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초기' 검색결과 총 9,851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뮤지컬 - 지붕 위의 바이올린 위태롭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인생 ‘선라이즈, 선셋(Sunrise, Sunset)’의 애잔한 선율로 브로드웨이를 사로잡은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관객과 만난다. 11월 21일부터 12월 28일까지 연말을 장식할 이 작품은 뮤지컬로 보다 영화로 더 잘 알려졌다. 11개의 토니상과 3개의 아카데미상을 거머쥔 바 있는 세기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이다. 1964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으며 국내에서는 1985년부터 1998년까지 공연된 바 있다. 이번 무대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최신 리바이벌 무대로 연출, 무대, 조명 등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스탭진에 의해 그대로 재현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두 피트에 내려가지 않고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등 50여 명의 배우와 연주자가 펼쳐내는 대형 프로덕션으로 기존의 쇼 뮤지컬과는 다른 예술적 무대의 극치를 보여준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탄탄한 드라마와 친숙한 멜로디, 웅장한 합창과 파워풀한 군무, 그리고 관록의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조화를 이룬다. 1905년 러시아의 어느 유태인 마을을 배경으로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듯 위태롭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유대인 가정의 모습을 위트와 재치, 감동으로 그렸다. 러시아 혁명과 유태인에 대한 핍박, 사랑과 결혼으로 대변되는 딸들의 가치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깊은 신앙심으로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인상 깊게 다룬 작품이다. 한민자 리포터hmj647@empa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11-10
- 서울 강남시니어클럽의 ‘주례클럽’ “품격높은 주례사, 우리 손에 맡겨요” 삼성동의 서울강남시니어클럽 사무실에 멋쟁이 할아버지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월례회에 참석하기 위해 ‘주례클럽’의 회원 15명 할아버지들이 모이는 날이다. 모두가 노년임에도 외모가 출중하고 풍기는 분위기도 범상치가 않다. 매월마다 열리는 월례회에서는 클럽 운영, 주례활동 사항과 활성화 방안, 파견일정 확인, 주례홍보 등 여러 가지 사안을 논의 하고 친목 등을 다지기도 한다. 회의 때마다 회원들 모두가 참여해 출석률이 좋다. ‘주례 클럽’은 서울강남시니어클럽이 지난해 6월부터 서울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주례파견 사업 진행을 위해 지역사회 시니어들을 모집, 교육을 통해 주례인을 양성하면서 탄생했다. 현재 회원은 15명으로 전직 교육자, 공직자, 언론계 등 다양한 사회경험을 가진 시니어들이 모여 예비 신랑 신부의 주례사를 맡아 활동하고 있다. 결혼문화의 변화로 결혼식이 간소해지면서 요즘은 주례를 지인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전문업체에 문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덕목과 학식을 갖춘 시니어들이 전문 주례사로 재취업에 나서고 있다. 주례클럽의 양춘식(70세) 단장은 “간소화 되어가는 웨딩문화에 부응하며 풍부한 삶의 경험과 연륜을 가진 주례클럽 회원들이 품격과 정성이 깃든 주례사로 단 한번뿐인 결혼식을 더욱 아름답고 소중한 날로 만들어준다”고 소개했다. 회원들 대부분 정년퇴직을 하고 ‘주례인’이라는 명함으로 제2의 직업을 찾은 셈이다. 인생의 황혼에서 만난 일이기에 더욱 소중하고 보람있어 젊은이들 못지않은 직업의식으로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제2막 인생, 주례로 보람 찾아 전직이 초등학교 교장이였던 이경철(68세)회원은 “주례가 있는 전 날에는 항상 샤워를 깨끗이 하고 1시간 정도 신랑 신부를 위해 기도를 한다”고 말했다. 또 주례신청이 오면 메일로 신상을 받아보고 신랑 신부 측과 연락을 해 특별히 할 말이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고.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요행사에서 주례를 맡아 사회경험과 생각, 삶의 지표 등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기쁨이고 보람이기도 하다. 예식장에서 신랑신부 다음으로 주목을 받는 자리이다 보니 옷차림에 가장 신경을 쓴다. 아내는 계절마다 와이셔츠를 새로 장만해준다. 전직이 공군대령이었던 양춘식 단장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최고의 멋쟁이 할아버지로 통한다. 깔끔한 외모와 세련된 의상으로 늘 주위사람들의 시선을 받곤한다. 주례일을 보면서 옷도 계절에 따라 구입하고 얼굴도 열심히 가꾸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멋쟁이로 소문이 났다고 흐뭇해했다. “그렇지만 어려움도 있지요. 까다로운 집안에서는 주례인 선을 보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케이스는 대부분 신부 측이 정한 주례인을 신랑쪽 예비 시부모가 보자고 하는 사례입니다” 주례클럽 회원들은 주말과 봄, 가을이 가장 바쁘다. 돈을 받고 주례사를 맡지만 저소득 가정에는 무료로 주례활동을 하는 등 지역사회 봉사에도 적극 힘을 보탠다. 주례인 파견 절차는 서울강남시니어클럽에 주례신청 접수를 하면 담당 복지사가 주례인과 연결을 해준다. 주례클럽은 1년 단위로 연초에 회원을 모집을 한다. 홈페이지나 지역 신문을 통해서 공고되며 만 60세 이상으로 컴퓨터와 휴대폰 사용이 가능해야 한다. 회원이 되면 예절교육기관에서 주례와 관련된 예절과 전통 혼례 등의 교육을 일정 기간 받은 뒤 주례사로 활동을 한다. 회원들 모두가 주례클럽에서 활동하면서 사회에 대한 소속감과 책임감을 느끼며 제2막 인생을 더욱 활기차게 보낸다면서 이것이 바로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한민자 리포터hmj647@empa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11-10
