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김포 천현마을 부녀자 일감 갖기 사업 일부 콩나물 업자들의 콩나물 부패방지를 위해 농약 등과 같은 인체에 위해성을 가져올 수 있는 화학약품을 음성적으로 사용함으로서 소비자에게 불신감과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보도를 접하곤 한다. 이런 위기감을 느낀 김포시 천현마을 부녀자들은 깨끗한 콩나물 생산으로 국민들의 건강을 약속하며 더불어 소득도 올려 보자는 생각으로 92년 김포시 농업기술센터의 농촌여성 일감 갖기 사업으로 콩나물 생산 및 판매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국산 콩을 원료로 전국에서 최초로 개발한 자동재배기를 이용, 생장촉진제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맑은 샘물로만 재배하여 맛이 고소하고 부드러운 콩나물을 생산하고 있다. 흐른 세월만큼 자연스럽게 성장한 콩나물 재배장은 천현마을 부녀자들의 공동 작업장이 되어 아침 일찍 시간이 허락되는 부녀자들이 7시에 재배장으로 삼삼오오 모여 콩나물을 씻고 포장을 한 다음 각 거래처에 납품을 한다. 99년부터는 콩나물과 함께 두부류를 더 추가하여 농협하나로마트에서 즉석 두부를 제조·판매하고 있으며 늘어나는 소득을 불우한 이웃과 함께 하는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천현마을 부녀자들은 오늘도 부산하게 손놀림하고 있다. 샘재콩나물은 100% 국산 콩 사용과 맑은 지하수만으로 재배하며 물과 공기를 동시에 공급하는 침수법을 이용한 자동 재배기 설치로 7일 후 수확한다. 샘재콩나물의 특징은 콩나물 뿌리가 약간 있으며 콩나물 맛이 고소하고 감칠맛이 있어 옛날에 즐겨 먹었던 콩나물 무침 맛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 그래서 먹어 본 후 그 맛을 잊지 못하여 인연을 끊지 못하고 계속 찾는다고 한다. 두부류 또한 국산 콩만을 사용하며 물 간수를 넣는 것 외에는 다른 이 물질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두부 맛이 무척 고소하고 부드럽다. 구입방법은 농협하나로마트나 일반 슈퍼에서 판매하고 있으며 가구별 개별주문도 받는다. 각 가정 주 1회 공급으로 콩나물, 두부 대금은 먼저 구입해서 먹어본 후 입금 방식이다. 소비자들의 입맛 판단에 자신감을 가지고 일하는 천현마을 주부들이 있기에 우리의 밥상은 안전하다. 주부들의 분주한 식탁에 행복이 가득 담긴 손맛으로 샘재무공해콩나물의 고소하고 담백한 맛을 오늘의 식탁에 올림은 어떨까? 두부류 1모 1200원(김포하나로마트에서만 직접생산 판매), 국산콩 콩나물(500g) 1200원. 찾아가는 길 : 48번 국도를 따라 강화쪽으로 약14km 이동 → 한옥마을 운양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500m 진입 → 농협하나로마트를 우측에 끼고 좌회전 → 천현마을과 청수마을 경계지점 샘재 약수터에 재배장 위치. 김포 버스 터미널에서 샘재 마을로 가는 5번 마을버스 탑승 → 샘재 마을 샘재약수터에서 하차. (985-2548) 조슬기네 리포터 sellyjung2@empal.com ▶무공해 콩나물 외관상 특징 1. 농약과 성장 촉진제를 주지 않고 기른 청정 무공해 콩나물은 일반 콩나물보다 머리 몸통 꽁지가 가늘고 길며 약간 질김. 2. 몸통을 꺾어 보면 완전히 잘라지지 않고 보통 콩나물보다 가늘지만 삶으면 부피가 줄어들지 않는 특징이 있다. 3. 일반 가정의 냉장고에서 일반 콩나물보다 녹화 시간이 빨라 4∼5시간의 형광불빛에서 녹화현상을 보임 ▶콩나물 고르기 : 머리 색깔이 노란 것을 고른다. 크기는 너무 길거나 짧지 않은 중간 크기의 것이 좋다. 물에 담긴 콩나물은 비타민C가 파괴된 것이므로 사지 않는다. 포장 판매하는 콩나물에는 콩의 원산지가 표시되므로 비교적 안심하고 선택할 수 있다. ▶콩나물 오래두고 먹을 수 있는 보관법 -먼저 물기를 빼고 지퍼백에 넣은 뒤 밀봉한다. 금방 먹을 것이면 이대로도 괜찮지만 며칠 둘 예정이라면 빛이 닿아 콩나물 대가리가 파랗게 되지 않도록 지퍼백 위를 신문지로 한 번 싸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좋다. -냉장실에 보관 시 매일 살짝 물을 뿌려준다면 2∼3주 정도 보관이 가능하다. 조슬기네 리포터 sellyjung2@empal.com 2002-04-30
- 원망과 기쁨 뒤섞인 채 밤잠 설쳐 /금강산=공동취재단 “애비 노릇 못한 이 못난 사람을 용서해다오.”, “형님, 오빠… 이 얼마 만이요.” 28일밤 금강산은 혼돈 그 자체였다. 남북 가족들은 강요당한 분단의 역사에 대한 원망과 반세기만의 만남이 던져준 기쁨이 뒤섞여 갈피를 잡지 못한채 밤잠을 설쳤다. 남측 가족들은 자정을 넘겨 숙소인 해금강호텔로 돌아온 후에도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일부는 호텔로비를 서성이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객실에 올라간 가족들도 장전항을 바라보며 꿈만 같았던 하루를 돌이켰다. 가족들은 바쁜 일정에 지친 표정이 역력했지만 가슴에 묻어둔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헤친 듯 사뭇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단체상봉 2시간, 만찬 2시간 등 4시간여의 만남이 50년 이산의 고통과 겹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바람처럼 달리던 청년 남편이 백발 노인이 되오 나타나다니, 기다림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50년간 수절한 끝에 북쪽 남편 임한언(74)씨를 만난 정귀업(75)씨는 인생무상을 절감했다. “결혼했다”면서 “홀로 고생했다”고 미안해하던 남편이 영 딴 사람으로 다가왔다. 정 할머니는 그러나 짧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질긴 부부의 인연이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때 남기고 온 세 살박이 딸 필순(55)씨를 만난 오정동(81)씨는 주금이 잡힌 늙은 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무리 과거를 추수리려해도 믿어지지 않아 다리를 꼬집어보기도 했다. 오씨는 “제 어미를 꼭 닮았다”는 말을 해줬지만, 아버지를 원망하는 듯한 딸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헤아리기도 힘든 긴 세월이었지만 남북 가족들은 피붙이를 한 눈에 알아보고 눈물바다를 이뤘던 첫날이었다. 이들의 뜨거운 만남에서는 남과 북도, 군사분계선도 없었다. 이날 밤 해금강 호텔 로비에서 애꿎은 담배만 태우던 한 남측 가족은 “빨리 통일 돼야지, 다시 합쳐야 살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회한과 기쁨의 짧은 밤을 보낸 남북 가족들은 29일 개별상봉을 통해 혈육의 정을 다시 확인했다. 2002-04-29
