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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은 자의 5월운동은 ‘기억’ “민주주의와 민족자주를 추구하고 살맛나는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제시한 80년 5월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근식 교수(48·서울대 사회학·사진)는 5월 광주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기억 속에서 지워지거나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위해서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필요하다고 했다. 80년 5월 기억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 기억의 현재 의미를 끊임없이 재현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 그는 그러한 ‘기억투쟁’으로서 5월 문화운동에 무게를 두었다. ◆ 5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근식 교수는 “95년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의 제정 이후 5월 운동은 제도권내에 포섭되면서 진상규명을 넘어선 문화운동의 중요성이 대두됐다”고 말했다.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고 97년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으며 이어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2000년 5·18 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5월 운동에는 전환점이 왔다. 그 기간 동안 5월 진상규명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문화운동의 과제가 부각됐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 사건은 기억 그 자체로서보다 예술작품으로 형상화되어 사람들 눈앞에 재현될 때 새로운 힘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24주년 기념일을 맞는 2004년 5월 18일. 80년 5월을 겪은 이들이 24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넘어 5월 광주를 현재에 되살리는 문화운동은 또 하나의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정근식 교수는 한국민주화 운동에서 차지하는 문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재평가하면서 제주 4·3연구소와 공동연구를 통해 민주화 과정에 있어서의 문화운동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연구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광주와 제주를 오가면서 연구의 방향과 분석틀에 관해 토론했다. 2003년 5월에는 광주에서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연구성과를 점검했으며 이 결과물이 ‘기억투쟁과 문화운동의 전개’라는 연구서로 지난 5월 1일 빛을 봤다. ◆ 기억투쟁으로서의 문화운동 =정교수는 “5월 문화운동은 검열을 의식하면서도 진상규명을 치열하게 지향하였다는 특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5·18의 역사적 무게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은 그 부담에 짓눌려 자유로운 상상력을 접고 사실적 재현에 경도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작풍의 형성과정과 이를 통한 작품이 제대로 수집되지도 못하고 있다”며 “문화운동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제대로 된 자료수집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여줄 수 있는 문화운동자료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도 도청이전과 동시에 만들어지는 5·18 기념관의 내부적 컨텐츠 구축도 예산이 부족하여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문화운동 자료관의 설립은 요원하다”고 안타까워했다. 정근식 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 76학번이다. 동시대 지식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80년 5월의 부채를 삶에 짊어지고 살아왔다고 한다. “대학원 다닐 때 광주 학살의 소식을 듣고 고통스러워했지만 중심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85년 전남대에 부임한 이후부터 ‘살아남은 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기 시작했다고 봐야죠.” 정근식 교수는 1985년 전남대에 부임한 이후 5·18민중항쟁, 영호남 지역감정, 문화도시 육성 등 지역현안을 연구주제로 천착하며 120여편의 논문과 저서를 발표해왔다. 특히 그는 지난 88년 송기숙교수(68·전남대 명예교수)가 금남로 부근에 설립한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에서 일하면서 ‘광주 5월 민중항쟁 사료전집’을 꾸리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현대사사료연구소는 96년 재정난으로 전남대 5·18연구소로 업무를 이관했다.이후 정근식 교수는 2000년부터 지금까지 5·18 연구소가 발간하는 잡지 ‘민주주의와 인권’의 편집위원장을 맡아오고 있다. “5월이 연구주제로서 점차 인기를 잃어가자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해나갈 연구원들이 부족하다는 것이 저의 고민입니다.” 정근식 교수는 지난해 7월 서울대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5월 광주에 대한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박정미 기자 pjm@naeil.com 2004-05-17
