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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로 칼럼>“백년이 지나도 빛날 대통령”(김성훈 2002.05.17) “백년이 지나도 빛날 대통령” 김성훈 중앙대학교 교수 경제학 현 캐나다 UBC 초빙교수 온 나라가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 의혹으로 시끌벅적하고 절망과 개탄과 한숨으로 가득 차 있다. 스페인이 바스크 분리주의자들과의 내전을 중단하고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성원했다는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축구대회 개최를 눈앞에 두고도 정치권이건 언론이건 이성을 잃다시피 집단히스테리에 걸린 듯 하다. 정권말기인데다가 곧 닥칠 지방선거와 대선 등 정치일정이 맞물려 살풀이와 한풀이마저 난무한다. 역사와 승부해 오던 준비된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이 터진 격이다. 이제까지 아무도 하지 못할 엄청난 일들을 해 놓고도 찬사를 듣기는커녕 자식들 스캔들에 휩싸여 마지막 경륜을 펼 기력마저 빼앗기지 않을까 염려된다. 민주화와 평화적 정권교체의 상징성 때문에 국민들의 실망과 비판은 더 혹독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헌법상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국정개혁의 갈무리를 한 순간이라도 늦추는 일이 발생해서는 아니된다. “자식은 자식이고,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냉철한 공인의식이 필요하다. “무조건 비난하고, 무조건 반대하며, 무조건 구박한다면 아무도 나라를 이끌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며 대부라 할 귀화인 두봉(프랑스명 르네 뒤퐁)주교의 말이다. 역대 독재정권 아래서 혹독한 고초를 겪으며 민주화운동을 해온 과정에서 아무리 자식들에게 빚을 많이 졌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된 다음에 더욱 엄격히 관리했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이 순식간에 이제까지의 업적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잔여 임기 중이라도 자식 일로인해 촌시라도 막중한 국정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아니된다. 자식은 자식이고, 아버지는 아버지 특히 이번 일은 역대정권에서 흔히 보아 온 검찰이나 국정원 또는 국세청을 동원한 권력형 정권비리가 아니다. 정치 브로커들의 한탕주의에 놀아난 공범행위이고, 패거리문화에 찌든 우리사회 특유의 죄의식을 결여한 병리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죄 많은 아버지라고 하지만 차제에 내칠 것은 내치고 자를 것은 자르는 결단이 필요하다. 클린턴 대통령이 재임 중 동생 빌 클린턴의 범법행위를 단호히 사법당국의 처리에 맡겼듯, 그리고 아버지 부시대통령이 그 아들인 현재 조지 부시 대통령의 정치초년병 시절 한 금융사의 비리에 휩싸였을 때 냉정히 사정당국의 처분에 따랐듯이 법에 맡겨 처리하면 된다. 물론 대만의 장개석 총통처럼 부패재벌들과 놀아 난 처남들을 단호히 처단하고 보석 뇌물사건에 연루된 며느리를 자살에 이르도록 엄격했던 중국식 해법도 있다. 그러나 3권 분립이 엄격한 현재 우리 사법제도라든지 국민정서상 초법적인 인치형벌주의는 결코 수용될 수 없다. 제대로 사법기관이 기능하도록 해주면 된다. 우리나라에도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두환 대통령 때의 형, 동생들의 범법행위, 노태우 대통령의 자녀 비리,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에 의한 탈법적 부정사건 때의 전례를 따르면 된다. 전ㆍ노 두 대통령은 당사자들이 직접 권력형 비리에 연루됐었고, 밝혀지진 않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한보 사건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적어도 김대중 대통령은 이 점에 있어서 역대 대통령과는 차별이 된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하에선 건당 비리규모가 작아졌지만 비리 수가 더 많이 노출된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지 곰곰이 짚어 볼 사안이다. 역대정권을 거슬러 보면 언제나 권력 주변에 패거리식 범법행위들이 기생해 왔다. 다만 시대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훨씬 투명해졌고,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는다. 잘 들키고 잘 폭로되는 시대에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문화 관습과 시스템이 고쳐지지 않는 한, 다음 정권때도 유사한 사건들이 줄을 이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정권말 여당 총재의 동생이 국세를 훔쳐내 정치자금화한 사건이 있었고 여당 고위간부들이 국정원 돈을 축낸 사건도 있다. 이렇듯 우리 정치권 일반의 도덕의식 결여가 가장 큰 문제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인 자기중심적인 도덕률이 타파되어야 한다. 도덕성의 회복이 가장 중요 두봉 주교는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대통령이 뭐든지 잘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자기와 손잡고 일할 수 있는 적합한 사람과 정당과 정치인들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허지만 앞으로 그런 대통령을 만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백년이 지나도 그래도 김대통령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올 것입니다.” 