- 한나라당 최고위원 후보자 연속 인터뷰 ⑧ - 강인섭 의원 강인섭 의원은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관훈클럽 총무를 거친 중견 언론인 출신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후 정계에 입문한 뒤에도 ‘녹슨 경의선’ ‘파리, 그 다락방 시절’ 등 4권의 시집을 펴내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강 의원은 최고위원 출마의 변으로 세 가지를 강조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지역구를 가진 서울을 대표하고, 구 통일민주계를 대변하며, 호남출신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강 의원은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당의 화합이 가장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비주류에게도 활동공간을 마련해줘야 한다”며 구 통일민주당에 대한 배려를 주장했다. - 최고위원에 출마한 동기는. 당을 집단지도체제로 바꾸어서 치르는 첫 전당대회이다. 집단지도체제의 취지에 맞는 인선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한나라당은 여러 정파가 모여서 하나의 큰 당을 이루고 있는 정당이기 때문에 당내 제 세력 제 정파를 대표하는 사람이 두루 최고위원에 들어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나는 서울에서 당선돼 서울시지부위원장을 2년 동안 맡아왔기 때문에 서울을 대표할 수 있고, 또 3당 합당의 한 축이었던 구 통일민주당 부총재 출신이고, 전북 고창 출신으로 호남 지역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출마를 결심했다. - 최고위원 경선의 쟁점은 무엇인가. 이회창 대세론이 무너지면서 노무현 후보에 밀리는 현상이 벌어졌는데 그렇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나라당의 끊임없는 집안 싸움 당 내분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따라서 12월 대선 승리를 위해 당내 화합을 위한 제 정파간의 화해와 단결이 관건이다. 이를 위한 기반을 만드는 것이 이번 경선의 의미라고 본다. - 소위 이 총재의 측근인사들로만 구성돼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렇게되면 대외적으로는 한나라당이 자칫 수구세력의 결집체처럼, 기득권 세력의 집합체처럼 비춰질 우려가 있고, 당내에서는 주류중심의 당 운영의 폐단이 그대로 나타날 것이다. - 17명이 출마했는데 당선가능성은 있다고 보나. 물론이다. 우리 대의원들이 당을 사랑하고 당의 장래를 누구보다도 걱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양식 있고 균형 있는 구조를 만들어 줄 것으로 믿는다. - 대선 후보 경선에서는 누가 당선돼야 한다고 보나. 이회창 후보가 독주하고 있는 것이 당원들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당원들이 이 전총재를 중심으로 뭉쳐야 정권재창출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노무현 바람이 일면서 오히려 이 전총재에게 더 많은 표가 몰리고 있다. - 노풍에 대한 견해는. 노무현과 이인제는 다같이 통일민주당 출신이다. 내가 부총재 할 때 두 분이 다 정치를 시작했다. 노 후보에 대해 안다면 아는 축에 속한다. 그야말로 돌풍을 몰고 왔는데 검증될 부분이 남아있다. 우리 국가의 운명을 상당부분 이끌어 가는 책임을 져야될 대통령은 보다 엄중한 검증과 신중한 판단을 하고 난 연후에 마지막으로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선거까지는 6개월 정도 남았고, 차분하게 후보에 대한 검증이 이뤄지다 보면 바람을 몰고 온 요소들이 많이 배제되고 진짜 판단의 알맹이가 남지 않겠나. - 노 후보가 ‘민주세력의 대결집을 이루자’며 정계개편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게 쉽게 이루어지겠나. 김대중 김영삼씨의 지지세력들이 민주화운동의 두축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갈라선 지 오래됐고…. 하나로 뭉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 5년전 현철씨 문제가 터졌을 때와 현 상황이 비슷한데,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지 않았나. 그때 정무수석으로 있으면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봤다. 불과 5년 전에 김영삼 전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감옥에 갔다왔는데 그 일이 다시 되풀이되는 것은 가슴아프고 안타깝다. 정말 불행한 일이다. - 현재의 청와대를 당시와 비교한다면. 충신은 자기 신상의 불이익이 닥치더라도 바른 건의와 충고를 해야 한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현철씨 사법처리와 국회 청문회에 세우자고 대통령에 건의했다. 김 전대통령에게는 뼈를 깎는 아픔이었지만 민심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주변에는 충복만 있지 충신은 없는 것 같다. 바른 권고를 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세월이 지나면 잠잠해 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는 안될 것이다. 바르게 처리하는 것만이 해법이다. ※ 약력 남성고, 한국외대졸 불 파리대학수료 동아일보워싱턴특파원·논설위원 통일민주당 부총재 대통령 정무수석 한나라당서울시지부위원장 외대국제대학원특별초빙교수 호남대 겸임교수 2002-04-28
