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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회교수의 이산가족 이야기 (38) 1990년 8월에서 9월에 걸쳐서의 일이니,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에서는 남북 이산가족의 재회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대표단을 구성하여 국제기구를 순방한 적이 있었다. 국제기구에 가족재회 지원촉구 UN 사무총장과 인권위원회, 국제인권연맹, 국제적십자위원회 등 뉴욕과 스위스에 있는 국제인권기구들을 방문하고 돌아온 노 대표들은 모두들 혀를 찼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이, 그 국제기구의 관계자들이 우리 남북 이산가족의 비극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선 한국 이산가족 전체의 숫자가 1000만에 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실상을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그 천문학적인(?) 숫자개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한국의 이산가족들이 반세기가 지나도록 생사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서신 한 장 교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시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여질 때만큼 당혹스런 경우가 있을까? 말도 서툴고 길도 서툰 곳을 찾아간 대표들은 그 당혹스러움 가운데서도 가장 직접적인 자신의 사례를 적시해가며 성의를 다한 설명을 전달했던 것이다. 그러자, 나중에는 그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손을 맞잡으며, 이 세기적 비극의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한국의 이산가족이 1천만이나? UN 인권위원회나 국제인권연맹에는 매일 많은 지원요청이나 진정서가 접수되는데, 그 중 단 한 명의 인권문제에 관한 것도 한 건이요 우리의 경우처럼 1000만에 달하는 엄청난 인원의 인권문제에 관한 것도 한 건으로 분류된다. 물론 접수 건수의 물량이 사건의 중요성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다면 자주 이 문제의 심각성을 국제사회에 환기하는 것이 좋다. 필자가 20년 가까운 세월을 이산가족 문제에 관계하면서 그간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의 이름으로 발송한 국제협력 서신의 건수를 점검해 보니, 무려 3000통을 넘어섰다.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느냐고? 필자는 말할 것이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한국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국제적 인식이 오늘의 수준에 오기까지, 이 민간차원의 국제협력활동이 미친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지 않은가, 가랑비에도 마침내 옷이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서신들을 통해서 우리는 끈질기게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한국 이산가족의 문제는 한국민 만의 책임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었던 세계 열강이 공동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라고. 인류의 양심과 국제정의가 살아있다면, 이 20세기 최대의 비극, 집단적 혈육이산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함께 나서주어야 한다고 호소했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다시 그와 같은 논리적 강변과 눈물어린 호소를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이 터졌다. 곧 북경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서 난민지위와 망명을 요구하다가 난민지위를 얻지 못하고 제3국으로 추방됐다 서울로 온 장길수군 가족 사건이다. 차제에 일반적 기준·관례 세워야 이들 가족 사건은 첫째로 철저하게 국제관계의 맥락 속에서 해결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다음의 경우를 위해서라도 국가의 외교적 역량을 동원하고 민간의 호소력도 십분 활용해서 중국 그리고 이의 처리를 면밀히 주시한다고 한 미국 관계자들에게 어필하는 것이 좋겠다. 할 수 있으면 북한과도 이런 문제만큼은 양해를 요청하는 시도를 생각해 보면 어떻까. 둘째로 이들 가족 사건은 탈북자의 난민지위 획득을 하나의 쟁점으로 올려 놓았다. 일찍이 북한의 거물이었던 황장엽씨가 '특수한 예'로 규정받아 제3국을 통해 한국에 왔고, 장씨 가족이 이 정도의 주목을 받은 것도 이들 자신이 세계 매스컴의 이목을 끌어낸 성과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로써 '특수한 예'를 적용받은 것이지만, 지금 중국에 널려있는 수많은 탈북자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현안 전체를 바라보는 대책이 있어야 할 시점이다. 셋째로 탈북 동포의 수용 문제는, 납북자나 국군포로의 문제와 같이 우리의 국가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역사과정을 조금만 더 포괄적인 눈으로 본다면 저들을 저렇게 방치하는 것이 일종의 직무유기임을 주장할 수도 있다. 따라서 1회성의 대증요법, '특수한 예' 따위가 아닌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 점을 강력하게 국제사회에 제기하고 또 호소해야 마땅하다.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사무국장 /경희대 교수 karts@hanmail.net 2001-07-01