- 이희호 여사 자서전 ‘동행’ 출간 이희호 여사 자서전 ‘동행’ 출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86) 여사가 파란만장한 삶을 정리한 자서전 ‘동행’(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을 출간했다. 자전적 수필집 ‘나의 사랑·나의 조국’(1992)과 1980년 당시 감옥에 있던 김 전 대통령에게 보낸 300여통의 편지를 묶은 서간집 ‘이희호의 내일을 위한 기도’(1998)에 이은 이 여사의 세 번째 책으로 집필을 시작한 지 4년여만에 완성했다. 1922년 9월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서 태어난 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독재정치와 유신체제, 군사정권 등 험난한 세월을 거쳐 퍼스트레이디가 되기까지 격동의 한국사를 정면으로 관통해 온 이 여사의 삶이 한국 현대사와 함께 펼쳐진다. 책은 삶의 동반자이자 정신적인 동지로 40여년을 함께 한 김 전 대통령과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온갖 고초를 겪었던 남편을 곁에서 지켜보며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한 몸 바치겠다는’ 남편의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응원하기도 하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지팡이를 짚고 무거운 걸음을 떼는 남편의 뒷모습이 결혼 생활 중 만난 가장 고독한 모습이었다고 회상한다. 네 차례 대선에 대한 소회도 털어놓았다. 1971년 95만표 차이로 패했던 첫 대선도전에 대해선 ‘전쟁에서 이기고 전투에서 진 선거,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진 선거’라고 평하며 너무나 아쉽고 억울했다고 말한다. 1987년 두 번째 대선에서 패배하고 나서는 투표 사흘 전 보라매공원에 250만명의 군중이 운집한 데 흥분한 것이 독이 되었다고 회고하며 투표 이틀 전 후보 단일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 데 대해 역사와 국민 앞에 큰 죄를 지은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1992년 세 번 째 대선에 대해서는 “이번이 마지막 도전이라고 보았으며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대선에 실패한 뒤 정계은퇴를 하겠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데 눈물이 주르륵 종이 위에 떨어졌다”고 했다. 지식인으로 여성운동에 앞장섰던 이 여사의 이야기는 또 한국 여성운동의 발전사이기도 하다. 이화고녀 졸업반 때 당시 조선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김활란 박사처럼 되자는 꿈을 갖고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후 갓 남녀공학이 됐던 서울대를 다니며 여성들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것이 이 여사가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이화고녀에서 보낸 4년으로 회고하는 대목에서는 거물정치인의 아내, 여성운동가로서가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서 이 여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던 미쓰코시 백화점에 가서 신식 물건들을 눈요기했고 사철 내내 아름다운 교정을 거니는 여학교 생활이 가장 행복했고 국내외에서 수많은 상을 받았지만 졸업식 때 받았던 ‘종교상’이 가장 자랑스럽고 소중하다고 회고한다. 역사의 현장에서 만났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평가도 눈에 띈다. 재야정치인 계훈제 선생과 한 때 부부의 연을 맺을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는 지인들 사이에선 알려진 내용이지만 공개적으로는 처음 소개되는 이야기다. 대학 졸업 무렵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학생위원장이었던 계 선생을 소개받은 이 여사는 그가 추구하는 꿈에 끌렸고 갓 해방된 조국을 뜨겁게 사랑한 청춘으로서 굳이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동지적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폐결핵에 걸렸고 당시 미국 유학과 연민의 정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유학을 결정했지만 미안함과 병든 이를 돌보지 않은 죄책감은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남편의 평생 정적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에 대한 평가는 후하다. 생전에 세 번 육 여사와 만났다는 이 여사는 육 여사에 대해 “따뜻하고 반듯한 성품을 지녔으며 남편의 독재를 많이 염려한 것으로 알려진 청와대 속의 야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독대 장면을 묘사한 부분도 흥미롭다. 1982년 남편의 석방을 요청하러 처음 만났던 전 전 대통령에 대해 “사형을 시키려 했던 ‘수괴’의 안사람을 상대로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 일상적으로 대했다”면서 “때로는 바짓자락을 올리고 다리를 긁적거리면서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독특한 분”이라고 평한다. 또 친일 논란이 일었던 김활란 박사에 대해서는 “그가 정작 친일파였다면 일본어에 서툴지 않았을 것”이라며 옹호하는 대목도 있다. 책의 부제인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는 김 전 대통령이 직접 붙인 제목이다. 이 여사는 자서전 출간을 기념해 11일 서울 63빌딩에서 김 전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연다. 연합뉴스 황희경 기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11-10
