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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시론>역사의 악순환과 유신 29년(신명식 2001.10.16) 역사의 악순환과 유신 29년(신명식 2001.10.16) 신명식 정치담당 편집위원 김종필 자민련총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최근 ‘반 DJ·비 이회창’의 깃발을 들고 “깜짝놀랄만한 정계개편”을 예고했다. 유신과업의 완수를 외치는 노정치인과 정치주역의 자리로 복귀하려고 몸부림치는 전직 대통령이 벌이는 야합은 처절하기도 하고 추한 모습으로도 비친다. 이들이 김대중 대통령을 최대한 압박해 이 대열에 합류시키려할 것이라는 얘기도 허무맹랑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들은 지역감정이라는 무기를 휘두르며 정치무대의 전면으로 나서고 있다. 김 대통령에 대한 공세의 수위도 높여나가고 있다. 집권여당인 민주당 내에서도 3김이 다시 손을 잡아야 재집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의 정치야망은 분명 노욕이라 할 수 있고 이를 꺾기에는 30년 세월이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9년 전 ‘헌정 유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유신본당과 이른바 유신의 최대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펼치는 야합이 얼마나 위험한 놀음인지를 알 수 있다. 대통령 뽑는 요식행위, 체육관 선거 4번 있었다 1972년 10월 17일 19시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등의 정치활동을 중지시키는 등 헌법 일부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킨다. 효력이 상실된 일부 헌법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가 수행한다.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까지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고 이 개정안은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로써 확정한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씨가 취한 이 초헌법적인 조치에 따라 이른바 ‘10월유신’은 시작됐다. 이로부터 9년간 유신체제가 이어졌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신체제는 자유와 인권이 모두 박탈된 암울한 시대였음이 틀림없다. 국정감사는 폐지됐다. 국회회기도 제한됐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형식상 동의하는 꼭두각시 국회의원이 나왔다. 임기2년의 유정회 의원이 되기 위해 일부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곡학아세를 서슴지 않았다. 10월유신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칭송하며 박씨가 불러 주기를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린 쓸개빠진 지식인들도 많았다. 박정희씨는 ‘체육관 선거’를 통해 72년 8대, 78년 9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동네유지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지내보았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단독 입후보한 박씨를 놓고 찬반투표를 했다. 찬성 2357표, 무효 2표라는 거의 100% 찬성이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체육관선거는 박씨가 살해당한 1979년 10·26사건 이후에도 몇 차례 계속됐다. 그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단독 입후보한 최규하씨를 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런데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신군부는 최씨를 끌어내리고 80년 8월 27일 11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역시 체육관선거였다. 군사독재에서 이러한 헌정유린은 네 번이나 이어졌다. 유신(維新)은 시전(詩傳)에 나오는 말로 ‘주 나라는 비록 오래되었으나 그 사명이 나날이 새로워진다’ (周雖舊邦 其命維新 日新又日新也)에서 유래한 말이다. 우리 역사에서 조선 중종때 정암 조광조와 고종때 흥선대원군이 유신이라는 말을 쓰며 강력한 개혁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박정희씨만큼 유신이라는 말을 즐겨 쓴 사람도 없을 것이다. 73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그는 2시간17분 동안 유신이라는 단어를 43회나 반복해 썼다. 정치 혼란스러우면 박정희 향수로 수구세력 힘 얻어 박씨의 추종자들은 10월유신이 국민교육헌장 새마을운동 한국적민주주의론이라는 세 가지 사상적 지주 위에 세워진 통치이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평가는 정반대이다. 10월유신은 대통령의 절대권력과 장기집권, 종속적 자본축적의 심화, 사회적 통제 강화, 안보이데올로기 강화로 집약되는 독재체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30년이면 10월유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려봄직하다. 그러나 ‘유신본당’ 이 현실세력으로 굳건히 버티고 있는 한 학계에서도 역사적 평가를 올바로 내리기 어려운 것 같다. 내일(17일)은 10월유신이 선포된 후 29년이 되는 날이다. 열흘 후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지 12주년이 된다. 해마다 그랬듯 이맘때가 되면 박정희씨에 대한 추모분위기가 조성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경제가 어렵고, 정치가 혼란스러울수록 그를 높은 자리에 올려 세우려는 움직임이 힘을 얻었다.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일부 정치인들의 야합이 그래서 가능한지도 모른다.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들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생각해보자. 신명식 정치담당 편집위원 2001-10-19