- 어깨제목:인터뷰-전남도지사 후보로 나선 송하성 전 공정거래위원회 심판관리관(무소속) “까마귀 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말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안가면 되는가. 그러면 까마귀 시대가 오는데. (내가 백로라는 말은 아니지만) 문제가 산적한 전남에 뜻있고 실력있는 사람이 가만히 있어야 되겠는가.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뛰어들어야 한다.” ‘잘 나가는 고급 관료가 왜 자리를 박차고 기반도 없는 정치판에 뛰어드느냐’는 첫 질문에 송하성 전 공정거래위원회 심판관리관이 담담하지만 힘있는 어조로 대답했다. 송 전 심판관리관은 “민주당 서울시장 김민석 후보를 빼면 40대에 광역단체장에 도전하는 사람은 처음이 될 것”이라면서 “그 어떤 유혹이 와도 예정대로 무소속 출마할 것이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재차 물었다. “그 실력으로 중앙에서 더 성장해 국가 경영에 남다른 역할을 하는 것이 훨씬 의미있는 일이지 않느냐”고. 이에 그는 “민의(民意) 말고는 나를 아무도 꺽을 수 없다”면서 “오직 도민만이 나를 검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고한 출마의지를 내보였다. ‘세대교체 돌풍을 바라는 민심변화가 크다’는 것이 송 전 심판관리관이 자신하는 근거이며 ‘민심을 강력하게 확인하고 싶다. 진군하는 것 외엔 다른 일 있을 수 없다’는 표현에서 그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무소속 출마의지 강변 ‘돈과 완장보다 실력과 열정이 더 필요한 시대가 왔다. 나는 이제 과연 내게 주어진 소명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가 된 것 같다.’(책 ‘21세기 장보고 시대를 열자’ 중:송하성 지음) 바로 그 소명은 전남사람들의 ‘돈 벌 거리’를 만드는 일이며 그 무엇은 ‘전남도지사’가 돼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송 전 심판관리관이 전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전남이 나아가야할 방향과 비전은 ‘자식 키우며 살만한 땅’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떠나지 않고 자식도 떠나 보내지 않으며 사람들이 모여들고 나이가 들어서 다시 돌아오고 싶은 땅을 말한다. 어떻게 만드냐가 관건이고, 바로 21세기 새로운 장보고 시대를 여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전상(全上, 전남-중국상해)의 시대를 열자고 말한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전남과 중국상해가 서로 발전협력관계를 만들고 광양과 목포가 아시아 물류이동의 허브 역할을 하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전남의 관광 문화 예술산업을 꽃피워 전세계에 팔아야 하고, 농업 수산업 교육을 비롯한 모든 산업을 국제분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경쟁력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농사 역시 국제경쟁에 참여, 친환경 무공해 유기농으로 탈바꿈한 문화산업화가 돼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때문에라도 그는 전남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자원을 돈이 될 수 있게 마케팅하고 세일즈 할 수 있는 젊고 능력있는, 그리고 국제적 안목과 식견이 있는 경제전문가인 자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전남 고흥 출신의 송 전 심판관리관은 서울대 행정대학원, 프랑스 솔본느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미국 조지타운대학 로스쿨을 마쳐 LL.M 학위를 취득했다. 재경부, 청와대 경제비서실 공정거래위원회 등 경제부처에서만 공직생활을 해온 송 전 심판관리관은 주미대사관에서 경제외교관으로 활동하는 등 이론과 실무에 능통한 경제전문가로서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10여년 동안 서울대 연세대 등에서 경제학을 강의했으며 한양대 경제금융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 민주당 전남도지사 경선이 끝나면 본선은 최소한 3파전이다. 같은 송씨 집안에서 두사람이나 나오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않고, 당선가능성도 없어보이는데. 개인적으로 송구스럽고 그 어른(송재구 전 전남부지사)의 인품을 존경한다. 하지만 전남을 잘 살수 있도록 경쟁력 있는 도지사를 선택하는 것은 순전히 도민 몫이다. 장유유서 논리로 문제삼으면 안된다. 민의가 결정한다는 원칙만 있을 뿐이다. 나는 2년 전부터 이미 화살이 출발한 상태였다. 이제와서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1년 전에만 그 어른이 거취를 분명히 하셨어도 조정됐을지 모른다. * 무소속 출마할만큼 시스템을 갖췄다고 보는가. 차관급은 돼야한다거나, 타인에게 빌붙지 않고 스스로 물질토대를 구축해 자율성을 갖는 것, 경영능력을 검증받았던 과정 등을 포함하는 조건을 말한다. 차관이 돼 나오려면 나이 50을 넘어선다. 세월이라는 변수는 젊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40대이니까 젊은 인물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500명의 미국기업인과 관계가 만들어졌고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나름대로 했다. 돈 있는 사람이 정치까지 하면 어떡하나. 법정선거비용을 채우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다비용 체제구조로 선거에 임하면 빨리 무너질 수 있다. 