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8·15 독도 방문을 준비하며 김범진 국회 보좌관 여의도 국회에 발을 디딘지 벌써 1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다. 정치속에서 정치를 배우고자 출발한 국회 보좌관 생활로 인해 30대 젊음을 꼬박 이곳 국회에서 보냈다. 힘들지 않은 분야가 있겠는가마는 국가의 정책에 대한 분석으로 밤새우며 일하는 국회의 일도 그리 만만치는 않다. 정치학을 전공했고 또 지금도 박사과정을 하면서 한국정치를 공부하고 있지만 정치에 대한 꿈을 품지않았다면 아마도 벌써 다른 직종으로 옮겼을 정도로 국회 일은 힘들다. 반대로 일의 성과에 대한 보람 또한 남다르다. 지난 16대 국회에서는 정병국 의원이 4년연속 최우수, 전체 의원 중 종합 2위 평가를 받았다. 마치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올린 농부처럼 보람과 기쁨이 충만한 것은 경험한 사람만의 특권이다. 요즘 개인적으로 의미 있고, 보람찬 일을 하고 있어 기분이 매우 좋다. 광복 59주년을 맞이한 2004년은 유난히 우리 역사에 대한 도전을 많이 받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침탈 등 최근의 동북아정세는 마치 100년전 구한말 주권상실 당시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한반도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그만큼 국회에서의 일도 많아진다. 한나라당내 젊은 의원 그룹인 ‘새정치수요모임’에서는 광복 59주년 기념식을 독도에서 갖기로 했다. 울릉경비대에는 도서 5백권을 기증하며 진중도서관을 설립하고, 독도경비대원들을 위한 위문공연 및 함께하는 족구대회도 마련했다. 특히 울릉도에서 1954년부터 1956년까지 민간인 신분으로서 목숨을 걸고 독도에서 일본해양경찰을 내몰았던 ‘독도의용수비대’ 생존자들과의 만남은 이번 기념행사의 의미를 더 크게 해주었다. 지난해 중국 중경임시정부청사에서 느꼈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이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독도는 아마도 다케시마로 불리는 일본땅이 되었을지 모른다. 동해에 우뚝선 독도야말로 대한민국의 영원한 국토이자, 태평양으로 뻗어나갈 우리 민족의 전진기지이며, 통일시대 자주독립국가의 등불로 빛날 것이라는 감동이 이번 8.15 광복절, 국회근무 10년만에 받은 아주 특별한 감회이다. 또 하나의 기쁨은 17대 총선이 끝난 뒤 잠시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지난 7월에는 그룹사운드 매니저로 일하는 특별한 기회를 가졌다. 한국 정당들의 오래된 권위주의를 깨고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 보고자 한나라당 국회의원, 보좌진의 그룹사운드 공연 아이디어를 냈는데, 정당사의 새로운 시도라며 반향이 괜찮았다. 특히 ‘고구려A.D410’ 이름의 보좌진팀은 최근 중국의 역사왜곡에 항의하면서 광개토대왕이 요동반도와, 만주 그리고 일본영토까지 정벌했던 해를 기념하고자 구성했는데 열광적인 공연과 박수갈채는 큰 추억으로 남는다. 앞으로 중국에 대한 항의 콘서트를 계획하고 있고, 가능하면 중국이나 북한에서도 공연을 하고픈 생각이다. 2004-08-13
- <신문로 칼럼> 북한은 변화하고 있나 (임현진 2004.07.05) 북한은 변화하고 있나 임현진 (서울대교수 정치사회학)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 이후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남북을 왕래하고 있다. 지난 4년간 북한을 방문한 남한인은 1만6천명으로 3배 가까이 늘어났고, 남한을 방문한 북한인은 1천명으로 16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민간교류가 학술, 체육, 문화, 의료 등 다방면에서 이루어져 왔다. 물론 인구규모로 보면 새 발의 피다. 그러나 지난날 교류가 휴전선(?)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 중 두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다시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기회가 주어지면 재방문하겠다는 사람들이다. 앞의 부류는 똑 같은 선전에 볼거리가 제한되어 있는데 또다시 가봐야 새로운 것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뒤의 부류는 그래도 자주 만나 다른 점과 같은 점을 얘기해야 서로 교류와 대화의 폭을 넓힐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얼마전 북한을 다녀온 나로서는 감히 후자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서로 자주 만나야 오해를 줄이고 이해를 늘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식 체제 운영과 선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주체’의 테마파크에는 오로지 혁명의 우상만 있다. 매우 일사불란한 체제다. 다양성이 안 보인다. 집단주의아래 개인의 공간은 비좁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시비 걸고 싶지 않다. 반세기라는 시간 속에 갇혀진 북한이 아닌가. 