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고향의 봄’ 배경은 창원 동요 ‘고향의 봄’배경을 놓고 창원과 양산 사이의 줄다리기가 창원으로 일단락됐다. ‘고향의 봄’은 아동문학가 고 이원수선생이 작사, 수많은 세월동안 애창된 것으로 배경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이선생은 양산서 태어나 1년도 못돼 창원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아홉 살까지 살았다.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봄’이었다…” 최근 창원시와 시문인협회가 중심이 돼 구성된 ‘고향의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위원장 고영조)’가 사업추진 총회를 가지며 이같은 자료를 공개했다. 추진위는 이선생의 성장기 무렵인 1912∼1921년 본적지 창원군 소답리(현 창원시 중동) 110의 호적등재 사본을 발굴, 공개했다. 또 추진위는 이선생 본인이 직접 감수한 연보 및 가족과 지인의 증언, 작품을 근거로 최종정리된 이원수전집 수록 연보 등을 동시에 내놔 최근 수년간 제기돼온 양산시 지역의 주장과 시의 배경 논란을 정확히 판가름했다. 2001-07-18
- 근조(謹弔) 북한산국립공원 경기도 양주군 교현리 북한산국립공원 경계에는 두 기의 커다란 장승이 서 있다. 지난 97년 7월 환경·산악단체들이 주최한 ‘북한산국립공원을 살리기 위한 하늘 큰굿’ 행사 때 세워져 유명한 무속인의 기도와 함께 신성(神性)이 부여된 장승들이다. 북한산국립공원을 8차선 터널로 관통하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현재 계획대로라면 이 장승들을 뽑아내고 건설된다. 장승들이 정확하게 도로공사의 실시설계노선 중앙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 97년 하늘 큰굿에 참가한 이들은 “이 장승의 죽음은 곧 북한산국립공원의 죽음”이라고 말해왔다. 물론 장승이 뽑혀나간 뒤에도 봄이면 산들꽃이 다투어 피어나고 여름이면 무서운 천둥번개가 몰아칠 것이다.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 것이고 낙엽이 진 뒤에는 하얀 눈이 잎을 떨어낸 나무들을 덮어줄 것이다. 그러나 효령대군의 후손들이 수백년 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마을이며 7월이면 온통 군락으로 뒤덮이는 교현리 뒷동산 왕손의 무덤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산국립공원 서북쪽 아름드리 숲에 깃들어 살아온 들도 매연에 찌든 숲에서 더 이상 먹이를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세월이 더 흐른 뒤에는 이 도로가 이런 가슴아픈 사연을 안고 건설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후손들이 도봉산―수락산―불암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시속 100km의 속도로 신나게 달릴 것이다. 혹 어떤 이들은 ‘선조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국립공원을 관통하는 8차선 고속도로를 놓았을까’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겠지만. 수도권의 녹색허파에 길이 4.6km, 왕복 8차선 터널이 1859년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이래 많은 논란이 거듭되었지만, 그래도 한가지 분명해진 것은 있다. 사람은 조물주가 만든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에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수많은 생물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국립공원 제도는 이런 인식의 반영이다. 인간의 손길로 인해 망가지는 자연환경과 멸종위기에 놓인 생물종을 국가가 지정하는 공원으로 묶어 보호하려는 것이다. 북한산국립공원 홈페이지는 스스로 이렇게 소개한다. 북한산국립공원은 세계적으로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으로, … 생태적으로는 ‘고립된 섬’이지만, 도시지역에 대한 ‘녹색허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으며 … 연평균 탐방객이 500만에 이르고 있어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일산―퇴계원 구간에 대한 환경영향평가가 7월 11일자로 환경부 협의를 통과했다. 98년 12월 15일 한국도로공사가 환경부에 1차 환경영향평가 협의요청을 한 지 2년 7개월만의 일이다. 그 동안 환경부는 모두 3차에 걸쳐 보완요구를 했지만, 결국 7월 11일의 최종 협의사항은 ‘국립공원 통과지역을 박스형 터널로 시공하고 그 위에 나무를 심으라’는 것으로 나왔다. 수도권의 녹색허파에 길이 4.6km, 왕복 8차선 크기의 구멍을 뚫되, 구멍 양쪽을 대롱으로 하고 그 위에 나무를 심자는 것이다. 이런 결정에 이르기까지 환경부나 도로공사 관계자들 모두가 “너무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난 2년 7개월 동안 국립공원을 지켜야 할 주무부서인 환경부가 무엇을 했는지, 이미 97년부터 본격적인 문제제기를 받았던 도로공사가 국립공원 우회노선 검토를 위해 어떤 조치를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환경단체 제시 ‘국립공원 우회노선’ 설계상 문제 없어 “지난 2년 반 동안 한국 도로건설의 최고 실력가들이 모인 도로공사가 ‘국립공원 우회노선은 없다’는 말로 환경부를 속였고, 이 문제에 대해 전문성이 부족한 환경부는 그 말만 믿고 엉뚱한 보완요구만 하고 있었다.” 지난 몇달 동안 환경부, 도로공사와 함께 시민환경단체 대표로 국립공원 우회노선 검토작업에 참여했던 어느 환경단체 관계자의 말이다. 더 말문이 막히는 것은 국내 최고의 도로 전문가들이 끝까지 없다고 주장하던 ‘국립공원 우회 대안노선’이 환경단체의 의견으로 제시되었으며, 설계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일이 이쯤 되었다면 한국도로공사는 책임있는 국가기관으로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경기북부지역의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북한산국립공원도 보존하기 위해서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의정부시 북쪽으로 우회해야 한다. 남준기 편집팀장 총 12매 2150자 2001-07-18
