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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정상회담과 통일을 여는 사람들] ③ 고 윤이상 선생 부인 이수자 여사 “남북이 함께 민족의 음악가로 키워야” … 김정일 위원장, 한국 방문 축하선물 보내기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다음달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열린다. 이번 정상회담은 북핵문제 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가운데 열리는 것이어서 남북관계의 획기적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본지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금까지 통일을 위해 남다르게 헌신했던 인물들의 삶과 근황, 이번 회담에 대한 기대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여보 만족해요?” 이수자(80·사진) 여사는 ‘2007 윤이상 페스티벌’ 개막공연이 열리는 내내 마음속으로 남편 윤이상에게 끊임없이 물었다.“선생님께서 살아서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서 후배들이 자신의 음악을 이렇게 훌륭하게 연주하는 것을 보셨다면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지난달 16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만난 이 여사는 40년만에 조국을 찾아 감격적인 공연을 하는 동안 눈물을 쏟아냈다. 이날 공연은 40년의 세월만큼이나 어렵게 성사됐다. 격정적인 연주 과정에서 첼로의 4개 현 중 마지막 줄이 끊어져 잠시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을 찾았지만 = 이 여사의 이번 조국방문은 꼬박 40년만이다. 지난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부부가 함께 독일에서 강제로 국내로 끌려와 재판을 받고 이 여사는 같은 해 집행유예로 풀려나 독일로 추방된 후 40년만에 다시 남한 땅을 밟은 것이다. 동백림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1967년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학생들이 동독을 방문한 것을 이유로 간첩죄를 적용한 사건이다. 하지만 1969년 2년 형을 살다 풀려난 후 독일에서 망명객의 생활을 한 윤이상 선생은 끝내 살아서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영정만 돌아왔다. 70~80년대 윤이상 선생은 조국의 남쪽에서 철저히 간첩으로 몰렸다. 이들을 조국에서 등지게 했던 ‘동백림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여론몰이 사건의 하나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지난해 1월 “동백림 사건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확대해석 됐다”고 밝혔다. 윤이상 선생은 해외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이 사건을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분노의 사건”이라고 말했다. 화가 이응로는 동백림 사건을 겪고 나서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미치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 윤이상 선생은 1917년 경남 산청군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난 후 4세 때 통영으로 이사해 어린시절을 보냈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음악학교를 다닌 그는 1944년 징용 중 반일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부산 통영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1950년 부산사범학교 시절 같은 학교 국어과 교사였던 이수자와 결혼했다. 이 여사는 집안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 선생과 결혼을 강행했다. 전쟁 후 서울로 올라온 윤이상은 여러 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치다 1956년 유럽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을 거쳐 독일 서베를린 음악대학을 1959년 졸업한 그는 그 해 네덜란드의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프란시스 트라비스의 지휘로 초연했다. 이때부터 그는 유럽 현대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61년 이 여사가 독일로 건너오면서 이들은 본격적인 독일생활을 시작했다. 차곡차곡 예술적 성과를 쌓아 올라가던 즈음 1967년 ‘동백림 사건’이 터졌다. 1969년 석방 이후 이들의 삶에는 예술에 민주와 민족이 더해졌다. 1972년 뮌헨올림픽 문화행사로 오페라 ‘심청’ , 81년에는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초연했다. 1988년 독일정부로부터 ‘대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사랑하는 조국에게서 상처만 받은 사람 = 이 여사는 윤이상 선생이 세상을 뜬 1995년 이후 지금까지 귀국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남편의 복권과 한국 정부의 사과를 요구해왔다. 지난 5월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불행했던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윤이상 선생 및 유가족이 큰 고초를 겪은데 대해 사과한다”고 밝히면서 이 여사의 귀국은 빠르게 추진됐다. “윤이상 선생은 한국의 음악을 세계에 알린 음악계의 거장입니다. 