- 공업단지 속의 그린 존(Green Zone) ‘공간코리아’ 구미에서 가산인터체인지 방향으로 가다보면 왼편의 세월지를 지나 오른쪽에 세워진 학상공업단지라는 안내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공업단지 안에서도 푸른 공기를 맘껏 마실 수 있는 녹색공간이 있으니, 바로 엔지니어링전문업체인 (주)공간코리아(대표 정낙규)다. 92년 설립된 공간코리아는 한마디로 청정설비 전문업체. 주로 전자, 반도체, 화학, 환경 등 업체에 필요한 모든 설비를 맡는다. 특히 첨단산업환경에 필수적인 크린룸(Clean room)의 설계와 시공, 각종 공기청정시스템, 초순수설비제품의 제조기술은 업계 최고로 손꼽힌다. 연못·분수·폭포로 꾸며진 사옥 정원 공간코리아의 또 다른 자랑은 바로 제 1공장과 제 2공장을 연결하는 푸른 정원. 이 곳은 잔디와 나무, 연못, 폭포, 분수, 각종 조형물들로 꾸며져 있어 멋진 공원을 연상케 한다. 서영일 이사(연구소장)는 “내 집 앞 정원을 가꾸듯 직원들이 직접 꾸민 공간이라 더욱 의미 있다”고 설명한다. “이 곳에 세워진 조형물들이나 벤치 등 대부분은 직원들이 직접 만들었습니다. 나무와 잔디를 가꾸는 일도 주말에 시간을 내 직원들이 직접 관리하고 있죠.” 사색을 즐기도록 배려한 대리석 발판설계 화목한 가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객을 가족과 같이’라는 공간코리아의 고객사랑 마음을 함축하고 있는 조형물부터, 땅이 하늘을 떠받치는 듯한 형상으로 어머니가 아이를 품은 듯한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 하늘과 땅 사이에서 웅비하듯 날개를 펼치고 있어 경천애인의 의미를 지니는 조형물 등 다채롭다. 특히 연못 위에는 작은 배를 띄워 이곳을 찾는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철판으로 만들어진 배 역시 공간코리아 직원들의 작품이다. 잘 손질된 정원 위에 조금 튀어 보이는 모습의 거친 바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이름은 ‘공간지킴이’. 글귀 한 줄 없고, 거칠게만 보여서 다른 조형물들과는 겉도는 느낌이다. 그러나 공간지킴이는 지난해 공장이전 당시 공사 중에 땅속에서 파낸 바위덩어리를 그대로 세워놓은 것이다. 바위에 글을 새기고 깎고, 다듬는 것보다 원래 모습대로 두는 편이 자연스럽다는 이유에서다. 잔디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진 대리석 발판도 사연이 깊다. 천천히 사색을 즐기지 않고서는 걸을 수 없도록 설계됐다는 것. 사람의 빠른 보폭으로는 조금 좁다 싶지만, 여유를 가지고 느리게 걷기엔 딱 알맞은 폭으로 대리석이 놓여져 있다. 여유 속의 너그러움을 잃지 말자는 정낙규 사장의 아이디어다. 무엇보다 한 켠에 마련된 바비큐 장소는 다른 회사 직원들로부터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곳. 2대의 바비큐기계를 설치해 직원들이 자유롭게 고기를 구워먹으며 단합을 다질 수 있는 공간이다. 소극장 ‘공간아트홀’ 무료대여 인기 자연을 얘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문화공간. 잔디공원에서 자연을 충분히 만끽했다면 이번엔 문화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공간아트홀’이 기다리고 있다. 본관 1층에 마련된 공간아트홀은 면적 80여평, 좌석 130석 규모로 피아노, 바이올린, 최신음향시설 등을 갖춘 소극장이다. 인근 초등학교에서 이곳에 와 학예회나 음악회를 열기도 하고, 기업의 소그룹미팅장소로도 애용된다. 열린 공간을 추구하는 공간코리아답게 이곳 공간아트홀의 사용료는 전액무료다. 사전에 사용신청만 하면 일반인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인간은 공간 속에 살고 있으며, 따라서 공간을 사랑한다’는 회사 로고탑의 의미처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이곳 공간코리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공간코리아 ☎975-6383 9 홍정아 리포터 tojounga@hanmail.net 2001-10-15
- 대정부질문 신중한 경기부양정책 촉구 민주당 최선영(경기 부천오정) 의원은 추경예산 편성, 세금삭감, 내수 진작 등 정부의 경기부양책에 대해 신중한 추진을 요구했다. 그는 “우리 경제는 그대로 방치하면 위기가 확산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급한 불을 끄기 위한 부양조치의 필요성은 인정한다”면서도 “근본적인 구조개혁 없이 부양조치만으로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최 의원은 경기부양조치는 “환자에게 수혈이 필요하듯 단지 보완적 조치일 뿐”이라고 정부의 신중한 접근을 강조했다. 이어 그는 미국테러사태와 보복전쟁에 따른 경제위기와 관련 “우리 국민은 다시 찾아온 경제위기에 불안해하고 있고, 동시에 경기회복에 대한 정부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며 “국민이 희망을 잃지 않고, 정부를 믿을 수 있도록” 정부에 경제위기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경제 낙관론 경계 민주당 김효석(전남 담양·곡성·장성)은 경제에 대한 낙관론에 경고를 보냈다. 그는 “우리 경제는 97년 경제위기 이전 사상 유례 없는 고속성장을 지속”하였지만 “이제 이런 세월은 오지 않는다”고 시각전환을 요구했다. 김 의원은 이에 따라 “이제는 성장보다는 내실 있는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며 “잠재성장률 범위 내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하자면 5% 내외로 만족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에따라 그는 “지나친 낙관론을 펴서 국민들로 하여금 경제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하는 것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뿐”이라며 “우리 경제가 지향하는 방향을 국민들에게 분명히 제시하고, 경제구조 개편과정에서 오는 고통을 경제주체들이 분담하여 나누는 국민적 합의가 계속돼야 한다”고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 2001-10-12
