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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과장과 민대리의 펀드이야기 볼거리가 마땅치 않았던 어린 시절, 관심의 대상이 된 것 중의 하나가 프로레슬링이었다. 당시 김 일 선수가 박치기로, 덩치 크고 반칙 잘 하는 일본 선수들을 쓰러뜨릴 때 쾌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우리편은 언제나 이기고, 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우리의 영웅 이였던 김일 선수의 노쇠한 모습을 보았고 세상살이에는 이기고 진다는 것이 존재하며 가능하면 이기려고 애쓰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세상이 그렇듯이 주식시장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대상을 정하고 이겨서 높은 수익을 얻고자 한다. 물론 시장이 전반적으로 레벨업 되어 높은 수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만족할 수 있을 것이지만 시장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질 않고 종목 선택능력, 자금의 제한 등 여러 가지 제약조건이 있어 항상 승리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펀드의 경우는 어떨까. 직접투자에 비하면 대규모 자금으로 다양한 종목에 분산투자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펀드 운용을 하기에 다소 유리하지만 펀드도 장기적으로 시장을 이기기는 쉽지 않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패자의 게임’일 때 부각인덱스펀드는 이처럼 시장에서 승자가 되기란 쉽지 않다는 것과 1970년대 후반 미국 주식시장이 정체에 빠지는 등 주식시장은 ‘패자의 게임’ 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증가하게 되자 부각되기 시작했다. 인덱스펀드란 펀드의 수익률이 주식시장의 주가지수(인덱스=Index)와 가능한한 유사하게 움직이도록 운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상품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인덱스펀드는 주가가 저평가돼 있어 상승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될 때 주가지수 수준만큼의 수익률을 원하지만 자금이 부족하거나 종목선택 능력에 자신이 없는 개인이나 장기적으로 자산을 운용하고자 하는 연기금 등이 선택하기에 적합한 투자수단이다. 이는 인덱스펀드가 투자대상 종목과 비율을 주가지수와 유사하게 해 주가 상승시 펀드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에 따른 것이다. 물론 일반 액티브형 펀드에 비해 잦은 매매를 할 필요가 없으므로 펀드 운용비용의 절감 효과도 상당하다. 인덱스펀드의 진화최근 시스템의 발달로 이러한 인덱스펀드에서 좀 더 진보된 인덱스펀드도 출현하게 됐다. 기본 전략은 인덱스펀드와 동일하지만 파생상품 시장과 전산 시스템을 이용해 위험 없이 추가수익을 얻는 차익거래를 함으로써 인덱스 대비 초과수익을 목표로 운용하는 펀드가 그것이다. 이러한 인덱스펀드는 미국의 뱅가드사에 의해 주로 운용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운용되고 있는 인덱스펀드의 수익률 추이를 살펴보면 실제 주가지수 변동율에 비해 초과 수익을 시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기투자가 유리 그러면 인덱스펀드는 어떻게 투자해야 할까. 무엇보다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장의 등락에 그대로 노출되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단기적인 시장의 등락에서 가입시점과 환매시점을 포착해 수익을 얻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10여년 이상 장기적으로 시장이 상승할 것이라면 여윳돈이 생기는 대로 자신의 노후나 자녀를 위해 매월 소액으로라도 인덱스펀드에 투자하고 10여년 후에 돈을 찾는 방식의 투자 방법도 고려해 봄직하다. 강영선(kys68@lgsmail.lg.co.kr) LG투신운용 마케팅팀 과장 2001-03-07
- 김종회 교수의 이산가족 이야기 100명씩의 이산가족이 서울과 평양을 교환 방문하는 '눈물의 행사'가 이제 세 차례를 넘겼다. 앞으로도 이 행사가 계속될 수 있을까? 아직 알 수 없다. 남북 양측은 다음 차례의 행사에 대해 아무런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3차 이산방문단이 남긴 것이를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은 때로 탄식을 발하고 때로 눈시울을 붉혔으되, 대체로 무덤덤했다. 경제가 어렵고 살기가 곤란한 판이기도 하지만, 앞서 두 차례의 행사를 바라보는 동안 감정선에 면역이 생기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행사의 내용 자체에 큰 변화나 발전이 없으므로 유달리 반응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그러나 한 가족 한 가족이 반백년을 그리던 친혈육을 만나는 자리는, 그와 같은 차갑고 복잡한 계산법과 관계없었다. 정말 기적처럼 살아있는 구순의 노모를 만난 칠순의 아들, "어머니, 앓지 말라요. 하나도 걱정 말라요. 