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검색결과 총 4,713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새만금 사료화 작업 서두르자 새만금사업에 대한 민 관 공동조사단의 활동은 위원들간의 입장차이가 워낙 커 사업지속여부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최종보고서 제출도 두 차례나 연기된 끝에 지난 18일에야 간신히 이루어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결론 없는 보고서가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공동조사단의 의견은 크게 정부측 추천인은 찬성, 민간측은 반대라는 입장으로 양분되었고, 결국 사업추진여부에 대한 결론은 내리지 않기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조사단의 이상은 단장은 이를 어기고 자신의 개인 의견을 첨부해 사업추진 쪽으로 합의가 기운 듯한 최종보고서를 총리실에 제출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세계 최대의 간척사업으로 엄청난 혈세가 투입되고 있는 국가적 정책사안을 일 개인이 이처럼 함부로 좌지우지하려 든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결코 한 사람의 돌발적 만용으로 벌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군부정치시대 이래로 우리사회의 개발이익을 향유하고있는 세력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공동조사단 소속의 한 위원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사업추진을 목적으로 진행된 조사단의 비합리적 운영을 비판하면서 사업의 중단을 위해 학자적 양심을 걸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수질분야 전문가인 이 교수는 새만금 담수호의 수질문제는 현재의 대책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최종보고서의 조사내용을 보면 간척사업으로 인한 편익은 가능한 과대 평가한 반면 수질개선과 생태계파괴로 인한 환경비용은 과소 평가한 흔적이 뚜렷하다. 심지어는 보고서작성과정에서 분과위의 토의내용을 분과위원장이 임의로 누락시키고 합의된 부분도 수정하지 않아 위원들의 항의사태까지 일어난 적이 있다.이런데도 전북도에서는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은 이 것으로 끝났으니 어서 정부가 결정을 내리고 예산집행이 이루어지도록 전 도민과 정치권이 힘을 결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새만금개발은 누구를 위한 사업이기에 모든 비판에 귀를 틀어막고 무작정 밀어붙이고 있는가.그 동안 새만금에 대한 독립적 의사결정 협의체를 기구화할 것을 주장해온 필자로서는 최근의 상황을 지켜보며 참담한 심경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역사는 결코 현재에 머물지 않으며 항상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특히 자연의 조화와 힘을 무시한 무모한 개발의 결과는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타나기에 더욱 그렇다. 새만금사업은 5공시절 호남권 득표를 의식해 이루어진 정치적 결정으로 환경적 측면은 고사하고 경제적 측면에 대한 숙고조차 제대로 없이 급조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 내려진 졸속한 결과물에 관한 정치적 이해 당사자만 바뀌어갈 뿐 이해관계의 끈은 끊임없이 이어져가고 있다.문제는 잘못된 정치가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죄없는 시민들과 자라나는 우리의 아들딸들이 고스란히 치러야 한다는데 있다. 우리는 시대적 과오에 대해 당사자들이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서글픈 역사속에서 살아왔다. 이러한 현실이 위정자들이 국민을 우습게 보고 자신의 입신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는데 대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그런데 잘못된 정책의 책임소재를 아무리 분명히 하려고 해도 정확한 역사적 근거자료가 없으면 훗날 "했다", "안했다" 식의 속빈 청문회밖에 열 수가 없다. 중요한 정치과정은 공개되지 않기 일쑤고 알려진 정보도 시간이 흐르면 의도적으로 왜곡되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새만금과 관련된 모든 역사적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후에 누가 얼마만큼 책임을 져야 하는지가 명확해지도록 준비해두어야 한다.새만금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진지 벌써 15년 가까이의 세월이 흘렀다. 전문가들은 새만금사업의 문제점들이 이미 현세대에 심각하게 나타나리라 예상하고 있다. 새만금관련 사료수집과 정리 작업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새만금 이해당사자들의 책임소재를 밝혀내려는 작업은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올바른 정치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의 하나이기도하다. 민간 전문가들에 의한 새만금사료화 작업이 하루속히 이루어져 정책결정과 집행이 역사 앞에 수시로 검증 받을 수 있는 사회구조가 정립되기를 바란다. 2000-08-29
