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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봉장 스케치 "어머니, 불효자식이 50년만에야 이렇게 인사를 드립니다." "애비 노릇도 못한 이 못난 애비를 용서해 다오."반세기만의 혈육 만남에 상봉장인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센트럴시티는 다시한번 눈물바다가 됐다. 남북 이산가족들은 '어머니', '아버지', '아들아', '형님'을 목놓아 부르며 부둥켜 안은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당초 오후 3시 30분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던 단체상봉이 조금 늦어져 초조한 모습을 보이던 남측 가족들은 3시 55분 밀레니엄홀에 도착한 북측 상봉단의 모습이 보이자 벌써부터 눈물을 머금기 시작했다.센트럴시티 밀레니엄홀은 순식간에 가슴벅찬 기운으로 가득찼다.어떤 이는 부여잡은 손을 놓지 못했고 너무나 많이 변해버린 얼굴에 꿈인지 생신지 분간조차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망연자실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마누라도 못 알아보나 왜 못 알아보나."북측 방문단 가운데 최고령자인 임문빈(86)씨의 아내 남상숙(81)씨는 50년만에 만난 남편의 손을 부여잡고 왜 못알아보냐며 몇번을 탓했다.비록 얼굴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딸 태혁(53)씨와 은혁(50)씨는 아버지 품에 안겨 "아버지"라며 목매어 울었다. 임씨는 아내에게 "딸들을 잘 키워줘 고맙다"며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는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어머니 모기술(84)씨를 만난 북의 최경석(66)씨는 휠체어에 앉은 어머니를 끌어안고 노래를 불렀다. 다른 가족들도 박수를 치며 장단을 맞췄다. 최씨는 자신이 부른 노래를 '사향가'라고 소개하며 "북한에서 고향을 그릴 때 즐겨 부르곤 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오마니, 기쁘죠", "염려 마시라우 오마니, 통일되면 모시고 살갔시요"라며 부둥켜 안은 어머니를 놓지 못했다.백발이 성성한 89세의 노모 앞에 세달후면 온다던 아들이 교수가 돼 돌아왔다. 50년 7월 17일에 의용군으로 가며 가족과 헤어졌던 조원영(69)씨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큰절로 인사를 올렸다."하늘에서 뚝 떨어졌나봐"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 김서운씨는 아들을 보며 언신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의용군갔다 3개월후에 온다던 애가 이제야 왔어.""어머니 나 혼자 가서 식구 불려 왔다. 딸이 둘이다"라고 원영씨가 얘기하자 어머니는 "아들은?"하며 아쉬워했고 이에 원영씨는 웃으며 "일없다"고 대답했다."옛날에는 얼굴이 통통하니 살이 좋았는데 이제는 얼굴이 갸름해졌구나"라며 원영씨의 얼굴을 연신 어루만지며 아쉬워하던 어머니 김씨는 그러면서도 4년전에 사망한 남편 조용범(당시 88세)씨 이야기를 하며 그렁그렁한 눈시울을 감추지 못했다.'향수'의 명시를 남긴 정지용 시인의 아들 구인(67)씨를 만난 남쪽의 형 구관(73)씨는 "아버지 찾으러 간다더니 드디어 왔구나"하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 "이 기쁜 날이 올 줄은… 형님, 고생 많으셨죠?" 북의 동생은 월북시인의 아들로 알려져 남한에서 험한 삶을 헤쳐온 형의 굵은 손마디를 연신 어루만졌다. 충남 보령 탄광에서의 광부생활과 보따리장사로 굵어진 형님의 손마디에 동생은 목이 메었다.공훈예술가 정두명(66)씨는 노모 김인순(89)씨에게 "어머니 인사받으세요"라며 인사한 뒤 부친의 작고소식을 듣고 오열을 터뜨렸다.'51년만의 모자상봉'을 한 허 계(92)씨는 북에서 온 아들 김두식(70)씨의 손을 꼭 붙잡은채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고 중풍으로 거동이 어려운 강항구(80)씨는 앰뷸런스를 타고 북한에서 온 동생 서구(70)씨와 감격의 해후를 했다.반세기라는 세월도 핏줄을 갈라놓진 못했다. 이산가족들은 피붙이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헤어짐을 강요한 분단의 역사에 대한 원망과 만남의 기쁨으로 눈물바다를 만들었다.2시간여동안 이뤄진 이날 만남속에서는 오직 이산의 한이 녹아내린 혈육의 정만이 흘러넘쳤다. 2001-02-27
- 잃어버린 10년, 일본의 교훈 일본의 경제위기를 촉발한 구조적인 문제가 우리와 매우 흡사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또 일본은 경기불황을 극복할 수 있는 체력이 튼튼하지만 우리는 장기불황을 버틸 수 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삼성경제연구원은 22일 ‘잃어버린 10년, 일본의 교훈’이란 연구자료에서 한국은 일본의 시스템을 장기간 학습한 상태로서 우리가 안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는 일본의 문제와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일본 경제위기의 원인들은 우리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조사, 분석됐다. 먼저 구조적 문제가 유사한 것으로 분석됐다. 부실기업과 금융이 그렇고, 지지부진한 구조조정과 파벌정치 부패 리더십 문제 등 정치도 흡사하다. 또 관료보수성도 부처이기주의 팽배와 정책대응 실기, 빈번한 인사나 부처간 협조체제 미흡 등도 일본과 한국은 닮은꼴이라는 것이다.이와 더불어 숨가쁘게 변화하는 세계시장에 대한 대응력도 일본의 경우 90년 이후 변화를 거부했고 우리는 국제변화에 비교적 조기적응을 했지만 아직도 미흡하다는 것이다.