그만큼 김 대통령은 많은 일을 해냈다. 이 땅에 민주화를 확연히 뿌리 내렸고, IMF 환란을 극복하였으며, 남북한간에 전쟁이 없는 화해와 평화를 정착시켰다. 정보화 지식기반사회를 열었으며, 감히 정권의 운명을 걸고 언론재벌의 비리도 파헤쳤다. 시행착오를 거치긴 했지만 인기 없는 의료ㆍ복지 개혁도 단행했다. 노사정위원회도 만들고 노조활동을 자유화했으며, 농조통합, 수세폐지, 협동조합 개혁도 무리 없이 추진했다. 설사 아들 중 한 두 명을 감옥에 보내는 일이 있더라도 이 기회에 오랜 세월 우리나라 정치 사회 일반에 관행화된 부정부패를 발본색원하는 일대 정치ㆍ사회개혁 조치와 도덕성회복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만약 이번 사태를 계기로 김대통령이 이를 앞장 서 솔선수범한다면 두봉주교의 말처럼 역사교과서에 영원히 빛날 수 있을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김성훈 중앙대학교 교수 경제학 현 캐나다 UBC 초빙교수 2002-05-17
- 김병량 시장에게 감사의 편지 보내오기도 하련생 작가는 지난 4월 21일 중국 절강성 항주시에서 김병량 성남시장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하씨는 지난 97년, 김 구 선생의 피난길을 65만에 찾은 이용상(79) 선생과 동행하면서 감동과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씨는 상해 홍교공항에서 이 선생과 만나 상해 임시정부에서 가흥 피난처 및 임시정부, 해염 피 난처와 야압령 정상에 자라잡은 영안정까지 당시 74세의 이 선생과 동행했다. 당시 이용상 선생과 야압령에 올라 바라본 영안정은 참담했다고 한다. 세월의 풍파에 지붕은 무너지고 하늘이 다 보이는 등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최근 하씨는 중국 중앙TV의 이색지역 취재활동 중에 복건성 동남 TV의 특별초청을 받아 절강성 가흥시와 해염현으로 가서 김 구 선생의 길을 다시 걸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씨는 한중우호의 역사적 근원 을 사실에 입각해 기록하도록 조력했다고 한다. 해염 남북호 야압령에서 하씨와 동남 TV 일행은 성남시장과 성남시민들이 뜻을 모아 중건한 ''영안정(永安亭)'' 을 촬영했으며, 아울러 작년에 김병량 시장이 친히 해염 김 구 선생의 피난처에 다녀갔다는 말을 접하게 됐다. 97년에 보았던 영안정만 생각하고 야압령에 올랐던 하씨는 새의 날개처럼 살아난 영안정을 보고 놀라움과 감 사함을 느겼다고 한다. 또한 올 청명절(4월5일)에 가흥시 해염을 방문한 이용상 선생 일행을 통해 미화 1000불을 피난처의 유지관리 비로 김시장이 가흥시 정부에 기탁한 것은 여러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말했다. 이에 하씨는 김병량 시장에게 진심어린 감사와 숭고한 경의의 뜻을 담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고, 5월 4일 성남 시청을 방문해 자신이 집필한 《회귀천당(回歸天堂)》과 번역본인 《천국의 새(상·하)》등 모두 3권을 김 시 장에게 선물했다. 존경하는 김병량 시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일찍이 김구선생님께서 나라수복을 위한 항일투쟁시 중국에서 피난생활을 하신 것을 소재로 장편소설 《선월(船月)》과 사실문학 작품인 《호보유망(虎步流亡)-김구선생 중국에 계시다》을 쓴 한국과 특별한 인연 을 가지고 있는 중국작가로서 이 두편은 모두 중국 최고 출판사에서 1999년에 출판되었으며 한국어로 번역 서 울 범우출판사에서 출판되어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저는 여러번 한국에 초청을 받아 이화대학교, 공주대학교에서 《김구선생 중국에 계시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바 있습니다. 금년 4월, 상해 문학출판사에서 또 한국을 소재로 한 저의 3번째 사실문학작품인 《회귀천당 (回歸天堂)》을 출판하였는데 윤봉길의사의 의로운 일생을 중국독자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문단에서 "한류삼부곡(韓流三部曲)"의 첫 번째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최근, 중국 중앙TV의 이색지역 취재활동 중에 저는 복건성 동남 TV의 특별초청을 받아 절강성 가흥 해염현 으로 가서 김 구 선생의 길을 다시 걸을 수 있었고 한중우호의 역사적 근원을 사실에 입각하여 기록하였습니 다. 해염 남북호 야압령에서 저희는 시장님께서 발기하시어 중건한 "영안정(永安亭)"을 촬영하였으며 아울러, 작년 에 시장님께서 친히 해염 김구선생의 피난처에 오셨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금년 청명절에 가흥 해염을 방 문(이용상 선생 일행)하시어 한국독립의 원훈이신 김 구 선생 및 윤봉길 의사를 회고하셨고, 또 미화 1000불을 피난처의 유지관리비로 시 정부에 기탁하는 등 여러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에, 시장님께 저의 진심어린 감사와 숭고한 경의를 보냅니다. 저 또한 민간 대사가 되어 양 국민의 우호관계 가 영원하고 발전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저는 4월27일에 한국 예산에서 거행되는 윤봉길 의사 의거 70주년기념식에 참석할 계획이며 시장님을 뵙고 많 은 지도편달을 받을 기회가 있기를 바라오며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중국작가 하련생 드림 2002년 4월 21일 2002-05-09