- “축산폐수로 살 수가 없어요” “이게 어디 사람사는 곳입니까. 시커먼 축산폐수가 하천을 뒤덮어 악취때문에 숨쉬고 살수가 없어요. 어디 그뿐입니까. 몰려드는 모기와 파리떼로 한낮에도 문을 열수가 없어요. 이젠 지하수에서도 폐수가 흘러들어 물을 끌어다 댔던 논에서는 어린 모들이 견디지 못해 모두 죽어버렸어요. 한숨만 나옵니다. 어쩌다 고향땅이 이지경으로 변했는지….”안동시 녹전면 서삼리 주민들이 할말을 잃었다. 물만 보면 넌저리가 난다. 8년의 세월동안 인근 와룡면 서현리의 서현양돈단지에서 배출되는 축산폐수와 ‘전쟁’을 치르다 보니 하천 물소리만 들어도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건 긴 한숨과 타다만 애간장뿐이었다. 그동안 관계기관에 수차례 민원도 넣어보고 항의방문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두가 예순을 넘은 노인들이지라 거동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고향땅이 썩어가는 것을 쳐다만 볼 수 없어 노구를 이끌고 안동시를 찾아가 대책을 세워달라고 호소도 해봤지만 메아리친 건 ‘좌절감’이었다. 7일 기자가 서삼리 일대를 방문했을 때도 주민들은 여전히 인근 축산단지에서 흘러나오는 축산폐수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가뭄으로 목마른 논에 물을 대기위해 이곳저곳 관정을 박고 지하수를 끌어올리지만 그때마다 올라오는 건 시꺼멓게 오염된 폐수뿐이었다. 상태는 축산단지로 향할수록 심각했다. 거의 모든 논이 폐수에 오염돼 어린 모들이 시들어가고 있었다.주민 최종근(62)씨는 “그나마 이 똥물도 없어 농사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라고 이 똥물을 끌어다 사용하고 싶겠습니까. 울며겨자먹기식이죠. 그러나 이 똥물로 시들어가고 있는 어린 모들을 볼 때면 억장이 무너집니다”라며 연신 담배를 피워물었다. 논바닥에 뿌려진 물은 육안으로도 오염정도가 심각했다. 논바닥 곳곳에는 검붉은 기름띠와 하얀 거품들이 즐비했고 악취도 심해 코를 막지않고서는 근처를 지날 수가 없었다. 논 옆으로 흐르는 개울에서는 시커먼 축산폐수들이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닥이 보이질 않았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해둘 수가 있을까’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오랫동안 마을주민을 대표해 축산폐수와 씨름했던 권오현(74)씨는 “어찌 이 심정을 말로 다 표현합니까”라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수차례 언론에서 찾아와 취재도 다녀갔지만 달라진게 없다는 듯 불신감이 팽배했다. “농사 망하는 걸 멀쩡히 눈뜨고 보는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먹는 물도 이젠 겁이 나서 못 먹겠어요. 시에서 지하수를 끌어올려 식수로 사용하고는 있지만 2년이 넘은 지금까지 검사한번 안했어요. 죽지못해 먹는 수밖에 더 있습니까”라며 한숨만 내쉰다. 더욱이 이 축산폐수가 안동댐으로 여과없이 그대로 흘러가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시에선 주민들의 거듭된 항의로 최근 1억7000여만원의 예산으로 3.75km에 이르는 배수로 공사를 했지만 이 배수로는 서산리 마을을 우회하도록 설계만 되어있을뿐 안동호로 흘러들어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서현양돈단지는 지난 92년 안동시 와룡면 서현리 일대 2만7000여평의 부지에 총사업비 60억원의 막대한 재원이 투입돼 조성됐다. 3년 세월 끝에 지난 95년 완공돼 현재는 8농가가 3만여두의 돼지를 사육하면서 하루 평균 120여톤에 이르는 축산폐수를 방류하고 있다. 이 단지에선 지난 96년 4차례의 축산폐수유출사고가 발생해 1km 떨어진 인근 안동댐 상류지역으로 유입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당국에서는 항구적인 대책이나 책임소재 규명없이 땜질 수습으로 일관했다. 주민들은 “폐수처리문제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을 경우 폐수로 인한 농업용수오염과 안동댐을 죽음의 호수로 만드는 대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동 주진영 기자 jjy@naeil.com 2001-06-07