- 검찰 본지 취재기자 수사방침 본지가 공개한 선거수사문건과 관련, 취재기자 소환 등 검찰의 대응이 위험수위로 치닫고 있다. 문건 유출경위를 수사한다면서 국민의 알 권리와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30일 문건이 공개됐을 즈음에는 대검 감찰부의 자체 조사에서 마무리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선거수사문건 공개는 언론사의 고유한 취재활동이라는 판단뿐만 아니라 정치개혁을 위해 보다 철저한 수사를 바라는 국민의 여망과도 부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일 대검 공안부는 서울지검 공안2부(부장검사 천성관)에 수사를 지시했다. 본사를 수사대상으로 삼겠다는 강경론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민주당 윤철상 사무부총장의 ‘기소제외 의원 10명’ 논란과의 화학적 결합을 우려한 조치로 해석됐다.2일 서울지검은 △특별취재팀의 구성원 및 인적사항 △문건의 입수시기와 경위 등을 알려달라는 를 보냈다. 이에 4일 본사는 △취재원 보호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들어 검찰의 요청을 거부했다.향후 검찰은 취재기자를 대상으로 참고인 자격의 소환조사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역시 본사는 소환조사도 거부할 방침이다. 참고인에 대해서는 검찰이 강제구인할 법적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 결국 검찰은 취재기자를 피의자 자격으로 소환하느냐는 강공책을 놓고 고민할 것으로 보인다. 언론자유를 침해한다는 여론의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소환할 마땅한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세월이 약”이라는 검찰 관계자의 독백이 사건의 성격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2000-09-05
- 349호<문화> 가볼만한 곳-라이브 카페 '비틀즈' 바람을 따라 해묵은 과거로 사라지던 여름이 땀을 식히는 오후.나무의자가 있는 발코니엔 어느새 석양이 와 앉는다. 자유로가 저 멀리 보이고 비틀즈의 감미로운 'In My Life'선율이 흐르는 곳 '비틀즈'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낡은 청바지와 통기타로 젊음을 구가하던 시절의 음악도 '전설' 속에 묻힌 지 오래다. 랩이나 힙합 테크노 음악이 입맛에 맞지 않는 386세대, 혹은 그 이전 세대가 편안히 쉴 곳을 찾기란 모래 속에서 바늘 찾기가 돼 버렸다. 비틀즈를 운영하는 정연욱(37)씨는 말 그대로 386세대다. 젊은 시절 음악에 빠져 DJ생활에 뛰어들기도 했던 그는 특히, 비틀즈 음악의 매력을 잊을 수 없어 카페이름도 비틀즈라 붙이게 된다.'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을 만들자' 그것이 그가 주장하는 경영관이다. 그러기 위해선 다른 곳과 차별되는 음악만이 필요충분조건으로 남는다. "라이브 카페에는 같은 세대들간의 호흡이 있어야 합니다. 비틀즈 세대가 함께 즐기고 함께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 거지요."그래서일까. 그는 별장 같은 고품격의 장소와 정통 라이브 음악을 고집한다. 바람에 날아간 그 시절의 음악, 그것이 곁에 있는 한 지나간 시간을 잡기 위해 안타까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자랑할 만한 음식은 이탈리아 정통 기술로 만든 스파게티와 와인을 곁들인 정식 코스가 있고, 외국에서 재료를 직수입해 준비한 마른안주가 일품이라고 귀띔한다. 영업시간은 오후 1시-새벽 3시이고 라이브 공연은 오후 8시-12시까지 이어진다. 요즘 드라마 삽입곡으로 유명한 '장미의 미소'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을 작곡한 이남우씨와 MBC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 박인옥씨의 '고운님 고운비'도 들을 수 있다.위치는 일산 신도시에서 자유로를 거쳐 통일동산 쪽으로 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육관 표지판이 있는 작은 오솔길로 올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Tel. 945-4355)이영란 리포터 dazzle77@dreamwiz.com박스처리비틀즈(Beatles):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등 4명으로 구성된 영국의 락 보컬 그룹. 하나의 형식에 안주하지 않는 진취적인 성향 속에서 보컬과 코러스의 조화를 탄생시켰다. 'Michelle' 'Girl' 'In My Life' 'Drive My Car' 등 주옥 같은 명곡이 있다. 락계의 전설이라 불린다./이영란 리포터 2000-09-05