- <신문로 칼럼>6.15 남북공동선언의 허와 실(김근식 2004.06.10) 6.15 남북공동선언의 허와 실 김근식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4년을 맞는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성사 자체만으로도 역사적 상징성을 갖는 것이었다. 분단 이후 대결과 반목으로 점철되었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서로 적성국가로 간주되던 양 정상이 활짝 웃으면서 포옹한 사실만으로도 남북화해 시대는 그 첫발을 디딘 것으로 평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합의하고 서명한 ‘6·15 공동선언’의 결과물에 비한다면 만남 그 자체의 성과는 여전히 부족해 보였다. 자주의 원칙과 통일방안의 공통성 인정 등 총론적인 합의 외에도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 및 다방면적 교류 그리고 당국간 대화의 정례화 등을 명시한 6.15 공동선언의 내용들은 남북간의 상시적 긴장과 갈등 대신 평화를, 불신과 대결 대신 화해를, 소모적 경쟁 대신 협력을 이루기 위한 실행가능한 구체적 원칙들을 합의한 것이었다. 결국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은 상호 체제인정과 이를 토대로 한 평화공존의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적대와 대결의 남북관계 대신 화해와 공존의 남북관계가 개막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6.15 공동선언의 시민적 ‘힘’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음을 여기저기서 목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남측 시민사회에서 6.15의 힘은 확대일로에 있다. 정상회담 이후 진행된 남북한간 교류협력의 진전과 민족화해의 가속화는 지난 2002년 대선에서 한반도 평화세력의 정치적 승리를 결과했고 최근 4.15 총선에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민족화해세력의 의회 내 다수확보라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했다. 정상회담 이후에도 이른바 남남갈등의 여진은 지속되었지만 시대의 흐름은 결국 냉전적 대결을 뒤로 하고 화해와 협력의 방향에 손을 들어 주었다. 군사회담 개성공단 조성, 남북화해 물꼬터 최근 용천 폭발사고 이후 북한주민을 돕자는 운동이 여야,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은 6.15의 시민적 힘이 이제 되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았음을 실감케 하는 사례이다. 또한 6.15의 힘은 남북관계 전반의 질적 발전과 함께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실질적 진전을 가능케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발휘되고 있다. 정상회담 이후 14차례의 장관급회담과 9차례의 경추위 회담이 진행되면서 이제 당국간 회담은 정례화와 제도화의 단계에 들어섰고 민간차원의 다방면적 교류협력 역시 구체적인 내용을 다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획기적 진전을 이루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남북경협의 활성화는 물론이고 남북간 철도 도로 연결과 개성공단 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음 역시 한반도 경제공동체의 앞날을 밝게 하는 청신호임에 분명하다. 특히 최근의 남북장성급회담 개최를 통해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의 첫 걸음을 떼고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의 가능성을 마련한 것은 6.15 이후 남북관계가 평화와 번영의 두 수레바퀴로 진전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계기라 할 것이다. 2000년 당시 6.15 공동선언에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내용이 누락되었음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최근 장성급회담에서의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 합의는 분명 6.15의 힘이 화해협력을 넘어 평화정착에까지 확대될 가능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다른 한편 6.15의 힘은 냉전시기 지속되었던 한반도 질서의 변화가능성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작용과 반작용의 내홍을 겪고 있기도 하다. 6.15가 남북이 주도적으로 나서 민족화해의 전기를 마련한 점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여전히 한반도 국제질서의 차원에서는 과거의 힘과 새로운 힘이 맞부딪치는 과도기에 놓여 있다. 남북관계의 의미있는 진전에도 불구하고 북미관계는 답보상태일 뿐 아니라 2차 북핵위기 이후 북미갈등이 첨예화되면서 남북관계도 상당한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북미갈등 한미동맹 변화 6.15로 극복을 물론 북핵위기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막고 위기를 관리하는 토대가 6.15의 힘에서 비롯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냉전적 국제질서는 한반도의 역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장애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북미간 갈등의 존속과 더불어 한미관계의 불안정성이 남아 있는 것 역시 6.15의 힘에 대한 또 하나의 반작용이다. 6.15의 성과에 따라 남북관계의 개선과 한반도 화해의 진전이 이루어지면서 한미동맹의 내용과 수준에 일정한 변화가 요구되는 것은 분명 6.15가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의미가 숫자로 표현되는 날짜에 역사적으로 녹아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5.16이 상징하는 군사독재의 어두운 그림자가 5.18로 대표되는 민주화의 진전으로 해소될 수 있기까지는 20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마찬가지로 6.25가 상징하는 분단과 적대의 역사가 6.15를 통해 화해와 통일의 방향으로 물꼬를 트는 데도 반세기가 필요했다. 이제 6.15 4돌을 맞으면서 우리가 보다 확산된 6.15의 힘을 기대하는 것도 바로 역사적 대세이기 때문이다. 2004-06-10