통일되면 다시 올께요"라며 눈물을 삼켰다.50년을 수절해 온 부인과 그 딸이 북한에서 온 남편이자 아버지를 만났는데, "50년만에 만나니 꿈만 같지만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다"는 약속 아닌 약속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아무리 능숙한 작가가 명장(名匠)의 솜씨로 소설을 쓴들, 이보다 기막힌 사연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자, 그런데 이 땅에는 이러한 엄청난 사연을 가진 이산가족들이 무려 1000만이라는 숫자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이를 제쳐두고 무슨 동포애니 인도주의니 인류의 양심이니 하고 이런저런 논의를 내놓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납북자·국군포로 문제 도출 그런데 이번 이산방문단 교환이 끝난 후, 지난 1·2차 때와 분명히 다른 한가지를 짚어두자면, 그것은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에 대한 공개적 언급의 시발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1969년 12월 강릉에서 납치된 KAL기 승무원 성경희씨가 평양에서 어머니 이후덕씨를 만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30여 년의 세월에 어머니는 처음에 그 딸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너 내 딸 맞아?" 이것이 그 어머니의 첫마디 말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에 헤어진 딸이 어느덧 50대 중반의 남편과 두 아이를 둔 엄마로 나타났으니, 밤마다 꿈에 그려온 딸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그런가 하면 평양에서는 국군포로 출신 두 사람이 남에서 간 가족과 만났다. 남북 양측은 이 사실을 별다른 거리낌없이 보도했으며, 지난번 2차 방문시 동진호 갑판장 보도 때처럼 보도 제한에 크게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이처럼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가 남북간 이산가족 교환 사업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그래도 세 차례에 이르도록 이 사업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북한에서는 의거입북이나 귀순은 있을지언정 납북자나 국군포로는 없다는 입장이었고 그 입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반면에 우리측은 이 문제를 독단적으로 계속 주장하면 남북간에 모처럼 조성된 대화 분위기를 깰 수 있으므로, 포괄적 이산가족 범주에 넣어 조심스럽게 해결을 추진해 나간다는 입장이었다.이제 그와 같은 조심성은 그만두어도 될 시점에 이르렀다. 이제는 이처럼 돌출된 문제를 남북간의 협상 테이블에 공식적으로 올려놓지 못할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그것이 이번 3차 방문의 가장 큰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남북간 의제에 제한 없어야정부와 한적의 집계에 따르면, 6·25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피랍된 납북자는 7034명, 국군포로는 1만9000명이며 이 가운데 납북자 337명과 국군포로 343명이 아직 북한에 남아있는 것으로 생사가 확인된 상태이다.이들을 송환하기 위해 성실한 노력을 다하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해당한다. 미국이 미군 사망자의 유해를 한 구라도 더 발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그간 '6·25전쟁 국군포로 가족협의회' 등 민간단체들은, 정부에 비전향 장기수와 납북자·국군포로의 상호교환을 요구하는 엄격한 상호주의를 적용할 것을 강력히 주문해 왔다. 그러나 이 주문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이 문제를 대강 어물쩍 넘기고 '포괄적' 범주에 넣어 해결하려고 하면, 자칫 저들의 의거입북이나 귀순의 주장을 납득하는 것이 된다. 마침 이번에 왔던 김경락 북측 단장이 33명의 비전향 장기수를 송환해달라고 요구했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9월2일 63명의 장기수를 보내는 것으로 종결됐다고 한다. 만에 하나라도 보낼 사람이 있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고 상호호혜원칙에 따른 공식 의제로 채택해야 한다.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사무국장/경희대 교수 2001-03-04
- “일제가 무릎꿇을 때까지 공부할래요” “정신대 문제 때문에 일본을 갔어요. 그런데 일본을 너무 몰랐어요.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하는데….”일제 정신대 피해자인 이용수(73·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할머니가 비록 명예학생의 신분이지만 대학원 과정인 경북대 사회교육원을 수료했다.대학원 수료기념사진을 찍기위해 4일 학교를 찾은 이 할머니는 곱게 차려입은 한복 위에다 푸른색 띠가 둘러져 있는 가운을 입으며 매무새를 추스리다 쉽지 않았던 지난 5년이 떠오르는 듯 잠시 손길을 멈추었다.“96년 초, 일본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이 같은 얘기를 전해들은 주위 분들이 도와줬어요. 정말 고마운 분들입니다.”같은 해 사회교육원 명예학생으로 등록한 이 할머니는 3년의 학부과정과 2년간의 대학원 과정을 이수했다. 