- 오페라 하우스 착공 될 듯 오페라 하우스가 3년 허송세월 보낸 끝에 이번 달 안으로 착공에 들어간다.그러나 구 제일모직 부지 전체의 활용방안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언급이 없어 이에 대한 시비는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제일모직은 지난달 25일 관할 대구 북구청에 대구시 북구 칠성동 구 제일모직 자리에 오페라 하우스 건립 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다.지하 2층, 지상 4층, 1천500석 규모로 건립 예정인 이 오페라하우스는 98년 3월 기공식만 가진 뒤 만 2년 6개월만에 본격적인 공사가 이루어지게 됐다.당시 제일모직은 대구시가 구 제일모직 부지를 공업용지에서 상업용지로 바꿔주자 이곳에다 대구시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을 조성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지난 97년 10월부터 기본설계 용역에 들어가 98년 9월 설계를 완료했다. 제일모직은 같은 해 11월 교통영향심의를 거쳐 98년 12월에는 건축심의까지 마쳤지만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공사를 계속 미뤄 시민들의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판 346호(8월21일 발행) 보도>제일모직은 오페라하우스 건립계획 이외에 구 제일모직 부지 전체에 대한 이용계획을 아직까지 내놓지 않고 있다.제일모직은 전체 부지 3만평 가운데 2천600여 평은 오페라하우스, 나머지 공간은 미술관, 운동 및 업무·판매시설 등으로 조성할 계획이었지만 오페라 하우스 건립을 제외한 나머지 사업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제일모직 장규식 총무부장은 “구 제일모직 부지 전체 개발은 현재로선 회사 자금사정 악화 등으로 인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만 대구시민과 약속한 오페라 하우스는 이번 달에 착공, 2002년쯤 완공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고 말했다.●유선태 기자 youst@naeil.com -------------------------------------------------------------------------------- 2000-09-05
- '상호주의 원칙' 고수 논란 6·25 당시 전쟁포로로 억류돼 북한에서 거주하던 강모(70)씨 등 국군포로 4명이 최근 귀환했다.이번에 귀환한 국군포로는 강씨를 비롯, 김모(71) 허모(68) 김모(71)씨 등 모두 4명. 이에 따라 지난 94년 조창호(70)씨 이후 지금까지 귀환한 국군포로는 15명으로 늘어났다.이에앞서 지난달에는 납북어부로는 처음으로 지난 70년 납북됐던 봉산22호 선원 이재근(53)씨가 탈북에 성공, 귀환한 것으로 전해졌다. 비전향장기수의 북송일자가 다가오는 시점에서 이들의 귀환으로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존재가 재확인됨에 따라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해 국군포로 및 납북자 송환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그러나 정부는 이들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이 완강한 상태에서 상호주의 원칙을 고수할 경우 합의사항위반이라는 북측의 항의를 받게된다며 난색을 보이고 있다. ◇국군포로 실태=국방부에 따르면 6·25당시 실종된 군인수는 모두 1만9000여명. 지난 94년 10월 국군포로로는 처음으로 조창호씨가 귀환한데 이어 97년 12월 귀환한 국군포로출신의 양순용·장무환씨 등이 국군포로에 대한 관심을 호소한 것을 계기로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 생존 국군포로 343명의 명단을 확보했다.국방부는 이들 생존확인자 외에 귀환국군포로 등의 증언을 토대로 실종자의 10% 정도인 1900여명의 국군포로가 북한에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실제 북한은 6·25전쟁 당시인 지난 51년 6만5천명의 국군포로를 생포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휴전협정과정에서는 8658명만 돌려보내 많은 수의 국군포로가 북한내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고 있다.더욱이 월맹군 포로출신인 박정환(58·미국 플로리다 한인회장)씨가 지난 7월 베트남전 참전수기 '느시'의 출판기념회에서 "미 중앙정보국문서에 한국군 포로 9명이 북한으로 송환됐음을 확인하는 기록이 남아있다"며 이들의 귀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 국군포로문제의 지평은 월남전으로까지 확대된 상태다.북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은 휴전후 수용소에 감금됐다가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탄광이나 임산사업소 벌목공으로 배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실제 지난해 5월 귀환한 허판영(74)씨는 50년 10월 포로가 된 후 평남 강동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함북 온성탄광에서 채탄부로 30여 년간 일했다고 증언했다. 또 9번째 귀환자인 서병렬(70)씨는 함북 학포탄광 덕흥협동농장에서, 10번째 귀환자인 장진환(70)씨는 신의주교화소를 거쳐 아오지탄광 등에서 오랜 세월 일한 것으로 전해졌다.◇납북자 실태=통일부와 납북자가족모임 등에 따르면 지난 55년 이후 북한으로 피랍됐던 사람은 모두 3767명으로 이들중 454명이 지금까지 억류된 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직업별로는 어부가 407명으로 가장 많고 해군방송선 승무원 20명, 69년 납북된 KAL승무원과 승객 등 12명, 해안에서 납치된 고교생 5명, 해외근무 및 유학도중 납북된 10명 등이다.