시장 300여개, 유아적 단계 공론장도 최근 북한의 모습은 ‘북한 불변론’의 예상을 뒤엎고 있다. ‘북한 변화론’이 전망했던 변화조차 뛰어넘고 있다. 7.1 경제관리 개선조치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북한은 시장경제와 시민사회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다. 중앙명령적 계획경제아래에서 시장은 공식적으로 부인되었다. 시장은 연대를 깨고 계급을 만들어내는 나쁜 것으로 파악되었다. 국가에 의한 물자공급체제는 시장의 자연적 형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민들은 오래 세월에 걸친 경제위기에서 생존을 위해 각자 물품을 암시장에서 사고파는 요령을 배우게 되었다. 이제 북한에는 300여개의 시장이 움직이고 있다. 평양에만 40개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상품이 유통된다. 판매가격도 탄력적이다. 모든 곳에 인센티브제가 도입되고 있다. 종업원들의 활력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상품공급 부족과 인플레 심화다. 그럼에도 돈벌이는 거의 모든 인민들에게 번지고 있다. 이러한 초급적 형태의 시장의 발생은 기존의 도덕적 인센티브에 입각한 노동윤리와 노사관계를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북한의 사회단체들은 관변조직이다.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는 차치하고 주거와 여행의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은 곳에서 시민사회를 운위하기 어렵다. 기실 인민들은 ‘시민’이라기보다 ‘신민’에 가깝다. 그러나 인민들은 경제위기를 헤쳐가는 와중에서 생존을 위하여 이곳저곳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공식적 배급체계가 무너진 마당에 북한으로서는 인민들의 이동과 이주를 단속하기 어렵다. 중국지역의 수많은 탈북자들이 웅변하듯 인민들 사이의 왕래와 거래는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외부세계와의 접촉이 이들에게 북한체제에 대한 비교감각을 갖게 해줌은 물론이다. 이른바 서로 다른 생각들이 교환되는 유아적 단계의 공론장이 북한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형성은 요원한 것이지만 공론장의 출현은 앞으로 체제에 대한 비판과 대안의 모색이 이루어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옛 사회주의 나라들의 경험이 보여주듯 경제 재건과 개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정치개혁 없이 경제개혁은 불가능하다. 바로 수령사회주의체제의 유지를 위해 추구되는 북한 경제개혁의 한계다. 그럼에도 북한식의 개방과 개혁 정책은 시장과 사회의 형성을 통해 장기적으로 정치개혁에 대한 갈증을 키울 것이다. 시장경제와 시민사회의 맹아가 보인다 분명 북한에는 시장경제와 시민사회의 맹아가 보인다. 그것은 경제위기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자 또한 경제개혁의 불가피한 결과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북한은 좋건 싫건 자본주의에 의한 물질적 토대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주체사회주의의 실리 모색을 위한 자본주의와의 제한적 동거로 집약되는 이러한 북한의 미래는 밝지 않다. 왜냐하면 물적 토대 재건과 개선만을 위한 정치주의에 의해서는 경제개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제개혁을 체제전환을 위한 물적 토대의 마련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러나 현재의 수령적 세습체제아래에서 주체사상이 체제전환을 향한 개방성과 유연성을 보이기는 거의 어렵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 핵무기 포기를 전제로 체제보장을 요구하고 있는 이유도 수령체제를 유지하는 범위에서 제한된 경제개혁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딜레마다. 2004-07-01
- 대결과 갈등, 이젠 끝내자 정치판이 어지럽다. 여 야는 물론 집권 세력인 여권 내에서도 주요 현안을 둘러싼 갈등이 심상치 않다. 국회 원 구성을 놓고 여 야의 밥그릇 싸움이 치열하다. 주요 정책 현안을 둘러싼 청와대와 여당의 대결과 불화가 증폭되고 있다. 국정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아파트 원가공개문제를 놓고 여당 주도세력과 다투고 대검 중수부 폐지 문제로 대통령과 검찰총장이 대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뿐만 아니다. 사실상 ‘천도’인 신 행정수도 이전과 이라크 파병 둘러싸고 찬반 국론분열이 예사롭지 않다. 국민투표로 결정하라는 여론에 아랑곳없이 신 행정수도 후보지가 공개되자 서울시와 경기 강원도를 중심으로 수도권의 반발이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민생은 뒷전이다. 상생과 통합은 온데 간데 없고 오기와 상극이 판치는 정국 속에 국정은 표류하고 있다 청·당·검 갈등 심화. 밥그릇 싸움에 국회공전 17대 국회는 개원한 지 열흘이 넘도록 사실상 ‘개점휴업’상태다. 상임위원장 배분을 둘러싼 여야의 원 구성 협상이 법정시한(8일)을 넘기고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기 때문이다. 