이 할머니는 특히 일본어와 역사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제를 반드시 무릎꿇게 만들기 위해서였다.“필기는 생각조차 못했어요. 수업을 듣는 것 만해도 무척 힘이 들었어요. 몇 번이고 포기할까 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동료 학생들이 적극 도와주었어요.”이 할머니는 어쩌면 형극과도 같았던 수학 과정을 담담하게 들어주었다.대동아 전쟁이 한 창이던 43년, 봉우리를 피우기도 전인 14살 때 집(대구시 북구 칠성동)으로 쳐 들어온 일본군과 경찰에 의해 대만까지 끌려간 이 할머니는 해방 이듬해까지 일제 위안부로 전락해 오욕을 세월을 살았다. 46년, 고향으로 돌아 온 그에게 남겨진 것은 자신을 기다리다 병든 어머니와 만신창이 육신, 주변의 따가운 시선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여자로써의 삶을 포기한 이 할머니는 40여 년을 숨어 지내며 모진 삶을 헤쳐가야만 했다. 지난 92년 이 할머니는 일제의 만행을 폭로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 참가하고 대구지역 정신대 할머니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기 시작했다. 일제만행 규탄운동에 앞장서는 등 활발한 사회운동을 펼쳤다. 지난해에는 ‘2000 도쿄 여성국제전범재판’에 증인으로 출석,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공로가 인정돼 미 의회가 주는 인권상을 받기도 했다.이 할머니는 북한에 있는 정신대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반세기가 지나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원망하기 보다는 힘을 합쳐 이기기 위해서다.“피해자가 엄연히 살아있는데도 최근 들어 일본은 정신대를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정신대 문제는 우리 나라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몫입니다. 그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올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해야겠어요.” 대구 유선태 기자 youst@naeil.com 2001-03-04
- 정지용 시인 아들 형제 만남 북으로 간 시인을 아버지로 둔 남과 북의 형제자매들이 마침내 반세기만에 만나게 됐다.화제의 주인공은 정지용 시인의 장남 구관(74·남측)씨와 딸 구원씨(68·남측), 그리고 3남 구인(67·북측)씨 등 3남매.구관씨는 이번 3차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동생 구인씨에게 전달하기 위해 지난 22일 부모님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마련했다. 부모님과 4남매의 어릴 적 모습이 생생한 이 사진은 원본을 컴퓨터로 스캐닝한 것.구인씨는 또 "늦게나마 계수씨에게 전해줄 옷감도 마련했다"고 말했다.정 시인과 이들 남매들이 헤어지게 된 것은 지난 50년 8월쯤. 갑자기 남하한 인민군에 의해 정시인이 구금되고 둘째 동생 구익씨(당시 19세)와 막내동생 구인씨(당시 17세)가 행방불명 된 것.그후 여동생과 함께 남한에 남게 된 구관씨는 항상 '월북시인의 아들'이라는 꼬리표에 묶여 정상적인 직장생활은 생각도 못한 채 세월을 보내게 됐다고 회고했다."살다 보니 인생이 너무 단촐해. 각종 허드렛일을 하다가 68년부터 탄광사업을 하게 됐는데 우연히 납북된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했고, 아버지의 해금을 위해 10여 년을 돌아다녔지. 그 후 10여 년이 지나 그리운 동생을 만나게 되고, 그러고 나니 죽을 나이가 가까워지고 있구만."동생 구인씨에 대한 구관씨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4남매 중 가장 인물이 좋고 총명해 아버지의 남다른 귀염을 받았다. 그렇지만 행방불명된 동생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지난 95년쯤 행정당국에 동생의 사망신고를 접수했다. 그러나 2년뒤인 97년 연변 지용제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연변 문학인들을 통해 동생이 아직 북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방송사 기자로 일하다 퇴임하고 방송위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었던 동생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어. 그런데 이제 만나 다시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목이 메이는구먼."한편 문학계는 정 시인 아들형제의 만남을 통해 북송 이후 정 시인의 추가 행적이 드러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까지는 북송된 정시인이 감옥에서 폭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정부 정이훈 기자 ihjung@naeil.com인터뷰: 3차 이산가족 상봉단에 낀 시인 정지용의 장남 구관씨주제: 다시 헤어질 것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사진 1, 구관씨가 어렸을 적 부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사진 2, 시인 정지용 가족 사진, 부부와 딸 구원씨, 그리고 구관씨, 구인씨, 구익씨(왼쪽부터) 2001-02-26