- 도산서원 여성 참배 허용 그 동안 여성의 참배를 금지해온 도산서원이 420여년만에 처음으로 여성참배를 허용키로 결정했다. 지난 14일 도산서원은 대당회(총회)를 열고 여성에게도 퇴계 선생이 모셔져 있는 상덕사 알묘(참배)를 허용키로 하고 관련 규정을 개정했다. 이에 따라 도산서원이 건립된 1574년 이후 430여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들의 참여가 공식적으로 허용됐다. 그 동안 도산서원은 여성들에게 단순관광만을 허용했을 뿐 상덕사에 모셔져 있는 퇴계 선생의 영정 알현이나 참배는 허용하지 않았었다. 도산서원의 이 같은 결정은 여성들의 사회 참여 확대와 시대변화의 조류를 수용한 것으로 풀이돼 전국 유림들의 반응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도산서원 이원대 유사는 “옛날에는 여성들의 사당참배를 금지했는데 이제 세월이 변한 만큼 이를 허용키로 결정했다”면서 “유교문화는 꼭 옛날의 것만을 고집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도산서원 상덕사에 알묘 하려는 여성들은 서원관리사무소에 미리 연락을 해 둬야 하며 복장은 한복 정장으로 제한된다. 2002-05-08
- 클릭 이사람 - 탤런트 임선택(대추나무 사랑걸렸네 … 쌍둥이 아빠)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에서 쌍둥이 아빠로 통하는 만능 엔터테이너 임선택씨를 보면 누구나 구수한 뚝배기를 생각한다. 부담없는 이웃집 아저씨 임씨가 분당에 이사 온 지도 벌써 9년, 이제 분당사람이 다 됐다. 지역케이블 방송에서 동별로 주민들의 노래솜씨를 뽑내는 ''한마음 노래자랑'' 사회자로 7개월 째 활동하고 있는 임씨는 브라운관속 인물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매우 친근한 이웃집 아저 씨가 되었다. 또한 (사)다살림 복지회 부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구수한 입담과 노래로 소외 받고 있는 노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임씨는 항상 이웃과 함께 어울리고 벗이 되는 곳을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어느덧 임 씨는 분당이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고 한다. 임선택(48)씨는 늦깍이다. 83년 KBS특채로 드라마 ''산유화''를 통해 연예계에 대뷔했으며, 당 시 임씨의 나이는 33살이었다. 이후 ''해돋는 언덕'', ''초원의 빛'' 등에 출연했으며, KBS 농촌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 쌍둥이 아빠로 출연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임씨는 40대 후반이 되어선 연기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뿜어내고 있 다. 6시 내고향에서 인기만점의 리포터로 맹활약하기도 했으며, 요즘은 가수로서도 자기 자 기자리를 지키고 있다. 임씨는 제1집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를 시작으로 2집 ''새천년 아리랑'', 3집 ''인생은 물레방아'' 를 내놓아 가수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으며, 주변으로부터 좋은 평을 듣고 있다. 임씨는 3집 타이틀곡인 ''인생은 물레방아''에 평소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 ''지금 힘들다 고 어려워 할 것 없고, 조금 잘나간다고 폼잡을 것도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변하고 돌고 돌아 언젠가 빈손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임선택씨는 충청도 보령 대천바닷가에서 9남매 중 3째로 태어났다. 가난으로 인해 초등학교 졸업후 1년간 쌀 두가마니와 고구마 다섯 가마니를 받고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는 ''가난에서 탈출하고 말 것''이라며 늘 바다를 보며 자신과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님 머리맡에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상경해서 7년동안 고향에 내려가지 않 고 열심히 생활했다. 가난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구로공단의 가방공장, 청계천의 양복공 장 등을 돌며 재단기술을 배우고, 조금씩 저축을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그는 군에 입대하기 전 집의 생계를 이어줄 풍선(風船·무동력선) 한척을 사서 부모님께 드릴 수 있었 다. 군대에 간 임씨는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괴롭힌 것이 국졸이라는 ''학력''임을 깨달 아 ''인간으로서 행세하려면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제대후 두 번째 상경을 했다. 새벽에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고, 낮에는 검정고시 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열심히 공부한 대가로 78년도 중학교 검정고시 합격에 이어, 이듬해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통과했다. 임씨는 대학입학에 대해 망설였다. 그러나 또다시 도전의 인생을 시작했다. 80년말 예비고사 를 치르고, 81년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지원했으나 면접관이 나이가 많다며 취직하기 쉬운 경제나 경영학과를 지원하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임씨가 고집을 굽히지 않자 면접관은 4년 제 대신 2년제를 지원하라며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 영화과를 추천해 주었다. 임씨의 인생살이는 고난과 도전의 세월이었다.