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많은 경제 사범이 발생하는 곳이라 지난 2년 동안 경제 사범 수사에 온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특히 강남권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유사금융업체 단속에 그를 비롯한 수사 2계 직원들이 ‘올인’ 해왔다. 수사 2계 직원들은 이를 위해 유사금융업체 사업 설명회에 신분을 속이고 잠입하면서 정보를 캐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높은 직위에 올라가야 이들 업체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고 판단, 거짓으로 영업실적을 꾸며 본부장에 오른 직원도 있었다. 그 결과 지난 9월 전국 최고 규모의 유사수신업체인 ‘ㅈ’ 그룹을 수사해 단일 사건으로 최대 규모인 121명을 검거하기도 했다. 김 계장은 “경제사범에 강한 강남서 전통과 지난해 새로 구성된 수사계 직원들의 의지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그가 온 이후 수사 2계는 유사수신업체 수사에서만 혁혁한 성과를 거둔 것이 아니다. 2003년 서울청 기획수사 1위에 오른 것을 비롯, 올해 지적재산권 기획수사에서도 790명을 입건해 서울청 1위에 올랐다. 또 민생경제 사범 단속에서도 234명을 구속해 서울청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이처럼 김 계장은 수사분야에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과를 거뒀지만 그의 본래 전공은 ‘강력계’이다. 김 계장은 82년 경찰에 투신한 이후 관악서 성동서 송파서 등을 두루 거치며 형사반장 강력반장 형사계장 등 강력계에서만 20년 세월을 보냈다. 그런 그인 만큼 굵직굵직한 사건도 수없이 해결했다. 특히 포항남부서 형사계장 시절인 지난 97년 히로뽕을 상습복용하고 강력사건을 저지른 일당 8명을 검거한 것이 가장 인상 남는다고 했다. 전국을 무대로 금고털이와 부녀자 납치강간을 저지른 일당을 해결한 공로로 직원 한 명을 특진시키기도 했다. 당시 경북청장이던 최기문 현 경찰청장이 초도순시 때 가장 먼저 포항남부서를 찾아와 김 계장 일행을 격려했던 일도 그에게는 자랑거리이다. 김 계장은 “그때의 근성으로 앞으로도 수사분야에서 더 좋은 결과를 내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김남성 기자 kns1992@naeil.com 2004-12-21
- 인물초대석-김진우 강남서 수사2계장 “강남경찰서에 와서 약 2년 동안 경제 사범 수사에 집중했습니다. 유사수신업체 수사에 대해서는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어요. 지방에서도 우리 수사 자료를 참고합니다.” 지난해 4월 서대문서에서 강남서로 자리를 옮긴 김진우(49·사진) 수사 2계장은 경제 사범 수사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강남 일대는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많은 경제 사범이 발생하는 곳이라 지난 2년 동안 경제 사범 수사에 온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특히 강남권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유사금융업체 단속에 그를 비롯한 수사 2계 직원들이 ‘올인’ 해왔다. 수사 2계 직원들은 이를 위해 유사금융업체 사업 설명회에 신분을 속이고 잠입하면서 정보를 캐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높은 직위에 올라가야 이들 업체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고 판단, 거짓으로 영업실적을 꾸며 본부장에 오른 직원도 있었다. 그 결과 지난 9월 전국 최고 규모의 유사수신업체인 ‘ㅈ’ 그룹을 수사해 단일 사건으로 최대 규모인 121명을 검거하기도 했다. 김 계장은 “경제사범에 강한 강남서 전통과 지난해 새로 구성된 수사계 직원들의 의지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그가 온 이후 수사 2계는 유사수신업체 수사에서만 혁혁한 성과를 거둔 것이 아니다. 2003년 서울청 기획수사 1위에 오른 것을 비롯, 올해 지적재산권 기획수사에서도 790명을 입건해 서울청 1위에 올랐다. 또 민생경제 사범 단속에서도 234명을 구속해 서울청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이처럼 김 계장은 수사분야에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과를 거뒀지만 그의 본래 전공은 ‘강력계’이다. 