동양적인 감수성과 서양의 철학을 결합해 150여곡을 작곡한 예술가로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린 건 분명 조국의 자랑입니다.” “독일의 베토벤,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조국은 윤이상 선생에게 평생 아픔만을 주었습니다. 조국을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에게 조국은 상처만 줬습니다.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이 여사는 “정부가 그의 위대한 작품들을 이용해 우리민족 고유의 정기를 널리 알려야 한다”며 “그것이 조국의 아들로 불우하게 죽어간 윤이상 선생에 대한 위로일 것”이라고 말했다. ◆냉전체제 무너지는 상징 = 이 여사는 지난달 10일 귀국 후 서울에서 ‘2007 윤이상 페스티벌’에 참석하고 청와대를 방문해 노무현 대통령도 만났다. 통영과 부산 등지를 돌면서 친척과 남편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이 여사의 고국 방문은 견고한 냉전체제를 유지하던 한반도의 급격한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이 여사는 오는 4일 방문을 끝내고 북한으로 간다. 이달 22일 북한 평양에서 열리는 윤이상 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현재 이수자 여사는 독일과 평양에 집을 두고 있다. 만약 남한에 또 하나의 집을 둔다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남북한에 집을 가진 사람이 된다. 이 여사는 “북한에서도 이번 방문에 대해 많은 것들을 보고 즐겁게 지내다 오라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았다”며 “김정일 위원장도 선물을 보내줬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에 있는 ‘윤이상관현악단’이 한국에서 연주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윤이상관현악단’은 북한에서 25년 된 악단으로 윤이상 선생이 직접 지도했다. 이수자 여사는 악단에서 고문직을 제안 받았지만 남북관계를 고려해 응하지 않고 있다. 그는 윤이상 선생을 빨갱이도 간첩단 두목도 아니라고 했다. 다만 민족을 사랑하고 통일을 간절히 바랬던 민족주의자였고 훌륭한 예술작품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였다고 강조했다. “이제 윤이상 선생이 세계적인 음악가로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전 민족이 도와줘야 합니다.” 절망만을 안겨줬던 조국에 이수자 여사가 바라는 소망이다. 특별취재팀 = 백만호 윤여운 김현경 김동수 기자 정주환(75) 남북코리아미술교류협의회 회장 지난 1991년 북경에서 남북작가들이 처음으로 ‘남북코리아성화전’을 개최했다. 2001년에는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기념해 북한작가 30여명이 참가해 ‘통일미술전’을 열기도 했다. 미술교류는 사람의 접촉이 필수적이다. 서로 만나 작품에 대해 얘기하고, 예술관 등을 툭 터놓고 말하면서 상호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인배(54) 민족예술인총연합 기획실장 민예총은 1989년 황석영 대변인이 방북하면서부터 북의 예술인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이후 일본 등 제3국에서 북한 예술인과 접촉을 지속해 왔다. 하지만 1994년 북의 ‘문학예술가총동맹과 합의한 코리아통일예술축전이 김일성 주석 사망 등으로 무산됐다. 최근에 다시 우리말사전 남북공동기획, 공동미술전시회, 윤이상 평화음악제 등을 통해 지난날의 노력이 성과를 보고 있다. 김형수(47)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작가의 조국은 모국어다’란 신념을 가지고 있다. 언어가 이질화되고 있는 것은 커다란 문제다. 북측 문인들과 함께 ‘통일사전’ 편찬 작업과 공동기관지 ‘통일문학’ 발행 작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금강산에서 남과 북인이 모여 ‘6·15민족문학인협회’를 결성하기도 했다.이번 제2차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문화교류가 확고하게 자리 잡기를 바란다. 김정민(39) 윤이상 평화재단 기획팀장 2007-10-01
- 농업분야 한·미 FTA 대책 예산 두배 증가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다음달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열립니다. 이번 정상회담은 북핵문제 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가운데 열리는 것이어서 남북관계의 획기적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될 전망입니다. 본지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금까지 통일을 위해 남다르게 헌신했던 인물들의 삶과 근황, 이번 회담에 대한 기대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미국이 무엇 때문에 우리 민족을 이렇게 붙잡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벌써 몇 십 년짼데 당최 도리에 어긋나는 거지요.” “우리 문 목사님과 김일성 주석이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기로 합의했는데 여의치가 않아요.”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88·사진)는 지금까지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남쪽의 민간인 가운데 한명입니다. 그는 지난 1995년 고 김일성 주석의 1주기에 평양을 방문해 금수산 기념궁전에서 김 전 주석의 시신을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박 장로 일행을 직접 안내하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해줬다고 합니다. 김 위원장이 남측 인사에 대해 이처럼 파격적인 행보를 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만큼 김 주석과 문 목사의 특수한 관계를 배려한 것입니다. 