- <클릭! 이사람> (주)대한세븐 회장 김남숙 20년이 넘도록 건달의 세계를 살아온 여자 김남숙(47)씨가 건강한 물’을 만들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바꿀 수 없지만 깨끗한 물로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신념하나로 건강한 물만들기에 나선 것이다. 70년대말 7공주파를 조직, 밤의 세계에서 악명을 떨친 ‘여두목’ 김남숙. 여자의 몸으로 건달세계에서 ‘큰누님’ ‘왕언니’로 불리운 건 김씨가 처음이다. 12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전국의 수많은 건달동생들이 머리를 숙이고 큰 누님으로 대접하고 있다. 스무살 나이에 결혼을 하고 7년 후 췌장암으로 남편을 잃은 김씨에게 남겨진 것은 어린 두 아들. 시댁이 순천에서 알아주는 부자였지만 남편없는 시집살이로 마음고생이 심해 친정인 강릉으로 왔다. 방 3개짜리 룸싸롱을 경영하면서 술장사를 시작했고 나이트클럽으로 발전했다. 장사가 잘되자 ‘뒤를 봐주겠다’는 깡패들을 무시한 죄로 업소는 박살이 나고 종업원들은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여자의 몸이지만 진정한 건달이 뭔지를 보여줘야 겠다는 생각에 태권도 도장을 찾아다니며 여자들로만 멤버를 모았다. 몸도 재빠르고 배짱도 두둑한 여동생들을 골라 모은 것이 ‘7공주파’였다. 이때부터 밤의 전쟁은 시작되었고 상호 보복이 반복되었다.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다 칼을 맞아 얼굴이 망가지고 암매장을 당할 뻔 하면서도 주먹세계를 평정했다. ‘돈을 탐내지 말고 약자를 배려하고 강한자에게는 강하게’ 등의 원칙을 지키면서 강릉뿐만 아니라 전국의 건달 세계를 알게됐다. 7공주들은 하나둘씩 가정을 꾸리기 시작했고 8년만에 자연스레 해체됐다. 홀로 남아 남자 건달동생들로부터 ‘큰누님’으로 불리며 인정을 받다 10년 연하의 건달 동생과 결혼을 하게됐다. 여자로써 느끼는 가정의 행복, 서른 아홉 나이에 딸도 하나 얻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살인혐의로 복역하고 나온 사람의 손에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총각귀신은 저승도 못가고 구천을 떠돈다는 말에 시체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당신 복수는 내가 해주마’ 다짐을 했었지만 그러고 나면 딸아이는 누가 키우나 하는 마음에 응어리를 풀고 평범한 삶을 선택했다. "건달세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여자의 행복은 가정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데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암흑세계에 핀 꽃?이란 제목의 책으로 정리했다. 평범하지 않은 삶이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여성잡지와 신문 TV에 수차례에 걸쳐 연재되고 방송됐다. CF 모델, 영화의 소재로 제안도 많이 받지만 이제는 자신의 경험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청소년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남을 돕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필요를 느끼기에 건강한 물을 만들고 돈도 벌어야겠다는 김씨.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신의라고 여겼기에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속에서도 당당하게 살수 있었다”고 한다. 8월경 모 방송국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드라마로 제작 방송한다. 밤세계에서 화려했던 그의 신화처럼 사업가로서의 삶이 기대된다. / 강릉 최백순 기자 knaeil@naeil.com 2001-06-27
- <김은정의 재테크 코너> 인터넷뱅킹, 시간·비용 절약 하루차이로 태어나도 세대차이가 나는 세상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변했고 은행의 이용형태도 바뀌었다. 은행 이용도 나에게 유리한 방법이 없는가를 꼼꼼히 따져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김 과장 & 임 대리 27일 S사에 근무하고 있는 김 과장은 신용카드 대금과 자동차세 결제를 위해 은행을 찾은 뒤 깜짝 놀랐다. 은행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50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이날 은행은 신용카드와 공과금 마감일이었다. 1시간 넘게 기다려 겨우 일을 마쳤다. 김 과장은 시간을 허비했고, 더구나 900원의 송금 수수료까지 지불했다. 김 과장은 1시간이상 기다린 후에 수수료까지 내고서 송금하고 세금을 내고 은행문을 나섰으나 기분이 언짢았다. 반면 점심시간 K사의 임 대리는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커피 한 모금 마시면서 거래은행 사이트로 접속했다. 임 대리는 인터넷 뱅킹을 이용해서 신용카드대금 결제계좌와 공과금을 자동이체하고 있는 부인계좌로 필요한 금액만큼 계좌이체를 시켰다. 송금수수료는 없었고 은행업무 보는 데도 단 2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용하면 편리한 제도들 인터넷 뱅킹을 이용하면 장점이 많다. 첫째, 시간을 절약 할 수 있다. 아무리 은행에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도 집에서 은행까지 걸어갈 필요도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둘째, 송금수수료가 없거나 은행에 직접 가서 송금하는 것보다 훨씬 싸다. 300~500원 정도면 인터넷 뱅킹을 이용할 수 있지만 창구에서 송금하는 경우 900~6500원까지 든다. 