나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과 분야별 모임을 갖추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처럼 무모한 사람이 있어야 역사는 발전한다’고 신념을 각인시키듯 낮은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또 변화와 새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것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그는 경제학 박사답게 ‘수요와 공급’론을 만고불변의 법칙으로 내세우며 도민의 뜻(수요)에 얼마나 부응하는 후보냐(공급)에 대한 선택은 도민이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 고시 합격자는 장교로 군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대접받지 않는 삶을 살아보자는 생각에서 졸병군대생활을 선택했다고 했는데, 사실인가. 다른 야망을 펼치기 위한 준비된 작전은 아니었는지. 대접받지 않는 삶을 살자는 생각은 진실이다. 병장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고, 병장출신의 공무원들이 다수다. 정열적이던 20대 중반이었다. 그러나 내 야망 혹은 욕망을 숨기지 않겠다. 막연하게나마 보통사람들의 삶과 대중정치를 마음속에 담고있지 않았나 싶다. 큰 마음으로 이해해 달라. * 선거 결과를 미리 예단하는 것은 그렇지만, 자칫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좌절할수도 있을텐데. 장보고 시대를 여는 전라도 만들기에 나서는 것이 내 그릇과 배짱에 맞다. 기존 관료로서의 성공은 주어진 것이다. 권력 귀퉁이에서 맴돌며 사는 것은 내 길이 아니다. 23년간 끓어오르는 열정을 억누르고 오랜 세월 참았다. 전남에서 역할을 하고 싶더라. 그러려면 관료사회에서 최소한 국장은 돼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미국에 가서 전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키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인내하며 정말 충실하게 해냈다. 규정된 세상에 들어가기 보다 도전하고 개척하는 삶을 선택했을 뿐이다. 집안 식구들도 이번 선거과정에서 민주당 실세와 조우하지 않도록 신경쓰라고 주문한다. 수요와 공급법칙에 따라 변함없이 내 갈길 가겠다. 도민들이 기회를 준다면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공헌하는 삶을 살고싶다. (한편 전남대 조선대 등에서 외래·겸임교수로 지내고 있는 그는 ‘후학을 가르치고 역사를 관조하는 기회’라며 또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 이번 무소속 출마 도전은 2년 후 총선을 겨냥한 행보라는 말이 있는데. 도지사 떨어졌다고 국회에 도전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면 정치적 낭인이 된다.(그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 상고 출신 학맥이 힘은 되는가. 고등학교 믿다가 일하면 실패한다. 김영곤 광주전남본부장 / 임선진 기자klims@naeil.com 2002-04-25
- <신문로 칼럼>4월혁명의 과녁은 반부패를 겨냥한다(이영일 2002.04.22) 4월혁명의 과녁은 반부패를 겨냥한다 이영일 호남대학교 교수 한중문화협회 회장 4월회 이사 우리는 올해로 4·19혁명 42주년을 맞이했다. 온 국민을 민권승리의 감격과 새로운 기대로 벅차게 했던 4·19혁명이 벌써 반세기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시점에서 4·19혁명을 맞는 우리의 심정은 목전에 전개되는 수많은 어처구니없는 사건들 때문에 4월 혁명완수의 도정이 아직도 요원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1960년 4·19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3학년 재학생으로서 학생시위에 앞장섰던 한 사람인 필자는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42년 전의 학창시절로 되돌아가서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눈에 그려본다. 그 당시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권력이 반공세력의 대동단합을 명분으로 포용한 친일세력들이 국가권력의 요직을 장악한 가운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유지하는데 광분하고 있었다. 이들은 또한 민족이익을 냉전이익에 종속시킨 가운데 민족통일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침묵시키고 권력의 사유화로 부정과 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이 참담한 상황에 맞서 싸울 야당도 시민단체도 존재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암흑이 온 누리를 뒤덮고 있었다. 오직 피끓는 젊은 학생들만이 구국의 대의를 위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 나라의 젊은 학생들은 민족의 진로를 바로 잡기 위해 분연히 궐기하였다. 186명의 젊은 학생들이 4월의 아스팔트 길 위에 독재권력이 발사한 총에 맞고 시체로 뒹구는 주검이 되어야 했고 6000여명이 부상당하는 희생을 통하여 반민족적 부패독재정권은 타도되었다. 4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권력의 사유화 4·19혁명은 독재에 항거한 점에서 이 나라 최초의 민주혁명이었다. 친일파를 규탄하고 민족통일의 욕구를 분출한 점에서 민족혁명이었다. 불의에 항거하여 부정 부패의 청산을 부르짖은 점에서 정의의 혁명이었다. 반민주, 반민족 반부패의 기치야말로 4월 혁명의 숭고한 목표였다. 1960년의 4월의 거리에서 온몸을 던져 민족의 대의에 충성했던 젊은 학생들은 정당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권을 탐하지도 않았다. 