박 장로는 그만큼 이번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2차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도 큽니다. ◆평생 하느님과 함께 한 인생 = 박 장로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요즘도 매주 교회에 나갑니다. 기자가 지난달 19일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 위치한 ‘한빛교회’를 찾았을 때 박 장로는 100여명의 교인과 함께 예배를 보고 있었습니다. 한빛교회는 박 장로의 시아버지인 고 문용린 목사가 설립하고 남편인 문 목사가 키워온 곳입니다. 박 장로는 원래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평안북도 창성군 대유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10살 때 서울로 유학을 왔습니다. 그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요코하마 신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공덕귀 여사와 만나기도 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지배할 때라서 성경을 배우고 싶은데도 조선에서는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졸라 여고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 거지.” 박 장로는 일본 유학생활을 하던 1938년 유학생 모임에서 평생의 반려자 문익환 목사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1944년 결혼했습니다. ◆고난의 역사를 함께 하다 = 박 장로는 문익환 목사의 부인이면서 동지이기도 했습니다. 문 목사가 한국 기독교계의 숙원사업인 성서번역 등 목회활동에 주력하다가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본격 가담하자 박 장로의 운명도 크게 변했습니다. 1970년대 한빛교회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의 석방환영식을 단골로 했던 장소입니다. 당시 민중 신학자들도 이곳에 자주 모여 토론을 벌였으며, 이 교회 대학생부와 청년부는 감옥을 가는 자리로 굳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유원규 한빛교회 담임목사는 “우리 한빛교회인이 민주화운동으로 받은 선고형량만 징역 200년이 넘는다”며 “이 과정에서 문 목사님과 박 장로님의 역할은 모든 이들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말했습니다. 1989년 문 목사가 방북하던 때도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박 장로였습니다. 박 장로는 당시 불법방북의 후속조치가 어떤 것임을 알았지만 문 목사의 방북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 지지했습니다. 이처럼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 과정에서 보여준 박 장로의 헌신은 그가 스스로 1995년 김 주석 1주기 행사에 참석했다가 구속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북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 = 박 장로는 지금까지 평양을 몇 차례 방문하는 등 북에 대한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에 갈 때마다 느끼지만 산에 나무가 없어 멀리서 보면 산속에서 움직이는 사람까지 보인다”며 “임진강 하구에 모래가 쌓여서 북에 홍수가 자주난다는데 아무튼 남북이 힘을 합쳐 북쪽 사람들 고생 좀 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북한이 많이 변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재작년에 평양에 갔는데 거리에 자동차도 많고 노점(가판)이 많이 생겼어요.” “남쪽 관광객들 위한 싼 액세서리 같은 것도 많고,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는 게 예전과 같지 않아요.” 그런데 요즘 아쉬운 것은 남편과 김 주석이 지난 89년 합의한 것 가운데 ‘우리말 큰 사전’을 남과 북이 공동으로 편찬하기로 한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점입니다. 박 장로는 “당시 두 분이 합의한 큰 사전 편찬사업이 남쪽에서만 부담하고 있어서 잘 진척이 안된다”며 “10년을 계획하고 한 건데 20년이 다 되도록 결실을 못 맺고 있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박 장로는 이 사업을 당시 두 사람의 합의 사항 1호라고 말했습니다. ◆“김 위원장, 목소리 크고 활달” = 박 장로가 김정일 위원장을 가까이에서 본 것은 두 번입니다. 95년 처음으로 방북했을 때 금수산 궁전에서 김 주석 시신과 관련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함께 묵상하던 것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지난 2005년 6월 10여년 만에 다시 북을 방문해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일행과 함께 김 위원장을 만났습니다. “김 위원장이 우리 일행과 함께 오찬을 하는데 내가 바로 옆에 앉았어.” “김 위원장이 말할 때면 목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아무튼 활달하고, 명랑한 그런 성격 이예요.” 박 장로는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도 어느 때보다 큽니다. 그는 “노 대통령이 요새 인기도 없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고 안타깝다”며 “그래도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서 민족의 통일을 위한 커다란 결정을 내렸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국민들도 이제 사상만 가지고 너무 따져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박 장로는 “남과 북이 전쟁을 했지만 이제는 잊어버려야 한다”며 “나도 형부랑 동생을 북에서 잃었지만 동족애로 극복하고 있다”며 국민들이 보다 큰 포용력을 발휘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는 요즘도 매주 일요일 사위와 함께 꼬박꼬박 교회에 나오지만 한결같이 남북통일을 하루빨리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문 목사가 원했던 것이고, 우리 목사님이 감옥도 무서워하지 않고 오직 통일을 위해서 일했잖아.” “집에 가면 아직도 문 목사의 채취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항상 통일을 위해 기도하면서 살지.” 특별취재팀 = 백만호 윤여운 김현경 김동수 기자 2007-09-28