셋째, 은행에 나가지 않아도 잔액조회나 입금조회는 물론 적금이나 정기예금 등에 가입할 수도 있고 또 창구에서 가입하는 것 보다 0.2~0.5%의 금리를 추가로 받을 수도 있다. 물론 적금의 만기 때도 나의 통장으로 바로 입금되므로 편리하다. 넷째. 대출상담 및 대출신청도 집에서 할 수 있다. 대출 가능여부를 직접 조회 할 수 있고 대출이 얼마까지 될 수 있나를 알아 볼 수 있으며 바로 대출 신청을 할 수도 있다. 다섯째, 세금도 인터넷으로 납부할 수 있다. 혹시 집에 컴퓨터가 없거나 컴맹이라서 컴퓨터로 은행업무 보는 것이 불안하거나 겁이 난다면 전화를 이용해서 은행 일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거래은행의 폰뱅킹서비스에 가입한다면 잔액조회는 물론 송금도 할 수 있으며 신용카드업무도 볼 수 있고 환율 등도 알아볼 수 있다. 이 모든 것도 혼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우 은행의 CD기를 이용해서 송금도 하고 세금도 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물론 직접 창구에서 송금하는 것보다 수수료가 없거나 저렴하고 기다리는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2001-06-27
- 아직 ‘사람 사는 냄새’가 그윽한 곳 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코를 자극하는 건 싱싱한 과일향이다. 제철에 맞게 좌판에 실린 토마토도 그 빛깔만으로 충분히 향기롭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아무래도 복숭아며 자두 같은 풋과일이다. 보기만 해도 입안 가득 배어 나오는 침을 넘기느라 모두들 난처한 표정이다. 양쪽으로 늘어 선 상점들 사이로 빽빽이 서 있는 포장마차엔 떡볶이며 튀김들이 그렇지 않아도 잔뜩 시장기가 돈 사람들의 배를 자극하느라 바쁜 풍경이 낯설지 않다. 시장엔 생선 과일 아동복 뿐 아니라 갖가지 야채나 건어물 등등 없는 게 없다. 오랜 세월 제 몫을 다한 나무의자가 세월의 훈장인 듯 반질 해진 이마를 내밀고 있고, 호객행위에 분주한 상인들의 손짓, 발짓이 하나도 어색하지가 않다. 조금 걸어 들어가다 보니 왠 상점 앞에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아동복을 팔고 있는 가게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보니 과연 소란스러울 만한 게 천 원, 이천 원 짜리 옷이 아주 많이 나와 있다. 경기가 좋지 못하다보니 서민들은 자꾸만 싼 것, 더 싼 것을 찾기 마련인 것 같다. 스무 걸음쯤 더 왔을까. 널려진 옷이며 신발들을 구경하는 동안 어느듯 생선가게 앞이다. 미처 눈을 감기도 전에 그물에 걸린 건지 파란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나란히 줄을 지어 누워 있는 생선도 있다. ● 이 사람 저 사람, 그리고 사는 모습들 생선 가게를 지나 시장의 제일 끄트머리쯤까지 오니 채소가게에서 실랑이가 한창이다. 그래, 뭐니뭐니 해도 재래시장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실랑이다. 백 원이라도 더 깎아보려는 알뜰파 아줌마들과 한두 개 덤으로 더 올려주더라도 제 값을 다 받으려는 상인들. 바로 이 모습이다. 뭐든 쉽고 편한 게 좋은 현대인들에겐 비능률적이고 어수선한 모습으로 비춰질지도 모르지만 그 속에선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아파트 같은 경우엔 한 동에 살고 있어도 서로 인사 한 마디 나누지 않는 게 허다하다. 그런 현대인들의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들에 가끔은 숨이 막힐 때가 있다. 거기에 비하면 재래시장의 모습은 얼마나 인간적이고 정겨운가. ● 예전 같지 않은 ‘장날’ 풍경 중앙시장은 5일마다 장이 선다. 뒷자리가 1일 6일, 그러니까 16일, 21일, 26일의 순이 된다. 예전엔 장날이면 사람들도 많이 붐비고 거래량도 무척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예전만큼 장날이란 것에 대해 그리 민감하지도 않고 해서인지 상인들도 이젠 장날 수입이 만족스럽지가 않은가 보다. 거의 10년째 이 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김만석(남·48·원남동)씨는 “대형 할인마트들이 들어서면서부터는 장날이 되어도 예전 같지가 않아요. 점점 우리 같은 상인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거지요”하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재래시장이 점점 위축되어 가는 건 소상인들의 설 자리를 없애는 일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 가슴 속 정을 무디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이용자들을 위한 배려 아쉬워 고정된 자리가 없는 상인들은 리어카에 물건을 진열해 놓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장사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은 무거운 장바구니에 상인들까지 피하려 하니 짜증이 많이 난다. 더구나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고도 쓰레기를 버릴 곳이 없어 장바구니로 밀어 넣어야 하는 모습을 보니 참 어이가 없다. 화장실 문제만 해도 그렇다. 각 블록마다 휴지통과 화장실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작은 편의시설 하나조차 해결이 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자꾸 대형마트로만 몰리게 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다. 임은실 리포터 sil11042@naeil.com 2001-06-25