김 계장은 82년 경찰에 투신한 이후 관악서 성동서 송파서 등을 두루 거치며 형사반장 강력반장 형사계장 등 강력계에서만 20년 세월을 보냈다. 그런 그인 만큼 굵직굵직한 사건도 수없이 해결했다. 특히 포항남부서 형사계장 시절인 지난 97년 히로뽕을 상습복용하고 강력사건을 저지른 일당 8명을 검거한 것이 가장 인상 남는다고 했다. 전국을 무대로 금고털이와 부녀자 납치강간을 저지른 일당을 해결한 공로로 직원 한 명을 특진시키기도 했다. 당시 경북청장이던 최기문 현 경찰청장이 초도순시 때 가장 먼저 포항남부서를 찾아와 김 계장 일행을 격려했던 일도 그에게는 자랑거리이다. 김 계장은 “그때의 근성으로 앞으로도 수사분야에서 더 좋은 결과를 내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김남성 기자 kns1992@naeil.com 2004-12-21
- <밥일꿈>2005년 동서화합을 기대한다(정원동 2004.12.20) 2005년 동서화합을 기대한다 정 원 동 정의화 국회지역화합특위 위원장 보좌관 1980년대를 돌아보면 ‘지역감정’의 벽이 가장 높은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지역갈등이 우리들의 마음의 상처를 후벼 파는 사례는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쉽게 경험할 수 있었고, 그런 지역감정 조장의 한가운데는 언제나 정치인이 앞장섰고 언론은 방관했다. 이제는 ‘지역감정’이란 말도 과거에 비해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결코 없어졌다고 보긴 힘들다. 실체는 없으면서 우리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지역감정’을 다시 이야기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실 지금이 동서간의 지역주의 장벽을 허물고 지역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본다. 새로운 17대 국회가 출범하고 내년은 큰 선거가 없는 해이다. 더군다나 정치권에서는 이미 ‘영호남 지역화합과 발전’을 위해 구체적 실천들을 소리 없이 해오고 있다. 목포에서 부산까지 남해안을 묶어내는 남해안 선언, 전남 동부와 경남 서부를 묶어내는 지역화합특구 설치 등 많은 아이디어들이 구체적 실천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세월가면 저절로 지역갈등 없어질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도지곤 했다. 선거 전략상의 유혹과 언론의 본의 아닌 동조의 반복 때문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항상 구두선에 머물게 된다. 지역감정 조장은 죄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먼저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케 한다. 그리고 명명백백한 피해가 반드시 따른다. 진정으로 우리나라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국민통합과 지역화합이 반드시 필수이다. 동서갈등의 실체는 별것 아니라고 본다. 문제는 실천이다. 무엇보다 상대방 입장에서 공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자리에서 떠오르는 지역갈등 해소를 위한 아이디어를 몇 가지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영호남지역 여행프로그램 개발을 통한 관광교류이다. 두 번째 지역감정 부추기는 정치인과 동조하는 언론은 해외로 추방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그런 세력에 대해 우리사회가 철퇴를 내려야 한다. 세 번째 어린이의 교육과 교류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역감정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편견에 의해 각인되기 때문이다. 지금 영호남 상대지역 예산에 대해 배려하려는 움직임이 정치권에서 일고 있다. 우리 정치역사상 보기 힘든 미담이지만 그것에 대해 아직도 순수성을 의심하는 도전도 만만치 않다. 지금까지 영호남 교류가 정권 안보적 차원에서 병주고 약주는 식의 행사, 생색내기, 일회성, 즉흥적 행사로는 안된다. 더군다나 정치인과 언론의 선동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서는 더더욱 안될 것이다. 2005년에는 동서통합의 훈풍이 우리들 가슴속을 따뜻하게 녹여주길 기대한다. 2004-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