- 사진기사(결혼축하 이벤트) KT “결혼·임신을 축하합니다” KT는 본인이나 자녀가 결혼을 하거나 임신, 출산했을 때 집전화에 가입하면 안(Ann)전화기를 무료로 증정하는 ‘KT집전화 웰빙가족 페스티벌’을 12월 31일까지 실시한다 사진 KT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10-01
- [남북정상회담과 통일을 여는 사람들] ① ‘통일은 됐어’ 늦봄 문익환 목사의 평생반려자 박용길 장로 문익환·김일성 ‘우리말사전 편찬합의’ 지연 … 매주 교회에 나가 통일 기원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다음달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열린다. 이번 정상회담은 북핵문제 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가운데 열리는 것이어서 남북관계의 획기적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본지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금까지 통일을 위해 남다르게 헌신했던 인물들의 삶과 근황, 이번 회담에 대한 기대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미국이 무엇 때문에 우리 민족을 이렇게 붙잡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벌써 몇 십 년짼데 당최 도리에 어긋나는 거지요.” “우리 문 목사님과 김일성 주석이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기로 합의했는데 여의치가 않아요.”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88·사진)는 지금까지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남쪽의 민간인 가운데 한명이다. 그는 지난 1995년 고 김일성 주석의 1주기에 평양을 방문해 금수산 기념궁전에서 김 전 주석의 시신을 참배하기도 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박 장로 일행을 직접 안내하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해줬다고 한다. 김 위원장이 남측 인사에 대해 이처럼 파격적인 행보를 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만큼 김 주석과 문 목사의 특수한 관계를 배려한 것이다. 박 장로는 그만큼 이번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2차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도 크다. ◆평생 하느님과 함께 한 인생 = 박 장로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요즘도 매주 교회에 나간다. 기자가 지난달 19일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 위치한 ‘한빛교회’를 찾았을 때 박 장로는 100여명의 교인과 함께 예배를 보고 있었다. 한빛교회는 박 장로의 시아버지인 고 문용린 목사가 설립하고 남편인 문 목사가 키워온 곳이다. 박 장로는 원래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평안북도 창성군 대유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10살 때 서울로 유학을 왔다. 그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요코하마 신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공덕귀 여사와 만나기도 했다. “일본사람들이 지배할 때라서 성경을 배우고 싶은데도 조선에서는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졸라 여고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 거지.” 박 장로는 일본 유학생활을 하던 1938년 유학생 모임에서 평생의 반려자 문익환 목사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1944년 결혼했다. ◆고난의 역사를 함께 하다 = 박 장로는 문익환 목사의 부인이면서 동지이기도 했다. 문 목사가 한국 기독교계의 숙원사업인 성서번역 등 목회활동에 주력하다가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본격 가담하자 박 장로의 운명도 크게 변했다. 1970년대 한빛교회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의 석방환영식을 단골로 했던 장소다. 당시 민중 신학자들도 이곳에 자주 모여 토론을 벌였으며, 이 교회 대학생부와 청년부는 감옥을 가는 자리로 굳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유원규 한빛교회 담임목사는 “우리 한빛교회인이 민주화운동으로 받은 선고형량만 징역 200년이 넘는다”며 “이 과정에서 문 목사님과 박 장로님의 역할은 모든 이들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말했다. 1989년 문 목사가 방북하던 때도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박 장로였다. 박 장로는 당시 불법방북의 후속조치가 어떤 것임을 알았지만 문 목사의 방북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 지지했다. 