◇경제정책의 유사성=일본은 버블경제 붕괴 이후 10년간 경제위기가 세차례 반복됐다. 1992년부터 3년간 제로성장이 지속되자 총 44조엔의 재정자금을 투입하여 경기부양을 도모했다. 1995년 경기부양 효과가 미흡하자 엔저로 불황탈출을 시도했다. 미국의 강한 달러정책과 맞물려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기회복으로 1997년 하시모토(橋本)정권은 재정재건을 위해서 소비세를 인상하여(3% → 5%) 경기에 찬물을 끼얹은 결과를 초래했다. 1998년 아시아 경제위기가 가세하여 다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58조엔의 경기부양책과 60조엔의 공적자금 투입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모면한 것이다. 그러나 2001년 들어 금융기관 부실채권 문제가 표면화되어 일본경제의 3번째 위기가 발발했다.◇회생불능 기업지원=일본 정부는 경기침체 가속, 금융시스템 불안, 실업증가 등을 우려하여 부실기업정리에 용단을 내리지 못했다. 경제위기 때마다 대량 도산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특별신용보증제도’등으로 부실기업을 지원했다. 1999년에는 3년 시한의 ‘산업재생법’을 제정하여 자발적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기업에 대해 세제 등 인센티브를 부여했다. 부실기업을 일시에 정리하면 부실채권이 은행으로 전가되어 은행의 자기자본을 잠식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졸속 정책에서 빚어진 사태다.◇눈덩이 재정적자=일본의 국가채무는 10년마다 2배 이상씩 증가하고 있다. 국가채무잔고는 지난해 642조엔, GDP의 118%로 G7 국가중 최고이며 일본만이 계속 확대되고 있다. 또 일본은 공채의존도(국채 세입)도 40%수준으로 예산의 3분의 1을 차입에 의존, 우리 재정흐름과 같다.◇구조개혁의 방향과 속도의 닮은 꼴=위기의식에서 차이가 있다. 일본의 구조개혁은 방향은 비교적 옳았으나 위기의식의 결여로 개혁속도가 느렸다. 95년 금융개혁, 98년 금융지주회사 등이 시작되었으나 추진은 미흡했다. 반면 우리는 구조개혁의 속도가 일본보다 빠르지만, 철저하지 못하고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 미숙했다. ◇불황의 유사성=불황실태도 매우 유사하다. 부실기업이나 금융의 증가나 규모가 비슷하다. 그러나 일본은 10년간의 장기불황을 지금도 꼿꼿하게 이겨내고 있지만 우리는 장기불황에 견딜만한 체력이 약해 문제가 더 심각해지면 벼랑에 몰릴 수 있다. 일본은 산업 및 기업의 국제경쟁력, 대규모 금융자산, 세계 1위의 외환보유고(약 3500억 달러) 등으로 경기 한파를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외자의존 기업개혁=재벌과 부실기업의 개혁을 외자유치로 대체하려하고 있다. 우리와 매우 흡사하다. 마구잡이식 외자유치로 재벌개혁을 마무리, 정경유착의 고리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1999년 위기에 몰린 닛산자동차가 프랑스 르노사로부터 5857억엔(지분 36.8%)의 자금을 도입하고 카를로스 곤을 경영자로 영입했다. 미쯔비시자동차도 최근 다임러크라이슬러의 롤프 엑크로드를 경영자로 영입했다. ◇지주회사제 도입지연=이것도 흡사하다. 금융지주회사법 성립으로 일본의 금융기관들은 4개의 그룹으로 지주회사를 추진 중이나 금융기관들간 이해조정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 부실채권 분담, 지점수 감축, 전산시스템 조정이 그것이다.때문에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3개은행 합병으로 ‘미즈호홀스딩’의 출범도 의문시되고 있다.◇유동성의 함정=일본은행의 금융정책도 한계점에 도달했다. 0.15%에서 사실상 제로금리로 회귀했으나 그 효과는 한정적이다. 초저금리에도 일본인들은 미래에 대비하여 저축을 하기 때문에 돈이 유통되지 않고 있다. 재정적자 확대에 따라 재정정책 구사의 여지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공공투자 확대의 효과도 맥을 못 춘다. ◇실물경제 다시 침체=실물경기는 금년 들어 금융불안과 맞물려 급격한 하강국면으로 돌입하고 있다. 소비 위축, 미국경제침체로 인한 수출부진, 세계적인 IT(정보기술)붐 정체 등의 악재가 겹치고 있고 여기에 금융불안이 가세하고 있다. 물가하락과 생산위축이 악순환을 일으키는 디플레이션 스피럴이 시작됐다. ◇불황탈출 방안=금융 및 기업부실을 조기 처리해야 한다. 길은 이것 뿐이다. 장기간 지속되어 온 금융부실에 대한 처리를 가속화해야 한다. 현재까지 159조원(2001년 상반기 투입분 포함)의 공적자금을 투입하였으나 잔존부실과 잠재부실이 상당부분 남아있는 상태다. 세계경제 불안으로 한계기업의 도산 가능성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기업부실을 조기에 정리하여 금융부실화를 차단해야 한다. 또 부실 대기업, 워크아웃 기업 등의 처리를 원칙대로 조기집행이 시급하다. 아울러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한계기업들에 대한 지원을 최소화하고 부실발생에 대한 책임 뿐 아니라 부실은닉에 대한 사후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단기적으로 외환유동성 확보, 경제살리기 등에 주력하면서 보다 근본적으로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구조를 건실화해야한다. 대외신인도 제고가 선결과제이다. 2001-03-21