특정 사회계급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권익이나 이권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오직 민족사의 진로를 독재 아닌 민주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민족정기가 바로 서는 조국건설을 위해 아까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것이다. 이 숭고한 4월의 정신은 마침내 이 나라의 헌법정신이 되었다. 4·19의 그 때로부터 42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가 큰 폭으로 발전하고 있다. 청와대에 있던 주권, 관료의 수중에 있던 주권이 점차 국민에게로 돌아오고 있다. 국회의원만 바꿀 수 있었던 국민들이 대통령도 바꿀 수 있는 국민으로 성장했다. 냉전시대의 보수정객들만을 지도자로 섬기던 국민들이 탈냉전시대의 진보적 주의, 주장을 내세우는 정치지도자에게도 뜨거운 박수와 지지를 보내는 국민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직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권력의 사유화현상과 권력형비리와 부패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현정권은 조국의 평화통일을 추진한다면서, 친일파를 응징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다면서,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고 부패방지위원회를 입법화하여 설치 운영한다면서 권력형비리와 권력사유화의 잘못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내키는 대로 공직자를 임명하고 국 공영 기업체의 요직을 능력에 관계없이 파당끼리 나누어 차지하는 풍토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권력층의 부정 부패도 여전하다. 권력을 등에 업은 주가조작, 탈세, 이권분배분식, 매관매직은 시대를 초월하여 끝없이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대통령 주변에서 일어나는 권력형비리는 김대중 정권 성립의 역사적 배경을 놓고 생각할 때 이 정권탄생을 도왔던 지지자들 모두에게 엄청난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도덕성을 철저히 짓밟은 그의 아들의 죄와 벌을 반면교사로 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말한 바 ‘선대들의 역사에서 후대들이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역사는 나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개탄이 바로 우리 현실을 두고 한 말 같이 생각된다. 국민에게 좌절 안겨준 대통령 주변 비리 지금 이 시대를 위한 4·19혁명의 당면 과업은 이 땅에서 권력의 사유화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것이다. 부패가 없어지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의 건설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통일과 선진화를 달성하는 첩경인 것이다.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 사회는 또다시 이 나라 젊은이들의 피를 요구해야 할 것인가. 이 과업은 지도층 스스로의 회개와 자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동시에 이 나라의 양심적인 시민단체들이 앞장서서 단호히 대처, 해결해야할 과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내년 43회 4·19기념일은 온 국민들이 부정, 부패의 신드롬으로 좌절 가운데 맞는 기념일이 아니라 4·19혁명의 역사적 성과들을 하나씩 평가하면서 혁명의 살찐 열매를 자랑스럽게 회고하는 기념일로 만들어야겠다. 이영일 호남대학교 교수 한중문화협회 회장 4월회 이사 2002-04-23
- 충북 공무원 노조 출범 공무원노조 충북지역본부가 18일 대의원 2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창립대의원 대회를 통해 공식 출범했다. 대회에 참가한 대의원들은 본부장으로 정세영(45·청주시 흥덕구직장협의회장)씨를 선출했으며 오헌세(47·청원군직장협의회부회장)씨를 수석본부장으로 하고 김상봉(44·진천군직장협의회장)·표세훈(36·청주 상당구직장협의회장)씨 등으로 임원을 구성했다. 이들은 ‘출범선언문’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정권의 하수인이요, 부정부패의 장본인으로 원망과 질책의 대상으로 비쳐졌다”며 “권력과 가진자들에 의하여 흔들려온 공직사회를 곧추세우고, 오랜 세월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온 공직사회를 내부로부터 혁신함으로써 상식과 정의가 바로서는 나라를 만드는 데 주체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공무원노조 충북지역본부는 전국공무원노조가 20일까지 지역본부 창립을 마친다는 계획에 따라 17일 경기지역본부에 이어 2번째 지역본부로 출범됐다. 한편 충북본부에는 청주시 흥덕구, 청주시 상당구, 진천군, 청원군 직장협의회가 참여했다. 청주 정성기 기자 tjdrl@naeil.com 2002-04-18