이처럼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 과정에서 보여준 박 장로의 헌신은 그가 스스로 1995년 김 주석 1주기 행사에 참석했다가 구속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북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 = 박 장로는 지금까지 평양을 몇 차례 방문하는 등 북에 대한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는 “북에 갈 때마다 느끼지만 산에 나무가 없어 멀리서 보면 산속에서 움직이는 사람까지 보인다”며 “임진강 하구에 모래가 쌓여서 북에 홍수가 자주난다는데 아무튼 남북이 힘을 합쳐 북쪽 사람들 고생 좀 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요즘 북한이 많이 변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재작년에 평양에 갔는데 거리에 자동차도 많고 노점(가판)이 많이 생겼어요.” “남쪽 관광객들 위한 싼 액세서리 같은 것도 많고,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는 게 예전과 같지 않아요.” 그런데 요즘 아쉬운 것은 남편과 김 주석이 지난 89년 합의한 것 가운데 ‘우리말 큰 사전’을 남과 북이 공동으로 편찬하기로 한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박 장로는 “당시 두 분이 합의한 큰 사전 편찬사업이 남쪽에서만 부담하고 있어서 잘 진척이 안된다”며 “10년을 계획하고 한 건데 20년이 다 되도록 결실을 못 맺고 있어 아쉽다”고 말했다. 박 장로는 이 사업을 당시 두 사람의 합의 사항 1호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 목소리 크고 활달” = 박 장로가 김정일 위원장을 가까이에서 본 것은 두 번이다. 95년 처음으로 방북했을 때 금수산 궁전에서 김 주석 시신과 관련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함께 묵상하던 것이 처음이다. 그리고 지난 2005년 6월 10여년 만에 다시 북을 방문해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일행과 함께 김 위원장을 만났다. “김 위원장이 우리 일행과 함께 오찬을 하는데 내가 바로 옆에 앉았어.” “김 위원장이 말할 때면 목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아무튼 활달하고, 명랑한 그런 성격 이예요.” 박 장로는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도 어느 때보다 크다. 그는 “노 대통령이 요새 인기도 없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고 안타깝다”며 “그래도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서 민족의 통일을 위한 커다란 결정을 내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들도 이제 사상만 가지고 너무 따져서는 안된다고 했다. 박 장로는 “남과 북이 전쟁을 했지만 이제는 잊어버려야 한다”며 “나도 형부랑 동생을 북에서 잃었지만 동족애로 극복하고 있다”며 국민들이 보다 큰 포용력을 발휘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요즘도 매주 일요일 사위와 함께 꼬박꼬박 교회에 나오지만 한결같이 남북통일을 하루빨리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한다. “문 목사가 원했던 것이고, 우리 목사님이 감옥도 무서워하지 않고 오직 통일을 위해서 일했잖아.” “집에 가면 아직도 문 목사의 채취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항상 통일을 위해 기도하면서 살지.” 유원호(77) 문익환 목사 방북 수행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와 친했는데 88년 말 일본에서 만나 서로 조국의 정치상황을 이야기하다가 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의 필요성을 통감했다. 정경모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에게 제의하고, 나는 남한의 문익환 목사에게 제의해서 둘의 만남을 주선하기로 했다. 나는 문 목사와 함께 조국통일을 위해서 평양을 함께 간다는 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이해동(73) 한빛교회 3대 담임목사 문익환 목사는 (통일의) 꿈만 꾼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온몸을 바친 분이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문 목사와 김일성 주석의 만남처럼 서로 진솔해야 한다. 통일과 민족문제를 정략적으로 접근하면 꼬이게 돼 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핵 문제나 동북아의 평화문제를 이야기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어떤 의제가 우선인가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유원규(56) 현 한빛교회 담임 목사 문 목사님과 허 담 대표가 합의한 ‘4·2 성명’의 내용을 보면 ‘낮은 단계의 연방제’ 같은 내용이 ‘6·15 공동선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당시에는 문 목사님의 행보를 영웅주의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 분의 통일에 대한 열망을 의심하지 않았다. 요즘 남북관계를 보면 목사님이 주장한 대로 진행되고 있지않느냐. 문 목사님은 역사를 꿰뚫어 보는 선지자적 면모가 있었다. 권오성(54) 현 KNCC 총무 1차 남북정상회담이 냉정체제를 허무는데 기여했다면 이번 2차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계기가 2007-09-27