- 행안부, 여성결혼이민자 부모초청행사 개최 행정안전부는 최근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다문화가족의 사회 정착을 위해 11월 10일~16일까지 여성결혼이민자 부모초청행사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에 초청된 베트남·필리핀·태국출신 여성결혼이민자 31명은 10일 인천공항에서 결혼 후 처음으로 부모·형제와 상봉하게 된다. 초청 가족들은 12일까지 행안부가 마련한 한국 문화 체험 일정에 따라 창덕궁 청계천 청와대 63빌딩 한국 민속촌 등을 둘러본 뒤 출국 전까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결혼이민자 31명은 지역새마을지도자 31명과 자매결연을 맺어 조기 정착에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행안부는 앞으로도 외국인주민에 대한 실태조사, 외국인주민 지원조례 제정, 한국사회 적응교육 확대, 고충상담 등을 지속적으로 실시할 예정이다. 한편, 외국인주민은 올해 5월 1일 현재 89만1391명이다. 홍범택 기자 durumi@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11-10
- [오바마시대를 보는 세계의 눈]오바마, 미 흑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인종 아닌 사회계층을 기준으로 한 긍정적 차별 주장 흑·백 공동체 모두로부터 지지 얻어… 화해 도출 기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는 미국내 흑인들의 운명을 실제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인가. 또 인종적 격차를 좁힐 수 있을 것인가. 독일 유력 일간 ‘데어슈피겔’은 조지타운대 사회학 교수로 저명한 흑인 에세이스트인 한 마이클 에릭 다이슨과의 인터뷰를 통해 오바마 시대의 인종적 미래와 현 미국사회의 흑백간 격차를 조명했다. 질: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미국 흑인들의 현 삶에서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보나. 답: 먼저 그가 바꿀 수 없을 것부터 살펴보자. 오바마의 승리에는 흑인들의 기여가 컸다. 오바마는 흑인 유권자들에게 마치 당선 후 흑인들에게 더 이상 세금을 내지 않고 교도소에서 석방되는 허가증을 줄 정치적 ‘산타클로스’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사회적 불평등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질: 오바마 당선자는 흑인들의 대학교육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긍정적 차별을 비난했는데. 답: 사실 오바마는 긍정적 차별에 근본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긍정적 차별이 인종보다는 사회적 계층을 기준으로 마련되기를 원한다. 학교간의 불평등이 흑인과 백인 학교간의 차별이라기보다는 시내와 변두리 학교사이의 차별 문제임을 보여주고 어떤 인종적 요소도 없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교육기관 사이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는 또 노예제도와 관련한 어떤 배상에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최상의 배상은 모든 이들이 좋은 교육과 적절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제안은 인종적으로 중립적으로 보이면서도 결국은 특히 흑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이라는 점에서 매우 효율적이다. 질: 이번 선거 결과는 백인과 흑인들이 여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보여 줬다. 오바마가 이들 두 세계를 가까워지게 할 수 있으리라 보는가. 답: 오바마가 세계를 보는 관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흑인의 시각에서고 또 다른 하나는 백인의 시각에서다. 그는 흑인으로서 교육을 받았고 자발적으로 흑인문화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동시에 유년기와 청년기의 상당부분을 백인 조부모 아래서 성장했다. 두가지 인종적 경험을 통해 그는 흑·백 공동체 모두로 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질: 오바마는 자서전에서 자신에게는 부족의 확신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게토에서 도망칠 필요가 없었다. 단지 내면의 의혹으로 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됐다. 답: 그는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야했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흑인 공동체와 가까워지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그는 흑인 공동체 속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 그렇다면 오바마가 시카고 흑인동네에 정착해 흑인 사회의 성공 사례로 꼽히는 흑인여성과 결혼하고 흑인교회에 다닌 것도 그 때문인가. 