- 김종회 교수의 이산가족 이야기(37) 그러고 보니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의 일로 동경을 방문하였을 때, 이제 그곳에 눌러 사는 오랜 친구의 안내를 받아 아주 특별한 곳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일본헌법을 수호하려는 사람들 동경에서도 가장 번화한 빌딩의 숲 속 신주쿠에 듣도보도 못한 뒷골목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때 폭격 당한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마치 멀리 흘러가 버린 세월의 잔해와도 같은 유별난 영역이었다. 그 뒷골목은 네온사인이 휘황한 중심거리에서 도보로 불과 5분밖에 안 걸렸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그렇게 보존된 역사의 중간, 비좁고 루핑을 얹은 지붕이 낮으며 어째 으스스하기까지 한 그 공간을 찾아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거기서 그야말로 '아주 특별한' 사람들을 만났다. 필자의 친구가 자주 드나든다는, 마치 선술집 같은 그 업소의 주인은 중년고개를 넘긴 여인이었다. 수더분하고 사람 좋아 보였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는 나를 위해 '아리랑'을 불러주었는데, 웬걸 그 아리랑 노래는 한국의 원판에도 없는 4절까지의 서사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징병이나 징용을 당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종전후 일본에 남은 사람들의 망향가가 그렇게 4절까지 늘어난 아리랑 노래였던 것이다. 그제야 필자를 안내한 친구는 그 집의 주인이 NHK에도 자주 나가는 일본의 이름 있는 연극인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가 일본헌법 수호운동을 하는, 곧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제한하는 일본헌법을 준수하자는, 양심적인 일본 문화인 그룹의 일원이라고 소개했다. 분단책임의 근원은 일제의 통치 그리고 필자더러 이 좁은 선술집을 채우고 있는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라고 권했다. 조용히, 때로는 낮은 웃음을 주고받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사람들은, 대개 일본 문화계의 걸물들이었다. 필자는 새로이 눈을 밝힌 느낌으로, 일본 지식인 가운데 역사적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다. 그날 필자가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강조했던 한가지 사실은, 한반도의 분단에 따른 일본과 세계 열강의 책임문제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한반도의 남북에 진주한 미소양군의 군사적 편의주의에서 오늘날의 남북분단이 시발되었던 것이 아닌가 말이다. 36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다른 민족을 압살한 그 죄과와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던 탄압의 실상은 잠시 보류해두고 생각해도, 일본이 지금의 부유와 번영으로 으스대며 역사의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적 도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일본인 가운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일 뿐, 일본 정치의 중심세력은 지금 역사교과서 수정문제에서 보듯 오히려 과거보다 더한 퇴행의 길로 들어서는 듯 하다. 한술 더 떠서 정치의 최고책임자에 해당하는 인사가 주변국들이 보라는 듯이 공식적인 신사참배를 거론하는 형편이다. 그런가하면 그 와중에서도 '오사카서적'의 경우처럼, 만주사변과 관련해 사용한 '지배'라는 표현을 오히려 '침략'으로 수정하는 용기 있는 출판사도 없지 않다. 그래서 이 문제에 접근하는 우리 당국 또는 당무자들은, 일본 정부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일본내의 양심적인 지식인이나 문화종사자들을 일깨우는 전략도 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남북문제 해결의 지렛대로 활용 동시에 남북 분단문제의 해결에 있어서도, 일본과 세계 열강의 책임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방법론과 그것이 증폭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보아야 할 터이다. 일찍이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에서 남북 이산가족 재회촉구 범세계 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 바로 그 열강의 책임을 내세웠던 것을 상기해 볼 만하다. 