- 요리사 겸 요리전문 사이트 '요리나무(www.kknet.co.kr)' 운영자 - 나경택씨 서양요리 전문 20년 경력을 자랑하는 나경택 요리사는 요즘 바쁘다. 하루에 정확히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나는지도 모르게 그의 생활은 요리에서 시작해 요리로 끝이 난다. 그 이유는 1년5개월 사이에 회원이 1천명도 넘게 불어난 '요리나무'를 자나깨나 지켜야 하기 때문. 정작 훌륭한 요리는 남자의 손에서 탄생된다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두 손과 두뇌는 항상 '새로운' 준비를 위해 움직인다. 바닷가재요리와 새우, 안심요리 전문인 그는 눈빛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충남 도고가 고향인 그는 어릴 적, 장사를 하고 늦게 돌아오는 어머니와 누나들을 위해 있는 반찬으로 저녁을 지어놓는 일로 요리사로서의 기본과정을 밟는다. 물론 그때는 장래 요리사가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저녁을 해놓으면 허기와 피로에 지친 가족들은 그가 해놓은 밥을 맛있게 먹었고 당연한 일로 여겨지곤 해 기억의 구석자리쯤 들어가 있는 부분이다. 그는 서울 도심에서 '잘 나가던' 관광식당 요리사로서 첫발을 디디게 되고 그 당시 요리의 체계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던 서양요리에 대한 연구를 스스로 해나가기 시작한다. 조리법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비전도 불확실하던 남자 요리사로서의 길은 멀기만 했다. 체계적으로 정리된 책도 없어 외국의 서적을 번역해 읽었고 용어와 조리법을 밤낮으로 외웠다. 다행히 사돈중에 같은 분야에서 기반을 닦은 사람이 있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전직은 단타 매매자(데이트레이더). 요리와는 전혀 다른 길이었지만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꾸준히 파 들어가는' 그의 강성이 또 한번 제 역할을 했다. PC를 켜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 주식의 상승종목과 하락종목을 구분했다. 상한가, 하한가를 예측했고 환율동향을 살펴가며 시간마다 순매매 상위종목을 체크하고 시황속보를 분석, 매수/ 매도 타이밍을 분석하는 데 촉각을 세우는 일로 보낸 세월이 3년. 데이트레이딩 수칙 가운데 '35세 이상이거나 주식투자 경력 5년이 넘은 사람은 피말리는 데이트레이딩을 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다. 그 수칙을 따를 때가 그에게 온 것이었다. 그에게 남은 건 요리사의 명예도 수 억대의 재산도 아닌 보이지 않는 허무뿐이었다고. 재도전을 결심한 그가 처음 만든 사이트는 여성 토탈 사이트. 그러나 경험부족과 부족한 재정 여건으로 인해 다시 전문성을 갖고 만든 것이 '요리나무'다. 실패를 모르는 사람은 새 일을 시작하지 못하듯 요리나무에 대한 그의 열정은 남다르다. 현재 일산구 일산동(오토킹 옆 원더랜드 건물 5층) 유럽식 카페에서 요리사로 있는 그는 틈이 날 때마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각종 요리 레시피를 사이트에 올리고 회원들과 요리학도들 그리고 일반 이용자를 위해 정보를 올리고 리플을 단다. 마늘소스크림 스파게티 라자니아 파스타 프리마레라, 라비올리 등 이름만 들어도 근사한 프랑스 요리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고 특히 세계 면요리 코너와 세계 밥요리 코너를 통해 토마토 칼국수, 호두크림치즈 스파게티, 감자 스파게티 등 자신이 개발한 요리와 퓨전요리도 선보이고 있다. 요리나무라는 이름에 대해 "한 그루의 나무를 키우듯 정성스럽게 전문성을 갖고 이 사이트를 운영할 생각으로 지었다"는 나경택씨는 이제 원래의 그가 서있던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요리 배우기, 요리정보, 생활에 필요한 각종 정보들 그리고 깜찍한 캐릭터가 있는 코너가 그의 사이트를 채우고 있고 파티를 위한 출장요리도 하고 있다. 또한 자신만의 요리사진이나 요리비법, 캐릭터 등을 모집해 매달 선정된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이벤트도 꾸미는 중. 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으로서 두 딸의 아버지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자 노력한다는 나경택씨는 "회원수를 급히 늘리기보다 요리 레시피를 지속적으로 보충해 내실있는 사이트로 관리함으로써 무엇보다 경험이 부족한 요리학도들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해나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주부들에게 권할 만한 여름 요리로 환경문제까지 고려해 수박껍질을 응용한 요리를 예로 드는 그는 "음식은 재료도 중요하고 충분한 경험과 연습을 통한 개발이 있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라며 '겸손'을 제1의 재료로 꼽기도 했다. (문의: 019-298-2463) 이영란 리포터 dazzle77@naeil.com 2001-07-18