- 집권 3년 평가도 정쟁일환 제목: 국민의 정부 3주년 평가 부제: 민주, 한나라 제각각 해석 25일로 3주년을 맞은 국민의 정부에 대해 여야는 이해관계에 따라 극단적으로 엇갈린 평가를 내렸다.(▶관련기사 2면) 민주당 김영환 대변인은 25일 성명을 통해 “국민의 정부 출범 3년 동안 7대 성과와 3대 과제가 도출됐다”고 평가했다. 성과로는 △IMF 관리체제 극복 △남북 정상회담성사 △금융구조조정 등 4대 개혁추진 △4강 외교 등 전방위 외교 △지식정보사회의 기반구축 △민주인권국가 실현 초석 △전국민연금시대 등 생산적 복지사회 실현이 제시됐다. 3대 과제로는 경제 재도약을 통한 민생안정과 정치개혁을 통한 희망정치 실현 그리고 국민대통합을 제시했다. 한나라당은 전혀 다른 평가로 맞섰다. 23일 특별성명에서는 “김대중 정권 3년은 총체적 실정으로 나라가 결딴난 치욕의 세월이었다”면서 “이제 국민들은 이 정권에게 아무런 기대와 희망을 갖지 않고 있다”고 혹평했다. 세부평가에서도 경제민생 정책은 모두 실패했으며, 사회안전망 대책은 속수무책이며, 대북외교 정책은 외화내빈이라고 비판했다. 이밖에도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대변인 논평 외에도 별도의 정책자료집 등을 통해 공방을 거듭해 평가보다는 정쟁에 더욱 관심이 있음을 보여줬다. 2001-02-26
- 집권 3년 평가도 정쟁 일환? 25일로 3주년을 맞은 국민의 정부에 대해 여야는 이해관계에 따라 극단적으로 엇갈린 평가를 내렸다.(▶관련기사 2면) 민주당 김영환 대변인은 25일 성명을 통해 “국민의 정부 출범 3년 동안 7대 성과와 3대 과제가 도출됐다”고 평가했다. 성과로는 △IMF 관리체제 극복 △남북 정상회담성사 △금융구조조정 등 4대 개혁추진 등을 꼽았고, 3대 과제로는 경제 재도약을 통한 민생안정과 정치개혁을 통한 희망정치 실현 그리고 국민대통합을 제시했다. 한나라당은 전혀 다른 평가로 맞섰다. 23일 특별성명에서는 “김대중 정권 3년은 총체적 실정으로 나라가 결딴난 치욕의 세월이었다”면서 “이제 국민들은 이 정권에게 아무런 기대와 희망을 갖지 않고 있다”고 혹평했다. 세부평가에서도 경제민생 정책은 모두 실패했으며, 사회안전망 대책은 속수무책이며, 대북외교 정책은 외화내빈이라고 비판했다. 이밖에도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대변인 논평 외에도 별도의 정책자료집 등을 통해 공방을 거듭해 평가보다는 정쟁에 더욱 관심이 있음을 보여줬다. 2001-02-26
- <문화유산> 13. 현존하는 고려의 목조건축들 … 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 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 고 최순우 선생의 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시대를 초 월하는 무량수전의 건축적 교훈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목조건축물들 가운데 지금까지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남북한을 통틀어 약 10여동 정도다. 현재 남한에는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강릉 객사문’ 등이 남아 있는데, 하나같이 건축적으로 튼튼하면서도 세 련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명작들이다. 대부분 변방에 있던 작은 건물들 000 그렇지만 이 건물들 모두가 당대(고려시대) 최고의 건축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건축물들은 당연히 개성 일대에 지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건축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단지 외진 곳에 있거나 운이 좋아서 오랜 세월과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 당대의 눈으로 보자면, 강릉 객사문은 시골 관아의 정문에 지나지 않는다. 또 부석사 무량수전이 나 수덕사 대웅전을 제외한다면,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은 인쇄창고로 쓰이던 건물이고, 봉정사 극락 전은 소박하게 지어진 조그만 시골 절집 건물에 불과하다. 서울(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작은 건물들이 이렇듯 견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고려 시대 건축문화의 기술 수준과 미학적 깊이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13~14세기 이후 고려의 목조건축은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을 계승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구조적 안정성을 모색, 하나의 고유한 형식을 완성하게 된다. 이 시기 건축가들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구조기법을 받아들이는 한편, 전래의 구조 기법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기법을 고안해냈고, 이를 통해 공예적이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 했다.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시대 이전,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처마 를 받치는 공포( 包)의 처리기법에서 구조기능에 충실한 고유의 형식이 가장 완전하게 구현된 건축 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두 건물의 과도적인 특성을 계승하면서 건축물의 형태적 아름다움이 가 장 극적으로 표현된 건물이다. 