- 입력기완성형으로 저장한 경우 13. 현존하는 고려의 목조건축들시대를 초월하는 공예정신의 승리… 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고 최순우 선생의 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무량수전의 건축적 교훈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목조건축물들 가운데 지금까지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남북한을 통틀어 약 10여동 정도다. 현재 남한에는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강릉 객사문’ 등이 남아 있는데, 하나같이 건축적으로 튼튼하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명작들이다.대부분 변방에 있던 작은 건물들 000그렇지만 이 건물들 모두가 당대(고려시대) 최고의 건축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건축물들은 당연히 개성 일대에 지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건축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단지 외진 곳에 있거나 운이 좋아서 오랜 세월과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 당대의 눈으로 보자면, 강릉 객사문은 시골 관아의 정문에 지나지 않는다. 또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을 제외한다면,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은 인쇄창고로 쓰이던 건물이고, 봉정사 극락전은 소박하게 지어진 조그만 시골 절집 건물에 불과하다. 서울(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작은 건물들이 이렇듯 견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고려시대 건축문화의 기술 수준과 미학적 깊이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13~14세기 이후 고려의 목조건축은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을 계승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구조적 안정성을 모색, 하나의 고유한 형식을 완성하게 된다. 이 시기 건축가들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구조기법을 받아들이는 한편, 전래의 구조기법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기법을 고안해냈고, 이를 통해 공예적이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시대 이전,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처마를 받치는 공포( 包)의 처리기법에서 구조기능에 충실한 고유의 형식이 가장 완전하게 구현된 건축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두 건물의 과도적인 특성을 계승하면서 건축물의 형태적 아름다움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건물이다. 이 시기에 완성된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구조기법들은 이후 부분적으로 확대발전하기도 하고, 독창적인 양식으로 변형되기도 하면서 조선시대 목조건축으로 이어진다. 유일한 통일신라식 목조기법 000경북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공민왕 12년(1363년) 에 중수한 기록이 발견됐으며 건축양식 등으로 미루어 처음 건립된 시기는 고려 중기인 1200년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극락전은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과는 전혀 다른, 신라시대부터 전해내려온 전통적인 구조방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같은 주심포(柱心包 : 기둥 위에만 포가 놓이는 구조법) 방식이지만,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을 지낸 김동현 박사는 극락전의 주심포 방식을 ‘라대(羅代) 주심포’부석사나 수덕사 이후의 방식을 ‘려대(麗代) 주심포’로 구별하기도 한다. 군산대학교 배병선 교수는 창건 당시 극락전 불단 위에 가설된 ‘닫집’이 완벽한 ‘다포계’ 구조 형식이라는 점에 근거, 다포계 형식이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편 최근 봉정사 대웅전 해체·보수과정에서 오래된 수법(手法)의 부재(部材)와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에 불단 조성(至正二十一年啄子造成)’이라는 묵서명이 발견되어, 지금까지 조선초로 추정되던 대웅전 건립연대를 고려 말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구조적 안정성과 의장적 효과 0001308년에 창건된 충남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은 이 시대에 유행한 ‘주심포’ 형식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실내에 고주(높은 기둥) 4개를 세워 맞배지붕을 받치는 간결한 구조이다. 사용된 부재는 섬세하고 정교하게 마무리되어 장식효과를 살리고 있고, 기둥은 완만한 곡선의 배흘림이다. 대들보나 종보 등을 받치는 부재는 하나의 통일된 곡선 무늬로 장식되었다. 경기대 건축공학과 김동욱 교수는 《한국건축의 역사》(1997.기문당)에서 “구조기능에 충실한 짜임을 한 대신, 눈에 잘 띄는 부분부분을 통일된 화려한 장식으로 보강한 것이 수덕사 대웅전의 특징이다. 