- 최도술 징역 6년 추징 등 27억4천 구형 대검 중수부(안대희 검사장)는 10일 불법 대선자금 수수 및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에 대해 징역 6년에 몰수 CD(양도성예금증서) 3억원 및 추징금 24억4326만원을 구형했다. 검찰은 이날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김병운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청와대에서 근무한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누구보다 청렴해야 할 사람이직위를 이용해 거액의 불법자금을 수수한 잘못은 비난받아 마땅하며 대선자금 수사를 계기로 정치권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엄벌이 필요하다"며 이 같이 구형했다. 검찰은 "피고인은 범행의 일부는 시인하나 알선수재 등 중요한 부분은 혐의를부인하거나 공범관계인 이영로씨에게 떠넘기는 등 과연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지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최씨는 "무엇이 자신의 참 모습인지 알지 못한 채 어느덧 (인생의) 가을의 끝자락에 섰다"며 "지나온 세월은 보잘 것 없지만 이 사건과 함께 많은 반성을 했다"고최후 진술했다. 최씨는 2001년 9월∼2003년 8월 23억2326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하고 안희정씨가 받은 불법자금 1억원을 수수한 혐의, 대선잔금 및 지방선거자금 54천500만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대검과 특검에서 수차례에 걸쳐 구속기소됐다. 선고공판은 5월 27일 오전 10시. 2004-05-10
- 리영희, 영원한 ‘이성’과 ‘우상’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편저: 강준만 발행: 개마고원 가격: 1만원 70∼80년대 청년지식인들의 영원한 우상으로 남아 있는 리영희, 그의 인생은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으로 남아있다. 저자는 이 글에서 리영희의 개인사와 한국현대사의 기록을 담고 있다. 리영희 만큼 해방이후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광범위하게 겪은 사람도 드물다. 그는 굽힘 없는 글쓰기로 현실을 고발했고, 누구보다 더 넓은 행동반경에서 살아왔다.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그의 책만 읽으면 충격을 받아 이상하게 변해가고, 청운의 꿈을 내던지고 진실과 인권과 상식의 가치에 입각해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게 됐다. 리영희는 그 스스로의 삶이 한국현대사와 같이 고난의 연속이었다. 모두 아홉 번이나 연행되어 다섯 번을 구치소에 가고, 세 번이나 재판을 받았으며, 1012일 동안 감옥에서 세월을 보냈다. 언론계에서 두 번 쫓겨나고, 교수직에서도 두 번 쫓겨났던 경험을 가졌다. 질곡 많은 한국현대사에서 그의 삶이 평탄하지 못했던 것은 그 스스로가 혹독한 현실에서도 결코 실천적 글쓰기의 맥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의 삶이 곧 한국현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이다. 저자인 강준만 교수는 이 책에서 시대가 변해 이제 더 이상 젊은이들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으며 공감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삶을 통해서 바라본 한국현대사’ 또는 ‘한국현대사를 통해 본 리영희의 삶’을 이야기해야만 리영희는 물론 한국현대사에 대해서 이해가 더 잘 이루어 질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그는 이 글에서 리영희의 저작과 리영희를 다룬 거의 모든 출판물을 설렵하고, 리영희의 삶과 한국현대사의 핵심만 집어냈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2004-05-03
- 일본열도에 퍼져가는 시 한편 생명은 너무나 소중하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전지같다 하지만 전지는 언젠가 끊어진다 생명은 언젠가 사라진다 전지는 금방 바꿀 수 있지만 생명은 그렇게 간단히 바꿀 수 없다 몇 년이나 몇 년이나 세월이 지나 겨우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생명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하지만 “목숨 같은 건 필요 없어” 라고 말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아직 많은 생명들이 쓰여지고 있는데.. 그런 사람을 보면 슬퍼진다 생명은 쉬는 날도 없이 일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나는 생명이 지쳤다고 말할 때까지 열심히 살고싶다. 소아암을 앓던 초등학교 4학년인 미야코시 유키나양은 98년 어느날 수업도중 선생님과 함께 전지실험을 했다. 불이 들어올 때마다 이 소녀는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에도 저런 충전지가 있었으면하고 바랬다. 그해 세상을 떠난 이 소녀가 전구실험때 감동을 써놓은 ‘생명’이라는 시 한편이 지금 일본열도에 잔잔히 퍼지면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TV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다. /장정선 리포터 2004-04-22