답: 오바마는 흑인 공동체의 정서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고자 싸워야 했다. 그 결과 그는 어느 정도 흑인의 정체성을 갖게 됐지만 많은 흑인들에게 도사리고 있는 ‘분노’를 품지는 않았다. 그는 결코 노골적 인종차별주의와 맞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불우한 LA 혹은 워싱턴의 흑인 게토가 아닌 하와이와 인도네시아에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흑인 공동체 밖에서도 지지를 얻은 것도 바로 그가 흑인들이 겪는 인종차별주의의 모든 것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바마는 양쪽 세계의 좋은 점만을 갖고 있으며 그 스스로가 서로 상반된 두 세계를 화해시킬 것이란 믿음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질: 오바마는 흔히 존 F.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과 비교되는데. 이 같은 비교는 정당한지. 답: 마틴 루터 킹에 대한 내 저서에서 나 역시 오바마를 ‘흑인 케네디’라고 표현했다. 오바마는 케네디의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큰 키에 잘 생긴 외모, 유창한 말솜씨, 하버드 졸업생이란 점에서 케네디와 닮았다. 또 마틴 루터 킹에 버금가는 웅변력을 자랑한다. 그는 나라를 달굴 뛰어난 웅변력을 갖춘 설교자들이 많은 흑인 공동체 출신이다. 오바마는 웅변술에 천재적인 이들 흑인들과 경쟁할 수는 없지만 정치 연설자로는 고수임을 입증했다. 질: 당신은 미국 공동체를 두개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한쪽은 연 소득이 10만달러가 넘는 110만명 흑인으로 이뤄진 ‘아프리스토크라시’와 게토에서 사는 가난한 흑인으로 구성된 ‘게토크라시’다. 흑인 부자들은 가난한 흑인들을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흑인만큼 증오를 내면화한 그룹도 없다. 다른 사회적 어떤 사회적 그룹도 그 구성원이 같은 구성원중 가난한 이들을 그토록 멸시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배우 빌 코스비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질: 코스비는 60%의 흑인 아동들이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인종차별 탓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공부하고 일하고 절망의 문화를 거부하라’는 그의 주장이 비난 받아야 할 것이 있는가. 답: 비난 받아야 할 것은 없다. 나는 흑인들이 보다 잘 처신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코스비는 흑인 소녀들이 어린 나이에 임신하는 것에 대해, 흑인들이 자신의 할머니와 자는 것을 막으려면 곧 게토에 DNA신분증을 지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흑인들의 자기 증오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질: 미국 사회에는 큰 성공을 이룬 흑인들이 많다. 동시에 여전히 많은 흑인들이 비참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당신이 보기에 흑인 사회에서 성공과 실패 중 어느 것이 지배적인가. 답: 우리는 최상과 최악을 동시에 겪고 있다. 성공한 흑인들은 인종차별이 성공을 향한 자신들의 전진을 퇴색시키거나 저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가난한 흑인들이 걸어야 하는 길은 보다 험난하다. 교도소 수감자 중 흑인들이 월등히 많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현실이다. 흑백 불평등을 교육과 제대로 된 학교에 대한 접근과 관련해 말한다면 현실은 끔찍하다. 백인 학생이 그 같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면 미국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정리 이지혜 리포터 2main@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11-10
- 시론 약자의 눈물, 우리도 닦아주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당선소식을 전하는 신문지면은 온통 ‘변화’라는 말로 도배되었다. 공화당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간 것만 해도 큰 변화다. 하물며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으니 ‘변화’라는 어휘로는 그 의미를 전하기 부족할지 모른다. 차별과 냉대, 편견과 따돌림이란 말의 주인공이었던 흑인이 대통령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상전은 벽해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은 있을 수 없다”던 일이 일어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대명사인 흑인정책에 어떤 변화가 올지 온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21세기 대한민국의 약자와 소수자 실상은 어떠하며 그들의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짚어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차별과 냉대가 흑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그것보다 심하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런 물음에 맞닥뜨려 단호히 “그렇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의 특질 중에서도 고약한 인종차별의 첫 희생자는 중국인이고, 그 다음은 혼혈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웬만한 도시의 중심지에 자리잡았던 중국인 거리가 사라진 사실을 안다면, 그 대답은 자명해진다. 