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 12년간 최 장수 출연하고 있는 임선택씨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개인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수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주위 로부터 당당하게 인정받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또한 당당한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청소년과 소외된 노인들을 돕 기 위해 몸뚱이로 가장 빨리 자신의 지위를 가질 수 있는 탤런트라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한 다. 임씨는 지금도 지난날을 잊지 않고 있으며, 외롭게 살아가는 노인들과 방황하는 청소년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쪼개 봉사하고 있다. (사)다살림복지회 부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어르신들을 모시는 행사엔 빠지지 않고 찾아가 노래와 구수한 만담으로 어르신들을 위로하고 있다. 또한 수원지검 성남지청 청소년범죄예 방위원으로 감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의 탈선을 막고, 청소년들이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있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있다. 대중문화예술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임씨는 분당이 문화예술의 도시로 발전하길 간절히 바라 고 있다.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도시가 되면 범죄도 사라지고, 주민간 갈등도 문화예술의 틀속에 녹아 버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임씨는 분당이 문화예술의 도시로 발돋움하는 과정 에서 자신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싶다고 한다. /백왕순 기자 wspaik@naeil.com 2002-05-02
- 월드컵 첫승에 일본열도 축제 월드컵 첫 승에 일본열도가 축구열풍에 몸살을 알고 있다. 이에 반해 러시아는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등 침통한 분위기다. 일본 축구대표팀은 9일 요코하마 종합경기장에서 벌어진 2002한일월드컵축구대회 조별리그H조 2차전에서 후반 초반 이나모토 준이치가 넣은 선제골을 끝까지 지켜내 강호 러시아에 1-0으로 신승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애매한 신판판정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당초 일본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속공능력을 갖추고 있는 데다 제공권에서도 앞서고 있어 무승부를 따내도 선전이라며, 일본이 마지막 경기인 튀니지를 잡고 조별예선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일본은 월드컵 본선에 처음 출전했던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매 경기에서 선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3패를 당했었다. 일본은 이날 승리로 1승 1무, 승점 4가 돼 조 선두로 올라섰다. 또 최종전 상대가 약체로 평가되는 튀니지라 결승토너먼트 진출이 유력시되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1승1패(승점 3)로 조 2위로 처졌고 벨기에와의 마지막 경기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날 일본은 패기와 투지, 스피드 모든 면에서 러시아를 압도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애매한 심판판정이 러시아 부진의 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의 첫 승은 이나모토의 발에서 만들어졌다. 야나기사와 아쓰시가 ‘월패스’한 공을 이나모토가 오른발 슛, 그물을 갈랐다. 러시아는 3분 뒤 결정적 골 찬스를 맞았으나 석연 찮은 판정으로 골을 놓쳤다. 오른쪽 돌파에 성공한 발레리 카르핀이 이고르 셈쇼프를 겨냥하고 문전으로 찔러주었으나 문전 쇄도하던 셈쇼프를 일본 수비수 도다 가즈유키가 잡아채는 바람에 공은 흘러버리고 말았다. 후반 6분에 터진 일본의 골 상황도 오프사이드 여부가 애매했다. 경기가 끝나자 요코하마경기장은 물론 도쿄의 국립경기장, 시부야의 술집, 신주쿠의 음식점 등에서는 일본대표팀의 유니폼을 차려입은 서포터들의 파란물결과 환희의 함성으로 가득찼다. 또 스포츠신문들은 밤 10시 30분이 지난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 호외를 발행해 일본대표팀의 승전보를 알리기도 했다. 이날 필리프 트루시에 감독은 “오늘 시합에서 우리팀이 훌륭한 기술을 발휘했다”며 “이제 승점 4점이 된 만큼 당연히 결승토너먼트 진출의 가능성이 커졌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런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도 러시아의 일부 축구팬들이 실망 끝에 난동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진데 대해 걱정스런 눈길을 보냈다. 전문가들은 이번 월드컵 대회에서 일본의 약진은 오랜 세월에 걸친 체계적인 투자가 일궈낸 결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오노 신지(페예누르드)와 이나모토 준이치(아스날) 등으로 대표되는 ‘황금세대’를 육성해낸 것이 돌풍의 주요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그동안 일본축구협회는 이번 월드컵을 목표로 유소년 강화정책을 펼쳐왔다. 이 결과 오노와 이나모토 등 ‘황금세대’ 소년들은 급속히 성장했다. 이들은 94년 U-16대표로 아시아주니어유스대회에 나가 우승했고, 95년에는 에콰도르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U-17)에 사상 처음으로 출전하는 쾌거를 올렸다. 또 하나 위 세대인 나카타 히데토시(파르마) 등이 가세한 2000년 시드니올림픽은 8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한편 일본열도가 축제 분위기에 빠져 있는 시간 러시아는 침통한 표정이다. 9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는 훌리건들의 난동이 발생, 시민 1명이 숨지고 200여 명이 부상하는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 또 ‘스킨헤드’로 추정되는 일부 축구광들은 한국 교민을 포함한 외국인들에 분풀이 폭력을 행사했으며, 일부 극성 팬은 러시아가 패한 것에 실망해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2002-06-10