일하는 국회, 정쟁 없는 새 정치는 온데 간데 없다. 말로만 변화와 개혁, 통합과 포용을 떠들면서 실제행동은 오히려 대결과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국회공전의 쟁점은 감투싸움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하거나 국회운영상 핵심인 위원장을 어느 당이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법사 예결위 등 이른바 ‘노른자위’나 ‘전략상임위’의 위원장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는 쟁탈전이다. 현재 겸임 특별위원회 형태로 돼있는 국회예산결산특위를 일반상임위로 바꾸자는 것도 그렇다. 물론 주요 상임위원장 배분은 국회의 권력구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쉽게 양보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 국회는 그런 자리싸움으로 허송세월해도 좋을 만큼 한가롭지 못하다. 우리 앞에는 유례없는 내수침체로 인한 경제난과 주한 미군 감축을 둘러싼 안보공백, 신 행정수도 이전이 빚은 ‘천도’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병원노조 파업, 쓰레기 만두 파동 등 민감한 각종 현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그런데도 이를 다루어야 할 새 국회는 상임위 구성조차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다. 국회뿐만 아니다. 청와대와 여당인 우리당 사이의 이상기류도 예사롭지 않다. 문제는 한발 물러나 갈등을 일단 봉합한 듯 했던 여당이 다시 불씨를 지피고 있다는 점이다. 집권 여당의 전 원내대표가 대통령을 겨냥해 ‘계급장을 떼고 한판 붙자’는 식으로 도전하고 있으니 국정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겠는가. ‘콩가루집안’에서 새 정치가 싹틀 수 없는 법이다. 당 청뿐만 아니다. 대통령과 검찰총장이 검찰개혁 문제로 대결하고 질책하는 모양새는 어이없고 실망스럽다. 송광수 검찰총장이 여권의 대검 중수부 폐지 방침에 반발하자 노 대통령이 어제 검찰총장의 하극상을 공개적으로 질책한 것은 볼썽사납다. 이래서는 안 된다. 새 국회는 밥그릇 싸움을 끝내고 원 구성을 서둘러 산적한 민생법안을 처리해야 한다. 청와대와 여당은 긴밀한 당정 협조로 갈등을 수습하고 정책을 조율해 민생과 경제를 살리는 데 국력을 동원해야 한다. 오기보다 화합, 정략보다 국익. 민생 정치를 특히 개원 국회가 반드시 처리해야 할 법안은 줄잡아 30여 개에 이른다.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촉진하는 관련법안은 조속히 통과시켜야 한다. 재래시장 활성화와 서민층의 자활급여 확대를 골자로 한 관련법 개정도 서둘러야 한다. 국민연금 체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국민연금법을 조속히 개정해야 함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집권여당은 물론 야당도 소모적인 정쟁과 오기정치 기싸움을 당장 끝내야 한다. 분배보다는 성장과 실업을 먼저 해결한 후 변화와 개혁을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민생정치’를 실행에 옮겨야 한다. 물론 변화와 개혁도 중요하고 정당의 정체성 확립도 필요하다. 하지만 500조에 육박하는 가계빚더미에 고통받는 민생문제가 더 급하고 중요하다. 한나라당도 공허한 말잔치만 하지 말고 수권 야당의 책무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민생법안의 통과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통합과 상생의 새 정치를 펴는 지름길이다. 이 두 석 주필 2004-06-16
- 6`·15는 과거 아닌 현재 진행형 2000년 6월 13일 오전 10시 25분. 새로운 역사가 탄생했다. 바로 당시 남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 순안공항에 공식 도착한 순간이다. 김 대통령은 솟구치는 감격을 감추지 않았다. “너무나 긴 세월을 돌아 이제야 왔습니다”라고 감격어린 연설을 할 때 이를 지켜보던 7000만 겨레도 함께 흥분했다. 그 뒤 이어진 김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상봉, 1, 2차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에 이르면서 감격은 최고조에 달했다. 김 대통령은 서울로 돌아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다. 반세기 분단 사를 하루아침에 끝낼 것 같은 강한 충격이 한반도를 뒤흔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2000년은 남북한 사이에 대형 사건들이 넘쳐난 잔치의 한 해였다. 1차 남북장관급 회담(7.29), 1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8.15), 비전향장기수 북송(9.2), 남북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 공동입장(9.15), 1차 남북국방장관회담(9.25), 김대중 대통령 노벨상 수상(12.8) 등 굵직한 사건만 해도 한두 건이 아니다. 변화는 곳곳에서 이뤄졌다. 경의선과 동해선 등 남북간 철도연결 사업이 본격 진행됐다. 