그 서명운동은 세계 153개국에서 무려 2120만2192명이 서명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일본의 책임을 묻는 일에는, 북한과 쉽사리 공통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것을 십분 활용하는 것은 일의 효율성뿐만 아니라 민족공동체의 정체성과 유대감을 확립하는 데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교과서문제든 동아시아국가들의 상호소통 문제든, 여기엔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을 포함하여 하나의 기구를 구성하는 방안도 있다. 일본의 역사적 책임이 너무도 분명하기에, 그것을 남북문제를 풀어나가는 지렛대중 하나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사무국장 /경희대교수 karts@hanmail.net 2001-06-24
- 인물탐구-문홍식 단편영화 '선영의 편지'로 새로운 영화인생 시작 문홍식(33), 그는 이 시대에 진정한 꿈을 꿀 줄 아는 사람이다. 능곡 토박이인 그가 고양시를 토대로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의 '꿈'을 위해 살던 집까지 남김없이 쏟아 부을 수 있게 된 것은 단지 세파에 물들지 않은 그만의 '꿈'을 꿀 줄 알기 때문이 다. 현재 고양시 소재 능곡 고등학교에서 '영화 영상학과' 지도교사로 청소년들에게 영화 및 영상기법 등을 가르치고 있는 문홍식씨에게는 교사라는 직함 외에도 많은 이름이 따라 다닌다. 시나리오 작가, 연극 연출가, 탤런트, 베스트 셀러 '청소년 영화 따라잡기 (시공사 펴냄)'의 저자 그리고 각본 감독에 이르기까지. 97년부터 작가로 활동하며 '억겁의 인연' '연어' '57년만의 졸업' 등의 드라마 작품과 '만선' '동굴' '방황하는 별들' 외 6편의 연극 연출작을 가지고 있는 그는 진유영, 고(故) 손창호 감독처럼 '탤런트 출신'의 감독이라는 여느 감독과는 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가 35mm 단편영화인 '선영의 편지'를 만들겠다는 결심이 전해지자 주위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영화는 아무나 하나'식의 편견이 작용한 것. 그러나 능곡에 '문 필름(Moon Film)'이라는 사무실을 갖고 시작한 그의 영화작업에 대한 열정은 오랜 시간 동안 세월을 거슬러 다져진 노력이다. 그 역시 어릴 때부터 영화란 영화는 다 찾아다니는 '할리우드 키드'였음은 물론이고 이제 그는 영화에 그의 새로운 인생을 걸고 있다. 한 가정의 가장이자 아이 아버지이기도 한 그가 오로지 영화제작을 위해 가족의 거처를 35평 아파트에서 전세로, 사글세로, 무허가 주택으로 그리고 처가로 옮기며 실행했다는 사실은 어떤 면에서 무모해 보일 수도 있을 만큼 맹목적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는 단지 재미있는 영화가 아닌 아픔이 있는 영화를 알려주고 싶어하고 곧 그것은 영화의 작품성과도 직결된다. 그는 영상물의 힘, 즉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 효과를 믿는다. 그림 혹은 자막과 소리가 하나로 합체된 영상물 속에 그는 그의 독특한 이미지를 심는 작업을 혼신의 힘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가 영화감독으로서 당당하게 데뷔하게 되는 작품 '선영의 편지' 또한 아픔과 사랑이 녹아있는 영화다. 어느 날 국내 유일하게 남아있는 동춘 극단을 접하면서 "한국의 사라져 가는 서커스 문화와 소외된 장애인 2세의 아픔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다. 작년 2월부터 올해 2월까지 총 1억5천4백만원의 제작비를 들여 제작한 '선영의 편지'는 화정역 부근과 대곡역 일대 서커스 세트를 배경으로 봄·여름·겨울 등 세 계절의 영상을 아름답게 담았다. "장애인의 아픔을 신파적, 피상적이 아닌 사실적으로 가깝게 그려내고 싶었다"는 문 감독은 실제 배우도 한쪽 눈을 실명한 장애인을 캐스팅할 만큼 작품의 완성도에 힘을 기울였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 '2001 국내 우수영화 지원작'으로 채택되기도 한 영광을 안은 '선영의 편지'는 이제 마지막 후반작업과 함께 적절한 시사회 장소를 선별중이다. "작품무대가 고양시이니 만큼 '호수공원'에 야외무대를 만들어 관객에게 소개할 기회를 갖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문 감독은 관계 기관의 협조를 간절히 기대하며 자체 홈페이지(www.moonfilm.co.kr)를 통해 영화팬과 주민들의 의견을 모으고 있다. 촬영 조명은 '단적비연수' '파이란'의 김영철, 음악은 '태조왕건' '용의 눈물'의 임택수씨가 맡았다. 이영란 리포터 dazzle77@naeil.com 2001-06-21