- <신문로 칼럼>베를린장벽 40주년과 햇볕정책(박성조 2001.08.30) 베를린장벽 40주년과 햇볕정책(박성조 2001.08.30) 박성조 / 베를린자유대 교수 경제학 8월 13일, 지금부터 40년 전(1961) 베를린 장벽이 생긴 날이다. 필자는 그 당시 베를린자유대학생이었으며 아침 일찍 쉽게 갈 수 있는 곳 브란덴부르크 문(門)으로 달려가 봤다. 많은 세월이 흘러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필자는 베를린자유대 교수로써 다시금 베를린 장벽과 인연을 갖게 됐다. 40년전 베를린장벽은 독일의 분단을 영구화하는 시도를, 1989년에는 분단의 무용화를 체험하게 됐다. 장벽은 단지 상징으로 분단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고 며칠 전에는 장벽 40주년 기념행사를 체험했다. 사실인즉 ‘기념행사’라고 하기보다 장벽이 생김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장벽을 넘어오다가 사망했는가를 추모하는 행사였다. 베르나우어 가(街)에 정치인들은 사망인에게 화환을 봉정했다. 독일대통령 ‘라우’는 ‘인권’과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독재자의 권력유지와 그것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자기민족을 배반하는 범죄를 베를린의 장벽은 상징한다고 강조했다. 베를린 장벽은 공산주의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즉 유럽대륙에서의 냉전을 시스템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도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의하여 이뤄진 것이 아니고 사회주의체제의 구조적 모순에서 오는 자체붕괴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한다면 공산주의체제가 스스로 정치적, 경제사회적 개혁을 하지 않으면 자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벽’을 판단하는 시각을 독일통일과 결부하여 생각하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왜? 한반도에는 아직도 ‘베를린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유럽국가들, 특히 독일에서 공산체제에 대응하는 전략은 한 때 미국에서 성행했던 과격한 보수주의가 아니었다. 유럽에는 많은 중립국이 있었고, 브란트의 동방정책, 나아가서 특히 OSCE(유럽안보협력기구) 노선은 적대관계에서 ‘안전’과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상반되는 양체제의 공존이었다. 따라서 미국, 한 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자본주의체제 우위론’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동방정책, 통일 표출했다면 통독은 불가능 만약 화해 공존철학에 의하지 않고 자본주의 ‘우위론’에 입각한 적대정책을 구사했다면 베를린 장벽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 둘째, 특히 독일에서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동서독이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밑에 깔지 않았다. ‘협조’와 ‘타협’을 통한 인간과 인간간의 점진적 접근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따라서 브란트 정책의 대상은 동방정부가 아니고 ‘동독인’ 즉 개개인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동방정책에 적극적이 아니었다. 더욱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통일하여 유럽 심장부에서 크게되는 것에 찬성할 이유가 없었다. 미국은 서독이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서독은 ‘국토통일원’과 같은 표현을 쓰지 않았다. 많은 전문가들은 만약 서독이 처음부터 ‘동방정책’을 ‘통일정책’으로 표출시켰다면 독일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 셋째, ‘인간’과 ‘인간’간의 신뢰관계를 이룩하는 데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게르만 민족’은 ‘같은 피’를 갖고 있다고 하는 막연한 문화주의개념을 쓰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은 끊임없는, 진실하지만 실패를 거듭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오랜 세월의 의지가 필요하다. 시간에 쫓기면서 ‘빨리빨리 하자’고 하면 상대방은 싫어한다. 더구나 공산주의자들은 ‘협상의 모사’들인데,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넷째, 베를린 장벽에 의한 분단의 서러움을 없애는데 무엇보다도 서독의 일방적인 경제적 원조였다. 동방정책의 반대자들은 초기 동서독간 상호주의를 준수해야 한다, ‘주는 것’과 ‘받는 것’간에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대차대조표식 사고방식을 가진 동방정책의 반대자들은 얼마 안 가서 장벽을 위주한 ‘긴장완화’가 ‘반대급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독으로 갈 수 있었고, 친척을 만날 수 있었고, 여러 가지의 협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독이 서독에게 줄 수 있었던 반대급부는 이것뿐이었다. 전 서독정부의 동베를린 대표부 대사 ‘브로잇트감’ 박사는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물질적인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것은 서독인이 동독인과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반대급부 없는 지원, 동독 서독에 예속시켜 다섯째, 바로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독 경제는 어느날 서독경제에 괄목할 정도로 예속되고 말았다. 즉 서독경제에 동독경제는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않았으나 동독경제, 나아가서 동독정치체제가 유지해 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서독 경제였다. 그러나 서독은 ‘경제협력’을 갖고 조금도 ‘장난’을 하지 않았다. 바꿔 말하자면 통일정책에 시장원칙을 적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주식자본주의 원칙이 범람하는 미국식 세계화가 어느 곳, 어느 시점에도 만능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동독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갖고 있지 않았던가? 사실상 베를린 장벽이 40년이란 세월에 걸쳐 표면적으로 존재했으나 최소한도 1970년 초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부터 많은 구멍이 생겼고 동독인 개개인의 의식 속에 ‘새로운 인간’이란 싹이 트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 40년’을 돌이켜보면 우리가 내세우는 ‘통일정책’으로써 ‘햇볕정책’의 한계점을 통감하게 된다. 햇볕정책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순수성, 결단성, 부단성을 재활(再活)시켜야 할 것이다. 박성조 / 베를린자유대 교수 경제학 2001-10-05