얼마 전 한 지방도시의 화교축제를 밀착중계한 TV 프로그램에 화교들의 애환이 잘 나타나 있었다. 오래 번창했던 화교학교 운동회에 모인 중국인들은 공영방송 마이크 앞에서 민족차별의 아픔을 털어놓았다. 한 아가씨는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인터넷 회원가입을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불편하다”고 말했다. 40대 중년남자는 같은 이유로 휴대폰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70대 할아버지는 “별것 아니지만, 지하철 같은 곳에서 경로우대를 받지 못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이 주민등록증이 없어 그런 차별을 당한다는 것은 나라의 수치다. 국내 정주자라면 외국인등록증 같은 증명서만으로 누려야 할 작은 혜택과 기회를 빼앗는 나라가 지구상에 몇이나 될 것인가. 무슨 낯으로 외국 정부에 한국인 정주자들의 참정권과 법적지위를 요구할 것인가. 한국전쟁이 양산한 혼혈아 문제는 지금도 가릴 수 없는 우리의 치부로 남았다. 미군병사와 한국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그들은 1980년 이전에는 누구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 했다. 어머니 친척이나 친지 자녀로 위장되었던 그들은 교육과 취업에서 당한 치명적인 차별과 냉대로 지금까지 울고 있다.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혼혈인 가수 인순이가 피를 토하는 음정으로 부르는 ‘거위의 꿈’은 그들이 겪은 모멸과 따돌림에 대한 항변이다. 새로운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은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었다. 국제결혼 당사자들과 그 자녀들은 법적으로는 차별을 받지 않지만 한국사회의 옹졸한 정서와 인습의 피해자가 되어 가정파탄에 울고 있다. 우리가 기피하는,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 3D 업종 일을 도맡아 해주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처우는 또 어떤가. 한국 남자와 외국인 여성의 결혼은 한해 3만건 정도이고 그 반대의 경우를 합치면 전체 결혼의 10% 정도가 국제결혼이라 한다. 불법체류자를 합치면 외국인 근로자는 수십만명을 헤아린다. 단지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 많은 사람들 가슴에 못을 박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인도적인 범죄에 해당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어찌 비국적자만의 문제겠는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의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무의식적인 차별을 뛰어넘지 않으면, 설혹 747 국가가 된다고 해도 ‘좋은 나라’ ‘훌륭한 나라’ 소리는 들을 수 없다. 마치 미국이 무서운 나라, 강대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좋은 나라’ ‘훌륭한 나라’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변화를 지향하는 미국 대통령의 탄생을 계기로 우리도 사회 구석구석에서 신음하는 약자와 소수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문 창 재(객원논설위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11-07
- 수능, 대학입시에 얽힌 황당한 에피소드 나의 대학입시, 즐거움도 괴로움도 이제는 그리운 ‘추억’수험생 모두 힘내세요!“부모님이 수험생에게 가장 큰 힘”누구에게나 대학 입시에 대한 한 두 가지 에피소드는 있다.답을 하나씩 미뤄 써서 시험을 망치거나, 갑자기 찍신이 내려 평소보다 훨씬 좋은 점수를 받고 꿈꾸던 대학에 입학하는 경우도 있다.그때야 괴롭고 기쁘고 인생이 완전히 결정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대학 입시에 실패해도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하지만 대학입시는 인생에서 만나는 첫 ‘큰 관문’임에는 틀림없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가장 힘이 되는 존재는 역시 ‘부모님’인 것으로 나타났다. 수험생들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부모님, 가족들이 힘이 되어 줄 때다.부산내일신문에서는 수능을 앞두고 수험생들과 가족들이 긴장을 풀고 힘내라는 의미에서 선배들이 말하는 ‘대학입시, 그날의 추억’에 대해 들어보았다.<수능시험 전> 책이 바닥에 ‘붙었다’고 말했던 그때입시가 가까워지면 고3 교실이 살벌해진다. 모두 불안하고 민감한지라 서로가 조심스럽다. 책을 떨어뜨리면 “책이 떨어졌네”가 아닌 “바닥에 붙었네”라고 표현해야 하고,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노래를 부른다든지 등 점점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는 친구들도 보인다.입시를 일주일 앞둔 야간 자습시간. 김진숙(40·연산동)씨는 그날따라 수학이 제대로 풀리지도 않고 답답하기만 했다. ‘머리가 너무 나쁜 것 같애. 평소에 더 열심히 공부할 걸…’ 별별 생각에 설움이 북받쳤다.급기야 엉엉 소리 내며 울기 시작했고 친구들도 한둘씩 훌쩍이기 시작하더니 아예 학급이 단체로 통곡하게 되었다.놀라서 달려온 선생님도 눈물을 흘렸고 옆 반 까지 번져 학교전체가 밤늦은 시간 울음소리로 가득했던 그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수능시험 당일>뒷좌석에서 갑자기 쏟아진 날벼락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던 김혜영(33·대연동)씨는 수능날 아침 두꺼운 겉옷을 챙겨 입고 몸도 마음도 든든하게 입시장으로 갔다. 1교시가 시작되고 10분쯤 지났을까? 이게 웬 날벼락인가. 