개성공단 사업 등 실질적인 경제협력이 진행 중이고, 남북 군·당국간 직통전화도 연결됐다. 또한 금강산 관광이 해로와 육로 양방향에서 진행되면서 수십만 남한 관광객이 민족 명산을 올랐다. 또한 2000년부터 추진된 이산가족 생사확인과 서신교환, 그리고 상봉은 민족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이제 더 이상 이데올로기와 적대적 감정만을 앞세울 수 없을 만큼 남북한 국민들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다고 긴장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물론 아니다. NLL 둘러싼 남북간 갈등과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 위기고조 등 남북관계는 여전히 간단치 않은 문제다. 약속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도 4년이 지난 지금도 과제로 남아 있는 상태다. 냉기류와 화해무드가 교차하면서도 끊이질 않고 이어져 온 과정이다. 그 이후 4년이 지난 2004년 6월 14일. 작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이날 남북이 동시에 참여하는 6·15 4주년 행사가 개막됐다. 또한 남북 해군함정은 53년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무선교신에 성공했다. 뜻 깊은 만남도 이뤄졌다. 6·15 4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남한을 방문한 북측 인사들이 김대중 전대통령을 면담한 것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북한 리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측인사들을 퇴임 후 처음으로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 전대통령은 “지난 4년 동안 과거 50년보다 많은 일이 이뤄졌다”면서 “결국 남북 정상이 만나 결단을 내렸고, 그 결과”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에 대해 리 부위원장도 “김정일 위원장도 기회 있을 때마다 정상회담을 회고하고 김 대통령이 이룬 일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6·15 선언 4주년은 역사 속에 묻힌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현재라는 지적이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2004-06-15
- 6·15는 과거 아닌 현재 진행형 2000년 6월 13일 오전 10시 25분. 새로운 역사가 탄생했다. 바로 당시 남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 순안공항에 공식 도착한 순간이다. 김 대통령은 솟구치는 감격을 감추지 않았다. “너무나 긴 세월을 돌아 이제야 왔습니다”라고 감격어린 연설을 할 때 이를 지켜보던 7000만 겨레도 함께 흥분했다. 그 뒤 이어진 김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상봉, 1, 2차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에 이르면서 감격은 최고조에 달했다. 김 대통령은 서울로 돌아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다. 반세기 분단 사를 하루아침에 끝낼 것 같은 강한 충격이 한반도를 뒤흔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2000년은 남북한 사이에 대형 사건들이 넘쳐난 잔치의 한 해였다. 1차 남북장관급 회담(7.29), 1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8.15), 비전향장기수 북송(9.2), 남북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 공동입장(9.15), 1차 남북국방장관회담(9.25), 김대중 대통령 노벨상 수상(12.8) 등 굵직한 사건만 해도 한두 건이 아니다. 변화는 곳곳에서 이뤄졌다. 경의선과 동해선 등 남북간 철도연결 사업이 본격 진행됐다. 개성공단 사업 등 실질적인 경제협력이 진행 중이고, 남북 군·당국간 직통전화도 연결됐다. 또한 금강산 관광이 해로와 육로 양방향에서 진행되면서 수십만 남한 관광객이 민족 명산을 올랐다. 또한 2000년부터 추진된 이산가족 생사확인과 서신교환, 그리고 상봉은 민족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이제 더 이상 이데올로기와 적대적 감정만을 앞세울 수 없을 만큼 남북한 국민들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다고 긴장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물론 아니다. NLL 둘러싼 남북간 갈등과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 위기고조 등 남북관계는 여전히 간단치 않은 문제다. 약속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도 4년이 지난 지금도 과제로 남아 있는 상태다. 냉기류와 화해무드가 교차하면서도 끊이질 않고 이어져 온 과정이다. 그 이후 4년이 지난 2004년 6월 14일. 작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이날 남북이 동시에 참여하는 6·15 4주년 행사가 개막됐다. 