이 시기에 완성된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구조기법들은 이후 부분적으로 확대발전하기도 하고, 독 창적인 양식으로 변형되기도 하면서 조선시대 목조건축으로 이어진다. 유일한 통일신라식 목조기법 000 경북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공민왕 12년(1363 년) 에 중수한 기록이 발견됐으며 건축양식 등으로 미루어 처음 건립된 시기는 고려 중기인 1200년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극락전은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과는 전혀 다른, 신라시대부터 전해내려온 전통적 인 구조방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같은 주심포(柱心包 : 기둥 위에만 포가 놓이는 구조법) 방식이 지만,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을 지낸 김동현 박사는 극락전의 주심포 방식을 ‘라대(羅代) 주심 포’부석사나 수덕사 이후의 방식을 ‘려대(麗代) 주심포’로 구별하기도 한다. 군산대학교 배병선 교수는 창건 당시 극락전 불단 위에 가설된 ‘닫집’이 완벽한 ‘다포계’ 구조 형식이라는 점에 근거, 다포계 형식이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편 최근 봉정사 대웅전 해체·보수과정에서 오래된 수법(手法)의 부재(部材)와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에 불단 조성(至正二十一年啄子造成)’이라는 묵서명이 발견되어, 지금까지 조선초로 추정되던 대웅전 건립연대를 고려 말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구조적 안정성과 의장적 효과 000 1308년에 창건된 충남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은 이 시대에 유행한 ‘주심포’ 형식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실내에 고주(높은 기둥) 4개를 세워 맞배지붕을 받치는 간결한 구조이다. 사용 된 부재는 섬세하고 정교하게 마무리되어 장식효과를 살리고 있고, 기둥은 완만한 곡선의 배흘림이 다. 대들보나 종보 등을 받치는 부재는 하나의 통일된 곡선 무늬로 장식되었다. 경기대 건축공학과 김동욱 교수는 《한국건축의 역사》(1997.기문당)에서 “구조기능에 충실한 짜임을 한 대신, 눈에 잘 띄는 부분부분을 통일된 화려한 장식으로 보강한 것이 수덕사 대웅전의 특징이다. 구조적 안정성에 의장적 효과가 한 건물 안에 잘 수렴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목수들이 창조했던 목구조의 법식을 가장 완벽하 게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여기에 사용된 기법들은 조선시대 이후까지 전승되어 우리나라 목구조기술의 정수를 이루고 있 는데,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김봉렬 교수는 이를 △기둥의 안쏠림과 배흘림, 귀솟음 △평면의 안허리곡 △항아리 모양의 대들보 등으로 요약한다. ‘안쏠림’은 ‘오금법’이라고도 하며 기둥머리를 건물 안쪽으로 약간씩 기울여 주는 것을 말 한다. 기둥이 전체적으로 사다리꼴 모양으로 세워지는 것인데 눈으로는 거의 알아채기가 힘들다. ‘귀솟음’은 건물을 앞에서 볼 때 가운데쪽 기둥보다 양쪽 추녀쪽 기둥을 갈수록 조금씩 높여주 는 것이다. 귀솟음을 주지 않을 경우 착시현상으로 건물 양어깨가 처진 것처럼 보인다. 안쏠림과 귀솟음은 시각적인 안정감을 줌과 동시에 하중을 가장 많이 받는 귓기둥을 높여줌으로써 구조적인 안정감도 준다. ‘배흘림’이란 기둥의 가운데 부분을 불룩하게 깎는 기법이고, 평면의 ‘안허리곡’은 평면을 직사각형으로 만들지 않고 네 변의 중앙을 약간 안쪽으로 들이밀어 기둥을 세우는 방법이다. ‘항아 리형 보’는 보의 단면을 항아리처럼 위는 둥글고 아래는 직선으로 깎는 것을 말한다. 모두가 시각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고 각 부재의 조립을 쉽고 튼튼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들이 다. 무량수전의 뛰어난 아름다움은 이런 기법들이 완벽하게 적용되어 있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다. 2001-02-23
- 메모장으로 변환 13. 현존하는 고려의 목조건축들시대를 초월하는 공예정신의 승리… 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고 최순우 선생의 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무량수전의 건축적 교훈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목조건축물들 가운데 지금까지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남북한을 통틀어 약 10여동 정도다. 현재 남한에는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강릉 객사문’ 등이 남아 있는데, 하나같이 건축적으로 튼튼하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명작들이다.대부분 변방에 있던 작은 건물들 000그렇지만 이 건물들 모두가 당대(고려시대) 최고의 건축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건축물들은 당연히 개성 일대에 지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건축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단지 외진 곳에 있거나 운이 좋아서 오랜 세월과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 당대의 눈으로 보자면, 강릉 객사문은 시골 관아의 정문에 지나지 않는다. 