- <신문로 칼럼>캠퍼스 밖 맴도는 한국의 대학교수(고세훈 2002.03.11) 캠퍼스 밖 맴도는 한국의 대학교수 고세훈 고려대학교 교수 경제행정학부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에게 고시야말로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말속엔 지식과 권력 그리고 명예와 금력이 난마처럼 얽히던 시대의 그늘이 서려있다. 고시정원이 늘어나고 취업전망은 요원하며 사회가 민주화된 만큼 고시의 원래 의미도 많이 ‘퇴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캠퍼스마다 불어 치는 고시열풍을 바라보는 심사가 고약하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사회는 지식(인) 위주의 보상체계가 두드러진 사회이다. 고시공부와 인격적 연마가 별무상관인 반면, 그 과정이 길고 외롭고 고단할수록 훗날의 보상에 대한 집착은 비례적으로 클 터이니, 농축된 이기심 속에 어떤 고급한 일확천금의 심리가 더불어 자라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최근의 신지식인 소동 속에서 기능인으로 평가 절하된 바 있던 대학교수라는 지식인 부류도 있다. 박사학위에 이르는 절차탁마의 그 고달픈 과정 역시 이 땅에서의 ‘교수됨’이 주는 보상을 위한 외줄기 집념의 시간들은 아니었는지. 지식시장의 담장이 저리 아득한 것도 일단 획득된 기득권에 대한 본능적 집단의식의 소산일 터이지만, 권력과 명예의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지식인의 모습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식사회의 오만한 군중심리 유감 그래도 과거 권위주의 시절엔 모시는 쪽에서의 삼고초려라는 체면 세워주기의 형식이나마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들어가려는 쪽에서 노심초사의 간절함을 먼저 신호할 정도에 이르렀으니, 격세지감이라면 이 또한 민주화의 위력일지 모른다. 그런데 저마다 진입의 변은 거창할지언정, 퇴진은 거의 변함없이 불명예의 강제 퇴진이니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교수됨’에 권력과 명예가 따른다면, 그것은 대학교수에게 교육과 연구를 통해 지식의 시공간적 이월(移越)을 책임지는 전권(全權)이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풍성함이란 것도 구태여 따진다면 연구실의 고독한 충일(充溢)이 자연스럽게 보편성과 연대를 획득한 결과이다. 물론 교수들도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발언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예컨대 대학교수들이 특정정치인이나 언론매체가 조직한 대외용 포럼에 집단적으로 참여하거나, 돌연 시대적 책임 운운하며 전시용 포럼을 조직하여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조잡한 정책내용으로 대안을 왜곡하는 등, 무더기로 캠퍼스 밖을 기웃거리는 일은 이른바 선진국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대학교수들이 특별히 높은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한 사회가 그들에게 특별히 허용한 여가와 직업적 안정이란 그렇게 활용하라고 준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최근 한 지식인 포럼이 특정 주요 매체의 주도로 출범하면서 국민소득 몇 만불의 사회를 첫 번째 담론으로 선택한 것은 해당 언론의 성장주의적 논지를 그대로 추인 하는 것 같아 이만저만 실망스럽지 않다. 지식 위주의 사회적 보상체계나 유인체계가 뻔히 변함없는 데, ‘잘 살아보세’의 양양한 미래를 위해 느닷없이 ‘튀는’ 괴짜를 고무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따라서 무슨 의도인가. 그 언론매체의 정체성에 대한 지식사회 일각의 논란이 아직도 진행중이라는 사실은 접어두자. 매체가 곧 권력이라는 말도 진부하다. 그러나 기존의 보상구조 속에서 탄탄대로를 걸어온 사람들이 다음 세대를 향해 너희만은 큰 길 아닌 곁길을 택하라고 충고하는 용기는 무슨 객기인가. 칼 만하임의 “부유(浮遊)하는 지식인”이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를 위한 지식인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수사였으며, 지금처럼 캠퍼스 밖을 부유하며 양명(揚名)을 획책하기에 바쁜 지식인 상을 지칭한 것은 아니었다. 무슨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민주화투쟁을 위해 새삼스럽게 비장한 것도 어색한 시절에, 이러한 집단적 결속력을 과시하려 드는 지식사회의 오만한 군중심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물욕보다 강한 것이 명예욕 지식(인)은, 재물이 그런 것처럼, 사회적으로 소비되어야 한다. 지식과 재산은 모두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회구조, 제도, 관행, 문화를 변화시킴으로써 개개인의 잠재력과 품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데 기여해야 한다. 개인들을 향한 도덕적 외침이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은, 개인들의 도덕적 역량이 극대화될 수 있는 구조개혁에 대한 부단한 노력이 선행 또는 병행될 때 비로소 정당성을 띠는 것이다.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를 대비시킨 라인홀드 니버의 통찰이 여기에서 빛나거니와, 장구한 세월동안 뒤틀리고 왜곡된 구조 속에서 개인들의 희생을 강요해 온 한국사회의 경우는 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명심보감에 무욕이(無慾易)요 무명난(無名難)이라 했다. 과연 명예욕을 누르기란 물욕 보다 훨씬 어려운가 보다. 운 좋으면 명예란 것에도 종종 권력이 따라 붙을 수 있고, 심심치 않게 물질의 욕구까지 채워준다면, 이 또한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고세훈 고려대학교 교수 경제행정학부 2002-03-12