- 드골의 자존심과 경찰의 자존심[수사연구 2003.10.] 드골의 자존심과 경찰의 자존심 드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장군이었으며, 전후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신념에 찬 프랑스의 장교로서 자신감과 용기 그리고 독창적인 사고를 갖춘 인물로 유명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국민성향에도 불구하고 드골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중 하나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드골은 군대시절 한때 프랑스를 구원한 영웅이었던 패탱 장군을 만났다. 둘은 프랑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항상 함께 하였고 1차 세계대전 때에는 힘을 합쳐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하자 패탱과 드골은 갈라진다. “끝까지 싸웁시다. 끝까지 싸워서 독일을 물리칩시다” “대세를 알아야지. 지금 우리 프랑스의 힘으론 역부족이야. 독일과의 협상을 이끌어야 하네” 독일과 타협한 패탱은 나치에 협력하는 비시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이에 반대한 드골은 패탱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의 처절한 패배였다. 이후 드골은 망명정부를 수립하여 대 나치 저항을 앞장서 이끌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 정부의 수반이 되어 패탱을 전범으로 기소하였고 배심원들은 90세가 넘은 패탱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드골은 패탱을 종신형으로 감형해주었고 어느 섬에서 부인과 함께 살게 해 주었다. 패탱은 떠나면서 드골에게 말했다. “우리가 지난 세월 같은 물줄기로 흐르다가 어찌하여 다른 물줄기로 갈라졌나... 그러나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은 자네와 같았지. 안 그런가?” 이후 패탱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고 드골은 두 번의 프랑스 대통령을 지냈다. 무엇이 드골에게 시련을 이겨내는 강인함을 주어 마침내 그를 최후의 승리자로 이끌었는가? 국민적 영웅이던 패탱장군을 배신한 반역자 정도로 취급되던 드골의 내면세계에 일관되게 관통했던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위대한 프랑스의 재건⌟이라는 그의 절대적인 신념이었다. 드골은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를 실천한 사람이었다.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강력하고도 유일한 목표를 위해 조국에 헌신하고 국익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면 어떠한 투쟁도 불사하는 강인함을 보여 주었다. 드골에게 절대적인 행동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바로 ⌜프랑스의 자존심⌟이었다. 영국의 도움을 얻어가며 영국에 머물면서 레지스탕스를 지휘한 드골이 영국의 처칠수상에게 보였던 오만한 행동들은 처칠은 물론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까지 분노하게 만들었지만 드골은 자신은 프랑스의 대표이기에 자신의 자존심은 곧 프랑스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하였고 “자존심이 지켜지지 않는 프랑스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다”라고 생각할 뿐 이었다. 이러한 드골의 자존심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주도되는 전후 유럽 질서의 재편과정에서 프랑스의 입지를 확보하게 하였고 마침내 전후 피폐해진 프랑스를 세계 열강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드골은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냉담하다는 국내외적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였지만 드골 특유의 자신감과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를 극복하여 오늘날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과 국민의 의식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냉엄한 현실사회 속에서 개인이든 조직이든 국가이든 일관되게 자존심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힘의 질서가 지배하는 틈바구니 속에서 약자의 입장에 서있으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은 종종 무모한 발상으로 비판받기 쉽상이다. 그러나 그 자존심을 지켜나가는 것이 냉철한 현실인식을 토대로 한 전략적인 판단까지 헤아린 것이라면 그러한 선택은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용기있는 자만이 선택하는 행동으로 역사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자존심을 지켜나간다는 것의 의미는 국가에게나 조직에게나 마찬가지이며 자존심을 지켜나갈 수 없는 조직이나 국가에게는 결코 미래의 영광은 오지 않을 것이다. 척박한 현실속에서도 자신의 조직이 자존심을 지켜나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면 그 조직원들은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힘을 얻게 될 것이고 미래에 대한 꿈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 경찰조직은 자존심이 지켜지고 있는가? 