김씨 뒷좌석 학생이 난데없이 토하는 바람에 김씨의 등짝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더러운 것은 참더라도 냄새 때문에 그대로 입고 시험을 치룰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겉옷을 과감하게 벗었다. 하루종일 떨며 입시 추위를 뼈아프게 실감했던 김씨. 그래도 그 정신으로 지금까지 다부지고 씩씩하게 살고 있다. 응원하러 나왔던 선생님, “아니, 누구세요?”이승윤(28·민락동)씨는 고3 시절 내내 담임 선생님을 사모했다.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도 실력을 인정받아 고3담임이 되었고, 학생들에게 누나처럼 언제나 다정했던 그녀였다.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탁월한 미모. 수능 당일 새벽,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새벽부터 나온다고 약속했던 담임 선생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먼저 학생들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하는 그녀. “아니, 누구세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새벽에 나오느라 화장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그녀는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대학에 가도 선생님을 찾아오겠노라 다짐했던 이씨지만 입학 후 바쁘다는 핑계로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고. 내게 힘을 준 어머니의 도시락 & 기도두 아이의 엄마가 된 박주영(36·중동)씨는 가끔 큰 아이의 현장학습 날 도시락을 싸다 보면 대학 입시 날이 생각난다.오전 시험을 치는데 왜 그리 속은 불편했던지. 점심 밥을 먹을까 말까 망설이다 도시락 뚜껑을 연 순간 박씨의 가슴이 뭉클했다. 명절도 아닌데 박씨가 좋아하는 콩나물 시금치나물 고사리나물 김치가 그림처럼 담겨 있었다.어머니께서 꼭두새벽에 만드신 나물들에 박씨는 밥 한 톨 남기지 않았고, 힘이 솟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해마다 시험 때만 되면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진다는 정미화(좌동·34)씨. 시험을 치던 그날, 날이 채 밝기도 전 고사장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어머니는 말없이 딸의 떨리는 손을 잡아 주셨다.창가가 자리인 정 씨는 시험 도중 우연히 내려다 본 운동장 한 구석에서 어머니 모습이 들어왔다. 시간이 꽤 흘려 어머니들이 거의 다 돌아간 시간임에도 어머니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서 기도하듯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순간 정 씨는 긴장이 풀리면서 힘이 불끈 솟았다. 어머니가 가까이 계시다는 그 든든함에 정 씨는 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 시험을 잘 쳤다.내 수능보다 더 열심히 했던 후배들의 시험날‘수능’하면 15년 전 겨울이 떠오른다는 박미정(35·용호동)씨는 대학교 1학년 겨울, 수능을 하루 앞두고 동문 동기들과 밤을 꼬박 새워가며 후배들을 위한 응원전을 준비했다.추운 밤을 꼬박 새워 모닥불에 추위를 녹여가며 목 좋은 곳을 차지하기 위한 학교 간 경쟁도 치열했다. “아침이 밝아 수험생들에게 따뜻한 커피와 녹차를 건네고 꽹과리, 북 등도 동원해 목이 터져라 학교 이름과 ‘필승, 합격’을 외쳐댔죠. 제 시험날 보다 그 날이 더 추억이 됐어요”라고 말한다.<수능 시험 후>시험결과는 나빴어도 완전연소, 후회없어요모의고사에서 언제나 전국 상위 3~4% 안에 들던 연규화(31·수영동)씨는 실제 수능에서 상위 10%를 벗어나는 말도 안 되는 성적을 거뒀다. 성적이 발표되자 담임 선생님, 심지어 교감 선생님은 재수 시키라고 집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정작 연씨는 미련이 없었다. 뜻밖에 부모님은 재수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존중해주셨고, 연씨는 결국 기대보다 못한 대학의 합격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연씨는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연씨는 현재 유능한 회계사로 잘~ 살아가고 있다.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목표와 출발이 있어요. 수능을 잘 보거나 못 봤다고 해서 인생이 엄청나게 망가지거나 실패하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성형수술로 맘껏 울지도 못했죠이미성(31·수영동)씨는 수능이 끝나고 소원이던 쌍꺼풀 수술을 받았다. 점수가 발표되던 날, 점수를 보고 울고 싶은데 수술 부위가 터질까봐 울지도 못하고 꾹꾹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바라던 학교는 아니었지만 대학에 입학하자, 그녀는 일찌감치 수술을 했던 덕에 부기 빠진 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그때 울지 않고 참았던 덕에 지금 내 눈은 몰라보게 예뻐져 있고, 결혼도 2008-11-07