구조적 안정성에 의장적 효과가 한 건물 안에 잘 수렴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목수들이 창조했던 목구조의 법식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여기에 사용된 기법들은 조선시대 이후까지 전승되어 우리나라 목구조기술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데,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김봉렬 교수는 이를 △기둥의 안쏠림과 배흘림, 귀솟음 △평면의 안허리곡 △항아리 모양의 대들보 등으로 요약한다. ‘안쏠림’은 ‘오금법’이라고도 하며 기둥머리를 건물 안쪽으로 약간씩 기울여 주는 것을 말한다. 기둥이 전체적으로 사다리꼴 모양으로 세워지는 것인데 눈으로는 거의 알아채기가 힘들다. ‘귀솟음’은 건물을 앞에서 볼 때 가운데쪽 기둥보다 양쪽 추녀쪽 기둥을 갈수록 조금씩 높여주는 것이다. 귀솟음을 주지 않을 경우 착시현상으로 건물 양어깨가 처진 것처럼 보인다. 안쏠림과 귀솟음은 시각적인 안정감을 줌과 동시에 하중을 가장 많이 받는 귓기둥을 높여줌으로써 구조적인 안정감도 준다. ‘배흘림’이란 기둥의 가운데 부분을 불룩하게 깎는 기법이고, 평면의 ‘안허리곡’은 평면을 직사각형으로 만들지 않고 네 변의 중앙을 약간 안쪽으로 들이밀어 기둥을 세우는 방법이다. ‘항아리형 보’는 보의 단면을 항아리처럼 위는 둥글고 아래는 직선으로 깎는 것을 말한다. 모두가 시각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고 각 부재의 조립을 쉽고 튼튼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들이다. 무량수전의 뛰어난 아름다움은 이런 기법들이 완벽하게 적용되어 있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다. 2001-02-23
- 워드패스 변환 … 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고 최순우 선생의 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무량수전의 건축적 교훈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목조건축물들 가운데 지금까지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남북한을 통틀어 약 10여동 정도다. 현재 남한에는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강릉 객사문’ 등이 남아 있는데, 하나같이 건축적으로 튼튼하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명작들이다.대부분 변방에 있던 작은 건물들 000그렇지만 이 건물들 모두가 당대(고려시대) 최고의 건축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건축물들은 당연히 개성 일대에 지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건축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단지 외진 곳에 있거나 운이 좋아서 오랜 세월과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 당대의 눈으로 보자면, 강릉 객사문은 시골 관아의 정문에 지나지 않는다. 또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을 제외한다면,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은 인쇄창고로 쓰이던 건물이고, 봉정사 극락전은 소박하게 지어진 조그만 시골 절집 건물에 불과하다. 서울(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작은 건물들이 이렇듯 견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고려시대 건축문화의 기술 수준과 미학적 깊이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13~14세기 이후 고려의 목조건축은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을 계승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구조적 안정성을 모색, 하나의 고유한 형식을 완성하게 된다. 이 시기 건축가들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구조기법을 받아들이는 한편, 전래의 구조기법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기법을 고안해냈고, 이를 통해 공예적이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시대 이전,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처마를 받치는 공포의 처리기법에서 구조기능에 충실한 고유의 형식이 가장 완전하게 구현된 건축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두 건물의 과도적인 특성을 계승하면서 건축물의 형태적 아름다움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건물이다. 이 시기에 완성된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구조기법들은 이후 부분적으로 확대발전하기도 하고, 독창적인 양식으로 변형되기도 하면서 조선시대 목조건축으로 이어진다. 유일한 통일신라식 목조기법 000경북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공민왕 12년(1363년) 에 중수한 기록이 발견됐으며 건축양식 등으로 미루어 처음 건립된 시기는 고려 중기인 1200년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극락전은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과는 전혀 다른, 신라시대부터 전해내려온 전통적인 구조방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같은 주심포(柱心包 : 기둥 위에만 포가 놓이는 구조법) 방식이지만,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을 지낸 김동현 박사는 극락전의 주심포 방식을 ‘라대(羅代) 주심포’부석사나 수덕사 이후의 방식을 ‘려대(麗代) 주심포’로 구별하기도 한다. 