아니 자존심을 지켜나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긍정적인 답변을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경찰조직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있는가? 한편으로는 자존심을 거론할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일부 조직내부의 도덕적 해이 탓도 있을 것이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조직외부로부터 경찰자존심을 지켜내지 못하는 탓이 클 것이다.이웃나라 일본의 경찰수뇌부가 때로는 정치권력에 대항하며 때로는 검찰로부터 경찰의 독립된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며 경찰조직의 자존심을 지켜내었고 그 과정에서 조직내부의 도덕적 무장을 강화하여 결과적으로 경찰조직의 위상을 공고히 해온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조직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느냐의 여부는 그 조직의 크고 작은 리더들에게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소조직의 리더이든 대조직의 리더이든 그들이 외부의 도전으로부터 조직의 자존심을 지켜나가려는 굳센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 조직의 자존심은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리더들이 일신상의 이해관계를 저울질하며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거나 외부세력의 막강파워에 쉽게 굴복하고 나아가 그 세력에 기대어서라도 오로지 스스로의 영달만을 꾀하려 한다면 그 조직의 자존심은 일상적으로 짓밣히고 말 것이다. 많은 경찰관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이 외부세력에 의해 너무 처참하게 무너진다고 한탄한다. 그 외부세력은 때로는 검찰이기도 하고 때로는 언론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 밖의 기관이기도 하다. 조직 내부의 정화와 개혁이 선행되어 조직이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얻은 연후에야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부의 역량이 축적되어 있지 않고 외부의 환경이 불리하다고 하여 지켜내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조차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 없지 않았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경찰조직의 자존심을 지켜나가는 것은 궁극적으로 경찰을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조직으로 제자리에 위치시키자는 목표이므로 결코 편협한 조직이기주의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자존심을 위해 자신을 던지며 용기있게 맞서 싸운 사람이 아직은 떠올려지지 않는다. 조직의 미래의 목표가 달성되는 것은 그 과정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 스스로 희생하고 투쟁하며 조직의 자존심을 지켜나가려는 과정없이 어느 날 갑자기 외부의 변화된 환경에 의해 조직의 목표가 달성된다 한들 그것을 유지 발전시켜 나갈 조직원의 동력은 뒷받침되지 않는다. 일신의 영달의 그늘에 숨어 신념과 용기가 부족함을 마치 냉철한 현실인식 인양 포장하여 자신과 조직을 기망하려는 교활함과 비겁함이 득세하는 현실에서는 조직의 자존심은 회복되기도 또 유지되기도 어렵다. 자신의 자존심을 조국 프랑스의 자존심과 일치시켜 나가며 일관된 신념 하나로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해내고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헌신한 드골의 오만한 자존심이 새삼스럽게 크게 느껴진다. 경찰조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패탱의 비겁한 타협이 아니라 드골의 오만한 자존심이다. 2004-04-20
- “대구 한나라 싹쓸이는 안돼” 17대 총선의 대구정치 일번지로 부상한 수성갑과 을 선거구에 출마하는 열린우리당 김태일후보와 윤덕홍 후보(사진 왼쪽)가 11일 선거운동을 전면중단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대학교수와 대학총장출신의 김후보와 윤후보는 당초 한 두석이상은 안정적으로 확보해 열린우리당의 대구 입성을 예상했으나 최근 ‘박근혜 효과’와 ‘정동영 의장의 노인폄훼발언’으로 다시 한나라당의 대구지역 싹쓸이 가능성이 높아지자 특단의 조치로 노상단식을 선택한 것. 이들 두 후보는 지난 11일 오후 3시 대구 수성구 황금네거리에서 존경하는 대구시민에게 드리는 긴급 호소문이라는 기자회견문을 발표하고 바로 단식에 들어갔다. 김 후보와 윤 후보는 이날 발표한 ‘긴급호소문’을 통해 “지금 대구는 한나라당 싹쓸이라는 정치적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다”며 “전국적으로 새로운 정치와 깨끗한 사회에 대한 국민적 열기가 어느 때보다 높은 이 때, 한나라당 싹쓸이라는 반이성적인 구태는 분명 우리 대구의 부끄러운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두 호보는 이어 “지난 12년 세월 동안 한 정당에 몰아준 몰표는 결국 우리 살림살이를 거덜내고 말았다”며 “한나라당 싹쓸이로 여당을 견제할 때가 아니라 대구 경제를 망친 한나라당에 엄중한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덕홍 후보는 “나를 찍지 않아도 좋고 열린우리당을 선택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고 “수년간 몰표를 밀어준 결과 대구를 망친 한나라당이 다시 대구지역을 싹쓸이 한다면 대구의 미래는 없고 고립무원의 섬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한편 이날 한나라당 대구 수성을 주호영 후보는 “윤 후보의 단식은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지 못한 데 따른 능력 부족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며 열린우리당이 왜 지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가를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2004-04-12