또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을 제외한다면,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은 인쇄창고로 쓰이던 건물이고, 봉정사 극락전은 소박하게 지어진 조그만 시골 절집 건물에 불과하다. 서울(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작은 건물들이 이렇듯 견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고려시대 건축문화의 기술 수준과 미학적 깊이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13~14세기 이후 고려의 목조건축은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을 계승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구조적 안정성을 모색, 하나의 고유한 형식을 완성하게 된다. 이 시기 건축가들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구조기법을 받아들이는 한편, 전래의 구조기법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기법을 고안해냈고, 이를 통해 공예적이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시대 이전,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처마를 받치는 공포( 包)의 처리기법에서 구조기능에 충실한 고유의 형식이 가장 완전하게 구현된 건축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두 건물의 과도적인 특성을 계승하면서 건축물의 형태적 아름다움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건물이다. 이 시기에 완성된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구조기법들은 이후 부분적으로 확대발전하기도 하고, 독창적인 양식으로 변형되기도 하면서 조선시대 목조건축으로 이어진다. 유일한 통일신라식 목조기법 000경북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공민왕 12년(1363년) 에 중수한 기록이 발견됐으며 건축양식 등으로 미루어 처음 건립된 시기는 고려 중기인 1200년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극락전은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과는 전혀 다른, 신라시대부터 전해내려온 전통적인 구조방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같은 주심포(柱心包 : 기둥 위에만 포가 놓이는 구조법) 방식이지만,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을 지낸 김동현 박사는 극락전의 주심포 방식을 ‘라대(羅代) 주심포’부석사나 수덕사 이후의 방식을 ‘려대(麗代) 주심포’로 구별하기도 한다. 군산대학교 배병선 교수는 창건 당시 극락전 불단 위에 가설된 ‘닫집’이 완벽한 ‘다포계’ 구조 형식이라는 점에 근거, 다포계 형식이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편 최근 봉정사 대웅전 해체·보수과정에서 오래된 수법(手法)의 부재(部材)와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에 불단 조성(至正二十一年啄子造成)’이라는 묵서명이 발견되어, 지금까지 조선초로 추정되던 대웅전 건립연대를 고려 말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구조적 안정성과 의장적 효과 0001308년에 창건된 충남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은 이 시대에 유행한 ‘주심포’ 형식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실내에 고주(높은 기둥) 4개를 세워 맞배지붕을 받치는 간결한 구조이다. 사용된 부재는 섬세하고 정교하게 마무리되어 장식효과를 살리고 있고, 기둥은 완만한 곡선의 배흘림이다. 대들보나 종보 등을 받치는 부재는 하나의 통일된 곡선 무늬로 장식되었다. 경기대 건축공학과 김동욱 교수는 《한국건축의 역사》(1997.기문당)에서 “구조기능에 충실한 짜임을 한 대신, 눈에 잘 띄는 부분부분을 통일된 화려한 장식으로 보강한 것이 수덕사 대웅전의 특징이다. 구조적 안정성에 의장적 효과가 한 건물 안에 잘 수렴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목수들이 창조했던 목구조의 법식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여기에 사용된 기법들은 조선시대 이후까지 전승되어 우리나라 목구조기술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데,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김봉렬 교수는 이를 △기둥의 안쏠림과 배흘림, 귀솟음 △평면의 안허리곡 △항아리 모양의 대들보 등으로 요약한다. ‘안쏠림’은 ‘오금법’이라고도 하며 기둥머리를 건물 안쪽으로 약간씩 기울여 주는 것을 말한다. 기둥이 전체적으로 사다리꼴 모양으로 세워지는 것인데 눈으로는 거의 알아채기가 힘들다. ‘귀솟음’은 건물을 앞에서 볼 때 가운데쪽 기둥보다 양쪽 추녀쪽 기둥을 갈수록 조금씩 높여주는 것이다. 귀솟음을 주지 않을 경우 착시현상으로 건물 양어깨가 처진 것처럼 보인다. 안쏠림과 귀솟음은 시각적인 안정감을 줌과 동시에 하중을 가장 많이 받는 귓기둥을 높여줌으로써 구조적인 안정감도 준다. ‘배흘림’이란 기둥의 가운데 부분을 불룩하게 깎는 기법이고, 평면의 ‘안허리곡’은 평면을 직사각형으로 만들지 않고 네 변의 중앙을 약간 안쪽으로 들이밀어 기둥을 세우는 방법이다. ‘항아리형 보’는 보의 단면을 항아리처럼 위는 둥글고 아래는 직선으로 깎는 것을 말한다. 모두가 시각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고 각 부재의 조립을 쉽고 튼튼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들이다. 무량수전의 뛰어난 아름다움은 이런 기법들이 완벽하게 적용되어 있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다. 2001-02-23