- [내일시론]약자의 눈물, 우리도 닦아주자(문창재 2008.11.07) 약자의 눈물, 우리도 닦아주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당선소식을 전하는 신문지면은 온통 ‘변화’라는 말로 도배되었다. 공화당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간 것만 해도 큰 변화다. 하물며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으니 ‘변화’라는 어휘로는 그 의미를 전하기 부족할지 모른다. 차별과 냉대, 편견과 따돌림이란 말의 주인공이었던 흑인이 대통령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상전은 벽해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은 있을 수 없다”던 일이 일어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대명사인 흑인정책에 어떤 변화가 올지 온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21세기 대한민국의 약자와 소수자 실상은 어떠하며 그들의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짚어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차별과 냉대가 흑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그것보다 심하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21세기 대한민국의 소수자들이 받는 차별과 냉대 이런 물음에 맞닥뜨려 단호히 “그렇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의 특질 중에서도 고약한 인종차별의 첫 희생자는 중국인이고, 그 다음은 혼혈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웬만한 도시의 중심지에 자리잡았던 중국인 거리가 사라진 사실을 안다면, 그 대답은 자명해진다. 얼마 전 한 지방도시의 화교축제를 밀착중계한 TV 프로그램에 화교들의 애환이 잘 나타나 있었다. 오래 번창했던 화교학교 운동회에 모인 중국인들은 공영방송 마이크 앞에서 민족차별의 아픔을 털어놓았다. 한 아가씨는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인터넷 회원가입을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불편하다”고 말했다. 40대 중년남자는 같은 이유로 휴대폰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70대 할아버지는 “별것 아니지만, 지하철 같은 곳에서 경로우대를 받지 못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이 주민등록증이 없어 그런 차별을 당한다는 것은 나라의 수치다. 국내 정주자라면 외국인등록증 같은 증명서만으로 누려야 할 작은 혜택과 기회를 빼앗는 나라가 지구상에 몇이나 될 것인가. 무슨 낯으로 외국 정부에 한국인 정주자들의 참정권과 법적지위를 요구할 것인가. 한국전쟁이 양산한 혼혈아 문제는 지금도 가릴 수 없는 우리의 치부로 남았다. 미군병사와 한국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그들은 1980년 이전에는 누구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 했다. 어머니 친척이나 친지 자녀로 위장되었던 그들은 교육과 취업에서 당한 치명적인 차별과 냉대로 지금까지 울고 있다.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혼혈인 가수 인순이가 피를 토하는 음정으로 부르는 ‘거위의 꿈’은 그들이 겪은 모멸과 따돌림에 대한 항변이다. 새로운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은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었다. 국제결혼 당사자들과 그 자녀들은 법적으로는 차별을 받지 않지만 한국사회의 옹졸한 정서와 인습의 피해자가 되어 가정파탄에 울고 있다. 우리가 기피하는,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 3D 업종 일을 도맡아 해주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처우는 또 어떤가. 국적 다르다고 차별하는 건 인도적 범죄 한국 남자와 외국인 여성의 결혼은 한해 3만건 정도이고 그 반대의 경우를 합치면 전체 결혼의 10% 정도가 국제결혼이라 한다. 불법체류자를 합치면 외국인 근로자는 수십만명을 헤아린다. 단지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 많은 사람들 가슴에 못을 박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인도적인 범죄에 해당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어찌 비국적자만의 문제겠는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의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무의식적인 차별을 뛰어넘지 않으면, 설혹 747 국가가 된다고 해도 ‘좋은 나라’ ‘훌륭한 나라’ 소리는 들을 수 없다. 마치 미국이 무서운 나라, 강대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좋은 나라’ ‘훌륭한 나라’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변화를 지향하는 미국 대통령의 탄생을 계기로 우리도 사회 구석구석에서 신음하는 약자와 소수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문창재 객원논설위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11-07
- [통신원 칼럼]청첩장 받고 얼굴 찌푸려서야 봄 가을이면 청첩장이 ‘노도처럼’ 밀려와서 무척 부담스럽다는 지인이 있다. 딱히 그 분뿐 아니라 이맘 무렵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결혼식장에 얼굴 내밀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시쳇말로 청첩장은 고지서와 마찬가지라고까지 하지만 반가운 마음보다 부담감이 먼저 드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축의금 때문일 것이다. 그 분은 ‘동창회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은 자식들의 청첩장을 갖고 온 사람’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그럴 바에는 누구에게 언제 얼마를 받았고, 이 쪽에서는 얼마를 부조했는지 일일이 치부책에 적어두고 적절한 때에 서로 주고받는 것이 오히려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퇴직하고 나면 바람 빠진 풍선 취급 받을세라, 현역에 있을 때 자녀들을 혼인시키려고 서두르는 것도 축의금을 거둬들이는 것과 관련있는 일이니 어쨌거나 우리의 결혼식은 당사자보다 혼주 중심으로 치러지는 ‘집안 잔치’임에 틀림없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요즘, 호주도 바야흐로 선남선녀들의 결혼 시즌을 맞고 있다. 