한국정치발전연구원 윤여상 책임연구위원은 이들 납북자들중 북한체제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정기간 북한체제에 대한 세뇌교육을 받은 뒤 직업을 부여받게 되지만 체제에 저항할 경우에는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다고 밝혔다. 윤위원은 국정원자료를 인용, 지난해 1월 현재 납·월북자중 22명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돼있다고 덧붙였다.◇북한주장=북한측은 '국군포로는 정전협정에 따라 전원 송환했으며 남은 사람들은 지난 조선전쟁시기 남조선 괴뢰들의 반 인민적인 통치에 항거, 공화국의 품으로 의거해온 이전 괴뢰장병과 민간인들뿐'이라며 일관되게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한나라당=한나라당은 지난 7월 국군포로 및 납북자대책특위(위원장 강삼재)를 구성, 국군포로와 납북자 송환에 대한 특단의 대책을 정부에 촉구하기 시작했다.특히 지난 23일에는 '정부가 북한의 입장만 고려해 상호주의를 포기하고 비전향장기수 송환에 앞장선 것은 중대한 잘못'이라며 국군포로 및 납북자 송환문제는 비전향장기수 북한송환과 연계, 2차장관급 회담에서 진전된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재향군인회·납북자가족 모임=비전향장기수의 북송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해 북측도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을 남쪽으로 돌려보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이와 관련, 재향군인회는 지난 21일 성우회 등과 함께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회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를 가진데 이어 통일부장관을 항의방문, 상호주의 원칙을 고수하라고 촉구했다.재향군인회 정일훈안보부장(50)은 "비전향장기수처럼 국군포로에 대해서도 본인 의사확인 후 희망자는 전원 남쪽으로 보내줘야 한다"며 이들의 전부귀환이 목표지만 그 이전단계로 생사라도 확인할 수 있도록 이산가족 상봉 우선대상자로 이들을 지정해줄 것을 정부측에 요구했다.납북자가족모임도 지난 24일 '납북자문제를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의제로 다뤄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청와대 민원실에 제출, 납북자의 조속한 생사확인과 대통령의 적극적 해결의지 등을 요구했다.◇정부입장=정부는 이들 문제에 대한 남·북의 시각차가 현저하다는 점을 감안, 조심스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납북자와 국군포로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가급적 북측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들을 특수 이산가족으로 분류, 광의의 이산가족개념에서 다른 이산가족문제처럼 자연스럽게 생사확인→서신교환→상봉→재결합의 수순으로 해결하겠다는 입장이다.특히 우리측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비전향장기수들을 북송하는 만큼 북측도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주길 기대하는 모습이다.그러나 국방부는 군 사법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국군포로에 대한 이산가족으로의) 신분상 변경을 가져오는 처분을 할 수 없다며 국군포로문제를 이산가족문제의 범주내에서 풀어가려는 통일부 계획에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노기혁 기자 nobad@naeil.com 2000-08-29
- 전교조, 해직교사 명예회복 나서 전교조 경북지부는 올해 1월 공포된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에 따라 지난 21일 전교조 활동 관련 도내 해직교사와 임용제외자 106명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는 신청서를 경상북도에 제출했다.전교조 경북지부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해직교사들의 복직만으로는 해직교사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졌다고 볼수 없다”며 “짧게는 4∼5년, 길게는 20년이라는 세월을 저당잡혀온 교사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아 해직기간동안의 경력 불인정은 물론 아직까지도 사회적으로 냉소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해직상태에서 복직되지 못하고 사망한 교사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가족의 이름으로 명예회복신청서를 신청했다”고 밝혔다.전교조 경북지부는 “앞으로 복직교사의 원상회복과 미복직 교사들의 복직조치는 물론, 민주화 운동 사건의 성격을 올바르게 규정하고 보상의 범위도 확대해 줄 것을 정부에 요청하고, 이와 관련된 해당자들의 사건접수에도 적극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2000-08-26