- [포커스] 오늘 개관 서울역사박물관 이존희 관장 “서울역사박물관은 1000만 시민의 자존심입니다.” 이존희 서울역사박물관 관장은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한다. 6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조선과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리매김해온 서울. 지금은 세계적인 거대도시로 성장한 이 곳에 그 역사와 전통을 담은 박물관이 21일 문을 열었다. 역사를 전공한 문학박사 출신으로 지난해부터 역사박물관 개관을 이끌어온 이 관장의 감회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서울은 세계적으로도 정말 오랜 역사를 간직한 도시입니다. 또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 왔고, 그들의 생활양식 하나하나가 모두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와 전통을 담아낸 공간이 바로 경희궁 옆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2만160점의 유물이 소장돼 있다. 이중 9804점은 시민들이 기증한 것으로 명실공히 시민박물관이라 할만하다. 보물 제974호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등 보물 4점과 흥선대원군 이하응 묵란도(興宣大院君李昰應墨蘭圖, 시유형문화재 제152호) 등은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서울역사박물관은 만지고 보고 느낄 수 있는 체험박물관이다. △조선의 수도, 서울 △서울사람의 생활 △서울의 문화 △도시 서울의 발달 등을 주제로 4개의 구역(Zone)으로 나뉘어진 전시공간에는 첨단 디지털 영상기법이 도입돼 가상 체험이 가능하다. 이존희 관장은 “이곳의 멀티미디어 기능은 세계 어떤 박물관에도 뒤지지 않는다”며 “가상 체험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과학기구·생활용구 등을 직접 조작해 보는 실제체험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2-05-21
- 가정의 달 기획 탐방 4 초인종을 누르니 “아이들로 시끄러울텐데요”하는 수줍음으로 안주인이 문을 열어 준다. 60이란 세월을 살아 낸 우리의 어머니이고 할머니의 모습이다. 손자 손녀들의 나란히 놓여 있는 신발들이 정겹다. 아빠 박종인(64) 엄마 김용숙(64) 큰 딸 박소현(35) 둘째 박소진(33) 셋째 박소림(31) 막내 아들 박성건(24). 4녀1남 참 다복한 모습의 가족 사진이 걸려 있다. 이 집에는 딸 셋 모두 출가했지만, 첫째와 셋째네 손자 손녀가 살고 있다. 귀염둥이 계윤성(41개월), 계윤우(28개월), 안예주(28개월)다. 1년 전 분당에서 장기동 청송마을로 이사를 왔다. 큰딸과 셋째도 엄마를 따라 감정동 실크벨리로 이사를 했다. 이 집의 안주인이자 엄마 그리고 할머니인 김씨는 솔직히 계획도시인 분당보다 김포는 대중교통과 편의시설이 불편하다고 털어놓는다. 남들처럼 그리고 남과 다르게 엄마 김씨는 64세의 나이만큼 정열을 키워왔다. 딸 셋 모두 음악의 길을 선택했다. 첫째 딸은 피아노, 둘째와 셋째는 성악을 전공했다. 그리고 셋 모두 유학의 길을 선택했다. 첫째는 부다페스트에서 어려운 학사제도에도 박사학위를 받고 결혼까지 하고 귀국했다. 하지만, IMF가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둘째와 셋째를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둘째와 셋째도 돌아와서 공부를 마치고 좋은 인연을 만나 결혼했다. 한 달에 300∼400만원이 드는 분당의 사교육 열풍에 시킬 수도 안 시킬 수도 없어 조기유학을 권했다. 46살에 낳은 늦둥이에게 말이다. 16살에 아이가 선택한 나라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애정이 아닌 애착과 집착으로 막내를 키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막내는 월드컵 기간동안 영국 국가대표팀 통역원이 되었다. 월드컵 행사가 끝나면 군에 입대할 것이다. 우리네 어머니처럼 그렇게 자신을 잊고 사셨다. 88세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4녀1남을 키우면서 말이다. 하지만 김씨는 다니던 사찰에서 단체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했다. 병원이나 장애인 복지시설 교도소 군부대에 가서 기도와 노래로 위문방문을 해왔다. 주부로 대학입시를 시키는 10년이란 제일 바쁜 세월에 봉사활동으로 더욱 열심히 살았다. 그러면서 김씨는 “봉사활동은 일상에서 여유 시간을 할애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분으로 일상이 되어야 한다”고 셋째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아마도 매일 바쁜 엄마가 딸들은 싫었나 보다. 김포가 준 기쁨, 딸이 준 보람 대중교통이 불편해 딸들이 아니면 꼼짝 않고 집에만 있던 김씨였다. 그런데 승가대학에 교양강좌가 있다는 소리에 교리강좌를 신청했다. 김포시내에 사원이 많지 않아 아쉬웠는데 서운함은 사라지고 버스 타는 법을 배워가며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승가대의 교수진 강의를 직접 듣는 다는 것에 신도로서 행복했다. 