군산대학교 배병선 교수는 창건 당시 극락전 불단 위에 가설된 ‘닫집’이 완벽한 ‘다포계’ 구조 형식이라는 점에 근거, 다포계 형식이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편 최근 봉정사 대웅전 해체·보수과정에서 오래된 수법(手法)의 부재(部材)와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에 불단 조성(至正二十一年啄子造成)’이라는 묵서명이 발견되어, 지금까지 조선초로 추정되던 대웅전 건립연대를 고려 말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구조적 안정성과 의장적 효과 0001308년에 창건된 충남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은 이 시대에 유행한 ‘주심포’ 형식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실내에 고주(높은 기둥) 4개를 세워 맞배지붕을 받치는 간결한 구조이다. 사용된 부재는 섬세하고 정교하게 마무리되어 장식효과를 살리고 있고, 기둥은 완만한 곡선의 배흘림이다. 대들보나 종보 등을 받치는 부재는 하나의 통일된 곡선 무늬로 장식되었다. 경기대 건축공학과 김동욱 교수는 《한국건축의 역사》(1997.기문당)에서 “구조기능에 충실한 짜임을 한 대신, 눈에 잘 띄는 부분부분을 통일된 화려한 장식으로 보강한 것이 수덕사 대웅전의 특징이다. 구조적 안정성에 의장적 효과가 한 건물 안에 잘 수렴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목수들이 창조했던 목구조의 법식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여기에 사용된 기법들은 조선시대 이후까지 전승되어 우리나라 목구조기술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데,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김봉렬 교수는 이를 △기둥의 안쏠림과 배흘림, 귀솟음 △평면의 안허리곡 △항아리 모양의 대들보 등으로 요약한다. ‘안쏠림’은 ‘오금법’이라고도 하며 기둥머리를 건물 안쪽으로 약간씩 기울여 주는 것을 말한다. 기둥이 전체적으로 사다리꼴 모양으로 세워지는 것인데 눈으로는 거의 알아채기가 힘들다. ‘귀솟음’은 건물을 앞에서 볼 때 가운데쪽 기둥보다 양쪽 추녀쪽 기둥을 갈수록 조금씩 높여주는 것이다. 귀솟음을 주지 않을 경우 착시현상으로 건물 양어깨가 처진 것처럼 보인다. 안쏠림과 귀솟음은 시각적인 안정감을 줌과 동시에 하중을 가장 많이 받는 귓기둥을 높여줌으로써 구조적인 안정감도 준다. ‘배흘림’이란 기둥의 가운데 부분을 불룩하게 깎는 기법이고, 평면의 ‘안허리곡’은 평면을 직사각형으로 만들지 않고 네 변의 중앙을 약간 안쪽으로 들이밀어 기둥을 세우는 방법이다. ‘항아리형 보’는 보의 단면을 항아리처럼 위는 둥글고 아래는 직선으로 깎는 것을 말한다. 모두가 시각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고 각 부재의 조립을 쉽고 튼튼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들이다. 무량수전의 뛰어난 아름다움은 이런 기법들이 완벽하게 적용되어 있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다. 2001-02-23
- <신문로 칼럼>대선 후보들 통일비전 낙제점 대선 후보들 통일비전 낙제점임재경/언론인‘세월아 어서 가거라’하며 달력의 그날치 숫자에 X자를 치는 심경은 오늘의 고통스러움을 내일의 희망을 통해 완화하고자 하는 인간 본래의 모습일 터이다. 비근한 예로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학생들의 안쓰러운 처지를 상상해보라. 필자의 개인적 경험으로는 징집을 당해 휴전선 최전방에 배치되어 엄동설한에 배를 곯던 1950년대 중반이 바로 그러한 시기에 해당한다. 제대 이후에 금시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단지 현재 상태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지겨웠던 때문이다. 미래에 거는 인간의 무의식적 기대를 사회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가 말했던 에서 원용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나 유토피아를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서 찾는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확실히 프로이드보다 한 걸음 앞선 것이다.고달픈 사람들의 이러한 ‘달력 날짜 지우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초읽기(count-down) 현상이 지금 우리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다 아는 대로 차기 대통령선거를 겨냥한 이른바 대선 예비 주자들의 언행인데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먼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대북 정책 전면 수정론’을 들 수 있겠다.냉전논리 회귀한 이 총재의 전면수정론이 총재는 북한이 변화하고 있다는 김대통령의 북한관을 변경할 것, 햇볕정책의 기조를 상호주의로 전환할 것, 투명성 검증의 원칙을 채택할 것 등 대여섯 가지인데 그 내용을 비유컨대 달력의 지나간 날짜들이 아니라 다가올 앞날의 날짜를 전부 먹칠하는 격, 아니 달력 앞장을 아주 뜯어 내버리는 것과 흡사하다. 