- 금오산의 이름을 간직한 숭산 숭산(嵩山)! 원래 금오산을 (남)숭산이라 불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지금은 칠곡군 북삼면 숭오리의 일부로 포함된 숭산 마을은 김천시 아포읍의 숭산 마을과 함께 금오산의 옛이름을 간직한 같은 이름의 2개 마을이다. 숭산 마을은 대각국사의 비석이 발견되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아포의 숭산마을은 금오산 자락은 아니지만 ‘주천자 탄생 설화’를 간직한 마을이다. 금오산 일대에는 중국 명나라의 건국시조인 주원장(朱元璋·1328년∼1398년)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중국의 천자가 한국 땅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허황된 이야기이다. 그러나 주천자 탄생담은 한국의 여러 곳에서 전승되었다. 인물이 많이 난다는 금오산 명기설(名基說)의 확고한 바탕으로 작용하고 있다. ● 총을 맞은 대각국사비 선봉사가 폐허가 되어 대각국사비는 오랜 세월 땅에 묻혀 있었다. 숭산마을 어느 주민이 현몽하여 대각국사비를 찾았다고 한다. 그 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비석에는 총탄 자국이 남게 되었다. 수 백년 땅 속에 묻혔다가 빛을 본 뒤 얼마 만에 총알받이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이겠는가. 또 하나 알수 없는 일은 천태종의 시조의 유적이 있는 곳인데도 천태종단에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연전에 만난 선봉사 주지께서는 천태종의 성지의 모습을 갖추는 불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 일제(日帝)가 베어간 당산목 수점마을 하당(下堂·아랫당), 갈항마을 하당이 신목(神木)과 조산무지로 이루어졌듯이 숭산마을 입구에 있는 하당도 돌무더기의 흔적과 나무가 있다. 원래 길 양쪽에 두 그루의 거대한 나무가 있었는데 이제는 작은 나무 한 그루만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 그 연유를 들어보니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일본군들이 배를 만드는 재료로 쓸려고 나무 한 그루를 베어 갔다. 서슬 퍼런 왜놈들 등쌀에 다들 숨죽여 살던 시절이었지만 주민들은 칠곡군청으로 달려가 거세게 항의하고 사과를 받았다”고 한다. 잊혀져 가는 우리 지역 근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누가 언제부터인지 알 수가 없으나 민중의 믿음의 체계로 자리 잡았던 이른바 민중신앙은 특히 근현대에 갖가지 이유로 훼손되고 제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인근에서는 보기 드물게 감나무가 흔한 숭산 계곡의 초겨울 아침 풍경은 안개가 서려 신비감과 아름다움이 넘친다.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 경북 칠곡군 북삼면 숭오리(崇烏里) 선봉사에 있는 고려시대 대각국사의 화강석 비석(보물 제251호)이다. 귀부대석(龜趺臺石) 크기 1.97m, 너비 1.82m, 이수 높이 0.56m. 비석의 조형은 간략하여 복련(覆蓮·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과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을 각출(刻出)한 직사각형의 대석 위에 비신(碑身)을 세웠고, 둘레에 당초문(唐草紋)을 새긴 개석(蓋石)을 얹었다. 비문은 표면과 이면에 모두 있으며 제액(題額)은 ‘천태시조대각국사비명(天臺始祖大覺國師碑銘)’으로 지은이는 임존(林存), 글씨는 승린(僧麟)의 전서(篆書)이다. 권이문 금오문화연구소 연구원 2001-07-18
- 풍류가객 농암 이현보 - 제3편 문학과 풍류 농암은 어부가서(漁父歌序)에서 “(아이가) 노래를 얻어 보이기에 내가 살펴보니 그 가사가 한적하며 의미가 깊고 멀어, 읊고 노래함을 여유롭게 할수록 세상 공명(功名)에서 벗어나고 다스리며, 표표하게 세상과 거리를 둘 수 있게 하는 드러나지 않는 뜻이 이었다. 이를 얻은 후에는 전에 즐겨 노래하던 가사(歌詞)는 모두 버리고 오로지 이에 뜻을 두었다” 라고 적 고 있다. 농암은 향년 83세에 어부가를 지어 불렀다. 당시의 평균연령을 계산할 때 그가 매우 장수하 였다는 점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세월을 격하여서 어부가만을 애창하였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 무엇이 농암에게 그 전에 전해오던 어부가를 접하고는 한시나 가사 등을 즐기 던 것은 잊고 어부가 심취하게 하였을까. 당대의 많은 명현거유들은 모두가 한시에 주력하 였던 점에 비추어 이러한 농암의 자족어린 문구는 청량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문이다. 농암은 전해오던 어부가 중 단가 10장은 5장으로 장가 12장은 9장으로 개작한다. 단가 5장 의 첫수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중에 시름없으니 어부의 생애로다/ 자연은 시름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마음의 파도와 물결이 일어 늘 걱정의 배를 띄워두고 이리저리 고민 하고 갈등한다. 그러나 어부의 생애는 그렇지 않다. 파도와 물결은 늘 일지만 그것이 시름으 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물결로 인하여 더욱 어부를 어부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둘째수에는 /십장홍진(十丈紅塵)이 언매나 가렸는가/ 강호에 달밝아 오니 더욱 무심하여라/ 하였다. 먼지에 가려진 세상, 티끌과 같은 세상이 나를 얼마나 가렸던가? 세상의 모든 풍진 은 사실 그 자체로 떠 다니는 먼지와 같다. 