또한 남북 해군함정은 53년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무선교신에 성공했다. 뜻 깊은 만남도 이뤄졌다. 6·15 4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남한을 방문한 북측 인사들이 김대중 전대통령을 면담한 것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북한 리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측인사들을 퇴임 후 처음으로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 전대통령은 “지난 4년 동안 과거 50년보다 많은 일이 이뤄졌다”면서 “결국 남북 정상이 만나 결단을 내렸고, 그 결과”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에 대해 리 부위원장도 “김정일 위원장도 기회 있을 때마다 정상회담을 회고하고 김 대통령이 이룬 일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6·15 선언 4주년은 역사 속에 묻힌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현재라는 지적이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2004-06-15
- [일터에서] 학교는 아직도 봄 얼마 전 오월의 저녁, 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퇴근을 재촉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까만 차 하나가 내 앞에 멈추고 운전기사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한 신사가 내렸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고 무시한 채 지나가려는데 신사가 내게 다가와 손을 잡고는 ‘저 호석입니다’라고 말했다. 호석이라면 17년 전 내가 처음 교직에 발을 내딛던 해에 만났던 학생이다. 그때 호석이는 버릇이 없는 아이로 소문나 있었다. 누구도 그 아이의 잘못을 일깨워 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수업을 하러 들어가다 아이들이 지켜보는데 호석이가 자랑삼아 복도 바닥과 벽에 침을 뱉는 모습을 보게 됐다. 나는 녀석을 교실로 들어오게 하고 이유를 물었다. 녀석은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당당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화난 나는 매를 들고 말았고, 녀석은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얼마 후 비슷한 일이 또 벌어졌고 나는 호석이를 집에 보내지 않고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 그날 밤 나는 보지 못했던 호석의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호석이도 나를 조금은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 후 호석이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고, 나도 호석이를 볼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 만난 호석이는 “살면서 항상 선생님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라며 내손을 꼭 잡았다. 십 칠년이란 세월이 일년처럼 흘러갔지만 스승에 감사해하는 제자가 있기에 우리 교육은 희망이 있다. 요즘 사람들에게 학교는 항상 비바람이 몰아치는 곳으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사랑스럽고 믿음직스러운 아이들이 있고, 이 아이들을 열정을 태우는 선생님들이 있기에 학교는 아직 봄처럼 따뜻하고 희망이 있다. /남부호 교육부 연구사 2004-06-07
- “매달 수십억원 약정 강요는 너무 큰 부담” 그는 증권맨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줄곧 증권사에만 몸담았던 그는 지난 5월, 증시가 꼬꾸라지면서 인생도 꼬꾸라졌다. 20년 청춘을 바쳤던 증권사를 그는 그렇게 떠났다. 손명호(가명·43). 그가 맡았던 마지막 증권사 보직은 서울 강북의 조그만 지점장이었다. 그래도 손씨는 증권사를 떠나면서 제 집 하나는 손에 쥐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한다. 손씨 친구인 증권사 지점장 가운데는 제 집 갖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화려하고 대박을 노릴 수 있다는’ 증권사 지점장이 말이다. 지점장이 아니더라도 과장·차장의 업무부담은 상당하다. 한달에 올려야하는 약정이 22억원. 증권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15~22억원 내외다. 계좌에 묻어둔 예탁금이 아니라 실제 매매가 일어난 금액이 22억원을 넘어야 한다. 지난해 코스닥 기준 개인 투자자의 평균 거래주가가 2500원 내외였으니까 한 달이면 88만주, 매일 4만4000주 이상을 사거나 팔도록 고객을 ‘꼬셔야’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안되면 자기 돈이라도 집어넣어서 매매를 일으켜야 한다. 손씨가 있던 증권사의 경우 22억원을 꼬박 채우는 사람은 전체의 30%도 되지 못했다. 직급별로 정해진 약정고에 따라 서열을 매긴 뒤 하위 15%는 기본급의 30%를 깎는다. 