- <한국은행 사람들③> 장승우 금융통화위원 98년 4월 개정 중앙은행법이 발효되면서 한국은행 총재와 6명의 금융통화위원이 새로 선정됐다. 당시 새 중앙은행법은 한국은행의 독립성 강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특히 금융통화위원회가 ‘금융통과위원회’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비상근이었던 금통위원의 지위도 상근직으로 격상됐다. 그만큼 금통위원 인사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러나 막상 새로 선임된 금통위원들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재경원과 한국은행의 나눠먹기식 인사였다”느니, “정작 금융통화위원 내부에 금융통은 없다”느니 하는 비판의 말들도 많았다. 장승우 금통위원도 비판의 대상 중 한 명이었다. 금융전문가라기보다 재경원 ‘대표’에 불과하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3년여 세월이 흐른 지금 장 위원에 대한 평가는 당시와 크게 달라져 있다. 재경원 출신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한국은행 직원들조차 장 위원을 “한국은행에 가장 먼저 뿌리내린 금통위원”으로 꼽고 있다. 가장 먼저 뿌리내린 금통위원 장 위원이 이같은 평가를 받는 것은 비록 재경원 출신이지만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경제기획원은 구 재무부와 달리 한국은행과 성격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 위원은 한국은행과 인연이 깊은 편이다. 그가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제기획원 물가국이었다. 물가지수를 관리하는 일이 그가 맡은 첫 업무였다. 물가관리에서 더 비중이 있는 도매 물가를 점검하기 위해 장 위원은 거의 매일 한국은행에 출입해야 했다. 72년 유신정부가 8·3조치를 통해 사채를 동결하고 물가상승률을 3%대로 설정하면서부터 그는 매일 도매물가 20∼30개 품목의 동향을 체크하고, 청와대에서 열리는 차관회의에 제출할 자료를 만드느라 한국은행 조사부에서 살다시피 했다. 금통위 부임 이후 장 위원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팀장, 과장급 실무진들과 점심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직원들과 일일이 대화를 하며 서로의 고충과 애로사항을 나누다보니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 요즘은 ‘재경부 출신’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그를 대하는 직원은 없다. 또 “경제정책 전문가일지는 몰라도 금융은 모른다”던 평가도 점차 실물경제와 통화정책을 연결하는 균형감각을 갖고 있다는 평가로 바뀌었다. “금융통화위원회 내부의 합리적인 조정자”라는 것이 요즘 그에 대한 안팎의 평가다. 장 위원은 개각이 있을 때마다 경제수석 물망에 오르는 금통위원으로도 유명하다. 얼마 전 개각 때에도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개각 때만 되면 청와대 비서실에서부터 경제수석 후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이처럼 장 위원을 두고 하마평이 무성한 것은 강봉균 전 경제수석, 이기호 현 경제수석과 동일한 코스를 밟아왔기 때문이다. 장 위원 역시 경제기획원 정책조정국장과 경제기획국장 등 핵심 요직만을 맡아왔다. 특히 공교롭게도(?) 5공화국 이후 세번이나 정권교체기에 경제정책 입안에 참여하게 됐다. 정권 경제계획 입안에 세차례나 참여 청와대 경제비서실 일선 직원으로 “바깥의 살벌한 분위기도 모른채 일만했다”는 80년을 제외하고 6공화국과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의 공과가 그에게 있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6공화국 경제정책은 여전히 양적 팽창에 중점을 두었던 반면 문민정부 시절에는 개혁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정책 입안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당사자로서 장 위원은 6공화국과 문민정부를 이렇게 비교했다. 그러나 경제개혁의 기본틀인 토지공개념과 실명제 등은 6공화국 때부터 출발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특히 장 위원이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문민정부의 경제개혁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당시 신경제 5개년 계획만큼은 손색없는 것이었다는 게 장 위원의 평가다. 다만 추진과정에서 경제주체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지 못했고, 점차 시간이 지나며 정치적 요구가 앞서게 됐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직전 재경원 차관보시절도 장 위원에게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당시 경상수지 적자 폭은 늘고 있는 데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40%이상 급증하고 있었습니다. 외환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상징후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 해소’와 ‘경쟁력 10% 높이기’를 추진했지만 경제주체들의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장 위원은 여전히 경제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현재의 경제위기도 소비진작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구조조정과 수출경쟁력 향상, 그리고 무엇보다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 위원이 정책조정능력과 균형감각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경제기획원 대외협력관, 남북회담 경제실무 담당 등을 역임하며 다양한 협상을 이끌었던 경험이 바탕이 됐다. 