털면 다른 곳에 떨어지고 때로 합쳐서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낸다. 그것을 털어낼 때 세상을 밝아오고 그것에 무심함이 오히려 깨끗하다. 농암은 단가 5장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두어라 내 시름 아니며 세상을 구제한 현인이 없 으랴/ 어쩌면 세상은 개인의 올바르다고 판단되는 주장에 의하여 더욱 혼탁하여 질 수 있 다. 농암은 그대로 두라고 말한다. 이러한 어부가를 노래로 불렀다는 것은 또하나의 의미를 새기게 한다. 농암은 어부가를 지 을 때 한시로만 지을 경우 노래로 부를 수 없어 한자와 국어를 함께 사용하여 사람들이 노 래로 부를 수 있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사실 어부가는 노래로 전해왔으나 농암에게 전해 질 때는 가사만 전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농암은 노래로 이를 복원하고자 하였을 지 모른다. 그러나 농암이 노래로 불렀다는 중요성은 단순히 노래방식이 끊어진 것을 이었다는 의미보 다는 당시로서는 천시받던 국어를 함께 사용하여 의미론적 전달과 노래의 흥취를 동시에 도 모하였다는 점에서 농암의 풍류와 자유로운 예술정신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농암은 어부가를 주로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면서 불렀는데 이는 농암이 흥취와 멋을 한 껏 드러내는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농암은 배를 타고 노래를 부르고, 낙동 강, 분강에 대한 수려한 경치를 만끽한 뒤 바위에 배를 대고 동승한 사람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어부가를 부르고 인생의 여유로움을 향유한 것이었다. 농암의 어부가는 이후 조선시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경산 이한진(京山 李漢鎭)의 속어부사(續漁父詞) 병와 이형상(甁窩 李衡祥)의 창보사( 父詞)등으로 이어졌고, 고산 윤선 도(孤山 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탄생하게 만든다. 소위 4대 사회를 경험한 그는 돌아와 그의 삶의 마지막을 어부가와 함께 보낸다. 수많은 삶 의 궤적에서 자신의 삶과 마음을 담아줄 것은 결국 그 무엇도 아닌 어부가 였던 것이다. 그 의 삶에서 어부가가 던지는 화두에 공감하였던 것이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사실 인간은 늘 자연에 있다. 언제나 자연에서 삶의 영위하지만 그러나 무엇이 자연인지 모른다. 필자 역 시 자연성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농암은 어부가에서 그 자연성을 발견한 것 같 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의 마지막을 정리한 것이다. 농암의 어부가는 이후 조선시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권두현 민예총 안동지부 사무국장 2001-07-16
- 성실함으로 승부하는 여성공직자의 사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땅의 절반, 여성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더욱 분발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여성권익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3일 녹조근정훈장을 수상한 정숙영 경기도 여성정책과장의 수상소감이다.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와 권리향상, 경기여성지도자 양성 등에 기여한 공로로 이날 공무원 중에는 유일하게 녹조근정훈장을 받았지만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주변의 평가는 우선 ‘그럴만하다는 것’으로 쉽게 합의된다. 동료들은 물론이고 경기도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바라보는 정 과장의 모습은 우선‘성실한 사람’으로 대변된다. “고양시청에 근무하면서 야간대학에 다니고, 두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 방송대학을 다녔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즐겁게 했어요” 주경야독으로 일관한 학업은 피해여성에 관한 문제로 석사학위를 받기까지 계속됐지만 아직도 쉼 없이 계속된다. 79년 외국인 자동차등록업무를 맡으면서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주지를 수원에서 외국인이 거주하는 안양 옆집으로 이사했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이렇듯 정 과장의 30년 공직생활에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에 거침없는 행동으로 수없이 많은 일화가 따라다닌다. 일화들은 우선 그 자신이 차별받는 여성 공직자라는 자각에서 비롯됐다. “여성은 공무원채용 후 주민등록과 전·출입업무, 등본업무 몇 년씩 하고나면 10년 세월이 가지요. 다음부터는 기획이 불가능하고, 진급에서도 뒤지게 되지요” 정 과장은 우선 자신의 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차별받고 싶지 않았고, 자신도 있었다. 76년, 그 때만해도 쉽지않은 분위기였지만 여성공무원에게도 교육훈련의 기회를 달라고 정식으로 건의했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사직서를 쓰는 일도 감행했다. 이후부터 여성공직자에게도 교육기회가 부여되고 민원실을 벗어난 부서에도 근무할 수 있게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주사로 승진하면서 남성전유물로 여겨왔던 공무원교육원의 직무교관과 사감 등을 거치면서 줄곧 새로운 선례를 만들어 왔다. 