다음달에도 약정에 따라 서열을 매겨 하위 15%는 다시 기본급의 30%를 깎는다. 이런 식으로 평가하다보니 손 지점장 직원 가운데는 한달 꼬박 일하고도 채 70만원을 받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회사가 직원 사정을 봐주지는 않는다. 영업점 직원 1명이 본사 직원 2명을 먹여 살려야하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설사 약정 22억원을 올렸다 해도 손에 쥐는 돈이 그리 많지는 않다. 최근 고객들이 많이 찾는다는 채권형 펀드나 MMF(머니마켓펀드)는 더 돈이 안된다. 시장이 불투명하니 고객은 언제라도 돈을 찾길 원하고 이런 상품 특성상 장기 운용을 하지 못한다. 당연히 수익이 낮으니 성과급으로 받는 돈도 적은, 악순환이다. MMF 100억원을 한달 유치하더라도 영업직원은 채 40만원도 건지지 못한다. 직원들은 약정 높이기와 각종 수익증권 판매 전선으로 내몰리고 지점장은 은행 예금 모셔오기에 목숨을 건다. 그래도 “지점장들은 단말기(시세표) 쳐다보는 부담이 없어서 좋다고 하더라”고 손 지점장은 말했다. ‘증권사 직원이면서 단말기를 보지 않아 행복하다’는 것이 지금 증권가 현실이다. 일선 지점에서는 고객들과의 다툼도 적지 않은 스트레스다. 운용을 잘못해도 뒤집어쓰는 건 일선 영업직원이다. 수익성을 둘러싼 갈등이 결국 다툼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임 매매를 일삼다가 문제가 터지면 책임을 증권사 직원에게 떠넘기기 일쑤다. 징계를 받지 않으려면 울며 겨자먹기로 손실금을 물어주기도 한다. 일임 매매 문제가 불거질 경우 손실금 보상 책임을 없지만 증권사 직원은 경고에서 감봉, 면직(해임) 등 심각한 처벌을 받게 된다. 이를 피하려면 고객에게 돈을 물어주고 소를 취하하는 게 때로는 속편한 방법이기도 하다. 남들은 대박이 나서 해 뜨고 날 바뀌면 돈을 긁어 담는다던 80년대 후반, 손 지점장은 거래소 시장부에서 근무했다. 남들 주문표에 열심히 도장 찍어주다보니 세월은 금새 저만치 달아나 있었고 손에 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요즘 유통업을 해보려고 알아보는 중이다. 음식점이 위험부담이 적지만 유통업을 택한 이유는 단 하나. 자본금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차트와 매매 주문 속에서 살아온 손 지점장은 유통사 사장님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증권사를 그만둔 두달새 손 지점장은 담배가 곱절로 늘었다. /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 2004-07-28
- [현장칼럼]지자체 브랜드를 파는 사람들 “여러분은 경북·구미주식회사의 비즈니스맨이다. 우리는 ‘구미’라는 브랜드를 파는 사람들이다.” 직원들과 투자유치현장을 뛰면서 늘 함께 하는 말이다. 낙동강 모랫벌에 외국인전용기업단지 지정과 때를 같이해 우리 시에서는 투자유치기획단을 본격 발족했다. 외국기업을 유치하는 데는 고도의 테크닉을 발휘하더라도, 1∼2년의 세월이 걸린다. 그만큼 예상할 수 없는 변수도 많고, 더하여 발로 뛰는 정성과 체계적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이사를 가도 가운(家運)을 걸고 고심하거늘 낯설고 언어가 다른 환경, 더군다나 중앙이 아닌 지방에 국제자본이 이동하는 데는 엄청난 결단이 요구된다. 기업인들과 같이 해외현장을 찾아가서 보따리를 풀어놓고 주장을 하고 동의를 얻고, 그래서 믿음을 쌓으면서 우리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끌어 냈다. 투자유치를 위해서는 우선 싱가폴, 중국, 대만 등 나라들간의 경쟁을 극복해야 하고, 또한 국내에 와서는 도시간의 비교우위를 입증해야 한다. 일본의 아사히글라스라는 국제기업이 동경에서 1억5000만달러의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구미국가 4공단에 투자를 확정했다. 이윤을 찾아 움직이는 경제의 속성은 글로벌·디지털 환경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이미 국가의 개념을 떠나 오로지 경쟁의 법칙이 지배하는 정글이다. 국제적인 자본의 이동은 이윤이 있는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구미공단도 아슬아슬한 위기를 여러 번 겪었다. 엄청난 비용도 지불했다. 그래서 우리는 사활을 걸고 외국기업 투자유치에 집중했다. IMF, 공단이 문을 닫고, 어제의 이웃이 직장을 잃고 근로자가 거리로 뛰쳐나오는 그런 불안한 시절이었다. 경쟁의 대열에서 밀려난 처참한 모습, 이것이 정말 IMF구나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똑같은 삶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야 한다.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산업평화의 바탕 위에 기술개발이 중요하다. ‘숲을 만들어야 새가 날아온다’는 속담처럼 경쟁에서 이기려면, 외국기업들이 한국투자를 선호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조세감면, 규제철폐, 산업평화 등 국제적인 대안을 마련하여 그들이 지방에서도 불편 없이 기업할 수 있는 투자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규모를 키워야 한다. 같은 크기의 파이를 나누어 갖는다면 분배의 답이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다. 