정책 조정능력 인정받아 90∼91년 대외협력관으로 있을 때에는 우루과이라운드로 미국의 통상압력이 거셌다. 당시 미국 뿐 아니라 경제 각 부처의 이해관계가 달라 이중으로 싸워야 했다. 또 90년대 초반 남북회담이 진행될 때에는 남측 경제실무담당으로 두 번이나 평양에 다녀왔다. 당시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는 장 위원의 공직생활 보람 중 하나다. 조정자 역할을 맡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는 부드러운 성격에다 아랫사람도 잘 챙기는 스타일이다. 반면 그만큼 저돌적인 면이 약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장 위원과 가까운 사람들은 ‘챙길 거 다 챙기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보좌역의 업무량도 엄청나게 많다고…. 그는 경기고, 서울대로 이어지는 소위 ‘KS’중에서도 10위 안에드는 수재로 꼽힌다. 경기고등학교를 수석졸업하고 대학졸업과 함께 행정고시를 패스했을 정도. 이기호 경제수석이 행시 동기(7회)다. 2001-10-03
- 마음은 청춘 <전주 건강면> 47세 되신 부인이 무릎이 아파 오셨다. 본인은 평소에 등산을 즐기는데 두어 달 전 등산 후 무릎이 아파 와서 하루 이틀 지나면 났겠거니 했는데 두 달이 지나도록 났지 않아 병원에 갔단다. 의사는 이런 저런 진찰을 한 후 갱년기에 접어들어 생긴 퇴행성관절염의 초기 증상이란 진단을 내렸다. 평소 건강에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고 현재도 매달 꼬박꼬박 생리를 하며 지금도 마음은 스무 살인데, 본인이 갱년기이며 늙었다는 말에 기분이 나빠 한의원에 왔단다. 침을 한 두 번 맞으면 나을 거라 하면서. 평소 진료를 하다보면 이런 분들을 자주 만난다. 나이가 50이건 60이건 마음은 젊어서, 노화 현상으로 생기는 퇴행성 질환이라 하면 심한 거부감을 보인다. 그러나 어쩌랴! 세월은 언제나 마음보다 훨씬 앞서 가는 것을. 갱년기(폐경기)란 무엇인가? 폐경기란 여성이 더 이상 월경을 하지 않고 임신능력을 상실했을 때를 말한다. 주로 45-55세 사이에 폐경기가 되며 개인에 따라서는 이 시기가 빨리 오거나 또는 늦게 올 수도 있는데 마지막 월경이 되는 전, 후 시기를 '갱년기'라고 한다. 폐경연령은 약 50세 전후이며 40세 이전에 폐경이 되는 경우를 조기 폐경이라 한다. 의학 수준이 향상되어 평균 수명이 연장됨에 따라 일반 여성의 경우 일생의 약 1/3을 폐경 상태로 지내게 된다. 따라서 폐경 여성의 관리가 사회적 및 의학적 관심사로 등장하게 되었다. 갱년기에 나타나는 증상들 폐경기가 되어 여성 호르몬의 분비가 감소되면 여러가지 증상이 나타난다. 초기에는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오르며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게 된다. 또한 부부관계시 분비물의 감소로 인하여 통증을 느끼고 질 및 방광에 염증이 쉽게 생긴다. 정신적으로는 불안증, 불면증, 우울증도 나타난다. 갱년기 증상가운데 가장 심각하면서도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골다공증이다. 에스트로겐이 감소하면서 뼈에서 칼슘이 빠져나가 뼈의 질량이 감소하고 뼈가 버석버석해지게 된다. 특히 대퇴부, 골반부 및 장골 등이 쉽게 골절을 입는다. 전에는 미끄러지면 고작 멍이 들었을 정도로 다친 상처가 이때쯤 되면 엉덩이뼈가 부러질 수도 있다. 골다공증의 위험이 높은 여성들은 골격이 약하고 흡연이나 음주습관이 있는 여성, 또 평소 운동량이 적은 여성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여성들은 적절한 검사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 한 번 시들어지기 시작한 뼈를 되돌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평소 식생활 습관 등을 통해 예방하는 것이 상책인데, 우유 등 칼슘이 많은 식품을 늘 먹어두는 것이 좋다. 갱년기에 나타나는 증상을 예방하고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한약을 복용하는 것도 좋다.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오르며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에는 '가미소요산' '가감소요산' '자음지보탕' 등을 쓰며, 골다공증이 심하다면 '대영전' '보음익기전'등의 약으로 진음정혈(眞陰精血)을 보강시켜 주는 것이 좋겠다. 아울러 좌훈요법을 병행하면 골밀도 감소를 예방하며 질 및 방광염증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 2001-09-07
- 파도와 모래와 바람의 아주 특별한 만남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바닷가, 저만치 물이 빠진 해변에 얼룩말 무늬처럼 선명한 ‘연흔(漣痕)’이 끝없이 이어진다. ‘전사구’(바닷가 가까이 형성된 모래언덕) 뒤로는 모래가 쌓여 언덕을 이룬 사막과 같은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신두리는 해안을 따라 길이 4킬로미터, 폭 500미터 이상 넓게 펼쳐져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사구지대이다. 빙하기 이후 약 1만 5000년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이곳 사구에는 ‘해당화’를 비롯한 다양한 사구식물들이 자연군락을 이루어 서식한다. 우리나라 자연사구의 모습을 잘 간직한 이곳은 지난 8월 23자로 문화재청의 천연기념물 가지정을 받은 상태이나 해안사구 일대가 대부분 사유지여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남쪽 사구와 해안에는 해수욕장 개발이 진행되고 있으며, 북쪽 해안에는 일부 주택건설 사업까지 시작되었다. 현재 이 지역 토지 소유자들은 곳곳에 “토지소유주 의사 무시한 보전지역 지정을 저주한다” 등의 섬뜩한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를 내걸고 있다. 000 해안사구(coastal dune)와 모래해안(해빈 : sand beach)은 ‘밀물과 썰물’보다는 ‘파도와 바람’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해안에 나타나는 지형으로 외해(外海)로 연한 해안지역에 발달한다. 