최근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여성에 대한 편견의 벽은 너무 높다. “UN에서 발표한 여성권익지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70개국 중 63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 낙후돼 있어요. 국회의원 중에 여성은 5.9%, 경기도 의회 3.1%, 기초의회는 1.9%에 머무르고 있어요. 피해여성들을 위한 복지수요도 만만치 않은 실정입니다” 정 과장은 현재 47.3%에 불과한 여성의 경제활동인구가 90%는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5.5%불과한 5급 이상 여성공무원을 확대하는 일도 시급하다고 믿는다. 지난해에는 각종 위원회의 여성참여를 34%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여성할당제에 대해서는 반대다.‘여성권익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정흥모 기자 hmchung@naeil.com 2001-07-09
- 김종회교수의 이산가족 이야기 (38) "어려서 집을 나가 늙어서 돌아오니 / 말소리는 변하지 않았으되 머리털이 희어졌구나 / 아이들이 마중 나와 나를 맞으면서 / '손님, 어디서 오셨습니까?'하고 묻는구나." 덧없는 세월, 나이만 늘었구나 '하지장(賀知章)'의 옛 시 한 구절이다. 누가 있어 저 가는 세월을 막을 것이랴. 청춘의 젊은 나이에 곧 돌아오마 손짓하고 고향을 떠나와서, 덧없는 세월에 이제 백발만 성성한 실향 이산가족들의 심사가 꼭 저 시 구절만 같다. 내 살아 생전에 두고 온 가족을 한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바깥에 보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도시 평양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 태를 묻고 내 잔뼈 굵은 그 고향산천을 다시 밟아볼 수 있을까? 고향으로 돌아간들 거기 누가 남아 있을 터이며, 그 가운데 나를 알고 반가이 마중해 줄 사람이 있기라도 할 것인가? 20년에 가깝도록 남북 이산가족 문제의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해 오는 동안, 필자는 그 자신이 '고희'를 넘긴 이산가족이면서도 그가 고향에 남겨놓은 노부모의 생존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산가족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한 분은 평북 신의주가 고향인데, 그분의 나이 칠십 중반이었으며 그 부모는 모두 백 열살 어림이라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보아 생존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형편인데도, 그분은 전혀 수긍하지 않았다. 반드시 살아 계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 확신이 너무도 장엄한 형국이라 어느 누구도 그에 시비를 걸지 못했다. 백세 넘은 부모 아직 살았을까 내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돌아가실 수 있느냐라는 억지 보다는, 생전에 얼굴 한번이라도 뵐 수 있도록 반드시 살아 계셔야 한다는 염원이 더 강한 경우였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완강한 갈망을 버리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제3국, 그래야 중국을 통해서인데, 어찌어찌 남은 가족 중 여동생과 서신 교환이 되고 부모가 언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된 것이다. 그 현장에 함께 있던 필자는 그분의 눈자위가 창졸지간에 붉어지고 두 눈을 가린 손바닥 아래로 철철 흘러내리던 눈물을 잊지 못한다. 목소리가 커야만 통곡이 아닌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함께 울었다. 그로부터 늘 하던 머리 염색도 포기하고 연세에 비해 튼실하던 활력의 맥을 놓아버린 채 갑자기 칠순 노인으로 황급히 되돌아 서버린 그분의 사정이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어찌 그분의 경우뿐이랴. 이 땅에는 그처럼 한 편의 소설 같은 사연을 안고 사는 이산가족들이 여전히 수백만에 달하는 것을. 현재 정부와 대한적십자사 등에서 보유하고 있는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의 숫자는 11만6000여명이다. 왜 이렇게 전체 이산가족의 숫자에 비해 신청자의 숫자가 미미하냐 하면, 아직도 많은 이산가족들이 북에 있는 가족들에게 위해가 있을까봐 신청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 중국 등 제3국을 통해 가족을 찾을 수 있는 연줄을 가진 이들은 또 그 쪽을 택했다. 그리고 11만6000명이란 숫자 가운데도 이제는 도저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니, 물리적 시간의 막바지에서 '초읽기'에 들어간 셈이니, 가족의 안위보다는 필생의 숙원을 꺼내놓는 것이 낫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동반한 사례가 허다하다. 이 세월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 지난 7월2일 통일부에 따르면 그 신청자의 11%에 해당하는 1만2000여명이 사망했다는 통계가 나왔다. 이는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에서 행정자치부의 주민전산망을 통해 신청자의 인적 사항을 확인한 결과이다. 