- [기고]아이에게 ‘종자돈’을 만들어줘야 하는 이유 재테크 책을 들추다 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말이 ‘종자돈’이다. 말 그대로 ‘씨가 되는 돈’이라는 의미다. 종자돈은 부(富)라는 열매를 맺기 위한 씨앗이다. 모든 생명이 조그만 종자 하나로부터 출발하듯 종자돈을 모으는 일이야말로 돈 불리기의 출발점이며 부자의 첫 관문이다. 그래서 종자돈 준비는 빠를수록 좋다. 경제관념이 투철하기로 유명한 유대인들은 이를 일찍부터 실행에 옮기고 있다. 유대인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두개의 기념일을 가장 중요하게 챙긴다. 하나는 결혼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바르미쯔바’라고 불리는 성인식이다. 유대인의 성인식은 남자는 만 14세, 여자는 초경이 있는 즈음의 생일날에 일가친척, 친지, 친구 등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성대히 치른다. 결혼식에 버금가는 중요한 날인만큼 초대 받은 사람들은 모두 ‘축의금’을 들고 온다. 이렇게 모아진 축의금은 적게는 몇 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이 된다고 한다. 성인식이 끝나면 부모는 이 돈을 다른 곳에 쓰지 않고 ‘통장’을 만들어 아이에게 건네주고 직접 관리하게 한다. 이 돈은 훗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때 사업 자금으로 쓸 수도 있고 내 집 마련, 또는 노후를 위한 토대로 활용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도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나 조부모가 아이의 명의로 예금을 하거나 채권이나 주식을 사서 투자를 한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때쯤이면 상당한 액수로 불어나 있다. 든든한 종자돈을 손에 쥐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가 나서서 종자돈 마련 영국에서는 아예 국가가 나서서 종자돈을 마련해준다. 2002년 시작된 ‘어린이 신탁기금(CTF: Child Trust Fund)’이 바로 그것이다. CTF는 부모나 후원자가 빈곤아동 이름으로 개설한 계좌에 저축을 하면 국가가 일정한 범위 내에서 이에 상응하는 액수의 돈을 저축해 주는 제도다. 그래서 2002년 9월 이후 출생한 아이들에게는 정부가 250파운드를 무상으로 지급한다. 저 소득층 자녀에게는 추가로 250파운드가 지급된다. 물론 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 명의의 계좌에 입금하는 방식이다. 한 마디로 세계 각국이 아이들의 종자돈 마련을 위해 팔을 걷어 붙이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종자돈 마련에 별 관심이 없다. 그나마 정부가 얼마 전 영국의 CTF와 비슷한 ‘아동발달지원계좌’를 도입했지만 예산부족으로 인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아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회 전체적으로 아이들의 종자돈 마련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선 정부는 현재 일부 빈곤아동에게만 혜택이 주어지는 ‘아동발달지원계좌’의 대상을 보다 확대할 필요가 있다. 실제 영국·캐나다 등은 가정형편에 따라 지원하는 액수에 차이를 두고 있지만 모든 아동들을 대상으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가정에서도 아이의 종자돈 마련에 보다 관심을 쏟아야 한다. 종자돈 마련은 아이의 출생과 더불어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면 출생 신고를 하자마자 아이 이름으로 은행계좌와 증권계좌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부모가 주기적으로 넣어주는 돈에다 백일이나 돌잔치에 들어오는 축의금이나 금반지, 명절의 세뱃돈을 불려주면 아이의 계좌는 점점 불어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금액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투자는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다. 연 복리 10%를 가정할 때 3세부터 부모가 월 2만원이라는 돈으로 15년 동안 투자해주면 4766만원의 종자돈이 만들어지고 이 돈으로 향후 32년간 복리로 굴리면 10억이 된다. ‘10억의 꿈’이 그저 허튼 소리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종자돈 마련에 사회적 관심 필요 종자돈은 경제적 자립을 향한 달리기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종자돈을 갖고 또 그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익힌 아이는 경제적 자립의 문턱에 성큼 들어선 셈이다. 달리기로 치면 다른 아이보다 훨씬 앞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이의 종자돈은 경제적 자립을 향한 부모와 아이의 ‘이어달리기’인지 모른다. 어릴 적 운동회 날 이어달리기에서 하얀 테이프를 먼저 끊고 들어와서 환한 미소를 짓는 ‘마지막 주자’로 뛰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 아이에게 그런 짜릿한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자. 종자돈은 이제 막 인생의 출발점에 선 아이를 위한 든든한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9-27
- 20대 여성 고용률 남성 육박 1%P내로 좁혀..곧 추월 가능 (서울=연합뉴스) 주종국 기자 = 꾸준히 상승하고 있는 20대 여성의 고용률이 같은 나이대 남성 고용률에 근소한 차이로 육박하고 있다.27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00년 54.9%이던 20대 여성 고용률은 2002년 57.9%,2004년 59.2%, 2006년 59.4% 등 매년 상승하더니 올해 들어서는 1.4분기 59.3%, 2.4분기 59.7%를 기록했다. 이에 비해 20대 남성고용률은 2000년에 66.0%이던 것이 2002년 65.2%, 2004년 63.2%, 2006년 61.2% 등으로 떨어지다가 올해 들어서는 1.4분기 60.5%, 2.4분기 60.7%를 나타냈다. 이 나이대 남녀 고용률 차이는 2000년에 11.1%포인트였으나 2002년에는 7.3%포인트, 2004년 4.0%포인트, 2006년 1.8% 포인트로 현격히 줄더니 올해는 1.4분기에 1.2%포인트, 2.4분기에는 1.0%포인트까지 좁혀졌다. 올해 남녀고용률 차이를 월별로 보면 5월과 6월엔 각각 0.6%포인트에 불과했다.