특히 겨울철 순간풍속 17미터/sec 정도의 강한 북서풍에 바닷가 모래가 육지로 날아들고, 이 모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쌓여 모래언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모래가 바람에 날리고 파도에 밀려서 형성되는 사구와 해빈 사이에는 퇴적물의 교환현상이 왕성하게 일어난다. 두 지형은 이어져 있지만 해빈은 파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 해양생태계에 가까운 반면, 사구는 바람에 의해 조정되고 육상생태계에 훨씬 가깝다. 이러한 생태계 전이지역에는 바다나 육지 생태계와는 또다른 독특한 식생대가 발달하고, 고유종들이 서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 반면 경관이 수려하고 개발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에 해수욕장이나 규사광산 등으로 개발되어 제대로 보존된 곳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2002년 세계 꽃박람회 행사장인 안면도 ‘꽃지 해안사구’는 수년 동안의 규사 채취로 이미 거대한 사구가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 있는 사구에는 콘도나 주차장 같은 각종 구조물과 시멘트 옹벽 등이 설치되었다. 만리포 천리포 몽산포 학암포 등 태안반도에 있는 대부분의 해안사구는 해수욕장 개발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전북 고창군의 ‘장호·용정 사구지대’는 해안을 따라 곰솔(해송)이 식재되어 있으며, 전남 임자도의 ‘대광리 사구지대’도 해수욕장 개발과 방파제 축조로 원형이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특히 바다와 사구지역의 경계에 있는 모래언덕(전사구) 위에 직접 건물을 짓는 경우, 모래의 이동이 어려워지면서 사구 환경이 크게 악화된다. 일부지역은 주변 해안을 매립하거나 방파제를 쌓은 후 해안선 변화에 따른 해류의 변화로 해안침식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000 신두리 해안사구는 그 규모와 함께 우리나라 해안사구 지형이 구성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지형이 존재한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이렇게 다양한 지형이 나타나는 것은 이 일대가 90년대 초까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원주민을 제외한 외부인들의 방문이 오랫동안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도 사구의 형성이 진행되고 있는 북서부 구역에서는 사구식생이 그 분포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상태이다. 이 사구지대의 식생을 구성하는 주요 식물종은 ‘갯그령’ ‘통보리사초’ ‘갯완두’ ‘해당화’ ‘갯메꽃’ ‘좀보리사초’ 등인데, 이들은 긴 지하경(땅속뿌리)으로 모래언덕이라는 건조하고 척박한 환경을 이겨낸다. 지하경은 수평 혹은 수직으로 생장하는데 상황에 따라 수직 혹은 수평생장을 적절히 조절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식생이 잘 발달한 곳에서는 대규모 해당화 군락이 형성되어 있다. 환경부 생태계조사단실의 서종철(지리학) 박사는 “신두리 해안사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구이며, 자연상태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점에서 시급한 보존대책이 필요하다”며 “특히 사구 형성이 시작되는 전사구를 보존하고 대규모 규사 채취를 금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환경선진국의 철저한 사구관리 해외 선진국에서는 일찍부터 사구보호 관리에 절대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미국 뉴저지 주립공원 아일랜드 비치의 경우,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해변 모래언덕에 울타리를 쳐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사구 위에 콘크리트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며, 해변으로 가는 통로는 목도를 놓아 모래를 밟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대도시의 고층빌딩 숲을 마주한 사구지역도 모두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대서양에 접한 스페인의 해안사구 지대는 유럽대륙에서 마지막 남은 ‘시라소니’ 서식지로 배후지역 수킬로미터까지 국립공원 및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난 8월부터 해안사구 보전에 나섰다. 공단은 우선 태안해안국립공원 내 11개 사구, 36개 지점에 표주를 설치해 높이의 변화를 정기적으로 측정하고 있으며, 해일이나 태풍 등의 경우에도 높이를 관찰, 퇴적이나 침식에 대한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또 앞으로 모래 이동이 활발한 계절이 오면 모래퇴적을 유도하기 위한 샌드트랩을 설치, 효과를 측정하기로 했다. 공단은 주요 사구에 대해 훼손방지시설을 연차적으로 설치하고 사구식물의 인공증식과 이식도 추진할 계획이다. 제 2회 NationalTrust 후보지 콘테스트 (사)내셔널트러스트운동(공동대표 고 은, 김상원, 김성훈)은 국내 자연 및 문화유산 보전지역을 발굴하는 제2회 "내셔널 트러스트 후보지 콘테스트"를 개최한다. 산, 강, 갯벌, 습지와 문화유적 등 보전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곳의 정보와 사진을 인터넷에 직접 올리거나, 양식을 다운받아 우편접수를 하면 된다. 이번 행사의 대한 자세한 안내는 내셔널트러스트 후보지 콘테스트 홈페이지(www.ntrust.or.kr)에 소개되어 있다. 올해부터는 웹 상으로만 접수를 받던 방법에서 벗어나 우편접수도 동시에 실시하여 홈페이지 제작이나 인터넷에 대해서 잘 모르는 참가자(어린이, 중·장년 층)의 폭넓은 참여를 기대하고 있다. 1차 심사를 통과한 참가팀 중에 교육부장관상(1팀), 환경부장관상(2팀), 산림청장상(2팀), 문화재청장상(2팀)과 입선(4팀) 총 11팀을 선발하여 푸짐한 부상이 주어진다. 수상작들은 영어로 번역, 웹사이트로 구축되어 해외에도 우리나라의 소중한 자연, 문화 유산을 소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또한 실제로 보전 가치가 높은 후보지의 경우에는 공식적으로 내셔널트러스트 후보지로 지정한다. 팀이나 개인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접수는 9월 30일까지, 수상자 발표는 12월 10일이다. 2001-09-06