- 인터뷰-'고부일기' 저자 천정순, 김민희 "미운 정 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세요?" "음, 그건 아무래도 세월을 말하는 것 같어. 세월이 지나 소리없이 쌓이는 먼지 같은 것"우문에 현답이다. 고부일기의 주인공 천정순 여사의 시간을 꿰뚫는 대답.며느리 김민희씨가 '고부일기'를 쓰고 그 화답으로 시어머니 천정순씨가 '붕어빵은 왜 사왔니?'를 출간한 이후로 두 사람은 전국에서 쏟아지는 각종 인터뷰와 방송 출연으로 이제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유명인이 되었다. 인터뷰의 취재 방향을 잡아 줄 정도의 노련함을 보일 정도로… 여름 녹음이 쏟아지는 날, 고양시 오금리 양어장을 찾았다. 주인의 손끝이 느껴지는 아늑한 정원과 아담한 집 그리고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함으로 가득찬 한나절이었다."…이제 남편과 헤어져도 우리 사이 끊어지지 않을 것 같다. 어머니와 자식이 되어버렸으니. 어머니도 늙고 나도 따라 늙었다. 늙는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 쓸쓸함이 우리를 결합시키는 것 같다" 고부일기에서 며느리 김민희씨가 '낙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쓴 내용이다. 시어머니 천정순 여사는 '어깨'라는 글에서 "…과거에는 단거리 육상 선수요, 자세가 바르기로 유명했던 내 어깨가 이렇게 될 줄이야. 그러나 나는 왜 어깨가 내려 앉았는지를 자식들에게 설명하지 않았고, 자식들도 내 어깨에 대해서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덜렁이 같은 며느리가, 저 시집온 지 13년이 지난 오늘, 내 어깨를 주의 깊게 보고 뜻밖의 소리를 한 것이다. 나는 며느리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고 썼다. 서로 결코 융화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이 시간이라는 울타리를 함께 헤쳐 나가며 서로의 존재를 자신의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두 사람은 어딜 가도 함께 다닌다. 각종 인터뷰와 방송출연 제의가 그렇기도 하지만 서로를 그만큼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며느리 김민희씨는 십여년 이라는 긴 기간동안 한국일보 장명수 편집위원(현재 한국일보 사장)의 칼럼에 매일 글을 보낼 정도로 열성적인 문학소녀(?)였고, 아직도 가족의 자랑을 늘어 놓으며 명랑한 웃음소리를 내는 맑은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에 비해 약간은 근엄해 보이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천정순씨는 '고양 신문'에 매주 칼럼을 싣고 TV와 월간 '전원생활'에 인생상담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일 덕분에 나이를 잊고 활기차게 생활할 수 있어서 좋다"고 대답했다. 며느리가 소개하는 시어머니의 솜씨들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직접 도자기를 구워 선물하고 박 공예로 거실을 아름답게 꾸미고 갖가지 사연이 담긴 수석을 모으고 요가를 가르치고 화장수를 만들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등… 팔방미인이 따로 없었다. 오로지 7남매 자식들을 위해 한평생을 누가 알아주든 말든 자신의 삶에 충실한 천정순씨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인생 고민의 상담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써 내려가는 고부 일기는 진행형이어서 더욱 감동적이다. /최승연 리포터 bbakbbak1999@yahoo.co.kr 2000-08-17
- "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6.15공동선언는 역사적 헌장적인 합의였다"남북당국간 합의로 오는 9월2일이면 '자신의 조국'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비전향 장기수 홍경선(76세). 그는 천안 출생이다.지난 8월24일 2000통일대축전천안·아산준비위원회가 마련한 에 참석한 홍씨는 출신 지역 후보들을 보고 감격에 찬 목소리를 쏟아놓았다."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더 많은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 데"라며 지난 세월을 아쉬워하는 홍씨는 출생 지역 오랜 후배들을 만나 무척 반가워했다.25년 5월 수신면 장산리 출생인 홍씨는 병천보통학교(1회), 천안농업고등학교(3회)를 거쳐 충남농사시험장(대전)에서 근무했었다. 해방전후로 일제를 상대로한 독립운동과정에서 4차례나 이미 옥살이를 겪기도 했다. 그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태백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고 정전 직전에 북으로 올라갔다. 정전후 북에서 김복실씨와 결혼해 3남1녀를 낳고 가정을 꾸미며 생활하다 다시 남으로 내려왔다. 남파생활을 하던 중 지난 67년 9월 17일 남한당국에 의해 체포돼 자신의 한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0.7평의 독방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33년간의 수형생활은 지난 98년 3월 13일 석방으로 마감했고 현재는 서울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날 환송식에 참석해 출생지역 후배들은 만난 홍씨는 6.15선언의 실현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6.15공동선언은 남북 정상이 자주를 기반으로 이룬 성과이다. 