- <국회의원 열전> 한나라당 정창화 의원 16대 국회 개원 때부터 한나라당 원내총무직을 수행하고 지난 5월 임기를 마친 5선 관록의 정창화(경북 군위·의성) 의원. 정 의원은 평균 재임기간이 7∼8개월에 불과한 원내총무 임기 1년을 제대로 채운 몇 안 되는 현역정치인이다. 정 의원은 팽팽한 여야 대결구도가 지속된 총무시절보다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무엇보다 먼저 “국회가 정치의 중심이 돼야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원내총무는 당의 방침을 전달하는 전령이 아니라 상대의 주장과 자기당 이익이 상충되는 지점에서 조종자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우리나라 정치구조와 문화가 오랜 세월 1인 보스정치로 고착돼 왔기 때문이다. 정 의원은 총무의 또 다른 역할로 포용력을 꼽는다. 특히 16대와 같은 여소야대 정치 상황속에서는 상대방이 처한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 소수여당은 다수야당의 주장을 말살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수용적 태도가 필요하며, 다수야당은 소수여당이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집권당이라는 점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논리다. 그래야만 상생의 정치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정 의원은 총무시절 정치적 파트너였던 민주당 정균환 전총무와 지금도 대단히 사이가 좋다고 한다. 비록 처리문제와 검찰총장 탄핵소추안 처리 등 불가피한 현안 때문에 다소 파행과 대립도 있었지만 정 전총무와 협상과정에서 충분히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역대 국회를 통틀어 날치기 통과 때를 제외하고 지난 16대 국회 1년 동안 처리한 안건이 가장 많은 300건에 이른다는 점도 정 의원이 보람으로 느끼는 점이다. 총무시절 가장 어려웠던 점으로는 자당의원들에 대한 설득을 꼽는다. 총무는 협상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주장의 일부분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결국 다시 당으로 돌아가 협상과정에서 양보된 부분을 설득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 정 의원은 “열 가지를 가져가면 다섯 가지만 얻어도 성공적이며, 이는 상대당도 마찬가지다”고 설명한 뒤 “협상과정에 양보한 부분이 패배가 아니라 협상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우리 당 의원들에게 설득하는 과정이 가장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정 의원의 국회에 대한 바람은 여전하다. 통법부나 민주주의의 장식기구가 아니라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녹이는 용광로와 같이 정치의 중심이 되길 기대한다. 이를 위해 당내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여야가 대화와 타협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 가는 성숙한 모습을 갖춰야 한다고 충고한다. 정 의원은 “너무 각박스럽게 자기당 이익과 주장만을 대변하는 평행적 주장을 접고, 가정의 부부처럼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 힘으로 국민을 위할 때 제대로 된 국회모습이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2001-06-19
- <정치를 일구는 사람들> 한나라당보좌관협의회 정찬수 회장 ‘이제 국회의원 보좌진들은 단순 비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입법·정책보좌를 하는 전문적인 영역으로 굳건히 자리 잡아가고 있다’지난해 최초의 경선을 통해 제10대 한나라당보좌관협의회장(한보협)이 된 정찬수 보좌관(정재문 의원실). 현재 국회의원 한 명당 6명의 보좌진이 있으니,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보좌진 789명이라는 대식구의 실질적인 대표가 정 보좌관이다. 요즘 그의 관심은 온통 25일 열릴 ‘한나라당보좌진체육대회’에 가있다. 연례적으로 해 오던 행사였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개최하지 못했다. 이번에 정 보좌관이 4년만에 다시 부활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내심 부담감이 크다.효율적인 의정활동을 위해서는 재충전과 의기투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이날 행사에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도 함께 참여해 보좌진들과 시간을 보낼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 보좌관이 강조해 온 보좌진들의 위상강화가 조금씩 성과를 보이고 있다는 평이다. 경선 당시 강조했던 입법·정책보좌 기능 강화도 가시적인 변화가 보인다. 수치로만 보더라도 보좌진 연구모임이 100회 이상 진행됐으며, 한보협이 주최한 연구모임만도 15회가 넘는 것으로 추산됐다. 그는 지난 12대 국회 때부터 국회 근무를 시작해 벌써 15년째 접어 든 터줏대감이다. 그가 처음 국회생활을 하던 87년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석사학위를 지닌 사람들이 국회사무처와 의원회관을 합쳐 네 명에 불과할 정도였으니 당시로서는 최고의 전문엘리트였다. 지금은 석·박사 학위 소지자들이 부지기수이므로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보좌진들의 전문성이 향상된 것이다. 남은 임기동안에도 보좌진들의 위상강화에 헌신하겠다는 각오다. 그가 모시는 정 의원과의 인연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대학교 조교시절 자신이 모셨던 교수와 친구였던 정 의원이 그를 국회로 불러들인 것이 인연이 됐다. 