- 골고루 꼴값, 구경한번 하세요 한없이 나른한 친구, 아시죠? 언제나 변함없이 제자리걸음만 하는 친구말이예요.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하듯이 말이죠. 옛날부터 그랬어요. 언제나 같은 말만 하고, 똑같은 문제로 맴맴 그랬어요. 결혼생활도 변함없이 맴맴 하더군요. 장장 18년 동안 말이죠. 생각만 해도 나른해 지는 거, 이거 그냥 미친답니다. 언제나 문제거리를 들고 와요. 와서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죠. 앵무새를 날마다 삶아 먹는 모양이에요. “애 아빠가 또 직장을 옮겼어. 속 터져 죽겠어.” 이 정도는 누구나 결혼생활 하면서 겪는 일이죠. 남편 때문에, 자식 때문에, 시댁 때문에 속 터지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인가요? 변함없이 나른하게 주절거리다가 가는 그 친구 뒷모습을 보면 내가 울화통이 터져요. 친구 남편이 맘에 들고, 안 들고 하는 잣대는 딱 한가지잖아요? 친구를 고생시키면 나쁜 놈이고, 호강시키면 좋은 사람인 거요. 그 친구 남편은 이런 면에서 전자에 속합니다. 아직도 사글세 단칸방에서 살아요. 애 셋을 데리고요. 내, 참! 돈이야 뭐 어쩔 수 없다 쳐도 이런 저런 속이나 안 썩히면 나른한 기분이 들지도 않을 거예요. 그 남자 허파는 세월 지나도 곰팡이가 쓸지 않나 봐요. “자기 나이 체면도 있고, 어떻게 쬐꼬만 차를 끌고 다니냐면서 그랜저를 몰겠다고 난리야. 아마 모르긴 해도 나 몰래 끌고 다니는 거 같아. 아유, 속 터져.” 이런 남자를 이뻐 할 수 있겠어요? 이런 나른한 친구, 다들 한 두 명씩은 다 있지요? 오늘은 그 친구가 원치도 않는 남편을 대동하고 우리 집에 왔답니다. 겨우 집 장만은 했어도 아직 집들이 할 형편은 아니거든요. 짐정리도 덜 끝난 상태라 좀 어수선했어요. 뭐 우리사이에 어떠냐고, 그러면서 그야말로 들이닥쳤어요. 슈퍼타이 달랑 한 개를 흔들며 말이죠. 형편이 어려우니 들여다 봐주는 것만도 고마워야 하는데, 그 남자 면상을 보니 슬슬 내 마음이 꼬이더라구요. “이거, 이거, 뭐 집이 이럽니까. 하하하. 썰렁하네. 썰렁해.” 이러면서 가구하나 변변한 게 없다고, 휑한 운동장 같다며 어찌나 퉁박을 주던지. 그 인간, 누가 가구점 점원 아니랄까봐 이방 저방 온 데를 다 돌아다니며 가구점검에 열을 올리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거실에 쇼파 하나는 제대로 된 거 들여놔야지, 하하하.” 묻지도 않는 말을 혼자 지껄이고 돌아다니는 꼴이 보기 싫어 미운 놈 떡 하나 줄 요량으로 점심준비를 했답니다. “쯧쯧쯧. 아이고, 이건 또 뭐야? 아이고, 쯧쯧……. 뭐하나 제대로 된 게 없구만, 없어.” 부엌까지 들어와 엉성한 식탁을 가리려고 천을 떠다가 덮어씌운 거 까지 들춰 내며 혀를 차더라구요. 남편보기가 너무 민망한건 둘째치고, 친구년 한테 화가 뻗치대요? 어째 이런 꼴을 보고 웃기만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정말 나른한 년이지 뭡니까. 잡담 한마디 : 아, 아! 정말 나른하네요. 미운 놈이 똥싸는 격이군요. 그렇다고 똑같이 똥싸고 뭉갤 수 없고 말이죠. 그 인간 밥 속에 주먹만한 돌 덩어리나 하나 얹어 줘요. 먹다가 이라도 부러지면 한동안 그런 짓 못하겠죠, 뭐! 아이고, 나른하다-아. 박남 시인의 꽁트칼럼(46) 2001-09-05
- 전시 클릭 이사람 - 강형구 화백 9년만의 외출, '얼굴, 개인사와 사회상' 개인전 열어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 사람이 어떤 세월을 살아왔는지를 상상한다. 그리고 단순한 얼굴을 그린다기 보다는 이야기가 있고 상황이 전제된 표정을 그린다. 즉, 인물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사상과 감정을, 그리고 사회상을 표현한다."(작가노트 중) 18일부터 27일까지 분당 삼성플라자 갤러리에서 '얼굴, 개인사와 사회상'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고 있는 강형구 화백의 얼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경우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그려, 12·12 구데타와 80년 5월 광주시민의 민주항쟁과 군의 진압이 순간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대통령이 아니라 단식투쟁하고 있는 김영삼 총재를 그려 가장 김영삼 다운 모습을 느낄 수 있고, 급변하고 있던 당시 상황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월계관을 쓰고 있는 손기정 선수의 모습에서 일제시대의 나라 잃은 슬픔을 절로 느낄 수 있다.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의 얼굴은 온화하고 넉넉한 미소로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준다. 강 화백의 그림은 극사실주의 중 '포토리얼이즘'으로 분류한다. 그림속의 인물이 금방이라도 말을 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강 화백은 사람의 얼굴 피부와 세포를 그린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역사적 순간을 포착하고 그 순간과 표면뒤에 숨겨지고 연계된 개인과 사회의 역사적 상황을 얼굴에 모두 담아냈다. 또한 강 화백은 허구적 시간개념을 작품세계에 도입했다. 이미 죽은 인물이 세월이 흐른 현재 살아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84세된 박정희 전대통령이 '내가 사리지고 너희들이 일군 대한민국이 고작 이 정도야'하며 어디선가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에서 만감이 교차한다. 76세된 마린린 먼로, 78세된 J.F 케네디의 모습 등에서 우리는 강 화백의 무한한 창조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강 화백 그림 중 30%는 자화상이다. 강 화백은 "자화상은 나를 그린 것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가 가질 수 있는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표현했다"고 한다. '강형구'라는 고유명사가 아인 강형구 대명사를 그려, 불특정 다수의 슬픔과 기쁨 고뇌 등을 대변했다고 한다. 많는 사람이 자신을 '얼굴 작가'라고 하지만 강 화백은 자신의 작업 영역을 결코 인물에 국한시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 화백은 9년만의 칩거를 깨고 외출을 했다. 강 화백의 작업 중 가장 힘든 일은 독창화 시킬 수 있는 특정 소재를 확정하는 것이다. 