주변에서 누구네 아들 딸이 결혼한다는 소리가 전에없이 자주 들리지만 한국에서처럼 부담감에 짓눌려 반갑지 않은 기색부터 하는 일은 없는 듯하다. 호주의 결혼 문화는 우리와는 사뭇 달라서 철저히 당사자인 신랑-신부 중심으로 치러지기 때문이다. 결혼 준비의 전과정을 당사자들이 주관하며 하객들도 신랑-신부의 친구 위주로 구성되고 어른들은 양가 부모와 조부모 등 선별(?)된 가까운 친척 몇 명만 초대를 받는다. 본인들이 부르고 싶은 사람을 다 부른 후에 남아있는 몇 자리를 부모에게 선심쓰듯 내어드리는 상황이라 부모들은 친지들을 위한 자리를 하나라도 더 빼내느라 자녀들과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여야 할 지경이다. 이렇게 구걸하다시피 받아낸 청첩장이니만큼 대부분은 직계가족에게 돌아갈 뿐이어서, 사돈의 팔촌도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우리의 결혼식 문화에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이다. 멋모르고 혹여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축하해 줄 요량으로 불쑥 결혼식에 모습을 나타냈다가는 머쓱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호주의 결혼식은 예식 자체는 조촐하게 끝난 후 정작 분위기는 피로연에서 무르익는 탓이다. 연회에는 청첩장을 받은 사람마다 지정석이 마련되고 예식을 포함하여 4시간 가량의 잔치가 치뤄지는 분위기이니, 우리처럼 결혼식은 보는 둥 마는 둥 돈봉투나 건네고 ‘갈비탕’ 한 그릇만 비우고 오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애당초 품지 못할 밖에. 그런가하면 피로연 음식값을 치르는 과정도 재미있다. 전통적으로는 신랑측과 신부측 가운데 한쪽은 음식값을, 다른 한쪽은 음료수 비용을 댄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양쪽 집안이 반씩 부담을 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그런데 만약 예상했던 것보다 신랑신부의 친구가 많이 왔다면 초과 비용만큼은 신랑 신부가 부담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들에게 가급적이면 경제적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갸륵한 생각의 연장이라 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부모들 위주의 잔치가 아닌, 어디까지나 그 날은 자신들이 주인공임을 당당히 주장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처럼 집안이나 부모 입김이 아닌 결혼 당사자들 위주로 결혼식을 준비하다보면 하객들로부터 축의금 대신 신접살림에 필요한 혼수품을 조달받는 경우가 보다 자연스럽다. 침구류나 식기류, 가전제품 등 필요한 살림 목록을 한 매장에서 일괄 작성하여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한 가지씩을 맡기는 식이다. 그래야 선물이 중복되는 일도 없고, 이중으로 구입하는 비효율성을 미리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해서 선물 받을 수 있는 것들이 미리 정해지면 나머지 물품들은 대략 10% 정도의 할인가격을 적용받아 본인들이 장만을 하게 된다. 알뜰, 간결, 실속 위주의 이 나라 결혼 풍습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앞날의 축복을 빌어줄 ‘선별된 하객’들이 참석함으로 인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청첩장을 받아들고 얼굴부터 찌푸리는 일은 거의 없다. 신아연 호주통신원 shinayoun@naver.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11-07
- “가족사진 찍기가 어려워요” 군산소방서 조태성 소방장 “가족 중 5명이 출동대기” 전북 군산소방서 조태성(45) 소방장은 남매를 둔 가장이면서 7형제를 이끄는 맏이다. 형제 가운데 소방관이 3명이다. 최근에는 2명의 소방관 식구를 늘렸다. 동생 2명은 경찰관이다. 군산 정읍 남원 고창 서울 등 근무지에 뿔뿔히 흩어져 살고 있다. ‘제복 입는 공무원’이 그렇지만 가족 행사 날짜잡기가 보통 고역이 아니다. 특히 24시간 맞교대로 돌아가는 소방 특성상 동생들 얼굴보기가 수월치 않다. 조씨는 “가족사진은 생각도 못하고 결혼식 사진이 전부”라고 말했다. 조씨 형제가 소방관 가족이 된 사연은 이렇다. 학교에서 일하던 그는 20년 전 아버지를 잃었다. “뇌출혈이 있었습니다. 돈도 돈이었지만 어떻게해야 할지 몰랐어요. 우왕좌왕 하다가 수술한번 못해보고….” 응급대처 방법도 몰랐고, 또 그런 자신 모습이 너무 비참했었단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결심에 만 서른에 소방관이 됐다. 아버지 대신이던 조씨의 소방관 입문은 동생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셋째와 넷째 동생은 경찰관이 됐고, 다섯째와 막내가 소방관이 됐다. “아버지 대신이라는 생각에 동생들에게 정말 엄하게 대했다”며 “동생들에게 소방관이나 경찰이 되기를 은근히 강요했다”고 말했다. 가장 최근에 소방관이 된 막내동생 복용(31.남원소방서)씨는 “하사관 제대 후 다른 일을 찾고 있었는데 큰 형의 협박(?)에 넘어갔다”고 말했다. 이런 형의 영향일까. 다섯째와 여섯째는 반쪽도 소방관 가운데서 찾았다. 조씨는 “함께 모일 수 있는 시간이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가족들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살고 있다”며 “먼저 가신 아버지께서도 ‘잘했다’고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군산 이명환 기자 mhan@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8-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