전국에서 유일한 승가대학이 김포에 있는 것이 자랑스럽고 김포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두진스님이 일반 신자들과 불교합창단을 발족했다. 바쁜 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은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다고 선언하고 합창단에 가입했다. 환갑이 넘어 손자 손녀를 둔 나이에 불심을 노래한다는 것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처음 결성된 합창반에 반주는 두진스님이 했지만 음악을 지도해주고 지휘해 줄 선생님이 없었다. 노래를 할 수 있는 귀한 시간, 시어머니와 자식과 손자 손녀를 잊는 나를 위한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셋째 딸에게 합창단을 지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셋째 박소림씨는 중창단에 소속되어 공연과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 터라 엄마의 부탁에 달갑지 않았다. 물론 보식음(페이)도 많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엄마의 가장 유일한 기쁨이 노래하는 것인데 합창단 전체를 위해 물러서는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김포시 승가대학교 합창단 지휘를 맡게 되었다. “셋째에게 고마워요. 유학도 중단에 포기하게 했는데, 너무도 예쁘게 잘 살아요. 어려운 곳에 가서 노래도 불러주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열심히 사는 것도요.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을 뒤를 이어 해주는 것이 고마워요”하고 김씨는 말한다. “아니, 셋이나 키워요?” 놀이터에 윤성이와 윤우 예주를 데리고 나가면 듣는 인사다. 친구들도 하나같이 “너 그러다 골병들어 애들 키우지마”하고 일장 연설을 한다고 한다. “힘들 때도 있고 짜증 날 때도 있죠. 하지만 아이들은 나를 행복하고 즐겁게 해줘요”하고 이야기한다. “옛날에 옛날에 엄마들이 그랬듯이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나란 존재가 없었던 엄마들의 희생에 의해 나도 컸는데 나도 그래야 돼지요”하며 “시집 간 딸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 줄 거예요”한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금강경에 나오는 말인데요, 제 신앙 생활의 좌우명이에요. 내가 주었어도 베풀었어도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거든요” 윤성이나 윤우가 엄마를 찾으면 “엄마는 대학교에 가서 대학생 누나 형들을 가르치지? 우리 엄마 최고지!” 이야기 해주고 예주가 엄마를 찾으면 “엄마는 아픈 사람들 위해서 ‘아’하고 노래 불러주지? 예주 엄마 최고지?”하며 손자 손녀들에게 설명을 해준단다. 할머니 이야기에 아직은 아기이지만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엄마가 없다고 외로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김씨에겐 행복이 있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 했던가? 유진희 리포터 mafille7@hanmail.net 2002-05-20
- 김병량 시장에게 감사의 편지 보내오기도 하련생 작가는 지난 4월 21일 중국 절강성 항주시에서 김병량 성남시장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하씨는 지난 97년, 김 구 선생의 피난길을 65만에 찾은 이용상(79) 선생과 동행하면서 감동과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씨는 상해 홍교공항에서 이 선생과 만나 상해 임시정부에서 가흥 피난처 및 임시정부, 해염 피 난처와 야압령 정상에 자라잡은 영안정까지 당시 74세의 이 선생과 동행했다. 당시 이용상 선생과 야압령에 올라 바라본 영안정은 참담했다고 한다. 세월의 풍파에 지붕은 무너지고 하늘이 다 보이는 등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최근 하씨는 중국 중앙TV의 이색지역 취재활동 중에 복건성 동남 TV의 특별초청을 받아 절강성 가흥시와 해염현으로 가서 김 구 선생의 길을 다시 걸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씨는 한중우호의 역사적 근원 을 사실에 입각해 기록하도록 조력했다고 한다. 해염 남북호 야압령에서 하씨와 동남 TV 일행은 성남시장과 성남시민들이 뜻을 모아 중건한 ''영안정(永安亭)'' 을 촬영했으며, 아울러 작년에 김병량 시장이 친히 해염 김 구 선생의 피난처에 다녀갔다는 말을 접하게 됐다. 97년에 보았던 영안정만 생각하고 야압령에 올랐던 하씨는 새의 날개처럼 살아난 영안정을 보고 놀라움과 감 사함을 느겼다고 한다. 또한 올 청명절(4월5일)에 가흥시 해염을 방문한 이용상 선생 일행을 통해 미화 1000불을 피난처의 유지관리 비로 김시장이 가흥시 정부에 기탁한 것은 여러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말했다. 이에 하씨는 김병량 시장에게 진심어린 감사와 숭고한 경의의 뜻을 담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고, 5월 4일 성남 시청을 방문해 자신이 집필한 《회귀천당(回歸天堂)》과 번역본인 《천국의 새(상·하)》등 모두 3권을 김 시 장에게 선물했다. 존경하는 김병량 시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일찍이 김구선생님께서 나라수복을 위한 항일투쟁시 중국에서 피난생활을 하신 것을 소재로 장편소설 《선월(船月)》과 사실문학 작품인 《호보유망(虎步流亡)-김구선생 중국에 계시다》을 쓴 한국과 특별한 인연 을 가지고 있는 중국작가로서 이 두편은 모두 중국 최고 출판사에서 1999년에 출판되었으며 한국어로 번역 서 울 범우출판사에서 출판되어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저는 여러번 한국에 초청을 받아 이화대학교, 공주대학교에서 《김구선생 중국에 계시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바 있습니다. 