- 고려목조건축들 13. 현존하는 고려의 목조건축들 시대를 초월하는 공예정신의 승리 … 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 고 최순우 선생의 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무량수전의 건축적 교훈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목조건축물들 가운데 지금까지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남북한을 통틀어 약 10여동 정도다. 현재 남한에는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강릉 객사문’ 등이 남아 있는데, 하나같이 건축적으로 튼튼하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명작들이다. 대부분 변방에 있던 작은 건물들 000그렇지만 이 건물들 모두가 당대(고려시대) 최고의 건축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건축물들은 당연히 개성 일대에 지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건축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단지 외진 곳에 있거나 운이 좋아서 오랜 세월과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 당대의 눈으로 보자면, 강릉 객사문은 시골 관아의 정문에 지나지 않는다. 또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을 제외한다면,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은 인쇄창고로 쓰이던 건물이고, 봉정사 극락전은 소박하게 지어진 조그만 시골 절집 건물에 불과하다. 서울(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작은 건물들이 이렇듯 견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고려 시대 건축문화의 기술 수준과 미학적 깊이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13~14세기 이후 고려의 목조건축은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을 계승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구조적 안정성을 모색, 하나의 고유한 형식을 완성하게 된다. 이 시기 건축가들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구조기법을 받아들이는 한편, 전래의 구조 기법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기법을 고안해냈고, 이를 통해 공예적이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시대 이전,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처마를 받치는 공포( 包)의 처리기법에서 구조기능에 충실한 고유의 형식이 가장 완전하게 구현된 건축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두 건물의 과도적인 특성을 계승하면서 건축물의 형태적 아름다움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건물이다. 이 시기에 완성된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구조기법들은 이후 부분적으로 확대발전하기도 하고, 독창적인 양식으로 변형되기도 하면서 조선시대 목조건축으로 이어진다. 유일한 통일신라식 목조기법 000경북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공민왕 12년(1363년) 에 중수한 기록이 발견됐으며 건축양식 등으로 미루어 처음 건립된 시기는 고려 중기인 1200년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극락전은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과는 전혀 다른, 신라시대부터 전해내려온 전통적인 구조방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같은 주심포(柱心包 : 기둥 위에만 포가 놓이는 구조법) 방식이지만,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을 지낸 김동현 박사는 극락전의 주심포 방식을 ‘라대(羅代) 주심포’, 부석사나 수덕사 이후의 방식을 ‘려대(麗代) 주심포’로 구별하기도 한다. 군산대학교 배병선 교수는 창건 당시 극락전 불단 위에 가설된 ‘닫집’이 완벽한 ‘다포계’ 구조 형식이라는 점에 근거, 다포계 형식이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편 최근 봉정사 대웅전 해체·보수과정에서 오래된 수법(手法)의 부재(部材)와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에 불단 조성(至正二十一年啄子造成)’이라는 묵서명이 발견되어, 지금까지 조선초로 추정되던 대웅전 건립연대를 고려 말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구조적 안정성과 의장적 효과 0001308년에 창건된 충남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은 이 시대에 유행한 ‘주심포’ 형식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실내에 고주(높은 기둥) 4개를 세워 맞배지붕을 받치는 간결한 구조이다. 