달리 표현한다면 2000년 6월 15일 이전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있던 1992년 중반 혹은 1970년 후반으로 되돌아가자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이 총재 말대로라면 분단 극복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미국 국무성과 국방성의 지시에 따르는 일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지구가 미소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어느 한 쪽 진영에 가담하지 않으면 존립이 불안정했던 시절, 즉 냉전시대의 논리로 이 총재는 회귀하고 있다. 국정의 책임을 지겠다는 정당의 지도자가 이런 정도의 세계관을 지니고 있음은 겨레의 앞날을 위해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그러나 더 불행한 것은 6·15를 도출해낸 집권 여당내부의 자천, 타천 대권 예비후보들이 멀게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 취임, 가깝게는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 이후 남북관계 내지 햇볕정책에 대하여 한결같이 입을 봉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대북정책 전면 수정론은 대통령 선거를 겨냥하고 집권당 흔들기에 일차적 목적이 있다고 할 때 여당 내부 대권 예비후보들의 함구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답변은 듣지 않아도 알만하다. 미국정부의 비위를 거스르는 입방아를 찧다가는 대권은 아예 물 건너 가기 십상이라는, 좋게 말하여 정치적 현실주의, 투박하게 표현하면 속 들여다 보이는 사대주의적 계산이다. 그들이 사석에서 약소국의 비애를 토로할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주권국가의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사대주의라는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보태면 미-소 양대 진영이 핵무기를 전쟁 억제수단으로 하며 서로 으르렁거리며 약소국들을 각기의 진영에 붙들어 매놓았던 시대에는 미국을 사대하는 것이 단기적 내지 중기적 소강상태와 소비 생활의 현상유지를 일정 범위 안에서 보장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단기적으로는 남북 간의 우발 사태 야기, 중기적으로는 동북아세아의 불안 증폭, 장기적으로는 민족 자립의 저해 등의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여권의 대통령 예비후보들의 함구가 김대통령 방미와 관련된 자체 평가에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점과 전혀 무관치는 않다 하더라도 그들이 평소에 분단극복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던들 지금처럼 대북정책에 대한 여론이 표류상태로 방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권 대선 후보들의 기회주의적 함구6·15 선언의 장래는 미국의 새정부가 들어선 이후라야 확실해진다는 기회주의적 태도가 정치권 전반에 만연되어 있었던 면이 엿보인다. 그렇다. 사대주의는 사후적 강제의 결과가 아니라 중요 결단을 사대의 필요시까지 유보해두는 심리상태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거대 언론매체들이 대선 예비후보자들 이상으로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는 참담한 현실을 외면하여서는 안되지만 적어도 대권주자들이 입을 모아 6·15정신에 대한 올바른 몽적 발언을 하였던들 오늘날과 같은 국내외의 역류는 모면했을지 모른다. 대통령선거와 관련된 실질적 일정은 향후 1년 이상을 남겨놓았다. 하지만 분단극복의 비전에 관한 예비후보자들의 성적표는 예외없이 낙제감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최대치적으로 남을 6·15 선언을 계승할 나라의 지도자를 어느 곳에서 찾아야 할 지가 이제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임재경/언론인 2001-03-19
- [포커스] 3대독자 북측 조카 편지 받은 황각주씨 "눈 감기 전에 큰조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도 다 조상님 덕이지. 나까지 가고 나면 의술이가 누구를 찾았겠어. 참 다행이야. 그런데 진짜 편지가 오긴 왔다는 거야?"남북 이산가족 서신왕래를 앞두고 북측에 살아있는 조카 황의술(71세)씨의 편지를 기다리는 황각주(78·전주시 삼천동)씨는 가슴 졸이는 하루를 보냈다. 최근 10년 사이에 의술씨의 두 누나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반세기를 돌아 판문점을 넘어 온 조카의 편지가 못내 아쉽고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다. 증조할아버지부터 3대를 내리 외아들로 지내다 황씨의 큰 형님이 낳은 아들이 바로 북에 있는 의술씨. 당시만해도 의술씨는 황씨집안의 희망이었다. 해방전 만주에서 교편생활을 했던 황씨의 큰 형님은 두딸과 의술씨를 남긴 채 사망했고, 의술씨 가족은 고향인 전북완주로 내려와야 했다. 황각주씨가 기억하는 조카 의술씨는 향학열이 높고 주변에 사람이 많은 젊은 대학생이었다. 의술씨는 전주에서 야간중학교를 나와 전북대의 전신인 명륜대에 이어 군산해양대를 다니다 한국전쟁시 퇴각하는 인민군에 휩쓸려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 집안의 기둥이라 믿었던 조카를 잃어버린 황씨 가족은 아픈 기억을 가슴속에 묻어둔 채 반세기를 보냈다. 조카의 편지가 왔다는 소식에 "자식은 몇이나 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사실 황씨는 조카의 생사를 알 길이 없어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일 생각도 했다.그러나 황각주씨는 무엇보다 반가운 조카의 편지를 기다리면서도 가슴 한켠에서는 조심스런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쟁을 경험했던 황씨로서는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하게 살아온 온 그간의 세월이었다. 행여나 어렵게 알게된 조카의 생사가 또 다른 상처를 만드는 것은 아닌가하는 염려가 황씨 가슴을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2001-03-16