금년 4월, 상해 문학출판사에서 또 한국을 소재로 한 저의 3번째 사실문학작품인 《회귀천당 (回歸天堂)》을 출판하였는데 윤봉길의사의 의로운 일생을 중국독자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문단에서 "한류삼부곡(韓流三部曲)"의 첫 번째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최근, 중국 중앙TV의 이색지역 취재활동 중에 저는 복건성 동남 TV의 특별초청을 받아 절강성 가흥 해염현 으로 가서 김 구 선생의 길을 다시 걸을 수 있었고 한중우호의 역사적 근원을 사실에 입각하여 기록하였습니 다. 해염 남북호 야압령에서 저희는 시장님께서 발기하시어 중건한 "영안정(永安亭)"을 촬영하였으며 아울러, 작년 에 시장님께서 친히 해염 김구선생의 피난처에 오셨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금년 청명절에 가흥 해염을 방 문(이용상 선생 일행)하시어 한국독립의 원훈이신 김 구 선생 및 윤봉길 의사를 회고하셨고, 또 미화 1000불을 피난처의 유지관리비로 시 정부에 기탁하는 등 여러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에, 시장님께 저의 진심어린 감사와 숭고한 경의를 보냅니다. 저 또한 민간 대사가 되어 양 국민의 우호관계 가 영원하고 발전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저는 4월27일에 한국 예산에서 거행되는 윤봉길 의사 의거 70주년기념식에 참석할 계획이며 시장님을 뵙고 많 은 지도편달을 받을 기회가 있기를 바라오며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중국작가 하련생 드림 2002년 4월 21일 2002-05-09
- “당신은 여전히 내 애인이야” /금강산=공동취재단 기자출신으로 지난 4년 평양에서의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에 김구 여운형 대표들을 동행 취재했다 평양에 눌러 앉았던 북측 김강현(76)씨. 김씨는 2일 금강산여관 5층 12호실에서 반세기 세월을 수절해 온 남측 아내 안정순 할머니(74)를 만나 손을 꼭 부여잡고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나눴다. “당신은 여전히 내 애인이야. 우리가 갈라지고 싶어 갈라졌나”라며 아내를 위로했다. 안 할머니는 당시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 “당신은 결혼뒤에도 너무 자상했었다. 한번이라도 만나려고 기도 많이 했다”며 남편을 향한 애틋한 심정을 전했다. 결혼한지 5년되던 어느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선뒤 소식이 끊겼던 남편을 52년만에 만나 켜켜이 쌓인 그리움을 말로만 표현하기는 어려운 듯 안 할머니의 얼굴에는 연신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난해 이미 서신을 통해 남편이 북측에서 재혼해 딸 넷을 두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도 그리움의 눈물은 멈출줄 몰랐다. 안 할머니의 그리움은 사실 50여년 동안만이 아니다. 생이별 이전부터 남편 김씨는 ‘큰 일’에 매달려 살아온 탓에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당시 혜화동에 있었던 경제전문학교를 졸업한 남편 김씨의 공식직업은 기자였다. 여운형 선생이 만든 중의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던 김씨는 지난 4년 평양에서 남북대표자 연석회의가열렸을 때 25살의 어린나이로 남조선 청년대표로 참석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도 했다. 또 당시 근무했던 신문사가 진보적이라는 이유로 4번이나 옥고를 치러야 했다. 남편 김씨는 북으로 올라온 뒤 곧바로 내각직속 중앙지도간부학교에서 근무하다 황북일보사에서 기자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와중에 조국통일상과 다수의 훈장을 받는 등 북한 지도층 인사로 활동했다. 이런 탓에 이번 상봉기간 중 북측 안내원들은 남측 기자들에게 “김씨를 취재해 보는 게 어떠냐”며 추천하기도 했다. 눈물을 머금은 안 할머니는 “살아줘서 고마워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라는 말로 50년 세월의 그리움을 남편에게 전했다. 2002-05-02
- 클릭 이사람 - 탤런트 임선택(대추나무 사랑걸렸네 … 쌍둥이 아빠)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에서 쌍둥이 아빠로 통하는 만능 엔터테이너 임선택씨를 보면 누구나 구수한 뚝배기를 생각한다. 부담없는 이웃집 아저씨 임씨가 분당에 이사 온 지도 벌써 9년, 이제 분당사람이 다 됐다. 지역케이블 방송에서 동별로 주민들의 노래솜씨를 뽑내는 ''한마음 노래자랑'' 사회자로 7개월 째 활동하고 있는 임씨는 브라운관속 인물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매우 친근한 이웃집 아저 씨가 되었다. 또한 (사)다살림 복지회 부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구수한 입담과 노래로 소외 받고 있는 노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임씨는 항상 이웃과 함께 어울리고 벗이 되는 곳을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어느덧 임 씨는 분당이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고 한다. 임선택(48)씨는 늦깍이다. 83년 KBS특채로 드라마 ''산유화''를 통해 연예계에 대뷔했으며, 당 시 임씨의 나이는 33살이었다. 