그러기에 신청서를 내지 않은 고령 이산가족들의 실상까지 포함하면, 남북 이산가족의 재회문제는 정말 '초읽기'의 다급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전산으로 입력되어 있는 신청자 가운데 고령 생존자는 100세 이상 31명, 90대 1777명, 이들을 포함한 70대 이상 생존자는 5만9380명으로 조사됐다. 이들이 이 땅에서 누릴 생명의 날이 길어야 얼마일 것인가. 미상불 이들의 한 맺힌 소원을 풀어주는 것은 굶어 가는 동포를 살려내는 일 만큼이나 절박하다. 남과 북의 지도자들은, 또한 뜻 없는 정치적 욕심으로 매일매일 드잡이질이나 하고 있는 이 나라의 여야 지도자들은, 이 엄숙한 세월의 소리를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 후세의 사필에 의해 애타는 인지상정과 민족적 소명을 외면하고 한 시대의 지도자로서 직무를 유기했다는 평가를 면하려면 말이다.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사무국장 /경희대 교수/karts@hanmail.net 2001-07-08
- 성실함으로 승부하는 여성공직자의 사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땅의 절반, 여성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더욱 분발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여성권익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3일 녹조근정훈장을 수상한 정숙영 경기도 여성정책과장의 수상소감이다.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와 권리향상, 경기여성지도자 양성 등에 기여한 공로로 이날 공무원 중에는 유일하게 녹조근정훈장을 받았지만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주변의 평가는 우선 ‘그럴만하다는 것’으로 쉽게 합의된다. 동료들은 물론이고 경기도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바라보는 정 과장의 모습은 우선‘성실한 사람’으로 대변된다. “고양시청에 근무하면서 야간대학에 다니고, 두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 방송대학을 다녔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즐겁게 했어요” 주경야독으로 일관한 학업은 피해여성에 관한 문제로 석사학위를 받기까지 계속됐지만 아직도 쉼 없이 계속된다. 79년 외국인 자동차등록업무를 맡으면서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주지를 수원에서 외국인이 거주하는 안양 옆집으로 이사했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이렇듯 정 과장의 30년 공직생활에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에 거침없는 행동으로 수없이 많은 일화가 따라다닌다. 일화들은 우선 그 자신이 차별받는 여성 공직자라는 자각에서 비롯됐다. “여성은 공무원채용 후 주민등록과 전·출입업무, 등본업무 몇 년씩 하고나면 10년 세월이 가지요. 다음부터는 기획이 불가능하고, 진급에서도 뒤지게 되지요” 정 과장은 우선 자신의 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차별받고 싶지 않았고, 자신도 있었다. 76년, 그 때만해도 쉽지않은 분위기였지만 여성공무원에게도 교육훈련의 기회를 달라고 정식으로 건의했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사직서를 쓰는 일도 감행했다. 이후부터 여성공직자에게도 교육기회가 부여되고 민원실을 벗어난 부서에도 근무할 수 있게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주사로 승진하면서 남성전유물로 여겨왔던 공무원교육원의 직무교관과 사감 등을 거치면서 줄곧 새로운 선례를 만들어 왔다. 최근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여성에 대한 편견의 벽은 너무 높다. “UN에서 발표한 여성권익지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70개국 중 63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 낙후돼 있어요. 국회의원 중에 여성은 5.9%, 경기도 의회 3.1%, 기초의회는 1.9%에 머무르고 있어요. 피해여성들을 위한 복지수요도 만만치 않은 실정입니다” 정 과장은 현재 47.3%에 불과한 여성의 경제활동인구가 90%는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5.5%불과한 5급 이상 여성공무원을 확대하는 일도 시급하다고 믿는다. 지난해에는 각종 위원회의 여성참여를 34%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여성할당제에 대해서는 반대다.‘여성권익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정흥모 기자 hmchung@naeil.com 2001-07-04
- 새책소개 바다로 간 게으름뱅이 정수복·장미란 지음 / 동아일보사 펴냄 / 336쪽 / 10,000원 단전호흡 참선 명상 요가 등 심신수련법이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빠르고 분주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수련 활동을 통해 긴장을 풀고 생활에서 부딪치는 사건들을 평온하게 받아들여 내면의 평화를 얻으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미국 벤처기업가들에까지 파급되고 있다. 이 책은 문명전환이라는 거대담론을 딱딱하고 형식적인 글이 아니라 문학적이고 아름다운 문체로 제시하고 있다. 