- “토종 야생화 이렇게 키우세요” 여성들을 대상으로 토종 야생화 재배법을 교육, 우리 꽃에 대한 관심과 종자보급이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경북 칠곡군농업기술센터는 오는 21일과 28일, 4월6일 등 3회에 걸쳐 지역 여성들을 대상으로 야생화재배법 교육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세월에 묻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우리 꽃 야생화의 손쉬운 재배법을 개발, 보급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교육은 바위취, 섬초롱, 기린초, 앵초, 상록패랭이, 돌담풍 등의 야생화 키우는 방법과 관리 요령, 품종별 형태별 분올리기, 작품만들기 기초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칠곡농업기술센터는 “우리 꽃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자연자원인 식물을 보존하고 활성화시키려는 목적이 담겨 있다”며 “토종 야생화를 새로운 농가소득 작목으로 육성해 농촌여성들의 삶의 질 향상 뿐 아니라 우리 꽃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칠곡 허신열 기자 syheo@naeil.com 2001-03-15
- 농촌에서 띄우는 편지 의복이 훌륭하지 못했던 옛날에도 소·대한이 지나면 얼어죽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우수가 지나면 대동강 물이 풀린다고 했고 경칩이 지나면 개구리 입이 떨어진다고 했다. 경칩인 내일이 지나면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 날 때가 되었는데 어찌 된 날씨인지 개구리 입이 새로이 다물어 질 것만 같다. 아침을 먹고 난 뒤부터 시작된 눈이 두 시간만에 발등이 묻힐 만큼 내렸고 오후가 된 지금에도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소리는 한겨울 날씨다. 분명 봄은 우리의 곁에 가까이 다가왔지만 봄 같지 아니하다. 어느 해 보다도 춥고 눈도 많이 내린 지난 겨울은 농민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살아가기 어려웠기에 더 춥게 느껴졌던 한해 겨울이 아닌가 싶다. 겨울 날씨가 평년보다 추웠기에 비닐 하우스 안의 일이나 했지 밖에서 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겨울에도 전지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일이월 날씨가 다른 해보다 춥고 눈도 잦아 봄 일이 내남없이 많이 늦어졌다. 비가 온다기에 어제는 사과나무 밭에 비료를 쳤다. 날씨만 좋아지면 이제 가지치기도 하고 거름도 내어야 한다. 볍씨를 준비하고 한달 만 지나면 파종도 해야 한다. 새 봄이 시작된 것이다. 예전에는 이맘때쯤 되어서 누구라도 인사말을 할 때면 으레 "희망찬 새봄을 맞아서...."라는 말로 시작하기가 예사였다. 그러나 그 말은 정말 옛말이 되어 버렸다. 지금의 농민들은 희망찬 새봄을 맞아 희망을 잃어 버렸다.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자네는 올해 농사 무얼 하나?"라고 물으면 열에 하나같이 "해 먹을게 있어야 하지."라고 대답한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자동차 수출하는 대신에 오렌지 수입하고 휴대폰 수출하는 대신에 참깨, 콩 수입한다니 자동차 휴대폰 장사야 살아갈 수 있겠지만 농민은 어찌 살란 말인가? 둘 형제 있는데 아버지라고 "니형 잘 살아야 되지"라고 하면서 동생이야 죽든 살든 형 잘 되도록만 한다면 하루 이틀 일 이년은 몰라도 세월이 지나 자기 죽을 형편이 되면 아무리 착한 동생인들 그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겠는가? 농사 망할 형편 되면 삽 들고 길거리로 나오는 것은 책에 있는 이야기고 그래도 안되면 어찌할까? 도둑놈, 강도가 따로 있고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게 아니었을게다. 농민은 마음씨 좋고 착하다고 한다. 물론 그 이야기가 맞겠지만 농민이 파산을 해도 계속 착하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농민이 망해서 자동차, 휴대폰 판돈 찾으려 가기 전에 제도적으로 돌려주는 방법을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자동차 수출한 사람, 휴대폰 수출한 사람이라고 문패에 써 부쳐놓고 사는 세월도 아니고 부도난 농민이 올바르지 못한 직업으로 바꾸어서 도시로 나가서 사회문제가 되면 그때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오렌지 수입하는 대신에 자동차 수출하면 수출 자동차 한대에 농촌회생 특별세 얼마 징수해서 피해보는 사과, 배 재배농민에게 돌려주고 참깨, 콩 수입하는 대신에 휴대폰 수출하면 얼마 징수해서 밭농사 짓는 농민에게 돌려주면 어떨까? 농촌 회생 특별세가 마음에 안 들면 이름이야 만드는 사람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지어도 착한 농민들은 아무도 성내지 않을게다. 배용규 2001-03-12