- <발언대> 잃어버린 직업을 찾아서 한때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은 은행원이었다. 70~80년대만 하더라도 대학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공사(公社)와 더불어 은행을 가장 안정적인 직장으로 보았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이제 은행원은 구조조정 1순위에 올라있다. 은행이 대형화되고 업무의 상당부분이 전산화됨에 따라 단순 반복적인 업무 담당자들의 설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처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직업이란 번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다. 직업이 성장하고 쇠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술의 발전에서 찾을 수 있다. 신세대의 애장품 1호가 된 휴대폰과 관련된 직업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휴대폰이 대중화된 상품이 되자 새롭고 산뜻한 휴대폰 벨소리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벨소리 작곡가, 각종 문자를 조합하여 멋진 그림(이모티콘)을 창조하는 이모티콘 전문가 등이 새로운 직업으로 탄생하였다. 직업이 사라져서 소멸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기술의 발전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 수작업에 의존하던 직업들의 상당수는 기계화, 자동화에 따라 사라질 운명에 처해졌다. 여기에는 타자원과 전화교환원, 그리고 비행기 항법사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컴퓨터가 보급됨에 따라 타자원은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으며, 자동화된 전화교환 시스템의 등장에 따라 과거 수작업을 도맡았던 전화교환원의 자리는 급격히 사라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항기 조종석 두 번째 줄에는 항법사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자동항법장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기업의 구조조정과 같은 사회제도적 요인도 직업을 쇠퇴시킨다. 안전 품질 검사분야의 직업들, 각종 보조원 등은 이러한 예들이다. 또, 산업구조의 변화 속에서 전통적인 직업들은 자리를 잃기도 한다. 광업분야의 광원과 채석공, 임업분야의 벌목원과 벌채원, 그리고 섬유 및 의류분야의 재봉공, 직조공, 방적공과 같은 직업들이 이러한 예이다. 이밖에도 쇠퇴하거나 소멸한 직업의 목록에는 유통 분야의 물품 기록원, 인쇄소의 식자공, 곡마단원과 악극단원, 그리고 조산원, 벽돌공, 우산 수선공도 있다. 굴뚝청소원과 전당포업자 역시 이와 유사한 운명이다. 사라진 직업들, 그래서 이제 추억이 된 직업들은 세월의 무상함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직업이란 시대의 산물이기에 직업의 쇠퇴와 소멸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반영한다. 따라서 이러한 직업들은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전환되면서 산업사회의 전통적인 직업들이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직업들로 대체되는 역사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 한국직업능력개발원 한상근 부연구위원 2002-03-04
- “짚신신고 서울 갔던 누렁암소 보셨나요?” 60년대만 해도 시골 농촌에서는 소를 팔기 위해 서울 동대문까지 소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날이 저물면 주막에 들러 소에게 쇠죽을 쑤어 먹이고 여정을 풀었다가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나는 모습은 시골마을마다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집에서 먹인 암소 한 마리가 온 식구의 살림밑천이고, 전 재산이었던 만큼 소 아끼는 마음도 지극 정성이어서, 행여나 자갈길에 소발굽이 상할까 싶어 짚신에 물을 묻혀 갈아 신기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게 서울 장터에 나가 소를 팔던 시절, 아직도 그 시절의 추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반세기 역사의 선산 우(牛)시장 매달 닷새 간격으로 열리는 5일장 선산 우시장은 세월의 무게도 잊은 채 여전히 소를 팔고 사는 사람들로 분주히 아침을 연다. 아침 7시에 장이 섰다가 2시간이 채 못돼 파하는 게 보통이다. 우시장이라고 해서 소만 거래되는 것은 아니다. 닭, 오리, 토끼, 흑염소, 개 등 가축을 사고 팔려는 사람들도 한 켠에 자리를 차고앉아 흥정을 벌인다. 우시장에서 그리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왁자지껄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선산재래시장도 우시장이 서는 날 함께 연다. “예전에는 선산 뿐 아니라, 해평, 장천, 인동, 도계, 옥성, 무을, 산동 등 각 면마다 장이 설 정도로 소를 사고 파는 일이 흔했죠. 요즘은 예전과 달라서 장날 풍경도 많이 변했습니다.” 60여년 넘게 소를 키워오고 있다는 옥성면 덕촌리의 하송희씨(75)는 예전 우시장의 향수에 아직도 흠뻑 젖어있는 듯 했다. 이곳 선산 우시장은 지난 1955년 지금의 화조리 선산소방서 터에서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장이 열리다가, 선산시장상가자리를 거쳐 지난해 자리를 옮겨왔다. 빨간 모자 중개인, 10년 전엔 밀매단 감시활동도 매달 2일, 7일, 12일, 17일, 22일, 27일 닷새 간격으로 열리는 선산 우시장의 중개인은 총 11명. 빨간 모자를 쓴 이들 중개인은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원만한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가격절충을 돕는 일을 주로 한다. 중개인들을 관리하고 지도하는 일은 구미축협 선산지점에서 맡고 있다. 중개인의 역할도 많이 달라졌다. 불과 10여년 전까지 중개인은 시청 공무원, 축협 직원들과 함께 밀매단 단속도 맡았었다. 당시 축산법 상 우시장을 통하지 않은 거래는 모두 밀거래 규정하고, 소를 판 사람과 산 사람 모두 벌금을 물어야 했다. 30년 경력의 중개인 송춘국(선산읍 농소리·68)씨는 한 눈에 좋은 소를 알아보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 “소의 나이는 치아의 개수와 마모정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죠. 예전에는 500kg을 넘는 소를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요즘은 육우사육이 늘고, 기술도 발달해서 700kg이 넘는 소들도 많습니다. 