그는 정 의원을 스승처럼 여기고 따른다. 정 의원도 그를 친자식처럼 신뢰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 보좌관은 자신이 예로부터 의병이 많았고, 의(義)를 숭상해 온 충북 제천 출신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학교에서나 집안에서 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배우면서 자란 탓에 정 보좌관도 이를 남다르게 여긴다. 이 때문인지 정치권을 바라보는 그의 생각도 남다르다. 정 보좌관은 “모름지기 정치인은 권력을 향한 정치가 아니라 아래를 굽어보는 봉사의 정치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2001-05-23
- 닥종이 인형 만들기, '동심의 세계에 빠져 보세요' 가늘게 옆으로 찢어진 눈매, 뭉뚝한 코에 울고 있는 표정조차도 익살이 뚝뚝 묻어나는 동그란 얼굴, 이 모두가 '엄마 어렸을 적에'로 대변되는 전통 종이인형들로 이젠 낯설지 않다. 재독 작가인 김영희씨가 처음 전시회를 가졌을 때의 그 신선한 충격을 느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점씩은 가지고 싶어하는 인형, 바라보기만 해도 어릴 적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닥종이 인형을 배워 보는 강좌가 '고양 일하는 여성의 집'에서 열린다. 이 강좌를 맡고 있는 안정희씨는 한국종이협회회원으로 한지그림공예, 종이접기 등 종이로 할 수 있는 공예는 두루 섭렵한 정통파로 닥종이 지도사범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종이를 좋아해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것이 할수록 빠져드는 종이공예의 매력 때문에 강사자격까지 이수하게 되었다는 안씨는 요즈음 닥종이인형에 푹 빠져있다.닥종이는 종이도 그냥 종이가 아닌 천년 세월을 견디며 썩지도 삭지도 않는 뛰어난 재질의 종이이며 우리 겨레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이러한 닥종이에 생명력을 불러 넣어 인형을 만드는 것이 닥종이 인형이고, 닥종이 인형은 우리 전통 지호공예로서 옛날 불교에서 간철불이란 닥종이로 만든 보물로 지정된 경주 기림사의 지장보살과 함께 두 작품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만 보아도 닥종이 인형은 우리 정서와 가장 가까운 토속공예로 만드는 사람의 심성에 따라 달라지는 얼굴표정 하나하나가 매력이다.그래서 만들고 나면 마치 자식처럼 분신같은 느낌으로 남에게 선물하기 아까울 정도로 애착이 가는 공예. 하지만 또 이 닥종이 인형을 제작하려면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다.제작기법으로는 철사로 기본 뼈대를 만들고 그 것에 한지를 뭉쳐 골격을 세우고 살을 붙이고 난 후 염색한지로 얼굴을 만들고 옷을 입히고 동작과 표정을 살리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중에 얼굴표정이 나오기까지 그저 한지 뭉치로밖에 보이지 않아 밉기까지 하다. 하지만 열매는 인내심을 가진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법이라 이렇게 조금은 지루한 과정을 견디고 나름대로의 동작과 표정을 살리는 작업을 하다보면 자신도 상상할 수 없었던 분신이 탄생하는 재미가 어느 공예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더구나 인형들은 묘하게 만드는 사람의 모습을 닮아 희노애락의 감정이 그대로 인형에 나타나게 되므로 저절로 마음을 닦는 공부도 하게 된다. 종이인형의 또 다른 장점은 기초과정만 배우면 동작과 얼굴표정은 평소 자신이 생각하는대로 창의성과 독창성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단순한 기법만의 공예라기보다 어느 정도 익히면 자신의 색깔을 지닌 예술의 차원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그리고 재료비가 다른 공예에 비해 저렴하고 한지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커피나 과일을 이용해 천연염색으로 물들여 다양하게 쓸 수 있다는 것, 필요한 도구는 풀과 붓, 철사, 한지, 얼굴표정을 다듬는 공구(가격은 2천원정도)정도이다.닥종이 인형과정은 초·중·고급과정으로 총 36시간을 이수하면 사범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되며 아직까지 다른 공예처럼 많이 보급되어 있지 않아 취미를 넘어 부업으로도 유망하다고 볼 수 있다.앞으로 지금처럼 다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제작기법을 보다 쉽고 빠르게 제작할 수 있는 기법을 개발하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지만 우리를 동심의 세계로, 추억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닥종이인형은 그만큼 성취감 있는 공예이다.대화동 소재 '고양 일하는 여성의 집'에서 5월14일부터 7월16일까지 월요일 오후 1시30분부터 3시까지 총 10회 과정으로 강좌가 있다. 수강료는 6만원이고 접수 및 문의는 031-912-8555/8668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2001-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