- “생산부터 청정기술을” 환경경영의 개척자, 윤리경영의 전도사로 불리는 유한킴벌리 문국현 사장을 만났다. 그가 도입한 ‘4조 4교대’ 근무제도는 성공적인 ‘일자리 창출’ 사례이자 기업활동에서 환경부담을 줄이는 모범사례로 꼽힌다. 그는 전문경영인으로만이 아니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생명의 숲’ ‘서울그린트러스트’ 등 환경 관련 NGO 단체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편집자 주 4조 4교대로 환경부담이 줄어드나. 100명씩 3개 조가 주간에만 근무하면 공장이 3개 필요하다. 그러나 4개 조가 1개 공장에서 4교대로 24시간 근무하면 공장을 1곳만 돌리면 된다. 기계·토지·건물 등 고정자산 비용이 2/3 이상 줄어든다. 기계 1대 더 만들고 공장 더 짓고 하는 데 엄청난 에너지와 비용이 들지 않나. 모두 환경에 부담을 주는 거다. 4조 4교대를 하면 노동자들은 연간 180일만 출근하면 된다. 그것도 주야 교대로. 300명이 270일 출퇴근하는 것보다 400명이 180일 출퇴근하면 교통량도 30% 이상 줄어든다. 2조 2교대나 3조 3교대로도 24시간 가동은 가능한데. 한편으로는 일자리가 없어서 문제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로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이 심각한 상황이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주당 44시간을 초과하는 장시간 근로 노동자가 867만명, 56시간이 넘게 일하는 최장시간 근로 노동자도 276만명이나 된다. 산재사고도 너무 많다. 2002년 산재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최소 10조 이상이다. 이렇게 오래 노동하는 사람이 어떻게 학습이나 자기 혁신 기회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잘 나가는 회사나 가능한 근무형태’라는 말도 있다. 유한킴벌리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지금은 62.1% 정도의 시장점유율로 동종업계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이런 혁신 시스템을 도입하기 전, 95년 우리 회사의 시장점유율은 19.9%에 불과했다. 경쟁사가 67.5%의 점유율을 갖고 있었고 유한킴벌리는 그야말로 위기 상황이었다. 4조 4교대는 이런 시점에서 도입됐다. 혁신 시스템 도입 후 조금씩 점유율이 높아져 2000년부터는 우리가 앞서기 시작했다. 지금은 전 부문 시장점유율, 고객만족도에서 1위, 환경·안전·품질·생산성 모든 부문에서 초일류기업이 됐다. 일반 기업들은 이런 사실을 몰라서 안 하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사람은 되도록 적게 쓰고 공장은 키우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다 세월이 지나면 땅값이 오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기계 사고 공장 짓고 하는 일이 많으면 아는 사업자들끼리 서로 인심 쓸 일도 늘어난다. 그러나 고정자산에 대한 투자를 늘릴수록 그만큼 환경에 부담이 된다. 사람에 대한 투자는 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기업가로서 한국의 경쟁력을 어떻게 보나. 섬유산업을 예로 들자면 한국이 아날로그 방식의 밀라노를 추월할 역량이 충분하다고 본다. 한국은 이미 반도체나 디지털 분야에서 세계 최강국이다. 첨단 나노 염료 기술도 갖고 있고, 연간 1만명 이상의 대졸 디자이너를 배출하는 잠재적 디자인 인력 강국이다. 우리는 디자인을 개발하고, 대량인쇄는 중국에서 하면 된다. 한국은 수십만 외국인 노동자가 아니라 수십만 고급 디자이너가 필요한 나라다. 현대사회에서 섬유제품은 디자인과 브랜드 값이지 옷감이나 바느질 값이 아니다. UNEP 제주총회 때 퇴퍼 사무총장이 유한킴벌리 디지털 날염기술을 극찬했는데. 물을 전혀 쓰지 않고 날염이 가능한 청정기술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날염 시스템으로 옷감 샘플 100가지를 뽑으려면 700장의 스크린, 700장의 필름, 700장×7도 인쇄 등 수많은 자재가 필요하고 오염물질도 다량 배출된다. 디지털 날염은 이 모든 공정을 다 생략하고 모니터에서 작업 후 출력만 하면 된다. 섬유산업은 샘플 뽑고 디자인 개발하는 기획단계에서 20% 이상의 비용이 들어간다. 전체 섬유산업의 매출이 50조라면, 샘플링 작업이 10조 이상이다. 디지털 날염이 어떻게 한국 섬유산업의 대안이 될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최소한 현재 기술로도 10조 이상의 샘플 시장을 커버할 수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 시장에서는 가장 유리한 생산방법이 될 것이다.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면 비싸지지 않나. 5000원짜리 넥타이 사서 며칠 쓰다가 버리면 결국 환경오염이 된다. 비싸더라도 최소한 2~3년은 쓸 수 있는 제품이 친환경적이다. 컴퓨터나 전화기,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튼튼하고 업그레이드가 잘 되도록 만들어서 오래 써야 한다. 유한킴벌리가 숲 가꾸기 등에 열심이지만 결국 나무 잘라낸 펄프로 제품을 만드는 회사라는 비판도 있다.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산 펄프는 싸지만 천연림을 베어낸 제품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 북미나 유럽 지역에서 구조재용 목재 생산 후 부산물로 나오는 펄프만 사용한다. 화장지 계열은 전량 폐지로 생산한다. 총 원가에서 펄프는 5% 미만이다.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펄프 200만톤 중 2만톤 정도만 우리가 쓰고 있다. 종이 기저귀나 생리대 대신 천 기저귀나 생리대를 쓰자는 운동에 대해서는. 모든 운동에는 상대적인 면이 있다. 천으로 된 제품을 쓰면 세탁을 해야 하고 그만큼 수질에 나쁜 영향을 준다. 천 생리대의 경우 여성 활동에도 많은 제약이 있고. 소각이나 매립의 경우에도 종이 제품보다는 플라스틱 제품이 환경에 훨씬 많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2004-05-19