사용된 부재는 섬세하고 정교하게 마무리되어 장식효과를 살리고 있고, 기둥은 완만한 곡선의 배흘림이다. 대들보나 종보 등을 받치는 부재는 하나의 통일된 곡선 무늬로 장식되었다. 경기대 건축공학과 김동욱 교수는 《한국건축의 역사》(1997.기문당)에서 “구조기능에 충실한 짜임을 한 대신, 눈에 잘 띄는 부분부분을 통일된 화려한 장식으로 보강한 것이 수덕사 대웅전의 특징이다. 구조적 안정성에 의장적 효과가 한 건물 안에 잘 수렴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목수들이 창조했던 목구조의 법식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여기에 사용된 기법들은 조선시대 이후까지 전승되어 우리나라 목구조기술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데,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김봉렬 교수는 이를 △기둥의 안쏠림과 배흘림, 귀솟음 △평면의 안허리곡 △항아리 모양의 대들보 등으로 요약한다. ‘안쏠림’은 ‘오금법’이라고도 하며 기둥머리를 건물 안쪽으로 약간씩 기울여 주는 것을 말한다. 기둥이 전체적으로 사다리꼴 모양으로 세워지는 것인데 눈으로는 거의 알아채기가 힘들다. ‘귀솟음’은 건물을 앞에서 볼 때 가운데쪽 기둥보다 양쪽 추녀쪽 기둥을 갈수록 조금씩 높여주는 것이다. 귀솟음을 주지 않을 경우 착시현상으로 건물 양어깨가 처진 것처럼 보인다. 안쏠림과 귀솟음은 시각적인 안정감을 줌과 동시에 하중을 가장 많이 받는 귓기둥을 높여줌으로써 구조적인 안정감도 준다. ‘배흘림’이란 기둥의 가운데 부분을 불룩하게 깎는 기법이고, 평면의 ‘안허리곡’은 평면을 직사각형으로 만들지 않고 네 변의 중앙을 약간 안쪽으로 들이밀어 기둥을 세우는 방법이다. ‘항아리형 보’는 보의 단면을 항아리처럼 위는 둥글고 아래는 직선으로 깎는 것을 말한다. 모두가 시각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고 각 부재의 조립을 쉽고 튼튼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들이다. 무량수전의 뛰어난 아름다움은 이런 기법들이 완벽하게 적용되어 있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다. 2001-02-23
- 빛으로 거듭난 두 민주화 횃불 70년대 살벌한 3공화국 아래서 자유언론을 요구하다 113명 해직을 몰고온 ‘동아투위’와 570여명이 해직된 원풍모방 사건이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 인정, 25년여만에 빛을 보게 됐다.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이우정)은 19일 심의위원회를 열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장 성유보)와 원풍모방 노조의 활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 명예회복과 보상을 결정했다.보상심의위원회는 현직기자 등 113명(사망자 10명 포함)의 언론인이 한꺼번에 해직당하고, 당시 국내 최대 일간지가 212일간 백지광고를 낸 것은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민주언론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74년10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시작으로 언론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였다.동아투위 사건은 1970년대 당시 박정희정권 시절 동아일보·동아방송 기자와 PD 아나운서 등이 언론탄압에 맞서 싸우다 113명이 강제해직된 사건이다. 백지광고가 200일이상 계속됐고, 이 기간동안 말없는 시민들이 소리없이 건네는 성금이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이들은 이후 긴 세월 동안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냉담한 사회를 온몸으로 경험해야 했다. 오로지 사회정의를 위해 스스로 혹독한 생활고를 불러들이며 사회의 밀알역할을 해 왔다. 이번 결정으로 빛은 언젠가 스스로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해 주었다.원풍모방 노조는 유신이 출범하던 해인 72년 설립, 노조민주화 투쟁의 교과서가 돼 왔다. 그해부터 82년까지 10여년간 570여명이 해고된 뒤 강제 귀향조치됐다. 8명의 노조간부들은 노동쟁의조정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다.이들은 귀향해서도 감시의 눈초리를 느끼며 이들은 모진 박해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경찰서장 농협장 면장 등에게는 이들이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1대 1 감시하라는 특수임무를 부여했다.80년 광주사태 후에는 광주희생자돕기 모금운동에 전 조합원들이 성금을 모아 천주교 광주교구 윤공희대주교에게 전달하는 등 활동으로 신군부에 밉보여 40여명의 노조간부들이 연행되고, 이중 16명이 강제해직됐다. 4명은 삼청교육대까지 보내졌다. 신군부는 노동계 정화조치라는 명분을 내걸고 이들을 박해했다. 문상식 기자 ssmun@naeil.com 2001-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