이 추세로 갈 경우 월별 고용률은 1~2년내에, 연간 고용률로는 수년내에 여성이 남성을 앞지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 전연령대의 고용률은 지난 2000년에 남성이 70.7%, 여성이 47.0%로 격차는 23.7%였으며 지난해의 경우 남성이 71.3%, 여성이 48.8%로 격차는 22.5%를 나타냈다. 전체 연령대의 남녀고용률 차이도 소폭 줄어드는 추세이긴 하지만 20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다. 고용률은 15세 이상 인구 가운데 취업자가 차지하는 비율로 남성의 경우 군입대나 공익근무요원 등은 아예 인구에서 빼고 계산한다. 이처럼 여성고용률이 남성을 위협할 정도로 높아진 것은 20대 젊은 여성들의 관심이 결혼보다는 취업으로 상당부분 옮겨오면서 취업을 위한 준비를 많이 하는데다 정부나 기업이 새 인력 채용시 양성평등 원칙을 지키면서 여성에 대한 문호를 넓혔기 때문이다. 최근 싱글족이 늘면서 여성의 취업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높아지고 결혼을 하는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맞벌이 선호 현상이 심해지는 것도 큰 요인으로 보인다. 통계청 관계자는 "20대 남성의 경우 군복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여성에 비해 취업준비에 걸리는 시간도 길고 사회에 나오는 시기도 늦어진다"면서 "최근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들이 취업에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어 머지않아 남녀고용률이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20대 남녀 고용률 (단위 %, %p)┌────┬──┬──┬──┬──┬──┬──┬──┬──┬──┐│20대│2000│2001│2002│2003│2004│2005│2006│2007│2007││고용률 ││││││││1.4 │2.4 ││ ││││││││││├────┼──┼──┼──┼──┼──┼──┼──┼──┼──┤│남 │66.0│64.9│65.2│63.4│63.2│62.4│61.2│60.5│60.7│├────┼──┼──┼──┼──┼──┼──┼──┼──┼──┤│여 │54.9│56.2│57.9│57.3│59.2│60.2│59.4│59.3│59.7│├────┼──┼──┼──┼──┼──┼──┼──┼──┼──┤│남녀차이│11.1│ 8.7│7.3 │6.1 │4.0 │2.2 │1.8 │1.2 │1.0 │└────┴──┴──┴──┴──┴──┴──┴──┴──┴──┘satw@yna.co.kr(끝)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9-27
- <기고> 아이의 ‘종자돈’ 재테크 책을 들추다 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말이 ‘종자돈’이다. 말 그대로 ‘씨가 되는 돈’이라는 의미다. 종자돈은 부(富)라는 열매를 맺기 위한 씨앗이다. 모든 생명이 조그만 종자 하나로부터 출발하듯 종자돈을 모으는 일이야말로 돈 불리기의 출발점이며 부자의 첫 관문이다. 그래서 종자돈 준비는 빠를수록 좋다. 경제관념이 투철하기로 유명한 유대인들은 이를 일찍부터 실행에 옮기고 있다. 유대인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두개의 기념일을 가장 중요하게 챙긴다. 하나는 결혼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바르미쯔바’라고 불리는 성인식이다. 유대인의 성인식은 남자는 만 14세, 여자는 초경이 있는 즈음의 생일날에 일가친척, 친지, 친구 등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성대히 치른다. 결혼식에 버금가는 중요한 날인만큼 초대 받은 사람들은 모두 ‘축의금’을 들고 온다. 이렇게 모아진 축의금은 적게는 몇 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이 된다고 한다. 성인식이 끝나면 부모는 이 돈을 다른 곳에 쓰지 않고 ‘통장’을 만들어 아이에게 건네주고 직접 관리하게 한다. 이 돈은 훗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때 사업 자금으로 쓸 수도 있고 내 집 마련, 또는 노후를 위한 토대로 활용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아이가 앞으로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종자돈’으로 쓰인다는 얘기다. 결국 유대인은 10대 중반부터 종자돈을 관리하고 자산운용을 경험하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기초를 다지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세계 어디에서나 부자로 사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에서도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나 조부모가 아이의 명의로 예금을 하거나 채권이나 주식을 사서 투자를 한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때쯤이면 상당한 액수로 불어나 있다. 든든한 종자돈을 손에 쥐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아예 국가가 나서서 종자돈을 마련해준다. 2002년 시작된 ‘어린이 신탁기금(CTF: Child Trust Fund)’이 바로 그것이다. CTF는 부모나 후원자가 빈곤아동 이름으로 개설한 계좌에 저축을 하면 국가가 일정한 범위 내에서 이에 상응하는 액수의 돈을 저축해 주는 제도다. 그래서 2002년 9월 이후 출생한 아이들에게는 정부가 250파운드를 무상으로 지급한다. 저 소득층 자녀에게는 추가로 250파운드가 지급된다. 물론 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 명의의 계좌에 입금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아이가 18세가 될 때까지는 돈을 찾을 수 없다. 아이가 성인이 된 뒤 대학등록금, 취업훈련비용, 주택구입시 보증금 등 자립의 발판이 될 수 있는 종자돈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한 마디로 세계 각국이 아이들의 종자돈 마련을 위해 팔을 걷어 붙이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종자돈 마련에 별 관심이 없다. 