나무도 뿌리가 튼튼해야 잎이 무성하듯이, 이제는 지방이 스스로 변해 가는 모습이 필요한 때이다. 비교우위의 조건은 지방이 만들어내야 한다. 누구를 탓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때로는 중앙과 경쟁하고 보완하는, 그래서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국제화 시대, 투자유치 활성화는 쟁반 위의 놓인 과일처럼 검증을 받고 투명해야 한다. 확실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와 있다. 어느 것 하나 예외이고, 감출 수 없는 것이다. 기업도 근로자도 투명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도 내일을 향해 뛰어야 한다. 그러한 조건과 각오만이 지방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비록 지방의 조그만 중소도시지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최선의 모습은 작아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구미공단은 바로 국제화의 현장이다. 2004-07-20
- “국민들 경제때문에 가장 불안해한다” “이번 조사 결과 사람들은 경제불안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최근의 취업난이나 불안정한 고용, 빈부격차의 확대 등이 불안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주위에서 ‘불안하다’하니 더 불안해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언론이나 매스미디어에서 불안한 현실을 지나치게 많이 다루지 말고 차분하게 현 상황을 분석해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입니다.” 지난 97년 IMF 구제 금융 이후 우리 사회 전체를 흔든 변화 속에서 우리 국민들은 살얼음위를 걷는 세월을 보냈다. 믿었던 평생 직장은 붕괴되고 최악의 취업난, 가정파괴 등에 고통받고 있다. 그 여파는 8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흡사 이웃 일본이 90년대 초반부터 10여년 이상 겪어왔던 장기 불황의 모습과도 비슷한 상태다. 우리 국민들은 이제 개인과 사회의 앞날에 대해 막연한‘불안’에서 실체가 있는 ‘불안’을 느끼고 있다. ‘불안’은 이제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4일 오후 광화문 프레스 센터에서 이런 의미에서 중요한 세미나가 열렸다. 언론이나 학계의 관심은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 가장 적나라하게 칼을 들이댄 연구 결과가 발표된 것. 연세대학교 인간행동연구소(책임연구자 송관재)가 주최하고 한국학술진흥재단이 후원한 이날 세미나 주제는 “한국 사회 얼마나 불안한가”였다. 이날 세미나를 주도한 이는 인간행동연구소 송관재 교수(44·사진). 송 교수는 연대에서 사회 및 조직 심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UC. Santa Barbara에서 Post. Doc 과정을 이수했다. 평소 지역감정과 고정관념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해온 송 교수가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역시 우리 사회 현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안하다는 말을 몇 년 사이에 부쩍 많이 하는데 이를 개념적으로 정의하고 다룬 심리학적 연구가 없었다”며 “학문적으로 이를 개념화하고 이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를 개발한 다음 우리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대처방안을 살펴보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 “현 상황이 불안의 실체”= 송 교수는 이번 조사에서 46가지의 다양한 사회적 사건과 현상을 제시해주고 각 사건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및 사회적 불안과의 관련성에 대해 살펴봤다. 그 결과 사람들은 경제불안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의 취업난이나 불안정한 고용, 빈부격차의 확대등이 불안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송 교수는 “테러에 대한 공포나 철도사고(KTX) 같은 것에 대해서는 덜 불안해했지만 현재 벌어진 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경향이 많았다”며 “현재 경제적 불황이나 경기침체가 사회적 불안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송 교수는 또 이번 조사에서 경제와 정치, 교육, 사회분야에 대한 개혁의 성공가능성을 살펴보았는데 전반적으로 개혁의 성공가능성은 50% 미만으로 조사됐다. 그 가운데서 정치개혁에 대한 성공가능성을 가장 낮게 추정했다. 그는 이같은 결과에 대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사회에 대해 신뢰감을 갖고 있지 못하고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정치 부분이 가장 예측불가능하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부분을 포함해 우리 사회에서 개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혁 방향 설정과 예측가능성을 높일 것을 주문했다. 