외세의 힘과 자본의 논리로부터 6.15선언이 당당할 수 있는 것은 통일 역량이 더욱 높아지고 민족이 각성되어야 한다."이날 환송식을 준비한 천안민주단체협의회 이용길 의장도 " 선생님들을 모시는 자리를 마련해 감격스럽다. 앞으로 천안과 아산지역을 비롯해 충남지역의 통일사업의 발판으로 삼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며 "지역에서 통일 노동자, 농민, 서민들의 각종 현안을 풀어나가는 계기와 바탕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또 전교조 충남지부 김지철지부장도 "자식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통일운동을 하러가시는 길이기도 하다"며 "북에서도 통일운동의 물코를 터주는 역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행사준비측은 이날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의 방명록과 기념 사진 등을 앨범으로 제작해 선물로 선사하기로 했다. 2000-08-25
- 박범진 전 의원의 망부가(望父歌) 박범진 전 의원은 8월 15~18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보며 남몰래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비록 상봉 현장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그 스스로가 지난 50여년간 이산의 아픔을 절감하며 살아온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부친(박정용)과 작은아버지(박진용), 막내삼촌(박민용)이 1950년 9·28 수복 직후 실종된 후 지금까지 소식이 끊겼던 것이다.박범진 전 의원은 “부친과 막내삼촌이 남로당 당원이었던 만큼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했을 거라고 막연하게 추측만 할 뿐”이라며 아련한 기억을 더듬었다. 부친 3형제에 대한 박 전 의원은 지금 감정은 ‘담담한 그리움’ 뿐이다. 50여년의 세월 속에 ‘미움’은 사그라져 버렸다. 때문에 TV로 이산가족들의 만남을 보면서 “차라리 노인으로 만나게 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자위해 본다고 했다.기자로 정치인으로, 박 전 의원은 남들보다 선택(?)된 삶을 살았지만 그 역시 긴 세월 동안 ‘월북자 가족’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야 했다.“내가 처음 출국을 해 본 게 86년 서울신문 논설위원 시절이었습니다. 그나마 서울신문이 친여 신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민정당 부대변인을 지낼 당시에도 신원조회를 하면 ‘출국불가’ 판정이 나왔다. 14대 때 민자당 대변인으로 임명되자 각 언론사 정치부장·사회부장 앞으로 ‘빨갱이 자식을 어떻게 민자당 대변인으로 앉히느냐’라는 내용의 투서가 보내졌을 정도였다.“사실 오래전부터 아버지 형제를 찾아볼 생각을 했습니다. 제3국을 통해 알게 모르게 안부도 전하고, 만나기도 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한참 고민했었지요. 그러나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포기해야 했습니다.”박범진 전 의원은 이달 중에 적십자사를 찾아 이산가족 상봉신청서를 공식적으로 접수시킬 예정라고 했다. 살아계신다면 부친이 84세, 작은 아버지가 80세, 막내 삼촌이 75세…. 50년만에 처음 만나서 무슨 말부터 건넬까. 박 전 의원은 요즘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로 마음 들떠있다. 2000-08-20
- 전교조, 해직교사 명예회복 나서 전교조 경북지부는 올해 1월 공포된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에 따라 지난 21일 전교조 활동 관련 도내 해직교사와 임용제외자 106명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는 신청서를 경상북도에 제출했다.전교조 경북지부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해직교사들의 복직만으로는 해직교사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졌다고 볼수 없다”며 “짧게는 4∼5년, 길게는 20년이라는 세월을 저당잡혀온 교사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아 해직기간동안의 경력 불인정은 물론 아직까지도 사회적으로 냉소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해직상태에서 복직되지 못하고 사망한 교사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가족의 이름으로 명예회복신청서를 신청했다”고 밝혔다.전교조 경북지부는 “앞으로 복직교사의 원상회복과 미복직 교사들의 복직조치는 물론, 민주화 운동 사건의 성격을 올바르게 규정하고 보상의 범위도 확대해 줄 것을 정부에 요청하고, 이와 관련된 해당자들의 사건접수에도 적극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2000-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