- “주한미군 병력실상 한국정부도 몰라” “솔직히 우리 정부는 오늘 현재 주한미군의 정확한 병력규모와 현황을 알 수 없다.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 문제도 미국이 당장 내일 결행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정부에 알려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그렇게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재배치 움직임을 둘러싸고 23일 한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털어놓은 속내다. 한국은 주한미군의 존재를 전제로 국방전력을 짜고 있는데 한미간 방위조약 상으로는 미군이 언제든지 한국에 통보하지 않고 병력을 움직일 수 있고 철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노 대통령이 ‘5년내 자주국방 기틀마련’을 강조한 대목도 이같은 고민이 반영됐다는 전언이다. 최근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 결정을 계기로 ‘한미동맹의 헌법’격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변화된 국제상황에 맞게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50여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변화된 국제정세와 한미관계를 담지 못해 불평등 논란은 물론, 자칫 한반도 안보에 치명적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17일 미국은 동두천 일대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제2사단 2여단 병력 3600여명을 이라크로 차출키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우리 정부와 아무런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았다. 주한미군의 주둔 근거가 되고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주둔의 근거규정만을 두고 있을 뿐, 주한미군의 이동이나 철수에 대한 한국의 권리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국의 군사상황에 대한 중대한 상황변화에 대해 우리 정부는 무력한 사후 동의를 했을 뿐이다. 따라서 한미상호방위조약 내에 한미 양국이 미군병력 배치와 이동을 사전 협의토록 하는 조항을 신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 미군 다 빼가도 아무 말 못해= 미 의회예산국(CBO)이 19일 공개한 ‘미 육군 해외 주둔 변경의 선택 방안들’이란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주둔 미 육군 병력을 1000명만 남기고 2만7000명을 미 본토로 불러들인 뒤 1개 전투여단을 한국에 순환 배치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주한미군이 1000명만 남게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한국은 미국의 결정에 아무런 제지 권한이 없다. 한미양국이 53년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이후 미국은 4차례에 걸쳐 주한미군 철수를 단행했다. 1950년대에 단행된 1차 철수는 한국전 종료 뒤에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1971년과 78년, 92년에 단행된 3차례에 걸친 철수는 미국의 일방적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현 방위조약 체제하에서는 급작스런 주한미군 이동 및 철수에 따른 안보공백이 필연적으로 우려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경우 주일미군의 국내외 배치 이동에 대한 사전 협의 장치가 돼 있다는 것과 비교된다. ‘미일안전보장조약’(52년 발효)의 경우 미군이 전투지역에 출동하기 위해 주일미군 기지를 사용할 때는 반드시 사전에 일본 정부와 협의하도록 돼 있다. 94년 북핵 위기 때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기 위해 일본과 ‘사전 협의’ 절차를 준비했던 것도 이에 따른 것이다. 반면 당시 미국은 정작 폭격시 직접 피해를 입을 한국과는 아무런 협의조차 않고 북폭을 준비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돼 국내에 큰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 일방적 전쟁도발에도 동참해야= 국내 군사전문가들은 주한미군이 신속대응군으로서 동아시아지역 분쟁에 적극 개입할 경우 한반도 안보공백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과 주변국의 외교관계도 문제가 된다고 보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상호조약의 특성상 미국의 대한 방위공약과 함께 한국의 대미동맹 의무도 규정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 2조 규정에 따르면 “미국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고 미국이 판단한 국제분쟁에 한국군을 파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유엔안보리의 결의를 받지 