송 교수는 “예컨대 개혁 5개년 계획이라고 해서 개혁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방향을 분명하게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송 교수가 이번 조사에서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것 가운데 하나가 ‘불안은 전염되며 그럴수록 더욱 깊어진다’는 것.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으며 스스로 느끼는 불안보다 다른 사람들이 불안해하기 때문 더 불안해한다고 한다. 실제로 언론에서 다루어진 기사를 분석한 연구가 있는데 우리나라 경기가 좋았던 지난 95년도에 비해 2002년도에 언론이 사회 불안 기사를 30% 더 다뤘다. 그 결과 우리 국민은 2002년도에 더 많이 불안해하는 것을 조사됐다. 그는 “이번 조사 결과는 언론이나 매스 미디어에서 긍정적이고 밝은 기사를 많이 발굴하는 것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피치 못해서 불안과 관련된 기사를 다룰 때에도 표면적인 실태보다는 구체적인 사황들을 많이 다뤄야 한다”고 덧불였다. /김남성 김병량기자 kns1992@naeil.com 2004-05-28
- “아들 다시 만난다면 날아라도 갈텐데” “기자 양반, 우리 아들 한번만 더 만나게 해주세요. 2박3일만 (상봉행사를) 하니 별 말도 못했어요. 만나서는 기력이 없어서 밥도 못 먹고 얘기도 많이 못했습니다.” 지난해 2월 30여년만에 작은 아들을 만난 박규순(77) 할머니는 기자와의 통화 내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몸져누운 채로 전화를 받는 듯한 박 할머니의 목소리에서는 아들 두 명이 모두 납북됐던 지난 72년 이후의 고통과 한과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박 할머니는 “다리만 좀 아플 뿐 다른 곳은 건강하다”며 “아들을 다시 만나러 간다면 날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북측 아들 김태준(50)씨와 재상봉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할머니는 “2개월전에 어디에서 사진을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줬는데 다시 만나게 해주려는 것 아니냐”면서 “소식이라도 들으면 안 좋겠냐”고 희망 섞인 반문을 했다. 오랜 세월 오매불망 보고파하던 아들을 만나고 돌아온 어머니 중에는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 2월 50여년만에 북측 아들 림동규(70)씨를 만났던 김금남 할머니는 96세를 일기로 같은 해 7월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며느리는 “시어머님이 아들을 만나고 돌아오신 후 소원풀이했다고 좋아하셨다”며 “한 달을 앓다가 끝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생전에 “통일만 되면 원도 한도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김 할머니는 상봉행사장에서 50여년만에 아들을 만난 날 저녁 만찬 도중 쓰러지는 등 평소에도 고혈압으로 고생을 해왔다. 아들을 만나기 전에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며칠간 식사를 거르기도 했던 김 할머니는 이제 영원한 안식처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오말신 할머니도 16년전 납북된 북측 아들 김상섭(54)씨를 지난해 9월 만난 후 3개월만에 이승과의 인연을 끊었다. 김 씨의 남측 형 상규(57)씨는 “지난해 12월23일 암으로 돌아가셨다”며 “어머니께서 동생을 만나고 돌아가셨으니 어머니 소원은 푸신 것 같다”고 말했다. 상규씨는 “어머니 49제를 치를 때 동생 생각이 많이 났다”며 나눌 수 없는 형제애를 아쉬워했다. 북녘에 부모를 두고 온 자녀의 마음도 역시 편치 못하다. 지난해 9월 8차 이산가족상봉행사에서 북측 어머니 박옥순(81) 할머니와 만난 임석주(63)씨는 “어머니를 만나고 나서 몇 달 동안 마음이 아파 고생했다”며 “지금은 많이 안정됐지만 동생과 만날 때마다 어머니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51년 친정에 잠시 다녀오겠다던 어머니는 그 길로 행방불명돼 임 씨 형제와 50여년 이산의 한을 남기게 됐다. 헤어질 때 어머니 얼굴도 알지 못하던 임 씨의 동생 승주(58)씨는 지난해 9월 작별상봉에서 “어머니”를 외치며 박 할머니의 한복 치마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8차 상봉행사에서 북의 어머니 복점순(93) 할머니를 만났던 남측 아들 김성태(75)씨는 “지금도 자꾸만 어머니 생각이 나서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좋지 않았겠는가하고 생각한다”며 “어머니가 거동이 불편해 늦게 나오셔서 얘기도 많이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김 씨는 “이번에 10차 이산가족상봉행사를 한다니 어머니 생각이 더 간절하다”고 말했다. /연제호 기자 news21@naeil.com 2004-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