맘에 드는 기록사진이 없는 경우, 특정 소재를 조각해 그것을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옮긴다. 레오나드로다빈치, 손기정 선수 등이 이런 작업을 통해 완성됐다고 한다. 강 화백은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란 문구를 싫어한다. 감상자가 손으로 만져야만 감상에 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만지라고 한다. 예술의 주체는 작가나 작품 뿐만 아니라 대중이며 일반인이라는 것. 그는 "나는 반성의 결과 작품에 손을 대면 큰 일 날 정도의 위대한 것을 제작한 것은 결코 아니다"라며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예술의 전당 미술관(9월 1일~10일)과 조선일보 미술관(9월 1일~17일)에서 전시를 마친 강 화백은 분당 삼성플라자 전시회가 끝나면 미국으로 건너가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성남 백왕순 기자 wspaik@naeil.com 2001-09-20
- 김은진 . ****** 임상으로 해 보는 자가진단 (글을 맺으며) **** . [환자] A*** 남자. 45세. 관리직. 체격은 육상선수와 같이 날렵함. 일요일 20키로 조깅을 한 다음날 눈에 검은 것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이더니 멎은 다음 앞머리가 몹시 아픔. 몇 년 전부터 매일 10 키로 정도의 달리기를 하며 한 달에 한번씩 20 키로 정도의 주행을 함으로 몸에 이상이 올 하등의 문제가 될 원인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음. [본론]: 먼저 눈에 온 이상은 흑화(黑花=성냥을 켜고 났을 때 실 날 같은 검은 검불이 생기듯 그러한 검불이 눈에서 지나는 것이 보이는 증상을 말함)라는 증상이며 노인에게 흔히 오는 것으로 기(氣)가 부족하되 급작스럽게 흐름의 변화를 일으킬 때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증이며 젊은 분에게도 옵니다. 그 후의 두통은 소모성 열에 의한 것입니다. [병인(病因)]: 무리한 운동 때문으로, 평소보다 다리가 아픈데도 20 키로의 주행거리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무리하게 기가 소모 되였으며 이에 따른 두통은 소모열(마모열)이 위로 상기(上氣)가 되여 정체된 상태의 불균형으로 순환이 정상적이 될 수 없는데 반하여 하루 밤새 회복이 안된 상태 입니다. 그 증거로서 하기(下氣)시키기 위하여 다리에 침을 놓았는데(施針=시침) 정상적인 침감(針感)인 통증이 늦게 옴은 지각신경(知覺神經)등 흐름의 순발력이 부족함을 말해주는 뜻이며 이는 상실하허(上實下虛)의 상(象)입니다. 주요한 것은 환자 자신은 평소에 해 오던 운동임으로 무리했다는 자체를 수긍 하지 않지만, 예를 들어 평소에 소주 두병을 마셔도 아무 이상이 없던 사람이 어느 때는 한 병의 술에 취기가 올라와 토할 것 같은 상기(上氣)때문에 도저히 마실 수가 없는 경우가 있음을 경험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와 같이 그 환자는 평소와 같지 않은 건강상태의 몸으로 운동을 한 결과인데 그 이유는 근래에 회사 일로 인한 많은 고심(苦心)으로 심신피로가 누적되어 무리를 낳은 것입니다. 즉 가장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결과입니다. [결론]: 선천성으로 평소에 혈기가 왕성 하다던가 정력가라던가 하는 말을 듣기에는 부족한 분이며 건강을 위한 조깅으로 심폐(心肺)의 기능에는 도움이 되지만 즐기기 위한 운동이 아닌 운동을 위한 운동의 무리수가 가지고 온 결과로서, 근래 직장의 일 때문에 기혈(氣血)의 중심이 위로 이동된 상태에서 다리의 운동을 위한 기력을 필요량 만큼 아래쪽으로 보내기에는 부족하고 늦어 그만 뛰어 달라는 신체의 충고(다리의 통증)가 있었을 것이나 듣지 않고 무리한 결과로서, 이는 성능이 약한 자동차가 무리하게 원거리를 달린다던가 무리한 속도를 낼 경우 엔진이 과열(소모성 열) 되어 점차로 속력이 떨어지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달리고 난 다음에 오는 신체의 일시적인 변화입니다. [환자 B]*** 여자 42세. 공무원. 후덕하게 생긴 부인. 허리가 무겁고 양 어깨가 몹시 뻐근하고 요즘 소화가 잘 안되며 헛배가 부르다고 호소함. 근심과 걱정의 마음(울화)에서 오는 원인 때문에 일어나는 증상임으로 약물 치료로서 근본(화)을 치료해야 된다고 진단을 내렸으나 그럴만한 상황이 전혀 없다고 부인 하면서도 다행히 약을 조제하고 간 다음날, 약을 찾으러 와서 하는 말이 실은 천만원을 누구에게 빌려 주었는데 그 돈 때문에 근심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 이 역시 소위 신경성 질환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첫날에는 구태여 밝힐 필요가 없어서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인과(因果)는 분명히 있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위의 두 예를 보듯이 긴 세월 병을 길러서 생긴 중병이 아닌, 일반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는 있으나 몸의 여기저기가 아파서 불편하지만 병명도 없을 뿐 더러 누울 병도 아닌 증상은 모두가 마음에서 생긴 상하좌우의 불균형에서 오는 흐름이 많고 적음의 결과이며 아픔은 내 몸 안의 참 의사(眞我=진아)가 경계할 것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끝으로 천학비재(淺學非材)한 제가 졸필을 올린 지 이번이 50 회로서 벌써 1년이 되었군요. 어디가 아프면 어떤 약을 쓰고 어떻게 처치하라는 실속은 전혀 없이 무미건조(無味乾操)한 말들만 나열을 한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저는 학자도 명의도 아닌 무명의 임상가로서 조금이라도 한의학에 대한 인식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일념에서 제게 있는 모든 마음의 그림을 글로서 정성껏 가식이 없이 최선을 다 했다고 자부합니다. 다만 좀더 솔직한 검은 화살을 쏘지 못하고 자재한 것만은 대상이 있기 때문임을 이해 바라며 그 동안 애독하여 주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건강관리에 일조하기 앞서 마음에 작은 깨달음이 있었다면 다행으로 생각하고 감사 드리며 어딘가 설익은 열매 같았음을 부끄럽게 여기며 맺습니다. 그리고 모두 건강한 삶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001-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