예전에는 털의 빛깔에 연황색이 도는 소가 고품종이었던 것과는 달리 요즘은 붉은기가 돌아야 육질이 좋습니다.” 서울까지 소 팔러 다니던 시절, 소 발굽에 짚신까지 흐른 세월만큼 달라진 게 있다면 우선 장에서 사고 파는 소의 물량 자체가 줄었다. 우시장에서 거래되는 소들은 대부분 번식을 위한 어미소와 송아지들인데, 식용을 위한 육우는 식육점 상인들과의 직거래나, 축협을 통해 출하되는 게 보통이다. 이제는 눈 씻고 찾아봐도 소를 직접 몰고 서울까지 올라가 파는 사람은 없다. 서울에 소를 운반해야 할 상황에서도 트럭이라는 유용한 운송수단 덕분에 더 이상 소에게 신길 짚신이 필요 없게 됐다. “선산에서 서울 동대문까지 소를 몰고 걸어가면 가는 데만 꼬박 8박9일이 걸렸죠. 서울 장에 가면 값을 후하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려도 소 한 마리 값은 족히 뽑을 수 있었습니다.” 60년대∼70년대에 소를 몰며 서울 장에 올라 다녔다는 김정욱(선산읍 교리·57)씨는 65년도 당시 암소 한 마리 값을 5500원∼6000원으로 기억하고 있다. 소에 신기는 짚신도 서울까지 가려면 10죽은 족히 있어야 했단다. “불과 3시간이면 서울까지 달려갈 수 있고, 예전처럼 시세 차이가 크지도 않고 소파는 일로만 본다면야 이젠 아주 좋은 세상이 온 겁니다.” 소는 여전히 농촌살림의 주요 밑천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서 좋아지기만 한 건 아니다. 농가에서는 쇠고기수입개방으로 들썩거리는 육류가격과 수입고기 한우둔갑문제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요즘 한우 암소의 가격은 생체 1kg당 8500원 정도인데, 지난 11월만 해도 1만500원까지 치솟았을 만큼 불안정한 상태. 중개인협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지칠복 회장(해평면 낙성리·64)은 소 값에 울고 웃는 축산농의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하나다. “5공 시절에는 소 값 폭락으로 자살하는 축산농가들이 생겨나기도 했었습니다. 한우는 쌀과 함께 우리 농촌경제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죠.” 소 한 마리면 살림밑천 된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른 말이 아닌 듯 싶다. 소에 웃고, 소에 우는 우리지역 축산농민들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선산 우시장. 아련한 향수에 젖어 음매음매 언덕에서 풀을 뜯는 누렁소를 떠올리며 들러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홍정아 리포터 tojounga@hanmail.net 2002-02-19
- 금연하는 사람 심재철씨 북변동에서 펌프대리점을 경영하고 있는 심재철(36세)씨는 담배 값이 인상되기 하루전인 1월 31일부터 금연을 시작했다. 20살에 호기심으로 피기 시작한 담배는 영웅심에 더욱 늘고 어느새 습관이 되어 16년이란 긴 세월의 친구가 됐다. 그 동안 금연할 기회가 서너 번 있기는 했다. 하지만 ‘담배끊는 누구랑은 상종을 하지 말라’는 경고도 무섭고 ‘내 인생의 즐거움인데 웬 금연?’하고 지내 왔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금연하게된 계기는 뭐죠?”하는 질문에 “ 아시잖아요? 친구들 때문에요. 일성이하고 주일이요”하고 웃는다. 유도와 태권도 유단자인 심씨는 평소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2년 전 첫째 딸 채림이의 운동회에서 릴레이 경주를 하다가 갑자기 숨이 가빠지더니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그때는 단순히 운동이 부족하구나하고 생각했다. 골프로 운동을 시작했는데 경제적인 부담이 되어 2001년 3월부터는 집 근처에 있는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8개월 동안 매일 아침 꾸준히 등산한 결과 160cm 키에 84kg의 부담스런 몸무게가 8kg이나 감소됐다. 운동을 하고 난 후 아침에 일어날 때 개운하고 대리점에 나가서도 일도 잘 됐다. 하지만 여전히 숨은 가쁘고 땀이 계속 지나치게 많이 났다. ‘무엇이 문제일까’라는 의문이 시작됐다. 운동으로 건강이 회복되지 않는 것은 혹시 흡연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코메디언 이주일씨의 폐암과 프로 야구해설가 하일성씨의 심장병 그리고 자신. 이 모두 흡연이 문제였다. 평소 비만이 자신의 건강의 적이라 생각했던 심씨는 결국 흡연이 자신의 건강에 빨간불을 켰다고 결론 내리게 됐다. 이 두 가지 일로 담배 값도 오르고 하니 끊어보자, 이주일씨도 하일성씨도 안타깝게 됐는데 정말 끊자하는 결단의 도화선이 됐다. 한 번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또 한번 참고 그렇게 금연을 하루, 이틀 하다보니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라면을 먹고 나서나 커피 한잔 마시고 나면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럴 때면 다시 커피 한 잔 마시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그의 금단 현상은 특이했다. 밤마다 꿈에서 담배를 피우더란다. 꿈에서 담배를 피우는 자신에게 ‘안돼, 담배 피우면 절대 안돼’하며 고함을 지르다 잠에서 깨면 ‘아 꿈이었구나’하고 안심을 하고 다시 잠들기를 두 달 이상 했다. 이제 금연을 한지 80여일이 돼 간다. 산에 오를 때 예전처럼 숨이 가쁘지도 않고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실제로 흡연을 했을 때는 거무스레한 가래가 많았는데 금연 후부터는 가래도 많이 줄고 그 빛깔도 정상이 됐다. 금연 100일이 되는 날 기념으로 ‘치과에 가서 스켈링으로 잇몸에 붙어 있는 니코틴을 제거하려해요’하며 다시 한번 금연에 대해 굳은 약속을 한다. 입담 좋은 심씨가 “요즘 가족사랑은 종신보험 가입하는거라던데 모르는 말씀. 가족사랑은 금연이에요”하며 아이들과 함께 다시 찾은 건강에 웃는다. 유진희 리포터 mafille7@hanmail.net 2002-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