- 인터뷰: 북녘의 딸 생존 확인한 서송명 할머니(100, 가능2동) "성해가 살아 있다고."딸의 생존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 가능2동 서송명 할머니(100)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1950년 평양 공습 때 헤어지고 그 후 50년 동안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던 딸이었다. 만삭이었던 그 딸은 곧 해산을 했는데 그 때 태어난 아이가 이미 50이 됐다. "너무나 정정하셨는데, 요즘은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23세에 결혼해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막내 며느리 이 은숙(50)씨의 말이다. 20여 년 전이었던가. 딸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38선 망향대 땅바닥에 주저앉아 어머니는 딸의 이름을 부르며 하염없이 통곡을 하더라고 셋째 딸 성숙(69)씨는 말한다.적십자사에 따르면 그 딸은 75세의 할머니가 돼 현재 평양에서 살고 있다. "무조건 서문고녀 옆 집 누구누구"라고만 말했죠, 한데 이렇게 생존 소식이 전해질 줄이야" 소식이 전해지던 날, 어머니 뿐 아니라 형제들도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둘째딸 성자(73씨는 혈압이 올라 수술을 연기해야 했고, 셋째 딸 성숙씨도 어렸을 때의 언니를 생각하느라 다른 일을 붙들지 못하고 있다. 같이 남하했던 먼 친척들도 부탁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만일 언니를 만나면 북의 혈육들에게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달라는 것이다.하지만 서송명 할머니는 이번에 서신 교환 명단에만 올라 있다. 요즘 어머니는 부쩍 당신이 이미 평양의 고향에 가있는 듯한 착각을 자주 일으킨다고 한다. "내 딸 좀 눈에 뵈게 해주오. 하늘 나라에 가서라도 은혜를 갚을게. 너무도 이쁘고, 효성이 지극했던 내 딸 좀 보게 해 주오."생사 확인 후, 서신교환까지는 하게 됐지만, 과연 딸을 만날 수 있도록 세월은 기다려 줄까.정이훈 기자 ihjung@naeil.com 2001-02-05
- 정(情)을 심어주는 주엽공업고등학교 지수경 교사<368호/교육> 교직에 몸담은 17년이라는 긴 세월중에 덩치 큰 고등학교 남학생들과 사이좋게 생활한 시간이 반이 넘는다는 지수경 교사는 주엽공업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있다.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해가 갈수록 아이들의 순수하고 착한 면을 볼 수 있어 교사라는 직업에 자부심과 재미를 느낀다고 한다. 오히려 의욕이 넘쳤던 교직 첫해, 큰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다는 지수경 교사. 지금도 그 당시 담임으로서 자퇴위기의 학생을 구제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늘 자신을 괴롭힌다고 한다. 그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지만 그후로는 아이들을 사회에서 해결하도록 절대 학교에서 포기하는 일없이 교사로서 최선을 다한다. 졸업 3년후 늠름한 사회인으로 열심히 사는 자식들의 모습에 부모님들이 잔칫상을 차려 놓고 그녀와 남편을 초대해 주며 작은 선물을 전해주던 일이나 마지막 학기의 납부금이 없어 취업을 못하던 제자를 위해 선뜻 내주었던 적지 않은 돈을 일년이 지난 어느 날 감사를 전하며 커다란 과일바구니와 함께 돌려 받았던 일 등은 따뜻한 情을 심어주던 그의 교직생활에 보람을 더해 주었던 일 이다. 작년에는 학생과의 생활지도를 맡으며 강함과 부드러움을 조화 있게 보여주기 위해 남다른 고충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동료교사들에게 아이들에 대한 믿음, 이해와 용서를 적극 권한다. 교사들의 인내력이 많은 아이들의 상처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 교사. 학년이 바뀔 때마다 또는 졸업 후에 어느 날 성숙한 모습이 되어 지 교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해 주는 아이들. 섣부른 선입관이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느끼게 해주는 유쾌한 순간을 자주 경험한다는 그녀는 자신은 물론 모든 교사들이 항상 내 아이를 키우는 심정으로 학생들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한다. 또한 자신이 실수하거나 야단을 쳐야될 땐 꼭 엉킨 마음을 풀어주는 시간을 갖는다는 지 교사. 학생들과의 속 깊은 대화는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아들을 교육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십 년이 지난 후까지 그대로 기억하는 제자들을 보며 교사의 말 한마디에 더욱 책임감을 느낀다는 지 교사. 한때 세 식구가 탔던 승용차가 버스와 충돌하는 큰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던 그녀는 고통을 극복한 이야기를 하며 학생들에게 늘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건강한 육체를 갖고 살아가는 그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기쁨이며 감사할 조건인지. 또한 작은 고민과 좌절정도는 훌훌 털어 버리고 푸르고 싱싱한 젊은이들답게 다시 시작해야한다'고. 공업고등학교임에도 4년제 대학의 높은 진학률, 그녀가 맡은 특기적성 교육의 볼링수업이나 학교축제를 위한 미술 작업을 할 때면 학생들의 무한한 가능성과 재능에 감탄을 하는 지 교사. 그녀는 학생들에게 '끈질기게 배우려고 하는 자세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힘주어 강조한다.전미정 리포터 flnari@naeil.com 2001-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