이후 ''해돋는 언덕'', ''초원의 빛'' 등에 출연했으며, KBS 농촌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 쌍둥이 아빠로 출연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임씨는 40대 후반이 되어선 연기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뿜어내고 있 다. 6시 내고향에서 인기만점의 리포터로 맹활약하기도 했으며, 요즘은 가수로서도 자기 자 기자리를 지키고 있다. 임씨는 제1집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를 시작으로 2집 ''새천년 아리랑'', 3집 ''인생은 물레방아'' 를 내놓아 가수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으며, 주변으로부터 좋은 평을 듣고 있다. 임씨는 3집 타이틀곡인 ''인생은 물레방아''에 평소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 ''지금 힘들다 고 어려워 할 것 없고, 조금 잘나간다고 폼잡을 것도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변하고 돌고 돌아 언젠가 빈손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임선택씨는 충청도 보령 대천바닷가에서 9남매 중 3째로 태어났다. 가난으로 인해 초등학교 졸업후 1년간 쌀 두가마니와 고구마 다섯 가마니를 받고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는 ''가난에서 탈출하고 말 것''이라며 늘 바다를 보며 자신과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님 머리맡에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상경해서 7년동안 고향에 내려가지 않 고 열심히 생활했다. 가난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구로공단의 가방공장, 청계천의 양복공 장 등을 돌며 재단기술을 배우고, 조금씩 저축을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그는 군에 입대하기 전 집의 생계를 이어줄 풍선(風船·무동력선) 한척을 사서 부모님께 드릴 수 있었 다. 군대에 간 임씨는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괴롭힌 것이 국졸이라는 ''학력''임을 깨달 아 ''인간으로서 행세하려면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제대후 두 번째 상경을 했다. 새벽에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고, 낮에는 검정고시 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열심히 공부한 대가로 78년도 중학교 검정고시 합격에 이어, 이듬해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통과했다. 임씨는 대학입학에 대해 망설였다. 그러나 또다시 도전의 인생을 시작했다. 80년말 예비고사 를 치르고, 81년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지원했으나 면접관이 나이가 많다며 취직하기 쉬운 경제나 경영학과를 지원하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임씨가 고집을 굽히지 않자 면접관은 4년 제 대신 2년제를 지원하라며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 영화과를 추천해 주었다. 임씨의 인생살이는 고난과 도전의 세월이었다.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 12년간 최 장수 출연하고 있는 임선택씨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개인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수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주위 로부터 당당하게 인정받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또한 당당한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청소년과 소외된 노인들을 돕 기 위해 몸뚱이로 가장 빨리 자신의 지위를 가질 수 있는 탤런트라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한 다. 임씨는 지금도 지난날을 잊지 않고 있으며, 외롭게 살아가는 노인들과 방황하는 청소년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쪼개 봉사하고 있다. (사)다살림복지회 부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어르신들을 모시는 행사엔 빠지지 않고 찾아가 노래와 구수한 만담으로 어르신들을 위로하고 있다. 또한 수원지검 성남지청 청소년범죄예 방위원으로 감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의 탈선을 막고, 청소년들이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있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있다. 대중문화예술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임씨는 분당이 문화예술의 도시로 발전하길 간절히 바라 고 있다.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도시가 되면 범죄도 사라지고, 주민간 갈등도 문화예술의 틀속에 녹아 버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임씨는 분당이 문화예술의 도시로 발돋움하는 과정 에서 자신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싶다고 한다. /백왕순 기자 wspaik@naeil.com 2002-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