문명전환이라는 말 자체가 전지구적 차원의 의미를 갖는 커다란 일이고 단시일 안에 이루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방안은, 큰 변화는 결국 삶의 현장에서 기존 삶의 양식을 서서히 바뀌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계간 교육비평 교육비평사 엮음 / 교육비평사 펴냄 / 318쪽 / 9,000원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묵직한 비판 이번 교육비평 여름호에는 「학부모운동의 ‘홀로서기’를 위하여」란 특집과 「관료들이 말아먹는 교육개혁」, 「아이들은 왜 배움에서 도주하는가」, 「차미리사 선생의 민족교육운동」 등 다양한 읽을거리를 담았다. 교육개혁을 통해 양질의 교육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제공된다는 약속과 달리 교육은 위기에 처했고,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다. 교육관료들은 ‘학교’를 ‘민간재’로 보고, 교사와 학생이 시장원리에 따라 경쟁하고 생산성을 향해 매진할 것을 주문한다. 교육정책을 ‘독점’하고 ‘거래’함으로써, 공교육을 위기에 빠뜨린 것도 이들에 의해서라고 교육비평은 비판한다. 교실붕괴위기, 학력저하 논란에 대해서도 교육비평은 학력저하 문제가 그저 학생들의 평균적인 학력저하로 끝날 게 아니라, ‘학력차이’로 인한 사회계층의 이분화, ‘교양의 해체 사태’ 등 사회문제가 발생할 것이라 경고한다. 이 책이 교육주체들의 건강한 고민과 만나는 단단한 정론지가 될 것을 기대한다.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 프레데릭 불레스텍스 지음 이향·김정연 옮김/ 청년사 펴냄 / 336쪽 / 12,000원 이 책은 프랑스가 자신의 반대편 극점에 놓인 나라, 한국에 어떤 이미지를 가져왔는가에 관해 통시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당시의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프랑스가 활자로 처음 만나게 되는 한국에서부터 주변을 맴돌며 관찰하는 시기, 제국주의 진출로서의 첫 접촉, 문호개방 뒤의 한국 여행을 통한 체험, 한국인들의 삶의 영역까지 들여다보는 직접 체험, 국제적 관계 변화와 격동기를 거치면서 변화하는 세계 속의 한국의 모습, 그리고 남과 북. 80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친 방대한 자료의 검색과 정리를 통해 저자는 한국 이미지의 양면성과 그 변화에 대해 기술한다. 장마다 등장하는 소제목들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르게 비치는, 하지만 본질은 전혀 다르지 않은 오랜 전통과 문명을 지닌 우리 민족,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은 장기적인 연구과제를 위한 출발점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제우스의 이름으로 에리히 폰 대니켄 지음 박종대 옮김 / 백의 펴냄 / 360쪽 / 12,000원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간된 신화나 고대 문명사에 관한 책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질 수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현대적 감각에 맞게 독자들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이 그 하나라면, 사라져버린 고대문명의 흔적을 찾아 그 미스테리들을 풀어놓는 책들(신의 지문, 금지된 신의 문명, 옛 문명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등)이 있다. 각박해지는 사회현실에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초고대문명의 흔적을 찾아 지구촌 곳곳을 여행하거나, 인류의 상상력의 보고인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넓히는 책들인 셈이다. 이 책의 저자 대니켄은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의 이야기들을 한 권의 책으로 읽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이야기꾼이다. 그는 그리스와 고대 문명의 시원을 기록한 신화나 초고대문명의 신비한 흔적들을 연결하여 자기만의 고유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고려무인이야기1 이승한 지음 / 푸른역사 펴냄 / 388쪽 / 12,000원 역사에서 좋은 시대,나쁜 시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 연구에서 도덕적 판단이나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조심해야할 일이다. 무인집권 시대의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그 시대 무인집권자들이 좋은 사람들이었는지 혹은 나쁜 사람들이었는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해후할 뿐이다. 이 책은 무인정권이나 집권자에 대해 예찬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폄하하려는 것도 아닌 고려 무인집권시대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 있다. 고려 무인집권시대는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궁금증을 남기지만, 학계의 연구업적은 일반인들에게 너무 멀리 있다. 인간은 역사변화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상 가장 독특한 시대인 무인집권시대, 국왕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100년 동안이나 무인정권이 계속되었는지 의문을 푸는 데 주력하고 있다. 좋은 미국, 나쁜 미국, 멍청한 미국 빌 오릴리 지음 손희승 옮김 / 서울문화사 펴냄 / 321쪽 / 9,800원 에미상을 두 차례나 받은 미국 방송 저널리스트 빌 오릴 리가 실랄하게 파헤치는 미국, 미국인, 미국살이. 