않은 월남전이나 이라크전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것이 유엔의 목적과 의무에 배치되는 무력행사를 금지한 상호방위조약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비판도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더구나 주한미군을 대북 인계철선에서 동아시아 기동타격대로 재규정하려는 미군 재배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어 상호방위조약 개정을 통해 한국군의 파병요건을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주한미군이 역내외 사태에 대응하는 신속기동군의 성격으로 변화되면 한국은 방위조약을 개정해 주한미군의 작전출동을 통제하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원치 않는 분쟁에 휩쓸릴 위험을 안게 된다”고 말했다. 방위조약을 개정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 변화된 국제환경 맞게 개정해야=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지난 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의 결과물로서 10월 1일 맺어졌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듬해 11월 교환된 한미 합의의사록과 어우러지면서 지난 50년 동안 한미동맹구조를 이루는 기본틀을 형성했다. 한국과 미국은 전쟁을 통해 ‘혈맹’으로 묶였지만 처음부터 수직적이고 불평등한 관계로 맺어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냉전체제 하에서 미국 없이는 한국의 안보가 위태로웠고 한국민들은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냉전의 해체와 남북화해 시대의 도래, 거대국가 중국의 부상에 따라 한미관계도 재조정이 불가피해졌다. 거기에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 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로 되살아난 한국민의 민족적 자긍심은 더 이상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지난 해 6월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이로 인한 촛불시위, 노무현 정부 출범은 동맹의 변화를 몰고 온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같은 요인들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과거 수직직인 관계와는 다른 수평적 관계수립을 위한 논의에 본격적으로 착수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 군사·외교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도 지난 19일 주한미군 차출에 대한 공식설명문에서 “50여년간 사전협의 절차 없이 주한미군의 감축 등 주요 변화가 일방적으로 이뤄져 온 것이 사실”이라며 ‘사전 협의 제도의 정립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개정 논의의 물꼬를 튼 것이다. /박정미 기자 pjm@naeil.com 2004-05-24
- 시 쓰는 경찰관 영등포서 김응만 경사 영등포 경찰서 조사계 김응만 경사(55·사진). 그는 독특한 사나이다. 경찰관과 시인이 그의 두 가지 직업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 일이 그에겐 가장 소중하다. 80년 8월부터 경찰 생활을 시작했으니 벌써 20년이 넘었다. 정년퇴임을 얼마 안 남겨둔 적잖은 나이다. 경찰 생활 초기엔 진급도 빨랐지만 나중에는 운이 지독히도 안 따랐다. 95년에 경사 달고 10년 가까이 그대로다. 경찰청장 표창 등 각종 수상만 24회에 달하지만 승진 운은 없다. 그래도 편법을 쓰거나 다른 방법을 택하진 않았다. 최근 자주 발생하는 경찰관 범죄 소식은 그를 안타깝게 한다. 그는 “자기 주관이나 철학 없이 직업으로만 경찰관을 하기 때문”이라면서 “예전에 비해 요즘 젊은 세대가 사명감이 부족한 것 같다”고 충고했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90년대부터다. 93년에 를 통해 정식 등단했으니 시인이 된 지 10년이 넘었다. 94년에는 시집도 냈다. 현직에 있으면서 쓰는 시이기에 곳곳에 경찰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양천경찰서 신정2파출소 근무 때 야간 순찰을 돌면서 쓴 시의 제목은 ‘야경꾼’이었다. 또 양천구 목5동에서 방범 근무하면서 지었던 ‘파리공원’이라는 제목의 시는 현재 파리공원 휴게실에 전시돼 있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문인협회원, 양천문학회 부회장, 공무원문학회, 경찰문학회 감사 등 다양한 이력도 붙었다. 하지만 여전히 하위직 경찰관 20년에 시인 10년이 그의 인생 이력서의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에는 공무원의 고뇌와 서민의 아픔이 배어있다. 세상을 향한 쓴 소리에도 거침이 없다. 최근에 지은 ‘작은 칼이 시가 되는 이유’라는 시만 봐도 “평생 말단에 연금 고갈이니 공적자금 유용 국민부담이니…(중략)… 서민 생계유지비가 기업에 모이고 그 돈은 정치에 주고…(중략)…사람 죽겄소” 등 적나라한 표현들이 곳곳에 있다. 최근엔 소설작업도 진행 중이다. 이미 중편 소설은 하나 완성했다. ‘물은 수직으로 흐리려 하지만’이란 제목으로 행정공무원이 겪는 애환이 담겨있다.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 장편소설도 하나 준비 중이다. 글을 쓰는 것이 그의 일이고 범죄자를 찾아내는 것이 또한 그의 일이다. 그는 “정년퇴직 후에도 계속 글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한 하급 공무원이 세상을 향해 할 말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정재철 기자 2004년 5월 11일자·887호 2004-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