가정에서는 가뜩이나 빠듯한 살림에 아이의 종자돈 마련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나마 정부가 얼마 전 영국의 CTF와 비슷한 ‘아동발달지원계좌’를 도입했지만 예산부족으로 인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아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한 후에야 내 돈을 만져보게 된다. 돈을 어떻게 모으고 불려나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결혼을 하게 되고, 월세나 전세 보증금을 대출 받기에 급급하다. 또 어렵사리 집 한 칸을 장만하고 한숨을 돌릴만하면 어느새 교육비가 무거운 짐으로 다가온다. 결국 교육비에 번 돈을 모두 쏟아 붓다가 준비 없는 노후를 맞게 된다. 이것이 종자돈 없이 출발한 아이들이 겪을 인생의 행로(行路)라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그래서 사회 전체적으로 아이들의 종자돈 마련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선 정부는 현재 일부 빈곤아동에게만 혜택이 주어지는 ‘아동발달지원계좌’의 대상을 보다 확대할 필요가 있다. 실제 영국•캐나다 등은 가정형편에 따라 지원하는 액수에 차이를 두고 있지만 모든 아동들을 대상으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가정에서도 아이의 종자돈 마련에 보다 관심을 쏟아야 한다. 종자돈 마련은 아이의 출생과 더불어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면 출생 신고를 하자마자 아이 이름으로 은행계좌와 증권계좌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부모가 주기적으로 넣어주는 돈에다 백일이나 돌잔치에 들어오는 축의금이나 금반지, 명절의 세뱃돈을 불려주면 아이의 계좌는 점점 불어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금액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투자는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다. 연 복리 10%를 가정할 때 3세부터 부모가 월 2만원이라는 돈으로 15년 동안 투자해주면 4,766만원의 종자돈이 만들어지고 이 돈으로 향후 32년간 복리로 굴리면 10억이 된다. ‘10억의 꿈’이 그저 허튼 소리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종자돈은 경제적 자립을 향한 달리기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종자돈을 갖고 또 그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익힌 아이는 경제적 자립의 문턱에 성큼 들어선 셈이다. 달리기로 치면 다른 아이보다 훨씬 앞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이의 종자돈은 경제적 자립을 향한 부모와 아이의 ‘이어달리기’인지 모른다. 어릴 적 운동회 날 이어달리기에서 하얀 테이프를 먼저 끊고 들어와서 환한 미소를 짓는 ‘마지막 주자’로 뛰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 아이에게 그런 짜릿한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자. 종자돈은 이제 막 인생의 출발점에 선 아이를 위한 든든한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9-27
- 부산지역 ‘다문화 가정 청소년’에 맞춤 서비스 외국인 100만명 시대를 맞아 가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부산지역 다문화 청소년을 위한 맞춤 서비스가 제공된다. 국가청소년위원회 산하 무지개청소년센터(이사장 정세현)는 19일 ‘부산광역시다문화청소년종합지원협의체’와 협약식을 갖고 지역내 다문화 청소년을 위한 활동을 다각적으로 벌이기로 했다. 협의체는 부산지역 대안학교와 청소년상담센터, 복지관 등 총 19개 기관으로 구성됐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진행되거나 중복됐던 다문화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관별로 정보를 공유할 예정이다. 협의체는 또 무지개청소년센터와의 협력을 통해 다문화 가정 청소년의 가정환경, 한국어 능력, 학교생활 등을 파악하고 개인별로 꼭 필요한 서비스부터 제공할 방침이다. 무지개청소년센터 관계자는 “국제결혼 2세 등 다문화가정 청소년이 급증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교육 내용도 다양해지고 있다”며 “수요자 중심으로 실질적 서비스를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예현 기자 newslove@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9-21
- 하나금융, 결혼이민자가정 한가위 나눔행사(사진) 하나금융그룹은 지난 20일 한가위를 맞아 결혼이민자 가족을 초청해 한가위 나눔행사를 영등포종합사회복지관에서 주최했다고 밝혔다. 이 행사는 한가위 명절을 맞아 여성결혼이민자들의 소외감 및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고 지역사회에 쉽게 융화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자리였다. 이날 행사에는 결혼이민자가정 15쌍과 하나금융그룹임직원들이 참석했으며 한복입어보기, 송편만들기, 윷놀이 등의 행사가 펼쳐졌다. 한편 현재 서울시에는 결혼이민자 가정이 1만6749쌍이 있으며 이중 영등포구내에 1007명이 거주하고 있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9-21
- 하나금융, 결혼이민자가정 한가위 나눔행사 하나금융그룹은 지난 20일 한가위를 맞아 결혼이민자 가족을 초청해 한가위 나눔행사를 영등포종합사회복지관에서 주최했다고 밝혔다. 이 행사는 한가위 명절을 맞아 여성결혼이민자들의 소외감 및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고 지역사회에 쉽게 융화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자리였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9-21