이 책은 미국 팍스 뉴스 채널에서 빌 오릴 리가 진행하는 시사토크쇼 (오릴리 팩터)의 주제들 가운데, 미국인의 삶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 요소들을 뽑아 놓은 책이다. 미국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소들 가운데 계급, 돈, 섹스, 대중매체, 약물과 술, 직업, 데이트, 배우자, 자식, 유명인사, 정치, 인종, 종교, 성공, 우정 등을 뽑아 미국, 미국인, 미국살이를 실랄하게 파헤친다. 부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를 영속화시키려는 기득권 세력에 대해 두려움 없이 비판을 가하며, 클린턴과 힐러리를 필두로 사회운동가, 정교쥭 정신적 지도자, 대중 스타 등 미국을 움직이는 ‘쟁쟁한 분’들을 화끈하게 도마 위에 올리고 있다. 2001-06-12
- 사라진 마을, ‘성(城)안’ 마을의 역사도 유기체의 삶과 유사하다. 마을이 개척되고 성하다가 쇠퇴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잊혀져 버릴 마을들이 있다. 우리 구미에는 공단 조성으로 이미 많은 마을들이 사라졌다. 최근에는 택지개발, 4공단 조성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고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오늘 찾아보는 마을은 금오산 정상아래 내성(內城) 안에 자리 잡았던 성안 마을이다. 적게 잡아도 수 백년 동안 사람들이 살던 성안마을이 사라진 것은 70년대이다. 당시 내무부는 화전민정리사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전국의 수많은 산골과 섬에서 독가촌들이 철거되었다. 해발 약 800m, 산 속의 분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마을이 사라졌다. 조선시대인 1789년의 기록에 금오산의 원호(元戶)가 180호이고 451명이 살았다고 하였다. 1832년에 나온 〈청구도〉에는 내성안 마을에 40호가 거주한다고 하였다. 70년대까지 마을에 살았던 분들은 지금의 내성 분지만을 성안이라 하지 않고 외성 안은 모두 성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광복을 전후해서는 10여 호가 살았고 전쟁기간을 거치면서 주둔한 미 공군 통신대와 국군의 주둔은 다시 한번 이 성안마을에 활기를 가져왔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통신대와 관련된 일을 하던 임시고용인들이거나 출퇴근자였고 군대가 철수하면서 함께 산을 내려갔다. ● 성안의 감자술 성안마을의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다. 벼농사도 시도 해보았지만 기후가 맞지 않았다. 오직 밭농사에만 의존하였다. 오늘날 고랭지 채소에 해당하는 성안 배추는 일품이었다고 한다. 밭작물의 소출을 지게에 지고 내려와 쌀과 바꾸어 먹기도 하였다. 약초를 캐서는 약목, 대구 등지로 내다 팔기도 하였다. 부족한 쌀을 대신하여 감자를 함께 넣어서 막걸리를 빚었다. 이것이 성안 감자술이다. 강원도 평창 등지의 감자술과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성안 감자술을 맛본 이들은 그 풍미를 매우 칭찬하는 경향인데, 해발 800m에서 먹는 술이 맛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그 추억을 못 잊어하여 한번은 무형문화재로 지정신청을 하기도 하였다. ● 외로운 중수송공비(重修頌功碑) 지금 성안에는 ‘금오산성중수송공비’만이 성안 분지를 지키고 있다. 대원군의 섭정 때에 세운 이 비문의 내용에는 누각만 해도 100여 칸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 많던 건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이전부터 금오산의 정상부와 내성 분지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진남사란 절을 비롯하여, 군량미와 군기를 보관한 창고, 성문루, 장대 등 마을 외에도 군사시설과 사찰 시설들이 있었다. 채 100년이 못된 세월에 쓰러지고 뜯겨 나가고 그 유지만 겨우 흔적을 남기고 있다. ● 소가 오르내리는 길 마을 사람들이 장을 보거나 산 아래와 연결되는 길은 지금과 같이 남통동으로 통하는 길과 지경리(김천 남면)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경작을 위해 이용되는 소는 이 가파른 두 길로는 다니지 못한다. 금오산 서쪽 자락에는 수점마을이 있다. 수점의 남쪽에는 그 유명한 갈항사지가 있는 갈항마을이 있다. 그 중간에 우장마을이 있다. 금오산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우장을 ‘쇠바탱이’라고 불렀다. 이 쇠바탱이에서 금오산을 오르는 길은 비교적 완만하다. 소가 걸어서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밭을 갈기 위해 빌린 소를 끌고 성안마을로 들어 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길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금오산성 수축과 위한 군수물자를 날랐을 것이다. 전시에 병참기지였던 금오산성에는 인근 군현에서 많은 군수물자를 비축해 두었다. 조선시대에 그린 지도에서도 금오산성 내에 숱한 창고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쇠바탱이-성안마을은 수송의 주요 루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 상상한다. TV 드라마 ‘여로’가 유행하던 시절, 부상마을(김천 남면)과 그 인근 주민들이 금오산 정상에 있는 통신대에 TV를 보기 위해 드나들었던 길도 이 길이라고 한다. 2001-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